윤의 1060일 ①~②
① 총선 출구조사에 격노한 윤 "그럴 리 없어, 당장 방송 막아"
1060일 재임한 윤석열 전 대통령은 2022년 11월 18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마지막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에 응했다. 총 61차례 진행한 도어스테핑은 용산 이전과 윤석열 정부의 상징이었지만 갖은 논란을 촉발하며 반년 만에 중단됐다.
대통령 윤석열이 파면됐다. 등장만큼이나 파괴적인 퇴장이다. 구세주 같은 정치인은 없다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 권력의 정점에 선 자가 오독(誤讀)·오판(誤判)하면 나라가 어디까지 흔들리는지도 확인했다.
#윤석열은 보수의 희망이었다
2021년 4월 어느 날,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을 도운 뒤 청와대 참모로 근무했던 이가 국회 서점에서 서성댔다. 당시 갓 출간된 『윤석열의 진심』이란 책 앞이었다. 그에게 물었다.
“형, 뭐해요?”
“윤 총장 관련 책을 사람들이 더 봐야지. 앞으로 슬쩍 뺐다.”
‘최순실 특검팀’ 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은 박근혜를 영어(囹圄)의 몸으로 만든 날카로운 칼이었다.
“마음이 괜찮아요? 박 전 대통령한테 안 미안해?”
“안 좋지. 미안하지. 그런데 이겨야 할 거 아냐. 암만 봐도 윤 총장 말고는 이길 수가 없어.”
대선 가도를 걷기 시작한 윤석열은 말했다. “열 가지 중 아홉 가지 생각은 달라도, 국민이 진짜 주인인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같이하는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윤석열에게 이재명은 그저 피의자였다
대통령직인수위 때, 그는 이재명의 대장동·백현동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한 국민의힘 의원 중 한 명과 독대했다.
“정말 수고했어요. 그런데 대선은 끝났어도 범죄는 범죄잖아요. 끝까지 파헤치세요.”
거야(巨野)의 대표 이재명은 그에게 그저 피의자였다. 그는 이재명과의 회담을 꺼렸다. 협상이나 타협을 몰랐던 그에게 과반 야당은 그저 ‘벽’이었다. 야권의 비토로 국정 운영이 뜻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강고해졌다.
2023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고 했다. 22대 총선 참패 직후, 취임 721일 만에 딱 한 번 이재명과 만났다. 둘은 각자 할 말만 했다. 루비콘강을 건넜다.
#그의 화(火)는 피아(彼我)를 넘나들었다
지난해 7월 18일은 가뭄에 단비 같은 날이었다. 24조원 규모인 체코의 원전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한국수력원자력이 선정됐다. 국민의힘 원내지도부와 만찬 중에 소식을 들은 그는 식탁을 “탕” 내려칠 정도로 기뻐했다. 소폭이 두어 순배 돌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이 나섰다.
“분위기도 좋은데, 그간 못했던 불편한 얘기 조금씩 하시죠.”
22대 총선에서 ‘175(민주당) 대 108(국민의힘)’로 깨진 3개월 후였다. 참석자들은 ‘이때다’ 싶었다.
“아니, 이 좋은 날 뭣 하러 그런 얘길 합니까. 쓸데없이 말이야.”
좌중은 곧장 얼어붙었다. 바른말은 ‘없던 말’이 됐다.
지난해 총선 직전, 의대 정원 문제가 뜨거웠다. ‘막 밀어붙이는 건 아닌데…’란 참모가 많았지만, 말을 못 했다. 이때, 직을 걸고 “안 된다”고 했던 이들이 당시 이관섭 비서실장과 한오섭 정무수석이다. 물류대란의 불을 껐던 이관섭과, 이태원 참사 때 발 빠른 보고로 큰 화를 막았던 한오섭은 유능한 참모였다. 그러나 이들은 “아니다”고 했다가 회의에서 배제됐고, 옷을 벗었다. 다른 참모들에겐 시그널이 됐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혔다
22대 총선날이던 4월 10일 저녁, 일부 참모가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를 몇 분 일찍 듣고 보고했다.
“그럴 리가 없어! 당장 방송 막아!”
분노에 찬 목소리가 문밖에서도 들렸다. 선거 전부터 여러 지표가 패배를 가리켰지만 안 믿었다. 대패를 부정선거 탓이라 여겼다. 극우 유튜버들의 주장을 진짜라 믿었다. 집권 초부터 그는 유튜브를 좋아했다. 참모들에게 몇몇 채널을 “꼭 보라”며 권했다. 2023년 4월 국빈 방문 중이던 미국에서도, 알링턴 국립묘지 참배가 예정됐던 날 아침에도 우파 유튜버와 1시간을 통화했다. 지난해 6월 검사 출신 소장파 김웅 전 의원이 라디오에서 눈물로 호소했다.
“꼭 대통령에게 당부드리고 싶다. 제발 유튜브 좀 그만 보시라.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
허사였다. 계엄령의 이유 중 하나가 부정선거론이었다. 기자회견은 네 번이 전부였다. 체포된 1월 15일에도 그는 찾아온 의원들에게 말했다. “레거시 미디어는 편향돼 있다. 잘 정리된 유튜브 정보를 보라.”
#김건희는 아내 그 이상이었다
임기 첫해인 2022년 가을, 기자는 이른바 ‘여사 라인’ 참모 중 한 명과 식사했다. “여사님 참 대단하셔. 대통령님이 저녁 전 관저에 가면 뭐하시는 줄 알아? 앞치마 두르고 김치찌개를 끓이셔. 계란말이도 만들고. 그러곤 여사님과 그날 일과를 놓고 한참을 얘기해. 국정 전반이 다 화두야.”
대통령실 실무급 참모들이 여사를 ‘브이 투(V2)’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브이’는 대통령을 지칭하는 약어다. 많은 이가 ‘V2’ 문제로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의 선택은 한결같았다.
#자신에게만 충성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의 상징어였다. 검사 윤석열을 대통령 윤석열로 이끌었다. 정작 본인은 맹종(盲從)을 요구했다. 이견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준석도, 한동훈과도 그랬다. 곁에는 충암고 선후배인 극소수 장관들, ‘여사 라인’ 등 일부 참모 정도만 남았다. 결과는 계엄과 파면이었다.
②“내가 있어 지금의 尹 있다고…김건희, 술자리 때마다 말해”
2023년 12월 12일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차라리 나를 탄핵하라고 해.
‘김건희 특검법’ 관련 내용을 보고했던 대통령실 수석이 당시 윤석열 대통령에게서 들었다는 얘기다. “문재인 검찰이 이미 아내를 탈탈 털었다”고 격노하는 대통령 앞에서 그 어떤 참모도 특검법에 대한 압도적 찬성 여론을 제대로 거론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건희 여사는 윤석열 정부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검찰총장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공정과 상식’은 김 여사 문턱 앞에서 번번이 무너졌다.
#윤 “일등 공신은 아내”
지난해 ‘세계자살예방의 날’(9월 10일) 김 여사는 마포대교를 깜짝 방문했다
“여사가 매번 하는 말이 있어. 고비고비마다 윤 전 대통령이 자신과 함께 결정하고 판단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야.”
윤석열 전 대통령과 종종 폭탄주를 즐겼던 전직 장관 A씨의 말이다. 사실 이는 김 여사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윤 전 대통령도 “대통령이 된 일등 공신을 한 사람만 꼽으라면 내 아내일 것”이라고 자주 말했다. 정권의 공동 창업자이자 국정 파트너, 이런 둘의 관계는 국정에 부담으로 돌아왔다.
2012년 51세 검사 윤석열은 띠동갑 연하인 전시기획자 김건희와 대검찰청 결혼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결혼에 반대하는 부친을 설득하기 위해 동창들을 동원했을 만큼 김 여사를 향한 윤 전 대통령의 마음은 컸다. 시간을 분초로 쪼개 썼던 검찰총장 시절에도 자신의 징계 문제로 몸져누운 김 여사를 보려고 점심시간에도 집에 들렀다. 요리사가 돼 제육볶음과 낙지볶음을 만든 뒤에야 대검찰청으로 복귀했다는 스토리가 유명하다.
#‘제2부속실 폐지’란 패착
2023년 11월 9일 ‘소방의 날’ 기념식에서 구조견을 쓰다듬는 김여사
김 여사는 대선 때부터 화제를 몰고 다녔다. 허위 경력 의혹에 대국민 사과를 하기도 했다. 거듭된 논란에 정무팀을 붙이자는 참모도 있었지만 윤 전 대통령은 “내 말도 안 듣는 사람이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버럭 화를 냈다. 김 여사는 점점 성역화됐다.
“영부인이라는 말 쓰지 맙시다. 무슨 영부인~.”
2021년 12월 대선후보였던 윤 전 대통령은 제2부속실 폐지를 공약했다. 법적 지위가 없는 영부인을 위한 별도 조직은 불필요하고, 김 여사는 정치를 싫어해 보좌 조직도 필요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결과적으로 패착이 됐다. 정권이 출범하자 김 여사의 지시가 윤 전 대통령의 지시와 섞여 제1부속실을 통해 내려왔다. 거부하기는 더 어려워졌고, 김 여사를 보좌하는 직원들의 힘은 점점 더 세졌다. 제2부속실 폐지가 ‘김건희 리스크’의 기폭제가 돼버렸다.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 역할만 하겠다”던 김 여사의 광폭 행보에 용산엔 ‘김건희 라인’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제2부속실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빗발쳤지만 정작 출범한 건 계엄 겨우 한 달 전이었다.
#“아내가 박절하지 못해서”
갈수록 태산이었다. 소위 명품백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대통령 부인이 어느 누구한테도 박절하기 어렵다”는 윤 전 대통령의 발언은 불에 기름을 부었다. 총선 참패를 걱정하는 참모들에게 윤 전 대통령은 “선거 져도 상관없다”고 했다.
총선 참패 뒤 여사 라인 참모들발로 ‘박영선 총리, 양정철 비서실장’설이 돌았다. 낌새도 못 챈 공식 라인은 보도 전날 윤 전 대통령과 만찬을 했던 홍준표 대구시장 측에 “시장님이 건의하신 것이냐”며 헛다리를 짚었다.
“주말이 무섭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주말 트라우마를 호소했다. 윤 전 대통령이 한남동 관저만 다녀오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군대가 말 잘 들을 줄 알았다"…尹 몰락하게 한 '계엄 착각'
지난해 12월 3일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당시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통해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유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지켜낼 것”이라고 말했다.
“망했다.”
12·3 비상계엄의 밤. 차마 믿기 어려운 계엄령 발동 소식을 접하고 친윤계 핵심 의원에게 전화를 건 또 다른 친윤계 의원은 수화기 너머 이 같은 외마디 소리를 들었다.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으로 치부되던 헌법 77조의 계엄령 선포권을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느닷없이 꺼내 들었을 때부터 이처럼 결말은 예정돼 있었다.
한국을 발칵 뒤집은 계엄령이, 2시간 30분 만에 끝났을 때부터 많은 사람이 12·3 비상계엄에 관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윤석열은 왜 계엄을 한 건가.’ 계엄 직후 관저에서 윤 전 대통령을 만난 인사들의 물음도 같았다. 윤 전 대통령의 답변 역시 매번 비슷했다. “조금만 기다려 보라.” 뭔가 더 있을 것이란 암시였다. 대통령실의 일부 참모 역시 계엄 직후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 실체를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탄핵소추안이 국회 문턱을 넘기 이틀 전인 지난해 12월 12일 오전 진행한 긴급 담화에서 윤 전 대통령은 “제가 비상계엄이라는 엄중한 결단을 내리기까지 그동안 직접 차마 밝히지 못했던 더 심각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며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부정선거 의혹은 2020년 총선 이후 아스팔트 우파에서 떠돌던, 그저 확인하지 못했던 잡음에 불과하지 않던가. 윤 전 대통령이 부정선거와 관련해 새롭게 공개한 사실도 없었다. 그렇다면 무모한 선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를 군까지 동원하게 만들었을까.
비상계엄 선포 직후인 지난해 12월 4일 자정 즈음 계엄군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으로 진입하고 있다.
계엄 이후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과 주변의 전언을 종합해 보면 윤 전 대통령은 꽤 일찍부터 계엄을 하나의 선택지로 고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에도 종종 “확 계엄 해버릴까”라는 말을 했었고, 지난해 4·10 총선에서 민주당이 대승을 거둔 뒤로는 “다 쓸어버리겠다”는 말을 술자리 등에서 서슴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의 그러한 사고의 흐름은 내란중요임무종사 등 혐의로 기소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공소장에도 드러나 있다. 공소장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총선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 안가에서 당시 김용현 경호처장, 여인형 방첩사령관 등과 식사를 하며 “비상대권을 통해 헤쳐 나가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고 말했고, 총선 4개월 뒤인 지난해 8월엔 “현재 사법 체계 하에선 (야당 정치인 등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므로 비상조치권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 전 대통령의 독불장군 스타일도 결국 그를 옭아맸다. 정치 입문 9개월 만에 대권을 쟁취한 그에게 여의도 정치는 소모적으로 여겨졌고, 당정 관계 역시 수직적으로만 운영됐다. 대통령실 참모가 그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직 용산 참모는 “윤 전 대통령은 대통령실 참모는 물론, 여당 중진 의원도 자신을 따르는 부하 정도로 여겼다”고 말했다.
합리적 참모 대신 그의 곁은 굳건히 지킨 사람은 충암고 1년 선배이자 임기 초반 경호처장으로 지근거리에 있던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었다. 친윤계 중진 의원은 “윤석열 정부 초반 2년은 여당이 한동훈을 넘지 못했고, 이후 1년은 김용현을 넘지 못했다”며 “대통령이 한동훈과 멀어지면서 김용현에 의지하게 됐다”고 했다.
계엄 직후 관저에서 윤 전 대통령을 만난 여권 인사들의 공통된 전언은 “상황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더라”였다. “군대를 안 다녀와서 그런지 계엄을 선포하면 군대가 명령에 따라 착착 움직일 줄 알았던 것 같다”는 전언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