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530일, 이광철의 기록④] 문재인 정부 '검찰과거사' 정리_첫 번째 이야기

온리하프 2025. 6. 2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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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변호사의 몰지각, 검사들의 흔들기...

검찰과거사 정리, 풍파를 겪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모습

 

 

윤석열이 마침내 파면되었다. 윤석열 시대의 정리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윤석열 폭압통치를 뒷받침한 검찰권 오남용 문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제도개혁과 과거사 청산의 두 측면에서 검찰의 악습은 철저하게 정리되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한 검찰제도개혁과 검찰과거사 정리의 성과와 한계가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과거사 정리 작업은 크게 두 가지를 뼈대로 하였다.

 

첫째, 입법이 아닌 행정명령 형식으로 진행됐다. 법무부 장관의 훈령(법무부 과거사위원회 운영 규정) 및 대검찰청 훈령(검찰 과거사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대검찰청 진상조사단 운영 규정)이 그것이다. 당시 국회 의석 분포 상황에서 입법에 의한 조사기구 설치가 요원했다. 입법적 근거가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나, 그렇다고 행정명령에 의하여 검찰과거사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위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검찰과거사에 연루된 검사들이 진상조사단 흔들기의 주요한 명분으로 입법적 근거를 시비하고, 자유한국당과 보수 언론이 이에 합세하자 "문제"가 되었다.

둘째, 2원적 체제로 설계되었다. 즉 법무부에 검찰과거사위원회를, 대검찰청에 진상조사단을 두었다. 대검에 조사기구를 두는 경우 조사의 신뢰성이나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위와 같이 2원적 체제로 설계된 가장 큰 이유는 민간인 단원들에게 수사 기록이 공개되는 것에 대한 위법성 시비 우려 때문이었다.

법무부에 진상조사단을 두는 경우 수사 기록을 검찰에서 법무부로 이관해야 하는데, 이러한 수사 기록 이관이 개인 정보 등 법적 시비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검찰총장의 감찰권 행사의 일환으로 외부 단원을 위촉하고 이들에게 수사 기록을 제공하도록 제도를 설계하였다. 이상과 같은 경위로 대검에 진상조사단을 설치하고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는 그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수사권고 등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역할을 나누었다.

 

이에 따라 대검 산하 진상조사팀을 6개로 구성하고, 각 팀별로 변호사 2인, 교수 2인, 검사 1인씩으로 하여 총 5인(나중에는 각 팀별 검사 2인으로 하여 총 6인)을 조사단원으로 구성하여 형제복지원 등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렇게 대검에 진상조사단이 설치되었으므로, 대검이 역량있는 단원들로 조사팀을 구성하고 조사단을 질서있게 운영하는 것이 검찰과거사 정리 작업의 성패를 좌우할만큼 긴요했다.

 

법무부를 통해 돌아온 대검의 뜻밖의 답변

 

문무일 검찰총장이 2019년 6월 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검찰역사관에서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지적한 검찰 과오와 관련한 대국민 입장을 밝힌 뒤 굳은 표정을 하고 있다.

 

 

당시 나는 민정수석실의 지침에 따라 법무부를 통해 대검에 두 가지를 요청했다(대검이 수사기관이라는 점 때문에 청와대가 직접 소통을 하지 않고 법무부를 통하여 간접 소통을 하였다).

첫째, 진상조사단에 유능한 조사 인력이 확보되어야 한다. 기록이 두꺼운 대형 형사사건을 수사와 재판 단계에서 수행하면서 검사와 맞서 본 경험과 이로부터 형성된 문제인식을 가진 변호사 인력의 확보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둘째, 진상조사단의 체계를 갖추고 여기에 진상조사에 의지를 갖는 합당한 분이 인선되어야 함을 주문했다. 검찰과거사는 검사들의 권한 오남용을 건드리는 일이다. 단장 등 조사단 지휘부가 외압과 외풍을 차단해 주어야 했다. 조사 과정의 보안 문제도 중요했다. 또한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적법한 범위 내에서 공보활동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조사의 내용과 과정에 대한 책임있는 지휘·감독이 필수였다. 지휘부의 검찰과거사에 대한 강력한 의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법무부를 통해 돌아온 대검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조사단에 참여할 수 있는 단원의 경우 처음에는 변호사를 단원으로 인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다가 변호사를 단원으로 인입하되, 현업에 종사하는 변호사는 안 되고 공익적 업무에 종사하는 변호사들만 단원으로 위촉하겠다고 했다.진상조사단 체계 문제의 경우 진상조사단의 독립성을 위하여 대검은 일체 관여를 안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사건 기록이라는 것이 순서대로 주욱 읽어나가면, 검사가 내린 결론이 별 문제가 없도록 느껴지게끔 만들어져 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록을 보고 검사가 어디서 수사를 왜곡하였는지를 찾아내야만 검찰과거사 작업이 성공할 수 있었다. 형사 송무를 경험해 보지 않은 변호사들이 그런 두꺼운 기록을 소화해내기는 어려웠다.

불개입을 이유로 하여 조사단 체계에 대검이 관여하지 않겠다는 회신도 이해불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사단의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는 경우 조사단원들의 조사 과정이나 내용이 들쑥날쑥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했다. 더구나 이 작업은 감찰 성격을 갖고 있는 조사 활동이 핵심이었다. 지휘 체계없는 조직이라니 황당했다. 계속 설득하는데, 벽이 느껴졌다. 그래서 법무부 관계자에게 이것이 누구의 뜻이냐고 물었다. 답이 없었다. '문무일 검찰총장의 뜻인가?'하고 물었다. 부인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실과의 소통에서 총장의 뜻과 무관한 대검의 입장이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검찰과거사 정리, 알맹이 없이 끝날 위기에 놓이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모습

 

 

당시 민정수석실은 검찰총장의 완강한 뜻을 꺾을 경우 초래될 문제점을 숙고했다. 그 조건에서 차선책을 도모하고자 했다. 또한 조사단 내에 지휘 체계가 만들어질 경우 검찰이 늘상 하는 방식으로 검찰과거사를 알맹이 없이 끝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결국 변호사 단원은 한두 명 정도를 제외하고 형사송무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조직적 체계가 없다 보니 결국 진상조사단 각 팀원들은 누구의 통제나 지휘도 받지 않았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와 이 문제로 마찰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교수, 변호사 단원들은 비상근이었으므로 대체로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 진상조사단 사무실(서울동부지검)에 나온 것으로 안다. 이에 반해 검사 단원들은 파견근무 형식으로 근무하다보니 상근으로 일했다. 그 결과 수사 기록을 보고 이를 정리하는 일은 대체로 검사단원들에게 맡겨졌고, 외부 단원들은 검사 단원이 정리한 사건 보고서를 기초로 추가적인 진상조사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사건 기록 검토 및 정리라는 기초 작업이 외부인의 문제의식 하에 걸러지지 못하고 검사들의 시각에서 정리되었다.

검사 단원이 당해 사건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으면 진상조사 작업이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내오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당시 검찰총장이 이런 결과까지를 의도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한편 역설도 있다. 검찰과거사 사건에서 김학의 사건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검사단원이었던 이규원이 지휘 체계에 따른 통제없이 의욕을 갖고 진상조사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덕에 이규원 검사는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두 건의 기소를 감당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신세가 되었다.

 

뇌물수수, 성범죄 의혹을 받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2019년 5월 9일 오전 서울 송파구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수사권고 관련 수사단에서 피의자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이런 체계 문제, 단원 구성으로 인한 문제점이 검찰과거사 작업이 진행되면서 하나 둘씩 터져 나왔다. 이 상태로 가서는 검찰과거사 정리 작업이 본래 취지에 맞는 성과를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검찰의 잘못된 수사를 별 문제없는 것으로 추인해 줄 우려마저 있었다. 나는 진상조사단 내부와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정리하여 조국 민정수석에게 보고했다. 이에 따라 마련된 대안이 총괄팀 신설이었다.

6개 팀에서 수행한 검찰과거사 진상조사 작업을 총괄팀에서나마 리뷰하여 재조사를 결정하거나 공보 등을 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다. 당시 검찰총장은 총괄팀 신설을 수용했다. 검찰과거사에서 김학의 사건이 그나마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 때 만들어진 총괄팀이 있었고, 여기에 이규원 검사 등 문제의식을 가진 단원들이 모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조직 구성 및 체계의 문제는 특정 변호사 단원의 몰지각한 행위와 검사들의 진상조사단 흔들기 등이 맞물리면서 특히 김학의 사건이라고 하는 검찰과거사 사건 중 가장 민감한 사건에 이르러 검찰과거사가 극심한 풍파를 겪는 근본 요인이 되었다. 이 점 다음 회차로 이어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