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잉카 트레일
2400m산정의 잉카왕 별궁, 스펙터클 풍광에 압도당하다
● 페루 마추픽추를 가다
페루 리마의 차베스 공항을 이륙한 지 50분. 란 항공의 LA2031편은 해발 3310m의 쿠스코 공항에 안착했다.
공중에서 본 쿠스코는 산악의 분지였다.
도시는 사방 산기슭에 다닥다닥 붙여 지은 집의 붉은 기와로 전체적으로 밝은 갈색 톤인데 스페인의 유산―지중해 건물의 붉은 기와―이다.
공항도 소박했다.
활주로엔 자동 착륙 유도장치도, 로딩브리지(탑승교)도 없고 터미널도 단층이다. 비행기도 트랩 카로 오르내린다.

15세기 중반 잉카제국의 기틀을 다진 파차쿠티 왕이 쿠스코의 추위를 피해 잠시 지내기 위해 해발 2400m 화강암반의 산정에 돌로 조성한 별궁 마추픽추.
왼쪽 산아래 우루밤바 강이 정면의 뾰족봉 와이나픽추(2660m)를 포함, 이 산정도시를 감싸안고 돌아나가는 물돌이동 지형이다.
그런데 땅을 딛고 걷기 시작한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고산증이다.
산소 부족으로 인한 어지럼증인데 공기 중 산소 함유량이 평지인 리마에 비해 30% 이상 부족한 데서 온다.
현지 인디오 가이드도 보자마자 고산증 극복 요령부터 알려준다. 물을 되도록 많이 마시고, 코카잎과 코카차도 수시로 씹고 마시란다.
버스엔 산소통도 있었는데 이동 중에 한 승객이 그 신세를 지고 말았다.
증상은 심한 어지럼증과 구토~
산소 흡입만으로 진정 효과가 있었다.
쿠스코는 역사가 깊다. 그 좁은 골목들이 그걸 말해준다.
12월 페루는 관광 비수기. 그런데도 쿠스코의 거리는 번잡했다. 차림새를 보니 대개 배낭여행자다. 단체관광객이라고는 미국과 유럽의 노인뿐이다.
어스름이 몰려오자 도심 광장이 주광색 가로등 불빛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그 모습은 영락없는 스페인의 어느 도시다.
주변을 둘러싼 대성당과 스페인풍 석조 건물 덕분이다. 멀리 고갯마루에선 팔 벌린 예수상이 하얗게 빛났고. 광장엔 산책객이 많았다.
그 사이로 수많은 정복 차림 경찰관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등에 ‘관광경찰’이라고 씌어 있는데 소매치기 등 관광객 상대 범죄 예방 근무란다.

이튿날 아침. 쿠스코에서 한두 시간 거리의 ‘성스러운 계곡(Sacred Valley)’으로 향했다. 우루밤바 강이 빚은 이 깊은 계곡엔 피사크 와일라밤바 등 원주민 인디오가 감자 옥수수 등 농사를 지으며 사는 잉카 유적 마을이 많다. 그중 계곡 초입의 오얀타이탐보 마을(해발 2792m)에서 차를 내렸다. 마추픽추행 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예약한 ‘하이럼 빙엄’은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세계적인 레일 크루즈 회사)의 블루트레인(남아공의 럭셔리 열차)급 관광열차(80석)로 1등석은 식당 칸(두 개)이다.
마추픽추까지 철길(폭 90cm 협궤)은 47km. 내내 우루밤바 강안을 따르는데 맨 뒤 전망 칸에서 보는 강안의 급류와 협곡 풍경이 기막혔다. 마추픽추가 가까워오자 강 건너 산등성으로 잉카 트레일(잉카제국을 그물처럼 연결시킨 산길)을 따라 마추픽추를 향해 걸어가는 트레커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1등석 승객은 세 가지 요리의 점심식사를 즐긴다. 전망 칸에선 밴드의 공연도 펼쳐졌다. 드디어 종착역이자 마추픽추 배후마을인 아과스칼리엔테스(해발 2040m)에 도착했다. 출발 후 한 시간 반 만이다. 해발 2400m의 마추픽추 유적까지는 지그재그의 비포장 산악도로(8km)로 올라간다. 그 버스는 역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25분 후. 버스가 유적 바로 밑 생크추어리로지(호텔)에 섰다. 유적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숨을 헐떡이며 오르다 보니 어느새 그 석조 시가가 눈에 들어왔다. 마추픽추다. 사진이나 다큐 필름을 통해 하도 봐 현장에 가더라도 별 감동이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그 스펙터클한 풍광이 나를 압도했다. 유적의 위치는 뒤편의 와이나픽추(2660m)와 내가 선 산등성의 마추픽추(3000m), 두 봉 사이. 우루밤바 강이 270도가량 감싸 안고 돌아 나가는 물돌이동 지형의 정상부다.
마추픽추는 잉카 유적 중에서도 특별하다. 요새나 도시가 아니라 잉카제국의 기틀을 다진 왕 파차쿠티 잉카 유판키(1438∼1472)를 위한 ‘별궁’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후 미라의 모습으로 이곳을 찾았던 파차쿠티를 생전과 똑같이 떠받들고 모시느라 1000여 명 시종이 수십년간 여길 떠나지 못하고 늘 지키며 살아왔다는 점도 그렇다. 그건 죽은 자도 미라로 남겨지면 영혼이 깃든다고 믿어 산 사람과 똑같이 대접하던 잉카의 생사관 때문이다. 그런 마추픽추도 1540년엔 종말을 고한다. 스페인 군대의 침공인데 그 핵심은 마추픽추 침공이 아니었다. 미라의 파괴였다. 스페인 군대가 쿠스코에 보관된 파차쿠티의 미라를 불태워 버리고 나서야 마추픽추의 시종들이 이곳을 떴다. 드디어 왕이 죽었기 때문이다.
▼유럽서 온 천연두에 인구 90% 사망… 스페인군 168명 앞에 ‘무릎’▼

해발 3350m의 고산에 건설된 고대도시 쿠스코의 해질 녘 모습. 한 인디오 젊은이가 광대복장을 하고 스페인 식민시대에 지은 대성당 앞에 서 있다. 잉카인은 이곳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16세기 지구상 가장 규모가 큰 제국을 건설했다.
‘에스 토도 포로이(Es todo por hoy).’ 이제 18km만 더 가면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페루의 해발 3350m 안데스 산악의 고대도시)인데 고개 하나를 남겨둔 쿠스코 서쪽 해발 3486m 지점(현재 지명 포로이)에서 프란시스코 피사로(1476∼1541·스페인의 잉카제국 정복자)는 따르던 군대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이란 뜻이다. 때는 1533년 11월 14일. 피사로가 엘도라도(황금의 땅)를 찾아 남미대륙에 상륙한 지 근 1년, 안데스의 원주민이 세운 강력한 잉카제국이 몰락하기 딱 하루 전이다.
사실 잉카가 무너진 건 그 1년 전이다. 내전을 진압하고 왕궁에 돌아오던 잉카 왕 아타우알파를 함정에 끌어들여 기마병과 철제무기로 무참히 도륙한 것이다. 게다가 쿠스코 왕궁의 벽을 장식했던 화려한 금과 은 장식도 모두 왕의 몸값으로 탈취해 스페인 왕실로 보냈다. 제국도 그의 손에 놀아났다. 피사로의 환심을 사 어부지리로 왕의 자리에 오른 망코 잉카(잉카는 ‘왕’을 뜻하는 경칭)가 그의 수족이 돼서다. 그래서 이튿날 잉카인이 ‘지구의 중심’으로 여겨온 쿠스코 입성은 혈투가 아닌 환영 속에 이뤄졌다. 더불어 95년이란 짧은 제국의 역사와 화려했던 문명도 순식간에 증발했다.
당시 잉카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다. 중국 명나라를 능가했고 이반 대제의 러시아, 오스만 튀르크와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아스테카 왕국도 잉카에 미치지 못할 만큼 영토가 넓었다고 ‘인디언’의 저자 찰스 만은 밝혔다. 그 영토를 보자. 남북으로는 에콰도르와 아마존 강 상류부터 칠레(위도차 32도)까지, 동서로는 태평양과 안데스 산맥까지. 태평양 연안부터 해발 4000m 안데스 고원과 6000m 빙하와 설산의 산악이 총연장 4000km에 이르는 ‘잉카 트레일(산길)’로 속속들이 연결됐다. 태평양에서 잡은 생선이 신선한 상태로 이튿날 아침 쿠스코의 왕실 테이블에 오를 정도로 제국은 잘 조직됐다. 그런 잉카가 고작 168명(기병 62명, 보병 102명과 지휘관) 스페인 군대의 단 일격에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불가사의한 의문은 이제껏 고고인류학의 핫이슈였다. 그런데 최근 그 원인이 명료하게 드러났다. 천연두와 그로 인한 제국의 분열이 이유다.
천연두가 신대륙에 상륙한 건 1518년이다. 전달자는 서인도제도를 찾은 유럽인이다. 당시 신대륙의 인구는 얼마나 됐을까. 놀라지 마시라. 1억 명 이상(추산)이 살고 있었다는 게 최근 제기된 수치다. 그런데 당시 그들에겐 천연두를 이겨낼 면역체계가 없었다. 그 최초의 피해자는 카리브해 주민이었다.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죽어 나갔다. 게다가 천연두는 신대륙 전역으로 거침없이 확산됐다. 잉카에선 더 빨랐다. 사통팔달의 ‘잉카 트레일’이 확산을 가속시킨 것이다. 잉카에선 제국의 주민 90%가 천연두로 죽었다. 왕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1524년 우아이나카팍 왕이 죽었다. 그 빈자리를 놓고 왕자 간에 내전이 발발했고 그게 제국 분열의 기폭제가 됐다. 국력이 쇠퇴 일로로 치닫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피사로가 당도한 건 그 즈음.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그와 제국의 첫 조우는 1532년 11월, 내전의 최종 승자인 아타우알파가 쿠스코로 귀환하던 도중이었다. 장소는 카하마르카라는 도시의 중앙광장. 피사로는 그 자리에서 성경을 건네며 거기에 신의 말씀이 담겼다고 전한다. 그러자 아타우알파는 그 성경을 귀에 댄다. 그런 뒤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며 그걸 내던진다. 피사로가 기대했던 행동이었다. 그는 신에 대한 모욕이라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당시 스페인 군사들은 광장을 에워싼 건물 뒤에 매복 중이었다. 대포가 발사됐고 말을 탄 기병이 잉카의 군사를 짓밟았다.
당시 신대륙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말 탄 기병을 처음 본 원주민에게 이들은 ‘반인반수의 괴물’로 비쳤다. 게다가 무기도 철기가 아니었다. 그나마도 그날은 개선 퍼레이드 중이라 5000명 병사의 무기는 모두 장식용이었다. 천둥 같은 대포 소리에 혼비백산해 흩어진 인디오 병사들은 스페인 군대가 휘두르는 칼과 창, 그리고 기병의 말발굽 아래 처참하게 죽어갔고 왕도 붙잡혔다.
피사로는 제국에 아타우알파의 몸값으로 금을 요구한다. 제국의 신하들은 쿠스코로 달려가 왕궁 외벽을 장식한 황금 판을 떼어 몽땅 스페인 군대에 넘긴다. 그럼에도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참수한다. 그러고는 스페인에 충성을 맹세한 투파우알파를 그 자리에 앉힌다. 수탈은 이런 식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1년 후. 피사로는 투파우알파에 이어 꼭두각시 왕에 앉힌 망코 잉카의 대대적인 환영 속에 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입성한다. 그게 1533년 11월 15일. 이게 100년 제국 잉카, 아니 1200년 번성해온 안데스 고원의 인디오 문명이 고작 168명 스페인 군대에 의해 연기처럼 사라진 사건의 클라이맥스다.
이후 제국의 반격은 딱 한 번, 1560년에 있었다. 쿠스코가 내려다보이는 산정의 삭사이와만(태양의 신전)에 5000명 인디오 군사가 집결한 것. 하지만 결과는 패퇴다. 잉카에 정복당해 제국에 부역 중이던 인디오들이 스페인을 도와 잉카와 싸운 탓이다. 적(敵)의 적(敵)은 우리 편, 힘으로 일어서면 힘으로 망한다는 진리는 16세기 남미 안데스 고원에서도 여전히 진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잡을 게 하나 있다. 잉카제국이란 표현은 서양의 고고학자들이 만든 조어다. 잉카는 제국의 ‘왕’을 칭하는 직위다. 정확한 국명은 ‘타완틴수유’다.

마추픽추·티티카카·바예스타섬… 한발 한발 수수께끼의 땅을 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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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가는 길
페루 여행정보
스페인어와 원주민 언어인 케추아어를 쓴다. 관광지에서는 간단한 영어로도 큰 불편함이 없이 소통할 수 있다. 화폐단위는 누에보 솔. 1솔은 우리 돈으로 440원 정도. 국내에서 페루 화폐로 환전이 불가능하니 미국 달러로 환전한 뒤 페루에서 다시 현지 화폐로 바꿔야 한다. 관광지에서는 현지 화폐와 함께 달러를 받는 곳도 많으니 물건을 사거나 택시를 탈 때 요구하는 가격이 현지 화폐 가격인지 달러 가격인지를 꼭 확인해야 한다. 치안은 그닥 안전한 편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관광지에는 관광경찰들이 많이 배치돼 있어 안심해도 된다. 페루는 지역마다 해발고도가 달라 다양한 기후가 나타나니 여러 곳을 여행할 계획이라면 계절에 관계없이 여름옷부터 겨울옷까지 다 챙겨 가야 한다.
페루 묵을 곳 · 먹을 것
페루의 리마나 쿠스코 등 주요 여행지에는 특급호텔과 리조트는 물론이고 배낭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게스트하우스부터 홈스테이 등의 저렴한 숙소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페루 관광청이 추천하는 주요 특급호텔들로는 수도 리마의 ‘컨트리클럽 리마 호텔’(www.hotelcountry.com), 와카치나 오아시스와 바예스타섬을 돌아볼 수 있는 위치의 파라카스의 ‘호텔 파라카스 럭셔리 리조트’(www.starwoodhotels.com/luxury/), 쿠스코의 ‘아란 쿠스코 부티크 호텔’(www.aranwahotels.com) 등이 있다. 주요 관광지에 들어선 이들 호텔은 도시의 주요 관광지 및 자연 경관과 가장 잘 어울리는 빼어난 외관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대표되는 이른바 ‘럭셔리 호텔’들이다.
지구 뒤편 산맥·호수·사막 완벽한 낯섦과 만나다 |
살아있는 자연 페루 |
▲ 국내에는 페루의 여행지로 마추픽추만 알려져 있지만, 그 못지않은 명소들이 곳곳에 있다. 페루 중남부 태평양 연안의 샌프란시스코 사막.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사막을 바람이 지나가면서 모래 위에 빚은 결들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런 사막에서는 사륜구동 차량을 이용한 투어와 함께 급경사의 모래사구에서 스노보드를 타는 ‘샌드보딩’을 즐길 수도 있다. |
두번째 풍경은 태평양을 끼고 있는 페루 중부 해안의 막막한 사막에서 만났습니다. 와카치나 사구와 샌프란시스코 사막이 그려내는 끝없는 모래의 곡선은 유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황량한 사막 위의 바람이 제가 지나간 길 뒤로 물결 모양의 잔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발자국이 그리는 선과 그림자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걸 거기서 처음 알았습니다. 여기다가 사륜구동 차량으로 저물어가는 사막 한복판으로 들어가 텐트를 치고 즐겼던 한 끼의 식사의 낭만을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경험으로 보탭니다.
페루 중부 해안의 작은 섬 바예스타. 이른바 ‘작은 갈라파고스’라 부르는 곳에서 목격한 ‘살아있는 자연’을 페루에서 만난 세번째 풍경으로 꼽습니다. 둥근 아치 형상의 세 개의 바위섬에는 가마우지, 펠리칸, 펭귄, 물떼새 등 바닷새들이 무려 100만 마리나 머물고 있었습니다. 해안가에는 수천 마리에 이르는 바다사자들이 번식기를 앞두고 무리를 이루고 있더군요. 배를 타고 다가서면 바다사자들이 바위에서 물로 뛰어들었고, 물러서면 섬을 뒤덮은 바닷새의 무리들이 일제히 날아올랐습니다. 작은 섬에서 자연이 있는 그대로 숨 쉬고 있는 모습은 배의 난간을 붙들고 선 이들의 가슴을 벅차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구름을 이마에 두르고 있던 안데스 산맥의 위용을 마지막 풍경으로 꼽습니다. 그렇다고 안데스의 위용과 감동이 덜하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앞선 풍경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기대하지 않았다가 의표를 찔린 것들인 데 반해 안데스의 위용과 감동은 익히 기대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잉카제국의 ‘공중도시’라는 마추픽추가 그랬고,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의 독특한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페루 여행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마추픽추는 기대가 컸지만, 거기에 당도해서 만난 풍경은 정확하게 그 기대만큼이었습니다. 잉카제국의 신전은 거대했고 그 험준한 산정에 만들어 놓은 도시는 말 그대로 ‘불가사의’, 그것이었습니다.
무릇 도전적인 여행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낯선 것들과의 충돌’입니다. 제 사는 곳의 형편과는 전혀 다른 광경을 만날 때 감동은 커지고, 사유 또한 깊어지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정반대인 남반구의 땅 페루는 낯선 풍경들로 가득한 완벽한 도전의 여행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익숙한 것들과의 충돌은 비단 풍경만은 아니었습니다.
지도 속의 추상으로만 존재했던 지구 뒤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만남은, 그것 그대로 경이였습니다. 페루의 수도 리마 외곽의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빈민촌, 평생을 갈대로 띄운 호수 위의 네댓 평짜리 섬에 사는 수상가옥, 사방의 산군(山群)들이 벽처럼 솟아 있는 안데스 고산지역의 잉카 후예들의 남루한 삶…. 이들이 지구 반대편의 우리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깨달음조차 모두 경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