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사~오봉산
백두대간이 설악산으로 남진하기 이전 슬쩍 미시령으로 빠져나와
양구의 사명산과 춘천의 오봉산을 떨구었다.
그 오봉산(五峰山)의 본디 이름은 경운산(慶雲山),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청평산이다.
언제부턴지는 분명치 않으나 다섯 봉우리가 열지어 섰다는 오봉산으로 바뀐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구송폭포(구성폭포)
춘천 청평사 영지(影池).
이 영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정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인공으로 조성된 연못이다.
오봉산(779m)이 비친다는 이 연못은 귀한 역사 유적이다.
영지에 오봉산을 담아보려 하지만 그때보다 숲이 우거져 담을 수가 없다.
청평사는 고려 때인 973년에 창건된 백암선원으로 시작해, 1068년 당시 명문세도가인 이의가 중건해 보현원이라 하였고, 1089년 그 아들 이자현이 문수원으로 중창했다.
청평사가 된 것은 1550년, 보우선사가 이자현의 호인 청평거사에서 이름을 따오면서부터다.
특이한 것은~
이 천년고찰은 젊은 연인들이 많이 찾는 산사 혹은 방문객의 평균 연령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절이라고 한다.
이유는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수려한 풍광 때문일 수도 있고, 소양강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오는 낭만적인 접근성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아마도 청평사에 얽힌 상사뱀에 관한 사랑의 전설 때문이리라.
청평사 회전문을 처음 본 이들은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에 의아할 수도 있다.
문이 달린 것도 아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장치도 없이 그저 뻥 뚫린 통로 같은 모습이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청평사 회전문은 回轉門이 아니라 廻轉門으로, 회전(廻轉)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줄임말이다.
중생들에게 윤회의 전생을 깨우치게 하려는 마음의 문이라는 의미.
불교에서는 생명이 6가지 세계를 계속 윤회한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따라 다음 세계가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의 현생을 잘 살아야 한다는 소리 없는 가르침이다.
사찰에는 보통 3개의 문이 있는데, 절 입구에 일주문, 중간에 사천왕문 그리고 맨 뒷면에 해탈문이 있다.
청평사 회전문은 사천왕문에 해당하고, 회전문 앞쪽에 곧게 뻗은 잣나무 두 그루가 일주문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잣나무는 수령이 다 되어 지금은 안타갑게도 볼 수가 없다.
소양호 위의 소양봉(698.7m)과 후봉(579m)을 당겨 봅니다.
멀리 대룡산(899m)과 그 좌측 옆으로 뾰족히 구절산(750m)이 자그맣게 보입니다
청평사와 소양호가 한 눈에~~
암으로 이루어진 오봉의 암봉들~~
청평사와 주차장에서 올라오다 만나는 삼거리. 주차료 2000원과 청평사 관람료2000을 받습니다
오봉산(753m) 정상부~~
백치고개 건너에 보이는 부용산(882m)
어제 당직 관계로 컨디션이 너무 않 좋아 오봉정상은 다음으로 패스하고 해탈문쪽으로 하산한다
해탈문 방향의 하산길은 급경사지로 비가 많이 올 때, 눈이 쌓인 겨울에는 피하는 게 좋다
진락공 세수터~
이자현 : 李資玄, 1061년(문종 15)∼1125년(인종 3).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 학자, 문인.
본관은 인주(仁州)이고 자는 진정(眞靖)이며 호는 식암(息庵)·청평거사(淸平居士)·희이자(希夷子)이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인예왕후, 인경현비, 인절현비의 조카이다. 강원도 청평산의 문수원(文殊院)을 중건하였다
문하시중 이자연의 손자이고 이의(李顗)의 맏아들이다. 이자겸, 이자덕, 이자의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1089년(선종 6)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여어 벼슬을 거쳐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강원도 춘천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세웠던 사찰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이라 이름을 고치고 중건하였으며 여기에 당(堂)과 암자를 지어 생활하며 이곳에서 베옷과 나물 밥 등으로 생활하며 학문 연구와 선(禪)을 즐겼다.
문벌과 배경이 있었으나 관직 욕심이 없었다.
뒤에 예종이 사람을 시켜 다향(茶香)과 금백(金帛)을 보내어 여러번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117년(예종 12) 예종이 남경(南京)에 행차하였을 때 잠시 왕을 만나기는 하였으나 곧 다시 문수원에 들어가 평생을 수도생활로 일관하였다. 사후 진락(眞樂)의 시호가 내려졌다.
적멸보궁 터.
건물을 빼면 사람 몇이 겨우 설 수 있는 정도의 좁은 바위인데, 왼쪽 암벽에 청평식암(淸平息庵)이 쓰여 있다.
고려 때 여생을 이곳에서 보낸 이자현이 새긴 것으로, 적멸보궁은 그가 머물던 암자 ‘식암’의 터다.
식암은 두 무릎을 겨우 세우고 앉을 정도의 작은 방, 이자현은 이곳에서 누비옷을 입고 푸성귀 음식을 먹으며 참선을 했다고 한다.
당시 나라를 들썩이던 명문세도가의 자제인 이자현이, 이 깊은 산골로 들어온 이유가 궁금했다.
사찰 뒤쪽에 위치한다는 해탈문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청평사를 많이 가본 사람이라도 경내만 돌아봤다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해탈문은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는데~
불이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모두 그 근원은 하나라는 뜻이다.
이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다고 하여 해탈문이다.
이자현(1061~1125)은 고려 8대 현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열 명의 왕과 혼인관계를 맺어, 당대 최대의 문벌귀족인 인천 李씨 출신이다. 당시 정치 상황을 살펴보면 인천 李씨로 태어난 이상, 어떤 식으로든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자현이 부귀를 구하고 벼슬을 취하기는 마치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집는 것처럼 쉬웠다(이황의 퇴계선생문집 제1권)’고 했을 정도. 하지만 역대 임금들을 쥐락펴락 하며 왕권까지 노렸던 사촌형제 이자겸이나 이자의와 달리, 그는 권력에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불교계는 왕실을 배경으로 종파 싸움이 한창이던 때였기에, 사회적으로나 불교적으로 다툼에서 벗어나 조용히 수행을 하려했던 것이리라. 고려 선종 6년(1089) 이곳으로 온 이자현은 보현원을 수리해 문수원이라 부르고, 산자락을 정원으로 꾸몄다.
구송폭포에서 오봉산 정상 부근인 식암까지 3㎞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리는 우리 정원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그 중심은 영지(影池)다.
그런데 평범해 보이는 이 연못에 과학이 숨어 있다. 연못의 북쪽 면이 남쪽 면보다 길지만, 정면에서 보면 정사각형으로 보인다. 이자현이 연못이 정방형으로 보이도록 원근법을 이용한 것이다. 연못에 비치는 오봉산의 자태가 휘어지지 않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 그런데 연못 안에는 3개의 돌이 있다. 청평사가 선(禪) 도량으로 쓰여서인지 가만 보면 마음 심(心)자로 보인다는데, 마음을 씻고 닦으라는 의미는 아닐까. 이자현은 37년의 여생을 이곳에서 수행과 후진 양성에만 몰두했다.
청평사에는 여느 사찰과 다른 특이한 것들이 많다.
사천왕이 없고, 회전문 천장에는 향교나 서원에 있는 홍살문이 있으며, 회전문을 들어서면 긴 회랑이 이어져 있다.
또한 경내에 탑이 없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돌을 깔아 놓았으며, 수로 역할을 한 5개의 맨홀이 있고, 대웅전 소맷돌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모두 궁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청평사가 고려시대 왕들의 사랑과 국가적 관심을 받아 한때 221칸이나 되는 대가람이었으며, 조선시대에도 문정왕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중창해 왕실의 원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남북한 통틀어 차별화 된 독특한 인문·자연경관을 지닌 청평사~
아름다운 자연풍광 속에 깊은 의미와 가치를 지닌 문화 유적을 내려오며 이자현과 예종의 일화가 떠올랐다.
"예종이 이자현에게 수신양성(修身養性)의 방법을 묻자,
이자현은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이 최고라며 과욕에 주의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한다."
늘 집은 조금 더 컸으면 좋겠고,
월급은 조금 더 많았으면 좋겠고,
차도 조금 더 좋았으면 좋겠다며 아쉬워하는 갑남을녀의 세상살이.
청평사에서 일상의 고단함도 씻고, 과욕은 내려놓으며, 참 나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신선한 산내음에 고달픈 육체와 정신을 씻어버리기 종은 나들이 하기에 딱 맞는 계절이다.
선동교라?
신선이 있는 골짜기를 말하는가 보다.
이 다리를 건넘으로써 진락공 이자현의 탐욕 없는 정신으로 환생이 가능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