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죽음의 진상
장준하는 감옥에서 나온 후 건강을 위하여 자주 등산길에 올랐다. 이 때 주로 수행하는 동행자는 백기완과 이철우였으며 필자도 간혹 끼었다. 협심증이 있는 장준하는 항상 비상약을 갖고 다녔으며 옆에 수행하는 동지에게 비상약이 어느 주머니에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 주기도 했다.
그는 태백산에 올라 조선 땅의 주맥을 짚으며 문수봉 가는 길의 호젓한 숲의 터널을 즐겼다. 산 정상에 오르면 맨 먼저 북쪽을 향하여 통일을 염원하는 묵념을 올리고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중국 대륙에서 조국 광복 운동을 하던 때를 회상했음인지 광복 군가를 부르기도 했다. 때로는 젊은 동지의 선창에 따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읊조리는 적도 있었다.
그런데 마(魔)의 1975년 8월 17일 마지막 가는 무더위가 발악을 한 날이었다. 매주 동행하던 이철우로부터 하루 전날 필자에게 연락이 왔다. "8월 17일(일요일)은 영상 36도까지 올라가는 폭서라고 해서 장 선생과 상의했더니 하루 쉬자고 합니다." 이 날 우리는 장 선생을 모시고 가던 등산을 포기하고 친구 몇이서 수락산 숲 속 개울에 발을 담그고 하루 종일 낮잠을 즐기다가 내려왔다.
그런데 쉬자고 했던 장준하는 혼자서 산에 갔던 것이다. 아니 혼자서가 아니었다. 그와 동행한 친지는 백기완도, 이철우도, 전대열도 아니었고 김희로(시인, 현재 평화신문 부산지사 근무)와 김용환(현장 목격자) 그리고 김용덕(당시 호림 산악회장)이었다. 이 날 등산은 안내 등산 전문 산악회인 호림 산악회 측에서 알선했으며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장준하와 잘 아는 처지였다. 다만 현장 목격자 김용환만은 장준하가 9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을 때 홀연히 나타나 자원 봉사를 시작한 인물로 친밀도의 뿌리가 약했고 선거 당시 함께 했던 지구당 간부들의 증언에 의하더라도 그 정체가 다소 의심가는 점이 많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거에 패한 후 김용환은 어디로 갔는지 헤어져 버렸는데 공교롭게도 몇 해 만에 이 날의 등산에 동행했고 더구나 장준하의 최후를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 되어 세인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등산을 권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앞서 말했지만 이 날 등산은 장준하의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매주 함께 가던 동지들과 쉬기로 약속했던 분이 어째서 혼자서 산에 가게 되었는가? 이 날 사고가 없었더라면 이 문제는 아무런 얘깃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날 산행에서 장준하는 희생되었고 그 내면을 파헤치려면 근본 원인을 따져야만 하는 것이다. 등산을 가자고 권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장준하의 부인 김희숙의 증언을 들어보자. "토요일 저녁에 호림산악회에서 전화가 걸려 왔어요. 김용덕 회장이 전화한 것인데 내일 등산을 함께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장 선생은 날씨도 덥고 약속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거절했습니다. 그 전화 내용에 여기 김용환이가 오랜만에 와 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 등산 권유가 거절되자 일요일 아침 7시경에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이 전화는 김용덕과 김용환이 함께 걸었고 역시 거절되었다. 그런데 30분 후 세 번째 전화가 왔다. 이 날의 전화는 후일 생각해 보면 악마의 부름이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큰 소리로, 때로는 달콤한 소리로, 또 때로는 애교 어린 교성으로 유혹하는 악마의 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세 번째 전화 역시 김용환으로부터였고 관광버스 좌석까지 마련해 놨으니 꼭 나와 달라는 반강제적 권유였다.
장준하는 원래 남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는 성격이 아니다. 공적인 일에는 엄격했지만 사적인 일에는 인정이 넘치고 어떤 면에서 단정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이 날 등산은 잘 아는 동지들의 권유를 두 번씩이나 거절했음에도 세 번째까지 강요하는 권유를 마지못해 응낙한데서 비극은 잉태된 것이다. 세 번째 권유를 받은 장준하는 그때서야 행선지를 물었고 높지 아니한 포천군 이동면 약사계곡이라는 말에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부인으로 하여금 보온병에 커피를 담고 샌드위치 2인분을 준비시켜 배낭에 넣고 나섰다. 지금의 동대문 운동장 앞에서 버스를 탄 장준하는 여러 사람을 둘러보다가 "이철우 씨는 안 나왔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철우는 지금도 그 날 "내가 따라갔어야만 그런 사고(?)가 없었을 텐데..." 하면서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백기완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도 그 날 동행하지 못했음을 크게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 날 등산 권유는 호림 산악회 회장 김용덕이 한 것이지만 김희로와 김용환 세 사람이 북창동에 있던 호림산악회 사무실에서 토요일 밤부터 끈질기게 권유한 것이 틀림없으며 김용덕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고 있다. 등산 권유가 장준하의 죽음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본인들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지만 거절하는 사람을 세 번씩이나 불러냈다는 사실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그 음모의 의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게 한다. 장준하의 죽음 이후 경찰과 검찰에서 사인 조사를 할 때 조사의 기초가 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파고들었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다.
엇갈리는 증언
그 날 등산이 과연 마지못해 간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장준하를 제거하려는 어떤 음모가 있었다면 싫다는 장준하를 억지로 끌어내어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시키려 했을 것이고, 부인 김희숙의 증언에 따르면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장준하를 존경하는 동지들이 그를 모시고 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거절하는 분에게 세 번씩이나 권유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 상식적인 예의로 보더라도 어른이 한 번 거절하면 두 번, 세 번씩 재삼 권유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가족들의 증언대로 장준하는 그들의 악착같은 권유에 못 이겨 따라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겨레신문 윤재걸 기자가 1988년 11월 6일자 일요신문에 기고한 <추적 장준하 의문의 죽음>을 보면 가족들이나 이철우의 증언과는 전혀 다른 증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장 목격자인 김용환이가 장준하의 약사봉 등산 계획을 알게 된 것은 8월 15일(광복절)로 호림산악회 회장 김용덕에게 전화가 걸려 와 알려준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김용덕은 김용환의 전화를 받기에 앞서 장준하로부터 약사봉 계곡에 등반하겠다는 동행 의사를 전달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증인들의 증언이 이처럼 엇갈릴 때 이 문제는 여기서부터 풀어 나가는 것이 순서이다. 그런데 경찰은 이에 대해서 전혀 알은 체도 않고 있는 것이다.
거의 매주 함께 다니던 이철우나 백기완에게 약사봉 계곡 등산을 감춰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검시의사의 소견과 의문점
사람이 아프게 되면 약국에서 약을 사먹거나 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죽게 되면 반드시 의사의 사망 진단서가 첨부되어야만 매장 또는 화장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인명을 중시하는 현대에 와서 이 제도는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특히 자살이나 변사의 경우 검사의 입회 하에 공의의 부검 또는 사체 검안을 해야 한다.
장준하 역시 의사의 검시를 받았다. 앞에 인용한 윤재걸 기자의 기사는 부검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검시를 착각한 것으로 보이며 검시 의사는 의정부시에서 심외과를 개업하고 있는 심구복이었다. 그의 검시 결과 장준하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오른쪽 귀 뒤쪽에 있는 급소가 예리한 흉기에 찔린 듯한 후두부 함몰에 기인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검시 소견에 따르면 장준하는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추락사라는데 기이하게도 전신에 골절상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심구복 의사가 장준하의 시신을 검안한 것은 사고지가 의정부 검찰지청 관할이었기 때문에 검찰의 요청을 받아서였으며 다음날인 8월 18일 새벽 가족들의 요청으로 시신은 상봉동 자택으로 옮겨졌다. 영상 30도를 훨씬 웃도는 무더위였기에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필자는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해태 측에 부탁하여 잘 녹지 않는 드라이아이스를 대량 매입 시신의 앞뒤를 쌓았고 이로써 5일장을 치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함석헌, 김준엽, 문익환 형제, 계훈제, 백기완 등의 주장으로 시신에 대한 정밀 검안이 실시되었다. 이는 검찰 등 수사 기관의 개입 없이 유가족의 요청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세 사람의 의사가 이에 참가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조광현 내과 의사다. 그는 장준하의 친구로 주치의라고 할 수 있으며 감옥에서 나왔을 때에도 이 병원에 입원하여 주거제한이 되기도 했던 인연이 있다. 또 한 사람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전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근무했던 의사로서 이런 변사 사건을 다뤄 본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고 또 다른 한 분은 상봉동에 개업하고 있는 동네 의사를 모셔왔다.
엄격히 출입이 통제된 가운데 실시된 이 날의 검시에서 심외과의 검사 소견과 대동소이한 얘기가 나왔으나 한 가지 새로운 것은 양팔 겨드랑이 쪽에 피멍이 발견된 사실이다. 이는 결코 추락하면서 생길 수 있는 흔적이 아니며 두 사람이 양팔을 꽉 끼고 강제로 끌고 갈 때나 생길 수 있는 상처로 판단되었다. 또 한 가지는 허리 부분에 주삿바늘 자국이 있었다는 점이다. 사고 전날이나 그 이전에 허리에 주사를 맞은 일이 없다는 가족들의 증언이 있고 보면 이 자국도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15미터의 추락(?)에도 불구하고 골절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얼굴에도 스친 자국 하나 없는 모습으로 전신에 아무 데도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의사들의 소견이 아무리 양보해도 추락사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으니 긴급조치 9호가 시퍼렇게 날뛰고 있는 시점에서 함부로 발표하기도 두려웠다.
동아일보에서 의문제기
이때 동아일보가 들고 나섰다. 사건 이틀 뒤인 8월 19일자 동아일보는 사건 현장을 원거리에서 찍은 사진을 곁들여 <장준하씨 사인에 의문점>이라는 큰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그 보도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경찰에서 실족사고로 처리한 장준하 씨 사인에 의문점이 있어 현지 검찰이 장씨의 사인을 다시 조사하고 있다. 18일 서울지검 의정부 지청 서돈양 검사는 현장을 돌아보고 포천경찰서에서 조사 보고해 온 장씨의 사인에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 함께 등산 갔다가 사고 현장을 혼자서 목격했다는 김용환씨(41세, 중학강사,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38)를 불러 자세한 경위를 듣고 19일 김씨를 다시 소환했다. 검찰이 장씨의 사인에 의문이 있다고 보는 점은 추락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도, 높이 12미터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씨 혼자 아무런 장비 없이 내려오려 한 점, 사고현장인 벼랑 위에 오를 때는 멀리 등산코스를 돌아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등산코스도 아닌 벼랑으로 내려오려 한 점, 사고 직후 김씨가 장씨의 시계를 차고 있던 점 등이다. 검찰은 특히 김씨가 장씨의 시계를 차고 있었던 점에 대해 "사고 후 신고나 인명구조가 더 바쁜 시간에 장씨의 시계는 왜 풀어서 찼느냐?" 고 김씨를 추궁, 김씨는 "자신이 장씨의 곁을 떠난 사이 다른 등산가들이 장씨의 시계를 훔쳐갈까 봐 그랬다." 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김씨가 1965년부터 3년 동안 신민당 서울 제4지구당 총무로 있었는데 사고 당일 우연히 등산길 버스 안에서 장씨와 만났다고 진술한 점과 김씨가 사고 직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군부대에 신고한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있다...
이 보도가 나가자 국민들의 여론은 '장준하 씨가 암살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고 박정권의 속성으로 미뤄 보아 틀림없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더구나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 태도가 어딘지 미심쩍은 바 있었으며 무언지 진실을 감추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던 터에 동아일보의 이 기사는 불섶에 기름을 끼얹은 듯한 효과를 냈다.
그러나 검찰에서는 서울지검 김태현 차장검사까지 동원하여 '등산 중 실족사' 한 것으로 못을 박고 나섰다. 그리고 이 기사를 보도한 성락오 기자를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구속시켰다. 그런데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성락오가 아니라 의정부 주제기자였던 '장봉진'이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성락오 기자는 편집부 기자로서 그 기사의 제목과 지면배치 등 편집을 했던 것으로 그 기사 내용은 잘 알지 못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런데 당시 발효 중이었던 긴급조치 9호는 인간이 행할 수 이는 모든 행동거지에 대해서 모두 고리를 걸었다.
기자 구속 후 곧 석방시킨 이유는?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고 또 이를 듣거나 보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도 죄가 성립되도록 완전무결하게 엮어진 법(?)이 긴급조치라는 괴물이었다. 긴급조치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마지막 발악으로 발동된 것이며 그 첫 번째 대상이 장준하였던 것은 새삼 되뇌일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는 죽으면서까지 그의 죽음과 관련된 기사 때문에 신문기자가 구속되었으니 인연이 있기는 단단히 있었던 모양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기사를 쓴 장본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편집기자만 구속했다는 사실이다. 편집기자가 구속될 사유라면 그 기사의 진원지인 취재기자는 당연히 구속되어야 했을 것이며 이것이 거꾸로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해 마지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스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자행되었다. 당사자인 동아일보에서도 꿀먹은 벙어리였고 다른 언론사에서는 구속 사실 자체도 보도하지 않았다. 약 보름이 지난 후 성락오는 기적처럼 석방되었다. 소위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것이다. 긴급조치로 구속되었던 사람을 기소유예로 풀어 준다는 것은 박정권의 속성으로 보아 기적같은 일이었고 과문일지 몰라도 긴급조치 발동 이후 처음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조용히 잠들었다. 어느 신문에서도 장준하의 이름 석자는 사라졌고 아무도 입벌려 이 금기의 벽을 깨려 하지 않았다.
그 후 민주통일당보에서만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장준하 특집을 발간하는 등 힘을 다 했으나 당기관지로서는 한계가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취재기자는 구속이 안되고 편집기자만이 구속되었다가 그나마 정당한 재판을 받지 않고 기소유예로 석방시켜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여기에 무슨 함정이 있는게 아닐까? 물론 당국으로서는 신문기자를 구속하여 재판에 회부한다는 것은 부담이 가는 일일 것이다. 무소불위의 정보부로서는 언론기관은 '조정'의 대상이었고 더구나 동아일보는 139명의 기자들을 강제 해고시키고 아직도 후유증조차 제대로 수습이 안 되었을 때였다. 그런 시점에서 기자의 구속이 가져올 연쇄파동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들이 기소유예 처분을 해야 했을까?
아니다. 나는 강한 부정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뭔지 모를 암수가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편집기자가 기소되어 공개재판에 넘어가면 당연히 취재기자의 공동정범 문제가 제기될 것이며 그가 취재했던 기사의 소스가 밝혀져야 하며 나아가서는 현장답사, 이것이 싫었을 것이다. 싫다기보다 그것은 저들이 감추고자 하는 어떤 원천에 도달하는 길이며 그렇게 되어서는 만사휴의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한 번 잡아 가둔 사람을 쉽게 풀어줄 리가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당사자들의 해명이 있어야 할 때가 되었다.
현장답사에 목격자 안 나와
장준하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다. 사회장으로 해야 한다, 광복군장으로 해야 한다, 사상계장으로 하자, 민주통일당장으로 하자는 등 장례의 격식으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으나 결국 가족장으로 낙착되었다. 가족장은 곧 동지장이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는 8월 21일 아침 파주군 광탄면 나사렛 천주교 묘지로 향하는 장례 행렬은 그가 남긴 재산과는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인파를 불러냈다. 그가 갇혀 있던 서울 구치소 앞을 지나면서 운구 행렬은 잠시 멈춰 묵념에 잠기기도 했다.
이철우 동지는 현장 목격자인 김용환을 만나 장례를 마친 3일 후 일요일 아침 8시 마장동 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대동다방에서 만나 현장을 안내하라고 부탁했으며 쾌히 승낙을 받았다. 또 당일 산행을 주선했던 호림 산악회 회장 김용덕도 참가를 약속했고 막역한 몇 사람이 동행하기로 했다. 나는 현장답사의 기록과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서 각 언론사에 연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날 정각에 다방에 집합한 사람은 18명이었다. 대구에 있는 이원수(종섭)가 등산 차림으로 참석했고, 이준형, 김삼웅 등 동지들과 뜻밖에도 홍콩에서 발행되는 「파 이스트 이코노믹 리뷰」誌의 로이 판이라는 외신기자와 동아일보 사회부의 송석형 기자가 동행했다. 송석형은 기독교 방송에서 근무하다가 동아일보로 옮긴 낯선 기자였으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용기를 낸 일이었다.
이철우와 나는 완전한 등산 장비에 30미터 자일까지 준비했다. 그런데 정작 안내해야 할 김용환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나 확실하게 약속한 일이기에 '설마 안 나오지는 않겠지' 하면서 두 시간을 기다렸으나 그는 끝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할 수 없이 김용덕의 안내를 받아 약사봉 계곡에 당도했다. 이 계곡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 사람의 내왕이 적은 곳이었고 큰길에서도 2킬로 남짓 깊숙이 들어가야만 현장에 이른다. 일행은 김용덕이가 그 날 등산회원들을 안내하여 점심을 지었던 곳까지 왔으며 이곳에서부터 장준하가 혼자 떨어져 산에 올라갔다는 설명을 들었다. 우리들도 그 자리에서 점심을 마친 다음 장준하가 올라갔던 그 길을 따라서 산행에 들어갔다.
이 길은 김용환 혼자서만 따라갔던 길이라 그가 없는 마당에 꼭 이 길로 올라갔는냐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김용덕의 증언과 산으로 오르는 길은 이 길 뿐이어서 틀림없는 듯 했다.
현장으로 가는 길은 없었다
외길을 따라 오르면서 목격자 김용환의 진술대로 중간 어느 지점에서 커피를 마셨는지 살펴봤으나 알 수 없었다. 이 커피를 마셨다는 대목은 그냥 흘려 버리기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 있다.
김용환의 말에 의하면 어느 만큼 산에 올라왔을 때 길 옆에 텐트를 친 두 사람의 군인이 있었다는 것이었으며 장준하는 평소의 습성대로 그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 다음 그 옆에 앉아 커피병을 꺼냈다는 것이다. 장준하는 7대 국회의원 당시 국방분과위원을 했고 광복군 출신인지라 군인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평생 박정희와 싸운 것은 그가 만군에서 '황도(皇道)에 가장 충실한 군인'으로 뽑혀 일본 육사를 나온 민족반역자라는 것과 그 뒤 5·16 쿠데타를 일으킨 정치군인이라는 데 있었다. 이런 한 줌 밖에 안 되는 정치군인을 제외하고는 국방의 간성인 군인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애정과 사랑을 따뜻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존재들이라는 것이 장준하의 생각이었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국정감사를 나갔을 때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이 먹는 국물을 직접 떠 마셨던 일은 지금도 얘깃거리고 남아있다.
아무튼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군인들에게 커피를 나눠줬고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다. 그런 다음 다시 산행에 들어갔는데 문제는 왜 그 장소에 군인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지난해(1988년) 우리는 국군정보사령부라는 특수부대의 군인들에 의해서 군사문화를 비판한 중앙경제신문오홍근 사회부장이 아침 출근길에 테러를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또 1980년대에도 공수부대 특공대에게 광주가 쑥밭이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부정적인 측면이 우리의 뇌리를 스치면서 백기완의 말대로 '장준하는 특수부대원에 의한 타살' 이라는 가설이 성립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얘기로는 그 날 인근 군부대에서 무슨 훈련을 실시했기 때문에 군인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우리 일행은 군인들과의 대화 장소를 찾지 못하고 좀 더 올라가 '추락사의 현장'을 찾아 내려갔다. 오솔길이지만 쉬운 길이 나 있는데 하필 길도 아닌 곳으로 왜 내려갔을까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길이었다. 일행 중에는 필자를 포함하여 이철우, 김용덕 등 등산에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 있어 산의 형태로 봐서 '현장'으로 가려면 이 길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길을 택했다. 장준하가 그 현장에서 떨어진 게 틀림없다면 이 길 말고는 다른 길을 찾아 내려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고 남은 한 사람인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이가 안 왔으니 꼭 이 길로 내려갔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절벽길 따라 현장 도착
여러 차례 말하지만 현장으로 가는 길을 아예 없었고 70도의 같은 곳을 개척하며 내려갔다. 한 번 굴러 떨어지면 저 산밑에서 '말없이' 만나야 되는 무시무시한 하산길이다. 18명의 일행이라 행여 새로운 사고가 있을까 고함을 질러가며 조심을 시켰다. 맨 앞은 가장 날쌘 이철우가 맡고 후미는 김용덕이가 봤다. 그러나 워낙 위험한 길이라 누가 누구를 봐줄 처지가 못 되었다. 죽기 싫으면 나무고 바위고 움켜쥐고 벌벌 떨면서 한 발 한 발 기어 내려가야만 되는 것이다. 가파른 절벽이라 큰 나무들이 자라지 못해 여름인데도 시야가 트여 좀 나은 편이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데다가 흙투성이가 되었다. 죽은 사람의 현장을 찾아가다 또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무척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가신 선생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더듬어 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길은 두 번 다시 올 길이 못된다. 우리 일행 모두의 마음에는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과 진상을 알아야겠다는 결심으로 무서움과 고통을 이겨내며 가까스로 내려갔다. 현장 도착에는 꽤 시간이 흘렀다. 김용덕이가 시신이 누워 있던 현장임을 확인했다. 그는 목격자 김용환이가 헐레벌떡 뛰어 내려와 "장준하 선생이 떨어져 돌아가셨다." 는 말을 듣고 번개처럼 달려와 '현장의 시신'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현장에 도착하긴 했지만 아직 시신이 누워 있던 곳에 이른게 아니라 장준하 선생이 실족했다는 소나무 옆까지 온 것이었다. 좌우를 살펴보니 어렵긴 해도 내려갈 수 있을 듯했다. 검사가 현장검증을 하면서 장준하가 소나무를 붙들고 건너편으로 건너가려다가 실족했는데 소나무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질 치는 통에 소나무가 아래쪽으로 기울어졌다고 소견을 발표했는데 이 소나무는 사람이 잡고 늘어져서 기운 게 아니고 절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원래 기울어져 있었다. 따라서 검사의 이 발표는 현장검증을 안 했거나 검증을 했어도 목격자의 진술만을 곧이곧대로 믿고 현장확인을 안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윤재걸 기자의 르포에 "검찰과 경찰에서 김용환을 대동 현장검증 및 확인을 한 일이 없다." 고 밝힌 것으로 보아 필자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본다.
자일 타고 내려간 16m 70cm
우리는 소나무로부터 추락현장까지 실측 조사에 들어갔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장준하가 잡고 매달리느라고 휘어졌다는 소나무는 직경 10cm 이상 되는 튼튼한 나무였기 때문에 70kg의 필자가 아무리 매달려 흔들어도 끄떡없었다. 나는 이 나무에 자일을 걸고 록 클라이밍 훈련할 때 익혔던 솜씨로 현수하강의 방법을 써서 천천히 내려왔다. 절벽의 각도는 70도로 자일을 타는 데는 별다른 위험이 없었고 아래에는 암벽을 타고 계곡처럼 물이 흘러내려 작은 폭포가 되어 있었다. 여름철이어서 오래된 이끼가 많이 끼어 있었으나 사람이 추락하면서 부딪치거나 스친 자국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장준하가 분명히 이곳에서 떨어졌다면 한번쯤 중간에 걸렸을 것이며 육중한 인체에 가중력이 붙어 스치기만 해도 이끼나 잡초는 뭉개져 버렸을 게 아닌가. 더구나 시신의 처음 위치는 절벽 바로 밑이었다고 했지 않은가.
나는 이 절벽을 타고 내려오며 먼저 가신 선생이 참말 이 곳에서 떨어진 것이라면 큰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 높이 때문이었다. 자일을 회수하여 소나무 밑동에서 절벽 밑까지 줄자로 재어보니 16미터 70센치였다. 요새 많이 짓는 아파트 5층 이상의 높이가 아닌가? 더구나 시신의 위치가 절벽 바로 밑이었다는 목격자 진술대로라면 그 자리는 어른 머리통만한 뾰족뾰족한 견치석들이 깔려 있어 깨져도 보통 깨질 자리가 아니었다. 또 16미터나 추락한 사람이 어떻게 잠자는 듯 반듯이 누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등산인들은 언제나 추락의 위험을 안고 산에 다닌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조심해서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인다. 그래서 절벽에서 추락했을 때 어떤 정도의 부상을 입거나 치명상을 당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올림픽 경기장에서 100미터를 뛰는 단거리 육상선수는 마라톤을 달리는 장거리 선수에 비해서 월등하게 체중이 무겁다. 지난번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가 약물복용으로 망신을 당했던 벤 존슨의 엄청난 근육과 파워를 모두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80kg이 넘는 육중한 체구로 전속력으로 달릴 때 그 체중에서 나오는 가속도가 붙기 때문에 남을 앞지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체중이 무겁다고 다 잘 달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와 똑같은 이치로 무거운 물체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그 물체는 떨어져 내려오면서 가중력이 생긴다. 가중력은 10미터를 떨어졌을 때 약 10배의 무게로 계산되며 이 가중력을 감안하여 등산 자일을 보통 1천 2백kg ∼ 1천 5백kg을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장준하의 몸무게가 80kg이었다고 치면 그가 16m를 추락했을 때의 몸무게는 약 1천kg이 넘었을 것이고 이 무게로 바위에 부딪치면 그 결과는 어찌 되겠는가?
외상과 골절이 없는 추락사라니
우리들은 근처에 있는 통나무를 들어 위에서 던져 보았다. 통나무는 쓰러진 지 오래 된 고목이었지만 절벽 아래 부딪치는 순간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머리통 만한 바윗돌을 굴렸더니 절벽 중간에 한 번 튕기더니 저 멀리 떨어졌다. 몇 차례를 반복해도 결과는 비슷했으며 이로써 장준하가 추락했다면 절벽 바로 밑에 누워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물론 돌덩이와 인체는 다르다. 그러나 떨어지는 모든 물체는 멀리 튕겨지게 되어 있고 절벽 바로 밑에 떨어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 자리에 누워서 숨져 있었을까? 잠자는 사람처럼 반듯이 누워서 떨어졌다는 말인가? 그의 시신을 염한 사람도, 그의 시신을 검안한 의사들도 도저히 추락사한 사람으로 믿을 수 없다는 이 불가사의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외상이나 골절이 생겨도 크게 생겨야 할 상황인데 전연 말짱하다는 것은 '세상일이란 그런 기적 같은 일도 있는 법'이라는 말로는 납득이 안 된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은 없는 것이라고 강변하려는 맘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장준하가 누구인가? 권력에 맞싸우는 신념과 용기의 화신이다. 부귀영화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소신대로 산 분이다. 하필이면 그가 산에서 떨어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검시 결과 그의 양팔 겨드랑이 쪽에 피멍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의사들 말로도 이 멍은 사반(死斑)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저항하는 그를, 또는 이미 죽은 그를 양쪽 겨드랑이에 팔을 끼어 부축하다가 절벽 밑에 뉘어 놨을 수는 없는 것일까?
꼬리를 무는 의문이 뭉게구름 일 듯 하는데 국회에서 조만후 의원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경기도경에서 재수사를 시작했는데 결론은 추락사로 다시 한번 단정지어졌다.
그런데 한가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추락 현장에 달려와서 사진을 찍은 사람이 새로 나타난 것이다. 그 사람은 카메라로 장준하의 시신을 촬영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약사봉 근처 마을에 사는 임 아무개씨라고 하는데 그의 증언에도 시신의 형체가 높은 곳에서 추락한 사람으로 믿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증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고 이번에 재수사 과정에서 나타난 것은 사건 당시 검찰과 경찰의 수사가 얼마나 무성의했던가를 웅변으로 증명하는 바다.
암살의 의문은 더욱 짙다
그의 사인은 검시 의사의 소견으로 오른쪽 귀 뒤 급소가 예리한 흉기에 찔린 듯한 함몰된 상처가 치사를 가져온 듯 싶다는 것이었다. 이 경우 예리한 흉기가 아니라 추락하면서 뾰족한 바위나 나무에 찾기도 어려운 귀 뒷부분이 부딪쳐서 생긴 상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데는 아무 탈이 없는데 하필 급소만 다쳐야 한단 말인가.
이번 재수사에서 현장 목격자인 김용환이 충남 당진에서 중학교 교편을 잡고 있다고 하는데 그의 진술은 13년 전과 똑같았다고 발표했다. 그는 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역사적인 사건의 목격자로서 과연 양심에 어긋나지 않은 증언을 한 것일까? 그가 떳떳했다면 왜 현장답사의 안내를 약속하고서도 나타나지 않았는가? 급한 볼 일이 생겼었다면 그 뒤 연락이라도 한번 해야 되지 않았을까? 미국으로 이민 갔다, 브라질로 이민 가서 죽었다더라, 하는 무성한 유언비어를 그는 못 듣고 살아왔는가? 13년이라는 세월을 눈감고 귀 막고, 입막고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암살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짙어만 가는데 미륵보살처럼 입을 꽉 다문 김용환은 가슴을 활짝 열고 자진해서 양심 선언을 할 용의는 없는가? 경찰서에서의 진술이 아니라 요새 유행하는 공개청문회라도 열어 이러한 의문점을 파헤쳐야 되지 않겠는가?
개성 송악산을 바라보며 나사렛 묘지에 잠들어 있는 선생의 영혼이 정녕 이 민족의 자주통일과 조국의 민주화를 염원하고 있고 우리가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고 하면, 이제 그의 죽음의 이유를 밝히는데 더욱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하겠다. 이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며 우리들의 운동 차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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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은 언젠가 박정희를 만난 자리에서
“일제가 그냥 계속 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면박 준 일도 있다고...
장준하선생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해 중국 충칭(重慶) 시안에서 광복군 장교로서
1945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국 정보기관(OSS) 특수훈련을 받던 때의 장준하(오른쪽)
가운데가 그의 평생 동지였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가운데),
왼쪽은 무선 암호에 능했던 노능서 선생
백범과 함께 1946년 겨울 서울 우이동 화계사를 찾은 백범 김구 선생(앞줄 중절모 쓴 이)과
장준하 선생 (백범 선생 오른쪽 뒤로 둘째줄 안경 쓴 이) 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유신헌법을 개헌해야 한다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 1호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돼 재판정에 선 장준하 선생
추모공원으로 이장하려다 발견된 망치타살흔적추정.
최초로 공개된 장준하 선생의 유골 사진.
망치로 맞은 것처럼 오른쪽 귀 뒤쪽 두개골이 지름 6㎝ 크기 원형으로,
깊이 1㎝가량 함몰돼 있다
[CBC뉴스]
고 장준하 선생의 함몰된 두개골이 공개되며 타살 의혹이 일고 있는 가운데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마치 킬링필드를 증언하는 유해”라고 밝혔다.
진 교수는 17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공개된 장준하선생의 두개골이 충격적” 이라며 “동그랗게 함몰된 부위가 마치 킬링필드를 증언하는 유해처럼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악상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진 교수는 “박근혜의 아킬레스건 장준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링크시키며 이번 장 선생의 타살 의혹이 대선에 끼칠 영향에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 목소리도 높였다.
진 교수는 “박빠들에게 한 마디”한다며 “박정희 덕분에 먹고 산다고 굳게 믿는 거야 자유겠지만 박정희의 헌정파괴, 정치테러, 사법테러를 정당화하거나 상대화하는 짓들은 하지 마셔”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정희와 장준하의 삶 비교
장준하와 박정희는 똑같이 일본군에 입대한다.
장준하는 일제 하에 강제 징용 당한다
박정희는 일본군관이 되기 위해 자진 입대 한다.
장준하는 일본군에서 탈영하고 조선 독립군에 자진입대 한다
박정희는 일본군관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천황에 충성한다.
장준하는 독립군 시절 미 첩보대 sos특수훈련을 받는다
박정희는 일본군관 장교 훈련을 받는다( 일본육사 57기)
장준하는 일제 하에서 창씨 개명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자진해서 창씨개명(다카키)에 앞장 선다
장준하는 독립군에 들어가서 혈서로 맹세한다 독립을 위해서
박정희도 왜왕에게"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혈서로 충성 맹세" 를 한다
장준하는 조선 독립을 위해서 가정을 돌보지 못한다
박정희는 독립군 때려 잡는데 앞장서고 처를 두번째로 바꾼다
장준하는 해방후 국민의 소식지 사상계를 창간 한다
박정희는 일본군 출신임을 희석하기 의해 좌파에 기댄다
장준하는 자유당 독재정권에 항거 한다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출신의 덕으로 군으로 들어 간다
장준하는 반민족 처벌법에 적극 찬성 한다
박정희는 반민족 처벌법에(친일매국노) 반대 한다
장준하는 민족 정신에 본인의 마음을 투신 한다(국토재건단)
박정희는 자기가 살기위해서 동료를 밀고 한다.
장준하는 자유당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혁명을 지지 한다
박정희는 4.19혁명을 지지 하지 않는다.
장준하는 군인이 정치를 하는것에 반대 한다
박정희는 군사 쿠테다를 일으켜 군사정치를 한다
장준하는 독실한 기독교인 이다
박정희는 일본의 신사참배를 인정 한다
장준하는 월남 파병에 반대한다
박정희는 월남 퍄병에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터에 보낸다
장준하는 월남파병 결정후 아들(장호권)을 솔선수범해서 파병 시킨다
박정희는 아들(박지만)을 육사로 보낸다(실력은 안되지만) (입시평준화됨)
장준하는 박정희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안다
박정희는 처음엔 장준하에 대해서 잘 모른다
장준하는 국민을 위해 군사 독재정권에 항거 한다
박정희는 국민을 탄압하기 위해 각종 악법을 만든다
장준하는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한일회담에 반대 한다
박정희는 돈 몇푼에 일본에게 면죄부를 준다
장준하는 민주화운동에 전념 한다.
박정희는 민주화운동을 탄압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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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속의 땅’ 중경(重慶)을 향하여 1 |
<문대골 칼럼>
구도(求道)의 길에 선 순례자(巡禮者)
중국중앙군(中國中央軍) 준위, 장준하(張俊河)! 그의 가슴엔 장준하와 그의 일단 53명의 중국중앙군사학교 임천분교 한광반(韓光班·한국 광복군 간부 훈련반)의 70일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그 감격의 글 모음집 <등불> 1, 2호 두 권이 깊이 안겨져 있었다. 그것은 결코 장준하 개인의 일기가 아니었다. 그 일본 군국주의의 철권(鐵拳)에도 기어이 버텨내는 조선혼(朝鮮魂)의 노래였다. 아니, 비인간, 비인도, 비도덕을 탄(歎)하는 <맨 사람>, 한 민중의 절규였다.
한광반의 김학규(金學奎) 대장은 장준하, 김준엽, 김영록, 홍석훈, 윤경빈, 선우진 같은 총명하면서도 정의롭고 신실한 사관들을 휘하에 두기 위해 임정이나 광복군사령부의 파쟁과 비행을 노골적으로 비방하며, ‘우리야말로 참 광복전력을 이룰 수 있는 애국자들이요, 용사들’이라면서 임천 한광반에 남아주기를 사정하기도 하고, 상당한 압력을 가하기도 했지만 장준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엄연히 버티고 있는 땅, 삼천만 민족의 의지가 뭉쳐있는 땅, 언젠가는 고난 받는 세계인민의 수족이 되어 모든 민족들로 스스로의 삶, 자주하는 사람을 살아내도록 세계사에 기여할 거기 중경, 그 <약속의 땅>을 향한 행진을 멈출 수는 없다. 장준하는 단호히 대장 김학규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리고 함께 군간부 교육을 수료한 대원들에게도 자신의 의지를 선언했다. 그것은 협상이 아니었다. 장준하에게 중경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나안>과 한 치도 다름없는 <약속의 땅>이었으니까. “나는 중경에 가야한다. 가다가 죽어도 가야한다.”장준하는 이때의 자신을 <순례자>(巡禮者)라 했고, 중경행의 길을 <구도의 길>이라 했다.(돌베개 p.192)
대장 김학규는 장준하와 그의 사람들의 중경행을 막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그의 중경행을 아예 돕기로 작정한다. 임천분교(중국중앙군사학교)의 지원까지 요청해 의류와 식량, 필수품 등을 공급받게 햇다. 임천을 떠나는 날은 임천분교와 한광반이 베푸는 융숭한 환송을 받게까지 되었다. <약속의 땅>을 향하는 장도가 시작된 것이다. 그 길은 일망무애(一望無涯), 형극의 광야였지만 말이다.
장준하에게 주어진 그 계약(契約)의 삶
1944년 11월 30일, 중국중앙군군관학교 임천분교 연병장에는 중경을 향해 거룩한 보무를 내딛어야 하는 한광반 훈련 수료생들과 그의 일단들이 거룩한 가슴으로 모여 섰다. 중국군관학교의 분교장과 한광반 대장이 번갈아 지휘단에 올라 중경을 향해 떠나는 한국출신 사관들을 격려하는 발언이 있었고, 이어 한국광복군을 대표하는 장준하는 두 지휘관을 향해 격(激)한 거수경례를 드리고 있었다. 그는 두 지휘관을 향해 꼭 같이 1분, 2분을 넘어 3분에 가깝도록 거수경례의 손을 내리지 않는 것이었다. 함께 한 동료들이 의아해 하는데도 그는 거수경례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지휘관들에 대한 존경이나 감사의 념보다도 이제 <약속의 땅> 중경(重慶)을 향한다는 감격적인 사실에 그의 의식도, 이성도 함몰해버렸던 것일까? 동료 중 어떤 이가 아주 조심스럽게 “장동지, 거수경례할 때 좀 이상하지 않았어?”하고 물었지만 오히려 장준하는 “왜”하며 되묻는 것이었다. 묻는 동료가 더 이상 “아니”하고 말이 없자 장준하 역시 더 다른 말이 없었다.
중경을 향해 가는 장준하 일단의 여정엔 임천으로부터 일주일 정도의 행진거리에 남양(河南省南陽)이 있고, 거기서 다시 20일이 조금 넘는 곳에 노하구(老河口)라는 15, 16개의 초등학교와 수 개의 중학교를 가진 지방도시가 있다. 이 노하구를 지나면 중경행을 가로막는 절대지난준령(絶對至難峻嶺) 파촉령(巴蜀嶺)이 있다. 그 죽음의 준령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형극의 숲을 뚫어야 하는가 하면, 글자 그대로 지평선을 방불케 하는 풀 한포기 찾아볼 수 없는 광야가 펼쳐진다. 눈보라가 불어치는 섣달길, 대오를 이루고 있는 일단 또한 위기엔 내달릴 수 있는 청년만이 아니었다. 여섯 명의 여인들과 업고 걸어야 하는 세 명의 어린애가 있었다. 일본 점령지역에서 장사를 하던 세 쌍의 부부와 그들에게 딸린 불과 한달 전쯤 그 지역마을의 한 보장(保長; 里長-필자 주)에 의해서 한광반에 인계된 나머지 3명의 여인 중 2명은 공작원, 다른 1명은 한광반원 중 한 사람의 큰딸이었다.
이 같은 총 53명의 일단이 임천을 떠나 남양을 거쳐 노하구(老河口)에 이르기까지 마치 하늘은 심술이라도 부리려는 듯 험로만 연이어 지고 있는데, 그 장준하의 일단이 여기 파촉령을 바로 뒤에 둔 노하구에 도착한 것은 섣달그믐, 임천을 떠난 지 꼭 한 달이 되는 12월 30일이었다. 그 행군기간 동안 장준하는 선발대장과 취사(炊事)부장 직을 맡아 일행의 보행을 통한 이동을 시종일관 시중해야 했다.
이의 전쟁, 옴의 극성
가장 힘든 일이 위생에 관한 것이었다. 바꿔 입을 여복이 갖추어 있지도 않았고, 밤이면 쉴 곳을 찾는다 해도 덮을 것이 없고, 행군하는 도중 얻어 들게 되는 숙소라는 것은 대개는 외양간, 마구간의 한 구석이거나 밀짚을 쌓은 창고의 짚단 위거나 였다. 정말 재수가 좋은 어떤 날은 어느 집의 행랑채에 얻어 드는 때가 있기도 했지만...... 상황이 이러니 신체의 위생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짚더미 위에 누워 잠을 이루는 경우 몸에 온기가 오는가 하면 그때부터 몸 전체가 예외 없이 이(蝨·Louse)란 놈들의 전쟁터가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옴(itch)의 극성이었다. 임천을 떠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부터 대원 중에 발생하기 시작한 이 옴이 노하구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절반이 넘는 수에 전염이 되었고, 이후 이 옴을 파촉령을 넘을 때까지 신기하게도 김준엽, 장준하를 제외하곤 모든 단원들에게 옮겨 붙었다. 애기들과 여인들은 거의 사경에 이르렀다 할 만큼 악성이 되어 있었다.
장준하의 돌베개는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습기가 베어오는 밀짚에선 무엇이 옮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녁마다 주어온 깨어진 사기그릇에 콩기름을 붓고 솜을 말아 심지로 꽂고 불을 밝히며 돼지기름과 유황을 사다가 한데 끓여 그 놈을 그 옴자리에 바르느라 야단들이었다. 꼭 공동목욕탕에서나 볼 수 있는 것 같은 장면이 매일 저녁마다 벌어졌다. 유황의 지독한 냄새가 질식시킬 듯 했다. ... 계곡이 진 곳에 햇빛을 마주하고 쭈그리고 앉아 쉴 때엔 이 휴식을 방해하는 이(蝨)의 난동을 견딜 수가 없었다. 옷을 온통 벗어 잡기도 하지만 역불급이었다. 드디어는 내복을 벗어 뒤집어 활활 털면 후두둑 후두둑 보리알 같은 이가 깨끗한 눈바닥 위에 떨어져 바둥대다가는 빨간 색깔로 변하며 죽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빈 동복이라 그 누빈 바느질 틈에 끼인 놈은 털어도 털어도 떨어지지 않았고, 속내의 한 벌 없는 우리는 오랜 햇살로 그 추위를 이겨낼 수도 없어 그냥 몇 번 털고는 다시 입고, 다시 입고 해야 했다.”(돌베개 p.226, 259).
필자가 장준하의 중경행군 도중의 일단에게 있었던 그의 희비를 엮어놓은 드라마 같은 이 사건을 전하는 것은 삶이란, 더군다나 뜻을 지닌 삶이란 그 같은 어처구나 없는 참경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존엄>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삶은 선택을 불허하는 것, 어떤 이들은 생존권(生存權)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 국가권력이, 힘의 소유층이 인민을 억압하고 그 인권을 유린할 때, 사악한 제도 권력이 <맨 사람>을 도구화 하려 할 때 함성으로 인민이 생존권을 주장해야 한다. 생존권이란 말의 사용은 오직 그럴 때뿐이다. 지존자 앞에서의 생존권이란 용납될 수 없는 말이다. 생은 선택을 용허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삶은 절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뜻을 품은 삶>에서일까?
장준하는 위대한 삶을 살았다. <주신 삶>을 말없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살아냈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장준하는 생명이 아슬한 지경에서 불퇴전의 민주주의 신봉자로 살았다. 필자가 장준하의 삶에 <계약의>라는 형용사를 붙인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다. <주신 삶>, <약속의 삶>, <뜻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나를 내려놓은 사람! 그래서 장준하는 하늘의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
우리가 인간 장준하를 더 알기 위해 임천 한광반에서의 <이·박(李·朴) 사건>을 알 필요가 있다. 같은 임천 한광반의 동료들이었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돼 국방경비대가 조직되면서 바로 국방경비대에 편입, 박모는 여순사건에서 기억될만한 공을 세우고 모 군사학교교장까지를 역임해 장성으로 예편한 자이고, 이모 역시 같은 길을 걸어 예비역 장성으로 군생활을 마감한 자이다. 이 박·이와 장준하 사이에 있었던 소위 <이·박 사건>은 생(生)의 추함과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
장준하(張俊河)와 그의 일단 성지임천(聖地臨泉)에 이르다 2 |
<문대골 칼럼>
박정희(朴正熙)와의 그 대척점(對蹠點)으로서의 임천(臨泉)
장준하의 박정희와의 대척의 운명은 1944년 7월 7일 장준하가 그 유명한 일본정예군을 길러내는 쓰까다(塚田)를 탈출할 때부터 결정된 것이었지만 그 운명의 구체성은 장준하가 쓰까다를 탈출, 실로 생사를 넘나드는 역경과 험로를 뚫고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을 찾아들면서부터 드러난다.
임천을 향하는 탈출 도상에서 중국유격대원에게 발각되어 다행히 20여 일 간의 호의 속에 그 유격대에 머물던 중 이미 말한 대로 참 사람 한치륭 장군을 만날 수 있었고, 드디어 7월 28일 최종 목적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자리잡고 있는 중경(重慶)을 향해 다시 출발, 40주야의 고투 끝에 중간 기착지인 임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임천에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도 장준하는 벅찬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탈출 동료 중 김준엽(金俊燁)은 중국국부군의 유격단에 머물던 중 한 중국군 간부로부터 중경이 아닌 임천에도 중국의 <중앙군관학교>(사관학교-필자주)가 있고, 그 군관학교엔 <대한민국 광복군 간부 훈련반>이 설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얻어들어 함께한 탈출동료들에게 이미 일러준 터였다.
대한민국 광복군 간부 훈련반! 생각만 해도 전신을 감격의 전율이 겹겹으로 휘감는다. 아, 대한민국! 전신을 바쳐 지켜야할 조국, 전신을 바쳐 이뤄내야 할 자주·독립! 꼭 중경이어야만 하는가? 반드시 정부청사가 있는 곳이어야 하는가? 우리의 역사를 배울 수 있고, 살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주변부여도, 소외지역이어도 ‘우리’를 살 수 있다면 좋다. 적어도 임천은 맘 놓고, 맘 먹고 <삼천리 내 조국>을 노래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임천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 설치의 배경
임천에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이 설치되게 된 것은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사의 상해의거가 그 계기가 되어서였다. 윤봉길 의사의 그 사즉생(死卽生)의 의거는 일군에 징집돼 중국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한국인 청년들의 엄청난 조국애를 불러일으켰고, 여타의 재중국청장년들에게도 ‘생의 변화’를 경험케 했다. 요원의 불길처럼 자주와 자존, 해방과 독립의 의지가 번져 나갔다. 중국주둔 한인일군들의 탈출이 줄을 이었고, 광복군의 지원이 부단히 이어져갔다.
임시정부 지도자들로서는 이렇게 모여드는 젊은 힘들을 자체적으로 정규군으로 훈련해 낸다는 것이 결코 여의치 않아 드디어 임시정부의 광복군 당무자들이 중국정부에 한국광복군의 훈련을 요청하게 되었고, 중국정부는 이를 흔쾌히 수락, 중국군관학교 낙양(洛陽)분교에 한인반(韓人班)을 설치해 이것이 중국군관학교 한인반의 효시가 된 것이다.
이어서 1940년 9월에는 중경에서 <대한민국 광복군>이 창설되면서 중국정부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여러 중요지역에 광복군 모집처를 설치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42년 김학규(金學奎) 장군에 의해 임천 중국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도 한광반을 설치하게 되었다. 국가가 설립 운영하는 군사관 정규교육대의 특설반으로 편입되어 아직도 계급은 군 체계상 중국군 계급이 부여되고 있었지만 어엿하고 확실한 대한민국 국군장교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9월 10일 임천에 도착, 당일 한광반에 편입되어 11월 20일까지 훈련기간 꼭 70일, 교육기간이 4개월이었지만 한광반 당국은 7월 7일 쓰까다 탈출 이후 한광반에 입교하기까지 2개월 여 사선을 넘은 행군을 크게 인정, 준사관의 계급을 수여한 것이다. 중국군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 공히 인정하는 사관이었다. 졸업장과 계급 수여는 중국군관학교장 장중정(場中正·장개석)이었다.
박정희(朴正熙)와 대척점에 선 장준하(張俊河)
장준하가 천신만고를 뚫고 넘어 기어이 대한민국 광복군 사관이 되어 나올 때,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新京: 현재의 長春) 입학(1940), 1942년 3월 동교 예과를 수석으로 마치면서 만주국황제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이때 졸업생 대표로 재학생의 송사에 저 유명한 ‘일본천왕에게 충성맹세’와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는 서원을 한다. 다까끼 마사오, 그가 스스로 선정한 일본명이었다. 박정희는 비운의 국가운명에 밀려 일본인이 되어 간 사람이 아니었다. 신비스러우리만큼 <힘>을 신봉하던 박정희였다.
힘을 숭상하는 힘의 교도인 박정희는 힘써 일본인이 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후에 그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민선정부(民選政府)를 전복시킨 것도, 경제 제일주의를 주창한 것도 다 힘의 도그마의 산물이었다. 만주사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만주군에 근무하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었다. 은인자중 오직 일본사관으로서 자신을 키우기에 심혈을 쏟았다. 그의 유일한 꿈은 일본육사를 가는 것이었다. 정말 힘을 지닐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일본의 육사에 진학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살도, 뼈도, 피도 일본의 것이어야 한다고... 박정희는 일본말, 일본노래, 일본인 어투를 끊임없이 배우고 익혔다. 그에게는 친구도 없고 놀이도 없었다. 오직 일본인이 되는 것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물론 사람으로서도 그래서는 안 될 일, 안 될 짓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는 드디어 민주사관학교 졸업 6개월 만에 일본사관학교 3년 편입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당시 만주출신이나 한인출신의 경우 일본사관학교의 진학은 정말 놀라운 특전이었다. 일본사관으로서 박정희의 교내생활과 군국주의 사상의 투철성은 타의 추종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신뢰할 정도로 일군사관으로서 빈틈없는 자세, 자격을 갖추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그를 육사 당국이 놓칠리 없었다. 한 전 사관생도 모임에서 당시 육사교장이었던 나구모쥬이치(南雲忠一)는 빽빽이 운집한 생도들에게 전례가 없는 한 학생의 실명을 거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박정희 곧 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에 대해서였다. “다까끼 생도 말이다. 다까끼 생도는 태생은 조선이라 하지만 천황폐하에게 바치는 충성심으로 한다면 그는 보통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생도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일본육사를 졸업한다. 졸업성적 전체3등, 조선인으로 육사 이래 일본교육총감의 유일한 수상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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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해 1944년, 장준하는 일군에 징집되어 평양주둔 제42부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중국의 강소성(江蘇省) 서주(西州) 일군보충대로 배속되어 있으면서 호시탐탐 그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곳 만주 일군보충대의 일지휘관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건이 한인출신병사들의 탈출이었다. 드디어 고위지휘관 회의에서 격한 단안을 내렸다. 여기 일군 보충대에 근무하는 모든 한인출신병들을 전원 쓰까다 부대로 이동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미 알려진 대로 쓰까다(塚田)부대란 모든 일군들 특히 한인출신병들을 일본군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일본의 정예 교관장교들을 특선하여 창설한 특별부대로 소위 일본의 역사학자까지도 차출하여 교관으로 근무케 하는 부대였다.
장준하를 비롯 160명의 한인병들이 그 쓰까다로 이동된 것이다. 군기는 필설로는 그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엄한 곳이었다. 1944년 5월 30일, 박정희가 일본천왕을 위해 죽겠다면서 일본육군 소위로 임관된 두 달 후의 일이다. 장준하는 탈출불가의 일군부대로 소문난 쓰까다의 전출에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엄한 곳, 엄한 사람, 엄한 소리에 오히려 “헛”이 더욱 틈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일본도를 차는 꿈을 이루기 위해 살 닳고 뼈 녹는 가혹(苛酷)의 싸움을 싸워간 것 같이 장준하 또한 그랬다. 뜻을 버리느니 차라리 죽음을 받겠다. 그것이 장준하 정신이었다. “옳은 것을 지켜내기 위해 옳지 않은 것과 대적한다.” 그것이 장준하 정신이었다. 장준하가 쓰까다부대 기마중대병으로 근무하면서 그 맡은 기마관리에 가히 애정을 쏟았던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장준하에게는 그 일본군의 군마가 일본군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그때, 그 역사 자체의 명(命)이었으니까!
분분초초, 장준하는 그 당하는 시간, 당하는 일을 주시는 시간, 주시는 일로 받아 그 일의 수행에 진액을 쏟아간다. 일본인과 조선일이, 네 일과 내 일이 장준하에게는 따로 없었다. 일본의 상관들에게 장준하는 “참 훌륭한 청년”으로 회자(膾炙)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한편 함께 탈출할 동료들을 찾기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였고 탈출로, 탈출시, 탈출방법의 모색에 목숨을 걸었다. “목숨을 걸고...”, 이것이 장준하의 박정희와 다른점이었다. 박정희의 5.16을 말하는 이들 중 “박정희는 목숨을 걸고 혁명을 했다.”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잘못된 말 중에 이보다 더한 경우는 없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자행했다. 칼, 총, 탱크를 동원해서 였다.
장준하의 경우는 자신이 ‘죽자는 것’이었지만 박정희의 경우, 박정희의 총칼은 ‘죽인다’는 것이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을 빌린다면 박정희는 지옥갈 놈, 장준하는 천당갈 사람이었다. 장준하는 세 명의 동료를 규합하여 기어이 그 일본의 정예부대 쓰까다의 탈출을 시도한다. 그리고 기어이 성공(?)했다. 그 무서운 쓰까다 탈출에 말이다.
장준하(張俊河)와 그의 일단 성지임천(聖地臨泉)에 이르다 3 |
<문대골 칼럼>
장준하는 자신이 ‘죽자’는 싸움을, 박정희는 너를 ‘죽인다’는 싸움을 살았다. 장준하는 거룩한 싸움을, 박정희는 살인마의 싸움을 싸운 것이다. 그 싸움이 아주 구체적으로 표출된 곳이 안휘성(安鰴省)의 임천이었다. 1944년 박정희가 일본군사관으로 천황폐하를 위해 죽겠다고 맹세하던 바로 그 해, 장준하는 대한민국 광복군 사관으로 대한민국 자주 독립을 위해 죽을 것을 맹세했다. 그래서 장준하의 임천은 실로 박정희와의 대척지(對蹠地)였다는 것이다. 필자가 임천을 장준하사(張俊河史)의 성지라고 일컫는 이유다.
이어서 우리는 장준하가 광복군의 사관으로 임명되기까지 임천군부에서의 ‘삶의 모습’을 주목,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일의 사람’ 장준하를 말이다. 일찍이 함석헌은 자유당 치하에서, 박정희의 군부독재 하에서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저항의 대오를 지어 열찬 투쟁을 부단히 지속하는 장준하의 의기에 감동, “장준하에게는 일감이 있다. 그는 어떤 대상에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라며 감탄을 마지못해 한 적이 있지만 실로 장준하는 일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는 일의 결과를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로 매진, 그렇게 한 자세로 그의 삶을 살고 갔다.
<교양강좌>와 <등불> 창간
1. <교양강좌> 장준하가 쓰까다를 탈출, 임천에 도착한 것이 1944년 9월 10일이었고, 중경을 향해 임천을 떠난 것이 11월 21일이었으니 그와 그의 일단이 임천에 주둔(?)해 있던 기간이 불과 70일이었다. 장준하의 갈 곳이 중경, 중경이 목적지이니 임천은 임시로 머무는 곳이었지만 장준하에겐 임시 거처와 정처가 따로 없었다. 자신이 지금 머무는 곳이 곧 보냄 받은 곳이었고 순간순간이 과제와 함께 주어진 시간이라 장단(長短)의 시간이 다름없이 온전히 드려져야만 했다. 그는 제물(祭物)로서의 생(生)을 요구받았고, 지존의 요구대로 제물로 드려갔다.
임천의 한광반 생활은 의외로 부실했다. 한광반의 지휘관들, 교관들의 자세 또한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나라는 이미 망해 버렸고 역사는 지워질 대로 지워져가고 있는 때,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이라는 그 이름이 장준하의 모골을 송연(悚然)케 하는데 반하여 훈련반의 나날은 역사의 사람 장준하에겐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교양시간이라는 건 완전히 엉터리인데다가, 훈련이라는 건 만기(萬氣)가 빠져있었다. 역사가 부여한 시간, 조국이 조국의 부활을 위해 부여한 시간을 이렇게 허비한다는 것은 <계약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장준하에겐 바로 범죄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하늘이 하늘뜻을 담아 부여한 시간이라면 그 하늘뜻을 이루는 일에 드려져야 한다. ‘계약의 나’를 사는 사람에겐 어떤 것도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신 분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진 계약을 이루는데 쓰여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장준하에겐 「따라 사는 삶」은 바로 범죄였다. 그것은 군대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가 깊이 잠든 깊은 밤, 장준하는 바로 옆자리에 누운 김준엽을 흔들어 보았다. “김형, 우리가 언제 중경행을 하게 될지 알 수가 없지만 이렇게 나날을 허송해서는 안 되지 않겠소.” 김준엽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대원들이 잠들어 있는데 더 이상 소근대는 말도 안면 방해가 될 것이니 내일 시간을 내서 몇 동지들과 더불어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로 하고 장준하도 김준엽도 깊은 잠에 들었다. 군부대 안에서, 더구나 훈련병 기간의 시간표를 훈련병 자신들이 짜보겠다니 하늘이 웃을 일이자, 노할 일이었다. “내 삶은 내가 산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장준하는 자신의 삶은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살아낸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만격(萬格)을 이루고 있었다.
생(生)의 존엄! 하늘 아래 땅 위에 훈련병이 훈련기간의 훈련계획을 자신이 짜겠다고 덤비는 놈이 장준하 말고 또 있었을까? 군사사(軍事史)의 조예가 깊지 못한 필자로서는 그 유(類)를 알지 못한다.
이튿날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가 점심시간과 이에 이어지는 휴식시간이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장준하의 가장 큰 불만이 거의 매일 이어지는 2-3시간의 강좌시간이었다. 강좌 내용의 부실함과 허함이 견딜 수 없게 했다. 장준하는 그의 돌베개에서 그때의 분위기를 “새로운 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태는 새로운 적으로, 우리를 자포자기 속에 빠지게 했다. 타락이라는 차원이 우리를 맴돌았다.”(돌베개 147쪽·思想社 1971.5.20.) 그러나 개혁은 용기만으로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도의 지략이 요구된다는 것을 장준하는 깊이 터득하고 있는 터, 우선은 남아도는 시간을 활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준엽, 영문학을 전공한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출신의 윤재현(尹在*), 법학을 전공한 동북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출신 김용민(金容旻)이 의외의 적극성을 띄면서 동참해준 것이 더 할 수 없는 힘이 되었다.
교양강좌에 이미 크게 실망한 장준하는 자신들이 스스로 하는 강좌를 통해 한국광복군반 수강생들의 뜨거운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이 불길이 자연스럽게 한국광복군반 정규강좌로 점화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있었다. 꿈과 이상에 의해 전진하는 역사는 없다. 역사는 깬 혼의 투신과 헌신을 요구한다. 장준하는 정말 신비스럽다할 만큼 역사(役事)를 만드는데 몸뚱이를 내던지는 사람이었다.
필자는 임천의 <중앙군관학교 대한민국 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장준하에 의해 시작된 <자율강좌>가 그 이후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떤 결과를 이루었나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같은 사실을 지나치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그 같은 사건들을 통해 나타나는 장준하의 삶(生)을 말하려 한다. ‘어떻게, 무엇을 살 것인가?’는 우리는 물론 곧 하늘이라고까지(人乃天) 말하는 그 <사람>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장준하의 생각, 계획, 추진은 적중했다. 각 부문의 전공자들이 강좌과목을 나눠 맡아 자유강좌를 시작한지 일주일이 채 되기 전 한광반에 새 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10일쯤 되었을 땐 그 새바람(新風)은 광풍(狂風)이 되어 한광반을 휩쓸었다. 중국중앙군관학교(임천분교)에서까지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강사(講師)들의 자세였다. 필기도구마저 변변치 않을 때, 강의를 맡은 강사들은 자신들이 놀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들의 한 위대한 자산처럼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라땅 빼앗기고 역사가 짓밟힘을 당해도, 부모도 형제도 아내마저 생이별해 천하의 슬픔을 씹어 삼키면서도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하늘의 명(命)이 있다니 말이다. ‘오늘을 살아내는 것’, ‘오늘의 명(命)을 지상(至上), 지성(至誠)으로 사는 것’ 말이다. 장준하는 이 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강사들 보다는 수강생들이 더욱 뜨거운 열심을 내면서 <판>을 새로 짜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잡지 <등불> 창간 강좌에 참여한 수강생들로부터 그 강의록을 좀 빌려보자는 요청이 쇄도하게 된 것이다. 그 또한 사명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이었다. 미래사의 주역은 화려한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다. <목전의 과제>에 미쳐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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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의 장준하 | 장준하는 그랬다. 강의록을 좀 빌려달라는 수강병들의 강청에 강사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할 때, 거기 역사 장준하가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계시처럼 장준하를 뒤흔들었다. 강사들의 강의안을 모으고, 대원들의 수필, 서사문, 생활일기, 단상 등의 글을 모아 잡지형태의 회지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개체 속의 생각들을 끌어내 공유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장준하가 의식리(意識裡)에 였거나 무의식리(無意識裡)에 였거나, 한국사 100년에서도 만날 수 없는 민주주의 지도자로서의 초석을 놓게 한 사건이었다. 대중의 생각, 의식을 한데 모아 공유한다! 이렇게 해서 창간(?)한 것이 잡지 <등불>이었다. 임천에서의 한광반 70일 주둔기간 동안 장준하는 제1호, 제2호를 발간하게 되는데, 장준하는 이 성역(聖役)에 실로 진액을 쏟았다. “맨땅에 가마니를 깔고 기거하는 병사(兵舍)”에, “매일매일 뒤지로 쓸 종이도 없어 나뭇잎을 사용하는 판국”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잡지였다. <한국광복군본부>에서도 못하는 일이었다. 장준하는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김준엽과 함께 <중국중앙군관학교>의 임천분교를 찾아 중국의 지휘관들을 상면하여 기어이 잡지를 제작할 수 있는 분량의 선화지를 얻어냈다.
독자들이여, 독자들은 조선이 낳은 이 역사의 아들을 기억해야 한다. 생사를 넘나들며 명(命)의 길을 오직 한맘 품고 직선으로 걷는 사람, 사람이란 점에선 우리와 티끌도 다름이 없을 그 아니겠나! 추위에 떨며, 주림에 허기, 지침에 깊은 실의(失意). 장준하라고 예외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장준하는, 장준하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랬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정글에서 창칼을 들 수밖에, 폭약을 내던질 수밖에 없는 한의 땅에서 사람(민중·民衆)의 혼을 지켜낸 사람, 그 혼을 더욱 키워 역경의 나라에 기여한 사람 장준하를 기억해야 한다.
복이란 구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구해서 받았다면 참 복일 수 없다. 내가 나를 선뜻 내줄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한 사람, 그 대상이 무엇이었든지 말이다. 그것이 참 복 아닌가? 받는 것이라면,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무슨 복이라 하겠는가? 주고 또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종국에는 모든 것의 구심(求心)이 되는 나(自我)를 통째로 내어주는, 그것도 어느 때만이 아닌 일생을 그렇게 살아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축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장준하는 그렇게 살았다! 독자여, 우리는 그 장준하를 알아야 한다. 찾아야 한다. 찾아서 살아내야 한다. 장준하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말이다.
잡지 <등불>을 만드는 장준하를 보는 동료들은 놀라지 말라. 생의 변화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잡지의 모양, 잡지의 내용이 아니었다. <등불>을 만드는 장준하의 자세였다. 첫 호의 잡지편집을 다 마친 후 장준하는 잡지의 표지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 앞에 웬 동료가 깨끗한 천(Textile) 한쪽을 장준하 앞에 내놓는 것이었다. 장준하의 정성을 쭉 지켜본 한 동료가 자신의 내복을 깨끗이 빨고 또 빨아 말려 표지를 할 수 있도록 잘라낸 것이라 했다!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준하가 우니 그 동료도, 곁에 있던 또 다른 동료도 함께 울었다. 생(生)의 거룩을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장준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중경을 향하여 임천을 떠난다. 장준하의 가슴엔 두 권의 <등불>이 안겨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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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골계곡 입구의 메사캠핑장(=하늘산캠핑장)에서 1.5km 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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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하나 6/9일 실시(010-2990-7600)
자료
http://blog.daum.net/modapin64/3992395
춘천-사창리 시외버스 시간표
사창리-동서울 시외버스 시간표
와수리-춘천 시외버스 시간표
산정호수에서 출발하는 버스 시간표 입니다.
138-6과 138-9는 138-6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춘천07:00→사창리08:00
사창리08:10→광덕산08:30
산행시작08:30→산행종료?
산정호수→와수리 : 01:15소요. 운천에서 와수리 1시간 간격으로 있음(45분 소요)
와수리18:50→춘천21:00
의정부-춘천 시외버스 시간표
http://blog.naver.com/skh1406/40198232608
http://blog.naver.com/skh1406/40206513411
http://blog.naver.com/skh1406/40206988856
"백두대간의 추가령에서 갈라져 서남쪽으로 뻗어 휴전선을 넘어 수피령을 지나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 지점인 교하의 장명산(102m)에서 끝나는 한북정맥"에서 여러개의 지맥이 갈라진다. 수피령 이남에는 8개의 지맥이 있어 한북 8지맥이라 부른다.
명성지맥은 한북정맥상의 광덕산(1,046m)에서 갈라져서 자등현, 각흘산(838m), 약사령, 명성산(922m), 여우봉(710m), 여우고개, 사향산(665m), 관음산(733m), 도내지고개, 불무산(662m), 보장산(555m)을 지나 한탄강과 영평천이 만나는 합수점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로 거리는 약 50km에 달한다.
명성지맥을 거닐면서 나타나는 근현대 역사의 흔적~
그것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이채롭다.
명성지맥 산행기
산이랑 "산이랑"님
http://blog.daum.net/limsees/594
http://blog.daum.net/limsees/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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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 행 지 : 경기도 포천시 각흘.명성산
2. 산행일자 : 2015. 3.14
3. 산행코스 : 도평3리 각흘산등산로입구 -각흘봉-약사령-명성산-삼각봉-팔각정-책바위-비선폭포-산정호수주차장
4. 산행거리 : 12.48km
5. 산행시간 : 06:25
6. 산행참고 : 온맵지도, 동아지도 , 선답자산행기및 트렉
7. 교통참고 : 갈때 : 동서울터미날에서 산양리/와수리버스탑승
올때 : 산정호수 138-6 버스탑승 의정부역이나 터미날하차
8. 산행트랙 : 2015-03-14 각흘-명성산__20150314_0914.gpx
산정호수-의정부 시외버스 시간표 2015. 3.14현재
철원군 농어촌버스 시간표
- ♣ 노선별 주요경유지와 비고란의 경유지를 확인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 교통량,기상변화 등에 따라 사전 예고 없이 변경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제일여객 동송본사(455-2217), 와수영업소(458-4055)로 문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동송 출발 농어촌버스 노선도
신철원 출발 농어촌버스 노선도
와수리 출발 농어촌버스 노선도
와수리에서 춘천 가는 버스시간표
춘천에서 와수리 가는 버스시간표
사창리 ↔ 서울 방면 - 사창리 터미널(033-441-4080)
사창리 ↔ 서울 방면
노선행선지 |
경유지 |
출발시간 |
요금 |
사창리 |
동서울 |
광덕고개,도평리,이동,일동 |
06:30,07:20,07:40,07:55,08:10,08:25,08:40,09:00, ,09:20,09:50,10:30,11:30,12:30,13:00,13:30,14:10, 14:50,15:40,16:20,17:00,17:40,18:20,19:20 |
성인 10,400 학생 8,300 어린이 5,200 |
상봉동 |
광덕고개,백운동,도평리,이동,일동 화현,내촌,광능내,장현,퇴계원,교문리 |
08:10,14:30 |
성인 9,600 학생 8,300 어린이 5,200 |
사창리 터미널(033-441-4718)
사창리 ↔ 춘천 방면
노선행선지 |
경유지 |
출발시간 |
요금 |
사창리 |
춘천 |
원천리,달거리,서오지리,어리고개,지촌, 신포리,원평리,춘천댐,용산리,소양로 |
07:30,08:40,09:20,10:20,12:40,14:20 15:20,16:40,18:00,18:50,19:40 |
성인 5,300 학생 4,200 어린이 2,650 |
사창리 ↔ 다목리, 와수리
노선행선지 |
경유지 |
출발시간 |
요금 |
사창리 |
와수리 |
명월리,사단앞,아파트,다목리,육단리 |
08:00,13:00,17:00,19:10 |
성인 3,900 학생 3,100 어린이 1,950 |
산양리 ↔ 서울 - 산양리 터미널(033-442-6189)
산양리 ↔ 서울
노선행선지 |
경유지 |
출발시간 |
요금 |
산양리 |
동서울 |
15포소,연대앞,와수리,신술리,도평리, 이동,일동 |
07:00,07:25,07:50,08:20,08:50,09:45, 18:00,18:30 |
성인 13,600 학생 10,900 어린이 6,800 |
상봉동 |
화천,원천리,달거리,서오지리,어리고개, 지촌,신포리,춘천,강촌,가평,청평,마석 교문리 |
08:30 |
성인 14,800 학생 10,400 어린이 7,400 |
다목리 ↔ 춘천, 서울 - 다목리 터미널(033-441-7105)
다목리 ↔ 춘천, 서울
노선행선지 |
경유지 |
출발시간 |
요금 |
다목리 |
춘천 |
사창리,어리고개,기촌,신포리,원평리 |
07:10,10:00,15:00,18:30 |
성인 2,000 학생 1,600 어린이 1,000 |
다목리 ↔ 와수리
다목리 ↔ 와수리
노선행선지 |
경유지 |
출발시간 |
요금 |
다목리 |
와수리 |
육단리 |
18:15,13:15,17:15,19:25 |
성인 7,200 학생 5,800 어린이 3,600 |
(관광정책과, 033-440-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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