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방을 바꾼 ‘결정적 사흘’을 들여다봅니다. '역사 빌런'들의 오만·오판·편견이 나라의 운명에 얼마만큼 큰 해악을 끼치는지를 보기 위해, 운명을 바꾼 결정적 72시간에 돋보기를 들이댑니다. 그 첫 번째 순서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이, 일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 폭격기를 조종한 미 육군항공대(현 공군) 대령 폴 티비츠.
“제군들, 오늘은 우리가 기다려온 날이다. 실패할지 성공할지는 잠시 후면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누구도 보지 못했고, 누구도 듣지 못했던 폭탄 한 발을 떨어뜨릴 것이다.”
미군 대령 폴 티비츠의 임무 브리핑
1945년 작전을 수행 중인 미 육군항공대 B-29 폭격기의 모습.
#1: 히로시마 상공
일본 세토 내해(瀬戸内海)는 혼슈, 큐슈, 시코쿠 세 섬으로 둘러싸인 바다다. 그 위를 세 대의 미 육군항공대(공군) B-29 폭격기가 날고 있었다. 그중 오늘 핵심 임무를 수행 중인 기체엔 ‘에놀라 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의 어머니 이름을 땄다.
이 기체엔 티비츠 대령과 11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 대위, 폭격장교 토머스 페러비 소령, 항법사 시어도어 반 커크 대위, 레이더 대응 담당 제이콥 비저 중위, 무기 담당 장교 윌리엄 파슨스 해군 대령, 파슨스의 보조 모리스 젭슨 소위, 레이더 조작수 조 스티보릭 병장, 후방 기관총 사수 조지 캐런 하사, 항공엔지니어 와이엇 듀젠베리 기술부사관, 항공엔지니어 보조 로버트 슈머드 병장, 무전병 리처드 넬슨 일병이 티비츠의 명령을 기다렸다.
에놀라 게이 내부엔 비장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은 그때까지 지구에 살았던 어떤 군인도 해본 적 없었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임무 실패?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적에게 잡히는 건 더욱 있어선 안 될 일. 그래서 이들 12명은 각자 주머니에 청산가리 캡슐 하나씩을 품고 있었다. 폭탄과 함께 산화하거나 불시착 땐 캡슐을 삼켜야 한다.
에놀라 게이가 어디로 가는지, 기장 티비츠도 몰랐다. 목표 도시는 셋 중 하나다. 직진해서 최우선 목표인 히로시마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왼쪽으로 틀어 고쿠라(기타큐슈)로 가야 할 수도 있다. 완전히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가사키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올 수도 있다. 모든 게 해당 도시의 날씨에 달려 있다. 다른 폭격과 달리 이번엔 레이더를 쓰지 말고 직접 육안으로 목표물을 확인한 뒤 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중요한 폭탄이길래.
“Y-3, Q-3, B-2, C-1.” 무전기를 통해 암호가 들려왔다. 그 뜻은 “1번 목표 지점에 구름이 적게 끼어 있다”는 뜻이다. 그제야 ‘그 폭탄’을 떨어뜨릴 목표가 결정됐다. 바로 혼슈 남서부 인구 35만 명의 도시 히로시마다. 미 공군이 히로시마의 운명을 결정한 이때가 1945년 8월 6일 오전 7시 30분이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B-29 폭격기(에놀라 게이)와 그 승무원들.
#2: 히로시마
그때 7시 30분. 에놀라 게이 아래 히로시마엔 공습경보가 발령되어 있었다. 인근에 미군 비행기들이 나타나 폭격할 수 있다는 경보였다. 경보는 7시 9분부터 시작됐지만, 히로시마 시민들은 별 동요 없이 월요일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폭격기 수십 대가 몰려온 것도 아니고 세 대만 온 걸 보고 다들 별일 없겠거니 생각했다. 그 무렵 미국의 B-29가 하도 자주 들이닥치는 바람에, 히로시마 시민 대부분이 이 폭격기를 잘 알고 있었다. ‘B상(さん)’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하긴 폭탄을 실었더라도, 요격기나 방공포 전력이 부족해 미군 폭격기를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 도시들은 몇 달째 미군 항공기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고, 미군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있어야 했다.
7시 31분. 여전히 미군 폭격기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음에도, 히로시마의 공습경보는 끝났고 사람들은 완전히 월요일 아침 일상으로 돌아갔다. 적기가 있어도 어쨌든 삶은 살아가야 했으니까. 어른들은 출근을, 아이들은 등교를 서둘렀다.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 촬영된 일본 히로시마 시내의 모습.
#3: 에놀라 게이
히로시마 하늘 위 에놀라 게이에선 폭탄 떨어뜨릴 준비가 한창이다. 시속 330㎞로 나는 티비츠의 시야에 히로시마 시가지가 들어왔다, 투하 목표 지점은 도시 중심부 오타강 위에 놓인 아이오이교(橋)다. T자 모양 3방향 다리라 하늘에서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목표물이다. 폭격장교 페러비 소령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케이, 다리 확인했습니다.”
준비가 끝났다. “페러비, 이제 자네 차롈세.” 기장 티비츠가 조종간을 놓고 조종석에 몸을 기대며 폭격장교에게 명령을 내렸다. “목표 지점 도착했습니다.” 페러비의 보고와 함께 에놀라 게이의 무장창이 열리고 폭탄이 투하됐다. 투하 시간 오전 8시 15분 17초. 43초 후면 저 폭탄은 터진다. 티비츠와 승무원들은 시력 보호를 위해 고글을 착용했다.
‘리틀 보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무게가 4.4톤에 달했던 무거운 폭탄을 떨구자, 에놀라 게이의 고도가 쑥 올라갔다. 티비츠는 폭발의 충격을 피하기 위해 기수를 오른쪽으로 꺾어 전속력으로 히로시마 도심을 빠져 나갔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모습. 티니안섬 미군 폭격 기지에서 찍힌 사진이다.
길이 3m, 무게 4.4톤의 리틀보이는 우라늄 농축 방식의 원자폭탄이다.
#4: 다시 히로시마
그 시각 히로시마 사람들은 미군 비행기가 떨구고 간 낙하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B상’이 대공포에 맞아 승무원이 낙하산으로 탈출하거나, 며칠 전처럼 뭔가 또 삐라 같은 유인물을 뿌리겠거니 생각했다. 최악의 살상 무기가 그들 머리 위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형성된 버섯구름.
8월 6일 오전 8시 16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실전에서 사용된 원자폭탄 리틀보이는 낙하산에 매달려 히로시마 도심 576m 상공에서 폭발했다. 폭탄은 원래 목표인 아이오이교를 살짝 빗나가, 다리에서 170m 떨어진 시마병원 안뜰 위에서 터졌다. 폭발 지점 바로 아래(그라운드 제로) 시마병원의 기온은 곧바로 섭씨 3,000~4,000도까지 치솟았고, 폭심지 반경 800m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한순간에 녹아내려 조그만 덩어리로 변해 버렸다. 히로시마 시내에 이런 둥근 덩어리가 수천 개 굴러다녔다. 구리로 만든 불상, 화강암까지 녹아내렸다.
열과 방사선만 뿜어져 나온 건 아니었다. 폭발로 인한 폭풍(blast)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시작해 시속 1만1,587㎞(마하 9.47)의 가공할 만한 속도로 반경 3.2㎞까지 뻗어나가 그 안의 건물과 사람을 찢어발겼다.
거대한 버섯구름은 상공 8㎞ 높이까지 피어 올랐다. 폭발 열기로 인한 화재 때문에 시내 7만6,000호의 가옥 중 7만 호가 불에 탔다. 도시에 있던 35만명 중 시민 11만 명과 군인 2만 명이 즉사하고, 그해 말까지 다시 14만 명이 더 사망했다.
“미국 비행기가 일본 육군 기지 히로시마에 폭탄 한 발을 떨어뜨렸습니다. 그 폭탄은 TNT 2만톤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현존하는 최고 폭탄보다 2,000배 이상 강력합니다. 그것은 원자폭탄이라고 불립니다.
일본인들은 진주만을 공습해 이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몇 배의 대가를 치렀고, 그 대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구상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파괴를 하늘로부터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원폭 투하 후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 성명
1945년 8월 6일 미군 비행기가 시코쿠 방면에서 촬영한 히로시마의 모습. 화적운(격렬한 화재로 인한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5: 그때 도쿄에선
수도 도쿄에선 히로시마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히로시마는 말 그대로 초토화 상태여서 보고할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폭의 위력은 히로시마의 모든 통신을 끊어 놓았다. 실시간으로 사람이 계속 죽어가고 있었지만, 상황을 몰랐던 일본 정부는 아무런 구호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그나마 몇 개의 보고와 뉴스가 단편적으로 도쿄에 도착하긴 했다. 오전 8시 30분, 히로시마 인근 구레에 있던 해군기지에서 저 멀리 버섯구름을 목격하고 도쿄 해군성에 “처음 보는 강력한 폭탄이 히로시마를 때렸다”는 첫 보고를 올렸다. 오전 10시엔 육군성에도 비슷한 보고가 들어갔고, 오후 2시 국영통신사 도메이뉴스(同盟通信)가 히로시마 폭격 소식을 1보로 보도했다.
그러나 도쿄에 있던 누구도 히로시마의 참상을 정확히 알긴 어려웠다. 혹시 ‘그 폭탄’이 떨어진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지만, 행여나 원폭이 맞다 하더라도 10만 명 이상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뭔가 큰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정확한 보고가 들어오지 않아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다. 오후가 되어서야 해군성 연락을 받은 사코미즈 히사쓰네 내각서기관장(현재의 관방장관)이 스즈키 간타로 내각총리대신에게 히로시마 폭격 소식을 알렸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1935년 모습.
일본 제124대 천황 히로히토(裕仁)도 8월 6일 늦은 오후쯤 히로시마 소식을 들은 것으로 보인다. 황거(皇居)로 관련 보고가 들어간 것이 6일 오후 7시다. 당시 시종무관이었던 오가타 겐이치 대령의 일기에는 “해군성이 구레 해군기지의 보고를 받고 전화 통보를 했는데, 오전 8시쯤 B-29 세 대가 특수 폭탄으로 공격을 해 도시가 대부분 무너졌다고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평소 모든 전황을 상세히 챙기려고 했던 히로히토의 특성을 감안하면 해군의 연락을 받은 시종무관이 이를 히로히토에게 알리지 않았을 리 없다.
히로시마에서 큰일이 터졌다는 사실이 알려졌음에도, 일본 황실·정부·군부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내각이나 대본영(전시 일본군 최고 통수기관) 그 어디서도 8월 6일 당일엔 히로시마 폭격과 관련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내각이 스즈키 총리 주재로 회의를 연 것은 다음 날인 8월 7일 오전이었다. 육군 수뇌부가 제대로 보고를 받은 것도 7일 새벽이 되어서였다.
1945년 6월 일본제국 내각.
맨 앞줄 중간이 스즈키 간타로 총리대신,
두 번째 줄 두 번째 입 부분이 살짝 가려진 인물이 주화파 거두인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이다
#6: 도쿄 미스터리
일본 수뇌부는 왜 가만히 있었을까. 원폭의 위력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보긴 어렵다. 사실 일본은 당시 비밀리에 원자탄을 만드는 중이었고, 원폭 제작에 참여한 핵물리학자들을 통해 이 폭탄의 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군 수뇌부의 일기나 회고록을 보면, 히로시마 폭격 직후 미국의 원폭 투하 가능성을 언급한 내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왜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꽤나 복합적이다. 정부, 군부, 황실이 각자 다른 이유로 히로시마 상황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우선 군부의 사정부터 보자. 일본 군부는 ‘집단 착란’에 가까운 현실 부정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배하며 전황을 도저히 뒤집을 수 없었음에도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치거나 “큰 승리를 거둬 더 나은 강화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일본 군부의 사형 선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군부 입장에선 생각하기도 싫은 변수였고, 그래서 군 수뇌부는 히로시마의 소식이 전해지고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원폭 성명’이 발표된 뒤에도 “트루먼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 있다”며 현실을 계속 부정했다.
정부와 황실은 이와는 좀 다른 이유로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내각의 주요 장관들과 황실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고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다면 군대를 해체해야 하고 정부 요인들은 다 전범으로 몰릴 것이며 히로히토는 폐위까지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소수의 장관과 황실 인사들은 중립국(당시는 1941년 소일 불가침조약이 유효)이었던 소련의 중재를 받아 미국과 강화 협상을 벌이려고 하는 중이었다. 군부의 목줄이 미국의 원자폭탄에, 정부황실의 운명은 소련의 아량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원폭 대응에서 가장 중요했던 첫날이 허무하게 지나가 버렸다. 구할 수 있었던 목숨은 더 죽어 나갔고, 그사이 미국은 두 번째 원폭을 떨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8월 6일이 저물었다.
1945년 10월 히로시마 시내. 원폭 투하의 피해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폐허의 모습이다.
4. 세도정치로 인한 국가적 혼란과 외세의 침략 속에서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했던 시기다.
고종 (26대)
초기에는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경복궁 재건, 서원 철폐 등 개혁을 추진했다.
이후 강화도 조약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순종 (27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하며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된다.
단종의 피눈물…
17세 어린 왕의 참혹했던 피의 역사
▲ 준비된 왕, 문종
때는 1452년, 조선의 다섯 번째 임금 문종이 다스리던 때야.
5월 14일 늦은 오후 한양 도성 안 경복궁 강녕전 앞에서 누군가 울부짖으며 큰 소리로 외쳐.
"어이는 대체 뭘 하느냐! 어째서 청심원을 올리지 않느냐!"
병석에 누워있던 문종의 병세가 갑자기 위급해진 거야. 어이를 찾으며 통곡하는 이는,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이었어. 어이가 황급히 청심원을 올리려는데, 이미 늦었어. 문종은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돼. 문종의 때이른 죽음은 조선왕조사를 통틀어 가장 안타까운 순간 중 하나로 꼽혀. 그 이유를 들어볼게.
"통치자로 봤었을 때는 모두가 준비된 세자, 국왕으로서의 문종이라는 존재는 굉장히 좀 기대가 됐던 군주. 만약에 그의 치세가 좀 오래됐다면, '세종 시즌2' 이렇게 볼 수 있었겠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종 때 주요 업적들의 과정들, 한글 창제라든지 국정 운영, 세금 제도 개선, 그리고 국방의 강화 같은 많은 정책에서 문종이 직접 수업도 받았고. 또 직접 참여하면서 특히 세종의 말년이나 후반기 때는 그 일을 대행해서 처리를 했었기 때문에. 문종이 만약에 오래 살았다 하면 굉장히 기대되는 군주가 아니었을까."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한마디로 준비된 왕. 성군이 될 자질을 타고난 임금이었거든.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야. 문종이 세자였을 때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맞이한 적이 있거든. 사신들이 문종을 보고는 감탄하며 말했대.
"이 나라는 산수가 빼어나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세자가 태어났구려."
-세종실록 세종 7년 윤7월 19일-
그 정도로 인물이 좋았나 봐. 그럼 단순히 잘생기기만 했냐? 아니야.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어. 당대 제일의 명필로 유명했는데.
"간혹 등불 아래에서 종이를 대하면 정치하고도 미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
-문종실록 문종 2년 5월 14일-
게다가 무예도 능해서 화를 쏘면 백발백중. 잘생겼는데 공부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거야. 그야말로 문과 무 모두 재능을 갖춘 인물이었던 거야. 천성이 너그럽고 효성이 지극해서 아버지 세종도 그렇게 아끼는 아들이었대. 세자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많은 업적을 남겼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힘을 보탰다고 해.
이게 다가 아니야. 비가 얼마나 왔는지 측정하는 측우기. 국가 단위로 표준화된 기상 측정기구로는 세계 최초야. 측우기를 누가 발명했는지 혹시 알아? 장영실이라고 알고 있잖아. 근데 문종이 발명한 거야. 문종이 측우기를 만든 이 날은, 발명의 날로 지정돼서 지금도 기념하고 있어.
문종이 만들어낸 게 또 있어. 이 물건의 이름은 화차야. 문종의 지시로 만들어진 화차는 화약의 힘으로 중신기전 100개를 연달아 발사하는 최첨단 신무기야. 요즘 시대로 하면 다연장 미사일이야. 화차는 훗날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활약을 하게 돼. 앞날을 내다본 문종의 이 대비가 조선을 지키는데 일조한 셈이야.
"세종의 뒤를 이어서 국방력 강화, 특히 화약무기나 이런 무기들을 개발해서 결국 임진왜란 때의 왜적을 막아낼 수 있는 힘에 있어서는 문종 때의 어떤 군사력 확충이나 시스템 확충이 있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8살 나이에 세자로 책봉돼서 무려 29년간 왕세자 교육을 받은 문종은, 직위하기 7년 전부터 세종을 대신해 국정을 돌보기도 했어. 말 그대로 준비된 왕이었던 거지. 모두들 기대했을 거야. 세종이 닦은 기반 위에 다시 한 번 문화 정치가 펼쳐지겠구나.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어. 문종의 죽음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
"신하들이 모두 목놓아 통곡하는 소리가 궁정에 진동하였지만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으며. 거리에 백성들도 슬퍼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문종실록 문종 2년 5월 14일-
이렇게 모두가 정말 진심으로 통곡을 한다는 건 어떤 분이었는지 알 수 있는 거지. 이들의 슬픔이 더욱 컸던 이유가 있어. 바로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가 너무 어렸거든.
"이때 사왕은 나이가 어려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하와 백성의 슬픔이 세종의 훙서 때보다 더하였다."
-문종실록 문종 2년 5월 14일-
문종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세자. 그게 단종이지. 조선의 여섯 번째 왕 단종이야.
이건 단종의 어진이야. 어진은 왕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말해. 1452년 5월 18일. 단종은 12살 어린 나이로 왕에 올라. 지금 같으면 초등학교 5학년, 너무 어릴 때잖아. 단종은 그 나이에 지엄한 왕의 자리에 올랐어.
▲ 홍위(弘暐)
단종은 문종이 28살 때 태어났어. 혼인 나고 14년 만에 힘들게 얻은 금지옥엽 외아들이야. 이 아이에게는 '홍위(弘暐)'라는 이름이 주어져. '넓을 홍'자에 '햇빛 위'자야. 밝은 햇살을 세상에 넓게 비추는 훌륭한 왕이 되기를, 그런 마음을 담지 않았을까. 세종실록에 보면 어린 홍위에 대한 기록이 있어.
"너 원손 이홍위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품성이 영명하니…"
-세종실록 세종30년 4월 3일-
홍위는 할아버지 세종의 총리를 받으며 왕이 될 교육을 받게 돼. 공부를 잘했을까? 아버지 문종이 아들 홍위를 평한 기록이 있어.
"너 원자 홍위는 덕이 온화하고 자질이 뛰어나며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니."
"인과 효는 천성으로 타고났고. 스승을 중히 여기고 높이어 학문이 날로 진취하였다."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7월 20일-
온화한 성품에 총명함까지. 그야말로 훌륭한 왕이 될 재질을 타고났던 거야. 게다가 홍위는 조선 건국 이래 유래 없는 정통성까지 지니고 있었어.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적장자, 그러니까 즉 정실 왕후가 낳은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게 원칙이야. 하지만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때까지는 한 번도 적장자가 왕이 된 적이 없었거든.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최초의 적장자 출신 왕이었어. 그런데 단종은 그런 문종의 적장자야. 2대에 걸쳐서 적장자의 혈통을 계승한, 왕수저. 이건 조선 왕조 사회 최고의 정통성이야.
하지만 그런 그에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어. 혹자는 이렇게 말해. 단종은 누구보다 외롭고 쓸쓸한 왕이었다고.
홍위가 태어난 날 모두가 탄생을 기뻐했어. 그중에서도 뒤늦게 손자를 보게 된 세종이 크게 기뻐했대. 그런데 정각 안에 있던 커다란 초가 갑자기 땅에 떨어져. 혹시 불길한 징조일까? 그 이튿날이 되자 궐 안에는 비통한 울음소리가 가득해. 홍위를 낳은 어머니 현덕왕후가 산후병으로 숨을 거둔 거야. 홍위는 어머니 품에 제대로 안겨 보지도 못하고,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손에 크게 돼.
그래서 홍위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던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 거기에 아버지 문종까지 모두 세상을 떠난 후였어. 이 어린 왕을 돌봐줄 왕실의 어른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거야. 고아와 같은 외로운 임금이었던 거지.
그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은 친누나 경혜공주뿐이야. 그래서일까? 홍위는 왕이 되고 난 후에도 자주 경혜공주의 집을 찾아 잠을 잤다고 해.
"친누나 한 명 있는 거죠. 누나는 15살에 결혼했거든요. 옆에 같이 지내다가 친누나가 떠난 거죠. 왕으로 즉위한 다음에, 또 즉위 전에도 틈이 나면 항상 단종이 계속 경혜 공주를 만나러 가요. 그러니까 둘간의 사이가 좋았구나를 알 수 있는 거고 애틋했던 거는 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넓은 궁과 많은 신하들도 홍위의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했던 것 같아. 혼자 남게 될 어린 아들이 염려가 됐던 걸까. 아버지 문종은 눈을 감기 전, 조정의 원로 대신들을 불러서 이런 부탁을 남겨.
"경들에게 이르니, 부디 어린 세자를 잘 보필하라."
이렇게 임금이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걸 '고명'이라고 해. 이때 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이, 당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이었어. 이들을 '고명대신'이라고 불러. 이들은 어린 왕을 보좌해서 나라일을 결정하도록 했어. 어떤 식으로 했는지 보여줄게.
예를 들어, 새로운 관리를 뽑아야 하는 상황이야. 어린 왕은 누가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잘 모를 거 아니야. 그래서 대신들이 후보자 명단을 올려. 대신들은 명단에 누런 종이를 붙여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미리 정해 표시를 해뒀어. 그럼 왕은 이 이름 밑에 점만 찍으면 돼. 누런 종이로 표시해서 정사를 결정했다고 해서 이를 '황표정사'라고 불러.
"어린 왕을 우리가 잘 보좌하기 위해서 왕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내용들을 우리가 알아서 해야겠다, 그렇게 해서 나온 대표적인 형태가 황표정사라 해서, 이것을 김종서나 황보인과 같은 신하들이 주도를 해나가는 거죠."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이렇게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시면, 왕이 아무리 어려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게 말이 좀 있었어. 황표정사를 통해서 고명대신들의 권한이 엄청 강해졌거든. 인사권을 가지게 되니까.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종서. 문신이면서도 국방개척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야. 세종 때 함길도 도절제사로 파견된 김종서는 육진개척을 총지휘해서 두만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만들었어. 지금의 한반도 지도로 만든 인물이지. 몸집은 작은데 얼마나 기세가 대단했냐 하면, 별명이 '대호'. 큰 호랑이라 불렀어.
단종 즉위 후 김종서는 조선 최고의 실력자로 떠오르게 돼. 그런데 황표정사를 두고 '그럼 어린 왕은 그냥 허수아비 아니야? 김종서가 대신 권력을 휘두르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잖아.
"황표정사 자체는 군주를 보좌하기 위한 방법이 맞습니다. 국왕의 나이가 어렸다라는 것이고, 국가를 이끌어가는 과정에 대해서 김종서가 선택을 해야 되는 부분은 분명히 있잖아요. 김종서라는 존재가 보여줬던 삶이라는 것은, 책임 있고 정말 독실하게 국가를 이끌어가는 전형적인 훌륭한 선비의 모습, 거의 그대로예요. 그 정도로 훌륭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김종서의 황표정사가 권력을 뺏기 위함이다. 이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그렇다면 단종은 그냥 허수아비 왕이었나? 그렇진 않아. 대신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직접 처리하는 일도 적지 않았어. 8살 때부터 왕도 교육을 잘 받아왔잖아. 황표정사를 하는 와중에도 또박또박 의견을 내고 판단력도 뛰어났다고 해. 설령 대신들이 반대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뜻을 꺾지 않았대.
한 가지 일례가 있는데, 단종이 왕이 된 다음에 문종의 큰 비석을 세워야 되는 거야. 신하들이 돌을 채취해서 가장 큰 비석을 만들어서 위대한 업적을 기려야 된다고 했어. 그런데 단종이 반대해. "지금 한겨울인데 그 돌을 캐느라고 우리 백성들이 고생을 한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따뜻하면 해라"는 거야. 다시 신하들이 안 된다고 했지만, 단종은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애민정신,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야.
"어린 나이지만 단종도 이미 8살에 세손으로 책봉이 되어서 기본적으로 왕이 되는 수업도 많이 받았고. 또 스스로도 할아버지가 세종이고 아버지가 문종. 그런 영향력 속에서 왕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알고 나름대로 그 역할을 하려고 했던 점은 분명합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국가의 정책을 논하는 신하들과의 대화 장면을 보더라도, 고집도 있고 판단도 좀 분별하고 했기 때문에 상당히 좀 똘똘했다. 몇 년 있으면 내가 정무를 다스린다, 이 단계로 가고 있었어요."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 수양대군의 등장
하지만 이런 상황에 불만을 느낀 인물이 있었어. 바로 수양대군.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 훗날 세조가 되는 인물이야.
"신하들의 권력이 상당히 비대해지고 왕은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왕권을 약화시키면서 김종서와 같은 신하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뭔가 이제 우리 왕실이 나서야 된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나는 바로 잡아야 되겠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수양대군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실제 수양대군은 이렇게 생겼대.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 다방면에서 뛰어났다고 해. 특히 무인의 기질을 타고 났는데 13살 때 아버지 세종과 사냥을 나간 자리에서 7개의 화살로 사슴 7마리를 잡았대. 백발 백중이었지. 잡고 봤더니 전부 목을 관통했다고 전해져. 게다가 행정적인 능력도 뛰어났어. 세종의 명에 따라 형 문종과 함께 여러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거든.
"수양대군 본인은 사실 되게 대단한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유능함은 정말 뛰어나요. 뛰어났기 때문에 세종이 자신의 업적과 일에 참여를 많이 시켰고요. 대부분 다 유능했기 때문에 했던 거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하지만 그는 서열상 왕이 될 수 없었어. 모든 면에서 뛰어난 형이 있었기 때문이지. 형이 왕위에 오르면서 수양은 점차 권력에서 멀어지게 돼. 하지만 형이 죽고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점차 권력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야. 겉으로는 어린 조카를 위해 권력을 손에 쥐려는 간신배들을 처내야 한다 했지만, 속으로는 스스로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그가 놓지 못한 게 있죠. 욕망을 놓지 못한 거죠. 이 모든 것들을 다 무너뜨리더라도 난 왕이 되고 싶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당시 조선의 권력은 삼각 구도로 나뉘어. 단종을 보좌하며 고명대신들을 이끄는 김종서. 그 반대편에선 수양대군. 그리고 세 번째로 안평대군.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문종과 수양대군의 친동생이야. 그를 '삼절'이라고 불렀어. 시, 서, 화에 모두 능한 인물을 삼절이라고 해. 시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한마디로 최고의 아티스트였던 거지. 안평을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면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떠올랐어. 그런데 이 삼각 구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해. 김종서가 이끄는 고명대신들이 안평대군과 왕래하면서 친분을 다지는 거야. 김종서와 안평, 그들이 같은 편에 서게 되면서 큰 세력을 이루게 돼.
"수양이 무쪽이었다면 안평대군은 문쪽이에요. 시, 서, 화에 능했고 상당히 좀 부드러운 인물.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안평대군과 함께 교류하고 손을 잡는 그런 모습을 보였고, 수양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김종서뿐만 아니라 안평대군도 제거를 해야 되겠다라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 수양대군과 한명회
이들에 비하면 수양대군의 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야. 그때 수양대군의 최측근 인사였던 권람이 이런 제안을 해.
"대군저하, 모름지기 삶과 죽음을 맡길 만한 자 두어 사람을 얻으시어 언제 닥칠지 모를 사태에 대비하소서."
그 말에 수양은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이 심히 옳다. 헌데 그런 일을 맡길 만한 자가 누가 있느냐."
그러자 권람이 기다렸다는 듯 수양한테 한 사람을 추천해.
"한명회라는 자가 그럴 만하옵니다."
권람이 한명회를 추천한 거야.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개가 범상치 않고 포부도 잡지 않았으나. 시운이 어긋나 벼슬이 낮아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께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뜻이 있으시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 7월 28일-
권람의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바로 한명회를 만나게 돼. 그리고 만나자마자 푹 빠져. 한명회의 손을 덥석 잡고는 진작에 만나지 못한 걸 아쉬워했대.
"김종서를 중심으로 하는 김종서, 안평대군 세력 대 수양대군과의 충돌인데, 결국 수양대군 입장에서도 김종서에 맞먹을 수 있는 자기 사람을 심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때 바로 스카우트 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명회었습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수양이 현 상황에 대해 어찌하면 좋을지 묻자 한명회는 이렇게 말해.
"대군께서는 종실의 맏어른으로 명분이 있으니 성공하지 못할 리가 만무합니다. 결단해야 할 때 하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 하였으니 익히 생각해보소서."
"한명회가 붙게 되면서 완전히 바뀝니다. 수양대군과 권람과 한명회가 붙게 되면서부터는 굉장히 노골적인 유능한 권력 집단이 바뀌어 가게 되고요. 한명회의 어떤 모사와 천재적인 조직 능력도 있겠지만, 최고의 명문 거족들이 모여서 라인들을 활용하고, 조직화된 그런 포섭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도 같이 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한명회와의 만남 이후 수양은 결심하게 돼. 권력을 쥐고 있는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처내기로. 수양과 한명회의 만남. 어쩌면 이 만남이 조선의 역사를 크게 뒤바꾼 사건이지 않을까.
이후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사 신숙주를 포섭해. 그밖에도 용맹한 무인들을 끌어모으며 세를 키워가기 시작해.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을 맞게 돼.
1453년 10월 10일 새벽.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등 신복들을 불러 이렇게 말해.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다. 내가 무사 몇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에 가서 그를 벨 것이야."
마침내 수양대군이 칼을 빼든 거야.
"수양대군이 명분을 취한 거거든요. 어린 왕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부득이하게 나섰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그는 신복 무사들을 불러 활 쏘기를 하고 낮부터 술자리를 가져. 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라 다들 마음껏 즐겼어. 해가 지자 수양은 무사들을 불러 모으고는 거사를 치르겠다는 뜻을 밝혀. 무사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일부는 찬성했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많아. "이 일은 마땅히 조종에 먼저 알려야 합니다", "단종께 먼저 보고해야 됩니다" 라면서. 심지어 겁을 먹고 도망가는 일들도 있었대. 다급해진 수양대군이 어쩌면 좋을지 망설이자 한명희가 말해.
"길 옆에 집을 짓는 일도 3년 안에 이루지 못하는 법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큰 일은 어떠하겠습니까? 이미 정하였으니 의견이 나뉜다 하여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마침내 마음을 정해. 옷을 붙잡고 만류하는 자들을 뿌리치고는 벌떡 일어나.
"내 한몸에 종사가 달렸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말 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수하 몇 명만 거느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해.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어. 이제 되돌릴 수 없는 거야.
잠시 후 김종서의 집. 쉬고 있는 김종서에게 수양대군이 왔다는 소식이 전해져. 김종서는 "몇이나 데려왔더냐? 사람이 적으면 맞이하고 많으면 쏘거라"라고 말했어. 그러자 "적습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와. 그 말을 듣고 김종서가 밖으로 나와 수양대군을 맞이해.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해. 수양대군이 멀찍이 서서 다가오질 않아.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대감께 한 가지 일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김종서가 여러 번 들기를 청했지만 끝까지 거절해. 하는 수 없이 김종서가 앞으로 나왔어. 안 들어오니까. 그러자 수양이 말해.
"내 오는 길에 사모 뿔이 떨어져 잃어버렸지 뭡니까. 대감의 사모 뿔을 좀 빌립시다."
사모는 관복을 입을 때 쓰는 검은색 비단 모자를 말해. 그 뒤쪽에 달린 뿔을 빌려달라는 거야. 이 말에 김종서는 긴장을 풀고는 바로 자신의 사모 뿔을 건네줬어. 수양대군이 이어서 말해.
"또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러자 함께 온 시종이 김종서에게 편지를 건네줘. 근데 밤이잖아.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아가. 김종서가 편지를 들어 달빛에 비춰보던 그때였어. 수양대군이 시종에게 눈짓을 보내. 그러자 시종이 품에서 철퇴를 꺼내더니, 김종서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쳐. 그의 아들이 놀라서 쓰러진 김종서 위에 엎드리자, 수양을 따라 무사가 칼을 뽑더니 휘둘러. 이렇게 개유년 10월 10일 밤, 마침내 수양대군의 쿠데타가 시작된 거야.
▲ 계유정난
한편 단종은 그날도 경혜공주의 집에서 자고 있었어. 늦은 밤 숙부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야. 수양대군이 이렇게 말해.
"김종서가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일이 급하여 먼저 아뢰지 못하고 이미 베어 죽였습니다."
단종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부모님과 할아버지 다 돌아가시고 정말 믿었던 사람인데. 단종 실록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단종이 환관에게 명해 궁중에 술과 음식을 내려 수양대군 이하 여러 재상들을 먹였다."
숙부의 공을 치하했다는 거야. 하지만 훗날 문신 이정형이 쓴 동각잡기에는 전혀 다르게 적혀있어.
"왕이 나이가 어리므로 놀라 일어나며 '숙부 나를 살려주오' 하였다. 수양이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아니하니 신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하고. 곧 명패를 내어 모든 재상을 부르고 금군을 부서를 나누어 각 곳에 지키게 하고. 또 사람으로 세 겹 문을 만들어 한명회로 하여금 살생부를 가지고 문 안에 앉았다가. 재상들이 첫 문에 들어오면 따르는 하인을 떼게 하고, 둘째 문에 들어오면 이름이 살부에 있는 사람은 무사를 시켜 철퇴로 쳐 죽였는데. 황보인 및 이조판서 조극관 등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동각잡기-
단종이 두려움에 떨면서 수양의 협박을 따랐다는 거야. 흔히 정사라고 말하는 단종실록의 내용과 후대에 기록된 내용은 왜 다른 걸까. 조선왕조 실록은 왕이 재위하는 동안 쓰여지는 게 아니야. 왕이 사망한 후, 다음 왕의 신하들이 편찬하게 돼 있어. 단종실록은 세조의 신하들이 쓴 거야. 그래서 세조의 입장에서 미화된 게 많다고 해.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잘 가려서 판단해야겠지. 그 다음 부분은 실록의 내용도 거의 같아.
그날 밤 대신들은 왕명을 받고 급히 입궐했어.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한명회였어. 한명회는 살생부를 보고 살려야 할 자 죽여야 할 자를 가려냈다고 해. 그렇게 수양대군의 반대편에 섰던 인물들은 죽임을 당하게 돼. 수양의 칼바람이 몰아치던 그때였어. 죽은 줄 알았던 김종서가 정신을 차려.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던 거야.
"수양대군은 그때 김종서가 이미 사망한 것으로 판단을 하고. 바로 자신의 집으로 가서 병력들을 다시 지휘를 하게 되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이때 김종서가 죽지는 않아요. 부상을 입습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김종서가 다시 깨어나서 원구를 시켜 돈의문을 지키는 자에게 달려가 고하게 하기를, '내가 밤에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죽게 되었으니. 속히 의정부에 고하여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싸 가지고 와서 구제하게 하고. 또 속히 안평대군에게 고하고 내금위를 보내도록 주상께 아뢰라. 내가 나를 다치게 한 자를 잡으려 한다."
-단종실록 단종 1년 10월 10일
그렇게 김종서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여자 옷을 입고 가마에 탄 채 황급히 입궐하려고 했어. 궁 안에 알려서 사태를 바로잡고자 했던 거야.
"조정에 들어가서 내가 충분히 소명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혹은 응당 신하라 하면 이런 억울한 상황에서도 조정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해서 국왕이 풀게 해야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되게 강직하거나 고지식한 선비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하지만 도성문이 굳게 닫혀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 할 수 없이 몸을 숨긴 김종서는 수양의 무사들에게 발각돼서 결국 죽임을 당하게 돼. 그렇게 하룻밤만에 조선의 권력 지도가 완전히 바뀌었어.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해가 떴지만 전날과는 다른 세상이야. 이제 수양대군의 세상이 열린 거지. 계유년 10월 10일 밤에 일어난 이 사건을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해. 정난은 말 그대로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야. 하지만 실상은 권력을 잡기 위해 칼을 휘두른 수양대군의 쿠데타였어.
"정난은 사실은 그냥 '혼란스러움을 바로잡는다' 한자 뜻 그대로예요. 내가 국익의 결단을 해서 김종서 무리를 처단함을 통해서 나라를 바로세웠다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승자의 기록이거든요. 조금 불쾌하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계유정난 이튿날 단종은 교지를 내려.
"과인이 어리고 부덕한 소치로 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만났으니 마땅히 종친의 견고함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좌하게 해서 군국의 중한 일을 모두 위임하여 총괄해 다스리게 하여 내가 직접 정무를 볼 날을 기다릴 것이다."
-단종실록 단종 1년 10월 11일
숙부에게 정사의 모든 권한을 맡기겠다는 얘기야. 과연 단종의 진심이었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수양대군은 스스로 관직에 올라. 관직 이름이 아주 길어. 영의정 부사 영경연 서운관사 겸판이병조사. 영의정과 이조판서, 병조판서까지 겸직한 거야.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 겸 행안부 장관 겸 국방부 장관이야. 그냥 혼자 다 해먹겠다는 거지. 그리고 자신을 도운 이들을 공신으로 책봉해서 굵직한 벼슬을 내려. 이제 조정은 수양대군의 세력이 완전히 장악해버렸어. 이 얘기를 들으니까 생각나는 사건 있지 않나?
"우리 가까운 현대사에서 12.12 군사 쿠데타 이후에 기억하실 거예요. 전두환이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장, 중앙정보부장 서리, 사회정화위원장, 다 요직을 겸직을 해요. 그런 장면하고도 매우 유사하고."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전두환 씨도 또 노태우 씨도 결국은 한국의 민주화의 시간을 지연시키고 그로 인해서 대단히 부정부폐라든지 군사문화의 악패 같은 것들을 사회에 남기고 5.18 민주화운동 같은 인권유린이나 유혈사태같은 것들을 벌이면서 너무나 많은 피해를 남겼단 말이에요. 그 부분에서 똑같지는 않지만 사실은 수양대군도 비판받을 만합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무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하룻밤만에 권력을 쥐게 되는 과정.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 1979년 일어난 12.12 군사 쿠데타와 아주 흡사해. 이렇게 보면 역사는 반복되는 게 아닐까 싶어.
권력을 쥔 후에도 수양의 칼춤은 계속 됐어. 남아있는 김종서 일파를 모두 죽이고, 친동생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을 강화도로 귀향을 보내. 그리고 얼마 후 사약을 내려 죽이게 돼. 혈육도 죽이는 거야.
단종은 자신의 손발이 끊어져 나가는 걸 지켜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왕이면서도 뜻대로 할 수 없는 고립무원의 신세. 오히려 숙부가 언제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공포스러운 상황이야.
"김종서 같은 사람한테 휘둘린다고 했을 때 그때가 허수아비가 아니라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이후에 모든 권력을 집중했을 때 그때부터 사실은 허수아비 왕으로 이제 전락을 하게 됩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정책 결정 같은 것들은 다 수양대군이 할 수밖에 없고. 수양대군에게 정책 결정을 올리는 사람들은 다 수양대군의 측근들인 거죠. 이때부터는 사실은 단종은 살아있는 산송장과 다름없다. 죽을 날을 기다리는, 이런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 왕위에서 물러나다
이제 실질적인 조선의 왕은 수양대군이야. 결국 이듬해인 단종 3년 윤달 6월 11일. 단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해.
"이제 대임을 숙부에게 전해주고자 한다."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거야. 그때 그의 나이 열다섯.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의 일이었어.
"왕위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거. 우리가 이런 걸 선위라고 하는데. 그 바로 직전에 수양대군이 주도해가지고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또 혜빈 양씨, 그리고 단종의 자형이었던 정종. 이런 사람들이 다 '역모를 꾀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처벌해야 된다'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해요. 결과적으로 여기에 떠밀려서 공식적으로는 단종이 이들의 유배를 명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계속 왕으로 있는 한, 이 사람들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이런 판단까지 하는 거죠. 자신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의 희생은 불을 보듯 뻔하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방법은 내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금성대군은 어릴 적부터 단종을 아껴주던 삼촌이야. 혜빈 양씨는 아기 때부터 단종을 맡아 키워준 어머니와 다름없어. 명목상으로는 아직 왕이었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 이들을 귀향 보내라고 명할 수밖에 없는 거야. 자신이 왕위에 있는 한 숙부는 내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고 죽일 게 뻔해. 그들을 위해서라도 왕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거지.
단종이 옥새를 건네는 순간에 대해 실록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수양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사양했지만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받아들였다"라고. 이게 과연 진실일까?
그렇게 단종은 상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물러나고 수양은 마침내 왕위를 차지했어. 이제 그는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된 거야.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는 단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쳐내. 단종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혜빈 양씨, 풍수로 단종을 지키고자 했던 목효지도 이때 죽임을 당했다.
▲ 상왕복위운동
한편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분한 눈물을 삼키는 이들이 있었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세종이 키워낸 집현전 출신의 문관들. 이들은 김종서 일파가 숙청당할 때는 소리를 내지 않았어.
"딱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까 성삼문, 박팽년 등은 '아 이거 아니구나. 결국은 왕을 몰아내는구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려고 하는 거구나' 깨닫고 뒤늦게 반응을 하는 거거든요. 너무 늦은 거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왕이 되기 위해 조카를 내몰고 자신의 형제까지 죽이는 세조의 모습은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 이들에게 세조는 선왕의 유훈을 저버린 반역자. 자신들이 섬길 왕은 단종이라고 생각한 거지. 이들은 뜻을 같이하는 문관들과 함께 은밀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해. 목적은 단종을 다시 왕으로 모시는 거야. 상왕의 복위를 도모한 거야. 이들의 계획은 이랬어.
"6월 초하루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연회가 있을 것이오. 그때 세조를 쳐야만 합니다."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는 정해진 예식대로 진행하게 돼. 연회장에선 아무도 무기를 지닐 수가 없어. 단, 별운검이라 불리는 호위 무관들은 무기를 지닌 채 왕을 호위하도록 되어 있어.
"마침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무인이었던 유응부가 별운검이라 해서 특별 경호원으로 그 자리에 임명이 되요. 진짜 하늘이 주신 기회다 해서, 이때 세조와 세조의 세자인 의경세자를 암살하자."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그런데 거사가 다가올수록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늘 하늘의 변화를 살폈어. 그런데 밤하늘에 빛을 내는 별이 긴 꼬리를 달고 움직이는 게 목격돼. 이런 걸 '혜성'이라고 하지. 이 조선시대 때는 혜성이 보이면 자연재해나 변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얘기했거든. 그런데 5월 한 달에만 혜성이 나타났다고 기록된 게 11번이나 돼. 심지어 훤한 대낮에도 혜성이 보였다고 해.
"혜성이 나타났다. 어떤 별이 남쪽으로 흘렀는데 모양이 주먹만 하고 꼬리 길이가 1장이나 되었다."
-세조실록 세조 2년 5월 10일-
게다가 궁중 안에 음식을 만드는 사홍방에서, 시루가 혼자 울었다는 얘기도 떠돌아. 떡시루. 과연 이게 좋은 징조일까? 아니면 불길한 징조일까?
그러는 사이 6월 초하루 거사일이 다가왔어. 이제 곧 조선의 운명이 정해지는 거야.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사신을 맞이할 때는 어전 안이 좁으니, 별운검을 없애도록 하라."
갑자기 세조가 별운검을 들이지 말라고 명한 거야. 그렇게 되면 거사는 시작도 못하잖아. 명을 들은 성삼문은 즉시 아뢰.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은 정해진 예법에 따라야 하니 별운검을 없애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지만 세조는 명을 거두지 않았어. 알고 보니 별운검을 없앤 것 역시, 한명회의 책략이었다고 해. 미리 연회장을 점검하고 오더니 어떤 촉을 느꼈던 걸까, 바로 세조에게 아뢰.
"연회 장소가 좁고 찌는 듯이 더우니 별운검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세조에게 별운검을 없애라고 청한 거야. 결국 거사는 실행하기도 전에 무산되고 말아. 별운검으로 뽑혔던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해. 하지만 성삼문 등 다른 문관들은 신중했어.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하니 훗날을 기약하도록 합시다"라며. 그리고 이 선택은 최악의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고 말아.
연회가 끝난 다음날, 그날은 낮인데도 어두웠다고 해. 두 명의 인물이 입궐에서 세조를 만나. 그의 정체는 성균관에서 문관으로 있는 김질과 그의 장인이었어. 성삼문의 제안을 받고 함께 상왕복위를 도모하던 그는 거사가 미뤄지자 불안에 떨다가 세조에게 밀고 하기로 한 거야.
상왕 복위를 도모하던 이들은 모두 의금부로 끌려와. 세조는 직접 국문에 나서 먼저 성삼문에게 말해.
"너는 나를 안지가 가장 오래되었고, 나 또한 너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내가 친히 묻는 것이니 숨기지 말고 고하라."
그러고는 불에 달군 인두로 몸을 지지고 매질을 해서 뼈를 으스러뜨리는 등 고통스러운 고문이 가해져.
"친국을 하는 사이에서 성삼문이 신음 소리 하나 안 내면서 버텼다. '내가 이 싸움에선 졌지만 누가 올바른가를 따졌을 땐 내가 옳다' 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고통을 참아서 버틴 거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그 과정에서 성삼문이나 박팽년은 끝까지 저항을 하죠. 대표적인 게 당시 왕이잖아요 세조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나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조가 더 열받는 거예요. 너희가 그래도 내가 준 녹까지 받지 않았느냐고 했는데, 집에 가보니까 그 당시에 월급으로 받은 녹봉이 그대로 남아있더라. 하나도 손을 안 댔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세조를 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지. 세조는 박팽년에게도 이렇게 말해.
"너는 내게 장계를 올릴 때마다 나의 신하라 칭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박팽년이 답해.
"나으리께선 내가 보낸 장계들을 확인해보시오."
세조가 박팽년이 관찰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다시 들여다보더니 부르르 떨어.
이 글씨가 '신하신'이야. 장계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거든.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글씨가 좀 이상해. '신하신'이라는 글자에 획이 빠져있어. 그러면 '클거'자가 되거든.
'난 당신의 신하가 아니다. 나는 단종 임금의 신하다'라는 뜻이야. 박팽년은 한 번도 세조에게 자기 자신을 신하라고 칭한 적이 없었던 거야. 세조는 바로 명을 내려.
"간악한 역도의 무리를 거열형에 처하라."
거열형은 목과 팔, 다리에 줄을 묶어 소나 말이 끌면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야. 세조는 이들의 목을 잘라 내걸고, 나머지 육신은 팔도 각지에 흩어 놓으라고 명해. 세조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상상이 되지?
처형장으로 향하는 길. 성삼문은 한 편의 시를 읊었다고 해. 제목은 '절명시'.
"북소리가 목숨을 재촉하고 돌아보니 해가 지려하네. 저승에는 주막도 없다는데 오늘 밤은 누구 집에서 묵으려나."
이들은 죽는 순간까지 단종에 대한 충심을 꺾지 않았어. 훗날 이들은 '사육신'이라 불리게 돼.
세조는 이 사건을 가리켜 혜성이 나타나고 변이 일어났다 하여 '성변'이라고 표현했어. 이렇게 상왕 복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어. 세조는 이렇게 생각했어. '조카가 궁 안에 남아있는 한, 반역을 꾀하는 무리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단종을 유배시킬 것을 명해. 역모의 배후에 단종이 있었다는 죄목이었어.
"뒷수습을 해야 되잖아요. 이게 빌미가 돼서 반정이 일어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단종이라는 빌미를 남겨둔다? 이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단종은 상왕의 지휘마저 빼앗겨. 세조는 그를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냈어. 이제 단종은 더 이상 왕이 아니게 된 거야.
▲ 노산(魯山)
태조 3년 6월 노산군은 가마를 타고 유배길에 올라. 그의 나이 열일곱.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궁에서 쫓겨나게 된 거야. 한양의 동쪽 문을 나와서 청계천 돌다리를 건너기 전, 유배 행렬이 멈춰서. 이곳에서 노산군은 한 사람과 가슴 아픈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게 돼.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 왕위에 오른 뒤 혼인하게 된 두 사람이었어. 하지만 3년 만에 생이별을 하게 된 거야.
두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은 아주 짧았어. 송씨는 노산군의 옷 매무새를 만져주고는 떠나는 모습을 눈에 담아. 두 사람은 그 후로 평생 다시 만나지 못했어. 두 사람이 손을 놓게 된 돌다리는 영도교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있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갔다는 뜻이야.
송씨는 정업원이라는 비구니 사찰에서 지내게 돼. 그녀는 매일 새벽 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며 지아비를 위해 기도했다고 해. 사람들은 그 산을 가르쳐 동쪽을 바라본다. 이 뜻으로 '동망봉'이라고 불렀어.
노산군은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여주 이포나루에서 내려. 거기서부터 원주를 지나 영월까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700리길.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거야. '내가 다시 이 길에 돌아올 수는 없겠구나'. 유배를 떠나는 길은 매 순간이 고통이지 않았을까.
7일 후 노산군은 영월에 도착해. 그가 지내게 될 유배지가 바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나왔던 청령포야.
"여기가 단종 임금이 유배됐던 곳인가요? 맞습니다. 이 자리가 바로 단종 임금이 귀양 오셨다가 두 달을 사셨던 곳. 청령포 한문을 좀 보셔야 돼요. 푸른 청, 맑을 령, 물가 포를 쓰거든요. 글자마다 삼수변이 다 들어갑니다. 이 땅이 그렇게 생겼거든요. 삼면은 전부 강이고, 뒤에는 봉오리가 여섯 개인 육육봉이고. 배를 타야만 건너올 수 있는 천연 감옥 같은 곳. 관리하기가 좀 좋습니까? 누군가 이 강을 건너가는 것만 확인하면 기가 막히잖아요. 거기다 단종 임금 알아서 본인이 나올 수 있는 이런 곳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단종 임금이 유배되시기에는 가장 적합하지 않았나."
-이갑순, 문화해설사
강물은 어디론가 흘러가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흘러갈 수 없는 곳, 벗어날 수 없는 곳. 노산군도 이렇게 예감했을 거야. '내가 죽기 전에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겠구나'라고.
"이게 수순이 정해져 있습니다. 죄를 물어서 유배를 보내고 유배를 보낸 다음에 거기서 처리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처하게 된 거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노산군이 유배 생활 중 썼다고 전해지는 시가 하나 있어.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떠나온 뒤 외로운 그림자 하나 푸른 산 중 헤메누나. 밤마다 잠을 청해도 잠은 이룰 수 없고 해마다 한을 풀려 해도 한은 끝이 없네. 울음소리마저 끊긴 새벽 봉우리 달빛만 희고.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붉은 꽃이 지네. 하늘은 귀먹어서 슬픈 하소연 못 듣는데, 어찌하여 설움 많은 내 귀만 홀로 밝은고."
이 시의 제목은 '자규시'야. 자규는 두견새를 가리켜. 노산군은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두견새 소리를 들으며 비통한 눈물을 흘렸을 거야. 그런데 노산군의 비통한 울음소리를 들은 이가 있었어.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잖아요 단종이. 그러니까 단종이 평소에도 울적하게 지내고 때로는 울기도 하고 고함을 치고 이랬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날 고종실록에 따르면, 꿈에 사육신이 나온 거예요. 자기들의 억울한 사연 그리고 비탄함을 쏟아내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너무나 한스러운 마음에 나와서 막 통곡을 했대요. 그런데 그 소식을 호장 엄흥도가 듣고 달려온 거예요."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였어. 호장은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야.
"요즘으로 치면 아전이라고 하는데, 행정실장쯤 되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당연히 단종이 유배를 왔으니까 음식 공급이라든가 단종이 이렇게 머무시는 곳 관리도 하고.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단종을 접촉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단종하고 상당한 교분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여기 와서 묵은 지 오래되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이가 없었는데. 오늘 네가 찾아왔으니 그 정성이 참으로 기특하구나."
첫 만남 이후 엄흥도는 감시를 피해 밤마다 강을 헤엄쳐 건너와 노산군을 만났다고 해. 이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야. 사실 노산군의 유배 생활에 대해 더 이상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그러니까 영화는 실록이 다루지 않았던 빈칸을 채워넣는 거지. 하지만 외로운 유배지의 생활에서 엄흥도는 원통한 마음을 달래줄 유일한 인물이지 않았을까?
▲ 내 아들을 홀로 두지 마라
그리고 아직 어린 왕을 잊지 않은 사람이 있었어. 경상북도 순흥, 지금의 영주야. 이곳에서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이 있어. 그는 바로 금성대군.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로, 문종과 세조의 친동생이야. 그는 단종이 어릴 적에 가장 따랐던 삼촌이었어. 문종은 숨을 거두기 전 금성대군을 불러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해.
"부디 내 아들을 홀로 두지 마라."
그것은 임금의 명이 아니라 형의 부탁이었어. 수양의 세상이 된 후 금성대군은 형의 유언을 따르기로 해. 다른 대군들이 침묵할 때 어린 조카의 편에 선 거야. 그 결과 세조에 의해서 순흥으로 귀양을 와 있는 상태야. 그런 그가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 걸까.
"군사들을 모아 한양으로 치고 올라가면 능히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금성대군은 순흥 부사 이보흠 그리고 지역의 선비들과 뜻을 모아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이야.
"금성대군은 정말 수양대군 입장에서 보면 '야 쟤 진짜 왜 저래' 라고 할 정도로 집요하게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켜요. 그래서 여러 곳에 유배됐다가 순흥이라는 곳에 유배되었을 때, 순흥군수 이보흠이라는 인물하고 같이 힘을 모아서 무사들도 키우고 서울까지도 이렇게 진격을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밀고자가 생겨서 이게 미리 이제 누설이 되어서."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금성대군이 쓴 격문 한 장이 안동 감영에 들어가고 말아. 누군가 밀고를 한 거야. 이 소식은 즉시 한양에 있는 세조에게 알려져.
"'이유(금성대군)가 순흥에 있으면서 몰래 군소배와 결탁하여 불궤한 짓을 도모합니다' 하고 또한 이유가 준 명주 띠를 바쳐서 증거로 삼았다."
-세조실록 세조 3년 6월 27일-
결국 체포되어서 사약을 받게 돼.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금성대군 앞에 서. "임금이 내린 것이니 왕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하고 이 사약을 받으라" 세조가 있는 한양을 향해 절을 하라는 거야. 금성대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절을 올려. 그런데 한양 쪽이 아니라 북쪽을 향해서 절을 올려. 단종 쪽을 향해서.
"'나의 왕은 영월에 계신다' 하면서 영월을 향해 절을 하고 사약을 받았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이 이야기는 실록에는 적혀있지 않아. 오랜 세월 민담으로 전해져온 이야기야. "부디 내 아들을 홀로 두지 마라" 금성대군은 죽는 순간까지 형의 부탁을 지켰어.
그런데 세조의 분노는 금성대군의 죽음으로도 가라앉지 않았어. 역모와 관련된 인물들은 모두 죽임을 당해. 순흥의 죽계천이라고 있는데 이 죽계천이 온통 피로 물들어. 붉은 강물이 10리를 흘렀다고 해.
"그래서 죽계 그 위쪽에 그 마을 이름도 피끝마을이다. 그런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그 지역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는."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 승자의 기록
금성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은 영월에 있는 노산군에게도 전해져. 세조 3년 10월 21일,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 매어서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
-세조실록 세조 3년 10월 21일-
'졸하다', 대부 혹은 왕족이 죽었을 때 사용되는 말이야. 금성대군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장인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단종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서는 굉장히 단순하게 나와요. '스스로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우리는 예를 다해서 장사 지냈다. 진짜 기만적이죠. 왕실의 책임, 수양대군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간단하게 쓰게 된 거고요. 현재 강원도 일대에 남겨져 있는 민담들은 100% 타살이에요. 정확한 진실의 전달자는 여기서는 사료라기보다는 민담이에요. 강원도 일대에 남겨져 있는 신빙성 높은 민담들은 100% 보낸 관리에서 죽였다. 즉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라고 정확하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후대에 적힌 연려실기술에서는 노산군의 죽음을 이렇게 이야기해. 의금부도사 왕방연이라는 자가 세조가 내린 사약을 들고 찾아와. 하지만 차마 사약을 건네지 못하고 망설였다고 해. 그때 대신 나선 사람이 하나 있었어.
"통인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에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단종이 스스로 죽었다고 기록한 것은 세조실록뿐, 그 밖의 기록에서는 모두 타살로 기록돼 있어. 내용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일치하는 게 있거든.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내용이야. 음의일기라는 문헌에서는 이렇게 말해.
"노산이 영월에서 금성군의 실패를 듣고 자진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에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첩하는 붓장난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실록을 작성한 건 다음 대 왕의 신하들이야. 세조를 따르던 당시의 신하들은 왕이 조카를 죽였다는 내용을 차마 적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어차피 역사의 본질은 승자의 기록이야. 역사학자가 왜 필요하냐면 이 승자의 기록과 다른 야사의 기록들을 종합해서 정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은 무엇이냐. 그런 것들을 판단하는 게 아닐까.
백성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야. 한때 조선의 왕이었던 소년의 시신이 동강에 버려졌어. 그의 나이 불과 열일곱. 너무 어린 나이지. 이때가 음력 10월이니까 한겨울이야. 차가운 강물 위에 옥채가 둥둥 떠다니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물 위에 떠있어. 하지만 시신을 수습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해. 노산군은 역모죄로 죽은 거잖아. 자칫 엮이기라도 하면 나도 역모야.
그런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게 있었어. 어린 왕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이겠지. 영월 호장 엄흥도는 이른 새벽, 세 아들과 함께 집에서 나왔어. 단종의 시신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거야. 주위에서는 모두 그를 말렸어. 하지만 엄흥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해. "의로운 일을 하다가 죽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고.
노모를 위해 준비한 수의와 관을 짊어지고 동강으로 향해. 얼음장같이 차가운 강물에 들어가 단종의 옥체를 수습했어.
얼어붙은 시신을 펴서 관에 넣고는 지게에 지고 선산에 올라. 좋은 자리를 정해 장사를 지낸 엄흥도는 그 길로 세 아들과 함께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고 해. 세조의 눈밖에 났으니 죽을 짓을 한 거 아니야. 모여 있으면 안 되니까 피한 거야.
사실 엄흥도의 이름은 당대에 실록에는 남아있지 않아. 그의 이름은 60년이 흘러 중종 때에 처음으로 등장해.
"사람들 말이 '당초 노산군이 돌아갔을 때 온 고울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슬프고 가슴 아프게 여긴다 하였다."
-중종실록 중종 11년 12월 10일-
다시 시간이 흘러 선조 때, 한 관리가 임금의 명을 받고 노산군 묘에 제사를 지내러 영월로 가게 돼. 오랫동안 방치된 묘는 황폐해져 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잖아? 몰래 했으니까. 그런데 노산군의 묘에 도착해서는 깜짝 놀라. 묘로 이어지는 길도 잘 정리가 되어 있고,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었던 거야. 알고 보니 영월 백성들이 계속 돌봐왔던 거였어. 비통한 삶을 살다간 어린 왕을 백성들이 잊지 않고 있었던 거지.
▲ 단종(端宗)
이런 백성들의 바람이 전해진 걸까. 그 후 조선의 19대 임금 숙종은 마침내 어린 왕을 복권시키게 돼. 그리고 단종이라는 묘호를 내려. 정식으로 왕의 이름을 갖게 된 거야. 숙종은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밝혀.
"예를 지키고 의를 잡음을 '단(端)'이라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단종이라는 이름은 이때 지어진 거야.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241년이 지난 때의 일이었어.
단종이 복권되면서 역사는 다시 쓰여져. 부인 송 씨도 다시 정순왕후로 추숭됐어. 죽음으로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사육신도 충절의 상징으로 칭송을 받게 돼. 그리고 단종의 마지막을 지켜준 인물 엄흥도. 왕을 향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공조판서 벼슬을 받게 돼. 훗날 고종 황제는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하사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렸어.
"충의공, 엄흥도 충신의 정려각이죠. 엄흥도 충신이 3족을 멸한다는 위험 속에서도 장롱에다가 단종을 모셨기 때문에 그 충의를 높이 표시해서 이곳에 정려각을 세우게 됐습니다. 엄흥도 선생이 단종의 어의를 가지고 공주 동학사로 왔어요. 그곳에서 생육신 김시습을 만나서 함께 초혼제를 지내고 그리고 3년상을 지냈죠. 그 이야기가 우리 엄씨들 가문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엄홍용, 엄흥도 후손
단종과 그를 왕으로 따랐던 신하들은 한때 역모를 꾀했던 반역도라고 기록됐어. 비록 긴 시간이 흘렀지만 마침내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된 거지. 단종 사후 이제 569년이 지났어. 지금 사람들에게 단종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여기가 바로 단종 어소입니다. 어가라고 그러죠. 그 당시에는 이렇게 크질 않았어요. 아궁이의 불도 안 들이는 방 두 칸에 방 한 칸은 단종 임금이 사셨고 방 한 칸은 시녀 궁녀가 살았다더라. 지붕에 기와가 얹어있는 것이 참 신기하다. 얼마나 작은 초막이면 그렇게 기록이 됐겠습니까?"
"이 소나무가 이게 지금 단종 임금 어소를 향해서 절을 하고 있는 소나무다. 뭐 어떤 분들은 충절 소나무다. 그런데 요즘에는요. 제가 '엄흥도 소나무다' 이러면요. 꼭 나오는 말 있죠. '유해진 소나무'다. 지금은 아주 당연히 '왕사남' 때문에 '유해진 소나무입니다'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졌어요."
"주말에는 이 데크가 버글버글해요. 하루에 기본으로 6천 명 오시니까. 세상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어요. '<왕사람> 봤잖아요. 영월에 안 가면 큰일 나는 줄 알아요' 어머 이 말이요. 그렇게 고맙더라고요. 한 분이 '저요' 그러더니 '저는 여섯 번 봤어요' 이래요. 그랬더니 옆에 분이 손을 딱 들더니 '저는 일곱 번 봤어요' 이래요. 저는 그리고 많은 줄 알았죠. 이쪽 구석에 어떤 분이 손을 들더니 '저는 열한 번 봤어요' 이러는데 제가 속으로 '그렇게 볼 건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영월 사람들은 단종 임금이 그냥 임금이 아닙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좀 더 힘을 얻기 위해서 참배하고 나면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은, 이런 희망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영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갑순, 문화해설사
흔히 단종을 '비운의 왕'이라 부르잖아.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던 할아버지 할머니도 잃었어. 든든하게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도 세상을 일찍 떠나. 12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에 의해 모든 걸 잃은 채 유배지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어.
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단종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흔적을 찾고 그를 기억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어.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외롭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종은 그저 어리고 유약한 왕. 세조는 그를 대신해 왕위에 올라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배웠어. 하지만 지금은 그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지.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잖아. 그렇지만 이제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과정이 옳지 못했다는 걸 이제는 알잖아.
우리가 단종을 연민하고 세조에게 분노하는 이유.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약자가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그런 역사는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아닐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기억해줬으면 해.
조선 왕조 가장 비극적인 인물 '단종'···
평생 외로웠던 '단종'의 마지막 이야기 '조명'
가장 외로웠던 왕 단종, 하지만 더 이상 그는 외롭지 않다.
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역사 특집: 홍위, 노산, 단종 -왕의 이름을 찾아서-'라는 부제로 어린 왕의 마지막 이야기를 추적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하나인 단종. 그는 2대에 걸쳐 완벽한 왕의 혈통을 타고나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르나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빼앗겼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은 자신을 도운 이들은 정난공신으로 책봉하고 김종서 일파는 몰살, 안평대군은 귀양까지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단종은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단종은 열다섯의 나이에 자신이 왕으로 있는 한 자신의 사람들의 희생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에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된 수양대군. 그는 왕이 된 후 단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쳐냈다. 이에 어린 왕을 지키려는 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거사를 도모했다. 그런데 그러던 중 5월 한 달에만 11번 혜성이 나타나고 사옹방의 시루가 혼자 우는 등 기이한 징조가 나타났다. 그리고 결국 한명회의 책략으로 세조에 의해 거사는 무산되었다.
이에 거사를 준비하던 이들은 불안에 떨다가 세조에게 거사를 주도한 이들을 밀고했다. 세조는 직접 국문에 나섰다. 하지만 성삼문과 박팽년은 끝까지 저항했다. 이들은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에게 받은 녹봉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뒀다. 이에 세조는 이들에게 죄인의 사지와 머리를 말 소 수레 등에 묶어 각 방향으로 끌려가게 하여 찢어 죽이는 형벌인 거열형을 명했다.
죽는 순간까지 단종에 대한 충심을 꺾지 않은 이들은 훗날 사육신이라 불리었지만 당시 세조는 혜성이 나타나고 변이 일어났다 하여 성변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결국 단종의 유배를 명한 세조. 명분은 역모의 배후에 단종이 있었다는 죄목 때문이었다. 상왕의 지위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 더 이상 그는 왕이 아니었다.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고 아내와도 생이별을 하게 된 단종. 그리고 그는 청령포에서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왕을 잊지 않은 이가 있었다. 내 아들을 홀로 두지 말라던 문종의 말을 기억한 금성대군은 단종의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계획마저 들키고 사약을 받은 금성대군.
그는 사약을 받기 전 왕을 향해 절을 올리라는 명령에 단종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고 사약을 받으며 죽는 순간까지 형의 부탁을 지켜냈다.
세조실록에는 이후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라고 쓰여있다. 그러나 강원도에 남은 민담의 대부분은 100% 보낸 관리에 의해서 죽었다는 기록뿐이었다.
그리고 후대에 기록된 연려실기술에서 이야기하는 노산군의 죽음은 세조가 내린 사약을 들고 찾아온 의금부도사 왕방연을 이야기했다.
또한 "통인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단종이 스스로 죽었다고 기록된 것은 세조실록뿐 나머지에는 모두 타살로 기록되어 있고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일치하는 내용은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 이에 승자의 기록과 야사의 기록을 찾아 정말 진실에 가까운 것은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몫이었다.
한때 조선의 왕이었던 소년의 시신은 후에 동강에 버려졌다. 그리고 영월에서 그를 돌보았던 엄흥도는 다음 날 이른 새벽 세 아들과 집 밖을 나와 단종의 옥체를 수습하고 장사를 지낸 후 세 아들과 뿔뿔이 흩어졌다.
의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달게 받겠다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왕을 지켰던 것.
왕을 지킨 것은 엄흥도뿐만이 아니었다. 엄흥도가 떠난 후에도 영월 백성들은 노산의 묘를 정성스럽게 돌보았다.
그리고 단종은 조선 19대 임금 숙종에 의해 왕으로 복권되고 단종이라는 묘호가 내려졌다. 예를 지키고 의를 잡음을 단이라 하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 이는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241년이 지난 일이었다.
단종이 복권되며 역사는 다시 쓰이고 부인 송 씨도 다시 정순왕후로 추숭 되고 사육신은 충절의 상징으로 자리했다. 그리고 엄흥도는 공조판서 벼슬을 받고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하사 받았다.
단종 사후 569년, 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외로운 왕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 많은 이들이 그의 흔적을 찾고 그를 기억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에 다시는 그가 더 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약자가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역사는 더 이상 반복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올해 상장폐지 기업은 8월까지 30곳으로 이미 지난해 한 해를 넘어섰고, 거래소가 퇴출 문턱을 높이면서 밀려나는 기업은 더 불어날 전망이다.
회사는 시장에서 사라져도, 그 주식을 든 소액주주는 남는다.
주식을 팔 곳이 마땅치 않고 회사 정보마저 끊기면서 남겨진 주주의 재산과 알 권리는 방치된다.
본지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와 한국거래소 시세, 금융투자협회 장외시장 데이터를 직접 분석해 최근 5년여간 상장폐지된 115곳과 그곳에 남겨진 소액주주 210만 명의 처지를 짚어본다.
상장폐지 기업 115곳 전수 조사 1인당 174만원 물려…정리매매서 90% 증발 올해만 30곳 퇴출…작년 연간 규모 넘어서 주식 팔 장외 거래처 5곳뿐…3곳만 거래 중 공시도 중단…기업경영 정보 알길 없어
최근 5년 7개월간 유가증권·코스닥 시장에서 상장폐지된 기업 115곳에 남은 소액주주가 약 212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상폐기업의 소액주주 평가액은 3조7000억원으로, 소액주주 1인당 174만원이 물린 것으로 추산된다.
상폐 후 사업보고서를 한 차례도 제출하지 않은 기업은 3곳 중 1곳에 달했고,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제도권 장외시장에 편입된 기업은 5곳에 불과했다.
7일 본지가 전자공시시스템(DART)과 한국거래소 데이터를 통해 2021년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유가증권·코스닥 시장의 상폐 기업을 전수 추적한 결과 합병·이전상장·기업인수목적회사(스팩)·소멸·자진 상폐 등의 방법으로 회사가 스스로 시장을 떠난 경우를 제외하고 강제 퇴출된 기업은 115곳(유가증권 16곳·코스닥 99곳)으로 집계됐다.
상폐 기업은 2021년 20곳, 2022년 17곳, 2023년 9곳으로 줄었다가 2024년 15곳, 2025년 24곳으로 다시 증가 추세를 보였다.
올해는 8월까지 30곳으로 이미 지난해 연간 상폐 기업 수를 넘어섰다.
거래소가 상폐 절차 단축과 시가총액 요건 상향 등 퇴출 제도를 강화하면서 시장에서 밀려나는 기업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상폐 기업 115곳에 남은 소액주주는 211만9309명에 달했다.
같은 사람이 여러 종목을 겹쳐 보유한 경우 중복 집계됐다.
소액주주가 가장 많았던 곳은 이트론(14만2075명)이었고 이아이디(13만8370명), 스마트솔루션즈(12만3089명), 이화전기(9만6854명) 순이었다. 이화그룹 3사(이트론·이아이디·이화전기)에만 37만7299명이 남았다.
이들 기업의 시가총액은 거래정지 직전 총 5조6699억원이었고 이 가운데 소액주주 몫은 3조6933억원이었다. 한 명당 평균 174만원 규모다. 이들 주식의 평가액은 마지막 정리매매를 거치면서 3682억원으로 약 90% 줄었다. 평가액은 거래정지 직전 마지막 거래일과 정리매매 마지막 날의 거래소 종가에 소액주주 지분을 곱한 값으로, 실현된 손실이 아닌 시장 평가액이다.
회사 경영 상황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길은 상폐와 함께 빠르게 차단됐다.
115곳 중 상폐 후 사업보고서를 한 번도 내지 않은 회사는 40곳(34.8%)이나 됐다.
보고서 미제출 40곳 가운데 첫 제출 기한이 지난 곳도 23곳에 달했다. 자본시장법상 사업보고서 제출 의무는 파산·해산이나 주주 수 300인 미만 등의 면제 사유가 없으면 상폐 후에도 유지된다. 공시 깜깜이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회사가 스스로 낸 공시가 이어진 비율은 상폐 후 1년차 76.3%에서 3년차 62.8%로 떨어졌다.
상폐 이후 회사 명의 공시가 한 건도 없는 곳도 22곳에 이른다. 2021년 2월 상폐된 이매진아시아는 그해 3월 공시를 마지막으로 5년 5개월째 회사 명의 공시가 없다.
정보 공개가 끊긴 주식은 팔 길마저 좁았다.
115곳 중 상장폐지 후 제도권 장외시장인 K-OTC 상장폐지지정기업부에 지정돼 거래 기회를 얻은 회사는 5곳에 불과했다.
이 중 현재 거래가 가능한 곳은 3곳으로 파악된다.
아리온은 4년 가까이 거래정지된 끝에 정리매매 기회조차 없이 상폐됐다.
반면 파산·해산·청산 절차가 공시로 확인된 곳은 1곳에 그쳤다.
회사는 문을 닫지 않았는데, 주주가 주식을 팔 장외 거래 플롯폼이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금융감독원은 상폐 뒤에도 사업보고서를 낼 의무는 그대로 남는다고 봤다. 다만 상장사에 붙던 수시공시 의무는 거래소 소관이라 상폐와 함께 풀리고, 상폐 과정에서 대주주가 지분을 사들여 주주가 몇 명으로 줄면 아예 제출 대상에서 빠지기도 한다.
금감원 관계자는 "상폐와 상관없이 사업보고서를 내야 하는 법인은 당연히 내야 하지만, 여건이 안 돼서 못 내는 경우가 많다"며 "폐업한 회사는 돈이 없어 과징금을 물려도 소용이 없다 보니 증권을 못 찍게 하는 것으로 제재를 대신한다"고 설명했다.
수문 열자 초당 5500t “발전소 지켜라” 고립 속 처절한 사투 1984년 태풍 ‘준’ 영향 장대비 습격 50㎜/h 폭우 준공 11년 댐 속수무책 당시 소양댐 수문 개방한 신금철씨 만수위 203m 임박 수문 전부 개방 엎친데 덮친격 주변 삼키며 산사태 발전소 덮치고 오가는 길 모두 막혀 소양강댐 40여년 근무한 박명학씨 전두환 정권 ‘100일 작전’ 복구 완료 불가능 가능케 한 전문가들의 노력 “우여곡절 겪은, 세계 최고 명품댐”
1984년 9월, 수문을 열자 댐 안에 갇혀있던 물은 용솟음치며 주변 산을 덮쳤고 순식간에 산사태가 일어났다.
물은 더이상 고요하지도, 잠잠하지도 않았다.
사진은 1998년 수문을 개방한 소양강댐 모습.
시간당 50㎜씩 퍼붓는 비는 사람도, 댐도 버티기 어려웠다. 준공 11년이 된 소양강댐은 아슬아슬한 생존의 끈을 이어가고 있었다. 비가 언제까지 더 내릴 지 예측하기 어려웠던 그날. K-water 소양강댐지사 직원들은 8월 31일까지만 해도 이 비의 여파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지금 내리는 이 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 예상치 못한 복병 산사태
1984년 8월말부터 쏟아진 장대비는 태풍 ‘준’과 만나 세력을 키웠다. 서울은 이미 물바다가 됐고 K-water 소양강댐지사와 본사, 한강홍수통제소 간 격론 끝에 소양강댐 수문을 열기로 했다. 그때가 1984년 9월 1일이었다. 이미 이날 오전부터 화천, 춘천, 의암, 청평댐이 수문을 열었다.
신금철(84)씨는 당시 소양강댐 수문을 개방한 장본인이다. 1969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소양강댐 공사 때부터 현장을 지켰던 신금철씨는 1974년 K-water 소양강댐지사에 입사, 1998년까지 일했다. 최근 자택에서 만난 신금철씨는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연했다. 4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할 때 신금철씨의 목소리는 젊고 건강했던 40대로 돌아갔다.
1984년 대홍수는 소양강댐 안전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도시 곳곳이 물에 잠겼다.
소양강댐은 결국 수문을 열고 물을 방류했다.
이미 8월 말부터 내린 비로 소양강댐 수위는 만수위(203m)를 위협했다. 조금 더 지나면 댐이 터질 수도 있는 상황. 신금철씨는 1984년 9월 1일 오후 11시쯤 수문을 개방하기 위해 이동한 것으로 기억했다. 수문 개방은 자정이 다 돼서야 이뤄졌다고 했다. 5개 수문 중 3번, 2번, 4번, 1번, 5번 순차적으로 문을 열었다. 초당 5500t이 쏟아졌다.
소양강댐이 지어진 후 그렇게 많은 물이 순식간에 쏟아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신금철씨는 “댐이 터질 만큼 비가 왔고 댐 수위는 198m를 넘나들었다. 여수로를 다 열었지만 5500t이 나갈 때 1만2000t이 들어왔다. 도무지 수위가 줄어들지를 않았다”고 회고했다.
칠흑같이 어둡던 그날, 소양강댐에 갇혀있던 물은 신북 일대를 집어삼켰다. 폭발적으로 떨어진 물은 용솟음치면서 떠올랐고, 그대로 댐 주변 산을 치기 시작했다.
당시 소양강댐은 지금처럼 주변 정리가 잘 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신금철씨는 “소양강댐 제방길이가 530m다. 5500t이 순식간에 내려오면서 땅으로 꽂히니 물이 떠오르게 되고 바로 옆에 산을 쳤다”고 했다. 산사태는 직원들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수문을 열고 처음에는 산사태가 난 줄도 몰랐다. 발전소로 돌아가려는 데 길이 끊겼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헤집고 기어서 내려가니 그제서야 산사태가 났음을 깨달았다. 주변 산 역시 며칠 간 내린 장대비로 이미 물을 많이 먹은 상황. 거대한 물보라 앞에 산은 속수무책으로 스러져갔다.
문제는 산사태 이후다. 산사태로 물의 길이 막히면서 소양강댐에서 내려온 물은 그대로 발전소를 덮쳤다.
1984년 대홍수는 소양강댐 안전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도시 곳곳이 물에 잠겼다.
소양강댐은 결국 수문을 열고 물을 방류했다.
■ 삶과 죽음의 경계
발전소에 물이 차기 시작하자 신금철씨와 직원들은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매달렸다. 발전소 피해 만큼은 줄여야 했다. 변전소에서 자갈을 가져와 쌓았고 물이 새는 구멍 곳곳은 옷을 벗어 틀어막았다.
신금철씨는 “직원들이 울면서 물을 막았다.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고 했다. 얼굴에 흐르는 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소양강댐에서 쏟아져 내려온 물보라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포기가 안됐다고도 했다. 신금철씨는 “발전소는 우리한테 밥 먹고 사는 직장이다.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을 해봐야지 ‘위험하다, 도망가자’가 안됐다.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1984년 9월 3일, 비는 그쳤지만 K-water 소양강댐지사의 고립은 그 이후로도 계속됐다. 발전기가 물에 잠기면서 발전기에 묻은 기름이 떠다녔고 벽면 곳곳에 기름때가 묻었다. 이를 다 닦아내는 일도, 물에 잠긴 기계를 복구하는 것도 오롯이 직원들의 몫이었다.
소양강댐 지사 옆 사택에 남아있던 가족들은 이미 직원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몇 날 며칠을 눈물로 보냈다.
신금철씨는 “밥도 못 먹고 날짜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일을 했다. 일하다 지치면 좀 쉬고, 다시 기운내서 치우는 일의 반복”이라고 했다.
그 사이 신북 일대에서는 ‘댐이 무너져 모래자루로 막았다’, ‘댐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고립된 직원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1984년 대홍수는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다.
1984년 대홍수는 소양강댐 안전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도시 곳곳이 물에 잠겼다.
소양강댐은 결국 수문을 열고 물을 방류했다.
■ 100일 안에 복구하라
비가 그치면서 복구 작업이 본격화됐다. 소양강댐은 전기를 생산하는 다목적댐이다. 당시로서는 소양강댐에서 전기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 일어날 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었다.
당시 소양강댐은 우리나라 전력의 10%를 담당하고 있었다. 적은 양이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복구해야 했다. 이때부터 ‘100일 작전’이 시작됐다.
1980년 1월부터 2017년 6월30일까지 소양강댐에서 40여 년을 근무한 박명학(67)씨는 “당시 전두환 정권 차원에서 100일 안에 끝내야 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누군가는 복구에 200일을, 일본에서는 2년이 걸린다고 했던 복구다. 전국 댐에서 전문가들이 몰려들었다. 소양강댐은 100일을 며칠 앞둔 시점에 복구가 됐고, 정부에서 100만원 포상금을 받았다.
신금철씨는 “하여간에 다들 대단했다. 1984년 수문 개방부터 산사태, 발전소 복구는 소양강댐지사에서 근무했던 40여 년 간의 경험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박명학씨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금의 소양강댐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명품댐”이라고 했다. 소양강댐은 이렇게 반세기를 이어오고 있다.
12. 소양강댐 그리고 춘천
2023. 3. 27. 05:00
“마을 갈라놓고 지원마저 뚝…‘육지 속 섬’으로 전락 착잡” 당시 항의 조차 못하고 이주해 어린시적 추억들 모두 물 속으로 도로 끊겨 대중교통 불편 호소 마을이동 지원 줄어 쇠퇴 가속 춘천시·수자원공사 관심 절실 1984년 대홍수 이후 위력 확인 “소양강댐 터지면 국가적 재앙 수문 열자 땅 흔들…상처 남아”
춘천시민들에게 소양강댐은 애증이다. 동양 최대 규모의 사력댐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지만, 소양강댐은 춘천에 수많은 족쇄를 채웠다. 도로를 끊고 마을을 갈라놓은 댐이다. 댐이 들어선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댐을 바라보는 춘천의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다.
수몰민 권오신씨가 그린 품안2리 마을지도
■‘안동권씨’의 대이주
소양강댐이 들어서자 수몰민들은 이주 계획을 서둘렀다. 평생을 뿌리내리고 살아온 지역이었지만, 군사정권 당시 반항이나 반발, 항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정부의 말이 법’인 시절 얘기다. 춘천의 경우 동면과 북산면이 대상이 됐다. 월곡리와 품안 1리·품안2리·품걸리·신이리·평촌리·상걸리를 거쳐 청평 1리·청평2리·내평 1리·내평2리·부귀리·오항리·물로1리·물로2리·조교리·대동리·추전리·추곡리·대곡리·수산리 전체 혹은 일부가 물에 잠겼다.
권오신(71)씨 집안은 품안2리, 학교가 있는 동네였다. 권오신씨의 부친 안동권씨 34대손 권영한씨는 마을의 이장이었다. 마을 대소사는 물론이고 군수가 온다고 하면 몇 날 며칠을 환영 준비를 하느라 마을이 들썩였다. 아버지 심부름덕에 이 동네 저 동네 안 다닌 곳이 없었다. 소양강댐이 들어선다고 하니 안동권씨 집안들도 이주를 준비해야 했다. 종갓집인 권오심(67)씨 집안이 나섰다. 지금의 춘천교대 부근에 터를 잡으니 안동권씨들이 그 곳으로 모였다. 비록 고향은 물에 잠겼지만 그래도 가족은 같이 살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안동권씨들은 춘천교대를 중심으로 나름의 생계를 이어갔다.
고향을 떠난지 50년, 그리움은 여전하다. 권오신씨는 “북에서 나온 사람들은 판문점이라도 가서 제사를 지내지만 우리는 그런 게 없다. 가끔은 구글에 들어가서 그때 번지수를 쳐본다. 물 밖에 안 나온다”며 웃어보였다. 냇가에서 목욕하던 시절, 고기잡고 친구들과 놀던 기억, 겨울이 되면 판때기 두 개 이어붙여 썰매를 만들어 놀던 일들 모두 이제는 물 속에 잠겼다.
춘천 북산면에서 바라본 소양강댐.
깊은 물 속에 잠겨있는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실향민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교통오지로 전락한 마을
소양강댐은 마을을 오지로 만들었다. 춘천시 북산면에 거주하는 수몰민 이진구(71)씨는 소양강댐이 바라보이는 곳에 거처를 정했다. 가까이서라도 볼 수 있으면 아쉬움이 가실까 싶었지만, 소양강댐을 바라볼 때 마다 울렁이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진구씨는 “고향이 없어지고 추억이 사라지니 기가막힐 뿐”이라며 “춘천이 소양강댐 때문에 여러 규제를 받고 있는데 정부는 관심도 없다. 인근 원주만 보더라도 인구가 팍팍 느는데 춘천은 공장이 없으니 사람이 오지도 않는다. 나는 소양강댐이 큰 원인이라고 본다”고 했다.
더 큰 불편은 교통이다. 댐이 들어서고 물이차면서 사람들은 길을 잃었다. 버스는 고사하고 희망택시마저 시간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운전을 하려니 이번엔 좁고 울퉁불퉁한 길이 문제다. 이진구씨는 “교통량이 적으니 눈이 와도 염화칼슘을 가장 늦게 뿌린다”며 “‘육지의 섬’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주변 자연이 아름다우니 카페라도 만들어볼까 싶었지만 그마저도 사람이 와야 가능한 일이다. 면에서 받았다는 행정선은 이제 폐선이 됐다. 쓸 만한 배도 없고 이를 이용할 수 있는 젊은 사람도 이제는 마을에 없다. 이진구씨는 “처음 댐이 생기고 길이 제대로 없어 천상 배로 다니다보니 그때 배를 줬는데 그 다음부터는 지원이 제대로 안됐다”며 “옛날에 사람들이 많이 다닐 때는 큰 배로 사람들을 태우러 왔는데 이제는 작은 배로 온다”고 했다.
마을의 쇠퇴를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북산면의 유일한 학교인 추곡초등학교가 폐교하게 되면 이제 이 곳에 학교는 없다. 우체국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대로 마을이 기록조차 없이 사라질까 이진구씨는 애가 탄다. 이진구씨는 “이제라도 춘천시나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마을이 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오지가 된 마을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권오신씨 역시 “국책사업이니 소양강댐이 들어선 것은 뭐라고 할 수 없지만 횡성만하더라도 보면 횡성호수길 축제를 하고 있다”며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소양강댐 사람들은 뭐했나, 가방 끈이 짧아 신경을 못 썼나 아쉬울 뿐”이라고 했다. 소양강댐에 담겨 있는 물 29t은 수몰민의 한의 무게다.
춘천 북산면에 놓여 있는 작은 배들.
한 때는 주민들의 교통수단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폐선이 된 배들이 적지 않다.
■1984년 대홍수…그 후
1984년 8월 기록적인 대홍수를 기억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당시 강원도 소양호 관리사무소 관리계장을 맡았던 김완수(77)씨 역시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해 봄 소양호 관리사무소로 발령을 받은 후 맞은 첫 여름, 비가 기록적으로 왔다. 이미 수도권이 물바다가 됐으니 대통령은 소양강댐이 버텨주길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댐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했다. 김완수씨는 “당시 청와대에서 ‘(댐 문을 열지 않을)방법이 없겠느냐’고 했다”며 “댐이 터지면 서울인구 3분의 1이 죽는다고 했다. 댐이 터지면 서울까지 물이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당시로서는 18시간이었고, 그 시간 안에 서울 사람들이 빠져나가질 못하니 댐이 터지면 국가적인 재앙”이라고 했다. 결국 댐 문을 열었고, 1984년 대홍수는 춘천과 소양강댐에 적지 않은 생채기를 남겼다. 김완수씨는 “소양강댐 수문을 모두 열었을 때 땅이 흔들렸다”고 했다.
하지만 복구 후, 소양강댐은 다시한 번 유명세를 탔다. 소양강댐의 위력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이 버스를 대절해 춘천을 찾았고 지역 이미지를 위해 호객행위를 하던 상인들에게 서비스 교육을 했다. 김완수씨는 “대홍수가 지나가고 어느 날 별 16개가 동시에 등장했다. 육군사령관, 군단장, 사단장까지 별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이들에게 소양강댐에 대해 설명하고 안내해야 했다”고 했다.
오세현·이승은·정민엽
2023년 1월 2일부터 게재된 ‘소양강댐 준공 50주년 기념 소양강댐의 빛과 그림자’는 12편 ‘소양강댐 그리고 춘천’으로 마무리됩니다. 다음달부터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획취재 지원을 받아 ‘소양강댐 준공 50주년 기념 소양강댐의 빛과 그림자 2’를 연재, 또 다른 수몰지역인 인제와 양구를 소개하고 수리권을 비롯한 댐 관련 이슈를 점검합니다. 댐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도 소개합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가족같던 이웃과 마지막 식사, 서로 안녕 기원하며 생이별” 1960년대 현 북산면 일대 큰마을 면사무소·경찰서도 갖춘 내평리 댐 건설 소식에 자식부터 내보내 “국가사업, 그러려니 하는 마음” 삶의 터전 훼손되는 과정 지켜봐 사람 흔적 공사장 몇 곳이 전부 소양강댐 최대 피해자 ‘수몰민’ 3100여세대·1만8000여명 이주 산과 물만 덩그러니 남은 고향 모임 ‘산수회’ 수몰민 애환 담겨 “통일돼도 못가는 고향, 애틋해” 그리운 마음에 인근 거주하기도
내평리 명물이었던 출렁다리
소양강댐 건설로 인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수몰민이다. 댐 건설로 이들은 조상대대로 이어져 오던 터를 한 순간에 잃었다. 지난해 춘천시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73년 소양강댐 조성으로 6개 면·38개 지역이 수몰됐다. 이주민은 3153세대, 1만8546명으로 집계됐다. 춘천시(당시 춘성군), 양구군, 인제군 주민들이 고향을 잃었고, 춘천에 거주하는 수몰민만 현재 8800여 명에 이른다.
물 흐르는 굽이굽이, 그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었어요
민병희 전 강원도교육감
가리산, 소양강 있는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비단결 같은 곳이었죠
엄기석 북산면 물로리 출생
댐 건설은 순식간에 마을의 운명을 바꿔놨다. 1960년대 들어 지금의 북산면 일대, 그 중에서도 내평리는 들썩이기 시작했다. 댐이 들어서면 마을 대부분이 물에 잠기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물 속으로 사라졌지만 내평리는 그때만해도 꽤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면사무소가 들어섰고 경찰서도 있었다.
민병희 전 교육감도 대표적인 수몰민이다. 그가 다니던 내평초교는 그의 기억에 6개 학급이 꽉꽉찼을 정도로 학생들로 붐볐다. 내평리 뿐만 아니라 물로리, 부귀리 일대 학생들도 내평초를 다녔다. 민 전 교육감에게 내평리는 한 폭의 산수화였다. 그는 “굽이굽이 물 흐르는 경치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없었다”며 “춘천에서도 많이 찾는 관광지였는데 영상으로 찍어놓은 것도 없고 이제는 그저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라고 했다.
북산면 물로리 출생인 엄기석(70)씨 역시 내평리 일원을 “가리산이 있고 소양강이 있고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곳. 비단결 같은 곳”이라고 했다.
수몰 전 내평리 마을 전경.
물을 끼고 있는 곳이라 주변 강가는 내평리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어깨가 타서 살갗이 몇 번이나 벗겨지는 데도 아랑곳 않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미군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출렁다리는 마을의 명물이었다. 송판으로 밑을 덧대 줄로 연결한 다리는 처음 다니는 사람은 무서워서 제대로 다니지 못할 정도로 흔들렸다.
어느 날은 출렁다리를 배경으로 영화촬영이 한창이었다. 독립군이 다리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독립군 모습을 한 인형이 다리 아래로 떨어져 줄에 걸리면 스태프들이 인형을 다시 꺼내느라 고생하던 그 모습은 어린 엄기석씨 눈에는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엄기석씨는 “여주인공이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났는데 ‘세상에 저런 사람도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어렸을 때여도 그때의 추억은 지금도 선명하다”고 했다.
평화롭던 마을은 댐 건설에 술렁였다. 댐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을 어른들은 자식들부터 밖으로 내보냈다. 민병희 전 교육감 부친도 민 전 교육감을 춘천 시내 학교로 보냈다. 그 보다 더 윗세대 어른들은 “조상의 묘를 두고 갈 수 없다”고 버텼지만 나라에서 하는 일에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민병희 전 교육감은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의 일인데 하나의 국가사업이니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더 컸다”며 “만약 제가 조금 더 성장했다면 고향을 위해 적극 반대도 하고 그랬을 텐데 그때는 그냥 이 상황을 ‘수용’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마을이 사라지기 전까지 민 전 교육감은 방학 때마다 내평리를 찾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삶아주는 옥수수, 친구들과 강에 가서 고기잡았던 기억은 50여 년이 지나도 눈에 선하다. 다만, 그때 그 곳을 찾을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
수몰 전 내평리에 있던 면사무소.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마을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가족처럼 붙어 살던 이웃들은 마지막 식사자리를 갖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했다.
이후 그들은 춘천시내로, 신북으로, 서면으로 아니면 강원도를 벗어나 살 길을 마련해야 했다. 고향을 잃은 상실감은 생각보다 컸다. 민병희 전 교육감은 아버지를 “고향 그 자체”라고 기억했다. 그는 “아버지께서 고향 얘기를 많이 하신 정도가 아니라 그냥 고향 그 자체”라며 “고향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서 나와버렸으니 더 애석하셨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민 전 교육감 아버지 세대의 수몰민들은 모임 이름을 ‘산수회’로 지었다. 고향이 산하고 물만 남았다는 뜻이다. 수몰민의 애환이 담긴 이름이다.
수몰 전 내평리에 있던 우체국 전경.
삶의 터전이 훼손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도 고역이었다. 엄기석씨는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던 1972년을 잊을 수 없다. 그는 고교 졸업 후 친구들과 가리산으로 등산을 갔다. 어렸을 때는 하루가 멀다하고 찾은 가리산이지만 마을은 더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등산을 하면서 마을을 내려다 보니 내평리는 학교가 부서졌고 집들이 모두 철거됐다. 사람 흔적이라고는 공사장 주변 몇 곳이 전부였다. 엄기석씨는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잠긴다고 하니 스산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래도 고향의 마지막을 잠깐이나마 볼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고향을 떠나온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고향은 여전히 그리운 곳이다. 민병희 전 교육감은 퇴임 후 화천 간척리 일원에 집을 지었다. 이곳에서는 내평리가 있는 곳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몰 전 내평리 마을 전경. 공사가 시작되면서 마을이 헐리고 있다.
민 전 교육감은 “여기(간척리)에서 내평리는 직선거리로는 얼마 되지 않는다”며 “청평사를 넘으면 고향 내평인데 고향 땅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보면 ‘여기가 고향이었구나’ 한다”고 했다.
엄기석씨는 가끔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다. 엄기석씨는 “고향이 북한이면 통일이 되면 가볼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지 우리는 통일되는 것 보다 더 어렵다. 갈 수 가 없다. 마을 어귀에서 친구들하고 연 날리기 하고 겨울에는 산토끼 잡아먹던 그 곳이 이제는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고 했다.
7.내평국민학교
2023. 2. 20. 05:00
춘천 두 번째 생긴 국민학교 1977년 폐교 총 2000명 졸업 마을 대소사 운동장서 이뤄져 학교 운동회 동네잔치 방불 6·25 당시 건물 사라지기도 댐 건설 시작되며 쇠락 일로 1977년 졸업인원 6명 불과
"높이 솟은 가리산은 소양강에다 웅장하다 그 이름은 번영하도다/청록 속에 흘러가는 우리학교는 낙원 속에 솟아나와 초석이 되며/영구히 그 이름을 비추우나니 오-우리들의 자유의 학원/영구히 번저(져)나갈 내평 학교야/오-우리들의 자유의 낙원." - 내평국민학교 교가
유년기 ‘삶의 전부’ 학교, 추억보다 깊은 물 속에 잠겨
1962년 2월10일 치러진 내평국민학교 제35회 졸업식.
댐이 집어삼킨 마을. 학교라고 평온할 리 없었다. 내평국민학교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댐 건설로 인한 수몰까지 한국의 근현대사가 집약된 곳이다. 1906년 설립된 춘천초등학교(당시 춘천국민학교) 이후 춘천에서 두번째로 생긴 학교라고 하지만 정확한 설립 시기는 저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대부분 1920년 설립으로 알고 있지만 졸업생 기수를 따라올라가다 보면 1919년 설립이라는 의견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내평면은 물론이고 물로리, 부귀리 지역 아이들까지 다녔던 내평국민학교는 1977년 폐교 때까지 60여 년 간 졸업생 2000여명을 배출했다. 어느 해에는 학생 수가 많아 반을 나눠 수업을 진행해야 할 정도였다.
내평면 주민들에게 내평국민학교는 생활의 중심이었다. 주민들이 모이는 곳도 학교이고, 마을의 대소사도 모두 학교에서 치러졌다. 운동회는 그야말로 동네잔치였다. 먹을 게 귀하던 시절, 그나마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밤을 한솥 삶아 이웃과 나눠먹으며 웃고 즐겼던 기억은 60여년이 지나도 선명하다.
엄기석(71·내평국민학교 38회/학적부 기준 41회) 내평국민학교 총동문회장은 “운동회가 열렸다고 하면 내평면을 포함해서 부귀리, 물로리 주민들까지 함께 어울렸다”며 “계란도 귀했던 때라 밤을 머리에 이고 오던 학부모들이 많았다”고 했다.
1920년(혹은 1919년) 설립된 내평국민학교는 개교 30주년쯤 6·25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니 학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학교는 터만 남았지만 어떻게든 가르침은 계속 돼야 했다. 결국 인근 10리(4㎞) 떨어진 물로리 인근 밤나무 밑에 천막을 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전쟁 직후, 교사도 얼마 없던 터라 6학년 선배들이 1학년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도 허다했다. 최양대(78) 내평국민학교 전 총동문회장은 “전쟁이 끝나고 마을로 돌아오니 학교는 불에 탔고 1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녀야 했다”며 “6학년 형들이 1학년 아이들에게 받아쓰기도 알려주고 셈도 가르쳤다”고 했다. 무너진 학교는 1956년쯤 복구됐다.
내평국민학교 학생들이 연극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반 세기 전의 일이지만 학교 다닐 때의 추억을 떠올려 보면 언제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말썽을 피우는 학생들을 보다 못해 선생님이 책상 위에 놓인 어항을 밀쳐 금붕어가 교실에서 펄떡이던 일부터 뒷동산에 놀러 갔다가 벌에 쏘인 학생을 선생님이 둘러업고 헐레벌떡 산에서 내려오던 일까지 학교만 생각하면 70세 노인은 10대 소년이 된다.
엄기석 회장은 국민학교 때 생활을 뒤돌아 보면 잊히지 않는 일화가 있다. 위생관념이 지금같지 않았던 때라 양치질도 제대로 하지 않던 당시. 하루는 선생님이 강가로 애들을 불러 모았다. 모래로 이를 닦으라고 지시했다. 종례시간에 검사하겠다는 말도 함께. 모래가 씹혀 입 안이 얼얼했지만 군소리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모래로 입 안을 문지르다가 물장난을 치던 어느 학생이 물살에 휩쓸리고 말았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물살이 거세져 구할 수 없던 상황. 평소 하루에도 수십번씩 물 속으로 뛰어들어 수영이 몸에 익은 남자 아이들 몇이 나섰다. 사고는 막았지만 당시 선생님의 표정은 잊히지 않는다. 엄기석 회장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던 그 얼굴은 지금도 선명하다”고 했다.
내평국민학교 학생들이 1966년 5월 가을소풍을 떠났다
학교를 새로 짓고 10년 쯤 흘렀을까. 평화롭던 마을은 술렁였다. 마을을 갈아엎고 댐이 들어선다고 했다. 나라에서 하겠다는 일에 무조건 ‘순응’해야 했던 시절이었지만 동네는 어수선했다. 댐이 어디에 들어서느냐도 주민들에게는 관심이었다. 최대한 마을 수몰만은 막고 싶었다. 북산면을 지나 양구 위쪽으로 댐을 건설하면 수몰은 안 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소양강댐은 현재 위치에 들어서게 됐고 주민들의 염원은 이뤄지지 못했다. 최양대 전 회장은 “내평리를 지나서 양구를 막으면 마을을 지킬 수 있다는 얘기들도 했다”고 했다.
1968년 내평국민학교 가을운동회 당시 모습
댐 건설이 시작되면서 한 두 명씩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고 한 반 가득 들어차던 내평국민학교도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70년 졸업한 43기(학적부 기준 46기)는 내평국민학교에서 졸업식을 개최한 마지막 기수다. 이후 44기(학적부 기준 47기)는 북산면사무소에서 졸업식을 치러야 했다. 내평국민학교는 1977년 2월 16일 50회 졸업(학적부 기준 52회)을 끝으로 폐교했다. 당시 졸업인원 6명. 배출한 졸업생만 2000여명에 달하는 춘천 강북지역 최대 규모 학교의 마지막은 다소 서글펐다.
1977년 폐교한 내평국민학교 전경. 친절, 고운말쓰기 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학교가 없어지면서 기록도 이리저리로 옮겨다녀야 했다. 1977년 2월 50회 졸업 이후 학적부는 오항초교로 이관됐다. 오항초교마저 폐교되자 추곡초교에서 내평국민학교 학적부를 관리했다. 엄기석 회장은 “1시간길을 걸어다녀도 학교 다닐 때는 힘든 줄 몰랐다. 눈만 뜨면 학교가서 공부하고 놀았으니 당시로서는 삶의 전부”였다며 “물 속에 잠긴 학교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련하기만 하다”고 했다.
8. 내평국민학교 폐교 그 후
2023. 2. 27. 05:01
마을·학교 잠기며 기약없는 이별 유일한 뿌리 확인수단 북산면민회 세월 막지못해 그마저도 뿔뿔이 1998년 동창회 꾸리며 만남 재개 잊히지 않기 위해 자식도 동석해 “물 속에 다 잠겨서 그리움 더 커” 함께 배타고 학교 터 바라보기도 마음놓고 만날 장소없어 서글퍼
내평초 총동창회는 2019년 10월 19일 소양강댐과 옛 내평초교 일원 등에서 행사를 가졌다.
일흔 다 된 동창 100명 남짓 “그들만이 유일한 고향의 흔적”
최양대 전 총동창회장
소양강댐이 들어서자 학교는 문을 닫았고 주민들은 흩어졌다. 누군가는 인근 신북으로 간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인제로, 어느 집은 서울로 간다고 했다. 아예 저 멀리 부산에 터를 잡겠다고 다짐한 사람도 있었다. 일상을 마주하던 이웃들은 언제 만날지 모르는 기약없는 이별을 하게 됐다. 내평국민학교 졸업생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급속도로 학생 수가 줄던 학교는 1977년 결국 문을 닫았다. 1920년(혹은 1919년) 세워져 반세기 넘도록 내평리를 지켜오던 학교는 이제 댐 아래, 물 속에 잠겼다.
그래도 뿌리가 주는 힘은 대단했다. 비록 마을과 학교는 물 속에 잠겼지만 북산면, 내평리, 내평국민학교로 이어진 끈은 단단했다. 내평국민학교가 폐교된 이후 수몰민들은 북산면민회를 만들었다. 1년에 한 번씩 모임도 가졌다. 한 번 모일 때마다 내평리 뿐만 아니라 물로리, 추곡리 주민들까지 참여했다. 고향을 잃은 이들에게 북산면민회는 자신의 소속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모임도 20여 년이 흐르자 모임도 힘을 잃었다. 수몰 당시 50대, 60대였던 어르신들은 이미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결국 북산면민회는 각 학교 동창회로 나뉘어졌고 내평국민학교 역시 그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내평국민학교 총동창회가 만들어진 시기는 1998년 쯤이다. 당시 교직에 있던 최양대(78) 전 내평국민학교 총동창회장을 중심으로 몇몇이 나섰다. 최양대 전 회장은 “내평국민학교가 그 당시 춘천에서는 가장 오래됐고, 제일 큰 학교 중 하나였는데 수몰이 되고 나니 동창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며 “평소 연락하고 지내던 동창들을 중심으로 알음알음 연결이 됐고 각 기수에 한 두 명만 연결이 되면 ‘고구마 캐듯’ 동창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내평국민학교의 첫 동창회는 1998년 춘천 동원학교에서 치렀다. 20여 년 만에 열린 동창회였지만 300여 명이 모일 정도로 성황이었다. 내평국민학교 출신인 김재호(66) 신북농협 조합장은 “국민학교 때의 기억이 참 오래가는데 우리는 학교가 물 속에 다 잠겨서 보이지 않으니 그리움이 더 크다”고 했다. 내평국민학교 42회 이수자(66)씨 역시 “동창회가 열리면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다고 보면 된다”며 “고향 사람들을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물 위에서라도 학교를 보겠다는 마음에 총동창회 차원에서 배를 타고 내평 백민터 인근까지 두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2014년 방문 때는 130명이, 2019년 찾을 때는 93명이 동행했다.
배 위에서 보이지도 않은 물 아래를 바라보던 그 마음은 지금도 생생하다. 엄기석 내평국민학교 총동창회장은 “산 위치로 어렴풋이 ‘여기가 학교겠거니’, ‘여기가 그 친구 집이겠지’라고 돌아본 정도”라며 “그 근처라도 가보면 그리움이 가실까 싶었는데 오히려 더 간절해졌다”고 했다.
김재호 조합장 역시 “실향민들은 통일이 되면 집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우리같은 수몰민은 댐이 가로막고 있으니 어찌보면 처지가 더 하다”며 “배를 타고 보니 ‘이건 내가 죽어라 평생 살아도 내 고향, 아버지 고향 한 번 못 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행했던 이들 중에는 울컥해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내평국민학교의 소모임은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최근 춘천에서도 내평국민학교 42회 출신 춘천 소모임이 열렸다. 매월 13일마다 열리는데 이번 달에는 서로 바빠 23일에 모였단다. 서울에서도 내평국민학교 소모임이 있다고 했다. 이날 모인 사람은 모두 9명.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친구들만 만나면 철없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이병태(66)씨는 “올해가 우리 집이 이사 나온지 딱 51년 되는 해”라고 했다.
내평국민학교 42회 춘천모임이 최근 춘천의 한 음식점에서 열렸다.
이들에게 동창들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소양강댐 수몰민들에게 곁에 있는 동창들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향의 흔적이다. 김재호 조합장은 “내 밑으로 다섯기수 정도 더 있는데 그 친구들도 이제 환갑이 지났다”며 “나도 죽고, 후배들도 떠나고 나면 내평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동창회 할 때마다 일부러 자식을 데리고 오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의 뿌리를 확인하라고…”라고 했다.
소양강댐이 들어선 지 50년, 학교가 폐교된 지는 46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명, 300명씩 모이던 동창회는 이제 100명 안팎이 전부다. 이마저도 코로나19로 최근 몇 년간은 공식적인 행사를 갖지 못했다.
1. 내평국민학교 학생들의 봄소풍 모습.
2. 내평리 주민들이 강가에서 천렵을 즐기던 모습.
3. 북산면민 체육대회에서 공연한 내평국민학교 밴드부.
줄어가는 동문을 볼 때마다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수자(66)씨는 “우리가 일흔이 다 돼 가는데 환갑이 넘은 사람들이 동창회 총무를 맡고 있다. 100명도 훨씬 넘게 모였는데 이제 갈수록 참석 인원이 줄고 있다”고 했다. 이병태(66)씨는 동창들이 마음놓고 만날 수 있는 장소 하나 없는 게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이씨는 “다들 학교에서 총동창회를 하는데 우리는 학교가 없으니 매번 여기, 저기에서 모여야 되는 상황”이라며 “소양강댐 근처에 동창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장소라도 마련해줬으면 좋겠다. 물에 잠긴 곳을 바라보면서 밥이라도 같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내평국민학교 총동창회는 내달 임원회의를 갖고 올해 사업계획을 논의한다고 했다. 댐이 들어선 지 반세기. 학교가 잊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여전히 간절하다.
9. 추전국민학교 동문을 찾습니다
2023. 3. 6. 05:01
물에 잠길 고향 생각에 댐 폭파시키고 싶었던 어린 날 1953년 개교 1972년 폐교 4~5개 마을 아이들의 공간 소양강댐 건설 삶의 터전 상실 정부 보상금에 마을 분란도 본지 기사로 추전국 동문 모임 잠긴 고향 배경 어머니 사진 촬영 이주 후 타향살이 설움 토로 아름드리 소나무 숲 소풍 추억 고향 이야기 오랜만에 동심으로
사명산 아래 마을들 구심점
소양강댐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사라지고 주민들이 흩어진 일들은 강원도내 곳곳에서 일어났다. 춘천 북산면 추전리 역시 마찬가지다. 수몰되기 전 38선 다리와 사명산 아래 자리잡던 곳. 지금도 그 곳 주민들은 아름답고 소박한 동네 모습이 생생하다. 그중에서도 추전국민학교는 주민들을 한 데 모으는 구심점이었다. 주민들의 기억으로는 추전국민학교는 내평국민학교보다 30년 후, 1953년에 문을 열었다. 추전리, 대곡리, 수인리, 추곡리 인근 4~5개 지역 아이들이 다니던 곳이다. 생활권으로 분류하자면 춘성군보다는 양구와 더 가까웠다.
수몰 후 50년, 추전국민학교 동문들이 한 데 모였다. 마을이 물에 잠긴 이후 이렇게 다 모이는 데만 반세기가 걸렸다. 강원도민일보가 연재하는 ‘소양강댐 준공 50주년 빛과 그림자’를 보고 현해숙(65)씨를 중심으로 동문들이 서로서로 다리를 놨다. 박창선(63)·박창배(71)·함수옥(70)·최수복(70)·양주순(67)·정영준(62)·강석철(65)씨가 지난 3일 춘천에서 만났다. 이제는 노년에 접어든 나이지만 서로를 알아보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수복씨는 “고향 사람 만난다니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며 “신랑 처음 볼 때 보다 더 설렜다”고 했다.
준비도 못한채 고향 떠나
추전리와 대곡리는 6·25 전쟁 당시 격전지였다. 야산에 가면 포탄이 즐비했다. 장마라도 나면 탄들이 물에 떠내려 오기도 했고 마을 어른들 중에는 포탄으로 고기를 잡다가 팔을 잃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입술이 보라색이 되도록 진달래꽃을 먹던 일, 진달래꽃을 먹어야했는데 철쭉을 잘 못 먹어 죽을 뻔한 일을 회상하며 이들은 금세 50년 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도 물에 잠긴 고향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저릿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댐 건설 계획에 순박했던 시골 사람들은 준비도 못하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주민들은 정보가 없으니 추전국민학교 교사들이 집 구하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정영준씨는 “마을이 수몰이 되니 어른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때 성남으로 가자는 얘기도 나왔는데 결국에는 신북읍 샘밭이나 화천, 춘천으로 터를 옮겼다”고 했다. 정씨는 사력댐이라 터트려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린 마음에 ‘소양강댐을 폭파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1953년 문을 연 추전국민학교는 19회 졸업을 끝으로 1972년에 문을 닫았다. 소양강댐이 준공되기 1년 전이다.
집성촌 해체 가장 안타까워
소양강댐은 집성촌의 혈연관계를 모두 가로막았다. 강석철씨는 “집성촌 혈연관계가 파괴됐다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며 “이제는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알아보지도 못하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강씨의 아버지는 작고 전까지 고향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어머니는 고향이 보이는 곳까지는 가봤지만 그때는 이미 치매를 앓고 있어 물에 잠긴 고향 땅을 바라봐도 알아보지를 못했다. 정영준씨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물에 잠긴 고향이 보이는 곳에 가서 사진을 찍어드렸다. 그리고 그 사진은 어머니의 영정사진이 됐다.
추전국민학교 동문들이 학교를 떠난지 50여년 만에 만났다.
왼쪽부터 강석철, 박창선, 박창배, 함수옥, 최수복, 양주순, 정영준, 현해숙씨.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동심으로 돌아갔다.
정부에서 보상금을 주기는 했지만 타향살이가 쉽지는 않았다. 현해숙씨는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갑자기 돈이 생기니 그 돈으로 사업을 하겠다던 사람들은 다 망했다”며 “보상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고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니 우왕좌왕했다”고 회고했다. 고향이 물에 잠긴 값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몇 푼 있는 돈으로 마을은 분란을 겪기도 했다.
강석철씨는 “그때 돈으로 280만원을 받았는데 거간꾼만 13명이 들러붙었다”고 했고 현해숙씨 역시 “집에 사람들이 찾아와 어머니가 나가라고 막대기를 휘두르며 쫓아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고향 없는 설움 지금도 마찬가지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경험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정영준씨는 지금 살던 아파트에서만 30년을 살고 있다. 정씨는 “다들 어떻게 그렇게(오래) 사느냐고 물어보는데 아마 어릴 때 기억으로 이사 가는 데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강석철씨도 “어디를 가던 타향살이었다”며 “그때는 텃세가 더 강했고 타향살이 설움이 만만치 않았다. 1세대가 희생을 했고 그걸 보고 자란 우리 2세대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다”고 회고했다.
고향이 없다는 설움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부라도 남아있는 다른 지역과 달리 추전리는 마을 전체가 댐 아래에 잠겨있다. 이제 추전리를 기억하는 이들은 지역에서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박창배씨는 “몇해 전 소양강댐이 너무 가물어서 살던 집이 나왔다고 해 가보니까 잠겼던 어른들 산소부터 이웃들 집까지 다 보였다”면서도 “그런데 정작 내 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내 집이 보이려면 댐 물이 다 빠져야 된다. 우리가 살던 곳은 댐 중에서도 가장 밑”이라고 했다. 현해숙씨는 지금도 1년에 한 두번씩 고향 인근을 찾는다. 물도 만져보고 물에 발도 담가본다. 현씨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고향과의 끈이다. 정영준씨도 지금도 고향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추곡약수터를 돌아 옛 길로 다닌다.
강원도민일보 기사로 재회 기대
이제는 50년 간 끊어진 인연을 다시 이어가려 한다. 박창선씨가 지금도 수인리에 살고 있으니 이날 모인 동문들은 회비를 모아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로 했다. 최수복씨는 “추전국민학교에서 배를 타고 가다보면 맨 위에 소나무가 있는데 거기로 소풍을 많이 갔다. 애들 5명이 안아야 나무 한 바퀴가 둘러질 정도로 컸는데 아름답던 그 곳이 너무 그립다”고 했다. 추곡국민학교 다른 동문들의 연락도 기다린다.
현해숙씨는 “강원도민일보 기사를 보고 연락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며 “박광근, 박인애가 기사를 보고 신문사로 연락을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수복씨 역시 “살아계신 선생님들도 꼭 한 번 뵙고 싶다”고 했다.
10. 소양강댐 붕괴론의 서막, 1984년 대홍수(상)
2023. 3. 13. 05:01
“댐 수위 200m 넘으면 다 나가라, 나 죽으면 비석이나…” 집중폭우로 침수 피해 심각 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상황 준공 11년 만에 붕괴 위기 수도권 방어 최후의 보루로 소양강댐 직원 고립 밤샘 근무 “힘든 상황 악에 받쳐 일해… 유입량 감소 하늘이 도왔다”
동양 최대 규모의 사력댐은 준공 11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1984년 8월 말에서 9월 초까지 내린 중부지역의 집중호우는 소양강댐의 안전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비가 내렸고, 상류부터 흘러온 물은 소양강댐의 계획홍수위 198m를 넘나들었다. 댐 만수위는 203m. 물이 댐을 넘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콘크리트 댐은 물이 넘치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사력댐은 얘기가 다르다. 모래와 자갈을 쌓아 만든 터라 댐이 터질 수도 있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소양강댐 사수에 나섰다. 이미 서울과 한강유역의 침수도 심각한 상태. 춘천권에선 “소양강댐이 무너질 수도 있다”며 술렁였다. 춘천시민들은 통제된 정보 속에 아무 것도 모른 채 며칠 밤을 새워야했다. 그 살벌했던 1984년 늦여름으로 돌아가본다.
1984년 소양강댐 수문 개방 당시 소양강댐 지사 정문 앞 모습. 바로 옆 도로까지 물이 차 있다.
■ 서울을 사수하라
소양강댐은 200년 빈도의 홍수에 맞춰져 설계됐다. 준공 당시만 해도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예측은 불과 11년 만에 여지없이 깨졌다. 그 전조는 준공 5년 후 발생했다. 소양강댐은 1978년 8월 28일 오후 4시 처음으로 수문을 열었다. 당시 늦은 장마로 댐 수위가 188.32m까지 오르자 댐 관리소에서 높이 100m, 길이 13m의 수문 5개를 열어 10분 동안 25만5000t의 물을 방류했다. 춘천학연구소가 펴낸 ‘춘천인 증언록 댐과 춘천’을 보면 ‘수문 밑 시멘트 바닥의 낙차 지점에서 30m 높이의 물기둥이 치솟았고 100m의 포물선이 그려지자 무지개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소양강댐의 본격적인 위기는 준공 11년만에 닥쳤다. 1984년 8월 말 이미 중부지역에는 며칠째 호우가 내린 상태였다. 여기에 태풍 ‘준’(1984년 8월28일~8월31일)이 덮치면서 빗줄기는 위협적으로 변했다. 시간 당 50㎜의 비를 뿌렸다. 당시 일 최다강수량을 보면 속초 314.2㎜, 부산 246.5㎜, 울산 233.2㎜, 홍천 215.9㎜, 강릉 204.5㎜에 달했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1984년 9월1일~3일까지 강원산간에 폭우가 집중됐다. 소양강댐으로는 설악산과 인제, 양구, 홍천 일대에서 물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춘천을 포함해 소양강댐 상류지역은 8월 말 일주일 동안 200㎜가 넘는 비가 끊이지 않고 내렸다.
운명의 9월1일, 인제 상류지역에 하루동안 275.8㎜, 춘천은 260.0㎜의 비가 내렸다. 2일에도 인제는 127.1㎜, 춘천은 103.1㎜의 비가 또 쏟아졌다. 이틀간 내린 폭우로 인해 소양강댐은 한계치를 향해 가고 있었다.
1984년 8월31일부터 9월4일까지 내린 집중폭우로 서울 대홍수가 발생했다.
한강물이 역류해 건물 2만채가 침수되고 9만명이 긴급대피했다.
전국에서 사망 189명, 실종 150명, 부상 103명, 재산피해 2502억원, 이재민 23만명이 발생했다.
사진은 서울 성내동 일대가 물에 잠겨있는 모습.
당시로서는 1904년 중앙기상대가 생긴 이후 최고 기록이고 1945년 해방 이후 세번째 대홍수였다. 1984년 대홍수로 재산 피해만 2000억원. 서울을 중심으로 주택 2만채가 침수됐고 9만명이 대피했다. 강원과 서울, 경기지역에서 19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서울 정도로 퍼붓는 비에 한국수자원공사 소양강댐지사는 며칠째 비상근무를 해야 했다. 당시 기능직 6급이었던 박명학(67)씨도 그 중 한 명 이었다. 박명학씨는 1980년 1월부터 2017년 6월30일까지 소양강댐에서 40여 년을 근무했다. 1984년 집중호우 때도 현장을 지켰다. 지난 11일 춘천 신북읍에서 만난 박명학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1980년대 당시만해도 제대로 된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다. 직원들이 현장에 나가서 수동으로 풍선을 나무에 묶어서 댐 수위를 예측하던 때였다.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댐 수위가 190m를 넘어서면 방류를 해 수위를 낮춰야 했다. 소양강댐이 문을 열면 서울을 비롯한 한강 하류 지역이 초토화 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소양강댐 수문 개방 여부는 한국수자원공사 본사와 소양강댐 지사, 한강홍수통제소가 협의해 결정한다.
이미 서울도 물바다가 된 상황에서 소양강댐은 수도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소양강댐 정상에는 이미 물이 차 넘실거렸지만 쉽게 수문 개방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소양강댐에서 최대한 막아보라”고 지시했다. 박명학씨는 “서울에 물이 차니까 ‘소양강댐에서 최대한 좀 막아보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박명학씨
■ “발전소, 포기하겠습니다”
하지만 막을 수 있는 비가 아니었다. 이미 도로는 끊겼고 인제쪽 상류 댐 수위를 살피러 간 직원들은 길이 막혀 홍천에서 고립됐다. 더 큰 문제는 발전소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물이 들어오는 곳을 막아봤지만 몰아치는 물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댐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박명학씨는 “그때 댐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콘크리트 댐이야 물이 월류(越流)하는 정도지만 모래와 자갈을 쌓아 올린 사력댐인 소양강댐은 댐이 터질 수도 있었다. 소양강댐 저수량만 29억t. 소양강댐이 무너지면 63빌딩 63층 중 45층까지 물이 차고 춘천의 경우 봉의산 도청 꼭대기만 살아남는 정도라고 알려져있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소양강댐지사와 한강홍수통제소 간 고성이 오갔다. “책임질 수 있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한국수자원공사 본사와 전화했다. 소양강댐지사는 “발전소, 포기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상황을 파악한 간부진이 “다 열어라”라고 지시했다.
1984년 9월 1일 오전부터 화천, 춘천, 의암, 청평댐이 수문을 열었고 소양강댐도 방류를 시작했다. 당시 댐 수위는 198m. 소양강댐 만수위 203m를 불과 5m 남겨둔 시점이었다.
수문을 열어도 수위는 내려가지 않았다. 초당 5500t을 내보내지만 상류에서 들어오는 물은 1만2000t에 달했다. 나가는 양보다 들어오는 양이 더 많았다. 이미 며칠 째 고립됐던 소양강댐지사 직원들은 마지막을 준비했다. 비상로로 식량을 조달받기도 했지만 생라면을 부셔 먹으며 버텼다. 덮쳐오는 물을 막으려 변전소 밑에 있는 자갈을 쌀 포대에 담아 쌓았는데 급한 마음에 무거운 줄도 모르고 쌀 포대를 날랐다. 나중에 비가 그치고 나니 성인 남성 둘이서 들기 버거울 정도의 무게였다.
박명학씨는 “악에 받쳐 일을 하다 보니 무거운 줄도 몰랐다”며 “그때 허리를 다친 직원들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전기는 끊긴지 오래, 한전에서 긴급 조치를 한 뒤에야 겨우 전기를 쓸 수 있었다.
당시 박명학씨와 같이 일하던 부장은 직원들에게 “댐 수위가 200m를 넘기면 다 나가라. 나 혼자 지키겠다. 내가 죽으면 비석이나 세워달라”고 했다. 4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박명학씨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박 씨는 “이 때만 생각하면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며 “정말 너무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하늘이 도왔을까. 댐 수위는 198m에서 더이상 올라가지 않았고, 비가 멈췄다. 댐 유입량과 방류량도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1984년 9월 3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