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대한 호랑이 형상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힘차게 뻗어 나온 '꼬리'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에서 출발해 호미곶 해맞이광장까지 이어지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전국의 트레커들이 죽기 전에 반드시 걸어봐야 할 성지로 손꼽히는 대한민국 대표 힐링로드 입니다.
영일만을 끼고 펼쳐진 총연장 58km의 거대한 해안길 중, 탐방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핵심 4개 코스(25km)는 최근 포항시가 총 12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대대적인 정비 공사를 완료했습니다.
이번 정비 사업에는 특히 2코스 선바우길 구간에는 약 1.3km 길이의 데크로드가 새롭게 조성되었습니다. 기존의 노후화된 구조물을 전면 교체하고 절벽과 암반 구간의 안전시설을 보강해 더욱 넓고 안전해진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의 코스별 매력과 핵심 스팟을 안내해 드립니다.
포항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관람 정보 요약
소재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호미로 2790번 길 20-18
이용 시간: 상시 개방 (※ 단, 태풍·풍랑 등 기상특보 발령 시 안전을 위해 즉시 출입 통제)
이용 요금: 전 구간 입장료 전면 무료
운영 형태: 연중무휴 상시 운영
편의 인프라: 각 코스별 거점 포인트마다 전용 주차장 및 공중화장실 완비
종합 문의: 포항시청 그린웨이추진과 (054-270-3203) / 포항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참조
3코스 진입 시 신발 선택 및 환경 보호 조언: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1, 2, 4코스의 경우 평탄한 데크길과 고운 모래길 위주로 되어 있어 가벼운 운동화로도 무리 없이 통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3코스 구룡소길 구간은 험한 바윗길과 숲길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발목을 안전하게 잡아주는 트레킹화나 등산화를 필수로 착용하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한 최근 환경을 생각하며 조깅과 쓰레기 줍기를 겸하는 '플로깅' 코스로도 각광받고 있는 만큼, 가방에 작은 쓰레기봉투를 준비해 가시면 더욱 뜻깊은 웰니스 트레킹을 완성하실 수 있습니다.
파도 소리가 걸음마다 밀려들고, 수평선 너머 붉게 피어오르는 일출과 일몰의 대서사시를 온전히 내어주는 포항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이번 주말에는 빌딩 숲 가득한 도심을 벗어나, 수억 년의 세월이 빚어낸 기암괴석과 은빛 파도가 일렁이는 호랑이 꼬리의 성지로 시원한 여정을 떠나보세요.
새롭게 정비된 데크길 위를 걸으며 바다 위를 유영하듯 사색에 잠겨보고, 동해 특유의 청정한 절경 속에서 나만의 속도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일상의 묵은 스트레스는 시원하게 비워내고 대자연이 건네는 기분 좋은 활력과 위로를 마음속 가득 채워올 수 있습니다.
[1코스: 연오랑세오녀길] 설화의 자취를 따라 걷는 평온한 입문 코스
코스 스펙: 총길이 6.1km / 소요 시간 약 1시간 30분
이동 경로: 청림운동장 ➔ 도구해수욕장 ➔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포항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1코스 풍경/출처:포항시 공식블로그
핵심 명소: 삼국유사에 기록된 연오랑과 세오녀의 신화를 배경으로 광활한 동해 바다를 감상하기 좋은 길입니다. 경사가 완만하고 해안선을 따라 산책로가 곧게 뻗어 있어,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나 트레킹 입문자들이 첫걸음을 떼기에 가장 훌륭합니다.
도구해수욕장의 고운 모래를 밟으며 마음의 평온을 찾고, 종착점인 테마공원에서 영일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정자인 '일월대'에 오르는 것이 이 코스의 백미입니다.
[2코스: 선바우길] 바다 위를 유영하는 1.3km 신축 데크로드의 짜릿함
코스 스펙: 총길이 6.5km / 소요 시간 약 1시간 30분
이동 경로: 흰디기 ➔ 하선대 ➔ 흥환간이해수욕장
핵심 명소: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의 '꽃'이라 불리는 가장 아름다운 구간입니다. 이번 정비 사업을 통해 약 1.3km 길이의 바다 위 데크로드가 새롭게 조성되어, 발밑으로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짜릿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의 '하선대'와 아름다운 여인의 옆모습을 한 '미인바위'가 대표적인 포토 스팟입니다. 오후 5~6시경 방문하면 기암괴석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석양의 장관을 만날 수 있으며, 종착지인 흥환간이해수욕장은 조용한 캠핑과 차박의 숨은 명소로 유명합니다.
[3코스: 구룡소길] 자연 그대로의 투박함이 살아있는 생태 탐방로
코스 스펙: 총길이 6.5km / 소요 시간 약 2시간
이동 경로: 장군바위 ➔ 모감주나무·병아리꽃나무 군락지 ➔ 구룡소
핵심 명소: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을 품은 코스입니다. 앞선 코스들과 달리 바윗길과 숲길의 비중이 높아 다소 거칠고 투박한 자연 그대로의 맛이 살아있어 트레킹 마니아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바다 한가운데 갑옷을 입은 장군처럼 늠름하게 서 있는 '장군바위'에서 강인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으며, 세계적으로 희귀하여 생태적 가치가 매우 높은 '모감주나무·병아리꽃나무 군락지'의 숲길을 걸으며 바다와 나무의 향기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습니다.
대동배1리에서 2리까지는 소나숲길 말고 호미곶 도로를 따른다
들어서지 말아야 할, 소나무 숲 길 들머리~~
[4코스: 호미길] 해안단구 지형을 따라 한반도 최동단으로 향하는 여정
코스 스펙: 총길이 5.6km / 소요 시간 약 1시간
이동 경로: 독수리바위 ➔ 호미곶 해맞이광장
핵심 명소: 해가 가장 먼저 뜨는 호미곶 광장으로 향하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길입니다.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독수리 부리 모양을 한 '독수리바위'가 마스코트 역할을 합니다. 특히 수천 년 전 바다 밑에 있던 땅이 솟아올라 형성된 계단 모양의 '해안단구' 지형이 잘 발달해 있어 지구의 역사를 발끝으로 느끼며 걸을 수 있습니다.
광장 주변에는 5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유채꽃밭'이 선물처럼 펼쳐지며, 우리나라 유일의 등대전문 박물관인 '국립등대박물관'이 있어 아이와 성인 모두에게 유익한 교육 공간이 되어줍니다.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 1~4코스 완주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 1~4코스 지도
발산항에서 깨비스테이까지 교통 정보
깨비스테이에서 발산항까지 교통정보
호미곶에서 포항시외버스터미널까지 교통 정보
춘천에서 포항 가는 버스 시간표, 요금, 소요시간
포항에서 춘천 가는 버스 시간표, 요금, 소요 시간
일출과 일몰, 문학이 공존하는 다채로운 힐링 테마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단순히 걷는 행위를 넘어, 길 위에서 만나는 다양한 인문학적·자연적 콘텐츠 덕분에 더욱 특별합니다. 선바우길에서 붉게 물드는 석양과 해국의 향연을 즐긴 후, 밤이 되면 달빛에 어른거리는 파도를 벗 삼아 낭만적인 야간 산책을 즐기기 좋습니다.
둘레길 동선 중에는 민족시인 이육사의 '청포도' 시가 새겨진 '이육사 청포도 시비'가 있어 평화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고요히 조망할 수 있으며, 예로부터 봉수대가 있던 작은 섬이자 현재는 강태공들의 성지가 된 '소봉대' 등 숨은 명소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지루할 틈 없는 여정을 완성합니다.
김승태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개인맞춤형 암 치료는 약 하나가 아니라 ‘시스템’이 필요하다”
신의철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 “공통 신생항원 활용하면 암 백신 비용 10분의 1로 낮출 수 있다”
<편집자 주>2024년 전 세계에서 새로 암 진단을 받은 환자는 2060만 명. 26년 뒤인 2050년에는 3500만 명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약 70% 증가다. 암 환자가 늘면서 치료 시장도 커지고 있다. 동시에 치료 기술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은 신약 개발의 속도를 높이고 메신저리보핵산(mRNA)은 환자마다 다른 암을 겨냥하는 새로운 치료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기술의 변화는 치료법을 넘어 제약·바이오 산업의 경쟁 구도와 투자 지형까지 바꾸고 있다. 더 많은 암을 더 정밀하게 치료해야 하는 시대. 암 치료의 다음 승부처는 어디에 있을까.
암 치료 시장을 둘러싼 글로벌 제약사들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암 환자가 늘면서 시장 자체가 커지는 데다 키트루다 등 대형 항암제의 특허 만료가 다가오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항체약물접합체(ADC)와 이중항체, 세포치료제에 이어 메신저리보핵산(mRNA)까지 차세대 항암 플랫폼을 둘러싼 경쟁이 본격화하는 이유다.
그중에서도 개인맞춤형 치료의 가능성을 보여준 mRNA 암 백신이 새로운 격전지로 떠올랐다. 지난 8월 19일(현지 시간) 미국 제약사 모더나와 머크(MSD)가 공동 개발 중인 개인맞춤형 mRNA 암 백신은 흑색종 임상 3상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내놨다. 수술로 종양을 제거한 고위험 흑색종 환자에게 암 백신을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와 병용해 재발 및 원격전이 위험을 낮추는 방식이다.
모더나와 머크의 임상은 차세대 암 치료 경쟁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인공지능(AI)이 치료의 실행을 앞당기는 가운데 국내 기업의 경쟁력과 기회, 환자에게 치료가 닿기까지 넘어야 할 비용·시스템의 과제를 살펴봤다.
◆AI ‘실행의 벽’ 낮춘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행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 실행되기 시작했다.”
김승태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암정밀치료센터장)는 최근 암 치료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삼성서울병원은 모더나와 머크가 공동 개발한 개인맞춤형 암 백신 인티스메란 오토진(개발명 V940·mRNA-4157)의 흑색종 임상 3상(INTerpath-001)과 비소세포폐암 임상시험(INTerpath-002)에 참여했다.
김 교수는 이번 변화의 핵심으로 AI를 비롯한 기술 발전을 꼽았다. “암 백신이나 세포치료, 개인맞춤형 치료라는 개념 자체가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 환자에게 적용하기에는 시간과 비용, 데이터 처리 등 여러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개인맞춤형 암 백신은 환자의 종양 조직을 분석해 수많은 돌연변이 가운데 면역세포가 공격할 가능성이 높은 신생항원(암 조각)을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환자별 치료제를 설계해야 한다. 환자마다 암의 특성이 다른 만큼 같은 치료제를 대량 생산하는 기존 신약과는 개발 방식부터 다르다. 김 교수는 “과거에는 이 과정에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AI는 이 ‘실행의 벽’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신생항원 후보를 찾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을 효율화하면서 개인별 치료제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어서다. 실제 모더나의 암 백신 개발 과정에서도 AI를 활용했다. 김 교수는 “AI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치료법을 마치 메시아처럼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다”며 “그동안 우리가 하지 못했던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도구”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변화가 암 백신에만 그치지 않을 것으로 봤다. 이미 성과를 내고 있는 표적치료제도 AI와 결합해 발전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특정 치료 하나가 암 치료 시장을 주도한다기보다 AI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이 암 치료 전반의 질적·양적 발전을 이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같은 변화는 암 백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이미 신약 개발 전반에 AI를 적용하고 있다. 글로벌 톱10 제약사 대부분이 AI를 신약 개발에 활용하는 가운데 외부 AI 기업과의 협업을 넘어 자체 플랫폼 구축과 전담 조직 운영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신약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시험, 제조까지 신약 개발 전 과정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움직임이다.
모더나는 오픈AI와 협업해 자체 AI 플랫폼 ‘mCHAT’을 구축했고 10년 이상 축적한 mRNA 의약품 데이터를 AI와 결합하고 있다. 미국 화이자는 아마존웹서비스(AWS)의 AI 플랫폼을 활용해 신약 개발과 생산성을 높이고 있으며 미국의 암젠은 엔비디아의 신약 개발용 AI 플랫폼 ‘바이오니모’를 도입했다. 머크 역시 초기 후보물질 발굴을 포함해 여러 신약 개발 단계에 AI와 머신러닝을 적용하고 있다.
AI 신약 개발이 주목받는 이유는 신약 개발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수년간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고도 극히 일부 후보물질만 최종 신약으로 이어지는 만큼 AI를 활용해 실험 전에 후보물질의 가능성을 예측하고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하면 개발 기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AI를 활용할 경우 신약 개발 기간을 평균 15년에서 7년으로, 비용을 3조원에서 6000억원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완제품도 요소기술도…한국의 암 치료 경쟁력
신의철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인프라만 해서는 안 되고 플러스알파로 완제품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로벌 제약사가 이미 앞서 있는 분야라고 하더라도 국내 기업이 자체 치료제를 내놓으면 시장에서 경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표적인 사례로 국내 카티(CAR-T) 치료제 개발을 들었다. 큐로셀이 개발한 림카토는 지난 4월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허가받아 9월 국내 출시를 목표로 한다. 카티는 환자 몸에서 직접 뽑은 면역세포에 ‘암세포 추적 레이더’를 달아준 뒤 몸속에 다시 넣어 암을 치료하는 맞춤형 치료제다. 신 교수는 “국내 제품이 나오면 꼭 국산을 쓰자는 의미가 아니라 국내 제품과 해외 제품이 경쟁하면서 외국 업체도 가격을 낮추게 된다”며 “결국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티 치료제는 2017년 스위스 노바티스의 ‘킴리아’를 시작으로 미국에서 7종이 허가될 만큼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킴리아와 미국 길리어드사이언스의 ‘예스카타’ 등이 쓰이지만 해외에서 제조돼 환자 투약까지 약 두 달이 걸린다.
반면 림카토는 국내 품질관리기준(GMP) 시설에서 생산해 T세포를 채취한 뒤 투약하기까지 약 16일로 기간을 크게 줄였다. 치료 효과도 임상 2상에서 완전관해율(검사했을 때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환자의 비율) 67.1%를 기록해 킴리아(40%), 브레얀지(53%), 예스카타(54%)보다 높았다.
모든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블록버스터 신약만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환자 일부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치료제라도 독자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하고 시장에 내놓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게 신 교수의 설명이다.
동시에 요소기술을 가져가는 전략도 필요하다. 신 교수는 핵심 기술 하나를 확보해 글로벌 제약사의 치료제에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고 설명했다.
알테오젠이 대표적인 사례다. 알테오젠은 정맥주사(IV)로 투여하던 항체의약품을 피하주사(SC) 방식으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머크와 협력하고 있다. 환자가 병원에서 장시간 정맥주사를 맞아야 하는 부담을 줄이면서 기존 치료제의 사용 편의성을 높이는 기술이다.
이번 모더나 암 백신이 머크의 키트루다와 함께 투여하는 병용 요법으로 개발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암 치료 시장의 경쟁이 단순히 ‘누가 더 좋은 독자 신약을 개발하느냐’를 넘어 ‘어떤 약과 동맹을 맺어 시너지를 내느냐’의 싸움으로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환자맞춤형 암 치료가 확대하면 기존의 대량생산 방식과는 다른 제조 기술이 필요할 수 있다. 신 교수는 “환자맞춤형 치료는 기존 방식의 위탁생산으로는 쉽지 않지만 누군가 개인맞춤형 치료제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위탁생산 플랫폼을 만들 수도 있다”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시장을 만들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비용과 시스템 구축은 과제
새로운 암 치료제가 등장할수록 또 하나의 과제는 치료 비용이다. 최근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레볼루션메디신스의 췌장암 치료제 ‘라손큐’는 한 달 약값이 3만9800달러(약 5500만원), 연간으로는 47만7000달러(약 6억6000만원)에 달한다. 수십 년간 치료가 어려웠던 췌장암 유발 핵심 유전자(RAS)를 겨냥한 새로운 치료법이 등장했지만 높은 약값은 환자와 의료시스템이 풀어야 할 또 다른 숙제로 남았다.
모더나의 개인맞춤형 mRNA 암 백신도 마찬가지다. 환자마다 종양의 유전체를 분석해 백신을 새로 설계·제작해야 하는 만큼 의료계에서는 인티스메란 치료 비용을 50만달러 이상(약 7억원)으로 내다본다.
신 교수는 “새로운 기술은 처음 나왔을 때 비싸지만 결국 기술이 진보하면서 가격을 낮추는 방법이 생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우선 모더나의 mRNA 암 백신에 대해 개인맞춤형이라는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제작 단가와 시간을 낮추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봤다. “폐암·대장암·흑색종처럼 암종별로 여러 환자가 공통적으로 갖는 신생항원을 찾아내면 이를 미리 백신으로 제작해 둘 수 있다”며 “환자마다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과정을 줄여 제작 기간을 단축하고 비용도 10분의 1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가 창업한 바이오벤처 티쎌로지도 이 같은 방식의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새로운 치료 기술이 등장한다고 곧바로 환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환자마다 치료제를 새로 설계해야 하는 개인맞춤형 치료는 병원 내부의 시스템과 협업 구조까지 함께 바뀌어야 한다.
김 교수는 “환자의 조직과 혈액을 신속하게 확보하고 가공해 외부 연구기관이나 기업과 공유해야 하는 만큼 기존 진료 체계만으로는 복잡한 임상시험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연구에도 여러 병원이 참여했지만 실제 환자 등록까지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던 병원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며 “혈액종양내과뿐 아니라 병리과·영상의학과·외과 등 여러 진료과가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고 부연했다.
이어 “이런 치료는 한 명의 교수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검체를 확보하고 처리하는 과정부터 환자 등록과 치료까지 각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다학제적 팀워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② ‘모더나 암 백신’ 임상에 참여한 의사가 말하는 암 치료,
무엇이 달라지나
입력2026.09.02 05:00
인터뷰 이대호 서울아산병원 교수
“가능성은 확인했다”…다음은 비용과 인프라다
“코로나19는 mRNA 기술을 직접 개발해 볼 수 있었던 중요한 기회였지만 국내에선 코로나19 mRNA 백신을 만들지 못했다”
<편집자 주>2024년 전 세계에서 새로 암 진단을 받은 환자는 2060만 명. 26년 뒤인 2050년에는 3500만 명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약 70% 증가다. 암 환자가 늘면서 치료 시장도 커지고 있다. 동시에 치료 기술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은 신약 개발의 속도를 높이고 메신저리보핵산(mRNA)은 환자마다 다른 암을 겨냥하는 새로운 치료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기술의 변화는 치료법을 넘어 제약·바이오 산업의 경쟁 구도와 투자 지형까지 바꾸고 있다. 더 많은 암을 더 정밀하게 치료해야 하는 시대. 암 치료의 다음 승부처는 어디에 있을까.
이대호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개인맞춤형 mRNA 암 백신인 인티스메란 오토진(Intismeran autogene·개발명 V940·mRNA-4157)의 비소세포폐암 임상시험인 INTerpath-002와 014에 아산병원 의료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폐암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고, 사망률도 독보적 1위인 치명적인 암이다. 비소세포폐암은 전체 폐암 발생의 약 80~85%를 차지한다. 앞서 모더나와 머크는 흑색종 환자를 대상으로 한 INTerpath-001 임상 3상에 대한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이승재 기자
기존 항암치료의 공식은 ‘만들어진 약 중에서 환자에게 맞는 약을 고르는 것’이었다. 표적항암제와 면역항암제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개인맞춤형 메신저리보핵산(mRNA) 암 백신은 출발점부터 다르다. 환자의 종양을 분석해 암세포만의 특징을 찾아내고, 그 환자에게 맞는 치료제를 새로 설계한다.
문제는 맞춤 제작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점이다. 환자마다 종양을 분석하고 수십 개의 항원을 골라 mRNA를 설계한 뒤 제조·운송까지 거쳐야 한다. 시간과 비용, 전문 인력과 물류 인프라가 모두 필요하다. 개인맞춤형 치료가 암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지만 동시에 기존 항암제에는 없던 새로운 과제도 던진 셈이다.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폐암 전문의인 이대호 교수는 이 같은 변화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아산병원은 개인맞춤형 mRNA 암 백신인 인티스메란 오토진의 폐암 임상시험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 제약사 모더나와 머크가 최근 흑색종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를 발표하면서 mRNA 암 백신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한경비즈니스는 국내 폐암 분야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이 교수를 만나 mRNA 암 백신이 암 치료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실제 치료 과정에서 넘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들어봤다.
Q. 기존 항암치료와 mRNA 암 백신은 치료 방식에서 어떤 차이가 있나요.
“지금까지 암 치료제는 세포독성 항암제에서 시작해 표적치료제, 면역항암제 등으로 발전해왔습니다. 효과는 높이고 부작용은 줄이는 방향이었죠. 그런데 표적치료제나 면역항암제도 결국은 만들어진 약 가운데 환자에게 맞는 약을 찾아 쓰는 방식입니다. 정밀의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정밀의료는 더 많은 환자의 특성을 세밀하게 분석해서 그중 어떤 치료제가 잘 맞을지를 찾아주는 개념입니다.
mRNA 기반 암 치료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환자의 암 조직과 정상 조직을 비교해 암세포에만 나타나는 특정 항원(우리 몸의 면역세포가 공격해야 할 암세포의 고유한 특징)을 찾아내고 그 환자에게 맞는 치료제를 직접 만드는 전략입니다. 쉽게 말하면 기성복과 맞춤 양복의 차이입니다. 기존 치료제가 사이즈별로 만들어진 기성복이라면 mRNA 암 백신은 환자의 몸을 직접 재서 만드는 맞춤 양복에 가깝습니다.”
Q. 가장 큰 장벽은 무엇입니까.
“맞춤 양복과 똑같습니다. 기성복은 가서 바로 사 입을 수 있지만 맞춤 양복은 양복점에 가서 치수를 재고 재단사가 만들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죠. 개인맞춤형 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자의 종양을 분석하고 항원을 찾아 그에 맞는 치료제를 설계한 뒤 다시 환자에게 투여할 수 있는 제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 시간과 비용, 전문 인력이 모두 필요합니다.
지금은 이런 과정을 거치는 데 대략 3~6주 정도가 필요할 수 있는데 환자에 따라서는 상당히 긴 시간입니다. 특히 4기 환자는 치료가 급하기 때문에 맞춤형 치료제가 만들어질 때까지 치료를 미룰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먼저 표준치료(안전성이 검증된 치료법)를 하고 그동안 환자에게 맞는 mRNA 백신을 만들어 완성되면 추가로 투여하는 방식이 가능할 겁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분석과 제조에 걸리는 시간을 얼마나 줄이고 그 과정을 얼마나 표준화하느냐입니다.
mRNA 자체를 만드는 기술이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분석부터 제조, 물류까지 이 모든 과정을 연결하는 데 비용이 든다는 겁니다. 기술 하나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Q. 백신인데 왜 수술 후에 이 치료를 하는 건가요.
“현재는 수술로 종양을 모두 제거한 환자의 재발을 낮추는 데 이 치료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수술 후에도 재발 위험이 남아 있는 환자에게 mRNA 백신을 투여해 재발을 막는 것이죠. 재발을 줄이면 장기적으로 생존기간을 늘리고 더 나아가 완치 가능성도 높일 수 있습니다.
수술 후 환자가 대상이 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개인맞춤형 백신을 만들려면 환자의 암 조직이 충분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수술 과정에서 종양 조직을 확보할 수 있고 수술 후에는 회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동안 조직을 분석해 환자에게 맞는 백신을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연구에서는 재발 위험이 높은 2·3기 환자를 주로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4기 환자는 상황이 다릅니다. 치료를 빨리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백신을 만들기 위해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고 충분한 종양 조직을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Q. 앞으로 임상에서는 어떤 지표를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하나요.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 생존기간(OS)입니다. 환자의 생존기간이 실제로 늘어났는지를 봐야 합니다. 다만 수술을 받은 환자는 기본적으로 생존기간이 길기 때문에 전체 생존기간을 확인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중간 지표로 무재발 생존기간(수술이 끝난 날부터 암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걸린 기간) 등을 봅니다.
반면 병이 많이 진행된 환자나 4기 환자는 전체 생존기간을 비교적 빠르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OS가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상황에 따라 무재발 생존기간이나 무진행 생존기간(항암제를 쓰기 시작한 날부터 암이 더 자라거나 나빠지지 않고 유지된 기간) 등을 활용하게 됩니다.”
Q. mRNA 백신과 키트루다의 역할이 궁금합니다.
“mRNA 백신은 암세포의 항원을 만들어서 T세포(암세포 저격수)에게 ‘어디를 공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T세포가 실제로 암세포를 공격하는 군인이라면 mRNA 백신은 군인에게 정밀한 타격 목표를 찍어주는 겁니다. 반면 키트루다는 암세포의 방해 공작을 무력화해 군인이 제 실력을 발휘하도록 돕습니다. 암세포는 T세포를 만나면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브레이크(면역관문) 스위치를 누르는데 키트루다가 중간에서 이를 차단합니다.”
Q. mRNA 백신은 키트루다와 반드시 같이 써야 하는 건가요.
“단독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환자의 T세포가 충분히 강하면 스스로 암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다만 T세포의 힘이 부족한 환자라면 mRNA 백신이 목표를 알려줘도 충분히 공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키트루다 같은 면역관문억제제로 T세포의 기능을 높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환자의 몸 속에 T세포(군인) 자체가 부족할 경우엔 목표를 알려주는 것(mRNA 백신)이 소용이 없을 수 있습니다. 군인이 없는데 공격 목표만 알려주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군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카티(CAR-T) 같은 세포치료제입니다. CAR-T는 외부에서 T세포를 만들어 환자에게 넣어주는 방식입니다.
앞으로는 군인을 만들어주고(CAR-T), 공격 목표를 알려주고(mRNA 백신), 군인의 힘을 키워주는 것(키트루다)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지가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아직은 연구가 그 정도까지 진행된 것은 아닙니다. 향후 10년은 어떤 치료제를 단독으로 쓸 것인가보다 여러 치료법을 어떻게 조합하면 가장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찾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Q. 가장 예측하기 어렵고 까다로운 부분은 무엇인가요. 이번 성과에는 AI도 활용됐다고 들었습니다.
“‘진짜 적군 같은 좋은 몽타주(항원)를 찾아내느냐’가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암세포 특유의 유전자 변이로 만들어지는 ‘신생항원(암 조각)’을 잘 발굴해내야 하고 그중에서도 T세포의 공격 능력을 가장 확실하게 자극할 수 있는 진짜 알짜배기 항원을 골라야 합니다.
그런데 종양에서 이 항원을 식별해내는 기술 자체가 매우 난도가 높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분석을 통해 암세포에서 100개 정도의 항원을 찾아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중 실제로 치료 효과를 낼 진짜 좋은 항원이 몇 개나 섞여 있는지는 미리 알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실전에서는 엄선한 30여 개를 먼저 백신으로 제작해 사용해 보고 효과가 충분하지 않으면 나머지 항원을 추가하는 유연한 방식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 방대하고 까다로운 분석 과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열쇠가 바로 인공지능(AI)입니다. 암세포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는 인간이 하나하나 확인해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섭니다. 환자 개인마다 암의 특성이 전부 다릅니다. 정상 조직과 암 조직을 정밀 비교하며 수백만 개의 단백질 가운데 진짜 암과 관련된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찾아낸 단백질이 모두 백신 후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mRNA 백신으로 만들어야 할 타깃이 무엇인지 다시 선별해야 합니다. 종양 내에서 해당 RNA가 실제로 잘 발현되는지, 그리고 진짜 단백질로 많이 발현되는지까지 다각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수많은 항원 중 ‘어떤 항원을 최종 선택해 백신으로 구울 것인가’가 핵심이며 이는 전적으로 각 바이오 기업이 가진 AI 알고리즘과 분석 노하우에 달려 있습니다. 기업들의 핵심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쉽게 공개되지 않는 영역이며 앞으로 각 기업이 스스로 경쟁력을 증명해야 하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Q. 폐암 임상의 결과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한국 환자들을 포함해 전 세계 약 900명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비소세포폐암 임상 3상의 경우 아산병원의 국내 환자 등록은 이미 마친 상태입니다. 이 연구의 결과는 이르면 내년쯤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와 더불어 4기 환자들을 포함한 또 다른 폐암 임상시험도 현재 진행하고 있습니다.”
Q. 흑색종의 경우 2027년부터 상용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는데요.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흑색종 연구에 참여한 국가를 중심으로 허가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임상시험에 참여했기 때문에 데이터를 가지고 허가를 내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허가와 실제 사용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약값이 너무 비싸 국내에서 감당할 수 없다면 회사가 약을 들여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건강보험 체계와 연결되기 때문에 급여 문제가 중요합니다. 개인맞춤형 치료는 일반적인 기성품처럼 약을 들여와 바로 쓰는 방식이 아닙니다. 환자의 종양을 보내 분석하고 그 환자에게 맞는 치료제를 만든 뒤 다시 가져와 투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제조와 물류를 연결하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현재 한국에는 이런 시스템이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치료비가 너무 비싸 환자가 많지 않다면 회사 입장에서도 한국에 별도의 제조·물류 시스템을 구축할 이유가 크지 않습니다. 환자가 충분히 있어야 투자할 이유가 생기는 겁니다.”
Q. 국내 기업들도 모더나처럼 이런 기술을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mRNA를 만드는 것 자체는 할 수 있습니다. 암 백신을 만드는 것도 할 수 있고 항원을 찾아내는 것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하나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항원을 찾고 여러 후보 가운데 좋은 항원을 골라내고, mRNA를 설계하고 제조하고, 임상시험까지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로 엮어야 합니다. 비용과 규모, 그리고 노하우가 필요하단 얘깁니다. 미국처럼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있는 빅테크나 제약사가 있는 환경과 한국은 다릅니다. mRNA를 만들 수 있다고 해서 이 플랫폼 전체를 개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Q. 국내 바이오 산업은 그동안 어떤 기회를 놓쳤다고 보시나요.
“지난 15~20년 동안 시간과 기회를 많이 놓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제네릭(복제약)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면서 규모를 키우고 혁신적인 분야에 도전하는 데 충분히 투자하지 못했습니다. 임상시험을 제대로 진행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려면 일정한 규모의 투자와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한데 그런 부분이 부족했습니다.
특히 코로나19는 mRNA 기술을 직접 개발해볼 수 있었던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mRNA 백신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에 우리도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국내에서는 코로나19 mRNA 백신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암 mRNA 백신은 코로나19 백신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코로나19 백신은 하나의 항원을 대상으로 하면 되지만 암은 환자마다 암의 특성이 다르고 여러 항원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AI를 우리가 직접 만들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나라는 AI 자체를 만드는 것보다 반도체나 데이터센터처럼 우리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가 있습니다. 바이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 플랫폼 가운데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Q. 이번 연구가 갖는 의미가 있다면요.
“개인맞춤형 mRNA 암 백신이라는 치료 전략 자체가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이제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흑색종에서 확인한 결과가 폐암을 비롯한 다른 암종에서도 나타나는지, 초기 암 환자와 진행성·4기 환자에서도 같은 효과를 보이는지를 각각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 연구는 끝이라기보다 시작이라고 봅니다.”
③ ‘하루 177% 폭등’ 모더나 잭팟 추격 매수보다 ‘이 종목’ 노려라
로또 그 이상의 로또였다. 8월 글로벌 증시를 흔든 역사적 사건, 모더나 이야기다. 모더나 주가는 역사적인 암 백신 임상 성공 발표에 힘입어 지난 8월 19일(현지 시간) 177% 급등했다. 불과 석 달 전 한타바이러스 유행 소식에 주가 급등을 기대하고 매수를 감행했던 이들은 예상치 못한 역사적 대박을 맞이했다.
‘제2의 모더나’는 없을까. 국내외 애널리스트 역시 하반기 증시를 이끌 새로운 주도주로 제약·바이오를 주목하고 있다.
모더나, 지금이라도?
모더나가 글로벌 제약사 머크(MSD)의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와 함께 개발 중인 암 백신 ‘인티스메란’이 피부암(흑색종) 환자 대상 임상 3상에서 뛰어난 재발 방지 효과를 입증하면서 바이오 시장은 크게 요동쳤다. 지금까지의 암 치료가 모든 환자에게 같은 약을 투여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기술은 환자의 수술 부위에서 떼어낸 암세포 유전을 분석해 그 환자의 몸속 암세포만 공격하도록 맞춤 제작하는 초개인화 치료 체계다.
임상 성공 발표 직후 62달러에서 170달러 선을 뚫어냈던 모더나 주가는 이내 130달러 선까지 밀려났다가 140~150달러 안팎에서 숨 고르기를 이어가는 등 강한 변동성을 보이고 있다. 단숨에 폭등한 뒤 가파른 등락을 거듭하자 투자자들 사이에선 지금이라도 모더나 추격 매수에 나서야 할지 고민이 깊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투자자들이 ‘암 백신’이라는 이름만 보고 세부적인 맥락을 놓쳤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울프리서치의 알렉산드리아 해먼드 애널리스트는 WSJ를 통해 “자체 설문조사 결과 개인투자자 다수가 암 백신을 독감 주사처럼 일반인이 미리 맞춰 암을 예방하는 약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며 시장이 잠재적 시장 규모를 실제보다 훨씬 크게 착각했을 가능성을 짚었다.
이 약물은 건강한 사람이 미리 맞는 예방용이 아니다. 이미 암 수술을 마친 고위험군 환자 몸속에 미세하게 남은 암세포를 찾아내 재발을 막는 치료용 백신이다. 환자 한 명 한 명의 세포를 채취해 백신으로 만드는 데만 약 6주가 걸리는 고가의 맞춤 의약품이라 대상 환자군이 한정돼 있다.
리링크파트너스의 다이나 그레이보시 애널리스트는 “인티스메란의 연간 매출이 2032년 수십억 달러 수준일 것”이라고 전망한 반면, 시장은 발표 단 하루 만에 모더나와 머크의 시가총액을 각각 400억달러 이상 부풀렸다. 실제 벌어들일 돈에 비해 기대감이 주가에 너무 일찍, 그리고 크게 반영됐다는 지적이다.
대신증권 조재윤 애널리스트 또한 “주가 폭등의 배경을 설명할 뿐 핵심 변수를 해소하진 못했다”며 신중론을 폈다. 그는 우선 전체 생존율 데이터가 아직 미공개 상태라 실제 환자의 생존 기간을 얼마나 늘려주는지 확인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기성품과 달리 환자 개인별로 일일이 맞춤 제작해야 하는 특성상 상업화를 위해 생산 규모를 10~100배 늘려야 하는 ‘대량생산의 한계’도 커다란 걸림돌이라고 덧붙였다. 조 애널리스트는 “밸류에이션 부담에 생산 확장 리스크까지 더해졌다”며 “향후 전체 생존율 수치와 후속 임상 데이터 발표를 차분히 지켜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급등주 추격 대신 주변 밸류체인
전문가들은 이미 주가가 치솟은 모더나를 무리하게 사들이기보다 암 백신 시대가 열리며 함께 성장할 주변 밸류체인에 주목하라고 조언한다. 신한투자증권의 하헌호 애널리스트는 “모더나는 단기간에 크게 상승해 현재 진입은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며 “모더나 암 백신과 함께 수혜를 볼 수 있는 주변 종목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첫째 수혜 분야는 ‘개인 맞춤형 유전체 분석 플랫폼’이다. 환자마다 다른 암세포 변이를 정밀하게 읽어내야만 그에 맞는 백신을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단 업체 퍼스널리스를 인수한 미국 헬스케어 기업 템퍼스AI가 대표적이다. 퍼스널리스는 모더나의 암 백신 개발에 유전체 분석 기술을 독점적으로 제공해 온 핵심 기업으로 이번 임상 성공에 따른 직접적인 수혜가 예상된다.
모더나의 라이벌 기업인 독일의 바이오엔테크 역시 췌장암, 대장암, 폐암 등 다수의 암 백신 임상 발표를 앞두고 있다. 이 회사는 스위스 제약사 로슈와 공동 개발 중인 맞춤형 암 백신 ‘BNT122(오토진 세부메란)’를 통해 괄목할 성과를 입증했다. AACR 등 주요 학회에서 발표된 바에 따르면 수술 후 췌장암 환자 8명 중 6명이 약 4.2년간 재발이나 전이 없이 건강한 상태를 유지했다. 치사율이 극도로 높은 췌장암에서 유의미한 재발 방지 효과를 확인한 셈이다. BNT122는 올해 대장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2상 중간 데이터 공개도 앞두고 있어 기대감이 높은 상황이다. 이 외에도 파이프라인 전반에 임상 호재가 대기 중이다. 두경부암 치료제 ‘BNT113’은 올해 임상 2/3상 중간 데이터를 공개할 예정이며 비소세포폐암 백신인 ‘BNT116’ 역시 세계폐암학회에서 초기 임상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국내 제약·바이오 시장으로 시선을 옮겨도 기회는 다양하다. 핵심 수혜주는 알테오젠이 꼽힌다. 암 백신의 핵심 파트너 약물이 키트루다인 만큼 백신 시장이 커질수록 키트루다의 처방량도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머크가 비소세포폐암 임상 3상에서 키트루다를 링거 대신 5분 만에 맞는 피하주사(SC) 제형으로 변경해 병용 임상에 착수하면서 알테오젠이 보유한 SC 제형 변경 플랫폼 기술의 가치는 더욱 급등할 전망이다.
IBK투자증권 정이수 애널리스트는 “국내 기업 중 가장 직접적인 수혜가 기대되는 곳은 알테오젠”이라며 “암 백신 보조요법 시장의 확대는 키트루다의 치료 영역 확장과 함께 알테오젠의 SC 제형 변경 기술이 적용된 ‘키트루다 큐렉스’의 처방 증가로 직결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머크는 매출 비중이 큰 고위험 비소세포폐암 임상 3상에서 이미 키트루다 SC 제형과 암 백신 병용 투여에 착수하며 SC 제형 중심의 전략적 확장을 공식화했다.
키움증권 허혜민 애널리스트 역시 구조적 수혜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허 애널리스트는 “미국 FDA가 단일 브리징 임상 결과를 근거로 키트루다 SC를 기존 정맥주사(IV)가 승인받은 대부분의 고형암 적응증에 포괄적으로 승인한 상태”라며 “암 백신 병용요법이 정식 승인되면 모더나가 별도의 SC 결합 임상을 진행하지 않아도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환자 편의성이 높은 키트루다 SC로 대체 처방될 길이 확고히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신한투자증권 엄민용 애널리스트의 톱픽도 알테오젠이다. 그는 “모더나 암 백신은 키트루다와 병용이 필수인데 이번에 공개된 흑색종은 키트루다 전체매출의 10%에 해당하고 5월 개시된 비소세포폐암은 키트루다 전체 매출 40%로 키트루다SC와 병용하는 디자인”이라며 알테오젠이 가장 큰 수혜 종목이라고 꼽았다.
아울러 암 백신 생태계 확장에 따른 낙수효과도 기대된다. 후발주자들의 암 백신 개발이 본격화됨에 따라 백신 원료와 임상 물량 위탁생산을 담당할 에스티팜이나 mRNA 전달체·플랫폼 기술을 가진 삼양바이오팜, 한미약품 등도 함께 주목받는 분위기다.
이 밖에 기술력 대비 저평가된 항암 바이오 기업도 눈여겨볼 만하다. 엄민 용 애널리스트는 앱클론과 지아이이노 베이션을 꼽았다. 앱클론은 HER2 항 17 2026 09 02-08 체 'AC101'이 지난 7월 글로벌 3상 첫 환 자 투약을 시작했으며, 중국 2상에서 기 존 대비 4배에 달하는 무진행생존기간 (mPFS 39개월)을 입증했다. 지아이이 노베이션은 면역항암제 'GI-102'의 암 백 신 병용 효능이 기대되는 한편, 하반기 알레르기 치료제 'GI-301'의 기술이전도 추진 중이다
사실 국내 제약·바이오 업종은 그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경쟁사인 삼성에피스가 SC 제형 핵심 기술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주가가 급락한 알테오젠을 비롯해 최근 골관절염 세포유전자 치료제 임상 3상에서 실패한 코오롱티슈진은 한 달 새 주가가 6만원대에서 2만원대로 3분의 1토막 났다. 악재가 겹치고 모멘텀 공백 속에 투자심리마저 극도로 위축됐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분위기가 반전되는 양상이다. 암 백신에 국한되지 않고 비만 치료제 등 다양한 핵심 신약 분야에서 글로벌 대형 기술수출(L/O)이 잇따르며 침체됐던 바이오 섹터 전반에 강한 반등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한미약품이다. 한미약품은 8월 24일 로슈 자회사 제넨텍에 근육 보존형 비만 신약 후보물질 ‘LA-UCN2(HM17321)’를 총 23억달러(약 3조2000억원) 규모로 기술수출하는 대형 잭팟을 터뜨렸다. 이는 단일 후보물질 기준 역대 글로벌 비만 딜 중 두 번째로 큰 규모이자 기존 ‘2강(일라이릴리, 노보노디스크)’ 구도를 깨고 비만 빅파마 톱3 진입을 노리는 로슈의 핵심 퍼즐로 평가받는다. 한미약품이 올해 릴리(13억달러)와 로슈(23억달러)에 잇달아 굵직한 메가딜을 성공시키면서 증권가의 목표주가 상향 조정도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빅파마로의 굵직한 기술수출이 이어지면서 업종 전반의 밸류에이션 재평가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대신증권 홍가혜 애널리스트는 “국내 헬스케어 주가는 지난 5년간 글로벌 시장 대비 부진했지만 최근 글로벌 제약사를 파트너로 한 대형 L/O가 지속되며 투자 매력이 높아졌다”며 “글로벌 대비 누적된 주가 격차를 고려할 때 제약·바이오 섹터에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글로벌 제약사들은 기존 핵심 의약품들의 특허 만료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외부에서 새로운 기술을 사들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차별화된 항체, ADC, RNA 치료제 및 플랫폼 기술을 보유한 국내 바이오텍에는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엄민용 애널리스트는 향후 1~2년 내 독보적인 주가 모멘텀을 보여주거나 글로벌 빅파마와의 기술수출(L/O) 가능성이 높은 핵심 기업들에 주목했다.
우선 강력한 모멘텀을 보유한 기업으로 한올바이오파마와 보로노이가 꼽힌다. 한올바이오파마는 항FcRn 자가면역질환 치료제로 류마티스 관절염 과 그레이브스병 분야에서 '퍼스트 인 클래스' 및 '베스트 인 클래스' 경쟁력 을 확보해, 글로벌 경쟁사인 아르젠엑스(Argenx)를 잇는 대장주로서의 성장이 기대된다. 보로노이는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VRN11'이 타그리소 내성 변이(C797S) 환자군에서 객관적 반응률(ORR) 100%와 뇌전이 완전관해 성과를 나타내며, 하반기 타그리소 미투여 환자 대상 임상에서 우위를 입증할 경우 주가 상승폭이 가장 클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빅파마와의 협업 및 기술수출 가능성이 큰 기업으로는 올릭스와 큐리언트가 언급됐다. 올릭스는 일라이릴리에 MASH 치료제 'OLX702A' 기술이전 후 하반기 임상 2상 진입을 앞두고 있으며, Dual siRNA 플랫폼 추 가 계약과 황반변성·비만 치료제 파이프라인의 빅파마 계약 추진 등 풍부한 기술이전 후보군을 갖췄다. 큐리언트는 세계적인 CDMO 기업 론자(Lonza) 와 CDK7 저해제를 활용한 이중 페이로드 ADC 전략을 공동 발표하는 등 플랫폼 공동 기술이전을 포함한 긴밀한 협력 성과가 기대된다.
다올투자증권 이지수 애널리스트 역시 8월의 단기 숨 고르기를 거쳐 9월부터 본격적인 반등 국면이 열릴 것으로 전망했다. 이 애널리스트는 “8월은 글로벌 임상 모멘텀 호조와 별개로 빅파마의 보수적인 딜 집행과 비수기가 맞물리며 단기 기술수출 모멘텀 공백기였다”며 “9월부터 글로벌 학회와 주요 임상 데이터 발표가 재개되면서 시장의 관심이 개별 R&D 이벤트로 다시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 봤다.
연일 내림세를 타던 가상자산 대장주 비트코인이 지난 8월 20일 반등했다. 하루 만에 5% 넘게 오르며 7만달러선을 회복했고 이후 7만8000달러 안팎까지 올라섰다. 하지만 상승세는 다시 주춤한 모습이다.
비트코인 시장을 움직이는 힘은 예전과 달라지고 있다. 한때 개인투자자가 가격을 밀어 올리고 시장을 흔들었다면 이제는 월가의 기관투자가와 각국 정부가 시장의 주요 변수로 등장했다.
비트코인의 다음 방향을 결정할 변수도 그만큼 복잡해졌다. 미국의 금리와 유동성 같은 거시경제 환경부터 가상자산 제도화, 기관·기업의 비트코인 매수세, 비트코인 고유의 수급 구조까지 얽혀 있다. 그렇다면 투자자들은 무엇을 봐야 할까. 세 가지 관점에서 짚어봤다.
◆9월 중순 비트코인 흔들 변수 쏟아진다
비트코인 가격의 단기 방향을 가를 변수들이 9월 중순에 몰려 있다. 미국 소비자물가부터 중앙은행(Fed)의 통화정책, 일본은행(BOJ)의 금리 결정, 미국 가상자산 규제 법안까지 다층적인 거시 변수들이 맞물려 있다. 최근 비트코인 가격이 금리와 국채시장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만큼 각 이벤트의 결과에 따라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첫 번째 분수령은 9월 11일 발표되는 미국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다. 시장에 중요한 것은 물가 수준 자체보다 이를 바라보는 Fed의 시선이다. 9월 금리를 결정짓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15~16일 열린다. 물가가 예상보다 높게 나오면 인플레이션(물가의 지속적인 상승) 경계가 커지면서 금리인상 기대가 높아질 수 있다. 금리가 오르면 채권 등 비교적 안전한 자산에서도 더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어 변동성이 큰 비트코인 같은 위험자산의 상대적인 투자 매력이 떨어진다.
시장에서는 9월 금리 동결 전망이 우세하지만 인플레이션과 고용 지표에 따라 추가 인상 가능성까지 열어둬야 한다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지난 8월 잭슨홀 미팅에서 케빈 워시 Fed 의장은 연설에서 ‘인플레이션’을 25번 넘게 언급하며 물가에 대한 강한 경계감을 드러냈다. 금리 경로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9월 FOMC는 단기 시장의 주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비트코인의 구조적 하단을 좌우할 핵심 변수는 미국 정치권의 가상자산 입법 속도다. 그중 가상자산 시장의 최대 관심사는 시장구조 체계를 정립하는 ‘클래리티 법안(CLARITY Act)’의 통과 여부다.
미국 상원은 9월 15일 법안 처리 절차에 들어갈지를 결정하는 표결을 진행할 예정이다. 최종 법안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 표결은 아니지만 시장에서는 이번 표결이 법안의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시험대로 보고 있다.
클래리티 법안은 그동안 시장의 발목을 잡아 온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간의 관할권 다툼을 정리하고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디지털 상품’으로 정립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업계에서는 법안이 통과되면 규제 불확실성 때문에 망설이던 연기금·국부펀드 등 기관 자금이 비트코인 시장에 더 쉽게 유입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폴리마켓, 칼시 등 글로벌 예측시장에서는 9월 중 해당 법안이 통과될 확률을 14~20% 수준으로 낮게 점치고 있다. 당파 간 윤리 조항(트럼프 대통령 가족 관련 문구) 갈등으로 9월 15일 표결이 사실상 부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며 실패 시 처리는 중간선거 이후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다만 법안 처리가 지연되더라도 SEC와 CFTC가 행정 지침 형태로 제도화 공백을 메워가는 흐름은 이어질 전망이다.
강력한 하락 압력 변수는 9월 17~18일 예정된 BOJ의 금융정책결정회의다. BOJ가 추가 금리인상에 나설 경우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엔캐리트레이드 청산’이 가속화할 수 있다.
엔캐리트레이드는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일본에서 엔화를 빌려 미국 주식이나 채권, 비트코인 등 수익률이 높은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이다. 일본 금리가 오르고 엔화 가치까지 상승하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엔화로 빌린 자금의 부담이 커지고 기존 투자자산을 팔아 엔화 부채를 갚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24시간 거래되고 유동성이 풍부한 비트코인은 가장 먼저 매도 청산 대상이 되기 쉽다. 실제 2024년 7월 31일 BOJ가 기준금리를 0.1%에서 0.25%로 깜짝 올린 뒤 엔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엔캐리트레이드 청산이 본격화했고 8월 5일 글로벌 위험자산 매도세가 확대했다. 당시 비트코인은 하루 새 약 17% 떨어지며 5만달러선이 깨졌다.
최근 급등에 영향을 줬던 미 재무부의 장기 국채 바이백 확대 소식은 이번엔 약발이 다한 모습이다. 지난 8월만 해도 바이백 확대 방침 발표는 ‘정부가 국채금리 상승을 억제하겠다’는 강한 정책 신호로 받아들여지며 국채금리와 달러가 하락하고 비트코인이 급등했다. 바이백 확대가 비트코인 상승의 주요 촉매 중 하나로 작용한 셈이다.
하지만 9월 시장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미 재무부는 9일 10~20년물 국채를 최대 60억달러 규모로 매입하겠다고 밝혔지만 시장이 기대했던 수준에는 못 미쳤다는 평가가 나왔다. 발표 이후 10년물 금리는 장중 4.85%대까지 올랐고 비트코인도 소폭 하락했다.
이번 이벤트는 국채 바이백의 한계도 보여준다. 바이백은 재무부가 기존에 발행한 국채를 다시 사들여 시장의 유동성과 수급을 개선하는 성격이 강하다. 시중에 돈을 직접 풀어주는 정책은 아니다. 바이백만으로 장기금리를 계속 낮추기는 어려운 이유다.
◆마르는 공급, 비트코인의 하단을 받칠까
단기적으로 금리와 유동성에 따라 가격이 출렁이더라도 비트코인 시장의 수급 구조 자체는 과거보다 타이트해지고 있다. 반감기로 신규 공급이 줄어든 데다 채굴기업과 장기 투자자들이 보유 물량을 시장에 내놓는 빈도도 낮아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비트코인을 전략적 준비자산으로 관리하기 시작한다면 시장에 풀리는 물량은 더욱 줄어들 수 있다.
우선 비트코인의 자체적인 공급 측면에서는 단기 하락 압력을 완화할 수 있는 구조적 요인이 있다. 2024년 4월 네 번째 반감기를 거치면서 비트코인의 하루 신규 채굴량은 약 900개에서 450개 수준으로 절반 줄었다. 시장에 새로 유입되는 비트코인 물량 자체가 감소한 것이다.
2028년 다섯 번째 반감기가 시작하면 하루 신규 채굴량이 다시 약 225개로 줄어들며 희소성은 더욱 극대화된다. 반감기는 비트코인의 총 발행량을 2100만 개로 제한하고 신규 공급 속도를 점차 낮추는 핵심 장치다.
민간에서도 시장에 풀리는 비트코인 물량이 줄어드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대형 상장 채굴기업들이 채굴한 비트코인을 즉시 매도하기보다 보유하거나 이를 담보로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장기 투자자들의 매도도 제한적이다. 비트코인을 거래소에서 개인 지갑 등으로 옮겨 장기 보유하는 흐름이 이어지면서 시장에서 바로 거래할 수 있는 물량이 줄고 있다.
중앙화 거래소(CEX)의 비트코인 잔고 감소도 이런 흐름을 보여주는 지표다. 블록체인 분석 플랫폼 크립토퀀트 등에 따르면 CEX의 비트코인 보유량은 9월 약 271만 개 수준으로 줄어 수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거래소 잔고가 줄었다는 것은 당장 매도할 수 있는 물량이 감소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국가 차원의 장기 보유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 비트코인을 전략자산으로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3월 행정명령을 통해 ‘전략적 비트코인 준비금’ 체제를 구축했다. 미국 재무부가 정부 보유 비트코인을 통합 관리하고 압수·몰수 등으로 확보한 물량을 준비금으로 이전하는 내용이다. 비트코인을 민간 가상자산이 아니라 국가가 장기적으로 보유할 주권적 전략자산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의회에서는 이를 법률로 고착화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2026년 5월 하원의원 닉 베기치 등이 발의한 ‘미국 준비금 현대화법(ARMA)’은 재무부 내에 전략적 비트코인 준비금을 설치하고 연방정부가 보유한 비트코인을 한곳에 통합하도록 했다. 준비금에 편입된 비트코인은 최소 20년간 매각·교환·담보 설정을 할 수 없도록 하고 분기별 보유 현황을 암호학적으로 검증해 공개하는 ‘보유 증명(Proof of Reserve)’ 체계도 마련하도록 했다.
다만 공급 감소만으로 가격 상승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가격은 신규 공급뿐 아니라 시장의 매수세와 기존 보유자들의 매도 여부에 함께 좌우된다.
◆월가로 들어간 비트코인, 수급의 질이 달라졌다
사실 가장 큰 변화는 월가가 비트코인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과거 개인투자자 중심의 시장이었던 비트코인은 2024년 1월 미국 SEC가 현물 비트코인 상장지수상품(ETF)의 상장을 승인하면서 전통 금융시장을 통한 투자 경로를 확보했다. 투자자가 개인키를 직접 관리하거나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비트코인을 매매하지 않고도 기존 증권계좌를 통해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ETF는 비트코인 시장에 새로운 자금이 들어오는 통로인 동시에 빠져나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기관투자가와 자산관리사, 연기금 등 전통 금융권의 자금이 유입될 수 있는 길이 넓어진 만큼 시장의 자금 흐름 자체가 커졌다. 반대로 시장 상황이 악화되면 ETF를 통한 자금 유출이 비트코인 매도 압력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금융 데이터 플랫폼 소소밸류에 따르면 미국 현물 비트코인 ETF에 지난 8월 중순 이후 3주간 약 38억달러의 자금이 순유입됐다. 올해 들어 최장기간, 최대규모의 순유입이다. 이 기간 비트코인 가격은 17% 뛰었다. 현물 비트코인 ETF 출시 이후 누적 순유입액은 556억달러에 달했다.
비트코인을 투자자산으로 활용하는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선물 시장과 금융회사들의 거래·수탁 서비스가 확대된 데 이어 기업들도 비트코인을 재무자산으로 편입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스트래티지다. 주식과 전환사채 등으로 자금을 조달해 비트코인을 사들이는 전략을 이어가면서, 비트코인을 기업의 핵심 재무자산으로 삼는 ‘비트코인 트레저리(Bitcoin Treasury)’라는 새로운 기업 모델을 제시했다. 이제 스트래티지의 비트코인 매입·매도 움직임 자체가 비트코인 투자 전략을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에도 월가의 진입이 본격화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뱅크오브아메리카·씨티 등 21개 글로벌 금융기관이 달러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하면서 비은행 중심의 시장에 은행권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규제 체계가 마련된 것도 은행권 진입을 뒷받침하고 있다.
③금융권이 코인거래소 삼킨다…2조 베팅 뒤엔 ‘미래 금융’ 계산법
여의도 금융권이 가상자산 거래소를 삼키기 시작했다. 금융사들이 잇달아 거래소 지분 확보에 나서면서 전통 금융과 디지털자산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거래소를 단순한 코인 거래 플랫폼이 아닌 ‘미래 금융의 인프라’로 보고 선점하려는 움직임이다.
반면 거래소 업계의 셈법은 복잡해지고 있다. 가상자산 시장의 거래가 위축되면서 주요 거래소의 실적이 크게 악화한 데다 ‘수수료 0원’ 출혈경쟁까지 벌어지며 기존 수익모델이 흔들리고 있다. 새로운 사업 기반이 될 가상자산 2단계 입법(디지털자산기본법)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거래소의 사업 다각화에도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코인거래소에 2조 베팅한 금융권 미래에셋·한투·하나·삼성 참전
가상자산 거래소를 둘러싼 금융권의 지분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올해 금융권이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지분 확보에 투입한 금액만 2조원을 웃돈다. 이 가운데 하나은행의 투자를 제외하면 증권사 자금이 1조원 넘게 들어갔다. 과거 금융사들이 거래소와 제휴하거나 디지털자산 관련 서비스를 준비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최근에는 직접 거래소에 투자해 주요 주주로 올라서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곳은 미래에셋이다. 미래에셋컨설팅은 지난 2월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 운영사 지분 92.06%를 인수하기로 한데 이어 7월 추가 지분을 확보해 현재 97.15%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 8월에는 500억원 규모의 추가 증자에도 나섰다. 신주 1007만8614주를 미래에셋컨설팅이 전량 인수했다. 사업 확장에 쓸 실탄을 확보한 셈이다.
아예 간판도 갈아엎었다. 코빗은 지난 8월 법인명을 디지털엑스로 변경했고 9월 16일부터 서비스명도 바꾼다.
코인원에는 한국투자증권이 지난 5월 약 20%를 투자해 OKX벤처스와 공동으로 3대 주주로 올라섰다. 기존 최대주주인 차명훈 대표(30.36%)와 2대 주주 컴투스홀딩스(24.54%)에 이어 주요 주주로 합류하면서 금융권과 거래소의 결합이 지분 투자 형태로 진행되는 모습이다.
시장점유율 선두인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 역시 대형 금융 자본의 유입이 잇따르고 있다. 한화투자증권은 두나무 지분 3.9%를 추가 취득해 지분율을 9.84%로 늘렸다. 삼성증권은 두나무 지분 2%를 확보했다. 삼성SDS와 삼성카드까지 합치면 삼성 계열 3사의 지분은 4%다. 하나금융지주는 하나은행을 통해 카카오인베스트먼트가 보유했던 두나무 지분 6.55%를 약 1조300억원에 인수하며 4대 주주로 올라섰다.
글로벌 거래소 바이낸스의 투자를 받은 고팍스를 제외하고 국내 원화 거래소 중 금융권의 전략적 투자가 확정되지 않은 곳은 빗썸뿐이다. 키움증권이 지분 투자를 검토하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투자 계획은 정해지지 않았다.
◆금융권의 계산은
거래소는 이미 대규모 거래가 이뤄지는 플랫폼을 확보하고 있다. 가상자산의 매매와 보관 등 디지털자산 시장에 필요한 인프라도 갖추고 있다. 향후 법인의 가상자산 투자와 보유가 제도적으로 허용되면 기업과 기관을 대상으로 한 거래·수탁·자산관리 등 새로운 금융 수요가 만들어질 수 있다. 금융사 입장에서는 자체적으로 디지털자산 플랫폼을 새로 구축하는 것보다 기존 거래소의 지분을 확보하는 편이 시장에 빠르게 진입할 수 있는 셈이다.
여의도 금융권이 거래소 인프라에 베팅하는 계산 속에는 ‘토큰증권(STO)’도 있다. 국회는 올해 초 전자증권법과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며 STO 제도화에 본격 착수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블록체인(분산원장)을 법적 효력이 있는 증권 계좌부로 인정하고 조각투자 등 비정형 증권의 유통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는 것이다. 공포 후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27년 시행이 목표다.
이는 사실상 증권사들에 블록체인 기반 거래 시장 진입을 허용한 것과 다름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금까지 조각투자 플랫폼이나 핀테크 기업 중심으로 형성돼 있던 STO 시장에 증권사가 직접 발행과 유통의 주체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들이 STO에 적극적인 이유도 분명하다. 주식 위탁매매 수수료는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과 전통 투자은행(IB) 시장은 위축되는 흐름이다. 새로운 수익원이 필요한 상황에서 STO는 부동산, 미술품, 명품, 한우, 채권 등 거의 모든 자산을 거래 대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구조라는 점에서 차세대 먹거리로 꼽힌다.
아직까지 증권사의 가상자산 직접 거래가 법으로 명확히 허용된 것은 아니지만 업계는 금융 플랫폼이 디지털자산 영역으로 확장할 여지가 점차 커지고 있다고 본다. 특히 STO, 스테이블코인, 수탁(커스터디) 등 인프라 영역부터 금융권의 진입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수수료 0원’ 치킨게임
금융권이 거대한 미래 인프라를 그리는 것과 달리 기존 가상자산 거래소들이 당장 마주한 현실은 냉혹하다. 어쨌거나 아직은 국내 거래소들의 경우 개인투자자를 중심으로 한 거래 수수료 수입이 매출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코인원과 디지털엑스(옛 코빗)의 영업수익은 사실상 전부 수수료에서 발생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두나무는 거래 플랫폼 수수료가 전체 영업수익의 96.9%를 차지했고 빗썸 역시 전체 영업수익 대부분을 가상자산 거래 수수료로 벌어들였다.
이런 수익구조를 흔든 것은 대형 금융사를 등에 업은 후발 거래소들의 ‘수수료 0원’ 정책이다. 디지털엑스는 지난 8월 24일부터 1년간 원화마켓 전 종목의 거래 수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코인원도 이틀 뒤인 26일부터 전 종목의 거래 수수료를 0%로 낮췄다. 횟수나 자격 제한 없이 바우처를 다시 발급받을 수 있어 별도 공지가 나올 때까지 사실상 무료 거래가 가능한 방식이다.
코인원의 점유율은 수수료 무료화 이후 눈에 띄게 뛰었다. 올해 상반기만 해도 3%에 못 미쳤던 시장점유율이 9월 9일 기준 12.99%까지 올라왔다(코인게코). 앞서 코인원은 지난 7월 말 거래소 앱에 한국투자증권의 웹트레이딩시스템(WTS)을 연동하며 주식 거래까지 한 플랫폼 안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연동 서비스 출시 직후 신규 가입자가 전월보다 85% 늘어난 만큼 금융권과의 결합이 거래소의 고객 기반 확대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으로 풀이된다. 수수료 경쟁과 금융서비스 결합이 맞물리면서 후발 거래소들이 기존 시장 구도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후발 거래소들의 공세에 업계 1·2위인 업비트와 빗썸도 대응에 나섰다. 업비트는 원화마켓에 상장된 일부 스테이블코인의 거래 수수료를 한시적으로 받지 않기로 했고 빗썸은 원화마켓 전체 종목을 대상으로 오픈 API 거래 수수료를 면제했다.
◆실적 쇼크 직격탄
가상자산 거래소는 거래가 줄거나 수수료율이 낮아지면 실적이 곧바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코인 시장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시들면서 두나무의 올해 상반기 연결 기준 영업수익은 4081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9.1%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1115억원으로 79.7% 줄었고 순이익도 1084억원에 그치며 전년 동기 대비 74.1% 감소했다.
빗썸 역시 매출과 이익이 동시에 크게 줄었다. 상반기 매출은 1688억원으로 1년 전보다 48.7% 감소했으며 영업이익은 149억원으로 83.4% 급감했다. 순이익은 지난해 상반기 550억원 흑자에서 올해 1087억원 순손실로 돌아섰다.
수익성 지표도 악화했다. 두나무의 상반기 영업이익률은 27.3%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1.2%포인트 떨어졌다. 빗썸 역시 영업이익률이 27.4%에서 8.8%로 18.6%포인트 낮아졌다.
문제는 거래소들이 수수료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새로운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는 데 필요한 제도적 기반도 아직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업 기반으로 꼽히는 가상자산 2단계 입법은 당정 간 이견으로 통합안 마련과 발의가 늦어지고 있다.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국회 대관 인력들이 입법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정무위원회 구성도 바뀌면서 다시 설득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며 “우선순위에서도 밀려 있어 연내 국회를 통과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민주당의 이재명이냐, 이재명의 민주당이냐. 이게 지지자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의 원인"이라고 민주당 내 갈등을 분석했다.
진 교수는 13일 새벽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조털래유'는 민주당이 대통령보다 먼저이고, 우리가 그 당의 주류이며, 이재명도 우리가 대통령으로 세운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사실 이게 민주당의 전통이긴 하다. 반면 친명은 당보다 대통령이 먼저이고, 우리가 그를 지지하므로, 우리가 그 당의 새 주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라며 이 같이 말했다.
그는 "검찰개혁이고 뭐고 다 가짜 의제이고, 이들 사이의 쟁점은 하나"라며 "공소취소와 연임개헌. 문조털래유는 이재명이 이걸 추진했다가는 민주당이 파탄날 거라는 걸 안다. 따라서 이재명이라는 한 개인이 대통령직 수행하는 것까지는 지지 혹은 용인해도, 그 직을 자기 개인을 위해 사용하다가 민주당이라는 밑천까지 날리는 것만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너 혼자 살겠다고 무리수 두다가 통째로 집안 말아먹지 말고 조용히 임기만 채우고 물러나란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시민이 '공소취소는 미친 짓'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라며 "그는 연임개헌을 위한 정계개편의 계획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게 한갓 음모론이 아니라는 것은 국회의장의 뜬금없는 발언, 대통령과 몇몇 국힘 의원들의 골프 회동을 통해 드러났다"라고 했다.
그는 "문제는 이재명으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데에 있다"며 "이화영이 이미 대북송금으로 중형이 확정된 상태에서 사실상 주범이나 다름없는 공범이 무죄를 받는을 수는 없다. 그러니 재임 중에 대통령의 권한을 사용해 무조건 공소취소를 해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에 정청래가 협조해 줄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억지로 김기현을 세웠던 윤석열을 벤치마킹해서 억지로 김민석를 당 대표로 만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그렇기에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김승원을 임명할 것이고, 김승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공소취소를 추진할 것"이라며 "그럼 지지율은 더 바닥으로 떨어져, 바로 레임덕에 빠질 것이다. 윤석열이 보여줬듯이 극심한 위기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현실감각을 잃고 자기만의 가상세계로 이주하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래서 결국 비합리적인 판단과 함께 치명적인 무리수를 두게 되고 그 경우 이 나라는 또 다시 극심한 혼란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며 "그러니 공소취소 포기하고 연임개헌도 포기하고, 내란척결이니 뭐니 철지난 쉰소리로 갈라치기 그만하고, 오디세우스가 제 몸을 묶듯이 SNS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손가락에 깁스 하고, 민망한 자기영웅화와 보여주기식 만기친람도 그만하시고, 그냥 겸손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다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가운데 퇴임하시는 게 정답"이라고 당부했다.
그는 "나 혼자 살겠다고 국가 시스템 망가뜨리지 말고, 퇴임 후엔 다른 국민과 똑같이 재판 받으라"라며 "정말 기소가 조작됐다면 바로 공소기각 날텐데, 뭘 걱정하는가. 설사 유죄가 난들 국민의 사랑을 받은 대통령을 국민들이 오래 감옥에 두진 않을 것이다. 정도를 걸으라"라고 밝혔다.
킁킁이2026.09.13
하..저인간 말에 동의될 만큼 상황이 처참하다...
샤인2026.09.13
공소취소위해 김승원을 지명한거 보면 자기죄를 본인도 알고 있다는건데 국민들이 호구인가 그걸 그냥 보고있게
솔나무2026.09.13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은 민주당의 대통령이고 이재명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민주당을 이용한거 뿐이다. 이러니 이재명은 자기 자신만의 만주당을 만들기 위해 기존 지지층을 갈라치기로 조롱하고 자기에 반하는 세력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명 신천지 삼자연합으로 조리돌림하는거다.
천왕봉2026.09.13
맞습니다. 현실의 팩트를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진중권 교수님 화이팅입니다.
오봉산2026.09.13
안돼? 윤짜장 옆방 비워놨다. 내년초에 탄핵해서 ㄲ콩밥 먹어야지?
솔나무2026.09.13
문조털래유로 갈라치기하면 자기를 따르는 당원들이 압도적일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거지 이번 전당대회에서 호남에 반도체 메가프로젝트까지 강행했는데도 실제 차이는 거의 없다는거지 아주 노골적으로 전당대회에 개입한 결과치고는 초라했고 그걸로 말미암아 오히려 역풍이 불어 지지율 폭락의 시발점이 된거다. 한마디로 정치를 너무 쉽게보고 당원들을 무시한 댓가인거지 덕분에 이재명의 실체를 속속들이 알게 되어서 두번 다시 속지 않게된거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당선인(6선·경기 하남갑)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5주기 추도사에서 "큰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추 당선인은 과거 새천년민주당 시절 노 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다 결국 찬성으로 입장을 바꾼 바 있습니다.
25일 야권에 따르면 추 당선인은 전날 페이스북에 "15번 째 추도식에서 큰 고통을 느낀다"며 "생전 노무현 대통령님의 말씀이 우리를 채찍질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작은 계산과 두려움에 검찰독재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빚어내고 국민을 참담한 고통 속에 빠뜨렸다"며 "노무현 정신은 두려움 없는 실천"이라고 말했답니다. 노 전 대통령을 '검찰개혁'의 명분으로 내세운 셈이다.
추 당선인은 지난 2004년 3월 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새천년민주당 시절 노 전 대통령 탄핵 사태 중 "노 대통령의 탄핵사유는 줄이고 줄여도 책자로 만들 정도"라고 했다.
이후 5월 노 전 대통령의 탄핵안은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됐고, 민주당이 총선에서 참패하며 역풍이 일었다. 당시 추 의원은 "내 정치 인생 중 가장 큰 과오가 탄핵에 찬성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탄핵으로 인한 여론의 거센 반발에 추 의원은 '삼보일배'를 하며 사과를 했던 일화도 유명하답니다.
추 당선인은 지난 2020년 노 전 대통령의 영정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고 "전직 대통령도, 전직 총리도, 전직 장관도 가혹한 수사활극에 희생되고 말았다"며 "흔들림 없이 전진할 것이다. 두려움 없이 나아갈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본인이 탄핵시킨 노 전 대통령을 이용하는 것은 구차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추 당선인은 최근 이른바 '명심'(이재명 대표의 의중)을 내세우며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경선에 나섰다가 같은 당 우원식 의원에 패배했다. 민주당 내에서 추 당선인 개인에 대한 비토 여론이 형성된 탓이라는 게 패배 원인으로 거론된답니다.
아울러 민주당 안팎에선 추 당선인을 차기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 앉히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법사위는 법안의 최종 관문으로 18개 상임위 중 핵심으로 꼽힌다. 다만 민주당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17대 국회부터 법사위원장을 원내 제2당이 맡아온 관례를 깨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노무현 탄핵' 추미애, 고인 센터서 간담회…노 지지자 반발 -2023. 7. 14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당시 탄핵 소추에 앞장섰던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노무현 시민센터에서 간담회를 열기로 해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14일 정치권에 따르면 추미애 전 장관은 오는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무현 시민센터 다목적홀에서 간담회를 연답니다.
행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지지자들 모임인 '잼잼자원봉사단'이 주최하고 '시민참여광장'이 주관한다.
주최 측은 커뮤니티 카페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이러한 소식을 공지하며 "참석하시는 선착순 깨시민 100분에게는 '함께, 우리 이재명' 책과 잼잼 열쇠고리를 증정한다"고 홍보했다.
추미애 전 장관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노 대통령의 탄핵사유는 줄이고 줄여도 책자로 만들 정도"라며 목소리를 높인 인물이다. "노 대통령이 국정불안을 부추겼다. 탄핵 표결 때 찬성하겠다. 노 대통령이 대국민 협박을 한 것을 보고 탄핵하지 말자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고도 발언했다.
이에 따라 온라인상에선 간담회 장소 선별을 두고 '고인 모욕'이라는 반발이 잇따랐다. 한 누리꾼은 "간담회는 이재명 지지자들이 주최하고 노무현 탄핵에 앞장선 추미애가 참석한다. 노골적으로 고인을 모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부 지지자들은 추미애 전 장관에게 간담회 장소를 대관해 준 노무현 재단 측에도 불만을 드러냈다. 간담회 장소는 노 전 대통령의 생전 뜻을 기려 지난해 9월 문을 열었다. 재단 이사장인 정세균 전 대표를 향해 대관을 취소해야 한다는 등의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이재명 대표 지지자들이 간담회를 주최하는 것을 놓고서도 추 전 장관의 행보와 맞물려 주목받고 있다.
지난 대선 이후 정치적 활동이 거의 없었던 추 전 장관은 최근 등판해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낙연 전 대표 등을 저격하고 있다. 문 정부 시절 장관직 사퇴 책임을 문 전 대통령과 청와대로 돌리며 친문 진영이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의 징계와 검찰 개혁에 미온적이었고 비판한 것이다.
반면 모두를 '돌려 까기' 하는 추 전 대표도 이재명 대표에게는 우호적이다. 이 대표를 '사법 피해자'라고 두둔하며 "자꾸 방탄국회라고 하니까 (이 대표가)다 내려놓겠다, 어떤 보호 장치도 내가 갖고 있지 않겠다고 하는데 참 눈물 나는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이를 두고 야권에선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 대표에 줄을 선 것으로 민주당 강성 지지층을 포섭하려는 탁란 정치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답니다.
역사의 향방을 바꾼 ‘결정적 사흘’을 들여다봅니다. '역사 빌런'들의 오만·오판·편견이 나라의 운명에 얼마만큼 큰 해악을 끼치는지를 보기 위해, 운명을 바꾼 결정적 72시간에 돋보기를 들이댑니다. 그 첫 번째 순서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이, 일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 폭격기를 조종한 미 육군항공대(현 공군) 대령 폴 티비츠.
“제군들, 오늘은 우리가 기다려온 날이다. 실패할지 성공할지는 잠시 후면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누구도 보지 못했고, 누구도 듣지 못했던 폭탄 한 발을 떨어뜨릴 것이다.”
미군 대령 폴 티비츠의 임무 브리핑
1945년 작전을 수행 중인 미 육군항공대 B-29 폭격기의 모습.
#1: 히로시마 상공
일본 세토 내해(瀬戸内海)는 혼슈, 큐슈, 시코쿠 세 섬으로 둘러싸인 바다다. 그 위를 세 대의 미 육군항공대(공군) B-29 폭격기가 날고 있었다. 그중 오늘 핵심 임무를 수행 중인 기체엔 ‘에놀라 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의 어머니 이름을 땄다.
이 기체엔 티비츠 대령과 11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 대위, 폭격장교 토머스 페러비 소령, 항법사 시어도어 반 커크 대위, 레이더 대응 담당 제이콥 비저 중위, 무기 담당 장교 윌리엄 파슨스 해군 대령, 파슨스의 보조 모리스 젭슨 소위, 레이더 조작수 조 스티보릭 병장, 후방 기관총 사수 조지 캐런 하사, 항공엔지니어 와이엇 듀젠베리 기술부사관, 항공엔지니어 보조 로버트 슈머드 병장, 무전병 리처드 넬슨 일병이 티비츠의 명령을 기다렸다.
에놀라 게이 내부엔 비장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은 그때까지 지구에 살았던 어떤 군인도 해본 적 없었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임무 실패?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적에게 잡히는 건 더욱 있어선 안 될 일. 그래서 이들 12명은 각자 주머니에 청산가리 캡슐 하나씩을 품고 있었다. 폭탄과 함께 산화하거나 불시착 땐 캡슐을 삼켜야 한다.
에놀라 게이가 어디로 가는지, 기장 티비츠도 몰랐다. 목표 도시는 셋 중 하나다. 직진해서 최우선 목표인 히로시마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왼쪽으로 틀어 고쿠라(기타큐슈)로 가야 할 수도 있다. 완전히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가사키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올 수도 있다. 모든 게 해당 도시의 날씨에 달려 있다. 다른 폭격과 달리 이번엔 레이더를 쓰지 말고 직접 육안으로 목표물을 확인한 뒤 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중요한 폭탄이길래.
“Y-3, Q-3, B-2, C-1.” 무전기를 통해 암호가 들려왔다. 그 뜻은 “1번 목표 지점에 구름이 적게 끼어 있다”는 뜻이다. 그제야 ‘그 폭탄’을 떨어뜨릴 목표가 결정됐다. 바로 혼슈 남서부 인구 35만 명의 도시 히로시마다. 미 공군이 히로시마의 운명을 결정한 이때가 1945년 8월 6일 오전 7시 30분이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B-29 폭격기(에놀라 게이)와 그 승무원들.
#2: 히로시마
그때 7시 30분. 에놀라 게이 아래 히로시마엔 공습경보가 발령되어 있었다. 인근에 미군 비행기들이 나타나 폭격할 수 있다는 경보였다. 경보는 7시 9분부터 시작됐지만, 히로시마 시민들은 별 동요 없이 월요일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폭격기 수십 대가 몰려온 것도 아니고 세 대만 온 걸 보고 다들 별일 없겠거니 생각했다. 그 무렵 미국의 B-29가 하도 자주 들이닥치는 바람에, 히로시마 시민 대부분이 이 폭격기를 잘 알고 있었다. ‘B상(さん)’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하긴 폭탄을 실었더라도, 요격기나 방공포 전력이 부족해 미군 폭격기를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 도시들은 몇 달째 미군 항공기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고, 미군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있어야 했다.
7시 31분. 여전히 미군 폭격기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음에도, 히로시마의 공습경보는 끝났고 사람들은 완전히 월요일 아침 일상으로 돌아갔다. 적기가 있어도 어쨌든 삶은 살아가야 했으니까. 어른들은 출근을, 아이들은 등교를 서둘렀다.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 촬영된 일본 히로시마 시내의 모습.
#3: 에놀라 게이
히로시마 하늘 위 에놀라 게이에선 폭탄 떨어뜨릴 준비가 한창이다. 시속 330㎞로 나는 티비츠의 시야에 히로시마 시가지가 들어왔다, 투하 목표 지점은 도시 중심부 오타강 위에 놓인 아이오이교(橋)다. T자 모양 3방향 다리라 하늘에서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목표물이다. 폭격장교 페러비 소령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케이, 다리 확인했습니다.”
준비가 끝났다. “페러비, 이제 자네 차롈세.” 기장 티비츠가 조종간을 놓고 조종석에 몸을 기대며 폭격장교에게 명령을 내렸다. “목표 지점 도착했습니다.” 페러비의 보고와 함께 에놀라 게이의 무장창이 열리고 폭탄이 투하됐다. 투하 시간 오전 8시 15분 17초. 43초 후면 저 폭탄은 터진다. 티비츠와 승무원들은 시력 보호를 위해 고글을 착용했다.
‘리틀 보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무게가 4.4톤에 달했던 무거운 폭탄을 떨구자, 에놀라 게이의 고도가 쑥 올라갔다. 티비츠는 폭발의 충격을 피하기 위해 기수를 오른쪽으로 꺾어 전속력으로 히로시마 도심을 빠져 나갔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모습. 티니안섬 미군 폭격 기지에서 찍힌 사진이다.
길이 3m, 무게 4.4톤의 리틀보이는 우라늄 농축 방식의 원자폭탄이다.
#4: 다시 히로시마
그 시각 히로시마 사람들은 미군 비행기가 떨구고 간 낙하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B상’이 대공포에 맞아 승무원이 낙하산으로 탈출하거나, 며칠 전처럼 뭔가 또 삐라 같은 유인물을 뿌리겠거니 생각했다. 최악의 살상 무기가 그들 머리 위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형성된 버섯구름.
8월 6일 오전 8시 16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실전에서 사용된 원자폭탄 리틀보이는 낙하산에 매달려 히로시마 도심 576m 상공에서 폭발했다. 폭탄은 원래 목표인 아이오이교를 살짝 빗나가, 다리에서 170m 떨어진 시마병원 안뜰 위에서 터졌다. 폭발 지점 바로 아래(그라운드 제로) 시마병원의 기온은 곧바로 섭씨 3,000~4,000도까지 치솟았고, 폭심지 반경 800m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한순간에 녹아내려 조그만 덩어리로 변해 버렸다. 히로시마 시내에 이런 둥근 덩어리가 수천 개 굴러다녔다. 구리로 만든 불상, 화강암까지 녹아내렸다.
열과 방사선만 뿜어져 나온 건 아니었다. 폭발로 인한 폭풍(blast)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시작해 시속 1만1,587㎞(마하 9.47)의 가공할 만한 속도로 반경 3.2㎞까지 뻗어나가 그 안의 건물과 사람을 찢어발겼다.
거대한 버섯구름은 상공 8㎞ 높이까지 피어 올랐다. 폭발 열기로 인한 화재 때문에 시내 7만6,000호의 가옥 중 7만 호가 불에 탔다. 도시에 있던 35만명 중 시민 11만 명과 군인 2만 명이 즉사하고, 그해 말까지 다시 14만 명이 더 사망했다.
“미국 비행기가 일본 육군 기지 히로시마에 폭탄 한 발을 떨어뜨렸습니다. 그 폭탄은 TNT 2만톤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현존하는 최고 폭탄보다 2,000배 이상 강력합니다. 그것은 원자폭탄이라고 불립니다.
일본인들은 진주만을 공습해 이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몇 배의 대가를 치렀고, 그 대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구상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파괴를 하늘로부터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원폭 투하 후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 성명
1945년 8월 6일 미군 비행기가 시코쿠 방면에서 촬영한 히로시마의 모습. 화적운(격렬한 화재로 인한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5: 그때 도쿄에선
수도 도쿄에선 히로시마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히로시마는 말 그대로 초토화 상태여서 보고할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폭의 위력은 히로시마의 모든 통신을 끊어 놓았다. 실시간으로 사람이 계속 죽어가고 있었지만, 상황을 몰랐던 일본 정부는 아무런 구호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그나마 몇 개의 보고와 뉴스가 단편적으로 도쿄에 도착하긴 했다. 오전 8시 30분, 히로시마 인근 구레에 있던 해군기지에서 저 멀리 버섯구름을 목격하고 도쿄 해군성에 “처음 보는 강력한 폭탄이 히로시마를 때렸다”는 첫 보고를 올렸다. 오전 10시엔 육군성에도 비슷한 보고가 들어갔고, 오후 2시 국영통신사 도메이뉴스(同盟通信)가 히로시마 폭격 소식을 1보로 보도했다.
그러나 도쿄에 있던 누구도 히로시마의 참상을 정확히 알긴 어려웠다. 혹시 ‘그 폭탄’이 떨어진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지만, 행여나 원폭이 맞다 하더라도 10만 명 이상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뭔가 큰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정확한 보고가 들어오지 않아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다. 오후가 되어서야 해군성 연락을 받은 사코미즈 히사쓰네 내각서기관장(현재의 관방장관)이 스즈키 간타로 내각총리대신에게 히로시마 폭격 소식을 알렸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1935년 모습.
일본 제124대 천황 히로히토(裕仁)도 8월 6일 늦은 오후쯤 히로시마 소식을 들은 것으로 보인다. 황거(皇居)로 관련 보고가 들어간 것이 6일 오후 7시다. 당시 시종무관이었던 오가타 겐이치 대령의 일기에는 “해군성이 구레 해군기지의 보고를 받고 전화 통보를 했는데, 오전 8시쯤 B-29 세 대가 특수 폭탄으로 공격을 해 도시가 대부분 무너졌다고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평소 모든 전황을 상세히 챙기려고 했던 히로히토의 특성을 감안하면 해군의 연락을 받은 시종무관이 이를 히로히토에게 알리지 않았을 리 없다.
히로시마에서 큰일이 터졌다는 사실이 알려졌음에도, 일본 황실·정부·군부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내각이나 대본영(전시 일본군 최고 통수기관) 그 어디서도 8월 6일 당일엔 히로시마 폭격과 관련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내각이 스즈키 총리 주재로 회의를 연 것은 다음 날인 8월 7일 오전이었다. 육군 수뇌부가 제대로 보고를 받은 것도 7일 새벽이 되어서였다.
1945년 6월 일본제국 내각.
맨 앞줄 중간이 스즈키 간타로 총리대신,
두 번째 줄 두 번째 입 부분이 살짝 가려진 인물이 주화파 거두인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이다
#6: 도쿄 미스터리
일본 수뇌부는 왜 가만히 있었을까. 원폭의 위력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보긴 어렵다. 사실 일본은 당시 비밀리에 원자탄을 만드는 중이었고, 원폭 제작에 참여한 핵물리학자들을 통해 이 폭탄의 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군 수뇌부의 일기나 회고록을 보면, 히로시마 폭격 직후 미국의 원폭 투하 가능성을 언급한 내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왜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꽤나 복합적이다. 정부, 군부, 황실이 각자 다른 이유로 히로시마 상황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우선 군부의 사정부터 보자. 일본 군부는 ‘집단 착란’에 가까운 현실 부정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배하며 전황을 도저히 뒤집을 수 없었음에도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치거나 “큰 승리를 거둬 더 나은 강화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일본 군부의 사형 선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군부 입장에선 생각하기도 싫은 변수였고, 그래서 군 수뇌부는 히로시마의 소식이 전해지고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원폭 성명’이 발표된 뒤에도 “트루먼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 있다”며 현실을 계속 부정했다.
정부와 황실은 이와는 좀 다른 이유로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내각의 주요 장관들과 황실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고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다면 군대를 해체해야 하고 정부 요인들은 다 전범으로 몰릴 것이며 히로히토는 폐위까지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소수의 장관과 황실 인사들은 중립국(당시는 1941년 소일 불가침조약이 유효)이었던 소련의 중재를 받아 미국과 강화 협상을 벌이려고 하는 중이었다. 군부의 목줄이 미국의 원자폭탄에, 정부황실의 운명은 소련의 아량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원폭 대응에서 가장 중요했던 첫날이 허무하게 지나가 버렸다. 구할 수 있었던 목숨은 더 죽어 나갔고, 그사이 미국은 두 번째 원폭을 떨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8월 6일이 저물었다.
1945년 10월 히로시마 시내. 원폭 투하의 피해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폐허의 모습이다.
4. 세도정치로 인한 국가적 혼란과 외세의 침략 속에서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했던 시기다.
고종 (26대)
초기에는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경복궁 재건, 서원 철폐 등 개혁을 추진했다.
이후 강화도 조약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순종 (27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하며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된다.
단종의 피눈물…
17세 어린 왕의 참혹했던 피의 역사
▲ 준비된 왕, 문종
때는 1452년, 조선의 다섯 번째 임금 문종이 다스리던 때야.
5월 14일 늦은 오후 한양 도성 안 경복궁 강녕전 앞에서 누군가 울부짖으며 큰 소리로 외쳐.
"어이는 대체 뭘 하느냐! 어째서 청심원을 올리지 않느냐!"
병석에 누워있던 문종의 병세가 갑자기 위급해진 거야. 어이를 찾으며 통곡하는 이는,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이었어. 어이가 황급히 청심원을 올리려는데, 이미 늦었어. 문종은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돼. 문종의 때이른 죽음은 조선왕조사를 통틀어 가장 안타까운 순간 중 하나로 꼽혀. 그 이유를 들어볼게.
"통치자로 봤었을 때는 모두가 준비된 세자, 국왕으로서의 문종이라는 존재는 굉장히 좀 기대가 됐던 군주. 만약에 그의 치세가 좀 오래됐다면, '세종 시즌2' 이렇게 볼 수 있었겠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종 때 주요 업적들의 과정들, 한글 창제라든지 국정 운영, 세금 제도 개선, 그리고 국방의 강화 같은 많은 정책에서 문종이 직접 수업도 받았고. 또 직접 참여하면서 특히 세종의 말년이나 후반기 때는 그 일을 대행해서 처리를 했었기 때문에. 문종이 만약에 오래 살았다 하면 굉장히 기대되는 군주가 아니었을까."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한마디로 준비된 왕. 성군이 될 자질을 타고난 임금이었거든.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야. 문종이 세자였을 때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맞이한 적이 있거든. 사신들이 문종을 보고는 감탄하며 말했대.
"이 나라는 산수가 빼어나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세자가 태어났구려."
-세종실록 세종 7년 윤7월 19일-
그 정도로 인물이 좋았나 봐. 그럼 단순히 잘생기기만 했냐? 아니야.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어. 당대 제일의 명필로 유명했는데.
"간혹 등불 아래에서 종이를 대하면 정치하고도 미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
-문종실록 문종 2년 5월 14일-
게다가 무예도 능해서 화를 쏘면 백발백중. 잘생겼는데 공부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거야. 그야말로 문과 무 모두 재능을 갖춘 인물이었던 거야. 천성이 너그럽고 효성이 지극해서 아버지 세종도 그렇게 아끼는 아들이었대. 세자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많은 업적을 남겼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힘을 보탰다고 해.
이게 다가 아니야. 비가 얼마나 왔는지 측정하는 측우기. 국가 단위로 표준화된 기상 측정기구로는 세계 최초야. 측우기를 누가 발명했는지 혹시 알아? 장영실이라고 알고 있잖아. 근데 문종이 발명한 거야. 문종이 측우기를 만든 이 날은, 발명의 날로 지정돼서 지금도 기념하고 있어.
문종이 만들어낸 게 또 있어. 이 물건의 이름은 화차야. 문종의 지시로 만들어진 화차는 화약의 힘으로 중신기전 100개를 연달아 발사하는 최첨단 신무기야. 요즘 시대로 하면 다연장 미사일이야. 화차는 훗날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활약을 하게 돼. 앞날을 내다본 문종의 이 대비가 조선을 지키는데 일조한 셈이야.
"세종의 뒤를 이어서 국방력 강화, 특히 화약무기나 이런 무기들을 개발해서 결국 임진왜란 때의 왜적을 막아낼 수 있는 힘에 있어서는 문종 때의 어떤 군사력 확충이나 시스템 확충이 있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8살 나이에 세자로 책봉돼서 무려 29년간 왕세자 교육을 받은 문종은, 직위하기 7년 전부터 세종을 대신해 국정을 돌보기도 했어. 말 그대로 준비된 왕이었던 거지. 모두들 기대했을 거야. 세종이 닦은 기반 위에 다시 한 번 문화 정치가 펼쳐지겠구나.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어. 문종의 죽음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
"신하들이 모두 목놓아 통곡하는 소리가 궁정에 진동하였지만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으며. 거리에 백성들도 슬퍼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문종실록 문종 2년 5월 14일-
이렇게 모두가 정말 진심으로 통곡을 한다는 건 어떤 분이었는지 알 수 있는 거지. 이들의 슬픔이 더욱 컸던 이유가 있어. 바로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가 너무 어렸거든.
"이때 사왕은 나이가 어려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하와 백성의 슬픔이 세종의 훙서 때보다 더하였다."
-문종실록 문종 2년 5월 14일-
문종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세자. 그게 단종이지. 조선의 여섯 번째 왕 단종이야.
이건 단종의 어진이야. 어진은 왕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말해. 1452년 5월 18일. 단종은 12살 어린 나이로 왕에 올라. 지금 같으면 초등학교 5학년, 너무 어릴 때잖아. 단종은 그 나이에 지엄한 왕의 자리에 올랐어.
▲ 홍위(弘暐)
단종은 문종이 28살 때 태어났어. 혼인 나고 14년 만에 힘들게 얻은 금지옥엽 외아들이야. 이 아이에게는 '홍위(弘暐)'라는 이름이 주어져. '넓을 홍'자에 '햇빛 위'자야. 밝은 햇살을 세상에 넓게 비추는 훌륭한 왕이 되기를, 그런 마음을 담지 않았을까. 세종실록에 보면 어린 홍위에 대한 기록이 있어.
"너 원손 이홍위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품성이 영명하니…"
-세종실록 세종30년 4월 3일-
홍위는 할아버지 세종의 총리를 받으며 왕이 될 교육을 받게 돼. 공부를 잘했을까? 아버지 문종이 아들 홍위를 평한 기록이 있어.
"너 원자 홍위는 덕이 온화하고 자질이 뛰어나며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니."
"인과 효는 천성으로 타고났고. 스승을 중히 여기고 높이어 학문이 날로 진취하였다."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7월 20일-
온화한 성품에 총명함까지. 그야말로 훌륭한 왕이 될 재질을 타고났던 거야. 게다가 홍위는 조선 건국 이래 유래 없는 정통성까지 지니고 있었어.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적장자, 그러니까 즉 정실 왕후가 낳은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게 원칙이야. 하지만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때까지는 한 번도 적장자가 왕이 된 적이 없었거든.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최초의 적장자 출신 왕이었어. 그런데 단종은 그런 문종의 적장자야. 2대에 걸쳐서 적장자의 혈통을 계승한, 왕수저. 이건 조선 왕조 사회 최고의 정통성이야.
하지만 그런 그에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어. 혹자는 이렇게 말해. 단종은 누구보다 외롭고 쓸쓸한 왕이었다고.
홍위가 태어난 날 모두가 탄생을 기뻐했어. 그중에서도 뒤늦게 손자를 보게 된 세종이 크게 기뻐했대. 그런데 정각 안에 있던 커다란 초가 갑자기 땅에 떨어져. 혹시 불길한 징조일까? 그 이튿날이 되자 궐 안에는 비통한 울음소리가 가득해. 홍위를 낳은 어머니 현덕왕후가 산후병으로 숨을 거둔 거야. 홍위는 어머니 품에 제대로 안겨 보지도 못하고,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손에 크게 돼.
그래서 홍위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던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 거기에 아버지 문종까지 모두 세상을 떠난 후였어. 이 어린 왕을 돌봐줄 왕실의 어른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거야. 고아와 같은 외로운 임금이었던 거지.
그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은 친누나 경혜공주뿐이야. 그래서일까? 홍위는 왕이 되고 난 후에도 자주 경혜공주의 집을 찾아 잠을 잤다고 해.
"친누나 한 명 있는 거죠. 누나는 15살에 결혼했거든요. 옆에 같이 지내다가 친누나가 떠난 거죠. 왕으로 즉위한 다음에, 또 즉위 전에도 틈이 나면 항상 단종이 계속 경혜 공주를 만나러 가요. 그러니까 둘간의 사이가 좋았구나를 알 수 있는 거고 애틋했던 거는 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넓은 궁과 많은 신하들도 홍위의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했던 것 같아. 혼자 남게 될 어린 아들이 염려가 됐던 걸까. 아버지 문종은 눈을 감기 전, 조정의 원로 대신들을 불러서 이런 부탁을 남겨.
"경들에게 이르니, 부디 어린 세자를 잘 보필하라."
이렇게 임금이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걸 '고명'이라고 해. 이때 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이, 당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이었어. 이들을 '고명대신'이라고 불러. 이들은 어린 왕을 보좌해서 나라일을 결정하도록 했어. 어떤 식으로 했는지 보여줄게.
예를 들어, 새로운 관리를 뽑아야 하는 상황이야. 어린 왕은 누가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잘 모를 거 아니야. 그래서 대신들이 후보자 명단을 올려. 대신들은 명단에 누런 종이를 붙여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미리 정해 표시를 해뒀어. 그럼 왕은 이 이름 밑에 점만 찍으면 돼. 누런 종이로 표시해서 정사를 결정했다고 해서 이를 '황표정사'라고 불러.
"어린 왕을 우리가 잘 보좌하기 위해서 왕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내용들을 우리가 알아서 해야겠다, 그렇게 해서 나온 대표적인 형태가 황표정사라 해서, 이것을 김종서나 황보인과 같은 신하들이 주도를 해나가는 거죠."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이렇게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시면, 왕이 아무리 어려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게 말이 좀 있었어. 황표정사를 통해서 고명대신들의 권한이 엄청 강해졌거든. 인사권을 가지게 되니까.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종서. 문신이면서도 국방개척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야. 세종 때 함길도 도절제사로 파견된 김종서는 육진개척을 총지휘해서 두만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만들었어. 지금의 한반도 지도로 만든 인물이지. 몸집은 작은데 얼마나 기세가 대단했냐 하면, 별명이 '대호'. 큰 호랑이라 불렀어.
단종 즉위 후 김종서는 조선 최고의 실력자로 떠오르게 돼. 그런데 황표정사를 두고 '그럼 어린 왕은 그냥 허수아비 아니야? 김종서가 대신 권력을 휘두르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잖아.
"황표정사 자체는 군주를 보좌하기 위한 방법이 맞습니다. 국왕의 나이가 어렸다라는 것이고, 국가를 이끌어가는 과정에 대해서 김종서가 선택을 해야 되는 부분은 분명히 있잖아요. 김종서라는 존재가 보여줬던 삶이라는 것은, 책임 있고 정말 독실하게 국가를 이끌어가는 전형적인 훌륭한 선비의 모습, 거의 그대로예요. 그 정도로 훌륭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김종서의 황표정사가 권력을 뺏기 위함이다. 이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그렇다면 단종은 그냥 허수아비 왕이었나? 그렇진 않아. 대신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직접 처리하는 일도 적지 않았어. 8살 때부터 왕도 교육을 잘 받아왔잖아. 황표정사를 하는 와중에도 또박또박 의견을 내고 판단력도 뛰어났다고 해. 설령 대신들이 반대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뜻을 꺾지 않았대.
한 가지 일례가 있는데, 단종이 왕이 된 다음에 문종의 큰 비석을 세워야 되는 거야. 신하들이 돌을 채취해서 가장 큰 비석을 만들어서 위대한 업적을 기려야 된다고 했어. 그런데 단종이 반대해. "지금 한겨울인데 그 돌을 캐느라고 우리 백성들이 고생을 한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따뜻하면 해라"는 거야. 다시 신하들이 안 된다고 했지만, 단종은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애민정신,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야.
"어린 나이지만 단종도 이미 8살에 세손으로 책봉이 되어서 기본적으로 왕이 되는 수업도 많이 받았고. 또 스스로도 할아버지가 세종이고 아버지가 문종. 그런 영향력 속에서 왕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알고 나름대로 그 역할을 하려고 했던 점은 분명합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국가의 정책을 논하는 신하들과의 대화 장면을 보더라도, 고집도 있고 판단도 좀 분별하고 했기 때문에 상당히 좀 똘똘했다. 몇 년 있으면 내가 정무를 다스린다, 이 단계로 가고 있었어요."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 수양대군의 등장
하지만 이런 상황에 불만을 느낀 인물이 있었어. 바로 수양대군.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 훗날 세조가 되는 인물이야.
"신하들의 권력이 상당히 비대해지고 왕은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왕권을 약화시키면서 김종서와 같은 신하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뭔가 이제 우리 왕실이 나서야 된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나는 바로 잡아야 되겠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수양대군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실제 수양대군은 이렇게 생겼대.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 다방면에서 뛰어났다고 해. 특히 무인의 기질을 타고 났는데 13살 때 아버지 세종과 사냥을 나간 자리에서 7개의 화살로 사슴 7마리를 잡았대. 백발 백중이었지. 잡고 봤더니 전부 목을 관통했다고 전해져. 게다가 행정적인 능력도 뛰어났어. 세종의 명에 따라 형 문종과 함께 여러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거든.
"수양대군 본인은 사실 되게 대단한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유능함은 정말 뛰어나요. 뛰어났기 때문에 세종이 자신의 업적과 일에 참여를 많이 시켰고요. 대부분 다 유능했기 때문에 했던 거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하지만 그는 서열상 왕이 될 수 없었어. 모든 면에서 뛰어난 형이 있었기 때문이지. 형이 왕위에 오르면서 수양은 점차 권력에서 멀어지게 돼. 하지만 형이 죽고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점차 권력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야. 겉으로는 어린 조카를 위해 권력을 손에 쥐려는 간신배들을 처내야 한다 했지만, 속으로는 스스로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그가 놓지 못한 게 있죠. 욕망을 놓지 못한 거죠. 이 모든 것들을 다 무너뜨리더라도 난 왕이 되고 싶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당시 조선의 권력은 삼각 구도로 나뉘어. 단종을 보좌하며 고명대신들을 이끄는 김종서. 그 반대편에선 수양대군. 그리고 세 번째로 안평대군.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문종과 수양대군의 친동생이야. 그를 '삼절'이라고 불렀어. 시, 서, 화에 모두 능한 인물을 삼절이라고 해. 시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한마디로 최고의 아티스트였던 거지. 안평을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면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떠올랐어. 그런데 이 삼각 구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해. 김종서가 이끄는 고명대신들이 안평대군과 왕래하면서 친분을 다지는 거야. 김종서와 안평, 그들이 같은 편에 서게 되면서 큰 세력을 이루게 돼.
"수양이 무쪽이었다면 안평대군은 문쪽이에요. 시, 서, 화에 능했고 상당히 좀 부드러운 인물.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안평대군과 함께 교류하고 손을 잡는 그런 모습을 보였고, 수양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김종서뿐만 아니라 안평대군도 제거를 해야 되겠다라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 수양대군과 한명회
이들에 비하면 수양대군의 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야. 그때 수양대군의 최측근 인사였던 권람이 이런 제안을 해.
"대군저하, 모름지기 삶과 죽음을 맡길 만한 자 두어 사람을 얻으시어 언제 닥칠지 모를 사태에 대비하소서."
그 말에 수양은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이 심히 옳다. 헌데 그런 일을 맡길 만한 자가 누가 있느냐."
그러자 권람이 기다렸다는 듯 수양한테 한 사람을 추천해.
"한명회라는 자가 그럴 만하옵니다."
권람이 한명회를 추천한 거야.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개가 범상치 않고 포부도 잡지 않았으나. 시운이 어긋나 벼슬이 낮아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께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뜻이 있으시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 7월 28일-
권람의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바로 한명회를 만나게 돼. 그리고 만나자마자 푹 빠져. 한명회의 손을 덥석 잡고는 진작에 만나지 못한 걸 아쉬워했대.
"김종서를 중심으로 하는 김종서, 안평대군 세력 대 수양대군과의 충돌인데, 결국 수양대군 입장에서도 김종서에 맞먹을 수 있는 자기 사람을 심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때 바로 스카우트 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명회었습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수양이 현 상황에 대해 어찌하면 좋을지 묻자 한명회는 이렇게 말해.
"대군께서는 종실의 맏어른으로 명분이 있으니 성공하지 못할 리가 만무합니다. 결단해야 할 때 하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 하였으니 익히 생각해보소서."
"한명회가 붙게 되면서 완전히 바뀝니다. 수양대군과 권람과 한명회가 붙게 되면서부터는 굉장히 노골적인 유능한 권력 집단이 바뀌어 가게 되고요. 한명회의 어떤 모사와 천재적인 조직 능력도 있겠지만, 최고의 명문 거족들이 모여서 라인들을 활용하고, 조직화된 그런 포섭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도 같이 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한명회와의 만남 이후 수양은 결심하게 돼. 권력을 쥐고 있는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처내기로. 수양과 한명회의 만남. 어쩌면 이 만남이 조선의 역사를 크게 뒤바꾼 사건이지 않을까.
이후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사 신숙주를 포섭해. 그밖에도 용맹한 무인들을 끌어모으며 세를 키워가기 시작해.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을 맞게 돼.
1453년 10월 10일 새벽.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등 신복들을 불러 이렇게 말해.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다. 내가 무사 몇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에 가서 그를 벨 것이야."
마침내 수양대군이 칼을 빼든 거야.
"수양대군이 명분을 취한 거거든요. 어린 왕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부득이하게 나섰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그는 신복 무사들을 불러 활 쏘기를 하고 낮부터 술자리를 가져. 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라 다들 마음껏 즐겼어. 해가 지자 수양은 무사들을 불러 모으고는 거사를 치르겠다는 뜻을 밝혀. 무사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일부는 찬성했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많아. "이 일은 마땅히 조종에 먼저 알려야 합니다", "단종께 먼저 보고해야 됩니다" 라면서. 심지어 겁을 먹고 도망가는 일들도 있었대. 다급해진 수양대군이 어쩌면 좋을지 망설이자 한명희가 말해.
"길 옆에 집을 짓는 일도 3년 안에 이루지 못하는 법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큰 일은 어떠하겠습니까? 이미 정하였으니 의견이 나뉜다 하여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마침내 마음을 정해. 옷을 붙잡고 만류하는 자들을 뿌리치고는 벌떡 일어나.
"내 한몸에 종사가 달렸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말 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수하 몇 명만 거느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해.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어. 이제 되돌릴 수 없는 거야.
잠시 후 김종서의 집. 쉬고 있는 김종서에게 수양대군이 왔다는 소식이 전해져. 김종서는 "몇이나 데려왔더냐? 사람이 적으면 맞이하고 많으면 쏘거라"라고 말했어. 그러자 "적습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와. 그 말을 듣고 김종서가 밖으로 나와 수양대군을 맞이해.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해. 수양대군이 멀찍이 서서 다가오질 않아.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대감께 한 가지 일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김종서가 여러 번 들기를 청했지만 끝까지 거절해. 하는 수 없이 김종서가 앞으로 나왔어. 안 들어오니까. 그러자 수양이 말해.
"내 오는 길에 사모 뿔이 떨어져 잃어버렸지 뭡니까. 대감의 사모 뿔을 좀 빌립시다."
사모는 관복을 입을 때 쓰는 검은색 비단 모자를 말해. 그 뒤쪽에 달린 뿔을 빌려달라는 거야. 이 말에 김종서는 긴장을 풀고는 바로 자신의 사모 뿔을 건네줬어. 수양대군이 이어서 말해.
"또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러자 함께 온 시종이 김종서에게 편지를 건네줘. 근데 밤이잖아.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아가. 김종서가 편지를 들어 달빛에 비춰보던 그때였어. 수양대군이 시종에게 눈짓을 보내. 그러자 시종이 품에서 철퇴를 꺼내더니, 김종서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쳐. 그의 아들이 놀라서 쓰러진 김종서 위에 엎드리자, 수양을 따라 무사가 칼을 뽑더니 휘둘러. 이렇게 개유년 10월 10일 밤, 마침내 수양대군의 쿠데타가 시작된 거야.
▲ 계유정난
한편 단종은 그날도 경혜공주의 집에서 자고 있었어. 늦은 밤 숙부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야. 수양대군이 이렇게 말해.
"김종서가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일이 급하여 먼저 아뢰지 못하고 이미 베어 죽였습니다."
단종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부모님과 할아버지 다 돌아가시고 정말 믿었던 사람인데. 단종 실록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단종이 환관에게 명해 궁중에 술과 음식을 내려 수양대군 이하 여러 재상들을 먹였다."
숙부의 공을 치하했다는 거야. 하지만 훗날 문신 이정형이 쓴 동각잡기에는 전혀 다르게 적혀있어.
"왕이 나이가 어리므로 놀라 일어나며 '숙부 나를 살려주오' 하였다. 수양이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아니하니 신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하고. 곧 명패를 내어 모든 재상을 부르고 금군을 부서를 나누어 각 곳에 지키게 하고. 또 사람으로 세 겹 문을 만들어 한명회로 하여금 살생부를 가지고 문 안에 앉았다가. 재상들이 첫 문에 들어오면 따르는 하인을 떼게 하고, 둘째 문에 들어오면 이름이 살부에 있는 사람은 무사를 시켜 철퇴로 쳐 죽였는데. 황보인 및 이조판서 조극관 등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동각잡기-
단종이 두려움에 떨면서 수양의 협박을 따랐다는 거야. 흔히 정사라고 말하는 단종실록의 내용과 후대에 기록된 내용은 왜 다른 걸까. 조선왕조 실록은 왕이 재위하는 동안 쓰여지는 게 아니야. 왕이 사망한 후, 다음 왕의 신하들이 편찬하게 돼 있어. 단종실록은 세조의 신하들이 쓴 거야. 그래서 세조의 입장에서 미화된 게 많다고 해.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잘 가려서 판단해야겠지. 그 다음 부분은 실록의 내용도 거의 같아.
그날 밤 대신들은 왕명을 받고 급히 입궐했어.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한명회였어. 한명회는 살생부를 보고 살려야 할 자 죽여야 할 자를 가려냈다고 해. 그렇게 수양대군의 반대편에 섰던 인물들은 죽임을 당하게 돼. 수양의 칼바람이 몰아치던 그때였어. 죽은 줄 알았던 김종서가 정신을 차려.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던 거야.
"수양대군은 그때 김종서가 이미 사망한 것으로 판단을 하고. 바로 자신의 집으로 가서 병력들을 다시 지휘를 하게 되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이때 김종서가 죽지는 않아요. 부상을 입습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김종서가 다시 깨어나서 원구를 시켜 돈의문을 지키는 자에게 달려가 고하게 하기를, '내가 밤에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죽게 되었으니. 속히 의정부에 고하여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싸 가지고 와서 구제하게 하고. 또 속히 안평대군에게 고하고 내금위를 보내도록 주상께 아뢰라. 내가 나를 다치게 한 자를 잡으려 한다."
-단종실록 단종 1년 10월 10일
그렇게 김종서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여자 옷을 입고 가마에 탄 채 황급히 입궐하려고 했어. 궁 안에 알려서 사태를 바로잡고자 했던 거야.
"조정에 들어가서 내가 충분히 소명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혹은 응당 신하라 하면 이런 억울한 상황에서도 조정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해서 국왕이 풀게 해야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되게 강직하거나 고지식한 선비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하지만 도성문이 굳게 닫혀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 할 수 없이 몸을 숨긴 김종서는 수양의 무사들에게 발각돼서 결국 죽임을 당하게 돼. 그렇게 하룻밤만에 조선의 권력 지도가 완전히 바뀌었어.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해가 떴지만 전날과는 다른 세상이야. 이제 수양대군의 세상이 열린 거지. 계유년 10월 10일 밤에 일어난 이 사건을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해. 정난은 말 그대로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야. 하지만 실상은 권력을 잡기 위해 칼을 휘두른 수양대군의 쿠데타였어.
"정난은 사실은 그냥 '혼란스러움을 바로잡는다' 한자 뜻 그대로예요. 내가 국익의 결단을 해서 김종서 무리를 처단함을 통해서 나라를 바로세웠다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승자의 기록이거든요. 조금 불쾌하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계유정난 이튿날 단종은 교지를 내려.
"과인이 어리고 부덕한 소치로 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만났으니 마땅히 종친의 견고함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좌하게 해서 군국의 중한 일을 모두 위임하여 총괄해 다스리게 하여 내가 직접 정무를 볼 날을 기다릴 것이다."
-단종실록 단종 1년 10월 11일
숙부에게 정사의 모든 권한을 맡기겠다는 얘기야. 과연 단종의 진심이었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수양대군은 스스로 관직에 올라. 관직 이름이 아주 길어. 영의정 부사 영경연 서운관사 겸판이병조사. 영의정과 이조판서, 병조판서까지 겸직한 거야.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 겸 행안부 장관 겸 국방부 장관이야. 그냥 혼자 다 해먹겠다는 거지. 그리고 자신을 도운 이들을 공신으로 책봉해서 굵직한 벼슬을 내려. 이제 조정은 수양대군의 세력이 완전히 장악해버렸어. 이 얘기를 들으니까 생각나는 사건 있지 않나?
"우리 가까운 현대사에서 12.12 군사 쿠데타 이후에 기억하실 거예요. 전두환이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장, 중앙정보부장 서리, 사회정화위원장, 다 요직을 겸직을 해요. 그런 장면하고도 매우 유사하고."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전두환 씨도 또 노태우 씨도 결국은 한국의 민주화의 시간을 지연시키고 그로 인해서 대단히 부정부폐라든지 군사문화의 악패 같은 것들을 사회에 남기고 5.18 민주화운동 같은 인권유린이나 유혈사태같은 것들을 벌이면서 너무나 많은 피해를 남겼단 말이에요. 그 부분에서 똑같지는 않지만 사실은 수양대군도 비판받을 만합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무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하룻밤만에 권력을 쥐게 되는 과정.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 1979년 일어난 12.12 군사 쿠데타와 아주 흡사해. 이렇게 보면 역사는 반복되는 게 아닐까 싶어.
권력을 쥔 후에도 수양의 칼춤은 계속 됐어. 남아있는 김종서 일파를 모두 죽이고, 친동생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을 강화도로 귀향을 보내. 그리고 얼마 후 사약을 내려 죽이게 돼. 혈육도 죽이는 거야.
단종은 자신의 손발이 끊어져 나가는 걸 지켜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왕이면서도 뜻대로 할 수 없는 고립무원의 신세. 오히려 숙부가 언제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공포스러운 상황이야.
"김종서 같은 사람한테 휘둘린다고 했을 때 그때가 허수아비가 아니라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이후에 모든 권력을 집중했을 때 그때부터 사실은 허수아비 왕으로 이제 전락을 하게 됩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정책 결정 같은 것들은 다 수양대군이 할 수밖에 없고. 수양대군에게 정책 결정을 올리는 사람들은 다 수양대군의 측근들인 거죠. 이때부터는 사실은 단종은 살아있는 산송장과 다름없다. 죽을 날을 기다리는, 이런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 왕위에서 물러나다
이제 실질적인 조선의 왕은 수양대군이야. 결국 이듬해인 단종 3년 윤달 6월 11일. 단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해.
"이제 대임을 숙부에게 전해주고자 한다."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거야. 그때 그의 나이 열다섯.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의 일이었어.
"왕위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거. 우리가 이런 걸 선위라고 하는데. 그 바로 직전에 수양대군이 주도해가지고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또 혜빈 양씨, 그리고 단종의 자형이었던 정종. 이런 사람들이 다 '역모를 꾀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처벌해야 된다'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해요. 결과적으로 여기에 떠밀려서 공식적으로는 단종이 이들의 유배를 명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계속 왕으로 있는 한, 이 사람들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이런 판단까지 하는 거죠. 자신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의 희생은 불을 보듯 뻔하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방법은 내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금성대군은 어릴 적부터 단종을 아껴주던 삼촌이야. 혜빈 양씨는 아기 때부터 단종을 맡아 키워준 어머니와 다름없어. 명목상으로는 아직 왕이었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 이들을 귀향 보내라고 명할 수밖에 없는 거야. 자신이 왕위에 있는 한 숙부는 내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고 죽일 게 뻔해. 그들을 위해서라도 왕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거지.
단종이 옥새를 건네는 순간에 대해 실록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수양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사양했지만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받아들였다"라고. 이게 과연 진실일까?
그렇게 단종은 상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물러나고 수양은 마침내 왕위를 차지했어. 이제 그는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된 거야.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는 단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쳐내. 단종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혜빈 양씨, 풍수로 단종을 지키고자 했던 목효지도 이때 죽임을 당했다.
▲ 상왕복위운동
한편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분한 눈물을 삼키는 이들이 있었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세종이 키워낸 집현전 출신의 문관들. 이들은 김종서 일파가 숙청당할 때는 소리를 내지 않았어.
"딱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까 성삼문, 박팽년 등은 '아 이거 아니구나. 결국은 왕을 몰아내는구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려고 하는 거구나' 깨닫고 뒤늦게 반응을 하는 거거든요. 너무 늦은 거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왕이 되기 위해 조카를 내몰고 자신의 형제까지 죽이는 세조의 모습은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 이들에게 세조는 선왕의 유훈을 저버린 반역자. 자신들이 섬길 왕은 단종이라고 생각한 거지. 이들은 뜻을 같이하는 문관들과 함께 은밀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해. 목적은 단종을 다시 왕으로 모시는 거야. 상왕의 복위를 도모한 거야. 이들의 계획은 이랬어.
"6월 초하루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연회가 있을 것이오. 그때 세조를 쳐야만 합니다."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는 정해진 예식대로 진행하게 돼. 연회장에선 아무도 무기를 지닐 수가 없어. 단, 별운검이라 불리는 호위 무관들은 무기를 지닌 채 왕을 호위하도록 되어 있어.
"마침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무인이었던 유응부가 별운검이라 해서 특별 경호원으로 그 자리에 임명이 되요. 진짜 하늘이 주신 기회다 해서, 이때 세조와 세조의 세자인 의경세자를 암살하자."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그런데 거사가 다가올수록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늘 하늘의 변화를 살폈어. 그런데 밤하늘에 빛을 내는 별이 긴 꼬리를 달고 움직이는 게 목격돼. 이런 걸 '혜성'이라고 하지. 이 조선시대 때는 혜성이 보이면 자연재해나 변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얘기했거든. 그런데 5월 한 달에만 혜성이 나타났다고 기록된 게 11번이나 돼. 심지어 훤한 대낮에도 혜성이 보였다고 해.
"혜성이 나타났다. 어떤 별이 남쪽으로 흘렀는데 모양이 주먹만 하고 꼬리 길이가 1장이나 되었다."
-세조실록 세조 2년 5월 10일-
게다가 궁중 안에 음식을 만드는 사홍방에서, 시루가 혼자 울었다는 얘기도 떠돌아. 떡시루. 과연 이게 좋은 징조일까? 아니면 불길한 징조일까?
그러는 사이 6월 초하루 거사일이 다가왔어. 이제 곧 조선의 운명이 정해지는 거야.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사신을 맞이할 때는 어전 안이 좁으니, 별운검을 없애도록 하라."
갑자기 세조가 별운검을 들이지 말라고 명한 거야. 그렇게 되면 거사는 시작도 못하잖아. 명을 들은 성삼문은 즉시 아뢰.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은 정해진 예법에 따라야 하니 별운검을 없애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지만 세조는 명을 거두지 않았어. 알고 보니 별운검을 없앤 것 역시, 한명회의 책략이었다고 해. 미리 연회장을 점검하고 오더니 어떤 촉을 느꼈던 걸까, 바로 세조에게 아뢰.
"연회 장소가 좁고 찌는 듯이 더우니 별운검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세조에게 별운검을 없애라고 청한 거야. 결국 거사는 실행하기도 전에 무산되고 말아. 별운검으로 뽑혔던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해. 하지만 성삼문 등 다른 문관들은 신중했어.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하니 훗날을 기약하도록 합시다"라며. 그리고 이 선택은 최악의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고 말아.
연회가 끝난 다음날, 그날은 낮인데도 어두웠다고 해. 두 명의 인물이 입궐에서 세조를 만나. 그의 정체는 성균관에서 문관으로 있는 김질과 그의 장인이었어. 성삼문의 제안을 받고 함께 상왕복위를 도모하던 그는 거사가 미뤄지자 불안에 떨다가 세조에게 밀고 하기로 한 거야.
상왕 복위를 도모하던 이들은 모두 의금부로 끌려와. 세조는 직접 국문에 나서 먼저 성삼문에게 말해.
"너는 나를 안지가 가장 오래되었고, 나 또한 너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내가 친히 묻는 것이니 숨기지 말고 고하라."
그러고는 불에 달군 인두로 몸을 지지고 매질을 해서 뼈를 으스러뜨리는 등 고통스러운 고문이 가해져.
"친국을 하는 사이에서 성삼문이 신음 소리 하나 안 내면서 버텼다. '내가 이 싸움에선 졌지만 누가 올바른가를 따졌을 땐 내가 옳다' 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고통을 참아서 버틴 거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그 과정에서 성삼문이나 박팽년은 끝까지 저항을 하죠. 대표적인 게 당시 왕이잖아요 세조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나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조가 더 열받는 거예요. 너희가 그래도 내가 준 녹까지 받지 않았느냐고 했는데, 집에 가보니까 그 당시에 월급으로 받은 녹봉이 그대로 남아있더라. 하나도 손을 안 댔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세조를 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지. 세조는 박팽년에게도 이렇게 말해.
"너는 내게 장계를 올릴 때마다 나의 신하라 칭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박팽년이 답해.
"나으리께선 내가 보낸 장계들을 확인해보시오."
세조가 박팽년이 관찰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다시 들여다보더니 부르르 떨어.
이 글씨가 '신하신'이야. 장계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거든.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글씨가 좀 이상해. '신하신'이라는 글자에 획이 빠져있어. 그러면 '클거'자가 되거든.
'난 당신의 신하가 아니다. 나는 단종 임금의 신하다'라는 뜻이야. 박팽년은 한 번도 세조에게 자기 자신을 신하라고 칭한 적이 없었던 거야. 세조는 바로 명을 내려.
"간악한 역도의 무리를 거열형에 처하라."
거열형은 목과 팔, 다리에 줄을 묶어 소나 말이 끌면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야. 세조는 이들의 목을 잘라 내걸고, 나머지 육신은 팔도 각지에 흩어 놓으라고 명해. 세조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상상이 되지?
처형장으로 향하는 길. 성삼문은 한 편의 시를 읊었다고 해. 제목은 '절명시'.
"북소리가 목숨을 재촉하고 돌아보니 해가 지려하네. 저승에는 주막도 없다는데 오늘 밤은 누구 집에서 묵으려나."
이들은 죽는 순간까지 단종에 대한 충심을 꺾지 않았어. 훗날 이들은 '사육신'이라 불리게 돼.
세조는 이 사건을 가리켜 혜성이 나타나고 변이 일어났다 하여 '성변'이라고 표현했어. 이렇게 상왕 복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어. 세조는 이렇게 생각했어. '조카가 궁 안에 남아있는 한, 반역을 꾀하는 무리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단종을 유배시킬 것을 명해. 역모의 배후에 단종이 있었다는 죄목이었어.
"뒷수습을 해야 되잖아요. 이게 빌미가 돼서 반정이 일어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단종이라는 빌미를 남겨둔다? 이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단종은 상왕의 지휘마저 빼앗겨. 세조는 그를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냈어. 이제 단종은 더 이상 왕이 아니게 된 거야.
▲ 노산(魯山)
태조 3년 6월 노산군은 가마를 타고 유배길에 올라. 그의 나이 열일곱.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궁에서 쫓겨나게 된 거야. 한양의 동쪽 문을 나와서 청계천 돌다리를 건너기 전, 유배 행렬이 멈춰서. 이곳에서 노산군은 한 사람과 가슴 아픈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게 돼.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 왕위에 오른 뒤 혼인하게 된 두 사람이었어. 하지만 3년 만에 생이별을 하게 된 거야.
두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은 아주 짧았어. 송씨는 노산군의 옷 매무새를 만져주고는 떠나는 모습을 눈에 담아. 두 사람은 그 후로 평생 다시 만나지 못했어. 두 사람이 손을 놓게 된 돌다리는 영도교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있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갔다는 뜻이야.
송씨는 정업원이라는 비구니 사찰에서 지내게 돼. 그녀는 매일 새벽 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며 지아비를 위해 기도했다고 해. 사람들은 그 산을 가르쳐 동쪽을 바라본다. 이 뜻으로 '동망봉'이라고 불렀어.
노산군은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여주 이포나루에서 내려. 거기서부터 원주를 지나 영월까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700리길.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거야. '내가 다시 이 길에 돌아올 수는 없겠구나'. 유배를 떠나는 길은 매 순간이 고통이지 않았을까.
7일 후 노산군은 영월에 도착해. 그가 지내게 될 유배지가 바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나왔던 청령포야.
"여기가 단종 임금이 유배됐던 곳인가요? 맞습니다. 이 자리가 바로 단종 임금이 귀양 오셨다가 두 달을 사셨던 곳. 청령포 한문을 좀 보셔야 돼요. 푸른 청, 맑을 령, 물가 포를 쓰거든요. 글자마다 삼수변이 다 들어갑니다. 이 땅이 그렇게 생겼거든요. 삼면은 전부 강이고, 뒤에는 봉오리가 여섯 개인 육육봉이고. 배를 타야만 건너올 수 있는 천연 감옥 같은 곳. 관리하기가 좀 좋습니까? 누군가 이 강을 건너가는 것만 확인하면 기가 막히잖아요. 거기다 단종 임금 알아서 본인이 나올 수 있는 이런 곳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단종 임금이 유배되시기에는 가장 적합하지 않았나."
-이갑순, 문화해설사
강물은 어디론가 흘러가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흘러갈 수 없는 곳, 벗어날 수 없는 곳. 노산군도 이렇게 예감했을 거야. '내가 죽기 전에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겠구나'라고.
"이게 수순이 정해져 있습니다. 죄를 물어서 유배를 보내고 유배를 보낸 다음에 거기서 처리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처하게 된 거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노산군이 유배 생활 중 썼다고 전해지는 시가 하나 있어.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떠나온 뒤 외로운 그림자 하나 푸른 산 중 헤메누나. 밤마다 잠을 청해도 잠은 이룰 수 없고 해마다 한을 풀려 해도 한은 끝이 없네. 울음소리마저 끊긴 새벽 봉우리 달빛만 희고.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붉은 꽃이 지네. 하늘은 귀먹어서 슬픈 하소연 못 듣는데, 어찌하여 설움 많은 내 귀만 홀로 밝은고."
이 시의 제목은 '자규시'야. 자규는 두견새를 가리켜. 노산군은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두견새 소리를 들으며 비통한 눈물을 흘렸을 거야. 그런데 노산군의 비통한 울음소리를 들은 이가 있었어.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잖아요 단종이. 그러니까 단종이 평소에도 울적하게 지내고 때로는 울기도 하고 고함을 치고 이랬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날 고종실록에 따르면, 꿈에 사육신이 나온 거예요. 자기들의 억울한 사연 그리고 비탄함을 쏟아내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너무나 한스러운 마음에 나와서 막 통곡을 했대요. 그런데 그 소식을 호장 엄흥도가 듣고 달려온 거예요."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였어. 호장은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야.
"요즘으로 치면 아전이라고 하는데, 행정실장쯤 되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당연히 단종이 유배를 왔으니까 음식 공급이라든가 단종이 이렇게 머무시는 곳 관리도 하고.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단종을 접촉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단종하고 상당한 교분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여기 와서 묵은 지 오래되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이가 없었는데. 오늘 네가 찾아왔으니 그 정성이 참으로 기특하구나."
첫 만남 이후 엄흥도는 감시를 피해 밤마다 강을 헤엄쳐 건너와 노산군을 만났다고 해. 이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야. 사실 노산군의 유배 생활에 대해 더 이상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그러니까 영화는 실록이 다루지 않았던 빈칸을 채워넣는 거지. 하지만 외로운 유배지의 생활에서 엄흥도는 원통한 마음을 달래줄 유일한 인물이지 않았을까?
▲ 내 아들을 홀로 두지 마라
그리고 아직 어린 왕을 잊지 않은 사람이 있었어. 경상북도 순흥, 지금의 영주야. 이곳에서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이 있어. 그는 바로 금성대군.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로, 문종과 세조의 친동생이야. 그는 단종이 어릴 적에 가장 따랐던 삼촌이었어. 문종은 숨을 거두기 전 금성대군을 불러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해.
"부디 내 아들을 홀로 두지 마라."
그것은 임금의 명이 아니라 형의 부탁이었어. 수양의 세상이 된 후 금성대군은 형의 유언을 따르기로 해. 다른 대군들이 침묵할 때 어린 조카의 편에 선 거야. 그 결과 세조에 의해서 순흥으로 귀양을 와 있는 상태야. 그런 그가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 걸까.
"군사들을 모아 한양으로 치고 올라가면 능히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금성대군은 순흥 부사 이보흠 그리고 지역의 선비들과 뜻을 모아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이야.
"금성대군은 정말 수양대군 입장에서 보면 '야 쟤 진짜 왜 저래' 라고 할 정도로 집요하게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켜요. 그래서 여러 곳에 유배됐다가 순흥이라는 곳에 유배되었을 때, 순흥군수 이보흠이라는 인물하고 같이 힘을 모아서 무사들도 키우고 서울까지도 이렇게 진격을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밀고자가 생겨서 이게 미리 이제 누설이 되어서."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금성대군이 쓴 격문 한 장이 안동 감영에 들어가고 말아. 누군가 밀고를 한 거야. 이 소식은 즉시 한양에 있는 세조에게 알려져.
"'이유(금성대군)가 순흥에 있으면서 몰래 군소배와 결탁하여 불궤한 짓을 도모합니다' 하고 또한 이유가 준 명주 띠를 바쳐서 증거로 삼았다."
-세조실록 세조 3년 6월 27일-
결국 체포되어서 사약을 받게 돼.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금성대군 앞에 서. "임금이 내린 것이니 왕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하고 이 사약을 받으라" 세조가 있는 한양을 향해 절을 하라는 거야. 금성대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절을 올려. 그런데 한양 쪽이 아니라 북쪽을 향해서 절을 올려. 단종 쪽을 향해서.
"'나의 왕은 영월에 계신다' 하면서 영월을 향해 절을 하고 사약을 받았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이 이야기는 실록에는 적혀있지 않아. 오랜 세월 민담으로 전해져온 이야기야. "부디 내 아들을 홀로 두지 마라" 금성대군은 죽는 순간까지 형의 부탁을 지켰어.
그런데 세조의 분노는 금성대군의 죽음으로도 가라앉지 않았어. 역모와 관련된 인물들은 모두 죽임을 당해. 순흥의 죽계천이라고 있는데 이 죽계천이 온통 피로 물들어. 붉은 강물이 10리를 흘렀다고 해.
"그래서 죽계 그 위쪽에 그 마을 이름도 피끝마을이다. 그런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그 지역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는."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 승자의 기록
금성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은 영월에 있는 노산군에게도 전해져. 세조 3년 10월 21일,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 매어서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
-세조실록 세조 3년 10월 21일-
'졸하다', 대부 혹은 왕족이 죽었을 때 사용되는 말이야. 금성대군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장인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단종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서는 굉장히 단순하게 나와요. '스스로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우리는 예를 다해서 장사 지냈다. 진짜 기만적이죠. 왕실의 책임, 수양대군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간단하게 쓰게 된 거고요. 현재 강원도 일대에 남겨져 있는 민담들은 100% 타살이에요. 정확한 진실의 전달자는 여기서는 사료라기보다는 민담이에요. 강원도 일대에 남겨져 있는 신빙성 높은 민담들은 100% 보낸 관리에서 죽였다. 즉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라고 정확하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후대에 적힌 연려실기술에서는 노산군의 죽음을 이렇게 이야기해. 의금부도사 왕방연이라는 자가 세조가 내린 사약을 들고 찾아와. 하지만 차마 사약을 건네지 못하고 망설였다고 해. 그때 대신 나선 사람이 하나 있었어.
"통인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에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단종이 스스로 죽었다고 기록한 것은 세조실록뿐, 그 밖의 기록에서는 모두 타살로 기록돼 있어. 내용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일치하는 게 있거든.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내용이야. 음의일기라는 문헌에서는 이렇게 말해.
"노산이 영월에서 금성군의 실패를 듣고 자진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에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첩하는 붓장난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실록을 작성한 건 다음 대 왕의 신하들이야. 세조를 따르던 당시의 신하들은 왕이 조카를 죽였다는 내용을 차마 적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어차피 역사의 본질은 승자의 기록이야. 역사학자가 왜 필요하냐면 이 승자의 기록과 다른 야사의 기록들을 종합해서 정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은 무엇이냐. 그런 것들을 판단하는 게 아닐까.
백성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야. 한때 조선의 왕이었던 소년의 시신이 동강에 버려졌어. 그의 나이 불과 열일곱. 너무 어린 나이지. 이때가 음력 10월이니까 한겨울이야. 차가운 강물 위에 옥채가 둥둥 떠다니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물 위에 떠있어. 하지만 시신을 수습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해. 노산군은 역모죄로 죽은 거잖아. 자칫 엮이기라도 하면 나도 역모야.
그런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게 있었어. 어린 왕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이겠지. 영월 호장 엄흥도는 이른 새벽, 세 아들과 함께 집에서 나왔어. 단종의 시신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거야. 주위에서는 모두 그를 말렸어. 하지만 엄흥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해. "의로운 일을 하다가 죽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고.
노모를 위해 준비한 수의와 관을 짊어지고 동강으로 향해. 얼음장같이 차가운 강물에 들어가 단종의 옥체를 수습했어.
얼어붙은 시신을 펴서 관에 넣고는 지게에 지고 선산에 올라. 좋은 자리를 정해 장사를 지낸 엄흥도는 그 길로 세 아들과 함께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고 해. 세조의 눈밖에 났으니 죽을 짓을 한 거 아니야. 모여 있으면 안 되니까 피한 거야.
사실 엄흥도의 이름은 당대에 실록에는 남아있지 않아. 그의 이름은 60년이 흘러 중종 때에 처음으로 등장해.
"사람들 말이 '당초 노산군이 돌아갔을 때 온 고울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슬프고 가슴 아프게 여긴다 하였다."
-중종실록 중종 11년 12월 10일-
다시 시간이 흘러 선조 때, 한 관리가 임금의 명을 받고 노산군 묘에 제사를 지내러 영월로 가게 돼. 오랫동안 방치된 묘는 황폐해져 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잖아? 몰래 했으니까. 그런데 노산군의 묘에 도착해서는 깜짝 놀라. 묘로 이어지는 길도 잘 정리가 되어 있고,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었던 거야. 알고 보니 영월 백성들이 계속 돌봐왔던 거였어. 비통한 삶을 살다간 어린 왕을 백성들이 잊지 않고 있었던 거지.
▲ 단종(端宗)
이런 백성들의 바람이 전해진 걸까. 그 후 조선의 19대 임금 숙종은 마침내 어린 왕을 복권시키게 돼. 그리고 단종이라는 묘호를 내려. 정식으로 왕의 이름을 갖게 된 거야. 숙종은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밝혀.
"예를 지키고 의를 잡음을 '단(端)'이라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단종이라는 이름은 이때 지어진 거야.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241년이 지난 때의 일이었어.
단종이 복권되면서 역사는 다시 쓰여져. 부인 송 씨도 다시 정순왕후로 추숭됐어. 죽음으로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사육신도 충절의 상징으로 칭송을 받게 돼. 그리고 단종의 마지막을 지켜준 인물 엄흥도. 왕을 향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공조판서 벼슬을 받게 돼. 훗날 고종 황제는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하사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렸어.
"충의공, 엄흥도 충신의 정려각이죠. 엄흥도 충신이 3족을 멸한다는 위험 속에서도 장롱에다가 단종을 모셨기 때문에 그 충의를 높이 표시해서 이곳에 정려각을 세우게 됐습니다. 엄흥도 선생이 단종의 어의를 가지고 공주 동학사로 왔어요. 그곳에서 생육신 김시습을 만나서 함께 초혼제를 지내고 그리고 3년상을 지냈죠. 그 이야기가 우리 엄씨들 가문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엄홍용, 엄흥도 후손
단종과 그를 왕으로 따랐던 신하들은 한때 역모를 꾀했던 반역도라고 기록됐어. 비록 긴 시간이 흘렀지만 마침내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된 거지. 단종 사후 이제 569년이 지났어. 지금 사람들에게 단종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여기가 바로 단종 어소입니다. 어가라고 그러죠. 그 당시에는 이렇게 크질 않았어요. 아궁이의 불도 안 들이는 방 두 칸에 방 한 칸은 단종 임금이 사셨고 방 한 칸은 시녀 궁녀가 살았다더라. 지붕에 기와가 얹어있는 것이 참 신기하다. 얼마나 작은 초막이면 그렇게 기록이 됐겠습니까?"
"이 소나무가 이게 지금 단종 임금 어소를 향해서 절을 하고 있는 소나무다. 뭐 어떤 분들은 충절 소나무다. 그런데 요즘에는요. 제가 '엄흥도 소나무다' 이러면요. 꼭 나오는 말 있죠. '유해진 소나무'다. 지금은 아주 당연히 '왕사남' 때문에 '유해진 소나무입니다'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졌어요."
"주말에는 이 데크가 버글버글해요. 하루에 기본으로 6천 명 오시니까. 세상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어요. '<왕사람> 봤잖아요. 영월에 안 가면 큰일 나는 줄 알아요' 어머 이 말이요. 그렇게 고맙더라고요. 한 분이 '저요' 그러더니 '저는 여섯 번 봤어요' 이래요. 그랬더니 옆에 분이 손을 딱 들더니 '저는 일곱 번 봤어요' 이래요. 저는 그리고 많은 줄 알았죠. 이쪽 구석에 어떤 분이 손을 들더니 '저는 열한 번 봤어요' 이러는데 제가 속으로 '그렇게 볼 건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영월 사람들은 단종 임금이 그냥 임금이 아닙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좀 더 힘을 얻기 위해서 참배하고 나면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은, 이런 희망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영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갑순, 문화해설사
흔히 단종을 '비운의 왕'이라 부르잖아.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던 할아버지 할머니도 잃었어. 든든하게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도 세상을 일찍 떠나. 12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에 의해 모든 걸 잃은 채 유배지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어.
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단종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흔적을 찾고 그를 기억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어.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외롭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종은 그저 어리고 유약한 왕. 세조는 그를 대신해 왕위에 올라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배웠어. 하지만 지금은 그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지.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잖아. 그렇지만 이제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과정이 옳지 못했다는 걸 이제는 알잖아.
우리가 단종을 연민하고 세조에게 분노하는 이유.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약자가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그런 역사는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아닐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기억해줬으면 해.
조선 왕조 가장 비극적인 인물 '단종'···
평생 외로웠던 '단종'의 마지막 이야기 '조명'
가장 외로웠던 왕 단종, 하지만 더 이상 그는 외롭지 않다.
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역사 특집: 홍위, 노산, 단종 -왕의 이름을 찾아서-'라는 부제로 어린 왕의 마지막 이야기를 추적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하나인 단종. 그는 2대에 걸쳐 완벽한 왕의 혈통을 타고나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르나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빼앗겼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은 자신을 도운 이들은 정난공신으로 책봉하고 김종서 일파는 몰살, 안평대군은 귀양까지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단종은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단종은 열다섯의 나이에 자신이 왕으로 있는 한 자신의 사람들의 희생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에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된 수양대군. 그는 왕이 된 후 단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쳐냈다. 이에 어린 왕을 지키려는 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거사를 도모했다. 그런데 그러던 중 5월 한 달에만 11번 혜성이 나타나고 사옹방의 시루가 혼자 우는 등 기이한 징조가 나타났다. 그리고 결국 한명회의 책략으로 세조에 의해 거사는 무산되었다.
이에 거사를 준비하던 이들은 불안에 떨다가 세조에게 거사를 주도한 이들을 밀고했다. 세조는 직접 국문에 나섰다. 하지만 성삼문과 박팽년은 끝까지 저항했다. 이들은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에게 받은 녹봉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뒀다. 이에 세조는 이들에게 죄인의 사지와 머리를 말 소 수레 등에 묶어 각 방향으로 끌려가게 하여 찢어 죽이는 형벌인 거열형을 명했다.
죽는 순간까지 단종에 대한 충심을 꺾지 않은 이들은 훗날 사육신이라 불리었지만 당시 세조는 혜성이 나타나고 변이 일어났다 하여 성변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결국 단종의 유배를 명한 세조. 명분은 역모의 배후에 단종이 있었다는 죄목 때문이었다. 상왕의 지위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 더 이상 그는 왕이 아니었다.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고 아내와도 생이별을 하게 된 단종. 그리고 그는 청령포에서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왕을 잊지 않은 이가 있었다. 내 아들을 홀로 두지 말라던 문종의 말을 기억한 금성대군은 단종의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계획마저 들키고 사약을 받은 금성대군.
그는 사약을 받기 전 왕을 향해 절을 올리라는 명령에 단종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고 사약을 받으며 죽는 순간까지 형의 부탁을 지켜냈다.
세조실록에는 이후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라고 쓰여있다. 그러나 강원도에 남은 민담의 대부분은 100% 보낸 관리에 의해서 죽었다는 기록뿐이었다.
그리고 후대에 기록된 연려실기술에서 이야기하는 노산군의 죽음은 세조가 내린 사약을 들고 찾아온 의금부도사 왕방연을 이야기했다.
또한 "통인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단종이 스스로 죽었다고 기록된 것은 세조실록뿐 나머지에는 모두 타살로 기록되어 있고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일치하는 내용은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 이에 승자의 기록과 야사의 기록을 찾아 정말 진실에 가까운 것은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몫이었다.
한때 조선의 왕이었던 소년의 시신은 후에 동강에 버려졌다. 그리고 영월에서 그를 돌보았던 엄흥도는 다음 날 이른 새벽 세 아들과 집 밖을 나와 단종의 옥체를 수습하고 장사를 지낸 후 세 아들과 뿔뿔이 흩어졌다.
의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달게 받겠다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왕을 지켰던 것.
왕을 지킨 것은 엄흥도뿐만이 아니었다. 엄흥도가 떠난 후에도 영월 백성들은 노산의 묘를 정성스럽게 돌보았다.
그리고 단종은 조선 19대 임금 숙종에 의해 왕으로 복권되고 단종이라는 묘호가 내려졌다. 예를 지키고 의를 잡음을 단이라 하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 이는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241년이 지난 일이었다.
단종이 복권되며 역사는 다시 쓰이고 부인 송 씨도 다시 정순왕후로 추숭 되고 사육신은 충절의 상징으로 자리했다. 그리고 엄흥도는 공조판서 벼슬을 받고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하사 받았다.
단종 사후 569년, 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외로운 왕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 많은 이들이 그의 흔적을 찾고 그를 기억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에 다시는 그가 더 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약자가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역사는 더 이상 반복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