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이 애국가를 거부하는건 친일파 안익태
가 작곡한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 운동가들을 추모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을 잊고 친일파의 노래를 애국의 노래로 부르며
왜인이 남겨둔 정체불명의 글자들을 마치 한국어처럼 사용하며
일본의 오니등을 한국의 도?비라 부르며 좋아하며 찬양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순국선열들은 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미국의 앞잡이 이승만이 친일파들과 결탁해 세운 시작부터 잘못된 대한민국의 친일파와 저러한 친일문화의 잔재를 그대로 남겨 둠으로서 역사에 큰 죄를 지었으며 시작부터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진보당이 애국가를 거부하는건 그러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민주주의와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와 인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서입니다.
친일파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겉으로는 애국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싫은 일본에 대한 찬양의 의미 깊게 숨어져 있습니다.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기상 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3.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4. 이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자~ 여기서 우리 전통 부분인 1절과 후렴구를 제외하고 살펴 보겠습니다.
**남산위의-> 남산은 대한민국 서울의 남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교토를 기준으로 남쪽에 있는 고야산 혹은 일본 전체를 기준으로 중심에서 남방부에 위치한 후지산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기에 지금의 남산은 목멱산이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저 소나무 -> 소나무는 말 그대로 일본 전통 나무의 상징입니다. 일본에선 일왕이나 귀족의 저택을 중심으로 소나무를 심는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일찌감치 소나무에 등급을 매겨 상품화 했을 정도로 소나무를 귀한 나무로 여겨왔습니다.
일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나무와 함께한 풍경
또한 한국의 남산 즉 목면산은 소나무가 상징인 산이 아니며 일본의 후지산과 고야산이야말로 소나무 명승지로 일본에서 이름 높은 곳이죠
**철갑을 두른듯 -> 이는 일본의 전통 무사인 사무라이의 복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 갑옷이 종이와 가족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일본의 갑옷은 전신 철갑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한눈에 봐도 소나무가 철갑을 둘렀다는 것은 일본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말이지 결코 한국 전통의 무사의 기개 높은 모습이 아닙니다.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 말 그대로 일본 민족 고유성을 찬양하고 있는 가사 내용입니다. 일본에서 태풍은 신풍이라 하여 나라를 보호해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으며 해마다 바람의 신을 축원하는 축제를 여는 도시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고려 몽고의 원정군을 태풍이 물러가게 한 것에서 시작해서 신풍에 대한 찬양은 2차대전 말기 자살 특공대를 신풍(가미카제)특공대로 명명하여 출격시킨 것까지 이어 집니다.
※ 우리의 전통 문화는 매화와 대나무를 기상과 고고함의 상징으로 사용하였으며 바람과 서리는 오히려 시련이라 생각하였는데 애국가의 가사는 이와 같인 조선과 대한제국의 문화적 전통보다는 일본의 문화에 가까운 가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만 해도 다소 노골적으로 일본을 찬양하고 있는 가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 이는 일본의 욱일 승천기를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 건국 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욱일승천기
**밝은 달은 우리가슴 -> 이 역시 일본 건국 신화의 달의 여신인 츠쿠요미 노미코토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일편단심일세 -> 이는 태양과 달의 여신 그리고 바다의 남신인 스사노오 노미코토가 하나되어 일본을 지켜주고 있으며 일본의 초대 천왕인 진무천왕을 보호한다는 내용입니다
※4절의 가사는 말그대로 일본 기미가요나 군가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라한 수준의 노래입니다. 루스 배네딕트의 "국화와 칼" 이란 저서를 보면 일본인의 전쟁과 국가에 대한 태도를 잘 살펴 볼 수 있는데 일본의 군가나 군홍보물은 서양의 군가가 매우 활기차고 긍정적인 것과 대비되어 매우 어둡고 부정적이며 그러한 고난을 그대로 감수하는 것이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일본인적 사고관을 대변하고 있다는 설명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 가요가 승화와 해학에 기품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의 전통가요는 지금의 일본 국가가 그러하듯 처절하고 고난적인 모습을 그대로 들어내어 그게 삶이며 고난하게 사는 것이라는 점을 강요하는 비극의 일상화가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애국가의 4절도 바로 그러한 일본식 군가와 매우 흡사합니다.
일본인은 괴로우나 즐거우나 지만 한국인은 괴로운 것도 즐거운 것이고 우리를 위한 일이 즐거운 문화입니다. 이는 미묘한 차이 같지만 우리 민족의 정통적 정서보다는 일본 민족의 전통적 정서와 맥락과 비슷한 형태의 가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개화가사가 고난을 강요하는 것과 반대로 한국의 개화가사는 개화를 매우 밝고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좋은일을 함께 하자라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국 개화 가사를 조금만 검색해 보셔도 느끼실 것입니다.
이처럼 애국가는 변절자 친일파의 매국적 가사관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노래이며 실제로 안익태를 조금만 조사해 보셔도 안익태가 어떤 친일 행위를 했는지 쉽게 찾을 실 수 있습니다.
이런 노래를 애국가로 알고 따라 부르고 있는 것을 조상님, 독립을 위해 투쟁하신 순국선열들이 보고 매우 가슴 아파 하셨을 것입니다. 김구 선생도 안창호 선생도 지금의 친일파가 만든 정체 불명의 친일 음악과 가사로 음악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스코틀랜드 음악으로 애국가를 외쳤으나 차라리 그 노래에는 민족의 삶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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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익 태
안익태는 1906년 12월 5일 평양의 돈 많은 여관집 안덕훈씨와 김정옥 사이의 7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나중 나운영 씨는 안익태 추도사에서 "1월 10일생"이라 하기도 했다)
여섯 살 때 찬송가 풍금 소리에 이끌려 동네 예배당을 다닌 것이 음악에 눈을 뜨게 된 동기였고 그 풍금을 몰래 건드리던 안익태 어린이는 일곱살 때 큰 형님 안익삼이 일본 동경에서 사 가지고 온 바이올린에 완전히 넋을 잃어 버렸다. 불과 6개월 연습에 간단한 찬송가를 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어 버렸다.
1914년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학교 취주악부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번에는 트럼펫에 넋이 나갔다. 아버지를 달달 볶아 트럼펫까지 확보한 안익태는 학예회 때마다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양손에 들고 펄펄 날았다.
1918년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음악 실력이 인정되어 바로 관현악단에 들어갔고, 1919년 2학년 때 일찍 음악부장이 되어 버렸다. 음악부장이 되자 자기 집에 있는 일본제 축음기를 학교로 갖고 와 '작은 음악회'를 여는 등 음악에 관한 한 안익태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런 동생의 음악적 재능을 기특히 생각한 큰 형님이 이번에는 첼로를 사다 주었고, 여름방학 때 서울로 올라 와 카나다 선교사에게 특별과외까지 받은 안익태의 인기는 더욱 올라갔고 평양시내 각 교회의 가장 인기 있는 특별손님이 되었다.
이 해는 3.1운동이 일어났던 해라 서울에서부터 기독교 학생회 형, 누나들이 몰려 와서 독립이 어쩌고 했는데, 이 때 안익태 학생은 스코틀랜드 민요 가락의 "애국가"라는 노래를 처음 들어 보았다고 한다.
안익태는 1919년 2학년 때 학교에서 친일 교사 추방 운동에 주도하여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학교에서는 무기정학까지 당했다고 한다. 오로지 음악밖에 모르던 안익태 학생이 주동자가 되었다니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는 하다. --- 아마도 교회에서 배운 "애국가"란 노래를 학교에서 못 부르게 하니까, 음악에 관해서는 누구의 제지도 받은 적이 없던 안익태 학생이 발끈하여 그 교사를 학교에서 몰아 내려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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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당시에 학생들에게 유행되었던 "애국가"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실, "애국가"란 제목의 노래는 1896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독립신문"에 실린 것만 수십 편이 넘는다. 작자 이름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다. "독립가"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계에서도 "애국가" 같은 것을 한번 만들어 보자 하여 이상재가 주선하여 대성학교 교장 윤치호, 화가 지운영 등 기독교인 4명을 지운영의 집에서 모이게 하여 공동 작업에 들어 가서 4절까지 만들었고, 나중에 안창호가 앞뒤 몇 군데를 수정하여 "윤치호 자네가 현재 교장으로 있으니 그냥 자네를 작사자로 하세"라고 하여 그 때부터 작사자는 윤치호가 되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주요한과 윤치영의 증언에 의한 것임)
지운영(이 지운영이라는 사람은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님이기도 하다)이 자기 앞집에 살던 서양 음악 강사 김인식에게 애국가의 곡을 붙여 보라 하였더니,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찬송가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김인식도 스코틀랜드 민요에서 곡을 따 왔다.
"올드 랭사인(Auld Lang Syne-- 전세계적으로 12월 31일 밤에 잘 부르는 노래)"이라는 곡에다 이 애국가 노랫말에다 붙인 것이다.(♬오랫 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가신다니 웬 알인가 가야만 하는가~)
이 악보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안창호 신민회 신문)에 "국민가"란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이 곡이 언제부터인가 "애국가"란 제목으로 바뀌어 버렸다고 한다.
경신, 배재, 이화 등 여러 학교에 강사로 나가던 김인식 교사는 1909년 경부터 각 학교에 이 노래를 퍼뜨렸고 한일합방 이후 이 노래의 출처를 조사하던 경찰에게 붙들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는데, 경찰 취조 과정에서 '곡은 일본의 친구 나라 영국 것이고 가사는 옛날부터 내려 오던 것'이라 둘러 대었다고 한다. 이 교사는 결국 재판에 회부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게 되는데, 죄명은 '풍기문란' 죄였다고 한다.
어쨌든 이 노래가 기독교를 통해 계속 이어지다가 1919년 3.1운동 때에 기독교 학생들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 노래가 안익태에게도 들려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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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안익태를 아깝게 여겼던 교장 "마우리" 박사는 안익태를 갑자기 평양기독병원에 입원시키는 등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경찰에 붙들려 가지 않도록 도와 주었고, 안익태 학생은 본의 아니게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형님과 일본으로 간 안익태는 1920년에는 일본어 실력을 쌓기 위해 사설강습소에 다녔고, 1921년에 동경 세이소꾸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게 된다. 5년 졸업 후 1926년 동경고등음악학교(지금의 동경 국립 음대)에 진학해서는 지도교수의 주선으로 예과 1학년 때부터 일본, 조선 전국 각지에서 첼로 독주회도 가지는 등 음악가로서의 경험을 쌓아 갔다.
1928년 본과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등록금을 낼 수 없게 되자 "동경회관"이라는 양식집에서 "첼로"를 연주해 주며 1년간 등록금을 벌었다고 한다. ( 이 때 바이올린으로 아르바이트하던 동료가 있었는데, 안익태가 30년 뒤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어 다시 동경회관을 방문할 때까지도 그 자리에 있길래 즉석에서 300달러를 주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1930년 졸업하여 평양에서 첼로 연주회를 개최하려고 하자 경찰이 제지하였고, 안익태는 아예 미국 유학으로 방침을 바꾼다. 일본에서 미국 가는 배를 타기 전에 송별연에서 친구와 후배들에게 "언젠가는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하고 말 거야"라고 외쳐서 놀림감이 되기도 하였다. --- 그러나 그 꿈은 나중에 정말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
안익태 청년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한국인 교회에서 다시 접한 "태극기"와 "애국가"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1년 전 3.1운동 때 잠깐 보고 들었던 것인데, 여기 미국에서는 정말 겁도 없이 태극기도 게양하고 애국가도 마구 부를 수 있고... 정말 별천지였다.
( 이 애국가 노래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공식적 노래가 되어 전세계 한국교민들의 애창곡이 되어 있었다. 참, 그리고 최근에는 1931년 LA 한인 교회에서 만든 노래책에서 "윤치호 작사 애국가" 악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애국가 악보와 가사를 잘 베껴서 넣고 음악학교가 있는 신시내티로 향했다. -- "언젠가는 이 애국가의 곡을 내가 다시 쓰고 말 거야"라고 맘 속으로 외치면서 -- 이 때 한인교회에서는 이 기특한 25세의 동포 청년에게 등록금에 보태 쓰라면서 헌금을 모아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때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미국 서부지역 밤의 황제로 군림했던 마피아 보스 '제이슨 리'(한국명 이장손/하와이 이민 1기)였다. 제이슨 리는 헐리우드의 숨은 실력자로 에바 가드너와 잠깐 동거하기도 했고, 그레이스 켈리를 발굴하고 프랑크 시나트라를 톱스타의 대열에 올려놓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시카고의 '알 카포네'의 목숨을 살려준 적도 있는, 알 카포네보다 더 막강한 사람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 헌금 상태는 괜찮은 편이었으며 하와이 한인교회와 함께 상하이 임시정부의 중요한 돈줄이 되었다. 물론 자금 전달책은 이승만이었다.
1931년 신시내티 음대 2학년 때 안익태는 신시내티 시립교향악단 첼로 주자로 입단하게 되고, 여러 곳에서 첼로 독주회도 갖게 된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신문의 기사를 보면, "안씨가 연주한 '첼로'의 'D단조협주곡'은 놀랄만한 기교와 세련된 소리를 가지고 청중을 도취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안익태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신시내티 관현악단 생활에서 첼로보다는 작곡과 지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선배 박윤정의 도움을 받아 필라델피아 음대에 편입하는 데 성공했다.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에 연습단원으로 들어가 지휘를 배우면서, 또 커티스 음대에도 등록하여 '프리곤 라이어'로부터 작곡 기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1935년 조업 직후 하숙비 낼 돈도 없으면서 뉴욕교향악단 주최의 '작곡 콩쿠르'에 참하기 위하여 열심히 곡을 썼다.
제목은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 -- 11월에 뉴욕 카네기 홀에서 안익태 자신의 지휘로 그 곡이 연주되었는데, 이 때 출품한 곡은 현재의 절반밖에 안 되는 소품이었다. 그러나 곡을 연주하는 주자들이 동양인 안익태를 우습게 보고 너무 불성실하게 연주했고, 화가 난 안익태는 중도에 내려 와 버렸다고 한다.
"미국은 역시 문화 후진국이야... 유럽으로 가자" 안익태의 마음은 어느 사이엔가 유럽으로 가 있었다. 1936년 초에 안익태는 무작정 유럽행 배를 탔다. "유럽에서 최고가 되어야지.."
그렇다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는 누구일까?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 1933년 11월 히틀러 나치 정권으로부터 "제3제국 국가음악국 총재"라는 중책을 임명 받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가 생각이 났다.
보통 때 같으면 감히 만나 볼 수도 없는, 엄청나게 높은 사람이었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스트라우스는 나치 정부의 미움을 받아 공직을 박탈 당한 채 빈에서 가택 연금 중인 처지였다... 그래서 바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영국으로 망명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 '츠바이크'의 대본으로 오페라를 준비 중이었고, 이를 나치 정부가 알고 만류하였으나 스트라우스가 그냥 밀고 나가다가 총재직에서 쫓겨 난 것이었다. 스트라우스는 누구든 실력이 있다고 인정되면 무한정 도와 주는, 좀 특이한 성격의 음악가였다.
어쨌든 괴짜 스트라우스가 안익태를 잘 보았는지 빈에서 "바인가르트너"에게 지휘를 배우도록 주선해 주었고, 안익태는 스트라우스 집에 들락날락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72세의 스트라우스가 집에 그냥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치 정부로부터 뭔가 큰 과제를 부여받아 곡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곡은 바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기념 행사에 사용될 "올림픽 찬가"였다. 나치 정부가 스트라우스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올림픽이라 --- 참, 이번 올림픽에는 일본 선수단에 우리 조선청년들도 많이 선발되었다는데 ---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위해 이번에 "응원가"를 한번 작곡해 봐야지 -- 그럼, 가사는 어떡한다? --- 참, 그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베껴 왔던 "애국가" 가사를 활용하면 되겠군.
안익태 본인의 말에 의하면 1936년 6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악상이 떠 올랐고, 그걸 바로 "애국가"의 곡으로 삼았다고 한다.
1936년 7월 스트라우스는 자신이 작곡한 "올림픽 찬가"를 직접 지휘하여 발표하였고....
며칠 후 8월 1일 히틀러가 참석한 개막식에 당당히 입장한 안익태는 개막식 직후 메인 스타디움 서북쪽 코너에 웅성웅성 잡담하고 있는 손기정, 남승룡 등 조선 동포들을 발견하였다.
무조건 뛰어 가서는 구깃구깃 악보를 펴더니 손기정, 남승룡 선수에게 다짜고짜로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 조선 응원가를 만들어 왔으니 함께 부르자"라고 했고, 어리둥절해 하는 조선 선수들 7명과 함께 안익태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 "를 불러 댔다.
1936년 8월 1일 히틀러가 막 퇴장하고 없는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서북 코너 ---- 이 곳이 바로 세계 최초로 지금의 우리나라 애국가가 발표된 곳이었다.
그리고 8월 9일 일장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 선수가 영국 선수를 제치고 세계신기록으로 메인스타디움으로 들어올 때, 손기정의 눈에 제일 먼저 띈 광경이 '두세 명의 청년들과 안익태가 거의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애국가를 부르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직접 영광의 금메달을 걸어 줄 때에도 손기정 선수가 '세상에서 가장 고뇌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까닭이 저 쪽에서 들려 오는 안익태 무리의 애국가 소리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적어도 이 날 손기정에게는 독일 군악대가 연주하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보다 저 쪽 스터디움 한 켠에서 들려 오는 "애국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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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 씨가 이 손기정 선수의 기분을 알았는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냈고, 그 때문에 동아일보는 무기정간됐었다. 이 현진건 씨가 2005년에 와서야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일본 여권을 가지고 독일에서 만났던 두 평안도 청년의 만남 --- 이 만남이 적어도 손기정에게는 평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다. 수십 년 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스터디움을 다시 찾았을 때에도 그 때 안익태를 만났던 서북쪽 코너 좌석에서 한동안 앉았다가 왔다. 손기정에게는 히틀러보다도 안익태가 더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손기정은 그 이후 일본말을 일체 쓰지 않았으며, 누구에게 사인해 줄 때에도 한글로 "손기정"이라고 써 주었다고 한다. 참, 말년에 일본 말을 한번 쓴 적이 있기는 있다. 일본의 최고문학상인 "아쿠다카와" 상까지 받은 젊은 재일교포 여류작가 "유미리"를 만났을 때였다.
손기정은 유미리에게 일본말로 "너의 할아버지는 훌륭한 장거리 선수였다"라고 말해 준 적이 있는데... 유미리가 간 뒤에 "친구의 손녀가 한국말을 모른다고 해서 중간에 통역을 붙일 수야 없지 않는가?"라고 하여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유미리는 나중에 그 말을 전해 듣고 물론 눈이 퉁퉁 붇도록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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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는 이 악보를 즉시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로 보냈고, 이 악보는 이승만을 통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애국가"가 우리 나라 청년 안익태가 작곡한 것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1936년 10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 1937년 6월에 템플대학 음악대학원에서 음악학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아마도 이 때 졸업논문 대신 제출한 악보가 "애국가" 합창 부분을 추가한 "한국환상곡" 악보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1937년 11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음악학교에 특별연구생으로 들어가서 "코다이"의 지도를 받고, 주위의 도움으로 1938년 2월 아일랜드의 더블린 국립교향악단을 직접 지휘하여 세계 최초로 "한국환상곡"이 발표된다.
안익태가 지휘하는 한국환상곡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연주되든 합창 부분의 애국가는 반드시 한국어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초연 때 더블린 합창단은 물론이고 나중에 일본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할 때에도 일본 합창단에게 한국어로 애국가를 부르도록 했다.
더블린 국립교향악단의 지휘를 성공적으로 끝낸 안익태는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고, 불과 몇 개월 뒤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교향악단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과 스승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정화"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큰 성공을 거두어 1939년부터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자신에게 들어 온 대부분의 지휘를 안익태에게 바로바로 넘겨 버린다. 괴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히틀러 나치 정권의 간섭에도 아랑곳 없이 유대인과 공동 작업을 계속한 적이 있지만, 문화 후진국인 일본에서 왔다는 안익태에게도 주위의 걱정스러운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업무를 팍팍 넘겨 버렸다.
스트라우스는 상대가 실력이 있다고 인정만 되면 유대인이든 일본인이든 일본령의 조선인이든 인종차별 같은 건 전혀 없이, 그냥 믿고 맡기는 괴짜였던 것이다. 무작정 무림의 고수를 찾아 나선 안익태 역시 굉장한 괴짜였지만, 이 두 괴짜의 만남은 이후 유럽과 전세계의 음악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어쨌든 당대 유럽 최고였던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대신 몇몇 굵직굵직한 연주회에 지휘를 나가다 보니 안익태는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유럽, 아니 세계의 최정상급 지휘자 대열에 서게 되어 버렸다.
옛날 꿈에도 그리던 런던교향악단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와 미국에 이르기까지 실로 정신없을 정도로 초청되었는데, 1959년 5월까지 안익태가 지휘한 횟수를 누군가가 세어 보니 무려 232회가 되더라고 한다. 거의 매달 여기저기로 불려 다녔다는 이야기이다.
1940년인가 일본에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에게 "개국 2,600주년 봉축기념 서곡"의 작곡을 의뢰한 적이 있는데, 이 때에도 스트라우스는 안익태를 대신 보내서 지휘하도록 했다. 그 다음 해에 일본이 중-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은 안익태에게 만주 관동군 위문공연 지휘를 부탁했으나, 안익태는 "벌써 몇 년치 예약이 다 되어 있는데요" --- 그래서 안 갔다.
참, 안익태가 로마 공연에서 이탈리아 최고의 권력자 무솔리니도 만났었다. 무솔리니가 기립 박수를 치면서 "일본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 에키타이 안 선생 만세!"라고 했다가 안익태가 "나는 코리안이요."라고 대드는 통에 갑자기 머쓱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와 안익태 -- 이 두 괴짜는 천하의 독재자 히틀러도 아예 제껴 놓은 사람들인데, 세상에 누가 있어 감히 이들에게 시비를 걸겠는가? 안익태의 여권은 비록 일본국 것이지만 안익태는 어디를 가든 당당한 한국인이었다.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을 유난히 좋아하여 1년에 평균 2번 정도는 지휘했다. 그 때마다 "애국가" 합창 부분은 번역을 불허했고 언제나 한국어로만 부르게 했다. 그 때문에 주최 측과 여러 번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렇게 안 하면 안익태가 안 오겠다고 하는 걸.....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이 돌아 왔다. 이제는 더 이상 일본의 여권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여권도 대한민국 것으로 빨리 교체해야겠고.... 그리고 이제는 빨리 평양으로 돌아가서 장가도 가야지... 흐흐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는구나..."
해방이 되면 고향에 가서 고향 처녀와 결혼하려고 나이 40이 되도록 아직 홀몸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일본의 여권으로 히틀러 나치 정권의 혜택을 엄청나게 받았던 안익태를 반겨 줄 곳은 지구상에 거의 없었다. 82세의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당장 나치 정권의 협력자로 고발되어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로 피신해 버리고, 안익태도 얼떨결에 같이 갔으나 일본 국적의 안익태는 스위스에서도 가시 방석이었다.
서울로의 귀국? 그건 말도 꺼내 보지 못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도 미군들이 허락을 안 해서 한참 있다가 돌아 오게 했는데, 히틀러 나치 정부의 총애를 받던 안익태를 미국이 좋아 할 리가 없었다. 안익태 자신은 몇 년 전 무솔리니에게도 당당히 "나는 한국인이요"라고 밝힌 적이 있지만, 미국 쪽에서 볼 때에는 안익태가 그저 나치 정권의 협력자일 뿐이었다.
갑자기 국제 미아가 되어 버린 안익태는 독일의 아는 사람 소개로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으나, 안익태에게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국적이 필요했다. 일본은 이제 죽어도 싫고, 한국은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니 역시 글렀고, 제3의 국적이 불가피한 시점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산다더니.... 이 때 안익태에게 걸린 지푸라기가 하나 있었다. 스페인 무슨 왕족의 딸인가 하는 처녀가 몇 년 전에 선생님의 지휘 모습을 보았다면서 찰싹 달라 붙었다.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는 허탈한 신세가 된 안익태는 모든 게 자포자기 상태였고, "에라, 스페인이면 어떠냐.."
1946년 안익태는 10살 연하인 스페인 처녀와 결혼을 하였고, 스페인 국적도 취득했다. 다행히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정권이 안익태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하여 국적 취득을 허락해 준 것이었다. 그래서 안익태는 히틀러 치하에서 프랑코 치하로 넘어 가게 되었다. 이상하게 독재자일수록 예술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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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르카 섬의 팔마 시에 좋은 집을 하나 장만하는 게 어떨까요?"
파란 눈의 젊은 아내 로리타 여사의 간절한 청을 안익태는 단칼에 잘랐다.
"아냐, 안 돼! 난 한국에 돌아가서 한국의 집을 살 거야... 조금만 기다려 봐..."
안익태의 마음은 벌써부터 고향 땅에 가 있었다. 로리타 여사는 남편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 로리타의 신혼 생활에는 셋방살이로 시작되었고...
비운의 주인공 안익태는 끝끝내 우리 나라에 집 한 채 장만 못하고 객지에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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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 지중해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 마요르카는 세계적인 거장 안익태의 정착으로 갑자기 시끌시끌해졌다. 안익태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기 전에 안익태를 오랫동안 붙잡아 둘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요르카 섬은 교향악단을 창단한다고 발표했다. 단장은 물론 '마에스트로 안(거장 안익태)'을 추대하자는 계획이었다.
스페인 프랑코 총통 결재도 났고, 어차피 오갈 데 없는 '거장 안익태'도 단장직을 수락했다. 이로 인하여 안익태의 바쁜 생활은 다시 계속되었다. 보금자리가 안정된 안익태는 다시 예전처럼 세계 각지로 돌아 다녔고, 런던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여전히 세계 최정상급 지휘자의 대우를 받았다. 덕분에 조용한 섬 마요르카도 엄청나게 많이 홍보가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서울에서는 임시정부 때부터 불러 오던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정식 국가(國歌)로 공표했는데, 정작 안익태에게는 한 마디 연락조차 없었다. 하기야 옛날 임시정부 때에도 안익태에게 허락 받고 불렀던 건 아니지만....
나치 전범 재판에서 무죄로 입증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안익태와 함께 1947년 런던에서 "스트라우스 음악제"를 1개월 동안 개최하였으나 노령에 건강 악화로 1949년 독일 바이에른 자택에서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이에 안익태는 "나의 스승 스트라우스"라는 책자를 발간한다. 일본어판이었다.
1950년에 조국 대한민국에서 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리는 듯하더니 1953년에는 전쟁이 끝났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그러나 조국 대한민국은 언제나 마음 속의 고향일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 1955년에 정말로, 정말로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조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팔순 생일잔치를 하는데, 해외동포들의 입국도 허락한다는 소식이었다.
안익태는 무조건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문을 열었다.
"요즈음 스페인에서 고생이 많다며? 유럽에서 크게 성공했다지? 참, 그때 샌프란시스코 교회에서 나 만난 것 기억 나나? 벌써 25년 전 일이구만.."
"글쎄요, 그 때는 경황이 없어서.. 누가 누군지.... 그 때 어르신들이 너무 고맙게 도와 주셨지요"
"그 때 교회에서 애국가 가사 베끼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 결국은 나중에 일 냈더구만.. 지금은 우리 국민들이 모두들 잘 부르고 있다네.. 정말 고맙네.."
프란체스카 여사도 한 마디 거들었다.
"제 고향이 오스트리아 빈인데... 요즈음 거기도 많이 달라졌겠지요... 앞으로 자주 들어 와서 고향 소식 좀 전해 주세요"
이승만과 안익태, 짧은 만남이었지만 안익태로서는 이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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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안익태의 등장은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애국가" 작사자에 관한 논쟁에 다시 불을 지폈고, 1955년 한 해는 이 문제로 또 한참 시끄러웠다.
수 많은 학설 중에 윤치호 작사설이 가장 유력하여 윤치호 작사자 안을 놓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표결에 들어 갔으나 찬성 11표, 반대 2표가 나와 만장일치를 보지 못하여 그냥 "작자 미상"으로 놓아 두자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 말았다. 반대 2표는 윤치호 만으로는 아직 좀 약하니 안창호로 하자는 쪽이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애국가 작사자는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다. 최근에 윤치호 작사설을 확인시켜 주는 1910년과 1931년 자료가 나와서 이제는 윤치호 작사로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 당시 윤치호, 지운영, 안창호 등 여러 사람이 같이 협의하여 결정했다는 증언도 많기 때문에 윤치호 단독 작사로 하지 말고 "윤치호 등 작사"로 하는 것도 좋은 해결책의 하나가 될 것 같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작자 미상"은 국가의 위신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참, 지난 1948년 애국가의 가사가 또 바뀌었다. 가사 중의 "하나님"이 특정 종교를 연상할 수 있다고 하여 하늘을 의미하는 "하느님"으로 바꾼 적이 있다. 어차피 애국가의 작사는 여러 사람의 공동작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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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는 스페인으로 가자마자 한국 공연계획을 짰다. 안익태로서는 꿈에도 그리던 고국 공연이었다. 옛날 일본서 음대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첼로 연주회를 하고자 했을 때는 경찰이 막았지만, 이번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이 있으니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런데, 그냥 보통의 연주회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다. 이 감격을, 이 기쁨을 음악으로 표현할 길은 없을까... 그렇다... 현재 3악장으로 되어 있는 "한국환상곡"을 4악장으로 완성을 하자, 그래 좋다...
사실 1936년 "한국 환상곡" 3악장에 "애국가" 합창 부분을 추가한 이후 벌써 20년이 흘렀다. 이번 기회에 제4악장을 추가하여 "한국 환상곡" 작곡의 최종 마무리를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지난 20년 간 조국에는 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동란이란 두 차례의 큰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지금 나라가 건재하고 국민들이 활기에 차 있으니, 아직 희망은 있는 것이야... 아, 아직 희망은 있다, 우리 민족에 좌절이란 단어는 이제 영원히 없다...
1956년에 안익태는 "한국환상곡" 제4악장 작곡에 착수했고...
그 4악장은 군인들의 행진곡으로 시작하여 제3악장의 "애국가" 멜로디가 다시 등장하면서 끝이 난다.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은 1935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1, 2악장이 발표되었고, 1936년 베를린에서 "애국가"가 만들어진 뒤, 이를 3악장으로 추가하여 1938년 더블린에서 발표되었다가....
이제 1957년의 서울 공연을 위하여 마지막 4악장이 드디어 완성이 된 것이다.
"솔도시라 도솔미솔 도레미파미레.. "로 이어지는 3악장의 주제 멜로디는 독립국가 '대한제국'의 존재를 알리는 소리일 수도 있고, 3.1운동 때 젊은 학생들의 우렁찬 외침일 수도 있고,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리는 소리일 수도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스터디움에서 처음 울렸던 이 애국가 멜로디는 이 한국 환상곡 전체를 감싸는 음악으로 추가되면서 영원한 "희망의 메아리"로 승화되고 있었다.
1957년 안익태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서 음악회를 개최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크게 치하하면서 "애국가" 작사자 안익태에게 문화포장을 수여하였다
▶윤치호
일제하에 교육사업과 선교활동에 종사했다.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좌옹(佐翁).
출신 및 유학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으나, 그뒤 향반(鄕班)으로 몰락했다가 아버지 때에 이르러 가세가 재건 되었다.
아버지는 무관출신으로 군부대신을 지낸 웅렬(雄烈)인데,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으며 '개화당'에 속했던 인물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11세부터 서광범(徐光範)의 친척 김정언(金正言)의 집에서 숙식하며 수학했으며, 15세 되던 해 정동의 강씨(姜氏)와 정혼한 뒤 1881년 어윤중(魚允中)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81년 신사유람단 조사(朝士)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건너가 1883년 4월까지 체류했다. 이때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알선으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했다.
1882년 도쿄제국대학 철학교수의 부인 L. G. 밀레트와 동대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 등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또한 김옥균(金玉均)·서광범·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물과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의 경영자 후쿠자와[福澤諭吉], 동인사의 경영자이며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나카무라[中村正直] 등 당대 일본 최고의 문명개화론자들과 교유했다.
이 과정에서 서구근대문명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체험하면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한 근대화 방안을 구상했다.
1883년 5월 초대 주한미국공사 L. H. 푸트의 통역으로 귀국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그뒤 통역으로서 푸트와 고종, 개화파 간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청나라의 간섭 배제와 미국과의 유대 강화, 각종 정치기구 개편에 힘썼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는 개량적 근대화론자로서 주도층과의 시국관 차이로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옥균·박영효 등과 절친했기 때문에 정변 실패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왕의 허락을 얻어 1885년 1월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미국 총영사 G. 스탈의 알선으로 미국 감리교 선교사 A. J. 앨런이 세운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했다. 여기서 3년 6개월 동안 체계적인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앨런과 W. B. 보넬 교수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 기간 동안 낙후된 조선과 중국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조선 근대화에 대한 절망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중서서원을 수료한 뒤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대학에서 신학과 영어 코스를 수학하고, 에모리대학에서 2년 동안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을 수강했다. 미국 유학기간 동안 기독교와 민주주의, 과학문명에 기초한 성숙한 사회를 경험하면서 이를 근대사회의 기본방향으로 설정했다. 그 사상적 기초는 '힘의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었으며, 사회개혁에서는 미개한 전통사회를 선교와 교육이라는 국민개조를 통하여 근대사회를 형성한다는 국민계몽의 방식이었다. 5년 동안의 미국 유학을 마친 후 청일전쟁 기간 동안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895년 2월 귀국해 김홍집 내각의 외부협판과 박영효 내각의 학부협판 등을 지냈다. 1896년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독립협회]활동
1897년 후반부터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운동을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 등 국민계몽 활동에 힘을 쏟았다. 1898년 3월 만민공동회를 주관하여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러시아 운동을 전개해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서재필이 추방당하자 1898년 8월 제2대 회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만민공동회를 주최, 헌의6조를 결의하여 국정에 반영시켰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1898년 12월 강제적인 정부의 해산조처로 해체되고 말았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 러일전쟁까지 5년간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 천안군수 등 지방관을 전전했다. 이 기간 동안 러·일 양국의 각축을 보면서 인종적 차원에서 일본인들의 '동양평화론'과 일맥상통한 '극동3국제휴론'을 주장했으며,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기뻐하는 모순된 사고구조 속에서 한국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계몽운동]과 일제하의 활동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했으며, 외부대신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수락을 거부했다. 당시 상소운동·외교운동·자결행위·의병전쟁 등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육의 확대와 산업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계몽에 노력했다. 그러나 대한자강회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운동을 펴다 해산되었다. 같은 해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신민회의 회원으로 평양의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또한 안태국(安泰國)과 더불어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청년운동을 적극 지도하는 한편, 신사상·신사업의 개발 등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계몽강연 연사로도 활약했다. 그가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인 사업은 남감리교 선교부가 1906년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을 통한 교육사업이었다. 그는 원장으로 실업교육을 제일 중시하여, 청년들에게 근로정신을 고취, 노동을 천시하는 폐습을 타파하고 경제적 자립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힘썼다. 한편 현실생활의 구원을 통하여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실천의 장으로서 기독교모범촌 건설계획을 추진했으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으로 일했다.
1912년 총독부가 민족운동세력과 기독교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날조한 '105인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복역하다가 석방되었다. 출감 뒤 YMCA 총무·회장, 연희전문학교·기독연합재단법인·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이사, 송도고등보통학교·연희전문학교 교장, 조선체육회·흥업구락부 회장 등을 역임하며 신교육운동과 기독교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전개된 독립운동에 대해 일본의 '독립불용인론'을 전제로 '자치능력결여론'도 주장했다. 조선의 당면문제는 유해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지적·경제적인 상태의 향상을 통하여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1920년대에는 교풍회(矯風會)·각도인민대표자대회·조선인산업대회 등 일제의 통치정책에 이용된 친일단체와 모임에 깊이 관여했다. 만주사변 직후 총독부 관료와 친일조선인 간의 친목단체인 토요회에 참여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해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내세운 '내선일체'의 실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를 지내며 강연회에서 '반도민중의 협력'을 강조했다. 1941년에는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에 대한 결의문을 낭독하고, 친일세력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의 고문으로 일제의 징병에 협력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1945년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에 선임되었다. 저서로 〈우스운 소리〉·〈영어문법첩경〉이 있으며, 역서로는 〈찬미가〉·〈의회통화규칙〉·〈이솝 우화〉·〈걸리버 여행기〉 등이 있다.
윤치호 일가
윤일선(조카)-서울대총장. 윤치영(사촌동생)-국회부의장. 윤보선(조카)-대통령. 윤치왕(동생)-육군의무감.
윤치창(동생)-주영공사. 윤영선(장남)-농림부장관.
윤치호는 구한말에 활동한 개혁가로서, 미국에 유학한 기독교도이고, 독립협회를 통해서 최초로 의회를 도입하려다가 대통령이 되려한다는 모함에 좌절된 인물이다. 독립과 개혁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비추어볼 때, 당시로서 개명한 인물이며 중앙관료 및 개혁가로 활동했던 그가 기록한 일기는 최근 한 소설의 모티브를 제공했고, 개인의 정국인식의 변화 뿐 아니라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유영렬 교수님의 "개화지식인 윤치호의 러시아 인식"이란 글(한국민족운동사연구, 41)에 면 윤치호의 정국인식은 다음과 같이 변한다고 주장해 놓고 있다.
첫째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한 영국의 거문도점령 시기에 영, 러 양국의 이해가 한반도에서 충돌하고, 청은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윤치호는 이왕에 외국의 지배를 받을 바에는 청나라 같은 야만국의 전근대적인 지배보다는 러시아나 영국 같은 문명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인민을 구원하고 개화를 추진하는데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윤치호는 청일전쟁에 즈음하여 조선인이 현실을 개선할 능력도 의욕도 없다면 일본이나 영국의 지배하에서 변혁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조선이 청의 압제를 스스로 벗어날 능력도 개혁을 단행할 능력도 없다면, 청의 야만적인 비배보다는 일본의 근대적인 지배 하에서 개혁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갑오개혁 당시 일본이 한국의 개혁을 외면하고 러시아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민비를 살해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강한 반일감정을 가지고, 조선이 외부의 영향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면 일본인보다는 유럽인 곧 러시아인이 낫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로 윤치호는 아관파천 직후에 러시아가 조선에 취한 관대하고 온건한 자세에 호감을 갖게 되어 러시아의 영향 하에서 조선이 개혁되기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가 조선의 개혁에 관심이 없고, 조선사회가 러시아의 간섭 하에서 갑고개혁 이전의 구악, 구패가 부활되어 복고적 성향을 띠는 것을 보고 러시아에 등을 돌리게 되
었다. 그리고 그는 독립협회의 회장이 되어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요구에 대응하여 자주국권운동을 전개했고, 나아가 자유민권운동과 근대개혁운동을 전개했다.
넷째로 윤치호는 러일전쟁을 한반도에 대한 러, 일 양국의 지배권 쟁탈전으로 파악했고, 러일전쟁의 승자에 의한 한국지배가 불가피 하다면, 백인국가인 러시아보다는 황인국가인 일본의 지배가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한국지배는 "괴로운 노예제" 또는 "이민족 지배에 의한 폭정"이 될 것이라고 하여, 러시아나 일본 등 외세의 지배가 현상유지보다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떻게 변화해도 현상유지보다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종래의 견해를 수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을사조약 이후 대한자각회의 회장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던 것이다.
(이상 p. 120 - 121)
한편 윤치호는 1895년 10월의 을미사변에 대하여 러시아 세력을 질시하는 일본공사관이 왕실세력의 강화를 반대하는 조선내각과 제휴하여 친러적 왕실세력의 총수인 민비를 살해한 것으로 생각했다.(Yun's letter to Dr. Young J. Allen", October 21, 1895)(위 p. 106)
협회는 광대극이다. 그것은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요소들의 집합체이다. 이완용과 그의 일파들이 당분간 상호 이익을 위해 얽혀 있다. 다음엔 대원권파, 러시아파, 일본파, 근왕파와 다른 파들이 있다. 각 정파는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나 같은 국외자는 발붙일 곳이 없다.(윤치호 일기 1897년 7. 25)(위 p. 111)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는 인종, 종교, 문자의 동일성에 기초한 감정과 이해의 공통성이 있다, 일본, 청국, 한국은 극동을 황인종의 영원한 보금자리로 지키고, 그 보금자리를 자연의 뜻대로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공동의 목표와 공동의 정책과 공동의ㅣ 이상을 가져야 한다.(1902년 5. 7. 일기)
한국인으로서 나는 일본의 잇따른 승리(러일전쟁)에 대하여 좋아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모든 승리는 한국 독립의 관에 못질이다.... 그러나 황인종으로서 한국은--- 더 정확히 말해서 나는--- 일본의 영광스런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일본은 황인종의 명예를 옹호했다.(1905년 6.2 일기)
나는 일본이 러시아를 패배시킨 것이 기쁘다,. 그 섬나라 사람들은 황인종의 명예를 영광스럽게 옹호했다. 백인은 오랫동안 대세를 잡아 수세기 동안 동양인종을 솥 안에 가두었다. 일본이 단독으로 이 마력을 깬 것은 그 착상 자체가 당당한 것이다.... 나는 황인종의 일원으로서 일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는 한국의 모든 것, 독립까지도 빼앗아가고 있는 일본을 증오한다.(1905. 9. 7. 일기)
일본의 괴로운 노예제 하에서 한국인들은 동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1905년 10. 16 일기)
이상 위 논문
최근 2010. 8. 4.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주최한 "근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반도 100년의 성찰과 전망"에서 야마무로 신이치 교토대 교수님이 소개한 바와 같이 일본은 당초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도전하기 위해 서양의 국제법을 받아들여 조선에도 독립국이 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후 서양의 국제법이나 1차대전 이후의 국제연맹 등은 기존의 서양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기타 잇키 등의 일본개조법안대강(1919년) 등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여러 이론을 내놓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에는 일본 정국신사 상의 게시물중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기존 유럽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 덕분에 아세아 각국이 패전후 독립국가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는 구절이 소개, 비판되고 있다. 조선은 일본이 맨 먼저 식민화한 나라로 1910년 이전의 일이기 때문에 이후 태평양전쟁시기와 다르고, 또 이미 유럽의 지배하이지도 않은 점에서 다르기는 하나, 이처럼 각국의 역사인식을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교육이 선택과목화한다고 하는데, 인터넷 역사자료 상의 윤치호 일기 중 하나를 소개한다.
일제 하에서 이상재로부터 도미하여 이승만과 같은 류의 독립구명운동을 권유받자 윤치호가 다 소용없는 짓임을 밝히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비열한 서북, 신사적 기호” 지역을 선악구도로 본 윤치호
1929년 3월12일 당대 최고의 거물, 좌옹 윤치호는 셋째 딸의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사위는 ‘대일본제국’ 최고 명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정광현. 어느모로 보나 ‘최고들’ 간의 축복받은 결혼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세인의 눈초리는 따가웠는데, 바로 지역색 때문이었다. 윤치호는 내로라하는 기호집안 해평 윤씨였고 사위는 평양, 즉 서북 출신이었다. 윤치호는 “조롱과 비난, 심지어는 욕을 먹게 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윤치호는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안창호는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으며 여운형 등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자신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윤치호는 서북파가 오랜 세월의 억압 속에서 기독교와 근대교육을 받아들여 지도자들로 부상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서북인들은 일본인들보다 기호인들을 더 증오하기에 일본인들에 아첨해 기호파에 대한 비열한 계략을 동원’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기호인들의 결사는 응집력이 없기에 불가능할 것’이니 ‘허심탄회하게 교류하고 신사적으로 대하자’는 유연한 태도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비열한’ 서북과 ‘신사적’ 기호라는 구도는 이미 지역을 선악이라는 가치체계로 포획해버리는 은폐된 지역색일 수 있었다. 비열한 서북이라는 타자는 기호파의 신사적 주체성에 영원히 종속될 열등성으로 배치된 것이며 야만 대 문명이라는 식민주의 문법의 레토릭이었다. 자신이 지역감정으로부터 벗어난 신사가 되기 위해 타자를 비열한 지역감정으로 함몰시키는 셈이었다. 게다가 ‘일본인’을 끌어들임으로써 지역대결 구도를 민족적 감정 차원으로 연결시키고자 했다. 실제 그는 2차대전을 황인종 대 백인종의 인종전쟁이라 규정한 일제의 구도를 받아들이고 친일 경쟁에 빠져들었다.
윤치호는 “내 평양사위가 성공을 입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서북파의 거두인 이광수와 허심탄회한 교분을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논쟁은 지역감정의 밖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휘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역감정을 개탄했지만 스스로 그것을 강화하는 자가당착을 실천했는바 그것도 식민주의의 강화를 동반한 것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힘이 곧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 제국주의적 인식을 가진 철저한 실력양성론자였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는 좌우명을 충실히 신봉했기에 3·1운동조차 비판의 대상이었고 독립운동은 무용한 수준을 넘어 유해한 것이었다. ‘열등한 민족’의 지역색을 극복할 전망이 부재한 그에게 지역색은 물론이요 민족색마저 사라진 ‘대동아’는 성전을 치르고라도 구현해야 할 유토피아였다. 평양 사위의 성공을 좌절시킨 것은 바로 서울 장인이었고 성공한 것은 식민주의였다.
황병주/한양대 강사, 한국사
'윤치호 일기'로 식민지 지식인 내면 파헤친 박지향 교수
일기 속 그는 '자유주의자'… 대일 협력 나선 이후에도 일제에 비판적 인식 뚜렷
삶은 훨씬 복잡하고 다면적… 친일 청산 몇년에 될일 아냐
▶영국사 전공인 박지향(57)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10여년 전부터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가 이끄는 '전파연구(傳播硏究)' 모임에서 '윤치호일기'를 함께 읽었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이자 지식인으로 꼽히는 좌옹 윤치호(1865~ 1945)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간 한문과 국문 그리고 대부분 영어로 일기를 썼다.
박지향 교수가 2일 출간한 《윤치호의 협력일기》(이숲출판사)는 나치 점령하 프랑스의 '협력' 등 서양사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대일(對日) 협력에 나서게 된 윤치호의 내면 세계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윤치호는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제에 검거된 이후 흥아보국단 위원장,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되는 등 총독부에 협력했다. 윤치호 개인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협력 또는 순응의 길로 내몰렸던 대다수의 삶을 성찰적으로 모색하는 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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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지향 교수는“‘협력자’를 도덕적으로 매도하거나 협력의 동기를 개인적 욕심과 야 망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 현상에 제대로 접근하는 방법이 아니다”고 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박 교수는 먼저 최근 몇년 사이에 이뤄진 과거사 청산작업이 정치적으로 오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많은 사람이 친일 협력자를 둘러서서 돌을 던지고 거기서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 특히 정치권이 개입할 때 친일문제는 여지없이 그들의 정략적 야욕에 놀아나는 장난감이 된다. 지난 정부의 과도한 역사 바로잡기 의식에서 '잘못' 태어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접하면서 이제는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성숙한 태도로 과거를 정리할 때가 되었음을 절감했다."
박 교수가 '윤치호일기'를 통해 발견한 윤치호는 '자유주의자' 다. '그는 자유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이라고 믿었으며, 자유주의의 가치인 근면과 자립, 점진적 역사 발전 등에 대한 깊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97쪽) 윤치호는 과격한 단절이 아니라 점진적 개선을 믿었으며 너무 빠른 혁신은 보수주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윤치호가 1938년 이후 대일 협력에 나선 이후에도 일제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그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새로운 지배자들은 예전 조선 황제들의 부패한 관리들의 지옥 같은 정책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다스린다.'(1938년 8월 20일자 일기) 1939년 배영(排英)궐기대회에 회장으로 참석한 윤치호는 '그들이 영국인들을 동아시아의 흡혈귀라고 비난했다'고 일기에 적으면서 자신은 다만 '회장으로 행동해야 했다'고 말한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결성대회가 열렸을 때 윤치호 자신은 고문이면서도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일기에도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윤치호는 1930년대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창궐하는 세상에서 일본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조선 민족이 생존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일본제국의 팽창이 조선인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대일 협력에 나섰다는 게 박 교수의 분석이다. 박 교수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였던 윤치호가 한때 영국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일본식의 파시즘에 잠시나마 동조한 것은 그의 치명적 한계"라며 "그러나 그의 협력은 마지못해서, 그리고 모호한 태도로 이루어졌고, 윤치호가 자발적으로 소신껏 친일을 했다는 일부 연구자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박지향 교수는 "인물사전이나 보고서 몇 쪽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삶의 복잡함과 다면성을 제대로 알고 난 후에야 그를 감히 재단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또 "친일 청산은 관(官)이 나서서 혹은 정부가 임명한 몇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몇 년 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과업은 훨씬 더 많은 연구가 진척되고 훨씬 더 많은 역사적 사실이 규명된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고 했다.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것은
학계가 거의 인정하는 사실.
그러나
윤치호는 친일파이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작사자로 인정하면 꼴이 어떻게 됨?
게다가 확실한 작곡자 안익태도
친일파로 의심받고 있으니
한국도 참 한심하지.
이 기회에 새 국가를 만들어야 함.
지금도 좋은 작사자, 작곡자 많으니 공모하면 됨.
▶남북분단 원인
<내부원인>
1) 8. 15 직후의 상황
8월 10일 조선총독부는 패전을 예상하고 일본인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국내 주요 인사들과 다각도로 접촉을 시도한다.우익 진영인 송진우는 협조 요청을 거부하고 여운형과 안재홍이 이를 수락하여 1년 전부터 조직해둔 비밀조직인 건국동맹을 모체로 하여 8.15 직후 여운형의 주장에 따라 전국 형무소에서 석방된 16,000여명의 정치범을 인적 자원으로 하여 건준은 급속히 조직을 팽창해 나가면서 실질적으로 지방의 행정권을 접수하기도 하였다.
여운형은 송진우 등 보수 인사들에게도 건준에 동참하기를 강력히 권유하였으나 송진우 등은
“망해 가는 놈의 손에서 정권을 받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프랑스의 페탕정권, 중국의 왕조명정권을 보라. 그들이 필경 허수아비 정권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는 논리로 건준에 불참한다.
건준이 실질적으로 정부 행세를 하며 행정기관들을 접수하자 당황한 총독부는 건준은 총독부의 치안 유지에 협조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행동을 중지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며 실력행사에 들어간다. 이러한 상황변화는 당초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8월 22일 일본으로부터 38선을 기준으로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다는 통보를 받게 된 이후 미군과 접촉하면서 사실상 미군 선발대가 9월 8일 서울에 진주하여 총독부의 일장기가 성조기로 교체되는 9일까지 20일 이상을 총독부는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해 나간다.
항복 선언과 함께 빠져나간 조선인 경찰 인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수천명의 일본군을 경찰 병력으로 대체한 총독부는 8월 30일 오끼나와에 있던 미군 24군단과 무선 교신을 시작한다. 조선군 사령관 코오츠키는
“8월 15일 이후 교통과 통신수단이 파괴되어 미군과의 연락이 늦어진 데에 대해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며 미군과 모든 것이 평화적으로 진행되도록 자기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조선의 상황은 군수품의 상당부분이 도둑맞았고 경찰서에 대한 습격이나 거의 모든 조선인경찰관의 도망에 의해 무법질서의 상황이며,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
고 경고했다
이에 하지는 “일본군은 미군이 그 책임을 인계할 때까지 북위38도 이남에서의 조선 치안을 유지할 것”과, 그리고 행정기관의 존속, “경인지구의 치안유지와 재산보호를 위하여 동 지구에 필요한 최소한의 무장한 일본군의 존속”을 허가하면서, 조선인에게 직접 경고하기 위해 그 내용을 포고문으로 하여 오늘(9월 1일) 미군기가 투하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9월 1일 미군에 의해 뿌려진 삐라의 내용은, 미군의 상륙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모든 것은 “조선국민의 행동 여하에 달려있다”고 강조하고, “철저한 복종은 나라의 재건을 빠르게 하고 또 민주주의적 지배 하에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는 날을 앞당길 것”이지만, “경솔하고 무분별한 행동”은 인명의 손실과 국토의 황폐, 독립의 지연만을 가져올 뿐이라고 경고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7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을 환영하기 위한 군중들을 향해 일본군은 사격을 가해 2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일어났음에도 미군은 일본군의 행동을 지지했다.
2) 좌우합작운동과 그 좌절
1946년 5월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중도 좌파인 여운형과 중도 우파인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미군정의 지원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미군정은 당시 첨예화된 좌우익의 대립을 완화시켜 정치적 안정을 이루어야 할 필요성과 좌우익세력 가운데서 온건세력을 포섭함으로써 극좌세력을 고립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미군정은 재개될 미소 공동위원회에 중도 좌우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하게 하고, 이들이 연합하여 과도입법의원에 참여하여 민주적인 개혁안을 만들어 실천함으로써 남한의 일반 대중이 미국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에 압력을 가해 미국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군정의 의도와 좌우합작 추진세력의 목적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역사적인 좌우합작운동은 전개되었다.
여운형이 허헌을 끌어들이고 김규식이 원세훈을 협의에 참여시켜서 좌우합작의 원칙에 관하여 쌍방간 상당한 의견 접근을 보았다.
좌우합작운동에 대하여 초기에는 우익이나 좌익도 그렇게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좌우합작이 무르익어 가자 이승만을 비롯한 한민당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 상실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방해공작에 나섰고,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세력은 미군정청의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대구 경북지역의 10월 봉기 등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냉전이라는 국제 정세와 미 소 양군의 남북 분할 점령이라는 현실 속에서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좌우 합작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한국 정치를 수렁 속에 빠뜨리는 정파간의 극심한 분열과 갈등은 결국 점차 영구분단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외부원인>
1) 연합군의 한국 독립 약속
남북분단의 원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미소 냉전이라는 외적인 요인과 민족 내부의 좌우 이념 갈등이라는 내적인 요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본다면 8.15 해방 전 38선이 그어지는 과정에서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외적 요인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외적인 요인보다 오히려 우리 민족 스스로의 책임이 더 컸다고 생각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우리는 독립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달성한 것이 아니었기에 분단이라는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했다.
물론 1910년 일본의 무력에 의한 한일합방 이후 국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은 끊임없이 이루어졌으나 명확한 구심점이 없었기에 중국 정부의 도움을 통해 여러 차례 상해 임시정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미국은 번번이 이를 묵살했다.
그 표면적인 이유는 한국인 단체들 간에 통일성이 없으며 한반도 본국인들과 어떠한 연결도 없어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임시정부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정만 받았다면 민족 분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전후 승전국으로서 당당히 일본에게 배상금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립운동 단체들 간에도 끝없는 갈등이 있어 사분오열되었으며 40여년에 이르는 세월은 국내외 많은 사람들을 낙담시켜 강력하고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어렵게 만들었다.
흔히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약속한 국제회담을 카이로 선언이라 한다.
물론 1943년 11월 미, 영, 중 3개국 정상이 카이로에 모인 이유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높이 평가하여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다급해진 미얀마 전선에서 인도를 향해 맹공을 가하는 일본을 막기 위해서는 중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고, 미국도 일본과의 효과적인 전투를 위해 보다 많은 일본군을 중국 대륙에 묶어 놓기를 원하였다.
여기서 합의된 사항은 일본의 영토를 1914년 1차 세계대전 전의 상태로 축소시키고 만주, 대만을 중국에 반환하며 한반도를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원래 루즈벨트 보좌관이던 해리홉킨스가 쓴 초안에는 at the earliest moment(가장 조속한 시일내에) 로 되어 있던 것을 루우즈벨트가 at the proper moment(적절한 시기에) 로 고쳤고 그 표현이 못마땅했는지 처칠이 다시 in due course(정해진순서따라, 때가되면, 당연한 순서를 따라)로 바꾸었다고 한다.
만주와 대만 반환 문제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던 in due course 가 해방 이후 한반도의 역사에서 벌어질 분단이라는 비극을 예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당시 영국은 한국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미국의 루즈벨트는 미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으로서 국무성의 의견을 무시하고 거의 독단적으로 외교 업무를 처리했다고 한다.
그는 카이로 선언 직후 일본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장개석과 동석하기를 기피한 스탈린을 위해 테헤란에서 미, 영, 소 정상회담을 갖게 된다. 공식 선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약속한 대가로 사할린 섬과 북방 4개 섬을 얻게 된다. 당시 회담을 기록한 회고록 등에 따르면 한반도 문제는 잠깐 언급되었는데 여기서 루즈벨트는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성공사례로 제시하며 한반도에도 3-40년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한다.
연합국의 유럽 전선에서의 승리를 목전에 둔 상태에서 미, 영, 소 정상들이 1945년 2월 얄타에 모였다.
여기에서도 한반도 문제는 토의에 주요 사안이 아니었다. 공식적인 문서에는 한반도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당시 미 국무부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였으나 루즈벨트는 이 보고서를 검토하지 않았다 한다.
그 보고서에서는 한국 독립은 3단계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도록 하였으니 첫째 연합국에 의한 군사 점령, 둘째 군사정부에 의한 통치, 셋째 신탁통치국들의 감시 하에 한국인 정부로 권력 이양이라는 절차를 밟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스탈린과의 환담을 통해 또다시 40년 정도의 신탁통치를 제안했고 스탈린은 2~30년 정도를 제안함으로써 대충 그 정도 선에서 묵시적 합의를 보았다 한다.
1945년 4월 루즈벨트의 돌연한 사망으로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수뇌회담이 열린다. 이후 신행정부는 대한 정책으로 미, 영, 중, 소에 의한 4대국 신탁통치안을 작성한다. 얄타회담 당시만 해도 미 국무부는 연구 부족으로 잠정적인 한국통치당국의 정확한 구조나 한국 독립의 허용 시기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2) 미 소간의 3.8선 획정 과정
연합국들이 대체로 전후 한반도에 대한 4대국 신탁통치안에 묵시적인 합의를 구한 상태에서 1945년 8월 들어 상황은 예상과 달리 급박하게 전개된다.
8월 6일 결국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 일대에서 강력한 남진을 개시하고, 9일에는 나가사키에도 원폭이 투하되면서 10일 일본은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할 의사가 있음을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통보하게 된다.
1945년 7월 16일 원폭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에도 미국 참모 본부는 1946년 후반 경에야 일본이 항복할 것을 예상했다. 그 과정에서 100만에 가까운 사상자가 생겨날 것으로 예측하고 소련군의 참전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소련의 대공세로 한때 무적의 관동군이라 불리던 만주 지방의 일본군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로 소련 극동군 25군 주력이 만주를 공격함과 동시에 일부 군대가 두만강을 건너 북한 땅으로 들어왔고 9일에는 하산호(張鼓峰)로부터 경흥(慶興), 청학(靑鶴), 아오지(阿吾地) 등을 공격했다.
그리고 10일 경흥을 점령하고 웅기(雄基), 나진(羅津) 방향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10일까지 바다와 하늘에서 웅기, 나진, 청진(淸津)을 공격하고 있었던 태평양 함대는 작전계획을 변경해 11일 웅기, 12일 나진, 13일 청진에 상륙하여 각각의 도시를 점령했다.
16일에는 원산항에 상륙하였고 그 후 23일에 개성(開城), 24일에 평양(平壤), 27일에 신의주(新義州) 등 소련군선견대가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한편 10일경 일본측이 천황제 인정을 조건으로 항복할 의사가 있음을 표명하자 미국은 즉시 항복 준비 작업에 들어가 10일 밤 국무성과 육군성, 해군성 실무자들이 모여 동남아 일본군은 영국, 중국내 일본군은 중국, 소련과 접전 중인 일본군은 소련, 일본 본토의 일본군은 미국에게 항복하도록 결정하면서 한반도에서는 38선을 경계로 이북은 소련군에, 이남은 미군에 항복한다는 지침을 결정했다.
그 안을 제시한 것은 육군성의 본스틸 대령과 러스크 대령이었다고 한다. 이 안이 8월 11일 확정되어 8월 15일 일반 명령 1호로 필리핀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로 전달되었고 영국과 소련에게도 통고되었다.
3)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
남북한을 나누어 군사적으로 점령한 미군과 소련군은 본격적으로 군정을 실시하면서 포고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 하는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25군 사령관은 포고문에서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라고 표현함으로써 조선이 해방되었고 소련군은 해방군임을 선언하였으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태평양방면 사령관 맥아더의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문에서
“ 일본 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그를 대표하여 일본국 정부와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 내용에 의하여 나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 모든 사람은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 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고 표현함으로써 점령군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여운형의 건준은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미군 상륙 직전인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일방적으로 발표했으나, 미군은 이를 부인하고 총독을 대신할 군정장관에 7사단장 아놀드 소장을 임명하면서 기존의 행정기구들을 그대로 접수 활용하려 했다. 따라서 과거 일본을 위해 일했던 한국인들이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요직을 차지하면서 이후 발생하는 수많은 민중 폭동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고 해방 후 지금에 와서도 과거사 진상 규명이라는 정치적 논란의 불씨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