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역에서 itx 막차 이용하여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착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01:00 출발하는 광주유스퀘어터미널(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 04:00 도착
터미널 길 건너에 있는 24시뼈해장국에서 아침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06:05 출발해서 화순터미널 도착
화순터미널에서 택시(12,000원)로 안양산자연휴양림 이동
안양산자연휴양림→안양산→백마능선→장불재→입*서석대→중봉→동화사터3거리→토끼등→증심사 : 07:30~14:30 ← 7시간 소요(촬영시간 많이 소요)
증심사 정류장에서 첨단09 빨간 시내버스로 광천터미널(고속버스터미널)로 이동
유스퀘어광주버스터미널(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17:25에 출발하는 춘천헹 막차를 이용하면 22:00에 도착
고속 |
17:10 |
21:45 (4시간 35분) |
- |
35,500원 |
☆ 유스퀘어광주버스터미널에서 춘천시외버스터미널로 오는 시간표는 광주로 가는 시간과 동일함.
원효사 주차장 내비게이션 주소 : 광주시 북구 금곡동 821-8
원효주차장~1.4km~늦재갈림길(516m)~1.7km~전망대(687m)~0.7km~동화사터갈림길~0.6km~동화사터상단
~0.9km~중봉~0.6km~군부대갈림길(900m)~0.3km~목교~0.5km~서석대~0.5km~입석대~0.5km~장불재~1.8km
~석불암~0.3km~규봉암~2.3km~억새평전~0.9km~신선대~0.9km~억새평전~1.2km~꼬막재~2.1km~원효주차장
약 17.2km/7h 소요
광주의 상징이요 모산인 무등산을 전철로 간다
월간마운틴 최두열 입력 2014.10.11 10:13
TV 방송에 출연해 퀴즈를 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착착 문제를 풀어 스타가 되면 좋으련만, 대부분은 말을 더듬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을 한다. KBS 우리말겨루기에 어렵게 출연을 해서 그런지, 방송 후 그 잔영을 쉽게 지우지 못하고 출연자 모임에 합류한다. 퀴즈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출연자들이 다시 끈끈한 인간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말겨루기 출연자 김양현씨는 광주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근무하며 다시 녹화할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
팔에 닿는 기운이 조석으로 차게 느껴지는 가을, 얼마 전에 출연했던 이혜경씨가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호남선 광주송정역까지 간다. 멀리서 회원이 오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김양현씨가 역까지 마중을 나와서는, 산행의 들머리인 소태역까지 안내해주었다. 동신대학교 교수학습지원센터에 근무하는 십년지기 이중엽씨도 함께 산을 오르기로 했다.
↑ 0001(장불재에서 입석대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억새천국이다.)
무등산은 197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40년만인 2012년에 우리나라의 21번째 국립공원이 된 산이다. 광주가 곧 무등산이요, 무등산이 곧 광주라고 표현해도 지나침이 없는 명산이다. 그래서 무등산을 '광주와 전남의 진산'이라 부른다.
정상부의 서석대와 입석대는 주상절리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처럼 멋있어, 찾는 이들이 꼭 앞에 서서 사진 한 장 남기는 곳이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흐르다가 바닷물을 만나 굳어진 것이다. 이렇게 1,000미터가 넘은 고지대에 있는 주상절리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등산객들은 원효사 지역과 증심사 지역으로 많이 오르내린다. 천왕봉은 출입금지 구역이다. 이 지역의 각계각층이 무등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가사문학의 대가라 해도 손색이 없는 송강 정철이 청소년기에 무등산 자락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그가 남긴 성산별곡은 무등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무등산은 광주 지역의 정신적 구심점이요, 지역 공동체의 상징인 것이다.
소태역 4번 출구~정토사~매봉~탑봉~마집봉~중머리재~장불재~입석대~서석대~중봉~중머리재~증심사~집단시설지구 약 15km 7시간 소요
소태역 4번 출구를 나와 지원파출소 앞을 지나면 사우나가 있는 6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 좌측으로 3분 정도 가면 우측에 정토사가 있는데, 정토사 건물을 지나면 우측에 계단이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지만 이정표 하나 없어 지나치기 십상이다. 숲에 들어서자 이정표가 나온다. 소태역 1km, 중머리재 6km 거리다. 근처에는 밤나무가 많아 등산로에 알밤이 나뒹군다. 작은 봉우리에 올라서면 매봉 0.9km 라는 이정표가 다시 반긴다.
소나무와 싸리나무가 많은 등산로를 가다보면 유문암 동굴이라고 명명된 바위에 닿는다. 누군가 바닥에 불을 때가며 침식을 잊고 기도를 한 흔적이 남아있다. 동굴 위의 바위는 넓어 몇 명이 앉아 조망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곧 탑봉에 닿는데, 누군가 돌을 쌓아 10개 정도의 탑이 만들어져있다. 아직 반쯤 쌓은 것도 있는데, 그래서 탑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탑봉에서는 천왕봉과 중봉, 장불재 등 무등산의 전경을 즐기기 좋다. 아래로 내려가는 듯하더니 다시 올라가는 길이 이어진다. 나무에서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 곳이다.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은 산길을 오르다보면 풀에 덮인 헬기장에 닿는다. 바로 마집봉인데, 근처에 중식 자리로 활용할만한 곳이 있다.
↑ 0010(마집봉에는 풀에 뒤덮인 헬기장이 있다. 중식자리로 활용하기 좋다.)
마집봉에서 중머리재까지는 2km다. 이 구간은 등산로 좌우로 조릿대가 많은 지역이다. 정상부는 보이지 않고 숲 사이로 서석대와 장불재 방향이 보인다. 등산로에 멋진 암괴가 나타나기도 한다. 태풍 때 뿌리가 뽑혀 쓰러진 고목도 자주 나오는데, 큰 산이라 쓰러진 나무들도 크다. 김해 김씨 봉분을 지나 1km 정도 오면 억새가 나타나 가을 분위기를 한층 무르익게 한다.
↑ 0002(마집봉에서 중머리재 구간에는 억새가 많다.)
앞쪽을 가로막는 중봉과 장불재의 몸집은 다가설수록 더욱 우람하게 보인다. 흰 구름 몇 조각 걸린 가을하늘이 청명하다. 중머리재를 0.4km 남기고 새인봉으로 빠지는 분기점인 서인봉도 나온다. 이쪽부터는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는지 길이 좋다. 헬기장을 거쳐 도착한 중머리재에는 넓은 데크도 만들어져있다. 증심사에서 이곳을 거쳐 입석대나 중봉을 오르는 코스가 일반적이라, 중머리재는 등산화에 짓밟혀 풀도 별로 없이 맨땅이 드러나 있다. 그 모습이 멀리서 보면 중의 머리같이 생겨 중머리재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 0003(중머리재 근처에 오면 등산로가 넓어진다.)
중머리재의 큰 표지석을 지나면 물을 뜰만한 곳이 있다. 두 줄기로 나오는 그곳에서 수통을 채워야 한다. 돌로 만든 계단을 따라 그리 급하지 않은 길을 약간 지루하게 올라가면 다시 조릿대가 나타나고, 좌측에는 집채만 한 바위가 흩어져있는 너덜지대가 나온다. 길 우측의 계곡에서 졸졸거리며 계곡물이 흐른다. 이런 길을 20여분 올라가면 앞이 탁 트이며 억새가 살랑거리는 곳에 닿는다. 통신시설도 바로 코앞에 서있다. 해발 900m의 장불재라는 곳인데, 증심사 주차장에서는 5km 거리다. 평소에 바람이 세게 불어 주변에 큰 나무는 없고 억새만 자란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입석대와 서석대의 모습이 거리도 적당하고 가장 멋있다. 마지막 화장실이 있는 곳인데, 정상부는 입석대와 서석대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우측 입석대를 거쳐 좌측의 서석대로 가는 게 적당하다.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을 때 생기는 절리 중에 오각형이나 육각형의 모양을 말한다. 무등산의 절리는 약 7천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서석대와 입석대, 규봉 등이 있다. 이곳의 너덜겅도 암석의 생성 및 풍화과정과 관련이 있다. 이런 자연자원은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라, 이 지역의 뜻있는 분들이 세계유산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규봉은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 0004(입석대 앞에는 전망대가 있어 누구라도 서서 사진을 찍는다.)
이곳 장불재에서 백마능선을 거쳐 3.1km 떨어진 화순의 안양산(853m)으로 능선산행을 하며 갈수도 있다. 입석대가 0.4km, 서석대가 0.9km 떨어졌다는 이정표를 뒤로 하고 걷는다. 억새 사이로 들어가면 아무 곳이나 다 그림이 된다. 억새 사이를 걷는 등산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입석대 앞에는 전망대가 있어 사진 찍으며 흔적을 남기기 좋다. 바람결 따라 군무를 즐기는 억새의 모습은 무등산 산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입석대는 이름자 그대로 길쭉한 바위가 층층이 세워져있는 모양이다. 산 정상부에 어떻게 이런 자연작품이 만들어졌는지, 위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다.
↑ 0006(무등산의 상징인 서석대에서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입석대 뒤로 돌아가 바위와 억새를 구경하며 바위 사이의 길로 가면 승천암(昇天巖)이라는 바위가 나온다. 그리 크지는 않은데, 생긴 모습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라 이런 이름이 붙은 듯하다. 옆에 있는 안내판이 스님과 이무기와 산양에 얽힌 보은의 전설을 전한다. 멀리에는 백마능선의 산줄기가, 가까이에는 바위와 억새가 있어 구경을 하다보면 서석대에 닿는다.
서석대 빗돌 옆에서 사진을 찍으면 뒤쪽의 정상부가 배경이 된다. 서쪽 아래에 있는 광주 시가지를 조망할 수도 있다. 출입금지 구역이라 등산객들은 이곳에서 하산해야 한다. 무등산 옛길로 내려가면 전망대가 있는데, 무등산의 주상절리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좋은 장소다.
↑ 0007(서석대에서 중봉 가는 길은 억새 사이로 나있다.)
앞쪽의 중봉을 향해 내려가면 다시 억새가 춤을 추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억새구경을 하며 기분 좋게 앞으로만 가면 중봉(915m)이다. 부드러운 능선이 마치 강원도 정선에 있는 민둥산 같은 느낌이 든다.
중봉도 바위투성이다. 중머리재까지 1km 거리인데, 바위 사이로 난 길을 즐겁게 걸으며 경치를 즐길 수 있다. 다시 중머리재에서 증심사까지는 2km, 길이 넓게 잘 나있어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길이다. 내려갈수록 좌측의 계곡에서 나는 물소리가 커지는데, '산이 커야 골이 깊지'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곳이다. 도시에 있는 산인데도 오염이 덜 되었는지 반딧불이도 날아다닌다.
천년고찰 증심사를 구경하고 다시 20여분 더 내려오면 집단시설지구인데, 식당과 커피숍 등이 많다. 집단시설지구에서 버스를 타면 10분 정도 뒤에 학동 증심사입구역에 닿는다.
산행정보
증심사
↑ 0008()
무등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증심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로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대웅전 뒤에 있는 삼층석탑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삼층석탑은 1971년에 탑을 해체하여 현재 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담양국수
↑ 0009()
증심사 상가 내에 식당이 많이 있는데, 집단시설지구가 대개 그렇듯이 메뉴는 비슷비슷하다. 이곳의 식당메뉴는 맛의 고향 광주답게 국수와 홍어무침이 기본이다. 30년 전통을 자랑하는 담양국수에서는 홍어, 무, 미나리 등을 버무려 만든 홍어무침에 막걸리를 곁들여 산행의 여운을 즐길 수 있다.
문의 (062)226-1178
원효사(11:03) - 제일기도원 갈림길(11:13) - 제철유적지(11:22) - 주검동유적(11:28) - 물통거리(11:37)
- 치마바위(11:51) - 얼음바위 갈림길(12:12) - 임도/중봉갈림길(12:30) - 중봉(12:43) - 임도/중봉갈림길(12:56)
- 서석대 전망대(13:17) - 서석대(13:25) - 입석대(13:39) - 장불재/중식(13:50-14:12) - 석불암(14:41)
- 규봉암(14:55) - 신선대 억새평전(15:47) - 꼬막재(16:07) - 원효사(16:43)
산행시간 : 5시간 40분 (중식시간 20분) http://blog.daum.net/ksk1033/6943136
만력계사 의병대장 김충장공 주검동
만력계사란 명나라 신종 21년으로 우리나라 선조 26년(1593)을 가리킨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이몽학(李夢學)의 난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전쟁 영웅들의 비참한 최후
전란이 모두 끝난 후 1601년(선조 34), 경연석상에서 이항복(李恒福)은 선조에게 비록 명나라 원군의 도움을 받았지만 조선 장수들의 노고도 적지 않으니 만일 공신의 말석에 부친다면 여러 장수들이 불만스러워 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에 대해 선조는 "명나라 군대의 힘이 아니면 왜적을 어떻게 물리쳤겠는가? 강토를 회복한 것은 모두 명나라 군대의 공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한 일이 없다. 이는 내가 사실에 근거하여 한 말이다. 여러 해 동안 방수(防守)한 공이야 어찌 전혀 없다고 하겠는가"라며 강하게 반박하였다.
선조는 신하들의 공을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사(將士)는 그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당의 머리를 얻었을 뿐 제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으며 그나마 이순신과 권율 정도가 조금 나은 편이라고 지적하였다. 선조의 이러한 인식은 왜군에 대항하여 필사적인 항쟁을 벌였던 조선 장수와 의병장들의 운명을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순신이 전공을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을 받아 죽음 직전까지 몰렸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때문에 『임진록』의 이본 가운데는 이순신의 죽음을 후일 반대파들에 의해 목숨을 잃느니 차라리 장렬한 죽음을 택한 데서 비롯된 일종의 자결로 그리고 있는 작품도 있다. 그래도 선조에게서 약간의 공적을 평가받았으며 전장에서 명예롭게 전사한 이순신은 오히려 행복한 편에 속한다.
의병장들의 운명은 더욱 비참하였다. 의병들의 공이 컸음을 치하하는 것은 관군의 역할이 미미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인데, 그것은 정권 담당자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백성들의 큰 신망을 받고 있던 이들이 혹시 어수선한 시국과 전란을 틈타 모반을 꾸미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실제로 전란 중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났고 모반 사건도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들이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이름난 의병장의 이름을 파는 경우가 있어 정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의병장들의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의 입김까지 작용함으로써 많은 전쟁 영웅들이 희생을 당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죽임을 당한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은 그 첫 희생자였다. 이산겸은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의 서자로, 조헌 의병 부대의 잔병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그런데 누군가 충청도 홍산에서 일어난 송유진(宋儒眞) 반란의 주모자로 그를 무고하는 바람에 억울하게 잡혀 죽고 말았다.
김덕령은 희생된 의병장 가운데 가장 거물이었다. 그는 의병 항쟁에 뛰어들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은 일이 있다.
거문고와 노래 이것은 영웅의 일이 아니고
칼춤으로 모름지기 옥장(玉帳)에서 놀 것이다
다른 날 난이 평정되어 칼을 씻고 돌아온 뒤에
강호에 낚시질하는 외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

김덕령 장군 묘 김덕령은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전란이 끝난 뒤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았는데, 광주시 충장로는 바로 충장공(忠壯公) 김덕령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광주시 충효동 소재. ⓒ 김성철
전란이 평정된 뒤 한가로이 낚시질이나 해야 할 김덕령을 기다린 것은 그러나 뜻밖에도 모함이었다. 1596년 7월에 이몽학이라는 자가 모반하였는데, 관련자들의 공초(供招)에서 장수가 김덕령이고 함께 거병하기로 일을 모의했다는 진술이 나오면서 김덕령은 모반 사건에 연루돼 체포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덕령의 명성을 꺼리는 자들에게서 "덕령이 사람 죽이기를 삼[麻]을 베듯 하였으며, 또 모반할 조짐이 있으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는 참소(讒訴)가 이어졌다. 심지어 형리에게 빨리 죽이도록 사주하는 자까지 있었다. 김덕령은 26일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고문으로 인해 정강이뼈가 부러진 상황에서도 그는 무릎으로 기면서 자신의 죄라면 어머니의 삼년상을 지키지 못하고 의병을 일으킨 것뿐이라고 항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홍의 장군 곽재우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혁혁한 전공은 일찍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병사 조대곤(曺大坤)은 곽재우가 의심스럽다고 보고한 바 있으며, 도망한 일로 곽재우에게 목숨까지 위협받았던 경상 감사 김수 역시 그를 도적으로 지목하면서 비방하였다. 선조는 함부로 감사를 죽이고자 하는 자가 도적이 아니고 무엇이냐며 없애 버리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전란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은밀히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순검(巡檢)한다 사칭하면서 곽재우의 동정을 살폈고, 곽재우는 이를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김덕령이 무고하게 죽는 것을 보고는 지금은 일할 수 없는 때임을 알고 은거하여 66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의병들 역시 표창을 받기는커녕 전란이 끝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정부에서 이들을 강제로 군인으로 만들어 전선에 배치하거나 수시로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의병들의 원망과 고통은 극에 달하였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이수광은 국가가 백성들의 신뢰를 크게 잃어 차후에 또 전란이 생기면 의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쟁 영웅들의 비참한 최후 - 임진록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개정증보판 2005, 2쇄 2013, 돌베개)
지공대사 좌선수도원
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오성원-꼬막재-규봉암-장불재-입석대-승천암-서석대-중봉
-용추봉-중머리재-구대피소-당산나무입구삼거리-증심사-증심교-무등산탐방안내소
약 16km 6시간 30분
◈ 12.6 Km
산장버스종점 ⇒1.0km⇒ 늦재샘 ⇒0.2km⇒ 늦재 ⇒1.3km⇒ 동화사터 ⇒0.8km⇒ 중봉 ⇒1.4km
⇒ 장불재 ⇒0.4km⇒ 입석대 ⇒0.5km⇒ 서석대 ⇒0.5km⇒ 입석대 ⇒0.4km⇒ 장불재 ⇒1.3km
⇒ 중머리재 ⇒1.2km⇒새인봉삼거리 ⇒0.5km⇒ 새인봉 ⇒0.3km⇒선두암 ⇒2.3km⇒ 운소봉 ⇒0.5km⇒ 증심사버스종점
◈ 13.5 Km
증심사버스종점 ⇒1.2km⇒ 증심사 ⇒0.5km⇒ 송풍정 ⇒1.5km⇒ 중머리재 ⇒1.3km⇒ 장불재 ⇒0.4km⇒ 입석대⇒0.5km
⇒서석대 ⇒0.5km⇒ 입석대 ⇒0.4km⇒ 장불재 ⇒1.6km⇒ 규봉암 ⇒3.0km⇒ 꼬막재 ⇒2.6km⇒ 산장버스종점
원효사 입구 주차장~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 앞 초소(우측으로)~무등산옛길 2구간 진입로~제철유적지~주검동유적~물통거리~치마바위~얼음바위 갈림길~작전도로 앞 안내판(초소)~서석대 전망대~서석대 정상(옛길 종점)~입석대~장불재~갈림길~지공너덜~규봉암(광석대)~신선대입구 갈림길~신선대억새평전~꼬막재~무등산장~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
총 13.5㎞에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4시간30분 걸린다. 식사와 휴식시간을 포함해도 6시간이면 여유 있게 완주할 수 있다.
뒤돌아 본 천왕봉과 서석대
동화사 가는 길
6월8일에 개방되는 정상~~
서석대와 입석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