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백범 김구 선생

온리하프 2024. 10. 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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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기의 책 "테러리스트 김구"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김구는 테러리스트 아닌 연쇄 살인마'로 표현된 듯 싶다.

 

 

[프레시안 books] 정안기의 <테러리스트 김구>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  기사입력 2024.10.05. 13:01:23

 

올해 8·15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뉴라이트의 부활, 건국절 논란의 재점화로 광복절 행사 마저 두 동강이 나버렸다.

여기에 더하여 정안기라는 자의 <테러리스트 김구>라는 책이 8월 15일에 맞춰 나왔다. 선정적인 제목 때문에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언론이 요란하게 다뤘다. 그러나 정작 책(이걸 책이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다)이 나오고 달포가 지났건만, 극우 유튜브에서만 떠들어댈 뿐, 종이 매체나 온라인 매체에서 이 책과 관련된 기사나 서평 등은 별로 많이 볼 수 없다.

 

뉴라이트 대부 안병직 교수가 정안기를 손절한 이유는?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낙성대 연구소 안병직 교수의 이 책에 대한 짤막한 언급

(<조선일보>, 2024.8.26, 안병직 "뉴라이트가 매국? 北 실태 목도한 친북주의자의 자기반성서 출발")과

안병직 교수의 발언에 대한 정안기의 거의 '발작적' 반응(<스카이데일리>, 2024.8.26, 안병직 교수의 '테러리스트 김구' 논평에 대한 저자 반론)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안병직 교수는 뉴라이트의 사상적 대부이자 정안기도 필자로 참여한 <반일종족주의>의 산실인 낙성대 연구소의 정신적 지주이다. 안병직 교수는 정안기가 가끔 낙성대 연구소에 왔지만 "내 제자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면서, "학문의 생명은 객관성인데 그의 관점은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백범에 대해 "김구 선생이 해방 이후 건국 과정에서 실수한 것은 있지만 그의 도덕성과 애국심에 도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지사 중의 지사 아닌가"라고 평가했다.

 

정안기는 안병직 교수의 논평에 대해 "저서의 표지만 본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옮긴 발언"이라 했다. 이어 안병직 교수의 김구 인식과 같은 "거짓과 착각을 파헤치고 논증"한 것이 자신의 책이며 자신은 이 책을 쓰면서 "이론과 실증 면에서 최선을 기하고자 노력"했다고 강변했다.

정안기는 또 안병직 교수를 자신의 스승이 아니라 "경제사 연구 동료"일 뿐이라고 하면서 그의 논평은 "희대의 연쇄살인"을 자행한 김구에 대해 "무지함과 무책임의 극치를 드러낼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서문과 목차라도 훑어보는" "최소한의 도리"도 지키지 않고 자신을 폄훼했다고 강변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안병직 교수가 왜 정안기를 '손절'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속된 말로 정안기가 뒤집어써야 할 똥물을 같이 뒤집어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안병직 교수의 논평이 이 책을 읽고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읽을 필요조차 없다는 제자나 후학들의 이야기만 듣고 한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인내력을 테스트해가며 정안기의 책을 앞표지부터 뒷표지까지 꼼꼼히 읽고 이 글을 썼다는 점은 밝혀둔다.

 

정안기는 누구인가?

 

정안기는 1990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2000년 일본 교토대학에서 일본 미쓰이 재벌 계열의 종연방적(해방 후 광주공장은 김무성의 아버지 김용주의 전남방직으로, 경성공장은 태창방직과 방림방적으로 분화)에 대한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안병직 교수의 변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나카무라 사토루의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2005, 혜안)을 번역하기도 했다. 2015년 고려대학교 수업에서 정안기는 "위안부가 돈 많이 벌었고 성노예 아니다", "식민지 지배 덕에 경제발전 했다" 등의 발언으로 학생들의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

 

<반일종족주의>(2019),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2020)에 공저자로 참여한 정안기는 여러 공저자 중 가장 저열하고 난폭한 주장을 펼쳤다. 그의 첫 번째 단독저서 <충성과 반역>(2020, 조갑제닷컴)은 일본군 출신 중에서도 가장 죄질이 나쁜 친일파로 비판받는 송요찬, 함병선 등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 출신들을 '대한민국 창군, 건국, 호국의 주역'으로 찬양한 책이다.

 

그는 또 2024년 2월 개봉한 이승만 찬양 다큐 <건국전쟁>에 출연하여 류석춘(역시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비난) 등과 함께 유어만 비망록이라는 괴문서에 근거해 백범 김구를 비난한 바 있다(유어만 비망록의 문제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프레시안> 2024년 6월 26일자에 실린 필자의 「오늘, 김구 암살당한 날 … <건국전쟁>의 총질은 여전히 계속된다」, 참조하기 바란다).

 

<테러리스트 김구>는 거대한 신화적 존재가 된 백범 김구에 대한 탈신화 작업을 표방하면서 백범 김구를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의열투쟁의 최고지도자로 높이 평가해온 한국학계를 비판하고 있다.

정안기는 테러와 테러리즘이 갖는 두 얼굴,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언론매체에서 접하는 부정적인 성격에 대비되는 약자의 저항수단으로서의 테러행위가 갖는 적극적인 측면을 인정하는 듯한 입장을 보인다.

 

정안기는 "김구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혹은 '테러리스트여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역사적 강박관념'이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20, 이하 정안기 책은 면수만 표시)해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국의 역사학계가 김구, 김원봉 등의 행위를 '의열투쟁'으로 미화하며 테러와 구분짓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을 저질러온 '불편한 진실'을 밝히겠다고 주장(25-30)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고, 정안기도 미주(60번)에서 테러와 의열투쟁을 구분짓는 행태에 대한 필자의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필자와 정안기의 동행은 딱 여기까지다.

 

▲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려고 38선 앞에 선 김구. 백범김구기념관 전시 사진 ⓒ손호철

 

 

정안기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김구는 테러리스트도 아닌 연쇄살인마

 

'테러리즘 있는 테러(terror with terrorism)'와 '테러리즘 없는 테러(terror without terrorism)'를 굳이 구분하는 정안기의 의도는 김구의 행동은 '테러리즘 없는 테러', 즉 살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안기가 원래 붙이고 싶었던 이 책의 제목이 <백정일지>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김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그가 유튜브에서 자주 주장하는 것처럼 김구는 '연쇄살인마'라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살인, 방화, 약탈을 일삼는 범죄자나 마적떼로 보는 것은 딱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의 시각이다.

 

<테러리스트 김구>는 김구의 활동을 항일테러, 밀정테러, 정적테러의 3부분으로 나누었다.

1부 항일테러에서는 치하포 사건,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2부 밀정테러에서는 김립 암살, 옥관빈 암살, 안공근 실종 사건,

3부 정적테러에서는 송진우 암살, 여운형 암살, 장덕수 암살을 다루었다.

그리고 이 모두를 김구가 자행한 살인행위라고 단정하였다.

 

책이 출간된 직후부터 극우 유튜브에서 정안기는 책에 담지 않은 새로운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백범이 죽인 사람을 모두 81명이라 했다가 최근 유튜브에서는 열댓 명 더 늘어나 백범이 죽인 사람을 96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표적이 된 인물 중 일본인은 3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동족을 대상으로 한 살해행위였다고 했다.

 

이 같은 정안기의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첫째는 정안기가 김구의 손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의 죽음이 김구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이다. 윤봉길 의거 당시 백범의 피신을 도왔던 피치 목사는 김구는 "그가 폭력에 참여했다면 용기 있게 그에 대한 책임을 졌"었다고 주장하면서 김구를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몰고가는 자들의 견해를 반박했다. 실제로 김구는 치하포 사건이나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 김립의 '처형', 그 밖에 다수의 밀정처단에 대하여 이 사건들이 자신의 책임하에 이루어진 일임을 밝혔다.

그런데 정안기는 사건 당시의 수사당국이나 해당 사건을 정밀하게 다룬 수많은 연구들이 김구의 책임이라고 단정하지 못한 사건들에 대해 아무 새로운 증거 없이 김구의 소행이라고 못 박는 뇌피셜을 자행하고 있다.

 

둘째 밀정 처단은 독립운동의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의병도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교전보다도 일진회 등 친일파 처단과 관련된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임시정부나 의열단의 각각 '7가살'이라 하여 독립운동가들이 마땅히 처단해야할 부류로 하고 있었다. 김구의 밀정처단은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안기는 왜 스스로 '입에 칼을 물고 널을 뛴다'고 할까?

 

<테러리스트 김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백범을 깎아내리고 모욕 주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집필 목적이기도 하다. 백범에 대한 평가가 과장된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고,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으면 될 일이다.

 

예컨대 1997년 도진순은 김구의 최초의 '살인'인 치하포 사건의 경우 피살자인 쓰치다 조스케가 백범이 생각한 대로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군인이 아니라 일본상인이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주장은 현재까지 별다른 이론 없이 학계에 받아들여 지고 있다. 물론 아직도 유튜브나 대중적인 서적에서는 김구 신화의 일부분으로 과장되게 통용되는 부분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왜 정안기는 스스로 밝히듯이 "입에 칼을 물고 널을 뛰는 심정"(7)으로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정안기나 <건국전쟁> 부류가 김구를 깎아내리는 이유는 이승만을 띄우기 위해서이다.

이승만 추종자들이 아무리 이승만을 띄우려 해도 김구에 눌려 이승만이 높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만 추종자들이 이승만에게 형광등 300개를 켜대도 이승만의 얼굴에는 김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울 수밖에 없다.

 

초조해서일까?

김구의 신화를 깬다라는 주장을 펴기에 이 책의 논증은 너무 허술하다.

상식과 통념을 깨는 전복적인 주장을 하려면 철저한 사료검증에 기초한 치밀한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문제는 무려 1,500개의 주가 달린 이 책의 논증이 학계의 기본 상식과 룰을 크게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미주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꼼꼼히 읽고 보니

 

이 책은 본문 뒤에 실린 미주만 158쪽에, 개수가 무려 1,525개에 달한다.

얼핏 보면 매우 충실하게 주를 단 것처럼 보인다.

우파 유튜브에서도 정안기가 실증에 완벽을 기했다고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다.

 

과연 그럴까?

요즘은 페이지 하단에 각주가 달린 책은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여 독자들이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본문 뒤에 미주를 다는 경우가 많다. 출전을 확인해 보려는 연구자에게 본문과 미주를 대조하며 읽는 것은 상당히 불편한 일이다. 왔다갔다 읽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미주를 꼼꼼히 확인하며 본문을 읽었다. 단지 미주에 어떤 자료가 인용되어있는가를 본 것이 아니다. 단순한 사실관계를 서술한 것을 제외하고 전체 미주의 3분의 2쯤은 인용된 자료의 원문을 확인했다.

정안기가 인용한 논문이나 원자료의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필자도 이미 본 것이고, 또 필자의 컴퓨터 안이나 책꽂이에 파일, 혹은 원본으로 보관되어 있다. 이로 인해 다행히 원전 확인이 가능했다.

 

정안기의 책을 읽다가 인용된 자료나 논문을 내가 분명히 본 것인데 그런 내용이 있었나, 그 출전의 저자가 저런 얘기를 했었나 계속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인용된 자료와 논문을 확인을 해보게 된 것이다. 이를 확인하는 과정은 '어?'를 넘어 '헐!'과 '허걱'의 연속이었다.

뇌피셜로 가득한 이 책의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지적하자면 이 책보다 더 두꺼운 책을 써야할지도 모른다. 문장 하나하나를 그냥 넘어가기 힘들 정도다. 그래서 이 책의 문제점을 세세하게 지적하는 대신 정안기의 사료 취급 태도에 국한해서 지적하고자 한다.

 

주에 인용된 전거를 찾아봤는데 본문에 주장한 내용이 없어

 

이 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 이유 중의 하나는 미주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해당 책의 페이지를 찾아보면 본문에 서술된 내용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한 예로 정안기는,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가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장개석을 비난한 사설 때문에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328) 정안기는 주 1049에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쓴 <몽양 여운형> 76쪽을 출전으로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1927년 장개석의 배신으로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수많은 중국혁명가들이 학살당할 때 여운형도 체포될 뻔했다가 간신히 탈출한 사실이 나온다. 이런 경험 때문에 여운형은 사석에서나 지면을 통해 장개석이 가식인이며 위선자로 중국을 통치할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운홍의 책 어디에도 사회적 물의가 일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장개석을 비판한 일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적 물의가 일었던 일 자체가 없었다.

시기상 도저히 출전이 될 수 없는데도 버젓이 주로 달린 사례도 드물지 않다. 정안기는 윤봉길의 폭탄테러가 백암 박은식의 지적과 같이 파벌의식과 합의무상(合意無常)의 민족적 고질만 드러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마치 박은식도 윤봉길의 테러를 비판한 듯싶지만, 박은식은 윤봉길의 테러 7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정안기는 윤봉길과 김구를 깎아내리기 위해 박은식을 끌어왔는데, 정직한 연구자라면 이 말이 윤봉길 의거와는 직접 상관없는 이승만의 탄핵을 둘러싼 갈등에 대한 박은식의 탄식이었음을 밝혔을 것이다. 또 여운형이 1943년 7월 사건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근거로 주 1057은 1935년 12월에 간행된 <사상휘보> 5호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별개의 사건으로, 1935년의 자료가 어떻게 7년 반 뒤 집행유예의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유리하면 그냥 인용, 불리하면 막무가내 배척: 사료비판 전혀 없어

 

요즘 가짜뉴스가 논란이 되지만, 역사연구를 할 때도 자신의 주장이 되는 사료가 정확한 것인가 먼저 검토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안기의 책은 엄정한 사료비판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정안기는 1955년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작성한 <사찰요람>이란 자료에 의거하여 여운형 암살범이 김구라고 단정한다.(357) 그런데 <사찰요람>은 근거가 불확실한 서술이 많아 비판을 받는 <나무위키>에서조차 인용해서는 절대 안 될 왜곡된 자료라고 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 자료다. 그런데 정안기는 당시 사찰형사들의 왜곡된 시각을 그대로 인용하여 김구로 암살범으로 몰고 갔다.

반면 고하 송진우의 최측근이었던 김용완은 송진우가 암살되기 전날 저녁 송진우를 만나 아래와 같은 결정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송진우 씨가 피살되기 전날 저녁 궁금해서 송진우씨댁에 가서 송진우 씨를 만났다。그 집에 가니까 변영태 씨가 와 있었고 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그때 찬탁이냐 반탁이냐를 둘러싸고 정객들이 나누어져 싸움을 벌였는데、송진우씨는 찬탁도 반탁도 아니었다。그런데 어떻게 찬탁으로 몰려 「송진우 죽일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송진우씨는 그날 저녁 김구씨를 만나러 경교장으로 갔다。그래 그 혼란 속에서 찬탁도 반탁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고、송진우씨는 평소에 김구씨를 따랐으므로 김구씨는 송진우씨를 무척 아꼈다。김구씨는 송진우씨더러 『여보게 오늘 저녁은 나하고 같이 자세。세상이 하도 소란하니, 이 밤은 같이 지내세』 하고 자고 가기를 권했는데、송진우 씨는 김구씨에게 『어떻습니까。괜찮읍니다』하고 집으로 돌아와 잤다는 이야기다。그런데 그날 밤 송진우씨는 밤에 자다가 변을 당했다. (<재계회고> 3. 122)

일제의 정보문서까지 샅샅이 뒤졌다는 정안기가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자료를 못본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주장이 결정적으로 불리하니 못 본 척 한 것일까? 김용완은 고하 송진우의 애제자이자 인촌 김성수의 매부로 어느 모로 보나 고하 쪽 인물임에 틀림없다. 전경련 회장을 10년 넘게 지냈으니 김구를 위인으로 조작했다는 종북좌빨일리는 더욱 없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대표적인 예에 불과하다. 정안기는 불리한 자료는 배척하고 유리한 자료는 사료비판이나 검증도 없이 뇌피셜에 의존해 모두 다 김구가 암살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서로서 기본이 안 된 책이다.

처음부터 김구는 살인자라는 결론을 갖고 출발한 정안기에게는 사료의 신뢰성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정안기는 어떤 사료든지 김구에게 불리한 것이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용하고, 김구에게 유리한 것이면 무조건 배척했다. 또 주를 1500개나 달았지만 다른 연구자가 먼저 밝혀낸 역사적 사실을 아주 새로운 해석이나 새로운 자료의 추가 없이, 인용할 때에는 선학의 연구성과를 명기해주는 것이 도리이다. 그러나 정안기는 학계의 그런 최소한의 도리도 지키지 않았다. 예컨대 임경석이 러시아문서를 발굴해서 김립과 관련된 많은 내용을 밝혀낸 것이나, 도진순이 백범일지 원본에서 안공근에 관한 내용이 잘려나갔지만 희미하게 남은 부분을 복원해낸 것 등은, 별다른 출전 없이 인용하다가 비판할 때에만 이름을 등장시켰다. (계속)

 

 

<테러리스트 김구>, '중꺾마' 백범 모해하려 증거조작뿐, 무엇을 걸었나?

 

[프레시안 books] 정안기의 <테러리스트 김구>

 

평화통일, 국가보안법 폐지, 또는 주한미군 철수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주장을 편 사람들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 종북좌빨로 몰려 국가보안법의 희생양이 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정안기 등 뉴라이트들은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북한의 교과서를 베꼈다고 아우성을 쳐왔다. 그런데 정안기가 김구는 살인마라고 가장 강하게 주장할 때 근거로 대는 자료는 놀랍게도 북한에서 간행된 서적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구가 1948년 남북협상에 나서기 전까지 북한은 이승만과 김구를 한 데 묶어 남조선반동 살인 테러 집단의 두목이라고 갖은 욕을 다 퍼부었었다.

 

김구가 남북협상에 나선다니 북한이 급하게 도처에 써놓았던 이승만·김구 비난 구호에서 김구 이름을 지웠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가 아닌가? 정안기는 1946년 5월 북조선5·1기념공동준비위원회가 펴낸 <팟쇼·반민주분자의 정체>에 실린 김구에 대한 험한 말들을 금과 옥처럼 인용하여 자기의 논거로 삼고 있으니 종북도 이런 종북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이승만과 김구를 싸잡아 욕하고 있다. <팟쇼·반민주분자의 정체> 18, 20, 56쪽에는 "살인강도단 '테로' 두목" 이승만과 김구는 "해외의 수십 년 역사를 반역자의 명부에 올린" 자들로 "지금 선두에 서서 '테로' 운동을 영도"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정안기는 이승만 부분은 놔두고 김구에 대한 비난만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내로남불'이 아닌 '이로김불'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출전은 악의적인 뇌피셜

 

정안기는 독립운동가들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깜짝 놀랄 무지를 곳곳에서 드러낸다. 예컨대 주 581에서는 이회영의 일가 가운데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물은 없었다고 단언하는데, 임시정부에서 아마도 가장 오래 국무위원을 지낸 이시영(초대 부통령)은 이회영의 바로 밑 동생이었다. 정안기는 이규서와 연충렬(김구의 측근 엄항섭의 처남)의 처형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의 당사자였던 이규창(이회영의 아들이자 이규서의 사촌동생)은 이규서와 연충렬을 유인하여 백정기와 엄형순이 처형했음을 자신의 회고록 <운명의 여신(餘燼)>에서 자세히 밝혔다. 그러나 정안기는 엉뚱하게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의 잘못된 정보를 인용해 두 사람이 "김구파에 의해 암살되었다"(212)고 했다. 문제는 정안기가 자기한테 유리할 때는 이규창의 <운명의 여신>을 7~8회나 인용하고 있지만, 정작 이렇게 중요한 부분은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안기는 안창호가 체포된 것이 김구가 윤봉길 의거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결과적'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무력입국론자인 김구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비폭력 자강주의자 안창호를 제거하고 흥사단을 와해시키기 위해 윤봉길 폭살테러의 후폭풍을 이용했다는 것이다.(152) 그러나 당시 안창호를 지근 거리에서 모셨던 구익균의 회고록이나 최근 간행된 흥사단 이태복의 <안창호 평전>을 보면 안창호와 김구 두 분의 돈독한 동지적 관계는 정안기류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또 안창호의 체포 과정을 전문적으로 다룬 한시준이나 이명화의 논문을 꼼꼼히 살펴봐도 정안기처럼 안창호의 체포를 백범 탓으로 돌릴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정안기의 독립운동에 대한 악랄하고 의도적인 왜곡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정안기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주도한 무정부주의자 정화암이 옥관빈, 옥성빈, 이용노, 이태서 등을 암살한 행위를 두고 "이 모든 것은 '독립투쟁도 좋지만, 우선 먹고 살아야했다'는 정화암의 고백과 같이 '생계형 테러' 혹은 '청부살인'의 실상이었다"고 주장했다.(196) 이런 식의 서술은 마치 정화암 자신이 위에 열거한 암살행위가 먹고살기 위해 벌인 청부살인이었던 것처럼 고백했다는 인상을 준다. 소제목 자체가 '청살(청부살인)의 추억'이다. 그런데 정작 정화암이 '독립투쟁도 좋지만, 우선 먹고 살아야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그가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동지들과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다가 쫄딱 망해 자본금만 축냈다는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

정안기는 1939년 5월경 중경에서 실종된 안공근을 백범이 남화한인청년연맹 정화암을 사주해 암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32) 그런데 뒷부분에 가서 정안기는 구익균의 증언을 인용하여 "정화암은 자기가 하지 않지만, 무정부주의자가 맡아 가지고 청부살인을 했다는 그런 얘기야"라고 쓰고 있다.(260) 정안기는 구익균의 증언을 요약하면서 "그(안공근)가 정화암을 굉장히 미워했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안기가 왜곡한 구익균의 증언 원문(국사편찬위원회, 2013, <독립운동과정병,식민 경험의 두갈래 길>, 47쪽)을 찾아보면

(면담자) 선생님은 이 사실을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구익균) 누군고 하니 백범 맏아들이 김인이라. 김인이가 이 내용을 안단 말이야. 그가 굉장히, 정화암을 굉장히 미워하고 했어. 이이가 백범 아들이고 그러니까 이이한테 통해서 결국은 3인방이 안공근을 죽였으니까, 이이를 통해서 알았던 노태준이를 통해서 나는 그 얘기를 들었어.

라고 되어있다. 정안기처럼 지독한 확증편향에 사로잡히지 않고 정상적으로 한국어를 읽는 사람이라면 정화암을 굉장히 미워했던 인물은 안공근이 아니라 김인임을 알 수 있다. 구익균의 증언에 따르면 안공근 피살의 비화를 노태준에게서뿐 아니라, 정화암에게서도 직접(아마도 1950년대 구익균과 정화암이 진보당 운동을 같이할 때) 들었다. 정안기의 뇌피셜과는 달리 정화암은 안공근이 실종된 무렵이 1939년에 중경에 간 일이 없다. 그는 중경에 갈 계획을 세웠었지만, "당초의 계획을 보류하고 건양(복건성)과 상요(강서성)를 중심으로 새로운 항일운동 태세를 갖출 것"을 모색했던 것이다.(정화암 회고록, 214) 정안기는 정화암이 중경에 간 적도 없고, 260쪽에서 구익균의 증언을 인용하여 정화암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서술해놓고서도 270쪽에 가서는 안공근이 "1939년 5월 살인 청부업자 남화연맹 정화암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쓰고 있다.

 

▲ 백범김구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임시정부 시절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이 속했던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김구

사진. ⓒ손호철

 

 

죽은 선우휘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왜곡 인용

 

백범 김구를 음해하는 세력이 백범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가장 공을 들였던 사례는 장덕수 암살사건이었다. 정안기도 당시 미군정 당국이나 분단세력이 그랬던 것 이상으로 백범을 음해했다. 정안기는 대중들의 깊은 관심 속에 열린 법정에서 범인들에 대한 심문 결과 암살의 배후세력으로 한독당의 중견 간부들이 드러나자, 좌익 측에서는 "그것 보라며 일제히 야유와 힐난과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보수 반동으로 가는 길, 스스로 무덤을 향하여 가는 꼴이 악마의 피리 소리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강물에 빠져드는 돼지떼와 뭐가 다르냐고 빈정댔다"며 선우휘의 소설 <노다지>를 인용했다.(574) 그는 또 "피의자 심문에서 치밀한 암살 계획과 김구의 암살 지령이 드러날 때마다 방청객들은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했다. 이어 "당시 군사재판에 참석했던 방청객과 일간지를 받아 본 독자들은 누구라도 김구가 암살테러의 배후라고 확신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400) 정안기는 이에 대한 출전으로 또다시 선우휘의 <노다지>를 제시하면서, 작가 선우휘는 범인 심문에서 배후세력으로 한독당의 중견간부가 드러나자 "세간에는 한독당 당수 김구 주석이 직접 교사한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문제 삼으려는 것은 역사를 서술하면서 소설을 인용했다는 점이 아니다. 소설도 얼마든지 역사적 사료로 인용될 수 있다. 문제는 얼마나 정확하게 그 소설이 의미하는 바를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았냐는 점이다. 선우휘의 소설 <노다지>에는 위에 정안기가 인용한 문장이 나오기는 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조금 길지만 선우휘가 백범의 증언광경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정안기는 1986년 동서문화사판을 이용했고, 필자는 1993년 학원한국문학전집판본을 인용했다. 아래 인용문에 페이지는 학원한국문학전집판본의 페이지이다.)

해방 뒤 중국에서 돌아온 동료 기자 한 사람은 핏대를 올리며 흥분했다.
「그따위 터무니없는 중상모략들을 마시오!」
재판이 시작되자 김구 주석은 증인으로 법정에 불려 나갔다. 주석의 출두 첫날을 보고 돌아온 법조 기자는 감격 어린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훌륭한 분이야.」
감개 어린 목소리였다.
「정말 당당하더군. 인정 심문을 하는데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 때 김구 씨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수인도 다른 기자들도 한결같이 그의 얼굴을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그는 좀처럼 말하기 아까운 듯이, 그래서 자기 혼자 그것을 간직해 두려는 듯 한창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가 참다못해 다그쳤다.
「빨리 말해 봐.」
「뭐라고 대답했는가 하면 바위같이 태연한 자세, 위엄 있는 굵직한 목소리로, 나의 직업은 …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순간 수인은 이루 형용하기 힘든 세찬 충격을 느꼈다. 커다란 쇠뭉치로 쾅 하고 가슴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팠다. 굳게 닫혔던 가슴의 문이 열리며 한없이 넓고 푸른 하늘로 트이는 통쾌한 그런 아픔이었다.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다른 기자들의 감명도 충격적인 듯 싶었다.
「거창한 말인데.」
「역사에 남을 명문구야.」
「평생을 그렇게 산 분이 아니면 못할 소리군.」
그때 사회부장이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그렇게 뽑아! 타이틀은 그밖에 없어!」
인물이 있긴 있었구나 싶었다.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평생 그렇게 산 분이 아니면 못할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서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신념에 찬 그 한마디 … 인간은 모름지기 일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수인은 한없는 존경을 느끼는 한편 그가 몹시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한평생을 살고 나서 그렇게 스스럼없이 자랑스럽게 자기를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인생의 황혼녘에 섰을 때 자신도 그런 인간으로 마무리짓고 싶었다. 그러나 김구 주석의 그 한마디는 한평생을 살고 난 마무리의 한마디로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한평생 오로지 그것을 목적으로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건만, 그래서 내 나라 내 고장을 떠나 고초의 가시밭길을 걸어왔건만, 늘그막에 광복을 맞아 조국 땅으로 돌아왔건만 아직도 독립을 보지 못한 노투사의 한 맺힌 단장의 부르짖음이라고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한마디가 그토록 세찬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닐까?
호랑이가 언덕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 포효하는 듯한 우렁차고 슬픈 가락때문에… 그가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라고 말했을 때, 앞으로도 늙은 몸을 이끌고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다는 굳건하고도 서글픈 결의가 가을바람처럼 그의 늙은 가슴을 오고갔으리라. (<노다지>, 477~478)

(...)

김구 주석은 항의하는 조선인 변호사를 가로막고 일어났다.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무섭도록 조용히 가라앉았다.
「나는 왜놈을 해치란 적은 있었지만 동포를 해치란 적은 없었소.」
순간 법정 안의 방청석에서 잔물결 같은 가벼운 동요가 일었다. 수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조금 떨었다.
〈왜놈을 해치란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김구 주석의 지난날 투쟁을 돌이켜보게 하는 증언이었다. 그가 전에 일본인 순사를 때려눕힌 일, 그리고 윤봉길 의사 같은 젊은이들에게 일본 타도의 의거를 격려한 갖가지 사실들…
〈동포를 해치란 적은 없었소.〉
아! 이 신념에 찬 한마디! 이 민족의식에 투철한 증언! 수인은 기자석에 못 박힌 채 온몸을 뒤흔드는 감격에 못 이겨 그만 원고지 위를 달리던 연필을 떨구고 두 팔로 힘껏 자기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격동을 일으킨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노다지>, 478~479)

<노다지>의 주인공은, 아마도 선우휘의 조선일보 동료로 장덕수 암살사건의 재판을 밀착 취재했던 조덕송으로 보인다. 조덕송 역시 정안기가 몇 차례 인용한 저서 <머나먼 여로 2> (1989, 100)에서 백범이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오"라고 말했을 때 "나는 순간 가슴이 빽빽해지도록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감격에 자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정말 명답이 아닌가! 나는 눈시울까지 뜨거워짐을 의식했다"라고 쓰고 있다.

정안기는 왜 느낌표 팍팍 찍어가며 백범을 찬양한 선우휘를 이렇게 터무니없이 왜곡해서 인용했을까? 선우휘가 자신의 소설이 백범을 중상, 비방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정안기나 <건국전쟁>류는 백범을 띄운 것은 주사파나 종북좌파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선우휘가 누구인가? 선우휘가 종북좌빨 주사파인가? 오늘의 극우신문 <조선일보>를 만든 딱 한 사람을 꼽으라면 방일영이나 방우영보다 앞서 꼽힐 만한 인물로, 20세기 후반 보수진영 최고의 이데올로그가 아닌가? 선우휘는 이 소설에서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계초 방응모의 기명칼럼을 인용해 "일부에서 선생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폭언이 있음에 대하여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유감되는 바 적지 않다"라고 쓰고 있다.(<노다지>, 484)

아무리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최소한도로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주를 단다는 것은 자기 주장의 근거를 대며 독자들을 설득하는 것인데, 금방 들통 날 이런 사기를 쳐서야 어찌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안병직 교수가 일찌감치 정안기와 <테러리스트 김구>를 손절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불량식품 섭취가 취미라면 모를까 더 읽을 이유가 없는 책이다. 아니, 책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의 심리와 사고방식 전혀 이해 못해

 

정안기의 눈에는 백범이 이봉창에게 거사 자금을 2차례 나눠 준 것이 김구의 입장에서 난봉꾼 이봉창은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108)이라고 비친다, 정안기는 김구가 폭발력이 약한 마미 수류탄을 이봉창에게 준 것도, 천황 폭살의 후폭풍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김구가 "폭살테러 자체가 애당초 실패하도록 설계"(111)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봉창 의거를 준비할 때 백범은 돈이 없었다. 태평양 건너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던 동포들이 모아서 보내준 돈으로 수류탄 겨우 두 개 구하는 데 1년이 걸렸다. 폭발력이 약한 마미 수류탄은 그 당시 백범이 현실적으로 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폭탄이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20여일 후 일본은 10만 대군에 비행기 300대, 군함 80척을 동원해 상해를 침략했다. 수류탄 두 개 마련하는 데 1년 걸린 우리 독립운동이 힘으로 일본을 꺾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봉창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죽으러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태와 쾌락에 빠진 자포자기 상태의 난봉꾼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봉창에게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으며,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봉창의 희생이 있었기에 백범은 윤봉길의 거사를 준비할 때 중국인들의 지원을 받아 폭탄 20여 개도 장만할 수 있던 것이다. 영화 <밀정>의 마지막 대사마냥, 우리는 실패를 딛고 한발한발 나갔던 것이다.

정안기는 안병직 교수가 책의 서문이나 목차도 보지 않고 자신을 비판했다고 펄펄 뛰었다. 그런데 정작 정안기는 백범 김구를 희대의 연쇄살인범으로, 이봉창을 "원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기, 횡령, 절도 등 물불을 가리지 않는 난봉꾼"이라고 비난했다. 개인의 사적 이익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의 심리와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뉴라이트들은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일본이 주는 떡고물을 받아먹던 친일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당장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독립의 길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다. 정안기는 '중꺾마'의 자세로 목숨을 걸었던 백범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모해하고 중상하기 위해 증거조작을 했을 뿐, 무엇을 걸었는가?

 

 

김구(金九)

 

출생사망본관주요활동포상훈격관련 인물/단체

출생 : 1876년 8월 29일, 황해 해주(海州)
사망 : 1949년 6월 26일
본관 : 안동(安東)
주요 활동
동학농민운동에 황해도 팔봉 접주로 참가, 해외 김이언 의병부대 참가, 치하포에서 일제 밀정 처단, 신민회 황해도 총감, 애국계몽운동 황해도 지도자, 망명 후 임시정부 경무국장 ・ 내무총장 ・ 국무령에 취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의사의 동경 일왕에게 투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 지도, 중경임시정부 주석, 한국광복군 창군, 임시정부의 좌 ・ 우연합정부로의 개편, 연합국 수뇌의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 약속받는 외교활동, 광복후 신탁통치 반대운동, 비상국민회의 조직, 민주의원 조직 총리 취임,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대한민국 추구
포상훈격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관련 인물/단체
신민회, 임시정부, 한국노병회, 한인애국단,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연상(蓮上), 초호는 연하(蓮下), 활동기 이후의 호는 백범(白凡)이다. 아명은 창암(昌巖)이었다가 동학 입도 후에 창수(昌洙), 그 후 구(龜, 九)로 개명하였다. 불교 입교 시기 법명은 원종(圓宗)이었다가, 환속 후 유랑기에는 잠시 김두래(金斗來)라는 이름을 썼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공부를 좋아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일급 서당에 가지 못하였다. 9세부터 서당 공부를 시작하여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차린 서당과 이웃 동네 서당에서 항상 일등을 차지하였다. 14세에 평민 출신인 훈장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 ・ 한당시(漢唐詩) ・ 대학(大學) ・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하여 과거 초시시험 공부를 하였다.

17세인 1892년 해주에서 경과(慶科)의 초시(初試)가 해주에서 열리자, 정훈장의 권고로 과거시험을 보러 해주 관풍각(觀風閣)에 갔으나, 온통 부정투성이인 시험의 실상을 확인하고는 과거시험 공부를 그만두었다.

어려서부터 반상의 차별을 한탄하다가,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입도 수개월 만에 그를 따르는 연비(蓮臂, 신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팔봉(八峯) 접주(接主)에 임명되었는데, 황해도 ・ 평안도 동학당 중에서 가장 어린 접주로 가장 많은 연비를 이끌었다고 하여 ‘아기 접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1894년 19세의 나이로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에 황해도 동학군 선봉장에 임명되었다. 700명의 총군(銃軍)을 거느리고 수천 명의 황해도 동학군과 함께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그가 담당한 서문 공격은 계획대로 되었으나, 본대는 남문에서 패전하였다. 그 후 동학군 토벌을 위해 기병한 진사 안태훈(安泰勳, 안중근의 부친) 과 만나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하고 구월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다가 이동엽(李東燁) 부대의 습격을 받아 해산한 다음, 신천 청계동에 있는 안태훈의 집에 은신하였다. 안태훈의 집에서는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의 강의와 훈도를 받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1895년 (음)8월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 및 일본 낭인배들이 궁궐을 야습하여 명성황후 시해 만행을 자행하자, 그해에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고 일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만주 삼도구(三道溝)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김이언 의병부대는 강계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화력에 눌려 패전하였다.

1896년 2월 안악으로 돌아오다가, 치하포(鴟河浦)의 객줏집에서 상인으로 변복하고 밀정 활동을 하던 일본군 특무장교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발견하고는 국모의 원수 갚는 일의 하나로 그를 처단하였다. 쓰치다 처단으로 투옥되어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옥중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읽고 차츰 개화 의식을 갖게 되었다. 1897년 7월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한 달 후 “김창수는 강도가 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므로 특사한다”라는 고종황제의 특명이 내렸다. 그러나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하게 되자 1898년 3월 탈옥하여 계룡산 갑사를 거쳐 공주 마곡사로 들어가 노승 하은당(荷隱堂)의 제자가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하였다.

 

 

25세인 1900년 환속하여 강화도로 들어가서 신교육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 이름을 김구(金龜)로 고쳤다. 1903년에는 황해도 장연읍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였고, 이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 예수교회 에벗(Evert)청년회 총무로 일하였다. 에벗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석하였다가,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체결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전덕기(全德基) ・ 이준(李儁) ・ 이동녕(李東寧) ・ 최재학(崔在學) ・ 조성환(曺成煥) ・ 김병헌(金炳憲, 후에 별명 王三德) 등과 함께 을사늑약 무효화 상소 운동 및 가두 연설을 전개하였다.

1906년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총감이 되어 황해도에서 신교육 구국운동 ・ 애국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초 동지들과 함께 안악에 양산학교(陽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7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창립되자 황해도 총감(總監)으로 활동하였다. 신민회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민주공화제’의 민주국가 건설을 공식 목표로 설정한 국권 회복 운동 단체였다. 그는 서명의숙과 양산학교의 교원, 해서 교육총회의 총감, 재령 보강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며, 황해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과 신민회 활동을 총지도하였다.

1910년 3월 신민회는 비밀리에 열린 전국간부회의에서 독립 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만주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한 독립군 기지 건설을 결정하였다. 황해도 총감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군자금과 애국 청년 모집 그리고 만주에 독립군 기지 창건 사업을 벌이던 중, 1911년 1월의 ‘안명근 사건’으로 신민회 황해도 지회 회원 160여 명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15년 형을 선고받은데 이어, 1911년 9월 일제가 조작한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105인사건, 신민회사건)’으로 2년 형이 추가되었다.

 

 

감옥에서 김구의 ‘구(龜)’자를 ‘구(九)’자로 바꾸고, 호를 평민이라는 뜻으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백범(白凡)이라고 지었다. 1914년 7월에 형기 2년을 남기고 가출옥되어 주거 제한의 요시찰을 받으면서, 친구 농장에서 농감으로 농민들을 지도 계몽 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맞았다.

 

 

3・1운동 후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상하이에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여 이사장을 맡았다. 한국노병회는 국내외에서 지원자를 모집하여 임금을 모아 10년 안에 1만 명의 독립군 예비병과 100만 원 군자금을 준비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1923년에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1926년에는 내각수반인 국무령에 선임되었다. 1928년 3월부터 독립운동 전선에서 전사하기로 맹세하고,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로 『백범일지』 집필을 시작하였다.

 

 

1929년에는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겸임하였다. 1930년 상하이에서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등과 상하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립하였다.

1931년 7월 일제는 만주에서 ‘만보산사건’을 조작하여 한 ・ 중 양민족을 이간시킨 다음, 1931년 9월 18일 만주 침략을 자행하였고, 1932년 1월 28일에는 상하이 침략을 시작하였다. 정규군 30만 명을 투입한 중국 측은 1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패전하였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던 임시정부도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승인과 위임하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였다. 1932년 1월 18일 단원 이봉창(李奉昌)을 도쿄(東京)에 파견하여 일왕에게 투탄케 하였다. 폭탄은 명중하지 않았지만, 한인 독립운동가가 일본의 심장에까지 파고들어 일왕을 공격하자 일제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어서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원 윤봉길(尹奉吉)이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린 천장절(天長節) 겸 상하이 점령 전승 경축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들에게 투탄하였다. 상하이 점령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비롯해서 군정 수뇌 일곱 명을 섬멸하였다. 전 세계가 한국 독립운동의 완강한 투지에 놀랐다. 중국 측은 30만 명의 중국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인 독립운동가 한 사람이 해냈다고 환호하고 경탄하면서 지원을 본격화하였다. 장제스(蔣介石) 위원장은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안에 한국인 장교 양성반의 특설을 허가하여, 한국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독립군 장교 훈련이 시작되었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산하에도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가 설립되어 한국인 장교 양성이 시작되었다. 후일 전자는 광복군의 기간 세력, 후자는 조선의용대의 기간 세력이 되었다.

한인애국단 활동이 성공한 후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서 확고한 지도력을 확립하였다. 60세인 1935년 임시정부의 지지 정당으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고 이사장이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장쑤성(江蘇省) 전장(鎭江)에서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을 거쳐 1939년에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한 후, 1940년 4월 1일 한국국민당 ・ 조소앙(趙素昻)의 한국독립당, 지청천(池靑天)의 조선혁명당을 통합해서 임시정부 여당으로서 새로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일제 말기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의 독립군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였다. 한국광복군이 창건됨으로써 임시정부는 군사력뿐 아니라 외교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1941년 12월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 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하였다. 건국 강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채용한 것으로써, 정치와 교육의 균등은 자유민주주의에 의거하고, 경제의 균등은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이튿날 임시정부는 즉각 「대일 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공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의 확전에 대응하여,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서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일제 패망과 조국 광복을 내다보고 적극적으로 군사 통일을 추진하여, 1942년 4월 국무회의에서는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합병안을 의결하였고, 7월에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시키고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에 임명하였다. 종래의 광복군 제1・2・5지대는 제2지대로 통합 개편하여, 이범석을 지대장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김학규(金學奎)를 제3지대장에 임명하여 한국인 학병 탈출자들을 대상으로 징집 활동을 강화하였다.

1942년 10월 개최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는 조선혁명당 출신 좌파 의원들이 참여하여 독립운동 세력이 통일을 이루었다. 임시의정원은 한국독립당이 여당이 되고 조선민족혁명당 등이 야당 역할을 한 전 민족적 통일의회가 되었다.

한편, 중국 국민당 장제스 위원장을 상대로 한국 독립의 국제적 보장을 요구하는 활발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을 초청하여 한국 독립의 국제적 보장을 위해 힘쓸 것을 약속하였고, 1943년 12월 1일 장제스가 참석한 연합국 수뇌의 카이로선언에서는 ‘한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1944년 4월 헌법을 개정하여 부주석제를 신설하고 국무위원 수를 증원하였는데, 주석에 선출되었다. 부주석은 민족혁명당 대표 김규식이 선출되었다. 한국독립당의 이시영 ・ 조성환 ・ 황학수 ・ 조완구 ・ 차리석 ・ 박찬익 ・ 조소앙 ・ 김붕준 ・ 안훈(조경한) 등 9명, 조선민족혁명당의 장건상 ・ 성주식 ・ 김원봉 등 3명,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및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유림을 국무위원으로 입각시켰다. 이로써 조국의 해방을 앞두고 정부의 통일도 실현되었다.

 

 

이와 함께 광복군과 연합군의 합동 작전을 추진하여 광복군을 중국 최전선 전지공작(戰地工作)에 투입하였다. 1943년 6월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과 영국군 동남아사령부 대표 콜린 매켄지가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광복군 1개 대를 인도 ・ 버마 전선에 파견하여 심리전에 종사케 하였다. 또한, 1944년 5월 광복군은 주중국 미 공군 사령관 웨드마이어(Wedemeyer, A. C.)의 원조를 얻어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합동으로 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을 위한 훈련을 시작하였다. 광복군 제2지대는 지대장 이범석과 OSS의 사전트 소령이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서 합작하였고, 제3지대는 지대장 김학규와 OSS의 윔스가 안훼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서 국내 진입 작전을 위한 비밀 훈련을 하였다. 1945년 8월 시안으로 날아가 광복군의 국내 진입 훈련을 시찰하던 중 일제가 항복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원자폭탄 투하로 일제가 무조건 항복한 것이다.

 

 

통일 임시정부를 이끌고 환국할 준비를 하였으나,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획정하여 남과 북에 주둔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개인 자격의 입국만을 허용하였다. 70세인 1945년 11월 23일 부주석 김규식 ・ 이시영 등 국무위원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환국 다음 날인 11월 24일 아침 8시에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 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키자”라는 귀국 방송을 하였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대회에서 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환국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한편, ‘한국독립당’을 기반으로 임시정부의 지도력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즉각 거족적인 반탁(反託)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미 1943년 11월 27일 미국 ・ 영국 ・ 중국 등 연합국 3수뇌의 카이로회담 직후 미국 수뇌부에서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미국에 강력한 항의를 전한 바 있었다. 또 광복 후에 연합국이 한국의 즉각 독립을 방해하여 ‘신탁통치’를 실시하면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다. 당시 반탁운동은 독립운동의 연장이었다.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를 결성하고, 2월 14일에는 민주의원(民主議院)을 조직한 후 총리에 취임하였다. 1947년 3월 통일된 대한민국 건국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개설하였다.

1947년 3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國民議會)로 개편되자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총회의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48년 3월 유엔 소총회가 ‘가능한 지역에 국한한 선거 실시’를 결정하자, 이것이 단독 정부 수립에 의해 남북 분단을 고착시키며, 남과 북에 각각의 단독 정부 수립은 동족상잔의 내전(內戰)을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하며 반대하였다. 남북 협상으로 북쪽을 설득하여, 처음부터 통일 대한민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하였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글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고 밝혔다.

1948년 2월 조국의 분단과 내전을 막고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남북 협상을 제의하였으며, 1948년 4월 19일 김규식 ・ 조소앙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4김 회담」과 「남북정당사회단체협의회」에 참석하여 남북협상을 마친 뒤,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 김일성의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정계에서 은퇴하여 경교장에서 고전을 읽으며 칩거하였다.

 

 

1949년 6월 26일, 친일파 잔당들과 일부 권력 추구배들이 고용한 안두희(安斗熙)라는 하수인에게 암살당하였다. 일제가 일찍이 방대한 일제 군경 조직을 동원하여 60만 엔의 현상금을 걸고 집요하게 추격하였지만, 위해를 가하지 못했던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를 해방된 조국 땅 수도 서울에서 친일파 잔당들이 백주에 시해한 것이다. 유해는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