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권역

청평사 대웅전~오봉산~청평사 해탈문

온리하프 2012. 11. 2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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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승용차를 이용하여 새로 생긴 배후령터널을 지나서 백치고개를 넘어 청평사로 발길을 들였다.

시내에서 50여분 정도 걸린다.

춘천역에서 시내버스 11번, 12번, 150번이 소양호 정상의 종점까지 간다. 거기서 다시 배를 이용하여 청평사를 갈 수도 있다.

 

청평사로 가는 길 초입은 식당거리다.

호젓한 길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몇 마디 늘어놓치만 개의치 않고 내려올 때 막걸리 한 잔 한다는 여유를 가지면 좋다.

짧은 상가 거리를 벗어나면서 길은 계곡과 가까워진다.

매표소 지나면서 민가는 없어지고 계곡은 깊어진다. 이제부터 자연 그대로의 계곡이고 숲이고 길이다.

승용차도 다닐 수 있는 등로엔 숲 그늘이 길을 덮는다.

걷다가 쉬고 싶으면 계곡 너럭바위에 앉아 물소리 바람소리 숲의 향기를 느끼면 된다.

맑은 계곡에 봄이면 신록이, 가을이면 단풍이 물든다.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며 다소곳이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다소 불편함이 있다면~

봄이나 초겨울에 내린눈이 녹아 다소 질퍽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포장을 한다면 그것 또한 잠시의 불편을 덜기위함 뿐이지 환경오염 뿐 아니라~

운치있는 흙길을 걷는 자연 그대로의 여유로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구성폭포~

       계곡에는 폭포가 두개 있다. 아래 폭포는 ‘쌍폭’,  위 폭포는 ‘구송(구성)폭포’라고 부른다.

              옛 문헌에 따르면 이 두 개의 폭포를 일컬어 ‘이단폭포’ ‘형제폭포’ ‘쌍폭’ 등으로 불렀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위 폭포를 ‘구송정폭포’ 아래 폭포를 ‘경운대폭포’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 세조 때에는 매월당 김시습이 청평사에 서향원(瑞香院)을 짓고 오랫동안 이 부근에 머물렀다.         

                 혹시 이곳이 아닌가?

                       지금은 이 산사에도 찻집이 생겼다.   

                             미시령 구길을 넘어 좌측의 수바위 아래에 자리 잡고있는 금강산화암사의 찻집이 생각난다.

 

 

         2010.7.30에 들렸을 당시의 화암사에 있는 찻집     "란야원" 

 

  첫눈에도 눈길을 잡아끄는 건축물이었다. 계곡 벼랑길을 따라 기둥을 받치고 몸체 일부분을 걸치고 있는 듯 아슬하다.

    

  ‘란야’는 산스크리트어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촌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수행하기에 알맞은 조용한 곳이라는 뜻이다.

            

  좌식 나무탁자가 놓여 있고 창문 밖 늘어진 두 개의 풍경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그 사이로 수암이 사진 속 액자처럼 다가선다.

          넓게 난 창문 옆자리 차지는 당연지사~

               소나무 꽃가루와 꿀을 넣어 마시는 ‘송화밀수’의 꽃향이 입안에 오랫동안 머문다.

                    화암사의 전설이 깃든 우뚝 솟은 수(秀)바위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자리잡고 있다.

 

세향다원 찻집은 세향원 자리 부근이다.

김시습(1435~1493)은 그의 나이 32세이던 1466년에 청평산에 들어와 섬세한 향기에 둘러쌓인 집이라는 뜻의 <세향원(細香院)>이라는 초막을 지어 은거하였고 학매(學梅)라는 제자를 두었다고도 하는데 그는 후대의 서산대사 법맥에 닿게 되는 인물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세향원의 위치가 어찌 되는지 탐문코자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자현 부도>로 알려져 있는 곳의 바로 아래 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게 마련인데 김시습은 닫힘 아니라 열림의 원림 생활을 누려보고자 하였던 듯 하다.

 

아래 김시습의 시는 춘천과 연관되어 있다. 546년 전에~

 

 

 “청평산 세향원(細香院)에서”

 

청평산색영인의(淸平山色映人衣)  청평산의 산빛이 내 옷에 어리어 있었더니 

참담연광송낙휘(慘淡煙光送落暉)  저무는 노을이 애잔하게 어둠을 뿌리고 있네.

암류주공경작무(巖溜?空輕作霧)   바위에 스민 물은 허공 올라가 엷은 안개로 뿌옇고    

춘라공목벽성위(春蘿拱木碧成?)   봄 넝쿨은 나무를 휘감아 푸른 장막을 이루었네.

옥사요초인간원(玉沙瑤草人間遠)  옥 빛 모래 아름다운 풀의 세계라 인간들은 멀리 있고   

기수경화세려미(琪樹瓊花世慮微)  맑은 꽃과 화려한 나무라 속세의 근심이 거의 없네

지호주모서절정(只好誅茅棲絶頂)  애오라지 초가집 엮어 지내는 산마루를 좋아할 따름   

종금가둔막상위(從今嘉遯莫相違)  이러한 은둔의 미쁨 이 세상과 어긋남 없어야 하리라.

 

 

 

  유객(有客; 나그네)

 

有客淸平寺(유객청평사) :  청평사 찾아온 나그네 있어

春山任意遊(춘산임의유) :  봄 산을 한가로이 노니노라

鳥啼孤塔靜(조제고탑정) :  새는 지저귀지만 외로운 탑은 고요하고

花落小溪流(화락소계류) :  꽃은 작은 개울에 떨어져 흘러가네

佳菜知時秀(가채지시수) :  맛있는 나물 제 때를 알아서 돋아나고

香菌過雨柔(향균과우유) :  향기로운 습지식물들 비 맞아 부드럽네

行吟入仙洞(행음입선동) :  시를 읊으며 신선 골에 들어서니

消我百年憂(소아백년우) :  나의 백년 근심이 사라지네

 

** 해제 : 이 시는 김시습이 청평산(오봉산)에 <세향원>을 짓기 훨씬 전에 쓴 것임에 틀림없다. ‘이군색거(離群索居)’, 또는 줄여서 ‘색거’라 하기도 하는 문자가 있는데 ‘마음의 터전’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오늘의 ‘탈서울-전원생활’ 갈망의 웰빙문화와 유사한 점이 있기도 하나 진경산수를 꿰뚫어 보려는 안목의 격조에서는 차이가 난다.

 

 

 

 소양정에 올라(登昭陽亭)

 

조외천장진(鳥外天將盡)  새들은 하늘 저 밖으로 날아가는데

수변한불휴(愁邊恨不休)  시름에 겨운 나의 한은 풀리지를 않네

산다종북전(山多從北轉)  첩첩의 산들은 북쪽에서 꺾어 들어오고

강자향서류(江自向西流)  강물은 저절로 서쪽을 향해 흐르는데

안하사정원(雁下沙汀遠)  기러기 내려앉은 모래톱은 아득하고

주회고안유(舟回古岸幽)  배 돌아오는 옛 언덕은 그윽하기만 하다

하시포세망(何時抛世網)  어느 때에야 세상 그물을 벗어던지고

승흥차중유(乘興此重游)  태평세월 맞아서 여기에 거듭 놀 수 있을까

 

** 해제 : ‘소양정’은 풍치 좋은 곳에 자리하여 삼국시대부터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 된 정자의 하나라고 고찰되는데 잦은 홍수로 여러 번 유실되기도 하였지만 봉의산의 요산(樂山)과 소양강의 요수(樂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하여 ‘이요루(二樂樓)’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6.25 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으나 1966년 7월 6일에 옛터보다 봉의산 위쪽으로 새롭게 터전을 닦아 재건되었다.

 

이 시는 특히 첫 구의 <하늘 저 밖으로 날아가는 새>라는 개방적인 이미지와 이에 대한 댓구, <시름 겨운 나의 한>은 가슴 속에 쌓여 있기만 하다는 폐쇄적인 필(feel)의 대비가 일품이라는 찬사를 받아왔다.;

 

 

 

 길을 지나다가(途中)

 

맥국초비설(貊國初飛雪)  맥의 나라 땅에 들어서니 첫눈이 내리어

춘성목엽소(春城木葉疏)  춘성 고을의 나뭇잎들 떨어지기만 하네

추심촌유주(秋深村有酒)  가을이 깊어 산골마을에 술은 있어도

객구식무어(客久食無魚)  손님에게 대접할 고기 마련이 안 되어 있네

산원천수야(山遠天垂野)  산이 멀어 하늘은 들판에 드리웠고,

강요지접허(江遙地接虛)  강물은 아득해 대지는 허공에 붙었네.

고홍락일외(孤鴻落日外)  외로운 기러기 저무는 해 밖으로 날아가고

정마정주저(征馬政躊躇)  말을 탄 나그네 행보 멈칫거리기만 하네

 

** 해제 : 춘천과 강릉 일대에는 삼국시대에 맥국(貊國)과 예국(濊國)이 있었으며 고구려 용병으로 전락한 말갈족이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지만 정확한 고증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어왔다. 맥족이 세운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영서-영동 일대에는 무천(舞天)의 하늘신앙이 깊었던 예족들의 원시공동체사회가 존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원래 강릉김씨이기도 하였던 김시습은 특히 영서-영동 지역을 여러 차례 순력하였는데 그는 한국 고대사에 관한 고증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맥의 나라, 춘성 고을>은 봄의 분위기를 지녀야 함에도 그는 첫눈이 내리어 가을이 깊은 고을을 찾았다고 하는 데에서 김부식에 대한 야유를 슬쩍 저장시키고 있다.

 

                      이제는 이 자리에서 김시습의 혼을 이어받는 템플스테이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진락공 이자현 부도

이자현(李資玄, 1061년1125년)은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 학자, 문인. 본관은 인주(仁州)이고 자는 진정(眞靖)이며 호는 식암(息庵)·청평거사(淸平居士)·희이자(希夷子)이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문하시중 이자연(李子淵)의 손자이며, 인예왕후, 인경현비, 인절현비의 조카이다.

이의(李顗)의 맏아들로 이자겸, 이자덕, 이자의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1089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여어 벼슬을 거쳐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강원도 춘천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세웠던 사찰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이라 이름을 고치고 중건하였으며 여기에 당(堂)과 암자를 지어 생활하며 이곳에서 베옷과 나물 밥 등으로 생활하며 학문 연구와 선(禪)을 즐겼다.

문벌과 배경이 있었으나 관직 욕심이 없었다. 뒤에 예종이 사람을 시켜 다향(茶香)과 금백(金帛)을 보내어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117년(예종 12) 예종이 남경(南京)에 행차하였을 때 잠시 왕을 만나기는 하였으나 곧 다시 문수원에 들어가 평생을 수도생활로 일관하였다. 사후 진락(眞樂)의 시호가 내려졌다.

 

 

 

 

 

 

 

 

 

 

 

 

 

 

 

 

 

 

 

                                    오봉산이 품고 있는 청평사

청평사의 회전문(노란색 부분. 보몰 제 146호)은 절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려는 의미의 문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앞면의 가운데 1칸은 넓게 드나드는 통로이고 양쪽 2칸은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간결한 형태로 짜여 있는데, 이는 주심포양식에서 익공계 양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이다.

건물 안쪽은 벽이 둘러진 공간에 사천왕상 등의 입상을 놓을 수 있게 했으며, 윗부분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만든 홍살을 설치하였다. 16세기 중엽 건축 양식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축물이다.

이 절의 서쪽 언덕에는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극락전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건축의 수법을 보여주던 중요한 건물이었다.

 

 

 

 

                                                                           

 

                                                                                  

                                                                                      원래 모습의 회전문~~

 

 

 

                                 회전문을 들어서면 나타나는 경운루~

                                                               

 

 

 

 

 

 

청평사는 973년(고려 광종 때)에 영현선사가 세운 절이다. 당시에는 백암선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가 1068년(문종 22년) 이의(이자현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보현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면서 중건했다. 이후 이자현이라는 사람이 1089년에 또 다시 중건하면서 이름을 문수원이라 했다. 지금의 청평사라는 이름은 조선 명종 대 보우선사가 중건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한때는 이곳에 국보 제115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대감국사 탄연이 쓴 문수원기 등 유물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공주와 상사뱀의 전설에 나오는 회전문은 보물 제164호로 지정돼 지금도 남아 있다. 회전문은 청평사의 중문에 해당되며 조선 명종 때 보우선사가 중건할 때 다시 지었다. ‘청평사지’라는 문헌에는 남문으로 기록돼 있다.

이곳을 거쳐 간 스님 중에는 나옹화상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김시습이 은거하기도 했다. 

 

 

 

      앞에 보이는 극락보전 좌측으로 들머리가 있습니다. 그 뒤로 보이는 암봉을 오르는 것이 오늘의 코스 입니다

 

 

 

 

 

 

 

 

 

 

 

                                        동그라미 부분이 오늘의 산행코스 입니다

 

 

 

 

 

 

 

 

 

 

 

 

 

 

 

 

 

 

 

 

 

 

 

 

 

 

 

 

 

 

 

 

 

 

 

 

 

 

 

 

 

 

 

                                                   흔적~~

 

 

 

                                           생각지 못한 복병!!   겨울산은 혹시나 하지말고 무조건 준비물을 챙겨야 합니다

 

 

 

     부용산과 오봉산 사이를 흐르는 백치고개~  청평사 넘나드는 길이다.

              완전 포장된지는 얼마 않되었죠!

                     고개를 기점으로 보이는 쪽은 춘천~ 고개넘어는 화천이다.

                           춘천쪽에서는 일찍 포장을 끝냈지만 화천쪽에서는 필요성이 없어 몇년 뒤에 도로포장을 끝냈다

 

 

 

                                                                해탈문*대웅전*오봉산 정상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해탈문~~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 들어가는 가지 선정() 통틀어 이르는 말로 공해탈문, 무상 해탈문, 무작 해탈문 가지 있다.

      불자들의 공통된 원력은 해탈(解脫)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누구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수행 정진한다. 하지만 해탈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참선, 염불, 간경, 주력, 사경 등 각자 근기에 따라 공부하지만 해탈의 경계는 멀기만 하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는 일. 궁극(窮極)에는 해탈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 불자의 사명이다.

 

 

 

        환적당 설화당 부도~~

고려시대 이곳 청평사에서 수도하던 고승인 환적대사와 설화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으로 환적대사의 부도탑 1기에는 환적당이라는 당호가 새겨져 있다. 고려 중기 이후에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어진 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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