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주막주차장~비룡교~의자봉~적석봉~사림봉
~사림재~용포~뿅뿅다리2~회룡포~뿅뿅다리1
~용주팔경시비~장안사~봉수대~용포대~원산성
~삼강앞봉(범봉)~비룡교~삼강주막
경상북도 예천군의 풍양면 삼강리와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사이에 있는 나루이다.
조선시대에는 문경새재로 연결되는 주요 간선이었다.
조령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다.
나룻배와 뱃사공이 존재하던 과거에는 오가는 길손들로 주막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삼강나루의 삼강은 세 강의 합류지점을 지칭하는 지명이며,
조선시대에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렀다.
『조선지도에 세 강이 만나는 곳에 무흘탄(無訖灘)이라고 적혀 있고,
『해동지도』에는 삼강진선(三江津船)이라고 기재되어 그곳이 나루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각읍지도』등의 여러 군현지도에는 삼강진(三江津)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여지도서』에서는
"무흘탄(無訖灘)은 관아 남쪽 7리에 있다. 사천·성화천·수정탄 등의 물줄기가 용비산에서 합쳐져 삼강(三江)을 이룬다."
라는 기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이 내용은 내성천, 금천, 낙동강의 세 물줄기가 삼강의 주류임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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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와 주막(酒幕), 주모(酒母)라는 3박자의 전통 정서가 머물러 있고, 산업사회로의 숨 막히는 전환 그 이면의 잃어버린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풍경이 남아 있다. 삼강나루는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낙동강변의 나루다.
2004년 2월 삼강교가 놓인 후 풍치가 일그러졌지만, 삼산(三山) 삼강(三江)이 어디 떠내려 간 건 아니다.
내성천이 금천을 끌어안고 낙동강이 내성천을 품으니 삼강이요, 남쪽에서 팔공산, 동쪽에서 학가산, 서쪽에서 주흘산 줄기가 내달려와 강 앞에서 약속한 듯 딱 멈추니 삼산이다.
삼강리 주민들의 말로는, 안동쪽 산은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어 ‘범디미’라 하고, 문경쪽 산은 늑대 모양이라 하여 ‘더무깨’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까 강을 사이에 두고 호랑이와 늑대가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이다.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던 선비나 장꾼들은 여기서 숨을 고른 뒤 문경새재를 넘었다.
나루보다 어쩌면 그곳의 주막지기인 주모가 더 유명할지 모른다. 평생을 강가 나루에서 주막을 지키며 사신 분이셨는데 2005년 10월 노환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아흔까지 사셨으니 장수한 셈이지만 서운하다. 낙동강 나루의 산 역사 한 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삼강나루 주막을 오가던 사람들은 그곳 주모를 ‘뱃가 할매’라 불렀다. ‘뱃가할매요~ 나 왔소!’하고 다가가 주막 평상에 앉으면, 술이 나왔다고 한다. 할머니가 기분이 좋은 날은 술뿐만 아니라 이바구까지 술술 풀렸다고 삼강리 사람들은 전한다.
경상북도에서 이 주막을 문화재(민속자료 134호)로 지정, 현재 복원이 되어 뱃가할매를 대신하여 아주매 주모가 일을 하고 있다. 주막이 문화재가 된 사례는 이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건축역사 자료로, 나루 문화를 얘기하는 민속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주막 복원을 통해 21세기 마지막 주모로 불린 ‘뱃가할매’의 삶이 새삼 반추되고 있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뱃가 할매’의 본명은 유옥연이다.
유 할머니는 16세 때인 1932년 이 마을 배소봉(50년 전 작고)씨와 결혼해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된 뒤 주막을 지켰다. 할머니의 질기디 질긴 삶은 이미 소문이 났다. 생전에 매스컴에도 한두 번 소개가 됐고, 인터넷에도 자료가 제법 쟁여져 있다.
몇 십년전 대구은행 사보인 ‘향토와 문화’에는 유 할머니의 육성 인터뷰가 실렸다. 제목이 ‘나의 20세기- 유옥연 주모’였는데, 삼강나루와 주막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이야기해주는 자료는 없다. 귀한 육성 증언인 만큼 그 내용 일부를 발췌한다.
‘내가 여 주막에 산지가 오래 되얏어요. 내 나가(나이가) 너무 많아요. 주막한지 오십년이요. 자식은 오남매를 낳았는데, 딸이 서이고 아들은 둘이라. 자식들은 벌시라(벌써) 시집 장가 다 갔어. 우리 영감은 일찌거이 천당 갔고. 내 나이 서른네 살 나던 해, 영감은 서른여덟 살 먹어 죽었어. 아파가지고 죽었지. 없는 집구석에 아(아이)를 다섯이나 나아가꾸 거북스레 그래 살았어. 아이들을 잘 갈키도(가르쳐주지도) 못하고 지구(겨우) 국민핵교 했어. 갈키는 못해도 저들꺼정 지대로 사람이 되어서 공부하고 공장도 다니고 해서 그래 잘 컸다. 남편 없제, 아는 오남매나 되제, 딱히 방도가 있어야제.
자식들하고 농사짓고 소도 믹이고(먹이고) 담배도 하고(재배하고) 살라꼬 발버둥 치다가 아이들이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여는 학교도 없고 풍양 가는 차도 없어 통학도 못하지, 이래저래 궁리를 하다가 할수 없어서 점촌 가서 집도 좋도 안한 걸 하나 사서 자식들 하고 살았어. 그것도 석잖애서(마땅찮아서) 다시 땅뙈기 선낫(조금) 있는 거 팔아 자식들 다 이사 내보내고 나 혼자 여 주막에 들어앉아 살고 있어. 그 질(길)로 우리 맏아(아들)는 점촌 가 살고 있지.
그래 이날꺼정(이날까지) 나 혼자 여 처져서 술장사 하며 주막 지키고 있는 기라. 남편 일찌거이 잃고 과부된 맏딸이 환갑 진갑 다 지나 예순여섯 살이다. 나하고 동무하고 같이 늙어가지. 막내이(막내아이)가 올개(올해) 마흔아홉잉께 내 나가 얼마나 많노.
내 사는 요 동네는 삼강이라 카는데 강이 시(세) 개가 여 와서 다 모인다꼬 삼강이라카지. 마실(마을)이 한 사십호 될라 몰라. 삼강 저 너매는 사막, 성당, 굴미, 그 다음에는 와룡 그 다음이 풍양 그렇지. 지금은 늙어서 힘도 부치고 해서 농사는 안 해. 요 앞에 텃밭이 전부야. 반찬할 거 고추, 배추, 무, 호박 심어 먹지. 살아온 세월ㆍ 아이고 그 세월이 참 기맥키지 기맥혀. 나 고향은 풍양면 우막이라카는 데지.
우막은 요 앞에 산 너머 얼마 안 가면 되지. 글찌기는 시집은 부모님이 가라카이 멋모르고 왔지. 우리 때야 결혼은 좋기나 안 좋기나 부모가 정해주면 그런갑다 하고 했지. 열 여섯 살 먹어 시집왔어. 시방 겉으면 학교 댕기고 철모를낀데. 처음 보니까 우리 영감 키도 크고 허울도 좋아 보이더마. 우리 시집 성은 배가라. 성주배가. 영감 이름은 배소봉이라 불렀어. 날보다 네 살 많았지.
처음 시집살이 할 때는 어른들 모시고 삼강 안마실서 살았어. 거기 들앉아서 아(아이) 너이(네명)를 나았다. 주막에서 보면 우리 시댁이 바로 보여요. 우리 시어른 성질이 참 무서웠어. 그래서 시집살이를 마이 했지. 참말로 나거치(같이) 시집살이 한 이도 없을 기구만…. 그 때는 서러븐 일이 있어도 신랑이 다둑그리 줄줄도 몰라. 모두 그래 살았은께. 모두 없이 살았어. 먹고 사니라고 거키 거북스레 버둥댔다. 쭉 여 살다가 시어른들 다 돌아가시고 영감 죽고 아들도 크고 해서 점촌 가서 방 얻어 좀 살았어. 내가 영감 일지거이 죽어뿔고, 고상은 참 이루 말할 수 없이 했지. …우리 영감이 풍채가 참 좋았어(유 할머니 담배 한 대를 문다). 그 영감이 몹쓸병에 걸려 무다이 죽고나이 고마 앞이 깜깜해. 정신이 아득하고 강산밖에는 안 보이는데, 산을 치다바도 한숨, 강을 니리다바도 한숨뿐이라. 걸음을 옮겨도 걷는기 아닌 기라. 발이 땅에 안 디디져.
허공을 다니는 것 같애. 몇 년간은 내 정신으로 산 게 아녀. 일을 해도 늘상 같치 하다가 혼자 하려니 이상하고, 농사일도 줄어들지가 안 해. 하나 있다 없어니 그 빈자리가 그리 커 보이더라고. 집에 와도 의지할 영감 없제, 아들은 와글와글 하제. 모이(먹이) 기다리는 제비처럼 마카 나만 쳐다보제. 고마 살기가 싫어. 강에가 빠져 죽어뿌가 생각하다가도 깔방알라(갓난아기)부터 큰 아까지 내 하나 치다보고 사는데 내 죽어만 천애고아가 될 낀데 싶어 그 생각하니 또 못 죽겠어.
살기가 참 막막한 기라. 그래 일꾼도 딜이가(데려다가) 농사도 지(지어) 보다가 내 혼자 해보다가 데릴 사우도 딜이다가, 해찬 바람이 불자 연료비라도 아끼려고 큰방 대신 작은방에 내려와 있다. 영감 죽고 담배 배았어. 영감 죽자 어데 하소연할 데도 없제 말 나눌 때도 없제. 천애 고아나 마찬가지가 된 기라. 너무 답답아. 속상하고 답답으면 담배 피운다디만 마음이 하도 안 돼서 몰래 담배를 피운 기라. 담배 피우만 좀 나을 줄 알았디만 아무리 담배 피아도 가슴에 남은 바우만한 설움은 꽉 맥혀 안 빠지는 기라. 자식 다 크도록 근 십년간 바우가 가슴을 꽉 틀어막고 있는 것 같더라카이. 몰라, 죽어뿌마 빠질 란가.
여 주막이 한창일 때는 육십년대였제. 그때는 낙동강에 배가 연락부지래(연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여 삼강나루도 큰 배 작은 배해서 배가 두 채나 있었지. 통선이라꼬 작은 배는 주로 사람 실어 나르고, 큰 배는 짐을 싣고도 소가 다섯, 여섯 마리씩 들어갔어. 여기는 차가 없으니까 저 아래에서 강따라 배가 올라와. 주로 낙동강 저 아래 왜관서 오는 배지. 겨울에는 강이 얼고 하니까 배가 없지마는, 늦은 봄에 배가 소금을 오본이(가득) 싣고 안동까지 가거든. 봄디면 장담기를 하니까 주로 소금배가 오는 거지. 소금배가 내려갈 때는 주로 나락 팔아서 갔제. 소금하고 나락 바꾼 거야. 소금 배들은 배 안에 집을 지가지고 방을 맹글어서 거서 밥 해먹고 그라대. 질이(길이)가 이 집(약 6~7m)보다 더 질어. 물이 얕으만 큰 판대기로 젓고, 사람 대씨(여럿)서 끌거나 배쭉 대로 밀고 그래 올라가더만.
내 시집오고도 한참 배가 있었는데 소금배 없어진 지가 한 오십년 정도 됐지. 여름부터 겨울까지는 배가 거의 안 다녀. 여 낙동강에는 소금배 말고는 빌로 없었어. 학생들 그석하면 여행 삼아 댕기던 배가 간혹 있었제. 여는 강따라 나루가 총총하구마는. 이 아래 백포나루는 예전에 나룻배가 있디만 지금은 고기 잡는 배가 있어. 썩 니리(내려)가면 하풍다리라고 있는디 그 다리 건너면 점촌도 가고 예천도 가고 그래. 다리 없을 때는 그리 배가 있었어. 하풍나루라 캤지. 저 우(위)로는 우망나루가 있었고. 거도 당시에는 배보는 집이 같이 있었어. 인지는 그도 없지만. 배볼 사람도 없고 배도 없고하니 절로 집이 없어진기라. 우망 위에는 저 우에 문정자라고 있었는데 거는 예천 지보장 보고 그랬어. 거는 다리 놓이면서 벌씨라(벌써 다) 없어졌지.
여는 제방할 적에까지 배가 있었는데, 배 없어진 지 십오 년 정도 됐어. 사방에 차 있느데 요새 누가 배 탈라 카나. 일 년에 버리(보리)하고 나락하고 양 철(봄, 가을)에 배추렴(뱃삯)을 줘야 하는데, 예전같이 배를 많이 안 타니 그나마 안주제. 배 한 번 몰라 캐도 돈이 드는데 배추렴 줄어드니 누가 적자보며 배를 보겠노. 마실에서 돌리가며 배를 보다가 결국 안돼서 치아 뿌렸지. 배추렴은 봄 가실(가을)로 나놔 주는데 많이 주는 이는 한 말썩도 주고, 없이 사는 이는 두 쪽대(두 되)도 떠 주고 시 쪽대도 떠준다. 배 많이 타는 이는 추렴을 따로 더 냈다. 거둔 배추렴은 배에도 전주가 따로 있어 사공 얼매 묵고 전주 얼매 들라주고 했지. 이 마실에서 예전에 사공하던 이는 모두 다 죽고 없어.
이 집 전기도 제방되고 들어왔어. 풍양하고 이 일대가 마카 낙동강 물 때매 살지. 여도 비 안 오마 모 못 심는 천수답이던기 요새는 낙동강에 큰 양수기를 시대(3대)나 설치해서 옥답이 다 됐어. 우리 클 적에만 해도 낙동강 칠백 리 참 소용없는 물이라 캤는데…. 물은 밑으로 니리가다 미나리꽝 서마지기밖에 못 댄다 캤는데, 지금은 큰 보화라. 농사도 되지, 식수도 되지, 공장도 돌리지. 요샌 이 물 없으면 못 살지. 암 못 살고말고. 영남사람이 마카 이 물 묵고 안사나.
제방 생긴 뒤로 큰물 진다고 캐도 걱정은 안돼 좋다만, 난 제방 해 놓으니 더 파이라(안 좋아). 제방 없을 적에는 주막 마루에 앉아 강을 보면 세 강과 세 산이 합쳐지는 기 훤히 내다보이고 해서 참 볼만했어. 시방 제방이 앞을 떡 막아섰으니 어띠구로(어찌나) 답답한지. 우로는 안동댐 생끼뿌니까 강물이 많이 안 내려오제 하니 홍수 걱정은 이자뿟다만(잊어버렸다만), 근데 강바닥 꼬라지는 안되여. 여 그전에 제방 안 되고 할 적에는 뽀한 몰개(모래)가 팽한기, 놀러오면 놀기 좋고 그랬다. 시방 제방되고부텀 풀피리가 막 들아서고 해서 볼끼 없어.
이 동네뿐 아니라 예전에 다 그랬지만 여름 되면 모기 때문에 저녁만 먹으면 이 강가로 나왔지. 안사람들은 초저녁에 나와서 놀다가 집에 가서 자는 이가 많고, 남자들은 밤새 강가서 자고 그랬다. 여름으로 강가에 놀러오면 주막에 와서 술도 한두 잔씩 먹고 그랬어. 뭣 할 적에는 불각정(갑자기) 소내기가 오고하면 집으로 들어간다고 야단이고, 강물에 떠내려갈까 싶어 아(아이) 찾는다꼬 꽥꽥 쳐 부르고 야단이제. 예전에는 여름에 강물이 확 쓸고가면 자연 청소가 돼서 몰개가 그렇게 곱고 이쁘디만. 시방은 몰개가 없고 전부 풀피리와 쓰레기가 저래 쌓여 있으니까 우얄란고 몰라.
삼강나루와 삼강 이야기는 내가 뭐 무식해서 잘 몰라. 우리 웃대부터 어른들이 그카더만. 여는 산이 세 개, 강이 세 개가 모이는데 산은 남짝으로는 대구의 팔공산, 서짝으로는 문경의 주흘산, 동짝으로는 안동의 학가산이 마카 여 와가 딱 떨어졌다 그러더만. 강은 안동짝에서 내려오는 낙동강, 문경짝에서 내려오는 금천, 영주 예천짝에서 내려오는 내성천, 이 세 강이 마카 여서 모여 어부러져(어울린다). 그래가 삼산삼강이라 카지.
강 건너 저짝, 문경 쪽도 옛날에 주막이 있어갖구 술 팔고 그랬어. 거도 주인 있다 어디 가고 요새 나겉은 할마이 하나 들어와 있다카더만. 달지주막이라 불렀는데 그기 암매(아마도) 문경시 영순면이야. 곧 삼강에 다리 놓인다 카데. 그땐 문경이고 예천 가는 길이 억시(아주) 빨라지지. 지금이사 저짝 하풍다리(영풍교) 쪽으로 해서 근 오십 리를 삥 둘러가지만. 근데 다리 노이만 이 세 강 절경이 다 없어지지나 않을 란가 몰라.
내사 그기 큰 걱정이라….
지금이사 풍양이 더 크고 좋지만 예전엔 예천 용궁이 더 커서 주로 용궁장을 봤어. 풍양장은 본데없었고. 그래서 풍양서는 마캉(모두) 용궁장에 다녔어. 조합일하고 비료 타는 것이고 시장 보는 것, 면서기꺼정 모두 강 건너 용궁으로 일 보러 갔으니까.
여가 질(길)이 이래 파이라(나빠) 비도(보여도) 대로여 대로. 장날이고 무신날이고 볼 일 있으면 용궁 가니까 다 여로 다녔으니 예전에는 참말로 북적대던 길이지. 시방은 풍양에 장 서고 점촌장 떡 벌어지니 용궁장이 캑 죽어 가도 안 하지만. 나루가 한창때는 이 도로에 주막이 이 집까정 시(세) 군데나 되었어. 바로 우리 집 옆에 쭉 있었어. 우리 맏딸이 갑술년생인데 올해 예순여섯 살이니까 그때 큰 홍수가 나서 이곳까지 물이 들이차서 주막이 다 떠내려갔어. 그때 주막 하던 사람들 마카 떠나뿔고 이 집만 남았어.
이 집도 갑술년 물에 퍽 엎어진 것을 어떤 이가 다시 지었는데 돈이 없어 억지로 억지로 지은 집이라. 흙으로 주막을 지노이(지어 놓으니) 물만 들면 퍽 엎어져 나무로 지었어. 집이 이래 없어비도 명색이 나무집이라. 그 뒤로 여러 홍수를 맞아도 엎어지지 않고 있는데 시방도 멀리서 보면 물 나가는 힘에 휩쓸려 집이 한쪽으로 씰어졌어(기울어졌어).
주막하면서 밥은 간혹 가다 팔고 주장(주로) 술을 팔았는데, 술안주는 주로 김치였어. 겨울에는 묵도 많이 했지. 우리가 미밀을 많이 해서 꿀밤묵 말고 미밀묵을 주로 했어. 그때 주막에 잘 이는(자고 가는 이) 잘 없어. 모두 술 마시고 쉬다 가고 그러지. 예전에야 주장 막걸리 마이 묵었지만, 인지는 막걸리는 간혹 가다 팔지 잘 안 팔아. 막걸리 띠놔(갖다 놔) 봐야 물(먹을) 사람이 마이 없어 변질되니 수지가 맞아야지. 소주야 암만 놔도도 괜찮아. 그래 요새는 주장 소주 팔지….
집 뒤로 제방 생겨 강이 안 보이게 되디만, 인지는 집 앞으로 도로가 뚫려 앞을 딱 가로 막고 서는 바람에 집 꼬라지 영 배리 놨어. 나 죽어 돌볼 사람 없으만 이 주막도 엎어지던둥 뜯기겠지...(주막 하면서 부르던 노래가 있다던데...)
노래ㆍ 노래가 있지. 주막하며 배운 노랜데, 나이 무가 노래한다꼬 인지 노래가 될라나 몰라. 내 한 마디만 할 것이니, 간단한 것으로 하나 할 것이니.
정월이야 속속한 마음 이월 매조에 맺어노코
삼월 사꾸라 산란한 마음 오월 목단에 씨러(쓰러)졌네
육칠월 홍돼지 홀로만 누워 팔월 공산에 건너본다
구월 국화 구드나(궂은) 마음 시월 단풍에 흩어졌네
동지 섣달 설한풍에 벽설(백설)만 날려도 임생각
앉아 생각 누워서 생각 생각사로 임생각
얼씨구나 지화자 좋다 아니 노지는 못하리로다
이 노래 제목도 잘 몰라. 그냥 일 년 열두 달 풀이라 불렀어. 달달이 나오는 거 있잖아. 이 노래 배운 지 오래 됐어. 내 서른 살 넘어 주막하면서 배웠응깨. 임 생각하고 기리버(그리워)하는 노래니까. 몰라, 남편 생각하며 자꾸 불러 안지까지(아직까지) 안 잊었먹었째.
요새도 길나서면 남편하고 가는 할마이들이 글키 부러버(부러워). 그때마다 저놈의 할마이들은 복도 많지. 우야면 영감하고 저래 댕길 수가 있노 안 카나. 내사 영감복 없어 일평생 그래 다니본 적이 없응깨. 내가 바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야…. 나이는 무사코(먹고) 자꾸 아파서 자식보다는 먼저 죽어야 할낀데…. 죽기도 안 쉬워. 자식들 애 안미고 죽을 때꺼정 별 탈 없이 있다, 여서 주막하고 같이 있다 가야 할낀데. 강물이 지대로 저리 흘러가듯 지대로 저승 가는기 내 바램인데…. 이 주막이 눈에 밟히고 자식 손자들이 밟혀서 어찌 떠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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