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권역

종묘, 창경궁, 창덕궁

온리하프 2018. 11. 20.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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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창덕궁창경궁




11:56    오늘도 동료분과 함께 서울을 찾았다.

청계산부터 시작하여 서울 북쪽을 둘러 싸고 있는 불수사도북을 3구간으로 나누어 종주를 끝낸 이후다.

역시나 산이 계획되어 있었지만~

이러저러, 여차여차하여 목적지를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 하여 서울에 닿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청계천이다.


"개천에서 용났다"

개골창 물에서 용이 솟구쳤다는 말이다.

종로와 을지로 사이 동내의 개골창은 개川으로 불리다가, 이후 일제시대 때 으로 바뀌었다.


북악*인왕산에서 발원하여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11km 정도의 하천.

그 하천을 가로지르는 버드나무다리 위에 전태일의 동상이 2005년에 건립되다.


《전태일 열사(대구. 1948)》

전태일 그는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재봉사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눈을 떴다.

1968년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고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해 노동운동에 앞장섰다.


48년 전인 1970년 11월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한날 그는 온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인 후 평화시장 앞을 달리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숨졌다










12:34    점심 겸~~





14:09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태조 4(1395) 9월에 완공 하였으며, 이윽고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정전에 계신 왕들의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1850년 충남 서천군에서 태어나

구한말·일제강점 시기에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로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개화운동에 참가해 서재필·윤치호와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한편,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서울YMCA의 전신) 회장으로서

물산장려운동과 소년연합척후대(보이스카우트의 전신) 운동·학생청년회운동 등을 주관했다.


종묘라는 역사적인 문화재 앞에 1986년에 시민광장을 마련하면서 한쪽에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동상을 세워 놓았

민족의 문화재이며 세계유산인 문화재 앞에 종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동상을 세웠다.  
모르는 사람들은 종묘나 이 지역과 관련이 있는가? 하겠지만 그렇치도 않다.

한쪽에 서 있는 모습은 애국지사 월남 이상재 선생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도 맞지 않아 보인다. 





종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그곳을 통과하니 바로 아담한 연못이 보인다









《재궁》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어목욕청(왕이 목욕하는 건물)이 있다.





  • 문틀 세개가 보이는 곳이 정전수복방이다
  • 정전 동문 북쪽에 위치한 수복방은 맞배집으로 수복(청소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 정전

    종묘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신실 양 옆으로 각각 두 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앞으로 꺾여 나와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가 넓게 펼쳐있고,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종묘 건축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길게 늘린 점에 있다.










    정전의 정면 사진~















    종묘를 빠져 나오며~~





    15:19    종묘에서 발길을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옮겼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서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문(仁政門:보물813호)》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인정전(仁政殿:국보225호)》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 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 밖 외행각(外行閣)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인정문을 들어서면 인정전 앞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 있다










    《선정전 (宣政殿, 보물 제814호)》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이다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복을 입은 아름다운 외국 여인에게 촬영을 부탁하고~~

    감사합니다~~^*^


    뉘신지? 국가나 이름도 묻지 못했습니다. 지송~!!!















    한복을 빌려 입은 여럿 사람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주 보기 좋았다.





    《려춘문(麗春門)》

    대조전과 희정당 중간 쯤에 있는 문으로~

    춘은 음양이론상 동쪽을 뜻하고.

    려춘은 아름다운 봄을 말한다










    보춘정은 선정각의 동쪽 누각인데~

    동쪽에 희우정이 있고 남쪽에 보춘정이 있다.

    보춘은 봄이 옴을 알린다는 의미이며

    왕세자가 독서하는 곳이다.










    여럿 사람들이 만추를 만끽하고 있




















    함인정(亭)

    창경궁에 있는 전각이며 임금들이 편전으로 즐겨 사용하던 곳이다.


    함인정()이 있는 자리는 성종 때 건립한 인양전이 있었던 자리이다.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을 떠났다가 창경궁으로 돌아와 지은 전각인데

    인왕산 아래 있었던 인경궁에 있는 함인정을 헐어 이곳에 옮겨와 지은 것이다. 


    1633년에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인 1830년 창경궁에 화재가 나 전소되었으나 1833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아홉칸의 팔작지붕이며 화려한 단청으로 채색되어 있다.


    예전과 달리 현재는 벽체가 없고 모두 개방되어 있으며 남향이다. 조선시대 임금들이 편전으로 사용했다.

    뒷편에 공묵합()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보양문(寶陽門)

    국사를 논하던 외전 건물인 명전정을 통해

    이곳 보양문을 나서면 생활공간인 내전이 나온다.

    그러므로 보양문은 내전과 외전을 구분하는 문이다.















    통명전(通明殿.보물 제818호)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다.

    1694년 (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다.
    희빈 장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을 받게 되고,

    희빈 장씨의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을 통해 나가게 된다.


    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는데, 1757년(영조 33)에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여 열천(冽泉)이라 하였다.

    통명전 서쪽의 연지는 샘이 마당으로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1485년(성종 16)만들었다





    후원(비원)은 오후 3시 이후에는 문을 닫는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금원이라고도 불렸으며 창덕궁 안에 있는 조선시대 정원이다.

    조선왕궁의 놀이와 잔치 장소로 활용된 대표적인 조원(造苑)유적이다.


    다음 기회에......















    창덕궁으로~~





    낙선재(樂善齋)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이 낙선재는 2012년 보물 제 1764호로 지정되었다.










    석복헌(軒)

    창덕궁의 낙선재·수강재와 연이어져 있는 공간으로, 낙선재 동쪽에 있다.

    1993년 복원공사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헌종 14년(1848)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복헌은 후손을 보기 위해 맞아들인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헌종이 마련해준 처소였다.

    유난히 경빈 김씨를 아꼈던 헌종은 석복헌을 짓기 한 해 전에 자신의 개인 휴식공간인 낙선재를 먼저 지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 숨을 거둘 때까지 거처했던 곳이기도 하다.

    낙선재 일대의 복원 작업을 마친 후 2006년부터 공개되었다.



































    종로구 계동 현대건설 건물

    정몽헌의 사망 소식으로 알게 되었다.

    [cbs ]정몽헌 회장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들 - 진중권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경악을 안겨주었습니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상황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부담을 주었고,

    그 복합적인 상황에서 헤어나는 극단적 선택으로서 그는 자살을 택했을 것입니다.

    일단 가신 분께 조의를 표합니다.

    대북사업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던지,

    말하자면 선친의 뜻을 잇기 위한 비경제적인 행위였든,

    아니면 기업가로서 먼 미래를 내다 본 경제적 투자였든지에 관계없이,

    어쨌든 그가 남북관계의 해빙에 기여한 것만은 사실이고,

    바로 이 부분에서 그의 죽음을 사회적으로 기릴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그의 죽음을 놓고 섣부른 시각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월간조선 조갑제 사장의 시각은 가장 극단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김일성 김정일 악당과 손잡은 정치인 기업인들의 최후를 직시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언사를 늘어놓으며,

    이번 사건을

    "민족반역자 김정일에게 국익과 국부를 팔아넘겨 기업과 기업인을 망치고도 호의호식하고 있는 국가반역자를 법정에 세우는 기폭제"

    로 삼을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정몽헌 회장이 국가반역자의 종범이라는 것입니다.

    한나라당에서는 이 사태의 책임을 잘못된 대북정책에서 찾으며,

    정몽헌 회장의 죽음의 책임을 김대중 정권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반면 민주당에서는 국가 간의 관계를 사법적 잣대로 재단하라고 요구한

    한나라당이야말로 정몽헌 회장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한편,

    민주당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구주류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한나라당의 특검 요구를 수용한 것이 정몽헌 회장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며, 생뚱하게도 그 책임을 대통령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물론 정몽헌 회장이 단지 한 사인의 죽음이 아니라 남북경협을 주도해 온 한 곡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죽음이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장례를 채 치르기도 전에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대 성급하게도 구구한 억측을 내어 놓으며,

    그의 죽음을 정적을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하는 것은,

    결코 죽은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장례를 치르는 다만 며칠이라도 소모적인 정쟁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어쨌든 정몽헌 회장의 죽음에 누가 책임이 있느냐는 그 성급한 논란을 통해 서로들 잘 들춰냈다고 봅니다.

    그 얘기들을 종합하면 이 불행한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윤곽이 드러납니다.

    책임을 묻는다면,

    제일 먼저 사업 허가의 댓가로 부당하게 돈을 요구한 북한 당국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큰 책임은 대북관계에서 성급하게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북한의 요구에 응하여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마련된 돈을 보내게 권유한 김대중 정권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책임은 남북관계의 중요성과 그 특수성에 대한 아무런 이해 없이

    오직 당리당략의 관점에서 사법적 잣대만 들이대도록 요구한 한나라당에게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의 죽음의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느냐 묻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우는 것.

    그게 이 불행한 사건을 대하는 시민사회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각 정치 주체들은 남 탓 하기 전에 먼저 제 몫의 잘못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올바른 대북관계의 방식에 관하여 이제는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내야 합니다.

    김대중 정권은 5년 안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증,

    그리고 총선 3일 전에 남북정상회담 사실을 발표하는 등,

    국민적 합의에 의해서 진행되어야 할 대북관계를 다분히 자신들의 정략적 필요에 종속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 무리가 벌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나라당은 남북관계 개선에 도대체 관심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수구적이고 냉적전적이 방식으로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에 대안 없는 비판을 남발해 왔습니다.

    이번 사건이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적어도 남북 문제만은 당리당략의 대상이 아니라 여야의 협조 위에,

    국민적 합의 위에 투명하게 진행되어야 할 국가적, 민족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햇볕정책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투명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정치권과 온 국민이 바로 여기에 합의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 할 때 정몽헌 회장의 죽음은 비로소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16:45    창경궁을 나서며~~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공간)의 다이닝 인 스페이스를 지나

    안국역에서 춘천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