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 아들 손잡고 세계 여행

온리하프 2023. 12. 18. 21:53
728x90

 

 

①40대에 공무원 퇴직 후 9살 아들과 떠난 세계여행

 

[아들 손잡고 세계여행] 시베리아에서 어지럼증으로 고생한 사연... 아빠 울린 아들의 검색 기록

 

2022년 9월 30일부터 2023년 4월 14일까지 9살 아들과 한국 자동차로 러시아 동쪽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인 포르투갈 호카곶을 지나 그리스 아테네까지 약 4만 km를 자동차로 여행한(3대륙, 40개국, 100개 도시)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오영식 기자]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자란 나는 가족 여행을 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가족이 생기면 여행을 많이 가 봐야지' 하고 생각했었고, 결혼해 아들이 생겼다. 하지만 공무원이던 나는 매일 직장 상황에 맞추느라 가족에게는 소홀히 했다.

그러다 몇 해 전부터 아이의 엄마와 헤어져 아들과 단 둘이 살게 됐다. 아들을 위해 생각했던 시기보다는 조금 더 일찍 아들과 여행을 가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아직 어린 아들과 함께 오랫동안 낯선 나라를 여행해야 하는 우리에게도 자동차 여행이 좋을 것 같았다.

 

"태풍아, 아빠랑 여행 가자!"
"응, 그래! 아빠."

 

"어디 가는 줄은 알고 대답하는 거야?"
"아니. 몰라."

 

"그런데 바로 가자고 해?"
"난 그냥 아빠랑 가면 아무 데나 다 좋아."

 

"우리 자동차 타고 세계 여행할 거야."
"우와~ 정말? 어떻게?"

 

"지금 우리가 타는 차를 배에 싣고 러시아까지 가서 여기 땅끝 포르투갈까지 우리 둘이 자동차 타고 여행할 거야."
"와~ 이게 다 러시아야? 러시아는 왜 이렇게 커?"

 

"그래,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가 러시아 거든. 그래서 여기를 지나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 우리 한 여섯 달 정도 아주 오랫동안 여행할 거야."
"지금 9월인데 학교는?"

 

"학교는 못 가지. 내년에 3학년 되면 돌아올 거야."
"앗싸~~"

 

"그렇게 좋아?"
"응, 아빠 빨리 가고 싶어."

 
9살 아들과 러시아로

 

동해항에서 출발 직전.

 

우선 아들의 학교 문제를 해결하고 강원도 동해항에서 러시아로 가는 여객선을 예매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국제 제재를 받고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러시아로 가는 직항 교통편은 이 여객선이 유일했다.
우리가 타던 국산 SUV를 동해항 세관에 맡기고 아들과 나는 블라디보스토크행 배에 올랐다. 꼬박 하루가 걸려 다음 날 오후 늦게 도착했지만, 내려서 짐을 찾고 입국 절차와 세관을 통과하고 나니 날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항.

 

주말은 아들과 시내 관광을 하며 푹 쉬고 월요일 아침에 아들과 함께 차량 통관절차를 대행해 주는 사무실로 찾아갔다. 무뚝뚝한 세관 직원들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아 며칠을 숙소에서 대기하다 4일 만에 차량을 인수했다.

 

"태풍아, 이제 우리 진짜 출발이다."
"응, 아빠 나 우리 차 이름 지을래."

 

"그래? 뭐로 할까?"
"하얀색이니까 흰둥이!"

 

"흰둥이? 그래, 좋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서쪽인 북한 방향으로 차를 몰아 북한과 중국, 러시아 3개국의 국경에서 10km 정도 떨어진 크라스키노로 향했다. 과거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곳이다. 과거 안중근 의사가 대한독립을 결의하며 항일 투사 11명과 모여 단지하고 혈서를 쓰며 결의한 것을 기념한 '단지동맹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크라스키노,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기념비 단지동맹기념비에 헌화하는 아들

 

아들과의 여행을 뜻깊은 곳에서 출발하고 싶어 한참이나 비포장도로를 달려 단지동맹기념비 앞에서 헌화하고 묵념을 드렸다. 아직 어린 아들이 먼 훗날 다른 건 잊을지 몰라도 교과서에 나온 훌륭한 분의 유적이 이렇게 먼 러시아 도시에서도 몇 시간이나 비포장도로를 달려 고생해야 찾아볼 수 있다는 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몸이 왜 이러지?

 

▲ 시베리아 횡단도로 가도가도 끝이 없는 시베리아 횡단도로

 

우리는 다시 시베리아를 향해 내달렸다. 이제부터는 하루 500km 이상 달려야 하는 구간이 매일 이어진다. 좁은 땅덩어리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마도 '하루 운전 거리가 너무 긴 거 아냐?' 하고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도시 간의 간격이 넓어 500km 이하에는 아주 작은 마을만 있고, 주유소도 만나기 힘들다는 걸 나도 러시아에 와보고야 알았다. 그러다 시베리아 횡단을 출발한 지 꼭 일주일 만에 탈이 났다.

오는 중간에 잠시 어지러운 증상이 있긴 했지만, 잠깐 차를 세워 휴식을 취하면 없어졌었는데, 이날은 새벽에 눈을 떴는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너무 어지러워 몸을 일으킬 수도 없어 억지로 눈을 감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빠, 나 배고파."
"응, 태풍이 일어났어?"

 

자고 일어났는데도 이번엔 구토까지 나오려 했다. 서둘러 즉석밥으로 아들 밥을 간신히 차려 주고 다시 누웠다. 안 그래도 요 며칠 어지러운 증상이 몇 번 있어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어제 숙소 직원에게 '근처에 병원이 있는지' 물어봤었다.

 

병원은 차로 1시간 정도 가야 있지만, 구급차를 부르면 금방 온다고 했고, 숙소 길 건너에 의원이 하나 있다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전 9시가 되면 아들과 함께 의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태풍아, 아빠 너무 어지러워서 이따 9시에 병원 가야겠어."

"왜? 아빠 많이 아파?"
"응, 계속 어지러워서 걷지도 못하겠어."

 

이제 키가 겨우 120cm가 넘은 또래보다도 작은 아들에게 기대 길 건너 의원으로 향했다. 전문 진료과목은 산부인과였고 한 시간 정도 대기하다 진료실로 들어갔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의사에게 간신히 번역기를 통해 설명하니 의사는 내 신체기능을 검사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뇌졸중 증상을 검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곳은 멀쩡한 것 같아 '단지 어지럼증만 있다'라고 다시 말했다.

 

그랬더니 의사는 그럼 내일 다시 와서 혈액검사를 하자고 했다. 왠지 여기서는 정확한 증상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일단 '알았다'라고 대답하고 나왔다. 그리고 혹시 몰라 일단 아들과 근처에 있는 작은 식료품점에 가서 비상식량을 사고 숙소로 돌아왔다.

 

"태풍아, 아빠가 지금 너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거든? 오늘은 태풍이 혼자 놀아야 해. 심심해도 참을 수 있지?"
"아빠, 많이 아파?"

 

"그래, 아빠가 아파서 토한 거 본 적 없지? 그런데 아까 병원 앞에서 토했잖아."
"그래? 아빠 그러면 쉬어. 오늘은 나 혼자 놀게."

 

아들에게 간신히 점심을 차려 주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들 핸드폰 검색 내용에 오열

 

▲ 벨로고르스크 산부인과가 있던 건물 이 건물이 가장 고층이었을 만큼 작은 도시

 

이곳은 누군가 한국에서 도와주러 온다고 해도 족히 일주일은 걸리는 곳이다. 우리나라와 직항 항공편도 없고, 1주일에 한 번뿐인 배를 타고 온다고 해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기까지는 1000km가 넘게 떨어져 있다.

 

우선 아들이 걱정돼 도움을 요청할 사람을 찾던 중,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우리랑 같은 배에 차량을 싣고 온 백진수라는 형님이 생각났다. 형수님이 러시아 사람이고 처가가 우수리스크 근처인데 당분간 그곳에 계신다고 하셨던 게 생각나 바로 전화했다.

 

"형님, 저 영식이에요. 잘 계시죠?"
"아~ 영식 씨. 잘 있지? 유튜브도 잘 보고 있어."

 

"형님, 그런데 제가 지금 벨로고르스크인데요. 이석증에 걸린 거 같아요. 너무 어지러워서 몸을 못 움직여요. 근데 혹시 제가 쓰러지거나 하면 아들 때문에 걱정되어서 전화했어요."
"그래? 어떡해?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아들한테도 내 전화번호 알려주고. 아내하고 교대로 운전하면 금방 가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네, 형님. 정말 고마워요. 또 연락드릴게요."

 

비상시 대책을 세워놓고는 치료법을 고민했다. 과거 남극세종과학기지에서 월동을 같이한 동생 중에 아주 똑똑한 의사가 있었다. 지금은 미국에서 의사로 있는 주섭이에게 SNS로 급하게 연락했다. 동생은 내가 말한 증상을 보더니 자기가 직접 진료한 게 아니라 확실하진 않지만, 이석증이 맞는 거 같다며 '애플리 메뉴버'라는 물리 치료법을 알려줬다.

 

아들 저녁을 서둘러 챙겨주고 혼자 동영상을 보며 한참 치료 동작을 따라 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눈을 떠보니 어제보단 훨씬 나아졌다. 일어나서 걸으면 조금 어지럽긴 해도, 구토가 나오거나 할 정도로 어지럽진 않았다.

 

'다행이다!'

 

안심하고 침대에 잠들어 있는 아들을 보니 너무 미안했다. 심심해서 종일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가 잠이 들었는지 손에 휴대전화를 꼭 쥐고 있었다. 배터리 충전을 해주려 고사리 같은 손에서 휴대전화를 빼다가 켜진 화면을 보니 한 포털 사이트 창이 열려 있었다.

 

'어? 게임이나 동영상이 아니고 왜 포털 창이 열려 있지? 아직 검색하는 건 잘 모를 텐데.'

 

검색창을 보니 아들이 사용한 검색 이력이 남아 있었다.

 

'이석증 나는 법'
'이석증 다 나는 법'
'어지러울 때 나는 법'

 

포털 사이트 검색창엔 틀린 맞춤법으로 아빠 이석증 낫는 법을 검색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울다 잠들어 있는 아들을 꼭 부둥켜안았다. 너무너무 미안하고 안쓰럽고… 그리고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여행 기간 내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작성하였으나, 사건 등 일부 내용은 기자의 저서 <돼지 아빠와 원숭이 아들의 흰둥이랑 지구 한 바퀴>에 수록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②러시아까지 가서 키즈카페부터 찾은 사연

 

처음 유라시아 대륙횡단 여행을 계획할 당시 내 눈으로 꼭 보고 싶었던 자연환경이 몇 군데 있었다. 첫 번째가 몽골의 초원이고, 두 번째는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 그리고 마지막이 바이칼 호수였다.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2,500만 년 전), 가장 깊고(1,700m), 가장 많은 물(지구상 담수의 20%)을 담고 있는 바다같이 거대한 호수이다.

 

그렇게나 오고 싶었던 바이칼 

학창 시절 지리 시간에 배울 땐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바이칼 호수를 향해 차를 몰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4,000km 정도 떨어진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바이칼 호수로 가는 길은 점점 오가는 차량도 적어지고 길 양옆으론 자작나무가 끝없이 이어졌다.

 

울란우데에서 2시간을 달려 미리 검색한 한적한 호숫가에 도착했다. 차박할 자리를 찾는데 한 수도사님이 다가오더니 주차하기에 평평한 곳을 알려주시고 가셨다. 우리가 캠핑하려 주차한 곳 바로 옆엔 그리스 산토리니에 어울릴 법한 아름답고 하얀 수도원이 있었는데 그곳에 계신 분 같았다. 캠핑 준비를 마치고 아들과 호숫가를 걸었다.

남북 방향 길이가 600km나 되는 바이칼 호수는 정말로, 바다인 것처럼 파도가 치고 있었다. 그리고 물은 수족관에 담긴 물처럼 아주 맑았다. 우리가 있던 곳의 맞은편 육지까지는 거리가 40km가 넘는데도, 건너편이 아주 뚜렷이 보일 정도로 공기도 깨끗했다.

 

▲ 바이칼 호수 차박 바이칼 호수를 바라보며 캠핑

 

영하로 떨어지는 추운 날씨였지만, '겨울의 바이칼에서 한 번쯤 수영을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에 아들과 점심을 맛있게 먹고 수영복만 입고 얼음장 같은 바이칼로 들어갔다.

 

"태풍아, 사랑한다~"

 

이런 거창한 아빠의 용기에 관심 없는 아들 녀석은 전기장판을 켜놓은 차 안에 누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은 차가웠지만, 햇살에 반사돼 찰랑찰랑 반짝이는 바이칼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야! 이렇게 바로 네 옆에도 있잖아!'

 

그렇게도 와보고 싶었던 바이칼에 몸을 담근 채 따뜻한 차 안에서 재밌어하며 나를 바라보는 아들을 보니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저런 사랑스러운 아들과 함께라면 유럽이나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도 어디서든 행복하겠다.'

 

▲ 바이칼 석양 바이칼 수평선 위로 물든 저녁놀

 

해가 저물자, 기온이 빨리 떨어지기 시작해 서둘러 아들과 소시지를 구워 라면과 함께 먹었다. 곧 밤이 되자 수도원 근처만 희미하게 밝혀져 있고,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 하늘은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노란 색의 별들이 요란스럽게 반짝였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10월 말인데 벌써 눈이 내려있었고, 바이칼은 풍랑주의보가 내린 듯 파도가 철썩댔다.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아들과 계속 서쪽으로 이동했다.

 

▲ 파도치는 바이칼 거대한 바이칼은 바다처럼 파도가 거칠게 일었다

 

척박한 시베리아에서 키즈카페부터 갔다

약 2,000km를 더 달려 러시아의 대전과도 같은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 노보시비르스크는 '새로운'이라는 뜻을 가진 '노보'와 시베리아라는 뜻을 가진 '시비르'가 합쳐진 이름으로 '새 시베리아'라는 뜻의 도시이다.

 

동서 방향의 길이가 약 10,000km 정도 되는 러시아의 중간에 있는 지리적 특성도 그렇고, 교육과 과학의 도시라는 특성 등 많은 부분에서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전과 비슷한 곳이다. 또 실제 우리나라의 대덕연구단지의 롤모델이 이곳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과학연구단지인 '아카뎀고로도크'라고 한다.

 

그리고 유라시아 횡단자들에게 이곳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곳부터는 그간 지나온 시베리아 구간에 비해 점점 차량 통행도 많아지고 도시 간의 간격, 휴게소, 도로 상태 등 모든 면에서 운전하기 편한 구간이 이어진다.

 

척박한 시베리아를 지나올 땐 여러 사정상 아들과 많이 놀지 못해 미안했던 나는 모처럼 만난 대도시에서 아들과 제대로 놀기로 작정하고 키즈카페부터 찾았다. 생각보다 꽤 크고 시설도 깔끔한 키즈카페에서 아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재밌게 놀다 나와 택시를 타기 위해 길을 걷는데, 도시 중심지인데도 차도뿐만 아니라 인도까지도 흙탕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전날부터 이슬비가 조금 내리긴 했지만, 기껏해야 총 강수량 5mm도 안 될 것 같은데 지나다니는 자동차며 인도를 걷는 행인들도 모두 진흙 범벅인 채 아무 일 없는 듯 돌아다니고 있었다.

 

▲ 노보시비르스크 키즈카페 여행 출발 후 처음 찾은 키즈카페

 

작은 도시를 지나오며 인프라가 좋지 않은 걸 볼 때마다 '여기는 시골이라 그렇겠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기는 러시아의 3대 도시로 인구는 160만 명이나 되는 대도시인데도 도심지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한국인으로 살면서 그동안 러시아를 유럽 국가로 생각했던 내 생각이 현실과 충돌하며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지금 '러시아 동쪽에서 자동차를 운전해 내리 달려온 지 19일이나 됐지만 아직도 한 국가의 중앙에 있다'라는 사실이 그 '혼란스러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정말로 거대한 나라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지평선을 한 달 내내 볼 수 있는 곳. 그래서 그 나라를 잘 개발하고 관리하기에는 여러모로 힘에 부치는 것만 같았다.

 

왼쪽은 유럽, 오른쪽은 아시아  

 

며칠 더 서쪽으로 석양을 바라보며 운전해 1,500km 정도 떨어진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다.

 

우리나라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는 섬진강으로 나뉘듯이 대부분 국가와 도시의 경계는 보통 높은 산맥이나 강 같은 자연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유라시아라'는 유럽과 아시아가 함께 있는 커다란 대륙에 있다.

 

그럼,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어디일까? 바로 우랄산맥이다. 도시나 국가의 경계도 아닌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경계인 우랄산맥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하던 찰나에 한 유튜브 구독자가 댓글로 '11월이 되기 전에 우랄산맥을 빨리 넘어야 한다'라고 조언해 주었다.

 

우랄 산맥의 바로 동쪽에 있는 예카테린부르크에 우리는 10월 30일에 도착했다. 아들과 나는 도시 서쪽에 있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기념비가 세워진 곳으로 갔다. 남북 방향으로 우랄산맥을 따라 여러 개 세워진 기념비 중의 하나인 이곳은 특히 큰 도시 근처에 있기도 해서 경계 기념비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신기하기도 해 아들과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태풍아, 너는 지금 유럽에 있는 거야."
"그래? 그럼, 여기는?"
"어? 이제 아시아로 넘어왔네? 아빠는 유럽이고."
"와~ 아빠 너무 신기해."

 

▲ 유럽 아시아 대륙 경계비 우랄 산맥을 따라 대륙 경계비가 여러 개 있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해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다행히 뒤따라오는 함박눈을 제치고 우랄산맥에서 거의 다 벗어난 곳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아직 산맥을 온전히 다 넘은 지역은 아니라서 불안한 마음에 다음 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숙소 주변으로 눈이 조금 쌓이긴 했지만, 운전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어서 조심히 운전하고 있는데 점점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며 길에는 쌓인 눈의 깊이가 깊어졌다. 30여 분을 운전하니 길가에는 운전을 포기한 건지, 차 위에 눈이 수북이 쌓인 차가 여러 대 주차되어 있었다.

 

'계속 가야 하나? 되돌려 가야 하나?' 하며 망설이는데 맞은편에서 차들이 한두 대 내려오고 있었다.

 

'저 차는 산맥을 넘어오는 차일까? 아니면 되돌아오는 차일까?'

 

문득 걱정된 나는 차를 잠깐 옆에 세우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영어도 통하지 않고 통신 신호도 잡히지 않아 손발짓 하며 물었더니 러시아인은 '겨울용 타이어에 4륜이 아니라면 힘들다'라고 말하는 듯 바닥의 눈과 타이어, 그리고 손가락 4개를 펴 보였다.

 

한국에서는 겨울철 해발 1,000m 이상 고산지대에서 운전한 경험이 많았지만, 어린 아들을 생각해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차를 돌렸다. 그리고 오늘 도착지까지 길을 다시 검색하니 원래 480km였던 거리가 700km로 늘어났다. 지금 이 거리를 운전해서 가는 건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잠시 생각을 해봤다.

 

기상학을 전공한 나는 '현재 눈이 많이 쌓인 도로의 고도가 대략 400m이고, 아침에 숙소가 있던 곳은 해발 100m에 온도가 영상 1~2도 정도 됐다'는 정보를 이용해 해발고도 300m 이하 지점을 경로에 넣어 다시 검색해 봤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리는 600km였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바로 운전을 시작했다. '10km, 20km….' 긴장하며 운전하는데 눈이 간간이 내리기는 하지만 바닥에 쌓이지는 않았다.

 

고도계를 확인해 보니, 지금 운전하는 도로의 고도는 대략 해발 200~300m였다. 대성공이었다. '아! 평생 직업을 이럴 때 써먹는구나.' 이후 4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운전해 우랄산맥을 거의 다 내려와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아들과 잠시 내려 화장실에 다녀와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샀다.

 

"태풍아, 아빠랑 기지개 켜고 스트레칭 하자. 이따가 차 오래 타야 할지도 몰라."
"응, 아빠 알았어. 하나! 둘! 셋! 넷!"

 

아들과 함께 몸을 풀고 의자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려는데 아들이 말했다.

 

"아빠, 나 그냥 차에서 먹을게. 아빠는 빨리 운전해."
"그럴까? 그럼, 태풍이 혼자 먹어. 아빠는 안 먹어도 돼."

 

우리 부자는 다시 흰둥이(자동차 이름)와 함께 눈이 흩날리는 우랄산맥으로 들어갔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③전쟁 중인 러시아로 여행을? 일단 제 얘기 들어보세요

 

우리 부자가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러시아로 간다고 했을 때, 얘길 들은 많은 지인이 걱정하며 말했다.

 

"아니, 러시아는 지금 전쟁 중 아니야? 거길 애랑 간다고? 미쳤어?"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설득했다.

 

"전쟁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하고 있고, 러시아는 땅이 워낙 커서 저희가 지나가는 곳과 전쟁이 벌어지는 곳의 거리가 1,000km 정도 떨어져 있어요. 최대한 안전하게 다녀올게요."

 

지금도 언론에서는 '러시아 전쟁' 얘기가 수시로 나오니 러시아라는 나라는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과 우리가 지나가는 도로까지의 거리는 북한 신의주에서 대한민국 부산까지의 거리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다.

 

아들과 함께 하는 러시아 여행

 

하지만, 어린 아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니 그래도 최대한 조심조심하며 운전하길 한 달여 만에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여행지가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과 아무리 거리가 멀다 해도 사실 우리나라와 친숙하지 않은, 과거 공산권 국가의 수도이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가지 걱정되는 문제가 있었다. 금융 제제로 러시아에서는 은행 입출금이나 ATM 사용이 불가능했기에 나는 한국에서 출발할 때 달러와 현금을 찾아서 차에 보관한 채 여행했다. 그런데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물가가 훨씬 비싸서 출국 때까지 쓸 돈이 아주 빠듯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혹시 예상치 못한 경비가 들면 어쩌지?' 하고 조마조마해하며 모스크바 시내로 들어왔다.

 

인구가 1300만 명이나 되는 모스크바는 한 달간 지나오며 그동안 본 다른 도시의 모습과는 다르게 보였다. 시베리아의 도시와는 달리 길도 널찍널찍했고, 건물도 모두 화려했다. 그리고 비가 조금만 내려도 인도와 차도가 모두 진흙투성이가 됐던 그간 도시들을 비웃듯 거리도 아주 깔끔했다. 거기에 며칠 후 국가 기념일 준비 때문인 듯 거리 곳곳엔 경찰들이 검문과 경비를 하고 있어 긴장하며 숙소로 향했다.

 

저녁엔 우리 부자의 유튜브 구독자분이 연락을 해와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한국식당에 같이 가서 순댓국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그 구독자분은 우리에게 귀한 러시아 현금을 빌려줘서 한국 계좌로 이체해 드렸다.

 

"태풍아, 우리 러시아 돈이 얼마 없었는데 이 삼촌이 우리한테 빌려주셨어. 고맙다. 그렇지?"
"와~ 다행이다. 아빠, 그럼 나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

 

평소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아들이 요 며칠 눈치가 보였는지 간식도 자제 중이었는데, 오랜만에 눈치 보지 않고 먹으며 좋아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인 곳에 다다르다

 

▲ 모스크바 굼 백화점 아주 화려한 백화점

 

다음날 우리는 제일 먼저 러시아 대통령이 있는 크렘린궁과 붉은 광장으로 갔다.
지금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만km를 운전해 모스크바 성 바실리 성당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고생 끝, 행복 시작'과도 같은 곳이다. 시베리아의 척박한 곳을 지나 이제는 제대로 된 도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자도 다른 횡단자들처럼 감회에 젖어 성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 모스크바 성 바실리 성당 유라시아 횡단자들에게는 감회가 새로운 곳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러시아 국경은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그리고 라트비아, 3개 나라와 접해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 관광하고 핀란드 쪽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징집령 발령 등 상황에 따라 3개 나라 국경 심사대의 교통상황이 수시로 급변했다. 자칫 탈출 행렬이 몰리는 국경으로 가거나 운이 나쁘면 국경 심사대 앞에 줄을 서서 하루 이상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어린 아들에게 힘들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인터넷과 각종 뉴스를 분석하며 당시 상황이 가장 좋아 보였던 라트비아로 향했다.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 국경까지는 600km 정도 떨어져 있어 국경 바로 전에 있는 작은 도시 벨리키예루키에 들러서 하룻밤 자며 휴식을 취하고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다음 날 우리는 아침 일찍 라트비아 국경으로 향했다. 국경에 다 와 갔지만 예상한 대로 차량 대기 행렬은 보이지 않았다. 국경 3km 정도를 남기곤 2차선에 트럭들이 줄지어 있었다. 2차선은 트럭 대기 줄이고 승용차는 1차선으로 가면 된다는 정보를 알았던 나는 계속해서 1차선으로 달렸다. 도착하니 승용차 대기 줄에는 우리 앞에 승용차 단 3대만 기다리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청년과의 짧고 강렬한 대화

 

▲ 러시아-라트비아 국경검문소 국경의 차량대기 상황은 수시로 변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 신호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요금소같이 생긴 곳에서 여러 차량이 검문검색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앞뒤에 대기 중이던 차량의 번호판엔 국가식별 영문으로 'UA'가 쓰여 있어 운전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어디에서 오셨나요?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우크라이나 사람이에요."

 

"안 그래도 우크라이나 차량번호판 같아서 물어봤어요. 그런데 지금 러시아와 전쟁 중인데 우크라이나 차량이 러시아에서 돌아다녀도 괜찮나요?"
"네, 괜찮아요. 그런데 오늘 가족과 러시아에서 나가려는데 여기서는 잘 모르겠네요."

 

"아! 그렇군요. 안전히 잘 가시길 바랍니다.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러시아는 길이 안 좋아요. 오늘 나가시면 다른 나라는 다 길이 좋을 거예요."

 

우크라이나 청년과 짧게 대화하고는 차에서 기다렸다. 가만히 보니 차량 서류를 갖고 러시아 국경심사 직원에게 주면 한참 후 다른 몇 명의 직원이 나와서 차량의 모든 문을 다 개방하고 내부의 모든 짐을 일일이 열어서 확인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눈치껏 차량의 모든 짐을 다 꺼내놓았다. 그러고는 차량 서류와 함께 모든 짐을 열어서 검사 받았다. 그렇게 4시간 만에 차량 서류를 받고 무사히 국경을 빠져나왔다.

 

▲ 러시아 국경심사 차량의 모든 짐을 꺼내 놓고 검사 받는다

 

러시아 국경을 나와 300m쯤 운전하니 바로 라트비아 검문소가 나왔다. 차량 서류를 들고 사무실로 갖다주려는데 라트비아 검문소 직원이 우리 차량 쪽으로 다가왔다.

 

"여권, 차량 서류, 비자 주세요."
"네, 여기 있습니다."

그 직원은 서류를 받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러시아를 여행하며 항상 공무원에게 먼저 찾아가서 물어봐야 알려주는 상황에 익숙해져서인지, 가만히 있어도 먼저 찾아와 해결해 주는 공무원의 작은 친절이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다.

 

▲ 라트비아-러시아 국경검문소 라트비아 공무원은 아주 친절하다

 

그런데 조금 전에 내 서류를 갖고 갔던 여직원이 다시 나와서 물었다.

 

"비자도 주세요. 비자는 없나요?"

 

사실 처음에 비자를 달라고 할 때 말할까 망설였었기 때문에 비자를 달라고 말할 걸 예상했던 나는 바로 쓸데없는 말까지 붙여가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저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은 대부분 국가에서 비자가 필요 없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괜스레 뿌듯한 마음을 느끼며 대답하자 그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잠시 뒤 바로 서류를 되돌려 받았다. 바로 옆에 있던 보험사에서 차량 보험에 가입한 후 국경을 빠져나왔다. 아들과 만세를 불렀다.

 

"태풍아, 우리 이제 러시아 완전히 빠져나왔다. 이제 라트비아야."
"어? 진짜? 이제 러시아 아니야?"

 

"어, 이제 아빠 카드도 쓸 수 있고, 예약이나 이런 것도 다 한국에서처럼 이용할 수 있어. 아휴~ 아빠, 너무 기분 좋다~"
"진짜야? 아빠, 그러면 우리 오늘 치킨 먹자~"

 

"그럴까? 치킨 먹고 파티하자."
"파티? 와~ 좋아~ 예쓰으~"

 

러시아는 은행뿐만 아니라 숙박 예약, 지도 그리고 각종 국제기업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사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간단한 인터넷 예약이 아무것도 되지 않아 여간 고생한 게 아니었는데 이제 라트비아에서부터는 모든 게 해결돼 마치 한국에 입국한 것처럼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지자, 나는 그동안 여행하기에 조금 불편했을 뿐 러시아에도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지금의 나'를 만든 문장이 하나 있다. 30여 년 전, 당시 10대 소년이던 나의 심금을 울린 문장은 바로 TV <동물의 왕국>에서 나온 성우의 내레이션이었다. 사바나 초원 위로 붉게 물든 하늘을 보여주며 성우가 이렇게 내레이션을 했다.

 

▲ 시베리아의 석양 유라시아 횡단을 하면 매일 이런 석양을 볼 수 있다

 

"과연 인간이 쓴 100권의 소설책이, 한 차례의 석양이 가져다주는 감동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장이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당시 나는 어린 나이에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 달간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여행한 우리 부자는 3000권의 소설책보다 값진 석양을 선물로 받았다. 그런 러시아에도 감사의 인사를 했다.

 

"러시아, 볼쇼이 스파시바(러시아여, 대단히 감사합니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④외국인이 차 싣고 국경 넘는데 아무도 검사를 안했다

 

리투아니아에서 한국 김치를 만날 줄이야

 

러시아 국경에서 나온 우리 부자는 발트 3국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로 향했다. 우리나라보다 큰 면적에 인구는 270만 명인 이곳은 한국인에게는 다소 낯선 나라이다. 수도 빌뉴스는 60만 명이 살고 있다고 했지만, 우리나라의 지방 중소도시보다 작게 느껴졌다. 대통령궁은 작은 지자체의 청사 건물보다 작았고, 시내도 아주 아담했다.

 

우리는 러시아 횡단을 기념하기 위해 케이크와 고기를 사러 재래시장으로 갔다. 아주 작은 실내 재래시장에서 돼지고기와 케이크를 사고 돌아보는데 한쪽 귀퉁이에 딱 봐도 한국인처럼 생긴 분이 김치를 팔고 계셨다. 김치가 맞는지 확인하러 다가가니, 정말로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팔고 있었다. 한동안 김치 구경을 못 한 아들을 위해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사고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 부자를 보며 많은 사람이 물었었다.

 

'왜 지금 굳이 러시아에 가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국가에 왜 여행을 가냐?'

 

하지만 우리 부자는 러시아를 여행하려고 한 게 아니다. 단지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세계를 여행하려면 러시아가 가장 가깝고 돈이 적게 들어, 러시아를 통해 여행할 계획을 세웠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러시아는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 국경을 빠져나오는 데까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힘이 들었다.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기 위해 하루에 500km씩 거의 매일 이동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어른인 나도 그런데, 이제 아홉살밖에 안 된 아들은 어떨까. 그동안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힘든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힘든 곳을 지나 안전한 곳에 도착한 기념으로 아들과 조촐하게 파티했다.

 

"태풍아, 우리 그동안 1만km 넘게 운전했어. 태풍이도 그동안 힘들었지? 차도 오래 타고."
"응, 태풍이도 힘들 때 많았어."

 

"이젠 러시아에서 나왔으니까 그렇게 고생할 일은 없을 거야. 운전도 많이 안 할 거고."
"정말? 아빠 이제 나랑 많이 놀자. 알았지?"

 

"그래, 우리 케이크에 촛불 끄자. 삼겹살 많이 먹고, 오랜만에 김치도 많이 먹어."
"아빠, 외국 김치가 왜 이렇게 맛있어? 진짜 맛있어."

 

"그래? 정말이네. 러시아에서 산 김치보다 훨씬 맛있다. 우리 많이 먹자."

오랜만에 삼겹살과 김치에다 케이크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아주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는 아주 작고 아담한 도시였지만, 우리 부자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고생스러운 시베리아 횡단 후 삼겹살과 김치를 맛있게 먹은 도시였다.
    
700년 된 건축물을 이긴 아이스크림

 

▲ 리투아니아 빌뉴스 대성당 600년이 넘은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다시 빌뉴스에서 멀지 않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로 향했다.

 

"태풍아, 우리 이제 리투아니아에서 방금 라트비아로 들어왔어. 저기 표지판 보이지?"
"응, 아빠 그런데 다른 나라에 오는데 왜 이렇게 금방 와? 러시아에서는 한 달이나 걸렸는데?"

 

"러시아는 엄청나게 큰 나라라서 오래 걸렸고, 다른 나라는 작으니까 금방 지나가지."

 

빌뉴스는 내륙 도시인 데 비해 리가는 발트해를 바라보고 있는 해안 도시라 그런지 인구는 비슷했지만, 도심지도 훨씬 커 보였고, 지나다니는 차량도 훨씬 많아 활기차 보였다.

 

노면에 차를 주차하고 시내를 걸었다. 러시아에 비해 건물의 규모는 작았지만, 유럽 특유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많아 '이제 진짜 유럽에 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오래된 성당뿐만 아니라 시청 건물도 아주 아름다웠다. 시간이 여유로워 계속 걷다 보니 아들의 투정이 시작됐다.

 

"아빠, 인제 그만 좀 가. 언제까지 걸을 거야?"
"저기 건물까지만 가고 좀 쉬자!"

 

"아까 본 거랑 똑같구먼. 뭐가 다른데? 그만 가!"
"저기만 가고 나서 쉬자~ 저게 700년 전에 지은 건물이래~"

 

러시아를 지나올 땐 적게는 6시간에서 많게는 11시간을 뒷좌석에 앉아 보내는 게 전부였지만, 러시아를 나오고 나니 차량 이동 거리는 줄고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국에 있을 때는 태권도 학원도 가고 운동을 했었지만, 그간 러시아를 지나오며 운동이라고는 하루 10분 정도 걷는 게 전부였던 아들은 체력이 약해졌는지 30분밖에 걷지 않았는데도 투정을 부리며 입이 삐쭉 나왔다.

 

"태풍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아이스크림!"

 

"아이고~ 이 추운데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응."

 

"그래. 저기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아들은 언제 다리가 아팠냐는 듯이 쏜살같이 뛰어갔다.

나는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같이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아들에게는 역사 유적과 아름다운 건축물보다는 아이스크림이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 리가, 삼형제의 집 세개의 건물이 100년 차이로 지어졌다

 

일정이 여유로워진 우리 부자는 해안도로를 따라 에스토니아로 향했다. 에스토니아 국경을 지나 얼마 가지 않은 곳에 패르누(Parnu)라는 도시에 점심을 먹으러 들렀다. 선착장마다 요트가 가득한 한 해안가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행 전 발트지역의 전통 요리 중 청어요리를 TV에서 본 적이 있어 청어요리를 한 번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들른 곳이었다.

 

일단 메뉴판에서 청어요리를 하나 시키고 아들이 먹을 만한 파스타를 주문했다.
잠시 뒤 익숙한 파스타와 함께 먹음직스러운 청어요리가 나왔다.

 

"태풍아, 뭐 먹을래? 이건 태풍이도 아는 스파게티 종류고, 이건 여기 전통음식이래."
"응, 난 이거."

 

잠시 두 메뉴를 보는 듯하더니 아들은 익숙한 파스타를 선택했다.

 

"그래. 아빤 이거 먹을게."

 

난생처음 청어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뜨겁게 데워진 철판 위에 청어살과 감자를 놓고 그 위에는 마요네즈와 양파를 덮고 찐 요리였다. 한 숟가락 먹고 나니 익숙하지 않은 비릿함에 후회가 밀려왔다. 청어요리를 아들에게도 맛보여 주려 한 점 아들에게 주었다. 아들은 먹는 듯하더니 일부러 그런 건지 바닥에 떨어뜨리며(!) 자기 파스타만 맛있게 먹었다.

 

평소 눈치가 빠른 아들은 아빠가 별로 맛있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안 그래도 느끼한 청어살에 마요네즈까지 듬뿍 들어간 전통 요리를 나 혼자 먹었다.

그래도 '나는 지금 무인도에 있고, 세상에는 이 음식밖에 없다.'하고 생각하니 나름 먹을 만했다.
  
자유로운 국경을 보고 생긴 질투

 

▲ 발트 전통 청어요리 양념하지 않은 과메기를 마요네즈와 함께 찐 맛이 난다.

 

점심을 먹고 탈린에 도착한 우리는 구시가지를 볼 수 있는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에서는 핀란드만과 육지가 어렴풋이 보였다. 발트 3국은 아래에서부터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순으로 올라올수록 도심지에 볼거리가 가득했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이라도 걸으며 구경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나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닌, 어린 아들과 하는 여행이니 참자!'하고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 탈린 파트쿨리 전망대 전망대에서 구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북유럽으로 넘어가기 위해 숙소로 돌아와 탈린항에서 핀란드 헬싱키로 가는 여객선을 예매했다.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유럽에 대한 내 예상과 달리 티켓은 인터넷으로 간단히 예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출발시간에 맞춰 항구로 갔더니 아무도 표를 검사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에선 목포에서 제주로 가는 배를 탈 때도 신분증 검사를 이중 삼중으로 하고, 또 차를 선적할 때는 차량 등록증을 꼭 확인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한데... 이 배는 심지어 에스토니아에서 핀란드로, 국경을 넘어 가는 여객선이다.

나는 유럽인도 아닌 외국인인 데다 차량은 한국 차량인데, 표 검사나 차량 검사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나와 있지 않아 신기했다. 그냥 차량 줄 세우는 사람의 수신호에 따라 한쪽에 주차하고 기다리다 신호에 따라 운전해서 배에 올랐다. 차에서 내려 객실로 올라갔지만, 어느 한 명 신분증이나 표를 검사하는 사람이 없었다. 긴가민가하며 인터넷으로 예약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 탈린항 페리 탑승장 인터넷 예매 후 이곳에 대기하다 탑승하면 된다.

 

배는 아주 커서 식당뿐만 아니라 여러 편의 시설이 잘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탑승 절차가 아주 간단해서 이렇게 편리하면 굳이 항공기를 이용할 필요가 없겠다고 느꼈다. 한국에서 배를 이용할 때는 사람만 탑승하더라도 탑승 절차가 번거롭고 또 대기시간이 긴 편이라 '배편은 항공편을 이용할 수 없거나, 비용을 절약할 때 이용하는 교통편'이란 인식이 있었는데, 여기는 반대였다. 오히려 항공편보다 대기시간이 적게 걸리고 이용도 편리했다.

 

심지어 요금도 성인 1명, 어린이 1명, SUV 1대의 총비용이 12만 원 정도로 우리나라 배편보다도 훨씬 저렴했다. 순간 정말 부러운 마음이 생겼다.

 

'우리나라도 통일만 된다면 훨씬 더 저렴하고 자유롭게, 자동차로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어딜 가나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자유롭게 국경을 이동할 수 있는 유럽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아들이 커서 성인이 된 미래 세대에는 우리나라 국민들도 꼭 그럴 수 있길 바라며, 핀란드 헬싱키로 향했다.

 

▲ 탈린-헬싱키 여객선 아주 크고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다

 

 

⑤30여년 전 소원, 드디어 산타를 만났습니다

 

헬싱키 항구에 도착해 배에서 차를 내렸다.

그런데 육지에 내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차량을 한 대씩 길가에 세우고 있었다.

경찰이나 세관 공무원인 것 같아 '번호판도 특이한 우리 차는 분명 검문 대상이겠구나!' 생각했고, 역시나 제복을 입은 사람이 우리에게 한쪽에 차를 세우라는 수신호를 했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물었다.

 

"안녕하세요. 어디에서 오셨나요?"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경찰이 아니라 세관 공무원이었고, 질문하는 표정이 밝고 친절했다. 나는 먼저 우리 여행 얘기를 했다.

 

"9살 아들과 한국에서 한국자동차를 운전해서 러시아를 횡단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 그래요? 이 차가 한국에서 온 차인가요?"
"네. 1만 km 넘게 주행했고, 핀란드를 여행한 후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지나 포르투갈로 갈 겁니다."

 

세관 직원은 계속 밝게 웃으며 아주 친절한 말투로 질문을 이어 갔다.

 

"혹시 차에 술이나 담배가 있습니까?"
"아니요.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과 담배 아무것도 없습니다. 옷이랑 여행용 짐이 전부입니다."
"그럼 차 문을 열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보세요."

 

나는 차 문을 열고 짐을 보여주려 내렸지만, 세관 직원은 그냥 의심스러운 사람인가 질문만 한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내가 적극적으로 짐을 보여주려 하자 아주 친절하게 우리 차를 보내줬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즐겁게 여행하세요."
"핀란드 공무원들이 아주 친절하네요. 핀란드 첫인상이 아주 좋아요. 감사합니다."

헬싱키는 러시아와 가까워서인지 시내를 지나가며 보이는 풍경은 꼭 러시아 도시와 비슷했다.
하지만 러시아와는 분명 다른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표정이었다.
첫 만남에 절대 미소를 보이지 않는 러시아 사람들과는 달리 공무원뿐만 아니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미소를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았다. 

 

▲ 바다에서 바라본 헬싱키 우뚝 솟은 둥근 돔 건물이 헬싱키 대성당이다

 

우리는 헬싱키시청, 대법원, 대통령궁 등 관공서부터 헬싱키 대성당과 우스펜스키 대성당까지 볼거리가 모여 있는 시청광장으로 갔다. 시청광장 주차장 바로 길 건너에 있는 건물이 대법원 건물이고 그 바로 옆에 대통령궁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물인데도 우리나라처럼 경찰이나 경비 인력이 보이지 않았고, 건물 앞으로는 차와 사람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심지어 대통령궁 외부는 울타리만 쳐져 있어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시청 뒤편에 넓은 광장을 품고 있는 헬싱키 대성당은 1852년 러시아 정교회 성당으로 지어졌는데, 가톨릭 성당과는 다른 외관이 오히려 푸른 하늘과 만나 더 아름답게 보였다.

 

▲ 핀란드 대법원과 대통령궁 (왼쪽) 대법원, (오른쪽) 대통령궁

 

우리 부자는 더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북쪽으로 이동했다. 아들에게 현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며칠 전 핀란드 사람인 이다(Iid)에게 '하룻밤 재워줄 수 있냐?'고 요청했고, 이다는 흔쾌히 우리 부자를 받아줬다.

 

그래서 핀란드 중부의 작은 마을 토홀람피(toholampi)로 찾아갔다. 큰길에서 한참을, 비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니 울창한 자작나무 숲속에 저택이 나왔다. 우리나라의 시골집을 생각했는데 족히 100평은 넘어 보이는 2층짜리 큰 집이었다. 마당에 주차하고 아들과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영식이라고 하고, 여기는 제 아들 오태풍입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코(Miko)라고 합니다. 여행을 오래 했다고 들었어요. 환영합니다. 이다(아내)는 조금 이따 올 거예요."

 

이다의 남편 미코는 우리가 잘 방을 안내해 주고 얘기를 조금 나누다 오늘은 교회에서 모임이 있다고 미안해하며 가족과 함께 나갔다. 졸지에 핀란드의 아주 큰 농촌 주택에 우리 부자만 남게 되어 저녁을 해 먹고 잠이 들었다.

핀란드는 좀도둑 걱정이 없는지 처음 본 낯선 동양인 여행객에게 집을 맡겨두고 온 가족이 모임을 가는 상황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만큼 안전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내 이다와 얘기를 나누고 기념품을 선물로 주고는 집을 나왔다.

 

▲ 카우치 서핑을 한 이다네 집 울창한 자작나무 숲속의 저택

 

어릴 적 꿈에 그리던 산타
오늘은 북위 66도에 있는 로바니에미(Rovaniemi)로 가는 날이다. 북위 66도 32분을 이은 선의 북쪽 지방을 북극권이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하짓날에는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으며, 동짓날에는 하루 종일 해가 뜨지 않는다. 바로 그 구분 선이 지나는 곳에 핀란드의 공식 산타 마을이 있다.

 

▲ 로바니에미 북극 구분선 북극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북극으로 구분된다

 

내가 어린 시절인 30여 년 전 한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북유럽에 있는 핀란드라는 나라에 산타 마을이 있고, 거기에는 300살 된 산타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산타 할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쓰면 이곳으로 전달되어서 운이 좋으면 답장도 받아 볼 수 있다.'

 

대충 이런 내용과 함께 눈이 내린 산타 마을의 사진 한 장을 봤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와 살며 여행 한 번 못 가본 나는 그저 꿈을 꾸었었다. 서울 여행도 가볼 형편이 안 되는데 하물며 비행기와 해외여행은 내 인생에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나는 정말로 꿈을 꾸었다.

 

'나도 한 번 산타 마을에 가서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그래서 소원을 빌면 그래도 하나는 들어주지 않을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내 스스로 커서 9살 아들 손을 잡고 한국에서부터 자동차를 운전해 그 꿈의 도시 로바니에미로 향했다.

 

▲ 로바니에미 산타 클로스 우체국 전 세계에서 산타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면 이곳으로 온다

 

11월 중순이었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해는 일찍 졌고, 도로에는 차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오후 4시 무렵 도착했는데 날은 벌써 어두워 있었다. 주차하고 아들과 함께 산타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산타를 만나는 건 무료였지만, 사진이나 영상은 개인이 마음대로 찍을 수 없고 직원이 찍은 걸 나중에 구매할 수 있다고 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아들과 함께 산타 방에 들어갔다. 산타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한국말로 간단한 대화는 할 수 있었다. 아들이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산타 할아버지!"

 

산타도 아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나도 어린아이가 되어 산타에게 인사했다.

 

"와,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 꼭 와서 당신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30년 만에 아들과 함께 올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몇 분간 대화를 나눴고, 산타 할아버지는 우리가 오랫동안 여행한 얘기를 듣곤, 아들에게 힘 나는 말을 해주었다. 신기해하는 아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산타 할아버지, 당신은 진짜군요

 

▲ 로바니에미 산타 마을 저 건물안에 핀란드의 공식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

 

사실 산타를 만나면 한국에서 아들 몰래 가져온 게임팩을 산타에게 부탁해 산타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선물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분명히 차에 감춰 놓았던 게임팩이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산타를 만나러 갔었다.

 

그동안 고생했을 아들에게 깜짝 선물하려 했는데 하지 못해서 너무 아쉽고 속이 상했다. 그래서 아들과 자리에 누워 크리스마스 선물 얘기를 하다 나의 어릴 적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빠는 어릴 때 아빠가 하늘나라에 가셨고, 그래서 80이 넘은 할머니랑 살아서 여행도 못 가봤다고, 크리스마스 선물도 초코파이 하나 받아 본 게 전부였다'고. 아들은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빠의 어릴 적 얘기를 들으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깜짝 놀라 왜 우냐고 묻자, 아들이 말했다.

 

"나도 아빠가 일찍 하늘나라에 가면 그럴 것 같아서 슬퍼."
"아빠는 그럴 일 없어. 나중에 너랑 손자랑 여기 또 올 거야!"

 

아들을 안심시키며 품에 꼭 안아주었다. 하지만, 자기 눈물을 닦아주는 아빠의 눈을 보며 불쌍하게 바라본 9살 아들의 진심 어린 공감에 나는 어렸을 적 받았던 상처가 모두 치유되는 것 같아, 마치 산타 할아버지에게 진짜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산타 할아버지, 당신은 진짜군요.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로바니에미 산타 할아버지 핀란드 로바니에미에 가면 공식 산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