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 '적군묘지'라고 치면 여기가 나옵니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1]
길을 나서며 : 유엔군 화장장과 북한군, 중국군 묘역
한국전쟁 때 숨진 유엔군의 유해를 태우던 화장장 시설.
도로변에 안내판이 없으면 찾기 어렵고, 찾아온들 어떤 폐허인지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안내판에는 '연천 유엔군 화장장 시설, 국가등록문화재 제408호'라고 되어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전사자들을 화장하기 위해 1952년 건립하여 휴전 직후까지도 사용한 화장시설이며, 건물의 벽과 지붕이 훼손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화장장 굴뚝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설명도 덧붙여 있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산 77-2번지.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다. 어려서 숱하게 들었던 화장장의 귀신이나 공포, 음습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분명히 남의 것이었을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시신을 고국으로 실어가기는 어려운 외국군 병사들의 유해가 뜨거운 불길 속에 고운 재로 가라앉은 곳. 어쩌다가 타국 땅에서 죽었고 낯선 곳에서 화장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인지. 나의 눈에는 우리 땅에서 벌어진 얽히고 설킨 현대사의 몇 장면들이 짧은 순간에 파노라마로 흐른다.
파주시에 위치한 북한군, 중국군 묘역.
2013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이후 중국군 유해는 본국에 상환됐지만 북한군은 여전히 '적국'에 남아있다.
"이곳은 6.25전쟁에서 전사한 북한군과 중국군 유해, 6.25전쟁 이후에 수습된 북한군 유해를 안장한 묘지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네바 협약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1996년 6월에 묘지를 조성하였으며 총면적은 6,099㎡로 1묘역과 2묘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2묘역에 안장되었던 중국군 유해 541구는 총 3회에 걸쳐 (2014.3.28~2016.3.31)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지난 2014년 3월 19일 한국전쟁기 중국군 유해가 중국으로 송환되고 있다.
중국군 유해가 본국에 송환됐음을 표시해둔 비석.
중국군의 유해 송환은 2013년 6월 국빈으로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송환의사를 전달한 이후 3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사드 배치로 한중 갈등이 불거지기 전의, 소위 한중 밀월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지금과 다른 국면인 당시의 정치외교적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우리 땅에서 수습된 외국군의 유해를 인도적으로 고향나라에 보낸 것은 잘한 일이다.
연천 유엔군 화장장 시설과 피주의 북한군-중국군 묘역
북한군, 중국군 묘역은 네이버지도에는 없고 카카오지도에서는 검색이 된다.
구글지도에는 '적군묘지'라고 등록돼 있다. 우리나라의 사적지가 우리나라의 일부 지도에서 검색되지 않는 것은 좀 아쉽다.
이 두 곳의 한국전쟁의 흔적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나도 한국전쟁 관련해서는 안보관광이라고 하는 땅굴이나 판문점,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일 년 동안 휴전선 일대에서 한국전쟁의 흔적을 찾아보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우리 현대사에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이런 낯 뜨거운 일들은 휴전선 답사 내내 나를 수시로 멈칫거리게 했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얼마나 아는가?
나는 십여 년 동안 주로 역사를 주제로 하여 중국 곳곳을 여행했다.
그런데 2019년 연말에 터진 코로나19 사태로 국경이 닫히면서 나의 답사여행은 어쩔 수 없이 국내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에는 서해와 남해에서 바다의 역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서해 남해 다음에, 북해가 아닌 북쪽에는 무엇이 있냐는 여행 동반자의 코멘트를 계기로 휴전선 답사에 나서게 됐다.
처음에는 한강하구 교동도에서 강원도 고성군까지 5박6일에 걸쳐 훑어나갔다.
첫 답사의 소감은 강렬했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으로서의 대한민국, 특히 한국전쟁이란 결정적인 우리 현대사에 얼마나 무지한지를 크게 깨달았다. 이후 일곱 차례의 휴전선 답사와 세 차례로 나눠서 다닌 38선 종주, 대여섯 번의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도서 답사, 그 외의 대전형무소 탐방 등 총 90여 일간 답사를 다녔다.
답사를 전후로 체크하게 되는 내 머리 속의 한국전쟁은 속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6.25란 한마디로 압축되는 김일성의 남침과, 포탄을 지고 적진에 뛰어들면서까지 장렬히 전사하면서 처절하게 지켜낸 국군이라는, 피아가 선악으로 명료하게 구분되는 서사. 그러나 길 위에서 대면하는 한국전쟁은 기존의 서사와는 크게 달랐다. 다르거나 틀렸다고 하기보다는 그것 이외의 무엇인가가 대단히 많이 보였다.
오늘날 내가 속한 공동체로서 대한민국, 북한에 빗대어 말하면 남한은 70여 년 전에 시작되고 3년이나 지속된 한국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 세대가 분투하여 초토화된 땅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다. 국가의 위상 역시 당시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굳혀버린 남북의 갈등과 국제질서의 압박이라는 대단히 불편한 구조를 털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짊어지는 정치적 부담과 경제적, 사회적 손실은 물론 전국민의 상당한 불안과 스트레스와 같은 심리적 피해는, 숫자로 계상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정전협정으로 전면전이 중지된 지는 70년이 되었다.
그럼 그것을 치료하는 것 역시 70여 년의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장기간에 걸친 준비의 하나로 한국전쟁의 이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을 꼽는다.
전쟁을 밀어내고 평화를 당긴다
유엔군 화장장 시설
한국전쟁의 속살을 그 흔적을 찾아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전쟁을 밀어내고 평화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실제 도달 가능한 평화란, 갈등으로 생기는 문제를 무력으로는 해결하지 않는 것이다. 무력으로 해결하지 않기 위해, 무력으로 해결하다가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를 오히려 치명적으로 악화시킨 한국전쟁을 곱씹어봐야 한다.
한국전쟁은 38선을 깨는 북한의 남침이 실패했고, 38선을 돌파한 북진 역시 실패했다. 직선 38선이 비슷한 지역에서 곡선의 군사분계선으로 바뀌었을 뿐 남북은 치명상에 치명상을 안고 불구가 되지 않았는가.
내가 한국전쟁을 되새겨보는 두 번째 의의는 전쟁 자체에 대비하는 것이다.
전쟁은 군대가 출동해서 수행하는 전투의 총합만이 아니다. 내가 전선으로 징집되지는 않아도 나와 무관한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전쟁은 전국민의 것이라는 명제는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한국전쟁의 참극과 그 후유증을 너무나도 끔찍하게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전쟁을 포함해 국가운영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민주시민으로서 전쟁을 한걸음 정도는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해의 하나로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을 돌아보고, 실제 우리가 겪은 전쟁은 어떠했고, 훗날 원치 않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전쟁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미리 짚어보자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소박한 이유다.
휴전선을 답사하면서 <60년 전 6.25는 이랬다>는 35명의 체험담을 수록한 단행본을 읽었다.
맞다.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그랬다'는 것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하다. 그러니 오늘도 그러하거나 오늘 또는 내일에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한국전쟁을 차분하게 다시 길 위에서 읽어보려고 한다. 전쟁에서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과 해서는 아니 될 것들에 대한 확인도 필요하다.
이제 독자들을 모시고 길로 나선다.
무거운 주제지만 가능하면 가벼운 맘으로 일어선다.
이 글의 의도의 하나는 휴전선 일대도 여행할 만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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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이 손잡고 그은 선... 아직도 남한 곳곳에 있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2]
미군과 소련군이 설치한 38선 표지
연천 한탄대교 남단 38선 표지
여러 군데 흩어져있는 38선 표지석
연천군 백학면 통구리 453-1의 38선 표지석
연천 초성리의 38선 돌파 기념비.
이곳에 38선 표지와 함께 한국전쟁과 관련된 몇 개의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다.
지도에서 '38선돌파기념비'라고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평화로와 한여울, 한여울로와 철로 사이사이에 몇 개의 표지가 있다. 38선돌파기념비는 1951년 5월 28일 유엔군이 세 번째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기념비는 영어로 되어 있고 옆에 번역문이 있다.
38선돌파기념비 옆 철로 가까이에는 큼직한 자연석으로 세운 38선 표지가 있다. 그 앞에는 반들반들한 화강암으로 만든 안내표지가 있다. 그런데 안내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큼직한 38선 표지가 아니고 그 바로 옆에 있는 깨지고 낡은 콘크리트 설치물이다. 상단은 잘라진 채 땅바닥에 놓여 있고 기단은 제자리에 박혀있다. 안내문이 그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연천 한탄대교 남단 38선 표지
연천 한탄대교 남단 38선 표지
이 파손된 38선 옛 표지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 미국과 옛 소련의 합의 하에 세워진 38선 표지석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김일성이 인민군과 탱크를 앞세우고 이 길로 남침하여 수많은 우리 국군과 민간인까지 비참하게 희생되게 했던 피로 물든 6.25전쟁으로 인해 역사적인 이 38선 표지석이 파손되어 있던 중 1991년 9월 17일 당시 군수였던 홍성규 연천군수께서 바로 그 옆에 38선 경계비를 다시 건립하여 오늘날까지 이루게 되었다. 파손된 옛 38선 표지석은 파손된 상태로 기념물로 보존하기로 하였다.
2016년 4월 일
대한민국 6.25참전기념자회 연천지회
이곳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안내문이 설명하고 있는 파손된 38선 표지이다. 1945년 미군과 소련군이 협력해서 세운 38선 표지이다. 안내문은 조금 어색했다. 연천의 한 단체가 이 지역 인사의 공덕을 선양하는 사적인 기념물인지, 연천군이 역사유적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안내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역사유적이라면 개인에 대한 존대어는 삼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안내문 전체의 5분의 4가 한 문장이라 읽기도 조금 거북하다. '이루게 되었다'는 말도 어색하다.
오래도록 보존하여 보여줄 것은 옛 38선 표지이고 안내문은 보조적인 것인데 안내문 표지를 너무 가까이 세운 탓에 사진에 담기도 불편하다. 안내표지가 옛 표지석보다 너무 멀끔해서 첫 시선은 그쪽으로 끌려간다. 주객이 바뀐 느낌이다.
38선은 우리가 그은 선이 아니다. 책임을 방기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책임을 더 크게 받아들여야 할 통탄스런 일이다. 아무튼 누군가 선을 그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행했다. 그러니 그들 두 나라의 군대가 합의하여 직접 설치한 표지야말로 역사적 사실에 가장 부합하지 않겠는가.
해방군과 점령군 사이
한반도에 남아있는 38선 표지석 위치
38선 표지(출처 미확인)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영국 총리 처칠,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는 전쟁이 끝나면 조선을 독립시키는 것으로 합의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잘 알려진 대로 '적절한 시기'에 독립하는 것으로 합의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했다. 이와 함께 어느 한 국가에 의한 군사적 점령은 강한 정치적 반발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조선에 중앙집권제 방식의 군정청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뒤에 열린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두 나라는 이미 조선의 독립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것이 아니었을까.
1945년 8월 6일, 9일 일본에 원자탄이 잇달아 투하되고, 8월 9일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는 바로 만주로 들이닥쳤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일본은 8월 10일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연합국 측에 전달했다.
연합국의 예상에 견주자면 돌발적인 사태에 가까웠던 것 같다. 미국은 한반도의 일본군에 대해 38도선을 기준으로 나누어 미군과 소련군이 무장해제를 하는 방안을 서둘러 제시했고 소련이 바로 동의하여 확정되었다.
실제로 지도 위에 38선을 처음 그은 인물은 당시 미국 전쟁성(국방부)에서 일하던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중령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월 7일에는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는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했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를 자신의 권한으로 시행하며,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나 질서를 교란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한국인들의 희망과는 달리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란 것을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미군이 서울에 들어온 9월 9일, 진주군 사령관 하지는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로부터 항복을 접수했고, 총독부 청사에는 오후 4시 반, 일장기가 내려오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이로서 미국의 군정 3년이 시작되었다.
소련군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김원봉이 주도하여 창설한 조선의용대는 지휘부와 본대가 따로 움직였다.
본대는 황하를 건너 북상하여 타이항산의 팔로군과 합작하면서 만주 방면으로 촉수를 뻗고 있었다. 일제가 항복하자 조선의용군 독립지대가 선양에서 조직됐다. 얼마 후 관내에서 이동해온 조선의용군 선견대와 합병해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로 개편했다. 이들은 선양에서 안동을 거쳐 압록강 다리를 건너 군악대를 앞세우고 신의주로 들어갔다.
한국어와 영어, 러시아어로 각각 쓰여져 있는 38선 표지.(출처 미확인)
조선인 마쯔야마 군수의 "조선독립만세"
이렇게 해서 일제강점기는 미소 양국의 점령기로 넘어갔다.
극소수의 조선인들은 일본이 곧 항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국내에서는 여운형이 8월 14일 초저녁에 조선군 참모부로부터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달받았다. 다음날 아침 8시에 총독부 정무총감의 관저로 와달라는 연락도 받았다.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이라고 방송을 했다. 도시는 물론 시골의 읍내 수준에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바로 퍼져나갔다. 왕래가 드문 시골에서는 하루이틀 늦게 전해지기도 했다.
강원도 김화읍에서 아이들은 자맥질을 하면 놀다가 일본의 항복방송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이들은 당장에는 무덤덤했으나 저녁이 되어서야 뭔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 아이는 그날 저녁을 먹고 난 뒤 엄마가 '몸뻬'라고 하는 일본식 바지를 벗어던지고 흰 치마저고리로 갈아입는 게 의아스러웠다. 엄마를 따라 군청 앞 공터로 가보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의 모두 흰색 한복을 입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청 현관의 상자 위에 흰색 셔츠 차림의 남자가 올라가 조선어로 목청 높여 연설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 마쯔야마 군수였다. 군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국방색이나 검정색 정장이 아닌 흰 셔츠 바람으로, 게다가 조선말로 연설하다니. 아이는 이때 비로소 해방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군수는 어제까지만 해도 황군신민과 내선일체와 옥쇄를 부르짖던 사람이었다, 그런대 그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아이도 세 번이나 따라 외쳤다. 마쯔야마 군수는 그날 밤 군청의 현금 뭉치로 가방을 채우고는 경성으로 도망쳤다는 소리가 돌았다.
그 아이는 훗날 언론인이 되는 임재경으로, 그의 회고는 그날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해방은 시작이었고 시작은 아직 반이었다. 압제로부터의 해방은 해방이지만 나라를 재건하는 과정이 나머지 반이었다. 35년이나 강점되었다가 다시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당연히 복잡할 수밖에 없다. 향후의 정국 전개를 불안해하는 사람은 있었겠지만, 그래도 분단이 되고 그것이 내전과 국제전이 결합된 참극으로 치닫게 되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얼마나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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