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왜 월북을 택했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5]
월북루트로 이용되던 강화 연미정... 목숨건 월경, 왜 계속돼야 하나
연미정을 밖에서 바라보든 그 안에 서든, 탁 트인 하늘과 바닷물과 정자가 잘 어울린다.
구름과 모래톱과 해안선과 능선, 연미정의 처마선까지 모두 유려한 곡선이다.
내가 연미정을 처음 찾은 것은 휴전선 답사여행 때였다.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한강하구를 긴장하며 마주하지만, 연미정이 건네주는 곡선의 감성은 나의 긴장감을 살며시 해제해주곤 한다. 역사의 협심증으로 발동하는 가슴 통증을 풀어주고, 덩달아 높아진 안압을 가라앉히는 느낌이다. 휴전선 답사를 십여 차례 다니면서 첫날 첫 번째 답사지로 연미정을 고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장 빈번한 월북루트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국전쟁이란 주제로 돌아와 월곶돈대 문루 옆의 배수구를 빤히 쳐다본다.
2020년 7월 탈북자 모씨가 배수구를 빠져나가 한강하구의 밀물을 타고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지역 방위를 책임지는 사단장이 해임되었다. 군사분계선 남에서 북으로 이동하는 월북이란 행위는 본인의 목숨은 물론 남의 목줄까지 날려버리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연미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한강하구는, 최근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전쟁 전후에도 수도권에서 가장 빈번한 월북 루트였던 것 같다. 뱃길이니 일정 규모의 그룹을 짐까지 싣기 용이했고, 육지의 도로에 비해 감시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좋았을 것이다.
중간에 남한의 해상검문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 우한에서 동전수매업을 하다가 폭격에 부상을 당하고 고향 옹진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꾸며댔다. 중일전쟁 시기에 일본은 중국의 구리 동전까지 수집해서 조병창에 공급했는데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동전 수거에 종사했었다.
지금은 남북으로 갈려 마주보고 있지만 한강하구는 그 북안인 황해도 연안 옹진까지 북위 38도 이남으로 온전한 남한의 관할지역이었다. 작은 배로 월북한 이들은 김학철과 누이동생 그리고 경호원과 간호사였다. 목적지가 옹진이라 하고 두 쌍의 부부처럼 보였으니 큰 의심을 받지 않고 월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은 인생을 건 월북이었다.
월북은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군정은 1946년 초부터 좌익에 대해 압박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그해 5월에는 정판사 사건을 터뜨렸다. 이 사건은 조작이란 것이 근래에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조선노동당을 탄압하는 치명적인 신호탄이 되었다.
조선노동당은 지하로 들어가면서 일부 주요 인사를 북으로 피신시키기 시작했다. 외다리라는 신체 조건으로 인해 지하활동이 불가능했으니 김학철은 북송 1호로 지목될 만했다.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41년 12월 중국 허베이성 타이항산 지역의 후자좡촌(胡家莊村)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다가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그는 일본으로 끌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는데 총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
일제가 패망하고도 55일이나 지나서야 석방돼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그는 서울에 돌아와서는 조선의용대 시절의 직속상관이었던 김원봉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상봉한 자리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회의석상,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멋지고 감동적인 귀환보고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장안의 뜨거운 시선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캄캄한 밤에 김학철 일행이 하선한 곳은 운이 나쁘게도 썰물에 드러난 갯벌의 끝자락이었다. 갯벌은 걷기 힘든데다가 바닷물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짐을 모두 포기한 채 겨우겨우 빠져나와 근처의 염막을 찾아 들어갔다. 김학철은 경호원을 보내 황해도 보안부장(경찰 책임자) 이춘암(일명 반해량)에게 연락했다.
연락을 받은 이춘암은 바로 차를 몰고 와서 김학철 일행을 데려갔다. 이춘암은 김학철의 조선의용군 동지였다.
중국 무한에서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깃발 가운데 선 이가 김원봉이고 흰 원 안의 사람이 김학철이다.
김학철과 김원봉은 해방 후에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회의석상에서 상봉했다.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멋지고 감동적인 귀환보고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장안의 뜨거운 시선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조선의용대는 처음에는 국민당 군대의 대일전선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대원들이 국민당의 대일항전 의지에 의구심을 품게 됐고 이들은 중의를 모아 화중 화남의 국민당 군대가 아니라 타이항산의 팔로군과 제휴하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김원봉의 본대는 충칭에 두고 주력 대원들은 황하를 건너 북상했다. 북상 이후 조선의용대는 최창익이 이니셔티브를 잡아갔고, 1942년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한 이후에는 무정이 주도하게 됐다. 1942년 11월에는 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건국역량을 키우기 위해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1944년 옌안으로 이동했다.
조선의용군은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바로 그달 하순 조국을 향해 동북으로 행군했고, 11월에는 1천여 명이 선양에 집결하여 의용군 군인대회를 열었다. 조국으로 입국하려는 조선의용군에 대해 소련 점령군이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귀국을 일단 연기했다. 그들은 만주 지역에서 3개 지대로 개편하여 동포들이 많은 남만주와 옌볜 그리고 북만주로 진출했다. 이들은 조선인들을 보호하며 대원을 늘려갔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164사단 166사단으로 개편하여 중국 국공내전에 참여했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에 대해 정치적 채권자가 됐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가 옌볜을 조선인의 자치주로 했고,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이 유엔군에 밀리자 의용군이란 명목으로 참전한 것이었다. 국공내전이 끝나자 이 두 개 사단은 1949년과 1950년 무장한 그대로 북한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바로 북한 인민군의 주축이 되 것이다.
북한의 건국이나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복구 등에서 조선의용군과 연안파는 인적으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1956년 김일성이 소위 종파사건을 계기로 전투적으로 벌인 권력투쟁에 연안파는 크게 밀리고 말았다. 김학철, 정율성 등은 중국으로 건너가 살아남았으나, 북한에 있던 상당수는 숙청을 당해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밀려났다. 해주에서 김학철을 환영해준 이유민도 함경남도 인민위원장으로 있다가 숙청당해 행방불명이 됐다. 살아남은 몇몇은 오직 김일성의 충성분자였다.
숙청되었으니 그들의 공적과 역사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으려 했고 북한에서 조선의용군이라는 독립운동 역사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김일성의 정치군사적 독재가 역사의 독점으로까지 뻗어가면서 독립운동의 생생한 역사는 창작으로 덧칠한 김일성 신화로 완전히 포맷되었으니.
김원봉 부인 묘소 찾은 김학철옹
지난 2001년 6월 3일 경남 밀양을 방문한 '항일 독립군 마지막분대장' 김학철옹이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여사의 묘를 찾아 묵념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옹, 박여사의 조카,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철의 월북에서 조선의용군 역사가 남북에서 어떻게 됐는지 짚어보았다. 다시 다른 월북 사례들도 몇 개를 더듬어 오늘을 가늠해본다. 김학철은 그를 수행했던 간호사 김혜원과 북한에서 결혼했다. 김혜원은 첫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친정집이 있는 부천으로 월남했고, 갓난아들을 안고 다시 월북하여 부군에게 돌아갔다. 아마 같은 루트를 경유했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38선이라지만 오가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목숨과 바꾼 월경
60년이 훨씬 더 지난 2013년 9월 임진각과 오두산 전망대 사이의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탄포천에서 한 남성이 철책을 넘었다. 초병의 통제에 응하지 않고 임진강에 입수했다가 우리 초병의 총격에 사망했다. 2020년 9월에는 연평도 해역에서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해상에서 실종됐고 이번에는 북한 초병의 총격에 숨졌다.
착잡하다. 철책선 경계근무가 철저해졌음을 칭찬할 것인가, 월북 행위는 총격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는 현실을 안타까워할 것인가. 월북을 하게 된 처지나 그 무지를 비난할 것인가. 제삼자가 보면 남북이 적대적으로 합동하여 아직도 '야만의 시간'을 철통같이 그대로 세우고 있을 뿐이다.
국경을 무단으로 넘는 것은 국경 양측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그 경우 검거해서 조사하고, 필요하면 재판을 거쳐 처벌하는 것이 문명세계의 상식이다. 초병은 근무지침에 따라 충실하게 자기 임무를 수행했다지만, 초병 개인의 단독 행위가 아니다. 초병을 그 자리에 세운 군, 군을 세운 정부, 정부를 세운 국민 모두가 합동으로 취한 행위, 곧 국가의 행위다.
38선 월북이, 군사분계선 월북이 과연 현장의 즉결처분감인지는 되짚어볼 수 없을까. 몰래 감행한 월북이란 남한의 총격을 피한 다음에, 북한의 총격까지 피해야만 살아서 도착하는, 그 이후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살 행위인 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전쟁이 멈추기 전까지 30만~35만이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련군 자료를 감안한 숫자라고 한다. 월남의 결과로 남한은 인구증가 이외에, 좋든 아니든, 무엇을 얻었다. 그럼 월북을 통해서 남한은 인구감소 이외에 무엇을 잃었을까. 이런 질문은 한국전쟁의 득과 실을 따지는 것과 같아서 답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다.
일단 월북 자체에 대해 객관적으로 조사연구된 것이 거의 없다. 월남이란 현상은 남한 학자들이 늦게라도 연구할 수 있었지만 월북자들에게 대해서는 연구는커녕 기본적인 자료에 접근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주장이나 발표는 아주 단편적인 팩트 몇 조각을 가끔 얻는 정도이다. 월북 숫자부터가 그렇다. 북한의 발표를 찾아봐도 숫자에 대해 쓴웃음만 지을 뿐이다.
연미정에서 바라본 황해도 땅.
나의 여행친구 이현숙이 그려서 보내온 연미정.
이 연재를 읽고 연미정 이야기도 나누더니 혼자서 현장을 다녀오기도 했단다(그림 제공: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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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사람은 다 평양 가고 서울엔 쭉정이만 남았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6]
월북 택한 조선 최고의 문장가 상허 이태준의 삶
철원읍 대마리에 세워진 두루미평화관의 문학비와 이태준 흉상
휴전선 일대에서 한국전쟁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월북자는 철원 태생의 이태준이었다. 철원읍 대마리에 있는 두루미평화관 마당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2004년에 세운 '상허이태준문학비'가 흉상과 함께 세워져 있다. 문학비 기단에는 이태준의 문학 인생을 요약한 뒤에 이렇게 맺고 있다.
"조국과 고향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이 위대한 문학자의 자취는 지금도 묘연하다. 이제 그의 나이 100세, 하루속히 통일이 이루어져 이 고독한 '경계인'의 문학과 생애가 우리 모두에게 알려지길 바랄 뿐이다"
철원의 노동당사 옆에는 컨테이너 하우스로 만든 소박한 이태준 문학관이 있다. 관장은 철원 이야기를 시로 담아내고 있는 시인 정춘근. 그는 오랫동안 철원에 살면서 이태준을 연구하며 관련 자료들을 모았다.
그는 이태준의 단편소설 <촌뜨기>의 배경을 하나하나 찾아내 촌뜨기길도 만들었다. 촌뜨기길은 이태준이 살던 용담마을에서 노동당사와 관전리로 이어지는 5.4km의 길이다. 13개 표지를 따라 걸으면서 소설 <촌뜨기>의 한 대목씩 짚어볼 수 있다. 최근 철원군은 19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 이태준 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정도면 이태준은 부활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체호프' 이태준
이태준은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완성자'나 '조선의 체호프'라고 칭해질 만큼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월북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희뿌연 그림자였다. 이름 석 자 가운데 한 글자는 ×나 ○나 ■로 복자(伏字)를 당하는 신세였다. 한국전쟁이 멈춘 지 50년이 지났고, 소식이 끊어진 지 30년이 넘은 2004년, 다른 곳도 아닌 그의 고향에 이태준 문학비를 세울 때도 '월북 빨갱이 절대불가'를 외치는 일부 철원 사람들 때문에 꽤나 애를 먹기도 했단다.
1904년 출생한 그는 고아와 다름없는 불행한 소년기를 거쳐 힘들게 문인으로 등단했다. 이태준은 1933년 이효석, 이상, 김유정 등과 함께 구인회를 만들고 주도했다. 구인회는 사회주의 참여문학인 카프(KARF) 계열과는 대조되는 순수문학 그룹이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은 거세졌고 문인들의 목을 억세게 졸랐다. 조선의 식자나 문화예술인 대부분은 "님의 부르심을 바뜰고서"와 같은, 억지로 짜내는 친일매국에 허덕였다. 이태준도 이런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이태준은 1943년 〈돌다리〉까지 내고는 철원군 안협으로 낙향했다. 펜을 놓고 낚시로 시간을 흘려보내려고 했으나 <해방전후>에서 묘사했듯이 그의 이름값은 계속해서 그를 경성으로 끌어내곤 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건국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마주친 이태준은 일제강점기의 문학경향과는 달리 현실참여로 자세를 전환했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 등 진보진영에 적극 가담했다. 그 내밀한 속내는 1946년 발표한 <해방전후>에 녹아 있다. 작중 인물 '현'에게 자신을 투영한 이 작품에서 이태준은 좌익에 대한 경계심도 드러냈지만 우익에 대해서는 환멸감을 쏟아냈다.
이태준
유임하(한국체육대학 교양과정부 교수)는 세 편의 기행에 대해 이태준이 고심 끝에 건국의 방략으로서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했고, 그 결행을 문장으로 구체화시킨 정치적 문학적 전향서라고 분석했다. 이태준은 소련이 전후복구를 거쳐 일궈낸 선진문물과 함께 조선이나 일본, 중국에서 보지 못했던 '제도의 승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특히 소련의 축제를 문화 정책을 통해 다양성의 조화를 구현한 선진적 사례로, 소수민족 전통과 평화와 문화가 합치된 것으로 평가했다.
혹자는 이태준이 스탈린 독재의 이면이나 그 한계를 읽어내지 못하고, 훗날 소련의 해체도 예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이태준과는 반대로 결론을 내렸던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1936)에 빗대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앙드레 지드와는 판이한 처지였다. 용광로가 쏟아지듯 화급하게 닥쳐오는 과제를 직면한 식민지 출신의 문인이었다. 이태준과 동시대의 문인들에게, 영미불일의 제국주의를 몸소 겪거나 관찰했던 앙드레 지드와 동일한 결론을 기대하는 것은 훗날의 허무한 탄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태준의 <쏘련기행>(시인 정춘근 소장)
유임하 교수는 <먼지>(1950)에서 북한 문학의 변화 속 이태준의 처지를 읽어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태준은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주인공인 한뫼 선생이란 인물을 문제적으로 구성하여 단일한 민족국가 건설의 꿈이 사라지고 분단이 고착되는 현실을 서사화했다는 것이다. 북한문학은 1950년대 중반까지는 다양한 사유와 목소리가 존재했다. 1953년 정전 이후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실패에 대한 살벌한 책임논쟁이 전개됐고, 외부적으로는 소련에서 시작된 스탈린 격하 운동이 김일성을 압박했다. 북한이 자신들의 체제와 권력을 세워가는 과정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거친 갈등과 충돌로 인해 다양한 사유는 자리를 잃었고, 이태준은 북한의 제도권 문학에서 바깥으로 밀려났다.
카프 출신의 한설야와 이기영은 이태준 작품을 평가절하하고 비판했다. 그들은 이태준의 월북 이전에 이미 북한 문단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설야는 1945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시작으로 교육문화상에 이르는 북한 문학권력의 정점이었다. 이기영은 1946년 2월에 월북하여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이끌면서 북한문예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이런 인물들이 이태준을 비판한 것은 문학토론이 아니라 정치적 박해였다. 한설야와 이기영은 이태준의 저격수였고 기소검사였고 판사였고 간수였다.
이들은 전쟁 이전의 이태준 작품들을 사상이 약하고 부르주아 반동이 잔존한다고 비판했다. 월북 이후의 작품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빨치산 대원을 냉혈동물로 묘사했다든가, 미국의 풍요를 노래했다면서 자연주의적 퇴폐나 반동적 태도라는 꼬리표를 붙여버렸다. 광복 후 북한 최고의 작품이라던 <호랑이 할머니>마저 문맹퇴치사업이 별 성과가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고 비난하는 정도였다.
이들이 이태준을 비판한 것은 그들만의 체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쌓여온 조선 최고의 문장가에 대한 질투가 아니었을까. 권력투쟁에 질투가 가미된 비판은 총알이 되어 이태준을 쓰러뜨렸고 결국 북한 문단에서 퇴출됐다. 한설야는 이태준을 정치적으로 죽인 다음에는 이태준과 같은 정치적 죽임에 빠졌으니 그의 정치와 문학은 자기부정이라 할 만하다.
이태준은 1956년 함흥노동자신문의 교정원으로 추방당했고, 다시 함흥콘크리트블록공장의 파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어 집필조차 박탈당했다. 1964년 조선노동당 중앙당 문화부 창작실 전속작가로 복귀했으나 그곳에서 이태준의 문장이 살아나올 수도, 권력을 만족시킬 수도 없었다. 몇 년 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추방되었고, 그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서 38선이 남북을 갈라놓자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의 월북이 많아졌다. 북한의 김일성대학이 교수진을 적극적으로 초빙하자 서울의 당대 최고 학자들이 적지 않게 평양을 선택했다. 이를 두고 똑똑한 사람은 전부 북으로 가고 서울에는 쭉정이만 남았다는 말이 돌았다. 문화예술인도 그랬다. 성혜랑(1996년 프랑스로 망명한 탈북인)에 따르면 "서울에서 온 작가, 예술가들로 넘쳐나는 평양을 보며 예술가들은 다 빨갱이였던가 생각될 정도"였다.
그들은 월북 이후 당장은 좋은 위치에 있었으나 인생 후반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극작가 신고송과 이서향, 만담가 신불출, 연출가 안영일, 연극배우 배용, 극작가 추민 등은 복고주의니 종파분자니 하는 명목으로 숙청당했다.
반면 북한체제가 불편했던 사람들은 월남하여 혈혈단신 객지에서 갖은 고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정치적으로 집단학살을 당하진 않았고 일부는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에 비해 월북의 결과는 대부분 불행이었다. 북한은 처음부터 월북자를 남한과 미국의 스파이로 경계하는 시각이 강했다.
학계나 문화예술가 가운데 자기 발로 38선을 넘어간 월북자는 중산층 이상이 많았고, 일본 제국주의의 갖가지 친일동원에서도 완벽하게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런 사람들은 북한이 사회구성의 기본으로 삼는 성분심사, 곧 출신성분과 사회성분 모두 부정적인 평가를 디폴트로 안고 있었다. 게다가 1956년 종파사건 이후 북한의 권력투쟁은 단순한 자리싸움이 아니라 죽고 사는 또 하나의 내전이었으니.
혁명은 인민을 끌어당겨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이지만, 권력을 잡는 순간 혁명은 사라지고 권력만 남는다. 이태준은 이런 냉혹한 권력에 추돌당했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이상과 열정은 그의 문장과 함께 사그라졌다. 그래도 철원에 그를 문학의 역사로 부활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으로서는 참으로 잘한 일이다. 한국전쟁의 직접 책임은 전범을 특정하여 그들에게 물을 일이고, 타버린 재처럼 흩날린 귀한 것들은 이제라도 하나하나 챙겨볼 일이다. 건져낼 역사가 이태준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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