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붙이 하나 없는 결혼식 사진... '38 따라지' 남자의 일생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3]
38선을 일곱번 넘고 결국 남한에 남은 남두용의 이야기
38선 통과지점의 경원선 철로.
학생 시절의 남두용. (사진 제공: 남명애)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로 진학한 남두용은 별다른 사고를 치지 않고 무난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독립운동이나 반일운동은 국내와 만주 모두 질식사를 할 정도로 위축된 상태였다.
국내의 조선공산당은 완전히 지하로 숨어들었다.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은 소련의 영토 연해주로 피신했다.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 역시 팔로군과 연합하고는 있었으나 혹독한 시련을 견디는 중이었다. 임시정부도 생존에 급급한 처지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남두용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도쿄-시모노세키-부산-경주-대구-개성-서울-경원선-함경선의 여정으로, 약간의 유람도 하면서 귀향했다. 한탄강철교를 네 번째 통과할 때도 그 지점이 북위 38도인 것을 인식할 리 없었다.
남두용은 탈출자금을 오마모리에 숨겼다.
일본군에서 개인용품은 검사대상이었지만 오마모리는 상관들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제공: 남명애)
탈출 자금을 준비하는 한편 남두용은 학도병 생활에 적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군사훈련과 내무생활에 모범이 되려고 애썼다. 그의 상관은 남두용을 좋게 평가하여 교육 조교로 내심 정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남두용은 전선으로 차출되지 않고 조교로 남을 수 있었다. 남두용은 함경북도 회령의 관동군 보병부대에 배치됐다. 같은 부대에 조선인 학도병은 27명이 있었다.
복무 중에 애국가 사건이 있었다.
남두용이 내무실 오락시간에 노래를 부르라고 지목되자 충동적으로 애국가 1절을 불렀다. 우리말을 모르는 일본 병사들은 박수를 쳤다. 조선인 병사들은 나라를 생각하는 노래라는 것은 짐작했다. 정작 남두용 자신은 조선인 병사가 밀고하지 않았을지 한동안 불안해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애국가를 아는 병사가 없었다.
이 사건 이외에 다른 불령한 행동은 없었다. 청춘의 반항심은 날카롭지만 일상의 굴복은 밋밋해보여도 묵직했던 게 보통의 삶이었다. 남두용은 일군의 조선인 병사들을 일본 나고야 근처의 아이지현까지 인솔해가는 임무가 주어졌다. 경원선 열차를 타고 한탄강철교 남단의 38선 그 지점을 또 지났다. 이번에는 일본군 병사로서 공무출장이었다.
그렇게 더딘 시간이 흘러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그날, 남두용은 두만강 철교의 경비부대 소속이었다. 그는 일본군 병사 신분이었기에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가 된 채 도문(투먼)역 근처의 수용소로 옮겨졌다. 이후 일본군은 소련으로 이송된다는 소문을 듣고는 남두용은 탈출을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조교로 교육시켰던 조선인 병사들을 모아 자신의 탈출계획을 알리고 동참하려면 내일 모처에 모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모처에 조선인 병사 전부가 모였다. 이 순간에 정말 뜨거운 환희를 맛보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남두용은 이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4일 동안 170킬로미터를 걸어 귀향했다.
징병으로 끌려갔으나 운 좋게 살아서 돌아왔다.
귀향한 남두용은 청진시의 나남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6년 1월 교사들이 반탁시위를 일으켰으나 인민위원회에 의해 바로 해산됐다. 교사들은 연금처분을 받았다.
남두용은 토지개혁까지 눈앞에 닥쳐오자 38선을 넘기로 결심했다.
1946년 1월 출발했다.
걸어서 경성까지, 트럭을 얻어 타고 북청을 거쳐 원산까지 남하했다. 불시검문을 피하려고 원산과 성진(지금의 김책시)에서는 노숙을 했다. 경원선은 원산에서 복계역(철원 직전의 역)까지만 운행하고 있었다. 이 구간은 화물칸 지붕에 얹혀 갔다. 그 다음엔 다른 세 사람과 함께 걸었다. 얼어붙은 한탄강을 새벽에 건넜고 건넌 지 얼마 가지 않아 미군 초소가 나왔다. 별다른 문제없이 통과했다. 아직은 38선이 얼어붙지는 않았던 것이다.
일곱번째 건넌 한탄강철교
남두용은 한탄강철교 남단을 일곱 번째 통과하면서 비로소 북위 38도가 운명의 구획선이 되어 있음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여섯 번이나 무심하게 통과했던 이 지점을 통과하는 것은 이제 특별한 정치적 행위였다.
남으로 가면 본인은 타향의 외톨이였고, 북에 남은 가족은 반동분자라는 불이익을 고스란히 덮어써야 했다.
남두용의 혼례 사진. 피붙이는 한명도 참석하지 못한 '38 따라지' 신세 그 자체였다. (사진 제공: 남명애)
1948년에는 모친이 월남했다. 집을 떠난 지 29일 만에 아들 집에 도착했다. 1947년 중반부터 38선 통행이 상당히 어려워졌으니 모자 모두에게 다행스런 일이었다. 38따라지 생활은 버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6.25가 터졌다. 남두용 부부와 처가에 상상도 못할 비극이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정훈장교 시절 남두용. 사진 우측이 남두용이다. (사진 제공: 윤명애)
남두용의 학도병 탈출 귀향길과 이향·월남길
아버지가 남긴 자서 박스
남두용은 은퇴 후에 본인의 일생을 회고하여 자서를 썼다.
이것을 관련 자료들과 함께 셋째 딸에게 맡겼다. 그녀는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2020년 코로나19로 바깥출입이 줄어들면서 선친의 자서 박스를 떠올렸다. 자서와 여러 자료들을 읽어보고는 정리하기 시작했다.
형제들의 앨범까지 뒤져 사진을 찾아 넣고 선친의 행적을 지도에 그리기도 했다. 몇 달이나 걸려 정리한 끝에 281쪽짜리 <어느 실향민의 수기>라는 책자로 제작했다. 형제들에게 책을 돌린 다음엔 선친의 월남 여정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나의 휴전선 답사여행을 알게 되자 주저 없이 동반을 청했다.
어느 실향민의 수기(남두용 자서 남명애 정리)(사진제공: 남명애)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 각기 다른 성격의 점령군이 들어앉자 서울과 평양을 원점으로 하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격렬한 정치적 인구이동을 야기했다. 북한 체제가 불편하면 남한으로 이동해서 극렬한 반북한이 되었고, 남한에서 부대끼면 북으로 넘어가서 더욱 날카로운 반남한이 되었다.
개인도 버겁고 불행했지만 두 개의 힘은 결국 무지막지한 비극의 전쟁으로 정면충돌을 했다. 남두용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연히 접하게 된 그의 일생에서 월남인의 생존 분투를 조심스레 읽었다. 당사자는 이미 고인이지만 그가 겪은 현실은 우리에게 아직도 살아 있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백마고지역 경원선의 남측 종점. 사진 속 인물은 남두용의 셋째 딸인 명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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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싫어서 목숨걸고 월남?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4]
백화점까지 있었던 월남 루트 도시 고랑포
38선 쉼터 풍경(2020년 늦여름 촬영)
폐허가 흉하게만 보이는 건 아니다.
폐허의 미학이 작동하여 사진기를 꺼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기 고향도 아니지만 뭔지 모를 회고감을 끌어내기도 한다.
소양호 조망이 참 좋은 곳에 있는, 지금은 폐업한 38선쉼터(춘천시 북산면 소양호로 650)도 그렇다. 소양호로는 소양강댐의 북안을 따라 꼬불꼬불 흘러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춘천에서 양구로 가는 외길이었으니 이 휴게소는 장사가 괜찮았을 것이다.
38선 쉼터에서 본 소양호 전망.
월남이란 말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잊힌 말이 아닐까 싶다. 경로는 달라졌지만 북에서 남으로 당국의 허가없이 자의적으로 이동하는 것으로는 탈북이란 말이 있을 뿐이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월북은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사람을 둘러싼 뉴스와 논란 때문에 기억이 되는 말이다.
남쪽으로 가는 아홉개의 길
아홉 개의 월남 루트
한국전쟁 이전의 월남 루트는 동서에 걸쳐 아홉 개가 있었다. 해상루트는 동해와 서해에 하나씩 있었고, 철도(해주선, 경의선, 경원선, 동해북부선)를 따라가는 네 개의 루트, 그리고 철도노선 사이로 세 개의 루트가 있었다.
서해에서는 황해도 북부와 평안도에서 배를 타고 연안(황해도)이나 인천 또는 한강하구에 하선했다.
동해에서는 원산 등지에서 주문진, 묵호, 포항, 방어진(울산), 부산으로 연결되었다. 철도를 따라 이동하는 루트 가운데 경의선은 북쪽의 금교역과 남쪽의 토성 구간을 걸어서 통과했다. 해주선을 이용할 때에는 학현역까지 와서는 청단까지의 산길 20km를 건너기도 했다.
경원선은 북에서는 복계역(철원역의 북쪽 세 번째 역)까지만 운행했기 때문에 복계역부터 걸어서 포천, 동두천 또는 고랑포구(연천)로 남하했다. 동해북부선의 종착역이었던 양양과 남쪽의 주문진 사이 28km 구간을 걸어서 월남하기도 했다.
백화점이 있을 정도로 번화했던 1930년대 고랑포.
고랑포 모습(2022년 봄 촬영).
월남 루트라고는 하지만 이미 누구나 이동하고 어떤 물자든 운송이 되는 기존의 교통망이었다. 다만 38선에서는 소련군과 북한 내무기관(남한의 경찰에 해당)의 초소를 피하기 위해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안내가 필요했다.
이로 인해 직업적인 월남 안내인과 짐꾼이 생겨났으니 이들이 월남루트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안내비는 300~500원 정도, 당시 북한의 노동자 월급이 1천원 수준이었으니 상당히 짭짤한 돈벌이였다. 짐꾼의 보수는 더 컸다. 북한에서는 38경비대 38보안대 자위대와 소련군이 월경을 통제했지만 월남 시도는 대부분 성공했다. 강원도 인제군의 경우 한국전쟁 이전에 노동당원 288명이 월남을 시도했는데 체포된 당원은 4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례가 당시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38선이란 남북의 인위적인 구분선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합의하여 우리도 모르게 그어졌다. 당장은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고 그해 8월 하순 38선에서 열차 운행을 차단하면서 행동의 제약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미군이 들어왔고 미군과 소련군이 만나 곳곳에 38선 초소를 세우면서 지리적인 구분선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제 월남과 월북이란 특별한 용어가 사람들의 이동에 크고 작은 제약을 주기 시작했다.
미군이든 소련군이든 처음부터 엄격하게 통제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내지나 만주 또는 소련의 연해주 등에서 귀국하거나, 북한 지역에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재산을 포기하고 맨몸으로 귀국하는 일본인도 적지 않았다. "모든 월남자는 즉각 ○○ 경찰에게 신고하여야 한다."고 38선의 남쪽 도로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일본어, 영어, 한글 순으로 쓰여 있었다. 많은 일본인이 귀국하기 위해 월남했음을 보여준다. 1946년 여름의 한 통계에는 47일간 38선을 통과한 사람 가운데 조선인 177명에 일본인 214명이었다.
월남 루트 중 하나인 고랑포구에서 본 북녘.
월남하려다가 체포되면 군인이나 군속은 소련군에게 인계되고, 그 외에는 구호소에 수용되었다. 북한은 내무기관의 지침으로 월경 행위를 처벌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1946년 5월 미군정은 무허가 월경을 금지했다. 그해 6~8월 콜레라가 전국에 퍼지자 북조선인민위원회는 38선의 육상해상 교통을 차단한다고 발표했다. 질병마저도 38선을 점점 더 얼어붙게 했던 것이다. 1947년에도 월남은 갈수록 어려워졌으나 월남 시도는 계속됐다. 그해 여름에는 북한의 식량난으로 인해, 12월에는 북한 화폐개혁으로 월남인이 일시적으로 급증하기도 했다.
1948년 9월 북한이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후에는 아예 형법에 불법월경죄가 명시됐다. 직업적으로 월경을 돕거나, 공무원이 월경을 도운 것도 처벌대상이었다. 남북이 제각각 정부를 수립하자 점령 지역 구분선을 넘어 적대국 국경이 되었다. 월남은 본인은 물론이요 가족의 안위가 걸린 결단이 되고 말았다.
남한과 미군은 북한과 소련군의 월경 통제에 비해 관대한 편이었다. 당시의 '삐라'에는 "국군 정방 50m까지 와서 무기를 내려놓고 '이승만 박사' 만세를 외치면 귀순으로 인정해 보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건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허술했으나 무작정 금지하기보다는 월남인들을 수용하는 태도이다.
그렇다고 파란불에 횡단보도 건너듯 월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쪽에는 38선을 따라 황해도의 청단, 경기도의 토성, 개성, 동두천, 의정부, 강원도의 주문진과 춘천에 수용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에도 수용소가 하나 있었다. 수용소의 위치는 위에 나열한 월남 루트와 조응한다. 월남자들은 일단 수용소에서 개인별 심문을 거쳐야 했다.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임을 알리는 표지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어왔을까. 학계의 추정치는 월남 150만, 월북 30만~35만이다. 1947년 6~7월에 개성 수용소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조사대상 31,859명 가운데 생활난(20,731명 65.1%)과 귀향(9,400명 29.5%)이 많았다. 구직과 진학이 각각 82명(0.3%), 892명(2.8%)이었고 상행위가 252명(0.8%), 가장 많을 것 같은 사상적 이유는 502명(1.6%)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적 사상적 이유가 있어도 굳이 발설하지 않은 월남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월남은 조사에서는 소수지만 영향력은 강력했다. 북한에서 인민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민주개혁과 토지개혁으로 친일 그룹과 지주층을 궁지로 내몰았다. 남한으로 와서는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 강렬한 반북한 조직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에게는 이미 원한과 복수라는 데칼코마니가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북한의 우익은 남으로, 남한의 좌익은 북으로 이동했다. 서울과 평양의 두 권력은 강력한 구심력과 원심력을 휘둘렀다. 자기편이 강화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반대편도 강력해지는 역설적인 과정이 계속됐다. 월남과 월북을 통해서 남한의 우익은 극우로, 북한의 좌익은 극좌로 치달았다.
통계로 잡힌 정치적 월남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생활난으로 월남한 빈농층이 가장 큰 비중을 점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38선을 가장 많이 넘나든 것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전문 38꾼들, 곧 밀무역 상인과 월경 안내인이었을 것이다.
상인들은 월경 안내와 짐꾼을 겸하기도 했다. 하나의 경제공동체였던 조선을 남북으로 분리하자 물자의 수요공급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작게는 38선으로 집과 논밭이 갈리기도 하고 시장이 38선 건너편에서 열리기도 했다. 크게는 남한에서는 중공업 화학제품이나 전기가 부족했고 북한에서는 경공업 생필품이 부족했다. 수요와 공급의 차이는 곧 이윤이었고, 이윤이 커질수록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은 늘어갔다.
전쟁 전이라지만 처벌 가능성이 상존하는 38선 지역에서도 생업이 활발했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가. 일제가 패망하고 38선으로 느닷없이 갈라진 후에도 백성들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반면 38선을 긋거나 그것에 기댄 상하좌우의 권력은 (미국이든 소련이든, 남한이든 북한이든) 시국을 폭발의 임계점으로 밀어가고 있었다.
월남이라는 격렬한 인구이동은 국가로서나 개인으로서나 핏물이 배어나오는 살벌한 현실이었다. 그 서사는 오랫동안 반공 웅변대회의 주된 소재가 되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젊은 역사학자들이 한국전쟁을 포함한 현대사를 역사학의 연구주제로 삼아 세밀하게 사실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상당한 연구 결과가 쌓여왔으나 대중적으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쌓여온 반공을 위한 반공교육 덕분인지 넓고 두꺼운 공포심이 무의식까지 적시고 있다.
무심히 강물이 흐르는 고랑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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