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7~8

온리하프 2024. 6. 25.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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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다던 거인, 열한번째 테러에 스러지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7]

 

여운형의 죽음에서 본 해방전후 좌·우익의 패착

 

몽양 여운형의 묘소

 

펜스와 정문이 1미터 남짓으로 야트막해 다가서는 사람을 편하게 맞아준다. 더 가까이 다가서면 눈에 들어오는 휘호는 血濃於水(혈농어수, 피는 물보다 진하다).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작은 돌을 던지는 듯하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106-1에 있는 여운형의 묘소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623-2에는 여운형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여운형의 남겨진 생과 사의 거리는 직선으로 35킬로미터밖에 되진 않지만 역사에서 그의 삶과 죽음 사이에는 훨씬 깊고 아픈 골짜기가 놓여있다.

여운형은 1886년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학문을 공부해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고 솔선하여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었다. 나라가 망하자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1932년 석방된 이후 그의 족적은 조선중앙일보, 조선농구협회, 조선축구협회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일제가 패망하던 바로 그날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세웠고 이후 조선올림픽위원회,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다가 1947년 7월 19일 테러로 사망했다. 그날의 죽음은 해방 이후 그가 당한 열한 번째의 테러였다. 여운형은 해방과 건국의 공간에서 좌우합작의 대표 인물이었다. 여운형의 당한 열한 번의 피습일지를 펼치면 1945~47년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제 패망 이후 26일, 운명의 시간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일제가 패망한 그해 8월 15일부터 미군이 중앙청에 성조기를 게양한 9월 9일까지의 26일은 식민지에서 점령지로 운명이 바뀐 조선에겐 절체절명의 기회였다. 길윤형 한겨레 기자는 이 시기를 집중 분석해 <26일 동안의 광복>(2020)을 펴냈다. 그는 "당대를 살았던 이들은 자신의 양심과 손익 계산에 따라 최선의 판단을 내렸지만, 결과는 끔찍한 파국"이라고 탄식했다. 파국의 하나는 건준의 좌우합작 실패다.

일본의 항복이 결정되자 조선총독부는 중도좌파인 여운형과 우파인 송진우에게 각각 치안협조를 요청했다. 송진우는 거절했지만 여운형은 중도우파인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8월 15일 당일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여운형은 그날 송진우를 두 번 만났고, 16일 우파의 이인이 여운형을 찾아 다시 논의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일제강점기 좌파와 우파는 갈등의 골이 깊었다. <동아일보>의 송진우와 <조선중앙일보>의 여운형은 견원지간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와중에 18일 새벽 1시경 여운형은 1차 테러를 당해 시골로 요양을 가야 했다. 일제의 탄압이 패전으로 급정거를 하자 '우리들 사이의 테러'가 시작된 것이다

 

여운형 부재 중에도 부위원장 안재홍은 우파 영입방안을 강구했다. 그러나 건준의 좌파, 특히 박헌영의 재건파가 강하게 반발했고 8월 24일 미군이 38선 이남을 접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를 계기로 좌파에 눌리고 밀리던 우파는 건준을 향해 거친 반격을 시작했다. 9월 4일 건준의 좌우합작은 실패를 선언했다. 항일투쟁이란 명분과 조직력에서 앞선 좌파는 미군 진주에 대처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했다. 헌법 초안도 없었고 공중의 합의절차나 과정도 없다시피 했다. 미군은 9월 9일 서울에 들어왔고 오후 4시 조선총독부의 항복문서를 접수했다. 중앙청에는 일장기가 내려오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그렇게 조선은 자신의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를 갖추지 못한 채 패전국 영토를 전리품으로 취하러 온 점령군을 맞았다. 이때 건준이 좌우합작의 단일한 정치조직으로서 미국과 소련을 상대했었어도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치달았을까. 안재홍은 당시를 회고하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좌우 쌍방이 국제정세에 너무 우원(愚遠)했고 사대주의적이었다"고. 이런 순간에 9월 7일 저녁 여운형은 두 번째 피습을 당했다. 운 좋게 행인들의 도움으로 구출됐다.

미군이 진주하고 우여곡절 끝에 임시정부는 11월 23일 뒤늦게 귀국했다. 김구는 미군에게 '정부나 정치기구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굴욕적인 각서를 써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여운형은 세 번째 피습을 당했다. 12월 초 휴양 차 들른 백천 옥천여관에 괴한이 침입했다. 누군지 알 듯 모를 듯한 그들은 집요했다.

 

여운형 생가 기념관 전시물

 

1945년 12월 16일부터 열흘 동안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이 열렸다. 신탁통치 5년 방안이 알려지자 조선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동아일보>가 '소련은 신탁통치,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이라는 대형 오보를 내는 바람에 '반탁'은 어처구니없이 반소 감정으로 폭발했다. 우파가 좌파에게 찬탁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정국은 요동쳤다. 그런 와중에 1946년 1월 여운형을 대상으로 네 번째 테러가 있었지만 출타 중이라 모면했다.

미국은 1946년 2월 우익 인사 중심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을 설치했다. 미국은 여운형을 초치했으나 불참했다. 그에 맞서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의장단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을 결성했다. 민주의원-민전이라는 좌우대립 구도를 증강시켰다.

 

3월말 서울에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애초 합의는 불가능했다. 미국은 "1차 목표는 소련의 한국 지배를 막는 것이고, 수년 내로 한국이 완전한 독립을 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친소정부 수립이 확고한 목표였던 소련 역시 임시정부 각료 명단(1946.3.15)까지 훈령으로 내려보냈다. 수상 여운형, 부수상 김규식 박헌영. 소련이 임시정부 수반으로 거론했기 때문일까. 여운형은 1946년 4월 18일 관수교 위에서 괴한들에게 또 습격을 당했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터뜨려 당시 최대 정당이었던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했다. 검거령, 체포, 피신, 월북이란 말이 남한에 불꽃처럼 튀었다. 민전도 지하로 들어갔다. 혼란 속에 민전 공동의장 여운형은 북으로 가서 조만식, 김일성 등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모색했다. 이후에도 다섯 차례 방북해 어떻게든 좌우-남북 합작을 이루어보려 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됐고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외치고 나왔다. 여운형은 통일은 자율적으로 하되 정부는 국제협조 하에 수립하자며 5월 25일 중도우파 김규식과 우파 원세훈과 함께 좌우합작을 위한 회동을 가졌다. 그리고 5월 하순 밤 10시경 종로에서 여섯 번째 습격을 당했다. 격투가 벌어졌고 행인들이 여운형을 구출했다. 좌우합작은 죽임을 당할 일이라는 뜻이었을까.

여운형과 김규식은 허헌 김원봉과 회동하며 좌우합작의 외연을 넓혀가던 중 7월 17일 일곱 번째 테러를 당했다. 이번에는 괴한들이 신당동 야산으로 납치했으나 벼랑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 미군정 경무부는 암살 미수범 3명을 체포했으나 이들의 처리는 오리무중이었다. 

좌우합작의 여정

 

여운형이 피살 당시 입었던 피묻은 옷.

 

여운형은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우파에서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 좌파에서 성주식·정노식·이강국이 참여했다. 양측을 중재해 좌우합작 7원칙을 10월 7일 발표했으나 이날 여운형은 여덟 번째 테러를 당했다. 자택 문 앞에서 4명에게 납치돼 2일간 감금됐다가 스스로 결박을 풀고 탈출했다. 영화라 해도 이렇게 지겹도록 반복되는 테러 스토리를 연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운형을 향한 테러는 픽션보다 지독했다.

이어 1947년 3월 17일 여운형의 자택 침실이 폭파됐으나 무사했다. 5월 12일 저녁 서울 혜화동에서 그가 타고 있던 자동차에 총탄이 날아들었다. 범인은 체포됐으나 처리는 또다시 흐지부지됐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5월 20일 서울에서 열렸다. 7월까지 협의단체에 반탁 단체를 넣느냐 마느냐로 입씨름만 질리도록 했다. 미소건 남북이건 좌우건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두 점령국의 정책이 그러했으니 합의될 리 없었다.

운명의 날이 닥쳤다. 1947년 7월 19일 '좌우합작 파괴'만이 민족의 살 길 또는 자신들의 생존 필수조건이라고 여긴 누군가가 열한 번째 테러를 가했고 여운형은 숨을 거두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구심점을 잃었다. 9월 17일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고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에 해체됐다. 끈질긴 테러에도 여운형은 끈질기게 살아났지만 결국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좌우합작도 죽었다.

누가 여운형을 죽였나    
 

 

내부가 단합해야 외부적인 분단압력에 그나마 버텨봤을 것이나 내부가 이리도 심하게 대립했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크게 보면 통합 정치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선 말기는 차치하더라도 독립운동에서도 그랬다. 국내외 민족유일당 운동도 실패했다. 신간회 해체는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임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분열이었다. 오죽하면 1944년 목숨 걸고 일본군에서 탈영해 임정을 찾아간 장준하는 "다시 일본 항공대가 되어 임정 청사를 폭격하겠다"며 절규를 했을까.

항일투쟁을 피로 물들이며 조선의 좌파는 선명성과 조직력이 몸에 배었다. 좌파의 진짜 조직력은 우파를 끌어당겨 품는 것이어야 했다. 우파는 지식과 교양과 재산이 있었으나 투쟁을 우회하거나 아예 친일로 붙어버렸다. 우파의 진짜 목소리는 기득권을 절제하면서 공감대를 확장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좌파는 투쟁실적을 발판으로 우파의 친일을 공격했다. 우파는 재산의 기득권에 눌러앉아 좌파를 빨갱이라고 공격했다. 양쪽 모두 통합의 구심력이 아니라 대결의 원심력만 진저리치듯 쏟아냈다.

여운형을 누가 죽였는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죽였다. 일본도 미국도 소련도 아닌, 바로 우리가 우리 손으로 죽였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가 아니라, 서로 살아서 밀고 당기기를 해야 했다. 그러지 않은 결과는 적대적 공멸이었다. 한국전쟁이 준 가장 크고 아픈 교훈이다. 여운형의 묘소 정문에 장식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다시 쳐다본다. 여운형의 죽음은 피가 물보다 진하지 않았다는 당시의 역사를 직설적으로 말해준다. 그래도 나는, 멈칫멈칫하면서도 그의 말에 공감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최소한 수백만이 죽어나가는 공멸에 빠지지 않을 만큼은 진해야 한다.

 

여운형 수묵화(작가 유준)

 
 

"개가 떠나자 돼지가 왔다" 소름끼치게 닮은 두 섬의 비극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8]

 

제주4.3과 타이베이2.28, 아름다운 풍광 속 슬픈 역사

제주를 여행하면 제주4.3의 흔적 하나쯤은 스치게 된다. 그만큼 유적이 많고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나는 그날에 맞춰 제주를 여러 차례 여행했다.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과 4.3의 아린 역사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당혹스럽지만 익숙하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제주4.3을 가장 낯설게 마주친 것은 제주가 아닌 다른 섬, 바로 타이완이었다.

코로나19로 국경이 닫히기 직전인 2019년 11월 나는 타이베이의 2.28기념관을 찾아갔다. 지하철 출구로 나와 기념관 건물이 보이는 순간, 입구의 큼직한 야외 조형물이 내 망막에 충격적으로 꽂혀버렸다. 4.3 JEJU! 타이완의 2.28사건을 찾아왔는데 제주4.3이라니! 2.28사건(2.28대도살사건, 2.28기의라고도 한다)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찾아간 길이지만 그곳에서 제주4.3을 마주칠 줄이야.

 

타이베이 2.28기념관

 

타이베이 2.28기념관

 

2.28 전시관을 둘러보고 마지막에 찾아간 제주4.3 특별전시관은 '아름답고 슬픈 섬'(島嶼的美麗與悲傷)이란 짧고도 강렬한 어구로 시작했다. 답사여행을 준비하면서 타이완의 지인에게 추천받아 읽었던 책 <대만, 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주완요 지음)와 같은 제목이었다.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 기마경찰에 의해 한 아이가 다친 사고로, 2.28사건은 그 이틀 전인 2월 27일 타이베이 전매국 단속반원이 노점상 여성을 폭행한 사건으로 시작됐다. 사태의 결말은 참혹했다. 제주에선 2만5천 명에서 3만 명이, 타이완에서는 2만8천 명이 죽었다. 서로 다른 두 섬에서 너무 유사한 일이 평행선을 그렸던 것이다.

 

해방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는 항복했고 제주도는 35년 동안의 일제 식민지 시대가 끝났다. 조선은 해방과 독립이라 착각했지만 미국과 소련에게 분할 점령됐다. 미군은 9월 28일 제주도에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고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제주도청에서 군정을 시작했다.

같은 날, 타이완도 50년 동안의 일제 식민지배는 끝났고 곧이어 중화민국의 국민당 군대가 진주했다. 50년 동안 접촉하지 못했던 '낯선 조국' 중화민국에 귀속됐다. 푸젠성 성장이던 천이(陳義)가 타이완 행정장관으로 임명됐다. 타이완은 다른 성과는 달리 행정장관이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독점하고 주둔군 사령관까지 겸직했다. 군정과 다를 바 없었다. 중화민국은 타이완 사람들을 일제의 노예였던 이등공민 정도로 간주한 것이었을까.

식량

제주도나 타이완이나 기존체제의 심장이 정지되자 크고 작은 문제가 연이어 발등에 떨어졌다. 당장 식량이 부족했다. 제주도는 1946년 보리마저 흉작이었고 한쪽에서는 굶어죽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위에 미군정은 미곡수집령까지 내렸다. 공출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던 일제강점기가 되살아난 듯했다.

타이완도 태평양전쟁 동안 식량생산이 이미 대폭 줄어 있었다. 천이 행정장관은 타이완에 전매국과 무역국을 설치해 경제를 독점했다. 장뇌, 성냥, 담배, 술, 도량형 등을 전매, 곧 정부의 독점으로 묶었고, 타이완 전역의 운수를 통제하며 무역과 공업도 독점했다. 정부의 독점과 작은 마찰이라도 일어나면 민간부분을 가혹하게 단속했다. 게다가 해방 이후 1년여 만에 물가가 자그마치 100배나 올랐다.

 

귀향

제주도에는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을 포함해 6만여 청장년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타이완에도 일본군에 끌려갔던 젊은이 10만여 명 돌아왔다. 두 섬 모두 쌀독은 비어있었고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다.

 

외지인

미군정은 조선총독부의 관리와 경찰을 행정조직으로 재생시켰다. 친일은 반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곤봉을 휘두르며 거리를 활보했다. 1947년에는 서북청년단이 대거 제주도로 몰려들었다. 외지에서 건너온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횡포는 제주 사람들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타이완도 그랬다. 인사부터 차별이 극심했다. 타이완의 고위직 21명 가운데 단 한 명, 중간관리 316명 가운데 겨우 17명만이 타이완 사람이었다.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은 타이완 사람과 같은 업무를 해도 월급을 두 배로 받아갔다. 국민당 군대는 조직폭력배와 다를 바 없었다. 걸핏하면 권총을 꺼내들었고 강탈, 공갈, 협박, 겁탈이 횡행했다.

반공은 전가의 보도이자 조자룡의 헌 칼이었다.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든 공산당 딱지를 붙이고는 끌고 가서 고문을 가했다. 관리들은 술집과 도박장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검찰관이나 법원장과 같은 고위직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완 사람들은 이들을 '도시의 호랑이'(市虎)라며 공포에 떨었고, "개(일제)가 떠나자 돼지(국민당)가 왔다"며 탄식하고 분노했다.

아름다운 섬 제주와 타이완이 일제의 지배에서는 해방됐지만 백성들에게는 아름다운 생활이 오지 않았다.

 

성산 터진목의 학살터 표지와 일출봉

 

 

 

 

촉발

 

1947년 3.1절 기념식과 시위가 이어지는 와중에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밟혔다. 구경꾼들이 항의하며 쫓아가다가 느닷없는 총성에 쓰러졌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를 포함해 여섯 명이, 그것도 등에 총을 맞아 죽었다.

제주에서 3.1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 타이완 전매국 단속반원이 담배 노점상 여성 한 사람을 폭행했다. 구경꾼들이 강하게 항의하자 총을 쏘았고 한 사람이 죽고 말았다. 제주도나 타이완이나 경찰과 공무원의 인명사고를 해결하라고 시위를 하면서 그동안 쌓인 분노가 불붙었다. 섬 전체로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악화

1947년 3월 10일 제주는 총파업을 했다. 공무원은 물론 미군정청 통역단이나 현직 경찰관도 파업에 동참했으나 열흘 정도 지속되고는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파업 후 한 달 만에 제주 사람 5백여 명이 잡혀갔다. 육지에서 증파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며 많은 사람들을 끌어다가 고문을 가했다. 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타이완에서도 시위는 급속히 확대됐다. 파업은 물론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상인들의 철시 속에 타이베이 시민들은 전매국과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에 몰려가 거세게 항의했다. 천이 행정장관은 계엄을 선포하고 곳곳에 군경을 투입했다. 양측의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고문

1948년 3월 제주의 조천지서와 모슬포지서에 끌려갔던 두 청년이 고문치사를 당했다. 한림에서는 초주검이 돼 끌려가던 청년이 총살을 당하는 사건도 터졌다. 세 곳의 주민과 학생들이 장례를 치르고 분노의 시위를 벌였다. 미군정이 사건을 감찰했지만 유해진 제주지사는 유임됐다. 1948년 5.10 남한 단독선거를 밀어붙이던 미군정은 유해진이 필요했을 것이다.

봉기

제주의 남로당은 탄압이 강해질수록 강경하게 저항했다. 결국 1948년 4월 3일, 350여 명의 남로당 무장대가 봉기를 일으켰다. 경찰서와 우익인사들을 공격해 경찰관 넷과 민간인 여덟 명 그리고 무장대 둘이 사망했다. 미군정과 국방경비대와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대대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타이베이 사람들은 전매국에 불을 지르고 일부는 군의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했다. 이들의 시위는 방송을 타고 타이완 전역에 신속하게 알려졌다. 시위와 저항은 순식간에 타이완 전체로 번져갔다.

협상

제주의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중령)은 미군정의 실정이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4월 28일 무장대와 협상을 해서 전투를 중지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협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일 우익 청년들이 오라리 마을을 불 지르고 이를 남로당 무장대의 소행이라고 발표하고는 강경토벌에 나섰다. 김익렬은 해임돼 여수로 전임됐다.

타이완에서는 3월 2일 타이베이 시민들이 먼저 2.28사건처리위원회를 조직했다. 천이 행정장관은 사건처리위원회에 관리를 참가시켜 수습방안 협상에 응하기는 했다. 제스처였다. 협상으로 시간을 끌면서 뒤로는 장제스에게 진압군 파병을 긴급 요청했다.

파병

제주도에 육지의 경찰과 군대가 증원되자 죽음이 하늘과 땅과 바다를 새카맣게 덮었다. 제주 경찰은 1947년 초에 330명이었으나 3.1사건을 예상한 듯 충남북 경찰 100명이 이미 '응원경찰'로 제주도에 도착해 있었다.

3.1사건이 터지자 바로 목포 경찰 100명을, 보름 후에 전남북 경찰 222명을 제주도로 출동시켰다. 1948년 4.3이 터지자 전남경찰 100여 명이 급파됐다. 5월에는 수원의 국방경비대 11연대가 제주도에 상륙했다. 서북청년단도 몰려들었다. 12월에는 서북청년단 620명이 경찰, 곧이어 새로 건너온 단원 250명은 군과 경찰로 나누어 채용됐다.

타이완에서는 파병요청 3일 만에 상하이에 주둔하던 21군에서 2개 사단을 파견해 곧바로 타이완 해안에 상륙했다. 도살이 시작됐다.

 

제주4.3 행방불명자 위령비

 

타이베이 2.28기념관

 

학살

제주는 1948년 11월부터 4개월간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초토화했다.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원동리, 세화리, 토산리, 다랑쉬굴, 조천면의 자수자, 의귀국민학교 수용 주민, 북촌, 동광리, 상창리, 봉개지구 육해공 합동작전... 지명 하나에 오십 내지 수백 명씩 죽어나갔다. 소위 군사재판이란 절차를 통해 사형이 집행된 것도 수백 명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1950년 한국전쟁 직후인 8월에는 제주시, 서귀포, 모슬포 등지에서 예비검속에 걸린 주민이 수백 명씩 학살당했다.

타이완에서는 2개 사단이 상륙하고 5월 16일까지 두 달 동안 타이완 전역을 휩쓸었다. 진압이란 이름의 생지옥이었다. 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비정성시>(悲情城市)다.

방언

제주도 지방어는 외지인들에게 낯설었다. 중국의 지방어는 문자를 공유하긴 해도 말로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식민지 50년 동안 타이완은 대륙과 접촉이 없었으니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들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와 다를 바 없었다. 제주도 토벌대나 타이완 진압군의 말을 즉시 알아듣지 못해 죽은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밀항

제주 사람들은 학살의 광풍이 멈추지 않자 제주도에서 탈출했다. 밀항도 많았다. 생업을 찾아 또는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온 남의 땅 일본으로 적지 않게 밀항을 했다. 오사카는 제주 사람들에게는 제2의 제주도가 됐다. 훗날 오사카의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이 중심이 돼 세운 통국사란 절이 있다. 그 절에는 제주4.3희생자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타이완은 2.28사건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이민을 갔다. 그것은 생존이고 도피였고 추방이었다.

 

순이삼촌 문학비

 

침묵

타이완이나 제주도나 무참하게 죽은 사람들은 원혼으로 떠돌았고 가족들은 연좌의 사슬에 묶여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현기영이 1979년 소설 <순이삼촌>로 4.3을 건드리자 그의 손톱은 고문에 짓이겨졌다. 40년 동안 완벽하고도 절대적인 침묵을 강요당했다.

계엄령 치하의 타이완도 그랬다. 타이완 사람들은 타이완 자체의 역사를 배울 수도, 타이완 고유의 언어도 말할 수 없었다.

해금

1987년 4.3과 2.28은 비로소 해금됐다.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이뤘고 타이완은 계엄령을 해제했다. 공권력에 의한 두 학살 사건은 어렵사리 공론화 과정을 거쳐 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과

두 나라 국가원수는 자국의 국가폭력을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 지금은 기념관과 유적지 등을 통해 참극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타이완2.28과 제주4.3은 쌍둥이였다. 망망대해 3천km나 떨어진 두 섬의 비극은 어찌 그리 똑같았을까. 너무도 아름다운 풍광 속에 깊고 깊은 슬픔을 품고 있는 섬이다. 금년 1월에 나는 다시 타이완으로 역사기행을 갔다. 이번엔 가오슝의 2.28기념관을 찾았다. 가오슝이 겪은 참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21세기에는 제주와 타이완, 거기에 또 하나의 아름답고 슬픈 섬 오키나와가 서로 연대해 교류하고 있다. 이들의 역사를 보면 세 섬으로 둘러싸인 동중국해는 동아시아의 슬픈 내해(內海)로 보인다.

 

제주도-타이완 지도

 

집터만 남아 있는 사라진 마을 -곤을동

 

타이베이 2.28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