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의 길

"DMZ 평화의 길 34코스" 트레킹 마지막 회차(2019.7.4)

온리하프 2024. 11. 12.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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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의 고성 DMZ 평화의 길 방문기-

 

DMZ 평화의 길 고성구간 27일부터 민간에 개방
사전신청받아 日200명 체험..32대 1 경쟁 추첨

 

4·27 남북정상회담 1주년인 27일 고성군 'DMZ 평화의 길' 투어에 참가한 시민들이

길 초입에서 남쪽 해안가를 바라보고 있다.<이미지:연합뉴스>

 

 

분단 후 70년 가까이 민간 접근이 불가능했던

강원도 고성군 동해안 비무장지대(DMZ) 일대 둘레길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통일전망대에서 출발해 해안 경계를 위해 둘러친 철책선을 따라 바닷길을 걸은 후

군사분계선에서 1.5㎞ 가량 떨어진 금강산 전망대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2018년 열린 4ㆍ27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맞이한 27일부터

운영에 들어간 'DMZ 평화의 길' 고성 A코스에는

전국 각지에서 미리 신청해 선정된 이들이 참가했다.

 

해안산책로가 포함된 A코스가 20명,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평화의 길 고성 B코스가 80명 정원으로

오전ㆍ오후에 각 한 차례씩인 점을 감안하면 하루에 200명만 다녀갈 수 있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서

"이제 곧 비무장지대는 국민의 것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고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해 국방부ㆍ통일부ㆍ행정안전부ㆍ환경부 등

관계부처간 협의에 따라 걷기체험길이 조성됐다.

 

DMZ 평화의길 고성 A코스

 

 

신원조회→통일전망대 인원 확인 후 해안로 쪽으로 내려와 길이 시작된다.

목재데크 산책로를 따라 내려오면 가장 먼저 동해 북부선 철길과 통전터널이 있다.

 

과거 일제시대 수탈을 위해 지어졌으나 한국전쟁 이후 50여년간 폐쇄됐었다.

이후 2000년 들어 운행재개에 남북간 협의가 있었고 철도운행이 이뤄진 적도 있으나

2007년 5월 마지막 운행 후 현재까지 멈춰서 있다.

 

고성통일전망대 인근에서 바라본 DMZ 평화의 길 인근 모습.

수풀이 우거져 작은 섬처럼 붙어있는 게 송도다.<이미지출처:연합뉴스>

 

 

강원도 고성군 DMZ 평화의 길 일대<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후 해안로를 따라 걷다보면 오른쪽으론 흔히 접하는 동해 바닷가 풍경이,

왼쪽으로는 풍성한 수풀이 우거진 게 눈에 들어온다.

여느 바닷가와 다를 바 없는듯하지만 바닷가쪽으로는 두터운 이중 철책이,

왼쪽에도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철망을 쳐두고

지뢰주의 경고문을 곳곳에 붙여둔 걸 보면 DMZ 인근이라는 게 실감난다.


해안로를 걷다보면 남방한계선을 지나 유엔사와 우리 정부의 고지문이 눈에 띈다.

2003년 지뢰폭발로 형태만 겨우 알아볼 법한 굴삭기를 그대로 유지해놨으며,

여름철 폭우 등으로 지뢰가 도보코스로 유입되는 걸 막기 위해 앝은 돌담을 쳐뒀다.

 

도보코스 도중 설치된 대전차방벽은 남방한계선에서

북쪽으로 200미터가량 떨어진 곳으로 얕은 언덕식으로 조성돼 있다.

말 그대로 북측 전차공격을 막기 위한 용도지만

주변 풍경을 더 잘 볼 수 있는 쉼터 역할을 한다.

 

이후 DMZ 통문까지 걸은 후 금강산전망대까지는 다시 차로 이동한다.

 

금강산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강산 구선봉과 감호<이미지출처:연합뉴스>

 

 

전망대라고는 하지만 상시로 관람객을 받는 곳은 아니다.

봄ㆍ가을 미리 신청을 받아 제한적으로 관람객을 받아왔다.

금강산전망대에서는 남북간 합의에 따라 없애고

한 개씩 만 남긴 감시초소(GP)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력이 좋은 이들은 말뚝으로 해둔 군사분계선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선녀와 나무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호수 감호,

금강산의 동쪽끝 구선봉,

해금강 일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이날은 전일 비가 내린 후 날씨가 맑아

전망대 북서쪽으로 채하봉 등 금강산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아직 눈이 남아있었다.

 

금강산전망대에서 취재진과 군 관계자가 금강산을 바라보고 있다.<연합뉴스>

 

 

남북한 합의에 따라 감시초소(GP)를 없애기로 했고 각 한개씩만 보존해뒀다.

사진은 우리쪽 보존GP.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수십대 1의 경쟁을 거쳐 이날 참가한 이들은 설레면서도

북쪽 땅을 볼 때면 감회에 잠기기도 했다.

 

이날 오전 A코스 일행으로 참여한 김영환(75)ㆍ송해숙(70) 부부는

"아침 서울에서 출발하면 늦을듯해 어제 인근 콘도에서 머문 후 오늘 일찍 왔다"며

"서해 강화도 일대부터 이곳 동해까지 가로질러 DMZ 일대를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간에 처음 개방되기 하루 전에는

문 대통령이 전국경제투어 일환으로 강원도 일대를 찾아 이 해안길을 다녀갔다.

문 대통령은 도보코스 중간에 설치된 소망나무에

'평화가 경제다!'라는 문구를 직접 적어 달아놓았다.

 

정부는 이번에 개방한 고성 구간에 이어

백마고지 전적비에서부터 DMZ 남측 철책 길을 걷는 철원 구간,

임진각에서 시작해 도라산 전망대를 경유해 철거 GP를 방문하는 파주 구간도

단계적으로 개방할 계획이다.


김현환 문체부 관광정책국장은

"평화의 길을 통해 남북간 평화, 통일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가졌으면 한다"

"나머지 구간에 대해선 이번 고성구간에 대한 국민반응을 토대로 협의해 나갈 것"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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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고성군

DMZ 평화의 길 34코스

통일안보공원→명파초등학교→제진검문소→통일전망

길이:11.4km   소요시간:4시간   난이도:보통

 

 

 

 

 

DMZ 평화의 길 34코스

 

마지막 34코스는 2019.7.4에 갔다온 글이 있어 그것으로 대신한다.

윗 지도의 무송정섬 위치가 마차진리 종점 즉, 금강산콘도가 위치한 곳이다.

 

블로그 글을 살펼보던 중 깜짝놀랐다.

사진 설명은 고사하고 트랭글, 오룩스 맵스 GPX트랙,

장소의 위치 그리고 방문한 날짜와 시간 등 기재된 것이 없다.

 

블로그 작성하면서 이런 경우는 없었는 데...

그 당시에 도대체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글 올린 순서의 날짜를 확인하니 2019.07.04로 되어 있다.

5년 전 기억을 되살려 재구성할 만큼 뇌세포가 충분치 못하니~

사진을 보며,  감으로 산행기를 쓴다.

 

 

 

 

그날 승용차를 끌고 갔으나 어디에서 이 강쥐녀석들 만났는지...

아마도 주차한 장소로 짐작된다.

 

 

 

 

귀여운 녀석, 더 못놀아줘 아쉽다.

 

 

 

 

 

평화의 길 탐방 시간은 오후라 화진포 일대를 둘러보고~~

 

 

 

 

화진포 관광 안내소

 

 

 

 

화진포해수욕장과 금구도(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산 1)

 

 

 

 

중국여행을 가면 유명 산 정상에 열쇠가 대단히 많은 데,

그것을 보고 따라하는 건가? 보기싫던데...

 

아름답고 시원한 망망대해 앞에서 연인은 사랑의 약속을 기념한다.

 

 

 

 

역시 소나무는 우리나라 풍경의 상징성이 짙다.

 

 

 

 

화진포의 성(김일성 별장)

 

6.25 때 최초 건물(1938)이 훼손되었다는 데~

비슷한 상태로 복원(2005) 되었다..

 

 

 

 

2005년 복원된 화진포의 성(김일성 별장)

 

 

 

 

내부 모습

 

 

 

 

화진포해수욕장

 

 

 

 

화진포 호수

 

 

 

 

화진포 콘도

 

 

 

 

화진포 콘도는 국군에서 운영한다.

현역, 군무원, 예비역, 비회원에 따라 가격 차이가 있다.

 

잔여객실에 한하여 비회원 현지예약 이용 가능이라니?

그것도 4일 전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기붕 부통령 별장

 

청주군 청천면 후평리의 몰락한 양반가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17대손이었으나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13대조에서 끝이 났고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전성군 이대는 그의 12대조였다.

 

증조부 이회정(李會正)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흥선대원군의 수하에서 활약하여 판의금부사와 예조판서에까지 올랐으나

임오군란 직후 흥선대원군이 잠시 정권을 잡았을 때

흥선대원군의 명을 어기지 않고 명성황후의 국상을 반포하였다.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중국으로 끌려간 이후 탄핵을 받고

민씨 정권에 의해 흥선대원군 무리라며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후 그의 가계는 몰락하여 어렵게 지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할아버지 20세, 아버지 30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7세였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했으며 가난한 환경에서 몸이 병약했다.

소학교에 다닐 때는 며칠 안있어 죽을 아이를 무엇하러 학교에 보내나 하고

손가락질하는 이도 있었지만 노래를 잘 불러서 여기저기 뽑혀다니기도 했다.

 

 

 

 

안보전시관으로 개관.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아이오와 주의 데이버 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호텔 일, 농장 일, 접시닦이 일 등을 하면서 어렵게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신민회 집회에서 박명삼(朴明三)의 딸 박마리아를 만나 1931년 약혼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되었지만

1935년 이기붕이 귀국하면서 다시 재회하여 결혼했다.

 

귀국 후 이기붕은 중추원 참의 최남이 경영하던 종로 국일관 지배인을 지냈다.

당시 아내 박마리아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교수였기 때문에

교수 남편이 을 운영한다고 말이 많았고 기사화도 되었다.

2남 1녀 (이강희, 이강석, 이강욱)를 두었으며 다방 <종로>를 경영하기도 했고

건축청부업사무소 등 잡다한 일을 거쳐 허정과 함께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8.15 광복을 맞았다.

 

 

 

 

이렇게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던 사람이었는데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의 개인 비서가 된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아내 박마리아가 출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이승만 주변에 붙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프란체스카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중앙대 설립)과 불화가 있었던 틈을 탔다.

임영신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돈암장을 들락날락거리자

임영신과 이승만이 불륜 관계라고 소문났는데

해외에 있던 프란체스카가 귀국하고 임영신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시켰다.

프란체스카를 만나기 전 이승만은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유학 중이던 임영신에게 한때 청혼했었지만 거절당했다.

 

국외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독립운동가들이 귀국시 처를 버리고 오는 일이 많아

임영신이 돈암장에 들락거린게 문제가 되었던 것.

 

박마리아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분을 다져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별 볼 일 없었던 남편을 정계에 들이는데 성공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겠다고 3.15 부정선거라는 최악의 사건을 터뜨린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2달여 전 급사해 이승만 재선은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당시 나이로 무려 86세였던지라

대통령 임기를 끝까지 마칠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통령은 대통령직 승계가 예약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고

부통령 자리에 당선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것이다.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나자 4월 22일 국무회의에서는 이기붕을 사퇴시키기로 합의~

국방장관 김정렬, 법무장관 홍진기에게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4월 19일 성난 군중이 서대문의 저택으로 몰려온 것을 본 이기붕은 겁을 먹고

그들의 눈을 피해 경기 포천의 육군 제6군단 사령부로 가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고 식사도 못해서 미군이 준 주스로 연명했으며

대화도 박마리아가 옆에서 말을 알아듣게 설명해줘야 겨우 했다고 한다.

 

이미 1957년부터 이기붕은 각부신경통과 협심증을 앓고 있어서

미국 월터리드 육군 병원 등 여러 병원들을 돌아다녔지만 점점 병세가 악화되었다.

 

 

 

 

이기붕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화장실도 가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 상태라

휠체어를 타야 했고 집 밖으로 나갈 때는 휠체어 밑에 간이 대소변기를 달고 다녔다.

 

4월 25일 오후 6시에 자택 뒷문으로 빠져나와 육군 6군단으로 피신할 때에도

대소변을 보기 위한 변기와 신경통을 앓는 다리를 덮을 담요를 챙길 정도였다.

 

그래서 사실상 이기붕은 부통령 역할을 거의 할 수가 없었고

부통령 역할은 그의 아내인 박마리아가 대리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아내인 프란체스카와 절친한 사이였고

권력욕이 강해서 사실상 비선 실세나 다름없었다.

 

김정렬 장관의 연락을 받고 서대문의 집으로 돌아간 이기붕은

김정렬 장관으로부터 부통령 당선자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기붕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잠시 후에 난 그럴 재목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잘되었다는 말을 했다.

 

김정렬 장관은 중앙청으로 가서 이기붕의 사퇴 수락 소식을 전했고 

이기붕 비서실장 한갑수를 시켜 사퇴 성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기붕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부통령에서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고

김정렬 국방장관이 설득하고 나서야 겨우 동의했다.

 

하지만 다음날 신문 기사에 이기붕 사퇴가 아니라 '사퇴 고려'라는 기사가 실렸다.

국무위원들은 김정렬 장관에게 항의했고 확인 결과 자유당 강경파들의 반발로

사퇴 성명서가 사퇴 고려 성명서로 후퇴한 것이 드러났다.

 

국민들은 이 '사퇴 고려'를 시간을 벌려는 얄팍한 수작으로 평가했고

계엄령 선포 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던 국민들 분노에 다시 불을 당겨버린 꼴이다.

 

 

 

 

여론이 끓자 다음날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이라는 의사를 발표했지만

결국 4월 25일에 이기붕의 집은 파괴되었고 시민들은 가구들을 가져나와 불태웠으며,

이기붕은 다시 6군단 사령부로 달아났다가 경무대 별관 36호실로 옮겼다.

 

그리고 다음 날인 4월 26일에 이승만은 하야를 선언했고

다음 날인 4월 27일에 결국 하야함으로써 

이기붕의 마지막 방패막이었던 이승만 정부는 붕괴되고 말았다.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난 지 9일째되던 1960년 4월 28일 새벽 5시 20분

경무대 비서동 36호실에서 당시 육군 소위였던 장남 이강석에 의해

이기붕을 포함한 가족들은 모조리 권총으로 살해되었고 이강석도 자살했다.

 

향년 63세. 참으로 비참한 최후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날 아침 미국 대사 맥카나기는

이기붕 내외의 망명 신청이 수락되었다는 미국 정부의 뜻을 전달한 상태였다.

 

이기붕과 가족들 시신을 수습해 1960.04.30 수도육군병원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이승만 내외와 허정  내각 인사, 여야 국회의원들이 망우리 공동묘지에 모였다.

 

1970년대까지 이기붕 비서 등 지인들이 망우리에서 추모 활동이 확인되며,

1976년 고양시와 파주시 경계에 있는 명봉산 자락의 한 사설묘지로 이장했다.

 

 

 

 

이기붕의 가문인 효령대군파 종중에서 가끔 제례를 지내지만

묘지 관리비도 내지 않아서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2008년경부터 미국에서 이기붕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한 여성이

거액의 관리비를 보내서 석축도 새로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몇년 후 끊겼다.

제1공화국의 이기붕 일가.

왼쪽부터 장남 이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이강욱.

이강석과 이강욱 위에 이강희(李康姬, 1935.12.19~1949.5.31)라는 딸이 있었지만

이화여중 2학년 때 사망해서 사진에는 없다.

 

 

 

 

화진포 호수에는 많은 역사가 잠들어 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십 년 가는 권세 없고, 열흘 붉은 꽃은 없다.

 

 

 

 

날씨가 너무 좋다.

군사분계선 넘어 북녘의 풍경은 어떤 모습으로 내게 전해질까?

많이 기대가 된다.

 

 

 

 

화진포 해수욕장

 

 

 

 

좀 떨어져 있는 이승만 대통령 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20년 일본이 현상 수배 중임에도 임시 대통령으로서 상해를 방문하려는 친구 이승만에게 밀항을 주선해 주었던 보스윅은 이승만 화와이 영결식에서 고인의 얼굴을 덮은 베일을 젖히고 이승만의 이마를 짚고 울부짖었다.

 

 "I Know You! I Know You!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해방 후 70 노구를 이끌고 좌우 이념으로 갈라진 민심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로 단결시켜 한반도 공산화 음모인 신탁통치와 좌우합낙을 극복한 건국 위업, 오세를 등에 업은 북한의 6.25 남침을 막아내어 자유를 수호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국토재건에 온 힘을 다했던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 체류 중 벌써 90을 바라보며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1962.03.17 평생을 바쳐 사랑한 이 민족과 강토를 다시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더 있으면 비행기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귀국길에 나섰다. 그러나 당일 아침 총영사가 찾아와 정부의 귀국만류 의사를 전하자, 충격을 받은 이 박사는 그날 이후로 휠체어에서 두 번 다시 일어설 수가 업게 되었다.

 

1967.07.09   00;35

프란체스카 여사와 아들 이인수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박사는 화와이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만 90세, 봉건시대인 조선조 말에 태어나 자유롭고 근대화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지켜낸 거목 이승만. 구한말에는 개혁가, 일제하에서는 독립운동가, 해방 후에는 자유와 민주의 투사였던 이승만은 이땅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1967.07.21

자신이 설립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사랑하는 제자였으며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교민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한국민족의 위인 우남 이승만 박사의 유해는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향해 청명한 하와이 반하늘을 힘차게 날아 올랐다」

 

 

 

 

프란체스카 여사와 이승만 대통령

 

 

 

 

단촐했던 침실

 

 

 

 

서재가 더 넓다.

 

 

 

 

1997.07.15 육참총장 김동신 복원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 기념관

 

 

 

 

김규식, 김구, 지청천, 이승만 박사 내외 1947.04.00

 

 

 

 

초대 부통령 이시영, 초대 국회의장 신익희,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통일전망대 신청서를 배부하는 곳

 

 

 

 

점심 식사를 위해 열차식당으로 들어가는 산아님~~

 

 

 

 

음식 맛은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얼마나 맛있을까?

기대가 된다.

 

 

 

 

내부 모습

 

 

 

 

열차식당 메뉴

 

 

 

 

 

외부를~~

 

 

 

 

식사 후 전쟁기념관을 둘러 본다.

 

 

 

 

80년 초까지도 이랬다는...

 

 

 

 

통일 전망대

 

 

 

 

남방한계선

 

 

 

 

 

 

 

 

 

남북 종단 철도

 

 

 

그래도 시간이 남아 커피 한 잔 마시러 다시 들어 오고~~

 

 

 

드디어 DMZ 평화의 길 트레킹이 시작되고~~

 

 

 

통문 들어가기 전 주의 사항을~~

 

 

 

남쪽 방향의 해안

 

 

 

북쪽 방향의 해안

 

 

 

전차지뢰에 파괴된 트랙터.

 

 

 

전선의 최북단.

 

우측으로는 군사분계선으로 들어가는 통문이 살짝 보인다.

 

 

 

구선봉과 감호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해금강의 일부

 

 

 

 

가고 싶은 금강산이 바로 눈앞이다.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가 전해 진 감호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언제 통일이 될까~~

 

 

 

 

봐도 봐도 그리운 금강산~~

 

 

 

 

트럼프가 김정일과 친하니 살아 생전에 가볼수 있을까?

 

 

 

 

남한 방향의 동해바다

 

 

 

 

아아 그리운 금강산, 해금강이여~~

죽기 전에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2008.07.11 박왕자 피살사건 이후 막혀버려~~

다음 년도에 매일관광여행사에 적금까지 들어 놨는 데,

벌써 16년 세월이 흘렀다.

 

요즘은 정권이 바뀌고 나서 남북 관계가 더 경색되어 있다.

여야가 바뀌어도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책은 영원불멸해야 하는데~

이것들은 바뀌기만 하면 자기 잘났다고 정권 내내 싸움질만 한다.

 

적금 써먹을 날은 올런지...

 

해변가 조금만 숲 섬이 송도로 보여진다.

 

 

 

 

전선의 낙조 풍경

 

 

 

 

올 10월에 평화누리길에서 평화의 길로 새롭게 탄생했다.

몇 군데는 길이 바뀌고 또 새로운 길이 생겼다.

그리고~~

정치 상황에 따라 길이 잇고, 끈어지기를 반복한다.

아쉬움이 남지만 트레킹을 다시 할 수는 없고,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더 돌아보고 싶다.

 

이제는 통일이 되어 남북 관통 열차를 타고

다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해서

유럽까지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내 생전에 그런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