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던 군인이 언론인 때려 잡았다…
감금한 채 "각서에 지장 찍어라"
[계엄과 검열] ② 해고, 농성, 고문
전두환의 집권 시나리오 핵심은 언론 탄압
12·12 후 전직 보안사 준위 투입해 공작
'협조 가능자' 언론사 간부들 만나 동태 파악
모은 정보는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악용
1980년 해직된 언론인 최대 1,500명 달해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포고령 제3항은 권력이 언론을 암전한 45여 년 전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독재 권력이 등장할 때, 가장 먼저 장악하려는 것이 언론이며 언론인은 독재자의 탄압과 가해를 가장 혹독히 겪는 직업군이다.
한국일보는 12·3 불법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1980년 전후 권력이 지운 352개의 기사를 발굴해 뒤늦게 독자들께 배달하면서, 비록 기사를 신문에 싣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취재하고 처절하게 맞섰던 당시 본보 기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기록했다.

45년 전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내란세력1이 꾸민 '집권 시나리오'의 핵심 축은 언론을 검열, 회유, 학살하는 'K-공작계획'이었다. 당시 관계자 전언에 따르면 여기서 'K'는 'King(왕)'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전씨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의미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직후 1979년 10월 27일 발표된 '계엄포고 제1호'에 따라 모든 매체를 대상으로 계엄사령부에 의한 철저한 사전 검열이 시작된다.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12월 하순부터는, 간첩 잡는 대공 업무만 20여 년간 해온 군인이자 전두환의 심복인 이상재 육군 준위가 투입돼 언론계 중진들과 접촉하고 신군부에 호의적인 보도를 하도록 회유했다.
이듬해 2월엔 전두환이 사령관인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정보처 산하에 언론대책반이 설치돼, 계엄사 보도 검열을 조정·감독하기 시작했다. 3월 말에는 각 언론사 간부들을 회유·포섭하는 게 골자인 K 공작계획이 수립됐다. A4 용지 11쪽짜리 이 문건은 보안사 언론대책반장 겸 보도검열단장 보좌관으로 '언론공작' 실무를 도맡던 이상재가 작성, 전두환의 결재를 받아 시행됐다.

K 공작은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 신장을 위한 안정 세력을 구축한다'는 목적하에,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해 안정세로 전환'할 방침이었다. 이상재 등 보안사 요원들은 한국일보를 비롯한 7대 중앙 일간지, 5대 방송사, 2대 통신사 사장·편집국장·정치부장·사회부장 등 94명과 접촉해 이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신군부에 유리한 여론 형성을 꾀했다.
예컨대 '정국 안정 방안을 청취한다'는 구실로 간부들을 고급음식점의 오찬·만찬 자리로 불러내, 각 언론사 동태를 파악하고 신군부에 포섭이 될 만한 '시국관 양호자' '협조 가능자'를 추려내는 식이었다. 반대로 정세에 비판적인 '야성 강한' 언론인도 솎아냈다. 94명을 대상으로 한 1단계 공작(1980년 3월 24일~5월 31일)에서는 1명 접촉비로 10만 원2씩, 총 940만 원 예산이 배정됐다. 2, 3단계(6월 1일~공작 종료 시까지)에서는 40명분으로 400만 원이 책정됐다.
K 공작계획으로 수집된 정보들은 이후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통폐합의 발판이 된다. 그해 여름 본격화되는 '언론 대학살'의 양대 축은 보안사 언론대책반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문공분과위원회였다. 전두환은 6월 기자 출신인 허문도 문공분과위원 등이 작성한 '언론 정화·정비계획'을 보고받는다. 언론인 숙정(해직)과 정비(통폐합)가 그 골자였다. 이후 이상재가 작성한 보도검열 비협조자 등 해직자 명단이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을 통해서 각 언론사에 통보됐고, 그해 10월까지 전국 언론사에서 933명이 해직됐다.

정점은 11월 언론통폐합이었다. 신군부는 그해 11월 12일 통폐합 대상 언론사 사주들을 보안사로 불러 강압적으로 포기 각서를 받아낸다. 언론인 해직과 마찬가지로 신군부의 '강요된 자율'하에, 전국 64개 언론사가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 등 18개 매체로 통폐합됐고, 이 과정에서 언론인 305명이 추가 해직됐다. 1979년 한국일보 입사 후 2년 뒤 정부가 관리하는 프레스카드(보도증)3가 잘려 해직된 본보 유동성 전 기자의 사례처럼, 비공식적 방식으로 해직된 이들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1,000~1,500명4에 달할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같은 일련의 대언론 공작을 통해 신군부는 비난 여론을 침묵시키고, 내란세력의 집권 계획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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