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린 의사로, 시절이 낳은 독립투사로 살다
함안 사람, '이태준'. 그는 의사이자 독립 투사였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병원을 세워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거점이자 군자금 운송 통로로 활용했다. 빼어난 의술로 몽골의 마지막 황제 주치의로 활약했으며, 그 공로로 1919년에는 몽골 최고 훈장까지 받을 정도로 몽골인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오늘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는 그의 기념 공원과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중에서 해외 현지에 기념 공원과 기념관이 세워진 이는 거의 유일하다.

이태준 선생
◇함안 군북 출생…독립운동에 뜻을 두다
선생은 1883년 함안군 군북면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07년 서울에 상경한 그는 서울역 부근에 있던 '김형제 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되는데, 마침 그곳은 독립운동가 김필순(1878~1919)이 그의 형과 함께 운영하던 가게였다.
김필순은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사 면허를 받은 의사이자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 등에서 활동했다. 점원으로 일하던 이태준은 1907년 그해,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어떻게 입학하게 됐는지, 그 연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김형제 상회'에 일하게 되면서 의사인 김필순과 인연을 맺게 되고, 그의 소개로 독립운동가 김규식(1881~1950), 안창호(1878~1938) 등 당대 명성을 떨치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점에 비춰 명석한 이태준을 알아본 주변의 권유와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미뤄 짐작해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당시 조선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자, 이에 반발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양측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형제 상회'는 부상을 당한 대한의 군인을 치료하던 세브란스 병원과 바로 지척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목격한 이태준이 항일 의지를 다지고, 의료인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세브란스 의학교 2회 졸업생 사진. 맨 뒷줄 가운데 인물이 이태준 선생이다.
이태준은 1911년 6월, 28세의 나이에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이때 이태준은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그의 권유로 '청년학우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청년학우회'는 1907년 국권 회복을 위해 조직한 구국청년 단체로 신민회의 자매단체였다.
하지만 이태준은 의사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05인 사건'으로 김필순과 함께 중국 난징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조선 독립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을 조작하고 신민회를 비롯한 애국지사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한 사건이다.
가깝게 지내던 김필순이 신민회 활동으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이태준은 그의 망명을 돕는 동시에 자신 또한 청년학우회 활동으로 감시의 손길이 미치자, 중국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태준 선생이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편지
◇몽골에서 의술 및 독립 활동
또 다른 배경은 때마침 중국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을 들 수 있다.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신해혁명은 당시 조선의 애국지사들에게 독립을 향한 새로운 희망과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됐다. 애국지사들은 신해혁명을 일으킨 중국의 혁명 세력을 적극 돕는다면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도움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김규식, 여운형 등 많은 애국지사가 신해혁명의 본거지였던 중국의 난징이나 상해를 새로운 활동 거점으로 선택하게 되고, 이는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태준은 도산 안창호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중국의 신해혁명에 크게 감동했으며, 일본에 강제로 나라를 뺏긴 조국의 독립을 향한 기대를 내비쳤다. 그렇게 이태준은 1912년 김필순과 함께 신해혁명 세력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난징에 도착한 그는 선교사가 설립한 '기독회의원'에 배치돼 의사로 근무하며 중국 인사들과 교류를 넓혔다. 이태준은 단순히 의료 지원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의술이 조선의 독립에 쓰임이 있기를 바랐다.
당시 임시정부는 일제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몽골에 비밀군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태준은 1914년 김규식의 제안으로 몽골로 이동하게 된다. 하지만 자금난으로 군관학교 설립은 성사되지 못하고, 이태준은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설립한다. 장기적으로 독립운동의 거점을 몽골에 마련하겠다는 계획 때문이다.

몽골 이태준기념관 내 전경

몽골 이태전기념관 내부 전경
당시 몽골은 화류병이 크게 유행하며 많은 몽골인이 고통받고 있었다. 근대적 의술을 지닌 이태준은 이를 치료하는데 탁월한 성과를 내면서, 몽골인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몽골 마지막 황제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1919년에는 몽골의 최고 훈장까지 받게 된다.
이태준은 병원 수익을 독립운동 관련 자금으로 기부했으며 몽골을 거쳐 가는 수많은 애국지사에게 숙식과 교통 편의를 제공했다.
김규식이 1919년 일제의 부당한 침략과 조선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로 파견되자 자금을 지원했다.
이태준의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한인사회당이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권으로부터 확보한 독립운동 자금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 운송에 깊숙이 관여한 일이다.
한인사회당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성공에 고무된 이동휘를 주축으로 1918년 창설한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다. 볼셰비키 정권은 1919년 전 세계 공산당의 연합 기구인 '코민테른'을 설치하고, 식민지 약소민족의 독립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 때문에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러시아는 볼셰비키 정권의 적군과 이에 맞선 구 러시아 체제를 옹호하는 백군 간에 내전(1917~1923)이 벌어졌다. 일본은 자국의 천황제를 위협하는 공산주의 이념이 유입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백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일본군과 백군이 연대하자, 연해주의 조선 독립군들은 자연스럽게 볼셰비키의 적군과 연합해 맞서는 형국이 벌어졌다.
이에 볼셰비키 정권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1920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200만 루블 지원을 약속했고, 이 가운데 1차로 40만 루블이 현금이 아닌 금괴로 지급됐다.

몽골의 수도에 마련된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내 신축 기념관 건립 당시 임시로 운영한
임시 이태준 기념관. 몽골의 전통 양식인 게르에 마련했다.

이태준 선생이 받은 몽골 최고 훈장.
◇의열단 가입, 폭탄 기술자 소개
이태준은 모스크바에서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되던 독립 자금을 몽골 구간에서 안전하게 운송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이때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에서 김원봉이 주축이 돼 결성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1920년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으로 일본인 서장을 사망하게 했고, 이어 밀양경찰서,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에 폭탄 투척, 1923년에는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1924년에는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하며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러한 의열단에 이태준은 자신의 운전사이자 우수한 폭탄 제조 기술자인 헝가리 출신 '마자르(Magyar)'를 소개했다.
이처럼 몽골에서 활발하게 하던 이태준은 러시아 내전(1917~1923)의 파고에 휩쓸리게 된다. 1923년 일본군과 결탁한 러시아 백군 세력이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점령하자, 이태준은 백군에 붙잡혔다. 백군은 이태준이 볼셰비키 세력과 연대해 독립운동 자금을 운송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으며 그를 살해했다.
이태준의 순국은 힘들게 구축한 몽골 내 독립운동 거점이 상실되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잊혔던 그의 존재는 1990년 한국과 몽골의 수교 이래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다시 조명되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현재 그의 고향 함안에는 이태준 선생 기념사업회와 기념관이 설립돼 있다. 최근에는 몽골을 찾았다가 이태준 이라는 독립운동가를 알게 된 이들이 국내로 돌아와 함안의 기념관을 방문하는 사례가 부쩍 많아졌다.
김동균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의술로 몽골에서 많은 사람을 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생의 애국정신이 보다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취재 도움=사단법인 이태준선생 기념사업회

지난 해 9월 몽골 이태준 기념공원내 건립한 이태준기념관 개관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지난 해 9월 몽골의 이태준 기념공원 내 개관한 이태준 기념

몽골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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