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 곽상도 사건의 1심 선고가 나온 뒤 다소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리 사회가 보인 반응을 요약한다면 그건 무엇보다도 경악이었다. 600만원 장학금은 유죄, 50억 뇌물성 퇴직금은 무죄로 압축되는 법원의 판결은 사람들의 보편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일이어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잔혹극과 부조리극과 같은 판결이 진짜 놀라운 것은 그것이 사실은 놀랍지 않은 일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법정은 우리 사회 현실의 반영이며 축도인 것이어서 법정이 속해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 그 현실이 빚어낸 이 판결의 결과는 오히려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잔혹과 부조리로서의 한국 사회의 현실이 법을 통해 표출된 것이었을 뿐이다.
두 사람이 받은 단죄와 면죄의 엇갈림은 막강한 검찰 권력이 한쪽에 대해서는 필사적으로 죄를 지우려 했고, 다른 한쪽에 대해선 결사적으로 죄를 묻지 않으려 했던 것의 ‘인과적’ 결과다. 뒤집힌 것은 재판 결과가 아니라 검찰이라는 권력의 실상이었으며, 그런 왜곡된 검찰을 갖고 있는 우리 사회였다. 법원은 그 전도된 현실을 그대로 충실히 따름으로써, 스스로를 법의 판관이 아닌 기능인으로 끌어내렸다.
잔혹극과 부조리극이 보여준 한국사회의 현실
검찰과 법원은 한편으로는 전능을, 한편으로는 무능을 보여줬다. 검찰은 죄가 있어서 수사, 기소하는 게 아니라 죄가 나올 때까지 수사하고는 기어코 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 전능의 권력임을 과시했다. 한편으로는 ‘50억 뇌물(성) 댓가 무죄’라는 기상천외한 판결로 귀결되기 위해 계획된 부실, 치밀한 무능을 보여줬다. 무능을 보여주는 데서 극히 유능했다. 사법부는 그에 조역으로 거들어 그 전능과 무능을 완성해 줬다.
검찰과 법원의 이중적인 그것처럼 법은 치밀하면서도 허술하다는 것의 이중성을 드러냈다. 법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상반된 현실, 즉 강자는 법의 위에 있고 약자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므로 필요 없게 되는, 법이 무력해지는 것에 대한 야유가 한국에서 실제로 이룩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확인해 줬다.
검-법의 합작이 그 같은 현실의 확인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에 드러내려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검찰 개혁’이라는 한국 사회 숙원의 과업의 선봉에 나서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이 정치적 수사, 정치적 기소, 정치적 재판에서 조 전 장관은 결국 실형 선고를 받았다.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제기됐던 기소 혐의에 대한 적잖은 반증들, 위법혐의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다수의 반박 진술과 정황들이 재판부에 의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는 무산됐다. 그의 유죄 판결로 한국 사회, 특히 검찰과 법원과 언론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기득과 기성과 수구(守舊)의 권력은 그에 균열을 내고 항거했던 이로부터 받아내고자 했던, 자신들과 맞서려면 ‘무결(無缺)할 것'을 요구하는 격투에서 승리했다.
반면 검사 출신의 국회의원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던 인물에 대해서는, 어느 선량한 젊은이를 유서 대필을 조작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씌워 그 인생을 파멸시킨 악행 등의 점철에 대해 벌은커녕 포상을 받아 왔으나 이번만큼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법망에 걸렸다고 생각됐던 그 인물에 대해서는, 그 형벌의 그물이 오히려 보호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불가침의 ‘신성가족’의 철옹성을 입증했다.
그 신성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한 법원. ‘정의의 보루’라는 영예로운 별칭은 검찰에 대한 보루라는 데에서부터 비롯되는 법원은 과거 독재권력의 시녀로서 외압에 굴복했던 것에서 이제는 검찰에 대한, 결국엔 자신에 대한 굴복으로, 자기 자신이 쳐 놓은 ‘자기안전’과 ‘자기보위’라는 울이자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국이라는 새로운 저울, 곽상도라는 각성제
검-법은 이번 판결로 많은 것을 얻은 듯하다. 이미 가진 것에 더욱 더 많은 것을 더하게 되는 난공불락의 성벽을 더욱 단단히 하고 있음을 과시했다.
그러나 뭔가를 잃는다는 것은 다른 뭔가를 얻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뭔가를 얻는 것은 또 뭔가를 내 줘야 하는 것이다. 조국에 대한 유죄 선고로 우리 사회는 하나의 정의를 잃었고, 하나의 정의를 얻었다. 하나의 작은 정의의 실현에는 실패했지만 그러나 ‘더 큰 정의’로의 길이 우리 앞에 열렸다. 또는 하나의 작은 정의를 이룸으로써 더 큰 정의라는 과제가 부여됐다, 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조국 유죄’가 이제 우리의 새로운 표준과 준거, 출발이 됐다는 것이다.
작은 승리를 거둔 이들은 자신에게 새로운 기준의 굴레를 씌우게 됐다. ‘조국’이라는 새로운 저울과 잣대가 한국사회의 정의를 규정하는 강력한 규율이 될 것이다. 그것이 ‘조국 유죄’라는 작은 정의가 대한민국에 부과한 ‘더 큰 정의’의 과제다. 그리고 그 큰 정의를 위한 심판대에는 누구보다 먼저 조국을 단죄하려고 했던 그들 자신이 앉아야 한다. 아니 공정과 정의의 이름으로 조국을 앉혔던 바로 그 피고석에 그들을 앉혀야 한다.
곽상도의 무죄는 우리의 ‘현실’을 깨닫게 해 줬다. 강력한 각성제였다. 우리의 상식과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현실이 현실임을 깨우쳐 줬다.
그 책무와 각성이 바로 조국과 곽상도가 던진 한국 사회의 책무이며 우리 사회의 전진에로의 출발이다.
법(法)은 그 글자의 어원에서 보이듯 물처럼 세상을 적시는 것이다. 물이 ‘상선(上善)’의 덕성으로 위에서 아래로, 구석구석 빈틈 없이 찾아 흐를 때 물은 물이 되는 것이며 법은 법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물과 같은 본래의 법의 정신이며 힘이다. 그러나, 또 그러기에 물은 장애를 만날 때 그대로 넘어갈 수가 없다. 구덩이가 있으면 그 구덩이를 채워야 나아갈 수 있다(盈科而進). 조국과 곽상도가, 그리고 윤미향 사태가 우리 앞의 깊은 구덩이를 보게 했다. 검란 법란과 함께 또 하나의 칼인 언론과 함께 파 놓은 깊은 구덩이들을 보게 했다.
조국이 지나온 ‘조국의 시간’, 조국이 건너온 ‘조국의 강’은 대한민국의 시간이며 대한민국의 강이기도 하다. 살점을 뜯기며 뼛가루가 분쇄되며 조국이, 그리고 윤미향이 통과하고 건너온 그 시간과 강을 이제는 우리가 거치고 건너야 한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깊은 구덩이들을 제대로 보는 것. 그리고 그 구덩이와 진창을 피해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 그 늪과 진창을 절실하게 직면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새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조국의 수난, 윤미향의 고초는, 심지어 곽상도(류)의 번성조차 한국사회를 위한 큰 선물이 될 것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곽상도의 함박웃음이 보여준 '불멸의 법조 카르텔' (0) | 2026.02.11 |
|---|---|
| 곽상도 50억 무죄 거센 후폭풍… "그 검사에 그 판사들" (0) | 2026.02.11 |
| 마녀사냥 쓰나미에 스러진 ‘천사’ 손영미를 기억하라 (0) | 2026.02.11 |
| 2) 6.25 한국 전쟁과 맥아더 (1) | 2026.02.09 |
| 1)6.25 한국 전쟁과 맥아더 (2) | 2026.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