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수)
어제에 이어 오늘은 서울 5대 궁궐과 종묘를 묶어 하루에 탐방해보려고 합니다.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남춘천역(10분)까지 가고
대중교통은 남춘천역 → 회기역 → 시청역 코스(1시간 50분)를 이용합니다.
걷기 코스는 덕수궁 → 경희궁 →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종묘 순서로 정합니다.
조선의 종묘, 사직과 5대 궁궐

트 랭 글

(종묘 3가 역에서 트랭글 off 했어야 했는 데, 400m 더 가서...)
06:52 남춘천역에서 회기역 가는 전동열차에 탑승했습니다.

08:20 회기역에서 시청역 가는 1호선으로 환승해합니다.

08:57 시청역에 도착하여 대한문 방향 1번 출구로 나갑니다.

덕수궁 관람 코스

설 명절이라 고궁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대한문(大漢門)을 들어섭니다.다.
그런데 다른 궁궐 정문과 달리 덕수궁 정문은 대한문일까요?
경복궁 정문은 광화문(光化門)
창덕궁 정문은 돈화문(敦化門)
창경궁 정문은 홍화문(弘化門)
경희궁 정문은 흥화문(興化門)
가운데가 모두 '화'자인데...
지금 현재 덕수궁 정문은 동문인 대한문(大漢門)으로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습니다.
1900년 대안문 앞으로 대로가 생기면서 당시 정문인 인화문 통행이 줄었죠.
대안문(大安門)을 수리(1906)해 정문으로 삼고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꿨습니다.

덕수궁 내부~~
생각했던 것보다 한산합니다.

광명문(함녕전의 정문).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본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가
인짐왜란가 잠시 머물던 행궁이었고,
그나마도 인조 이후엔 왕들의 흔적이 서린 즉조당과 주변 몇 채 정도를 빼고
나머지 건물 전부를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면서 약 270년 간 비어있었다.

함녕전(고종의 침전).
1896년(건양 원년)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아관파천) 고종이
환궁을 경운궁으로 결정하면서 중건 공사를 명하였고
비로소 제대로 된 궁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 당연히 임금이 머물 정식 침전 필요했고
그에 따라 1897년(건양 2년) 함녕전을 건립했다.

덕홍전.
지금의 덕홍전 자리에는 원래 경소전(景昭殿)이 위치하였다.
1896년(건양 1)에 고종황제는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였다.
이때 경운궁(慶運宮)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경복궁 태원전(泰元殿)에 모신
명성황후의 시신을 모실 빈전(殯殿)과 신주를 봉안할 혼전으로 사용하고자 건립하였다.
곧 9월 4일에 명성황후의 시신을 경소전으로 옮겼고,
명성황후 국장(1897.11.21)을 지낸 뒤에는 경효전(景孝殿)으로 부르면서 혼전으로 삼았다.
1904년(광무 8)에 경운궁에 큰 불이 일어나 불에 타고 말았는데,
명성황후의 신주는 준명전(濬明殿)의 서쪽 행각에 임시로 모셨고,
그 뒤에는 중명전(重眀殿)의 주변에 자리한 수풍당(綏豐堂)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이후 경소전 터에 이전과 같은 규모의 건물을 다시 건립하였지만,
을사늑약(1905) 체결로 고종황제가 여전히 중명전에 머물렀기에 신주를 다시 옮기지 못했다.
고종황제가 함녕전으로 돌아온 뒤에도 신주는 여전히 수봉당에 봉안되었다.
1912년에 고종황제의 알현실로 고쳐 짓고서 덕홍전이라고 불렀다.

중화문.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의 정문이다.
대한문으로 들어와 일직선상의 금천교를 건넌 뒤 조원문을 지나 오른쪽에 있다.
이는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인 경복궁과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한 반면,
덕수궁은 원래 궁궐이 아닌 곳을 확장하며 지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5대 궁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20세기에 창건했으며
조선국 시절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정문으로 세운 문이다.

중화전.
덕수궁의 정전(正殿)으로, 중요한 국가 의식과 조회가 열리던 곳이다.

중화전 내부.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이듬해 환궁하면서,
기존의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아닌 공사관 근처의 경운궁을 거처로 선택했다.
오랫동안 방치된 경운궁을 왕의 거처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했다.
명목상 ‘중건’이라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궁궐을 창건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기존 건물인 즉조당을 태극전 또는 중화전으로 부르며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매우 협소하여 규모가 큰 새로운 정전이 필요했다.
결국 대한제국 선포 후 5년이 지난 1902년(광무 6년)에 중화전을 건립했다.

중화전 앞에 문무백관이 서 있을 품계석이 늘어져 있다.
정1품 → 종1품 → 정 2품 → 종 2품 → 정 3품 → 종 3품 → 정 4품 → 정 5품... 정 9품
12개의 품계석(품석)이 좌우로 있다.

즉조당.
즉조(卽阼)는 즉위와 같은 말로,
인조가 이곳에서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현판 글씨는 고종 친필이다.
즉(卽) 옆엔 어필(御筆)이
당(堂) 옆에 광무구년을사칠 월 일(光武九年乙巳七月 日) 글씨가 있다.
즉 1905년(을사년) 7월에 고정이 직접 썼다는 의미이다.

정관헌(靜觀軒) .
덕수궁의 서양식 정자이다.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으로 1900년경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
1919년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은 비었고
1933년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많은 전각을 허물었다.
그럼에도 정관헌은 살아남았다.
정관헌은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여가를 즐기던 곳으로
찻집과 카페로 활용되면서, 연회장처럼 변형되었다.
이로 인해 정관헌이 카페였다는 오해가 생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윤정희 영화 "야행 91977)"에는 카페로 운영하던 정관헌 모습이 등장했다.
덕수궁관리소는 2025년 열린 특별전
"대한제국 황궁에 선 양관(洋館:서양식 건물) –만나고, 간직하다"에서
정관헌이 황실의 보물을 보관하던 '보물 수장고'로 사용되었음을 밝혔다.
정관헌을 비롯한 양관들은 화재에 강하고 견고한 자재로 건립되어,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덕수궁관리소의 학예연구사는
"정관헌은 벽으로 둘러싸인 폐쇄형 건물로,
도면과 사진을 통해 수장고 용도였음이 확인된다."라고 설명했다.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여가를 즐기던 카페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활용된 장소가 분명하다.
왕실의 존엄을 상징하는 어진을 봉안하고,
황실의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수장고로 기능했으며,
일제 이후에는 때때로 황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서양식 건축 기법을 적용하여 기능성과 안전성을 높인 점에서
대한제국기 궁궐 양관 건축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09:27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경희궁으로 향합니다.
서울시 중구 정동길입니다.
가을에는 낙엽 쓸지 않는 길로도 유명하지요.
정동교회 앞 사거리에서 이화여고 동문을 지나 새 문안길에 이르는 구간이다.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합니다.
이영훈이 작사 작곡.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 연가〉에서는~~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 미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겠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누군가는 걷고 싶은 길이고, 누군가는 옛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
정동...
하지만 이곳은 조선 왕조의 비극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정동은 "이성계의 계비 강 씨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는 곳"으로
태조는 강 씨의 능을 정성스럽게 치장해 조성했고,
자신도 이곳에 함께 묻히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아들 이방원 때문에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이복동생으로 강 씨의 아들 방번과 세자 방석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전합니다.
그렇게 이전한 곳이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이지요.
또 태조의 능은 양주로 옮겼는데 지금의 구리시입니다.
일부러 아버지와 계모의 능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것입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방해한 계모에 대한 이방원의 분풀이로
정릉을 파괴해서 봉분을 완전히 깎아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했고,
정자각은 헐어서 목재는 태평관을 짓는 데,
석조물은 돌다리를 만드는 데 썼는데 이 다리가 광통교입니다.
장안에서 가장 넓은 다리를 만들면서 일부러 정릉의 석조물을 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라는 잔인한 의도가 담겨 있었지요.

덕수궁 대한문에서 경희궁 흥화문까지 950m/15분 걸으면 됩니다.

경희궁 관람 코스

09:42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에 들어서고~~
1910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을 헐고 몇몇 건물들을 매각하고 이전하면서
흥화문도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겼다가
1932년는 장충동 박문사에서 사들여 정문으로 사용했다.
그 후 박문사 자리에 국영 영빈관과 서울신라호텔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그대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숭정문.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이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넌 후,
왼쪽으로 살짝 틀어 건명문을 따라 직진한다.
이후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꾼 뒤 경사를 따라 올라가면,
숭정문과 숭정전에 도착할 수 있다.
경복궁과 다른 점으로~
경복궁은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반면,
경희궁은 이궁(離宮)으로서 인왕산 자락의 지형에 맞춰 지어졌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숭정문 뒤로 인왕산이 우뚝 섯다.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숭전전 앞에 길게 늘어선 품계석.
우리나라가 계급사회라는 것을 확연히 보여주는 현장이다.
상관의 명령이 부당할지라도 이를 거부하기는 사회 통념상 가당치 않다.
부당한 명령을 따른 것보다 배신?이 더 큰 상처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품계석처럼 정착되고 당연시되어 고치기 쉽지 않은 한국사회 폐습이다.
민주주의, 문화, 정치, 교육, 스퍼츠, 사회발전에 악영향을 끼친다.
1979년 12.6 사태와 2024년 12.3 내란 사이 45년은 아주 길다.
정관계와 언론 및 군 협력자들의 관련된 행동에서 엿볼 수 있다.
이번에는 그 끈을 확실히 불식시키기 위해 엄한 처벌이 요구된다.

숭정전 내부.
1617년(광해군 9년)~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 창건 때 지었다.
경종, 정조, 헌종이 이곳에서 즉위했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일제는 숭정전 부근에 일본학교 경성중학교를 세웠다.
숭정전은 한동안 제자리에 있었는데
1926년에 일본 사찰 "대화정 조계사"에 매각되어 법당으로 바뀌었고,
기존 숭정전 자리에는 학교 식당이 들어섰다.
광복 이후 조계사 터에 동국대학교가 들어섰고,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정각원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1980년에 서울시가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 사적 공원 조성 계획〉를 세우고
서울고등학교( 경성중학교)를 서초구 효령로로 이전시킨 뒤 1991년에 복원했다.
2002년에는 주변부까지 복원을 마쳤고 이후 시민에게 개방해 오늘에 이른다.

도대체 어려워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 실제로 이러했는지?
역사가들의 이야기인지...

자정문.
경희궁의 편전 자정전의 정문이다.
자정(資政) 뜻은 정사(政)를 돕는다(資)이다

자정전 내부.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었다.
편전으로 처음 사용한 시기는 1624년(인조 2년)부터이다.
이괄의 난으로 중건한 지 얼마나 됐다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불타자
인조가 경희궁을 사용하면서 그때 비로소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빈전으로 주로 사용했고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는 용도로 쓰기도 했다.
숙종, 영조 연간까지 활발히 사용되었으나 정조 이후부터는
사용이 뜸해졌으며 순조가 간간히 이용할 뿐이었다.
1865년 고정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을 헐어 경복궁 공사의 자재로 썼다.

10:05 경희궁 역사박문관의 경성전차 381호.
서울에서 첫 전차 운행은 1899년 5월이었으며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왕복 운행 했다.
이 열차는 1930년부터 서울 시내를 운행했으나
1968년 11월, 버스와 자동차 운행에 불편을 줘 중단했다.

경희궁 흥화문에서 경복궁 광화문까지 1.3km/20분 걸음이다.

경복궁 관람 코스

10:21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문으로, 궁의 정문 기능을 한다.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 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구정 명절을 맞아 많은 내외국 관람객이 붐빈다.

흥례문.
정문 광화문, 중문 흥례문, 근정전 정문 근정문 순서로 놓여 있다.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지었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흥례문(興禮門)'으로 바꾸었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다.
근정문 뒤편의 사정전과 강녕전, 교태전도 모두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다만 광화문은 2006년 12월까지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철거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하면서
원래의 위치가 아닌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추어지었기 때문이다.
광복 65주년인 2010년 8월 15일에
틀어진 3.75도를 바로잡고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근정문.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근정문 바로 앞까지 들어섰었다.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은 헐려 사라지고, 금천은 메워졌다.
그럼에도 무사했고 6.25 전쟁의 화마도 비껴가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1985년에 보물 제812호로 지정받았다.

10:29 근정전.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같이 지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이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으로 좌측에는 수정전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궁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인지 구정을 맞아 관람객이 상당히 많다.

흥선대원군이 1867년(고종 4년) 중건했고
고종이 근정전에서 공식적으로 정도전의 업적을 찬양하며 사면을 반포했다.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을 때도 철거되지 않고 자리를 지켰으며
광복 이후 6.25 전쟁의 화마 속에서도 무사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85년 근정전을 국보 제223호로 지정했다.
현재 근정전의 모습은 2000년대 초 대대적인 보수를 거친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라우치 마사타케, 사이토 마코토 등 조선총독이
각종 행사를 어좌에 앉아 진행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진압하다 사망한 일본인 경찰의 위령제도
일제강점기 기간 동안 수시로 근정전에서 시행했다.

수정전.
경복궁 중건할 때 처음 지었으며 사정전과 함께 편전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便殿] 임금이 평소에 거처하는 궁전
때로는 이곳에서 행사를 거행하고 어진을 잠시 모셔두기도 했다.
[御眞] 임금 얼굴을 그린 그림이나 사진
이때에는 주변에 200칸 가까운 행각들이 있었고
북행각과 수정전 본채가 복도로 연결되었으며
궐내각사에 해당하는 수많은 전각들이
경복궁의 서쪽 대문인 영추문까지 즐비해 있었다.

10:39 경회루.
1395년(태조 4년) 창건.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거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등 국가 행사에 사용하던 건물이다.
연못에는 샘물이 솟아나 고인 물이 아니고,
흘러넘치면 빠지는 곳이 있어 썩지 않았고,
배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호우에도 범람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회루와 연관된 흥청만청~~
興淸(흥청) : 연산군이 총애하던 기생 집단
亡淸(망청) : 결국 망하게 된다는 의미
연산군은 성종의 장남으로 집권 초는 국정을 잘 다스려 성군 기질이 보였으나,
생모인 폐비 윤 씨의 죽음에 관련된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1505년 10월 2일 『연산군일기』-
“갑자사화 이후에 얼굴이 예쁜 자를 대궐 안으로 뽑아 들이니 처음에는 백 명 정도였던 것이 나중에는 만 명이나 되었다. 연산군 11년(1505년) 6월 : 연산군은 전국 팔도에서 미녀와 튼튼한 말을 구하기 위해 지방 관리인 채홍준사(採紅駿使)를 파견했다. 사대부의 첩이나 양인의 아내와 딸, 노비, 창기 중에서 닥치는 대로 여자들을 징발했다.
기생의 칭호를 고쳐 운평(運平)이라 했는데 대궐 안에 들어온 자는 흥청(興淸), 계평(繼平), 속홍(續紅)이라 하고 왕을 가까이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 임금과 동침한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61권, 연산 12년(1506) 3월 17일 정유 8번째 기사-
경회루 못(池) 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 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해 그 사이가 기괴 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 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호수(珊瑚樹)도 만들어 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누(樓)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운평 3천여 인을 모아 노니, 관악기 생황(笙簧)과 노랫소리가 서로 비등하였다.
흥청은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으라는 뜻으로
많은 기생과 궁궐에서 함께 놀이를 즐기고 주연을 베풀면서
국고를 탕진하고 나라가 망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흥청으로 인해 망국이 든다는 뜻에서 흥청망청이 유래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강화도 교동에 귀양 갔다가 그해 11월 병사했다.
中宗反正 : 조선 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 이역(晉城大君 李懌)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전 이조참판 성희안, 지중추부사 박원종이 연산군의 폐출을 밀약하는 한편,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과 연산군의 사랑을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申允武),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전수원부사 장정(張珽)의 호응을 얻었다.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柳濱)·이과(李顆) 등의 거사 격문이 서울까지 전해졌다.
진성대군에게 거사를 알리는 한편, 신수근·수영(守英) 형제와 임사홍 등을 불러내어 격살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변이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繼妃)이며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인 윤대비(尹大妃)를 경복궁에서 만나 허락을 얻어 연산군을 폐하고 강화 교동에 안치하는 동시에, 이튿날인 9월 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가 곧 중종이며,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 한다.
대통령 뽑아놨더니 술 먹고 놀 줄만 알고, 정치는 아예 할 줄도 모르고, 마누라 품에 안겨 희희낙락해 흥청망청하니 결국 탄핵되어 어찌 520년 전 연산군과 비교되누노!! 그를 뽑은 지금의 국민은 520년 전 피 그대로 인가?
저럴 줄 몰랐다라니? 나라의 몇 년 역사가 거꾸로 흘러갔는데...
유럽 민주주의는 그냥 온 게 아니고 전쟁으로 침범하고 침범당하는 누누의 결과이다.
가만히 앉아 침범당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턱 없이 부족하다.
현재의 전시작전권을 보면 그러함을 더욱 알 수 있다.
군지휘관이 남의 나라에 국가의 운명을 맡기는가?
배 나오고 거드름 피는 많은 장군들은 전쟁 나면 승리할 작전 수행 능력 있는가?
노무현*이재명은 진작에 그것을 알았다.
미국에 무조건 올인할 필요 없다. 한 번이라도 노한 적이 없으니...
세계의 전쟁은 강대국이 시작하고 결과는 관계도 없는 나라를 탓하니~~
이제는 노라고 할 때다. 부드럽게...

북악산 아래로 청기와가 살포시 보인다.
호루므즈해협 파병은 참 난감하다.
중동산 원유 수입국인 반면에 미국은 깡패 동맹 아닌가?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고 난감하다.
국내 덜 떨어진 놈 하나 처리하니 또 하나가 세계정세를 어지럽힌다.
중동 여러 국가가 네타냐후 하나 거세 못하냐?
다시 저 청기와 집으로 들어간 이재명대통령의 현명한 판단이 요구된다.

태원전.
경복궁 전각 중 하나로 빈전이다.
빈전은 왕과 왕비, 대비가 죽으면 발인할 때까지 관을 모시는 곳이다.
국상 때 잠깐 사용하는 용도였기에 건물을 따로 짓지 않고,
편전이나 침전의 일부 건물을 활용했다.
그러다 1860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빈전 전용으로 새로 지은 건물이 태원전이다.
일제강점기 들어부서졌고, 그 자리에 일제 관료들의 관사가 세워졌다.
5.16 군사정변 이후 수경사 예하 30 경비단이 주둔해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주축으로 한 하나회 일당의 반란군 지휘부였다.
하나회 보스인 전두환과 그의 절친 동기 9 사단장 노태우, 30 경비단장 장세동
국방부 군수 차관보 및 제3군 사령관 유학성, 1 군단장 황영시
육군 수도군단장 차규헌, 20 사단장 박준병, 71방위사단장 백운택
1 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 3 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5 공수특전여단장 장기오, 33 경비단장 김진영 등 하나회 핵심 간부들이다.

홈경각.
농본사회를 운영하는 왕의 역할과 밀접하게 관련된 건물이다.
시간과 천체의 운행에 맞추어 정치하기 위해 천체기구를 왕실 가까이 두었다.
옥루기륜(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 간의 등...
[簡儀] 조선 시대, 1432년에 이천과 장영실 등이 만든, 천체를 관측하는 기계

설날을 맞아 많은 이들이 경복궁 관람을 한다.

보기 좋다.

10:51 강녕전.
임금의 정식 침전이다.
왕도 사람이므로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필요했다.
쉽게 말해 왕의 집이다.

근정전과 근정문을 잇는 복도.
기둥과 단청이 어울려 아름답다.

11:09 경복궁 관람을 마치고 광화문을 빠져나와
창덕궁과 창경궁 방향으로 발검음을 옮긴다.

경복궁 광화문에서 창덕궁 돈화문까지 1.4km/22분 소요된다.

창덕궁 관람 코스
12:02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은 공사 중이라 좌측 금호문을 이용한다.

진선문.
창덕궁의 중문으로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있다.
이문을 지나면 좌로 인정문 직선으로 숙장문이 보인다.
인정문을 들어서면 인정전, 숙장문은 낙선재로 들어선다.

좌측의 인정문으로 향하고~~

인정문.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와 오른쪽으로 꺾어
금천교를 건넌 뒤 진선문을 지나 왼쪽으로 돌면 보인다.
이는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인 경복궁과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한 반면, 창덕궁은 자연 산세에 맞췄다.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이다.
신하들이 임금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과 함께 조선 궁궐의 세 정전 중 하나로,
규모가 근정전보다는 조금 작고 건립연대는 명정전보다 뒤떨어져 있다.
조선왕조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던 점에서는 다른 정전과는 다른 큰 의미를 가진다.
이 건물이 역사와 함께 변화되어 왔음은
내부에 꾸며진 한말의 서양식 시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14 인정전 내부.
인정전은 한말에 내부시설 일부를 개조하였다.
내부 바닥은 본래 벽돌이 깔려 있었던 것을 서양식의 쪽나무로 바꾸었으며,
창도 내부에 서양식의 들어서 여는 창을 내고 커튼을 드리웠다.
또한, 궁내에 전기를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어 여러 개의 전등을 가설하였다.
이들 새로운 시설은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장식하였다.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선정문.
창덕궁 편전 선정전의 정문이다.

선정전.
편전이나 행사 공간으로도 많이 쓰였다.
조선 전기에는 왕비가 양로연을 여는 일이 꽤 있었으며,
신하들의 아내들을 불러 잔치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친잠을 행한 뒤 하례를 받는 일과 책보를 받는 의례 등을 거행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친잠:왕비가 누에를 치고고치를 거두던 의례.
책보: 존호를 올릴 때 함께 올리던 옥책과 금보를 말한다.

창경궁 관람 코스

12:21 좌측은 후원 가는 방향이고 입장료를 5,000원 받고 있다.
3년 전에 갔다 왔던 곳이고, 아직 창경궁과 종묘 관람이 남아 있어
우측의 함양문을 통과하여 창경궁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함양문이 있는 곳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여서
조선시대에도 이 일대에 두 궁을 잇는 문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함양문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순종 재위 기간인
1907(융희 원년)~1908(융희 2년)에 제작된 《동궐도형》에는 나와 있는데
지금 위치보다 북쪽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위치를 옮긴 듯하다.

창경궁 양화당.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은 궁이다.
그래서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했다.
때문에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어느 전각을 어느 지위 사람이 썼는지를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양화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반적으로는 왕실 내 최고위급 인물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하다.

창경궁 통명전.
창경궁의 내전 전각들 중 위상이 가장 으뜸이었다.
《궁궐지(宮闕志)》 ‘통명전은 창경궁의 내정전(通明殿卽昌慶宮內正殿)’으로 표기한 것과,
영조가 통명전을 ‘내전의 법전(法殿)’이라 남긴 글,
《통명전 중건 상량문》 ‘동쪽에 창경궁이 조성된 이후 내전은 통명전보다 높은 전각이 없다’
라고 적혀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창경궁 영춘헌과 집복헌.
두 곳 모두 후궁의 생활공간이었다.
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성종 14년(1483년) 때 건축하였다.
원래 이름은 수창궁(壽昌宮)과 매우 유사한 수강궁(壽康宮)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고려 국새를 넘겨받은 수창궁(壽昌宮)의 청심정(淸心亭)과 동일한 정자가 가까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하였는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으면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정조가 승하한 일 등 크고 작은 궁중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에 동물원과 식물원, 이왕가박물관이 들어서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63년 1월에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1983년 동물원,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이름도 창경궁으로 되찾았다.

환경전.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에,
왕실 구성원들은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은,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며 환경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남아있는 기록을 볼 때,
왕과 왕세자 등 주로 왕실 내 최고위급 남성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하다.

명정전(창경궁 정전).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1483년(성종 14년), 옛날 태종이 머물던 수강궁 자리에
대비들을 위해 창경궁을 창건할 때 함께 지었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이 지었으며
상량문은 우부승지 김종직이 지었다.
다른 궁궐의 정전과는 다르게 남향이 아닌 동향으로,
이는 풍수지리 및 지형 문제에 근거해 배치한 것이다.
명정전에서 열린 행사는 중요한 국가행사보다는 작은 행사나 왕실의 잔치 등이었다.
명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왕은 인종이 유일하다.

홍화문(창경궁 정문).
조선 중기에 만든 문이나 조선 초기 양식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보물 제384호이다.
고유의 아름다움이 일부 퇴색되기는 했지만,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관람객도 한산하다.

춘당지.

팔각칠층석탑
높이 6.5m 규모로 1992년 1월 15일에 보물로 지정되었고,
창경궁 관리소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한국에 있는 유일한 중국 석탑이라는 점에서 석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창경궁 식물원(창경궁 대온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철골 구조와 유리, 목재가 혼합된 건축물이다.
일제가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킨 뒤,
왕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함께 1909년 건립하였다.

관천대.
숙종 14년(1688)에 만든 조선시대의 천문 관측소이다.

13:08 관천대를 지나 북신문을 빠져나가면 바로 종묘가 나온다.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통로로 율곡터널 상부가 되겠다.
관람 후 종묘 정문인 외대문을 통해 빠져나가면 된다.

정전( 正殿 국보 제227호).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으로,
초에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등 태조의 사대조(四代祖)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에는 당시 재위하던 왕의 사 대조(四代祖)와
조선 시대에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19칸으로, 단일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국보 제227호.

신위봉안도.
유교국가에서 갖춰야 할 국가시설 가운데 중요한 것은 궁궐, 종묘, 사직이 있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사직은 땅과 곡식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종묘, 사직은 제례공간으로서 엄격히 정해진 이론에 입각하여 조성하는데,
이 원리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겪었다.
한국에 남아있는 조선왕조 종묘는 중국에서의 제도 변화에 영향을 받거나,
고려왕조 등 전조에게서 내려오는 전통을 이어 발전시키면서
현재는 중국, 월남 등과 여러 면에서 다른 제도를 띠게 되었다.


공민왕신당.
1395년(태조 4년) 종묘가 세워질 때 공민왕 신당도 함께 건립됐다고 한다.
조선의 국가사당인 종묘에 망한 왕조 국왕의 사당이라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태조 이성계의 의도는 공민왕 아우라의 이용이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몰아내고 이후 창왕ㆍ공양왕까지 갈아치우며
결국 자신의 왕조를 연 그였기에 늘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다.
이에 공민왕 시대로의 복귀를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다.
100여 년 걸친 몽골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ㆍ개혁정치를 편 사람이 공민왕이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의 그림이 있다.
왼쪽 그림 세 폭은 공민왕이 그렸다고 하는 준마도(駿馬圖)가 있다.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
원나라(몽공제국)의 공주인데,
당시 부마국이었던 고려의 왕자, 즉 훗날의 공민왕과 결혼한다.
노국공주는 원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지지했다.
노국공주가 죽고 공민왕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의 길을 걸었다.
부마국[駙馬國]: 사위의 나라라는 뜻으로, 고려 중기 이후를 이르는 말

준마도(駿馬圖)
이성계의 말 팔준(八駿).
횡운골(橫雲鶻), 유린청(遊麟靑), 추풍오(追風鳥), 발전자(發電緒),
용등자( 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賞), 현표(玄約)
횡운골은 원나라 나하추(納哈出)를 쫓아내고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할 때 탔고
유린청은 태조가 오녀산성을 차지했을 때와
해주ㆍ운봉 등지에서 왜구를 상대로 승전할 때 탔다.
태조는 유린청이 여섯 살일 때부터 타기 시작해서
서른한 살에 죽을 때까지 25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1370년 공민왕이 요동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이성계를 출정시켰을 때 함께 한 것도 유린청이었다.

1370년 12월 일시적으로 차지했던 요동(붉은 점선)

종묘의 정문 외대문을 나서면서 구정 연휴 5일을 보냈다.
춘천 중도의 자전거 타기, 망우산 등산 그리고 5대 궁궐과 종묘 관람~

13:38 외대문 앞 길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여운을 달래고
전철을 타고, 환승하기를 반복해야 하는
춘천으로의 힘겨운 여정을 마음속으로 준비한다.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되새긴다.
https://youtu.be/IwZtD0XB7JQ?si=taGc6NqEMtVD8T5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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