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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해방 직후 중국에서 귀국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특히 김구는 해방 이후 치열한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 등 우파의 정치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47년 말 남북 분단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였던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남북협상’ 등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결국 분단을 막는 데 실패한 김구는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현역 육군 포병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론은 깊은 애도를 표명하였다.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 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장례식이 있던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다.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시키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자 광복군 지휘관이었던 김학규(金學奎)를 구속하였다.

 

7월 2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안두희도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였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오랜 시간에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에 1992년 드디어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국회의 보고서 등 지금까지 이루어진 관련 조사와 연구를 종합해 보면, 먼저 김구 암살사건은, 김구가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1949년 6월 전후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이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사건 등 정부 내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에 앞장선 반대세력을 물리적으로 탄압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김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권 차원에서 가장 위협적인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동시에, 김구와 한국독립당까지 친공세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정권의 기반인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조치였다고도 평가된다.

 

 

 

1949년 6월 26일 오후 김구는 자택인 서울 경교장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줄은 예상도 못하였으며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게 지내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각 경교장에 김구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찾아왔으니 그는 바로 대한민국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안두희 육군 포병소위였는데, 그는 당시 육군 정복 차림을 하고 경교장에 와서 비서진에게 백범 선생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고 비서진들의 안내에 따라 1층에서 대기하였다. 직후 육군 헌병 장교인 강홍모 대위가 군용차에 필요한 휘발유를 얻기 위해 방문하였고 안두희의 양해를 구하고 먼저 김구를 만났다. 강홍모가 나간 후 비서진들은 아무런 검문이나 경계 없이 안두희를 그대로 김구가 있는 서재로 보내주었지만 이 때까지 아무도 이 자가 김구를 죽이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하였으며 마침 안두희의 허리춤에 권총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단지 군인이라는 이유로 검문이나 제지 없이 통과시켰다.

이때 김구는 서재에 있었으며 글씨를 쓰던 중 비서로부터 포병장교가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며 보고를 받았고 김구는 들어오라고 하였으며 잠시 후, 안두희가 김구 앞에 나타나 "선생님, 먹을 갈아 드릴까요?" 라고 묻자 김구가 고개를 들어 안두희를 보려는 순간 안두희는 미국제 권총을 꺼내들어 약 1미터 거리에서 김구를 향해 4발의 총탄을 발포하였다. 결국, 김구는 안두희가 쏜 총에 의해서 경교장, 현장에서 사망했다. 다음은 재판 당시 안두희가 살해경위에 대해 말한 내용이다. 물론 순전히 안두희 개인의 주장에 불과한 점은 감안해야 한다.

 

 

 

내가 선생 앞에 나가 거수경례를 하자 선생은 2미터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 때 선생은 매우 표정이 불쾌한 것이 역력했다. 선생은 38선 사태 및 포병의 편성 상태는 어떠냐고 묻기에 흐지부지 대답한 후 나는 선생에게 일부러 꾸며 거짓말을 하여 본심을 알아보려 하였다. … 나는 2, 3일 중 옹진 전투에 나가게 되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출정하며 선생님께 인사도 드리고 선생님의 포부도 똑바로 알고 싶어 왔습니다 하고 말하니까 선생은 국회 소장파 얘기를 꺼내며 세간에서는 경교장을 싸고 여러 가지 낭설이 떠돌고 있는 이때에 너까지 와서 이러면 남들이 색안경을 끼고 볼 테니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나는 선생에게 그런 말을 하시는 선생을 어찌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저마저 선생님을 의심하게 됩니다. 정당이나 언론계에서는 모두 선생을 공산당과 악수한다고 합니다. 오늘을 꼭 선생님의 본심을 확실히 알고야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더니, 선생은 대노하시며, 이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크게 떠들었다. 나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30여 년 간 투쟁한 탑을 지금 선생님 손으로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지금 이 때가 바로 선생님이 개심할 때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으니 본심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십시오 하였다. 그랬더니 선생은 크게 노하시며, 에이 고약한 놈, 나에게 반동하는 놈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이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이 순간, 틀림없이 선생을 국가의 반동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단정했다.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으며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시키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자 광복군 지휘관이었던 김학규를 구속하였다.

7월 2일 이승만 대통령도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암살이 정치적 배경을 지녔음에는 당시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으며 사건 발생 이후 지속적으로 암살의 동기·이유, 배후 조종세력, 이승만·한국정부·미국의 개입여부 및 책임 등이 주요한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커졌으며 드디어 1992년에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미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던 도진순은 기존에 간행된 여러 기사들과 안두희 등 핵심관계자들의 증언을 면밀히 분석하는 한편 1949년 전후 김구의 정치노선을 집중분석했다. 도진순은 암살작전의 전개과정을 4단계로 분석하며, 암살배경으로 국내 및 미국과의 관련을 추적했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그의 견해를 반영하여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의혹의 모략꾼' 김지웅이 암살 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했으며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안두희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 쪽이었다. 즉,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당시 방첩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고 한다.

한필동 당시 1연대 헌병대장에 따르면 김창룡은 1연대 정보과장으로 지령을 내릴 위치가 아니었으며[2]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과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비밀리에 주도하였다고 증언했다. MBC 1992-04-21.

 

 

 

암살의 시대

안두희는 왜 김구선생님을 죽였나?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3-0571&program_id=PS-2020022250-01-000&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section_code=05&section_sub_code=08

 

[258회] 역사저널 그날 - KBS

[암살의 시대 - 안두희는 왜 김구를 죽였나] 혼란스러운 해방정국, 극심한 좌우 대립과 갈등 속에서 유명인사들을 향한 암살의 시대가 도래했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김구의 집무실에서 이윽

vod.kbs.co.kr

 

 

 

정치 암살의 희생자 백범 김구 선생님

 

https://youtu.be/13QaWpebR_w?si=kq-fqg1n5zJloxUq

 

 

 

정치 암살의 희생자 설산 장덕수 선생님

 

https://youtu.be/swBJ_1HnEhA?si=VoXK342oVyP7CoiW

 

 

 

정치 암살의 희생자 몽양 여운형 선생님

 

https://youtu.be/xN1gh6kOQug?si=-yxpOypsQgdn_TBS

 

 

 

정치 암살의 희생자 고하 송진우 선생님

 

https://youtu.be/8u6h1uSojU4?si=jGDWWZ7f0Te44Sw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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