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도심 총격전 끝 24명 즉사·사형…실미도 50년,

온리하프 2020. 8. 2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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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총격전 끝에 공작원 자폭

1971년 8월 23일 오후 2시 15분. 서울 대방동 삼거리에 난데없는 총성이 울렸다. 시민들은 혼비백산했고, 멈춰선 인천 시내버스와 바리케이드로 막아선 경찰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정부가 철저히 비밀에 부쳤던 대북 침투 목적의 ‘실미도 부대’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다. 인천 실미도를 탈출해 서울로 진입한 공작원 중 20명이 즉사했고, 생존 공작원 4명은 이듬해 3월 모두 사형당했다. 남·북 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냉전 시대에, 총격전은 특수 범죄자의 난동으로 치부됐고, 실미도 부대는 그렇게 다시 역사 속에 묻혔다.

 

①50년 전 울린 총성의 진실은?…마침표 못 찍은 '실미도'

2020.08.23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의 육군 11보급 대대에선 49년 전 숨진 공작원들의 위령제가 열렸다. 2013년부터 국방부 주최로 매년 열리던 위령제가 이날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공식 행사는 생략한 채 유가족 10여명의 개별 참배만 진행됐다. 위령제에서 만난 고(故) 심보길 공작원의 아들은 “50년이 다 되도록 진상 규명이 끝나지 않았다"며 "유족들도 이제 지쳐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사형 집행 후 암매장된 고 임성빈 공작원의 여동생은 “오빠 시신을 아직도 못 찾아줘 너무 미안하다. 너무 보고 싶다"며 오열했다.

철저한 은폐로 50년간 다시 묻혀

정부는 총격전 직후 ‘군 특수범의 난동 사건’으로 규정하고 '실미도 부대'를 철저히 은폐했다. 실미도 부대 관련 서류를 불태웠고, 생존 공작원 4명의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했다. 또 이 4명은 사형 선고 직후 시신은 암매장됐다.

실미도 부대는 2000년 전후 다시 역사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남북관계가 풀리고 민주화가 이뤄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다. 여기저기서 진상규명 요구가 쏟아졌고, 마침 실미도를 다룬 소설과 영화로 세간에도 알려졌다. 특히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실미도’는 진실 규명의 불쏘시개가 됐다. 하지만 다소 허구가 섞인 탓에 유가족의 반발로 강우석 감독은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국방부 조사로 실체적 진실 접근

정부가 공식적으로 진실 규명에 착수한 건 2004년이다. 국방부가 실미도 부대의 존재를 처음 인정했다. 2005년에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했고, 2006년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역사학계는 이 조사로 실체적 진실의 개요는 드러났다고 평가한다.

“실미도 부대는 1968년 북한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응한 북한 침투 작전을 수행을 목표로 창설됐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주도로 공군이 민간인 31명을 특수목적으로 고용하는 형태였다. 훈련은 인권 유린 자체였다. 폭행과 실탄 위협 사격은 기본이고, 가족과의 서신이나 휴가가 허용되지 않은 감금 생활을 했다. 3년 4개월 동안 7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남북 간에 데탕트가 시작되자, 군은 공작원들을 방치한 채 처리에 골몰했다. 이들이 실미도를 탈출해 서울로 진입한 이유다.”(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

 

유가족, 절규 속에 진실 규명 요구

 

국방부의 조사는 진상 규명의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수사권이 없어 일부 의혹을 밝히는 데 실패했다. 사형된 공작원 4명의 암매장 장소도 찾아내지 못했다. 유족들에 대한 보상도 해결되지 않았다. 실미도 부대를 훈련시켰던 기간병들 또한 냉전 시대의 피해자지만 이들에 보상 방안도 미흡하긴 마찬가지다.

“1968년 1월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습격 시도 사건 직후 정부가 특수부대(실미도 부대)를 동원해 보복하는 건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문제는 그 옵션을 선택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겁니다. 방치했다가 대형사고가 났고, 대형사고가 일어났으면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국가의 성격을 보여주는 건데…. 냉전 시대에 개인의 인권을 유린한 채 국가는 무책임과 무능으로 일관했습니다.”(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진실에 더 다가서기 위해 기획 보도

중앙일보는 이번 주부터 ‘잃어버린 총성을 찾아서-실미도 50년’ 기획 기사로 실미도 사건을 다시 조명한다. 국내 언론사 중 처음으로 과거사조사위의 조사 보고서 전체 내용을 입수해 공작원 모집부터, 극한의 조건에서 인간병기로 키워진 혹독한 훈련, 기간병들과의 충돌, 공작원들의 반란과 탈출 등을 다룰 계획이다. 과거사조사위 보고서에 담기지 않았던 김신조 목사나 공작원 사형 집행을 한 군 검사(현 변호사), 암매장 관계자 등을 추가 취재했다. 중앙일보는 본 기획을 통해 어두웠던 냉전 시기 인권을 유린당한 공작원 등의 한을 달래고 아직도 절규하는 유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해 역사에서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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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이고 억울함 알리자"..결국 수류탄 터트린 실미도 그들

②탈출 D-Day, 날이 밝다

 

“3년 4개월 동안 참을 만큼 참았다. 다 죽이고 서울로 가서 억울함을 알리자.”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 인천의 무인도인 실미도. 해변에서 멀지 않은 가건물의 막사 안으로 여명이 비쳤다. 기간병들의 간단한 점호가 끝나자 공작원 2명이 발소리를 죽인 채 교육대장실로 숨어들었다. 군복을 챙겨입던 교육대장은 공작원이 휘두른 망치를 맞고 즉사했다. 공작원 둘은 카빈총 실탄 60발을 탈취해 내무반에서 청소 중이던 동료들과 나눠 가졌다.


총소리를 신호탄으로 실미도 탈출

 

오전 6시30분. ‘탕’. 새벽 공기를 가르는 총성을 시작으로 공작원들은 기간병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30여분간의 총격전 끝에 공작원들은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탄약창고를 털어 기관총과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실탄을 챙겼다. 부대를 장악한 공작원들이 다시 내무반 앞에 집결했다. 24명이던 공작원 중 2명이 교전 중 숨졌고, 생존자는 22명이었다. 공작원들은 다시 위장복으로 갈아입고 서울행을 결의했다. “서울 중앙청이나 사령부로 가 우리들의 억울함을 알리자.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폭하자.”

“기간병을 사살하지 않고는 도저히 탈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각자 장전된 소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이서천 공작원·재판기록) “공작원들이 ‘기간병 한 명쯤을 증인으로 남겨놓자’며 나를 살려줬다는 걸 나중에 들었습니다.”(생존 기간병 한모씨·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면담)

 

 

군, 초병 ‘중무장 병력 이동’ 보고에 비상

 

오전 8시45분. 공작원 22명은 실미도 근처 무의도에서 구한 작은 고깃배를 타고 실미도를 탈출했다. 정기성 등 공작원 4명이 배를 구해왔고, 나머지는 산 중턱에 몸을 숨긴 채 건빵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실미도를 출발한 공작원들이 탄 고깃배는 정오쯤 인천 송도 앞바다에 닿았다. 배에서 뛰어내리자 무릎까지 빠졌다. 갯벌을 빠져나온 공작원들을 육군 33사단 해안 초소병이 막아 세웠다. “잠깐 멈추시오. 어디서 온 부대입니까?” 초병의 눈초리가 번뜩였다. 정기성 공작원이 나섰다. “이거 보면 모르나.” 낙하산 모양의 부대 마크를 보여주며 “훈련 중”이라고 쏘아붙였다. 기세에 눌린 초병이 물러섰다.

오후 1시. 송도에서 인천 시내로 넘어가는 조개 고개에서 공작원들은 잠시 한숨을 돌렸다. 군복에 묻은 흙을 씻어내고 물을 나눠 마셨다. 마침 고개를 지나던 항도여객 버스를 잡아 탔다. 승객 6~8명이 타고 있었다. “서울로 가자!” 겁에 질린 운전기사가 버스를 출발하는 순간 매복해 있던 군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해안 초소를 무사 통과한 만큼 큰 탈 없이 서울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란 공작원들의 기대는 착오였다. 육군은 해안 초소로부터 ‘자동화기로 중무장한 위장복 차림의 병력 20여명이 이동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3~5분간의 교전 끝에 공작원 3명이 숨졌다. 또 버스 운전사가 오른팔 관통상을, 육군 하사 1명이 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서울 도착했지만 6시간 만에 탈출 실패

 

오후 2시15분. 군의 추격을 따돌린 공작원들은 수원발 태화여객 버스로 갈아타고 서울 대방동 삼거리에 도착했다. 버스 승객 7~8명이 탑승한 채였다. 삼거리에서 버스가 나타나자 노량진 경찰서 기동타격대가 총탄을 퍼부었다. 경찰의 급습을 받은 공작원들도 창밖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버스는 경찰의 총탄을 뚫고 수백m를 달렸지만 끝내 유한양행 본사 앞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섰다. 버스 안에 이제 남은 공작원은 8명, 피땀에 젖은 이들은 작전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실미도를 탈출하며 실패하면 자폭한다고 결의했던 공작원들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버스에서 민간인들이 기어 나오는 걸 보고 회사(유한양행) 간호사를 데리고 제일 먼저 버스에 올랐습니다. 운전석에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이 운전대를 끌어안고 축 늘어져 있었어요. 공작원들은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고, 민간인들만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터지지 않은 수류탄 2발도 보였고요. 부상자를 부축해 밖으로 내보내 잔디밭에 눕혔습니다.” (당시 유한양행 직원 이모씨·2006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면담)

 

 

정부 “무장공비 침투, 특수범 난동” 발표

 

실미도 공작원들의 탈출은 약 6시간 만에 서울 대방동에서 끝났다. 이날 공작원 24명 중 20명이 숨졌고, 4명 만이 살아남았다. 또 민간인 6명, 군경 20명이 사망했다. 사건 직후인 오후 3시쯤 간첩대책본부는 “무장공비들이 서울 침투를 기도했다. 민간버스를 탈취해 부평을 거쳐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했다가 군·경·예비군에 의해 저지됐다”고 발표했다. 약 3시간 뒤인 오후 6시 36분 정래혁 당시 국방장관이 발표를 수정했다. “공군 관리하의 특수범 24명이 격리 수용된 데 불만을 품고 관리원들을 사살, 집단으로 탈출, 난동을 벌였다.” 국방부의 발표 직전 실미도에서는 김모 소대장과 상급 부대의 최모 대위가 실미도 부대와 관련된 모든 서류를 불태웠다.

실미도 부대의 공작원 24명은 누구일까. 군은 어떤 이유로 사건 발표 직전 관련 서류를 모두 태워버린 것인가. 다음 회에서는 실미도 공작원 24명은 누구이고, 실미도 부대는 왜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한다. 실미도 부대 창설 직전 북한의 '김신조 게릴라 부대'가 청와대를 급습했다.

※2006년 발표된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보고서(국방부 과거사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1971년 8·23 실미도 부대 탈출.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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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부대 만든 그 말…"박정희 목 따러 왔다"

“내래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김신조 북한 공작원·1968년 1월 22일 남한 기자회견)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 남북 갈등 역시 최고조였다. 1953년 정전협정 후 잠잠하던 휴전선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남북은 ‘전선(戰線) 공작’으로 불렀던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불사했다. 특히 북한은 1967년 이후 집요하게 게릴라 공격에 매달렸다. 미군이 주둔해 있는 남한을 적화 통일하려면 전면전보다 게릴라전이 유리하다고 봤다.

 

③비극의 씨앗, 김신조 부대

 

북, 김신조 부대 ‘박정희 멱 따러’ 급파

 

북한은 급기야 ‘김신조 부대’를 남파한다. 1968년 1월 21일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 소속 31명의 게릴라 부대로 청와대를 급습했다. 김신조의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말대로 박 대통령 암살이 목표였다. 북한이 당초 계획한 부대 규모는 76명, 공격 목표도 청와대뿐만 아니라 육군본부, KBS, 공안 사범 수용소, 미국 대사관 등 광범위했다. 하지만 작전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부대원은 31명으로 줄이고 타깃도 청와대로 좁혔다. 북한은 당시 3단계 적화 통일 작전을 짰다. ①박 대통령 살해 ②8개 도에 공작원 1000명씩 남파해 전국 장악 ③인민군 공격으로 적화 통일 마무리 순이다. 3단계 작전의 시한은 단 20일이었다.

“부대원을 선발할 때 노동당원 등 출신 성분이 좋은 사람만 뽑았습니다. 어떤 지령을 내려도 100% 받아들일 충성심이 있어야 하니까요. 키는 적당해야 하고 얼굴은 표준형이어야 했습니다. 말하는 것도 서울말을 해야 했습니다. 경계심을 최대한 줄일 목적이지요. 지능이 높아야 하는 것도 선발 조건이었습니다.”(현재 김신조 목사·2020년 8월 14일 중앙일보 인터뷰)

청와대 전경. 중앙포토

 

 

北 출발 닷새 만에 청와대 자하문 도착

 

김신조 부대는 1968년 1월 16일 밤 북한 황해북도 연산군에서 출발했다. 다음 날 남방한계선을 넘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지령을 갖고 청와대로 진격하던 김신조 부대는 19일 파주시 야산에서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친다. 공작원들은 4형제를 제거하려 했지만,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땅 때문에 망설였다. 부대원 사이에서 “돌덩이처럼 얼어붙은 땅에 어떻게 시체를 묻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죄 없는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를 죽여야 하느냐”는 반문도 있었다. 김신조 부대는 다수결 끝에 4형제를 풀어줬다. “신고하면 가족을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을 잊지 않았다.

파주 나무꾼 우씨 4형제의 신고

 

김신조 부대는 북 출발 닷새 만인 21일 밤 10시쯤 청와대 지척에 도착했다. 청와대 공습 계획을 다시 숙지했다. 막 자하문 초소를 통과할 즈음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우씨 4형제가 풀려나자마자 파출소로 달려갔고, 군과 경찰은 즉각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 김신조 부대는 검문에서 “우리는 CIC(당시 남한 육군 방첩부대) 소속으로 특수훈련 뒤 복귀중”이라고 외쳤다. 종로서 경찰은 물러서지 않았고, 김신조 부대는 사격을 개시했다. 결국 공작원 31명 중 29명이 사살됐고, 1명은 월북,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는 투항했다. “파주에서 우씨 4형제를 살해했다면, 박 대통령 암살 지령도 성공하고, 적화 통일로 이어졌을 것”이란 게 김신조씨의 회상이다.

김신조씨가 1·21 사태 이후 동료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있다. 중앙포토

 

北, 김신조 남파 이어 美 푸에블로호 나포

 

청와대 습격 시도 이튿날 김신조는 수갑을 찬 채 기자들 앞에 섰다. 그는 거친 말투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소리쳤다.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그 와중에 북한은 바로 다음 날 미 함정을 나포했다. 원산항 근처에서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와 미 승무원 83명을 포로로 잡은 것이다. 김신조 부대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이 연이어 터지자 한반도엔 전쟁의 기운이 스멀거렸다.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보복을 다짐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박 대통령을 뜯어말렸다. 박 대통령은 1월 하순부터 2월 19일까지 주한 미국대사 포터를 10여 차례나 만나야 했다.

“한국 정부 수뇌부는 당시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까지 침투한 상황에서 보복은 불가피하다며 강경한 입장이었습니다.” (장지량 당시 공군참모총장·2006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면담)


미국은 당시 베트남전 장기화로 지쳐있었다.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원치 않았다. 푸에블로호 승무원의 안전한 복귀를 원하는 미국 내 여론도 비등했다. 남북 갈등에 개입하지 말라는 남한 내 목소리도 컸다. 박 대통령은 1월 26일 전국 군·검·경·중앙정보부·여당이 참여하는 긴급합동안보비상회의를 개최했다. 박 대통령은 ‘독자적인 대북응징보복 방침 수립’을 지시했다.

“북한 공작원들이 청와대 앞까지 침투할 때까지 뭣들 한 겁니까. 중앙정보부장과 공군참모총장은 보복 계획을 세우세요.”(박정희 대통령·1968년 1월 26일 긴급합동안보비상회의)

 

북한에 나포된 푸에블로호의 로이드 부커 함장과 승무원들이 배에서 끌려 내려오고 있다. 중앙포토

 

美 반대 속에 대북 보복 공격 착수

 

박 대통령의 지시에 군과 정보 당국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대북 대응 태세 강화가 골자였다. 우선 군복무기간이 3~6개월 늘었다. 예비군이 창설됐고, 육군3사관학교가 설립됐다.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을 시작했다. 남북 전선의 목책을 철책으로 전면 교체했다.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교련 실습이 생겼다. 간첩 억제를 위한 주민등록번호제도 도입이 시작됐다. 그리고, 극비리에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1968년 김신조 부대 사태 후 국민적 분노에 기반을 둔 실미도 부대 창설은 시대적으로 당연한 임무였습니다. 창설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곤란해요. 과거 국가적인 특수활동이 비하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국가정보원 연락관 A씨·2005년 국정원과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의 워크숍)


다음 회에서는 김신조 부대의 급습에 맞설 대북 보복 공격 계획의 핵심인 실미도 부대 창설을 다룬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실미도 부대의 목표는 분명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의 멱을 따는 것’이었다. 한반도 평화를 원하는 미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지휘봉은 군 대신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잡았다. 중정은 김신조 부대를 능가하는 실미도 부대를 만들기 위해 ‘매우 특별한 부대원’을 모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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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에 고공 침투해 폭탄으로 김일성 거처를 때려 부수자.”


1968년 1월 말. 김형욱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이 장지량 공군참모총장을 불러 주문한다. 열흘 전쯤 북한의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데 대한 맞불 작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진노하며 보복지시를 내렸고, 당시 최고 권력 기관을 자처한 중앙정보부가 총대를 멘 것이다. 중정은 공군에 북의 김신조 부대를 뛰어넘는 특수부대 창설을 지시했다. 공군을 동원한 건 고공 침투 작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④민간인 31명 북파부대 창설


“사태가 급하니 ‘필요한 서류는 나중에 챙기고 바로 실제 업무를 진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이철희 당시 중정 국제정보국장· 2006년 1월 25일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면담)

 

사형수 중심으로 공작원 모집 착수

 

중정의 지휘 아래 공군은 1968년 3월부터 사형수 중심의 공작원 선발을 시작했다.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사형수나 무기수를 물색했다. 사형수 등을 찾은 건 훈련이나 북파 작전이 실패해도 비밀에 부쳐 뒤탈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형수 중심의 공작원 선발은 무산됐다. 법무부 반대 때문이다. 법무부는 “사형수의 경우 사형 후 시신을 유가족에게 넘겨줘야 하는데, 작전 중 사망하면 시신 인도 의무를 지킬 수 없다”며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공군은 무연고자나 가족과 연락이 끊긴 사람 중심으로 공작원 선발 방향을 틀었다. 이들은 갑자기 사라져도 문제가 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다. 공군은 전국의 합기도나 태권도 체육관 등을 돌며 신체 건강한 20대 중에서 실미도 공작원 31명을 선발했다.

 

지난달 23일 경기 고양시 벽제 봉안소의 실미도 부대 단체사진. 우상조 기자

 

 

실미도 부대원 특별대우 보장

 

공군이 모집한 실미도 부대원은 31명, 북이 남파한 김신조 부대와 같은 규모였다. 공작원의 직업은 행상, 수리공, 서커스단원, 운동선수, 요리사 등 다양했다. 공군은 다양한 보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당초부터 지킬 생각도 없었고 끝내 공염불로 끝났다. 실미도 부대원을 기다린 건 감금과 목숨을 건 극한 훈련이었지만 초기 3개월을 제외하고 월급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김일성 목을 베어올 정신을 갖고 몸을 바치는 일이라고 했어요. 대신 특별 대우를 보장해준다고 했습니다. 임무 기간 중 월 600불 지급, 이틀에 한 번 신탄진 담배 한 갑 지급, 외출과 서신 왕래 자유 등 조건이었습니다.”(김병염 공작원 재판기록)

 

“3개월 훈련받고 이북에 갔다 오면 소위로 임관시켜 원하는 데로 배속시켜주고, 제대를 원하면 제대시켜 원하는 직장 취직을 알선해준다고 했습니다. 훈련 기간에는 장교후보생 대우를 해준다고 했어요.”(이서천 공작원 재판기록)

 

“6개월간 훈련을 받으면 미군 부대에 취직시켜준다고 약속했습니다. 훈련은 밖에서 뛰는 것이고 TV로 교육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한 끼에 400원씩 주·부식으로 식사가 나오는 등 다른 군대에서 볼 수 없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했어요.”(김창구 공작원 재판기록)


실미도부대 생존자들의 재판 증언이다. 공작원들 사이엔 ‘금고 이상의 전과를 가진 자’가 일부 있었다. 이들은 애초부터 장교로 임용되는 게 불가능했다. 또 미군 부대 취직 역시 미국이 대북 보복 공격을 반대한 상황에서 처음부터 실현되기 어려웠다.

탈출이나 사고 나면 자살로 간주

 

1968년 4월. 공군은 중정의 지시를 받은 지 3개월 만에 실미도 부대 창설을 완료한다. 공군 2325부대 산하의 ‘209파견대’가 공식 명칭이다. 하지만 이후 209파견대보다는 68년 4월 창설일을 빌려 ‘684부대’ 혹은 훈련 장소의 이름을 따 ‘실미도 부대’로 불렸다. 1968년 5월 실미도에서는 장교 1명, 사병 42명, 조종관 5명, 공작원 31명의 입교식이 열렸다.

“훈련 도중 도피나 탈출 또는 부주의로 인해서 사고 유발 시 자살 행위로 간주한다.”

31명의 공작원은 입교식에서 선서를 마친 뒤 임시 군번을 부여받았다.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 북한 주석 거처, 원산 원유저장소, 송림제철소를 폭파하는 것이 임부였다. 공작원 31명은 3개 팀(A·B·C)으로 나눠 편제됐다. 또 각 팀은 다시 돌격조·경계조·폭파조 등 3개 조로 구성됐다. 그러나 이들의 신분은 군인도 군무원도 아니었다. 남북이 대치하던 냉전 시기에 자유와 인권이 억압된 ‘실종된 민간인’에 불과했다. 소속도 모호했다. 공군 산하로 창설됐지만, 중정의 통제를 받았다. 실미도 부대장은 정기적으로 공작 훈련과 부대 운영 상황을 중정에 보고하고 지시받았다.

실미도 부대의 입교식 직후 공작원을 기다린 건 감금과 지옥 훈련이었다. 공작원뿐 아니라 그들의 훈련을 담당한 기간병에게도 실미도는 지옥으로 변한다. 다음 회에서는 실미도 훈련 장면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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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탕!”


굵은 기관총 실탄은 발뒤꿈치를 노렸다. 잔가지가 얼굴을 따갑게 치며 눈을 찔렀다. 탕탕탕! 푹-! 등 뒤에서 바짝 들리던 동료의 거친 숨소리가 멈췄다. 그 순간 힘이 풀린 다리를 잔뿌리가 감아챘다. 누군지 궁금했지만 되돌아볼 엄두를 못 냈다. 그저 언제 내 발목도 날아갈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죽자사자 등성이를 향해 내달렸다. 머릿속엔 ‘한 발만 늦으면 나도 죽는다’는 두려움뿐이었다.

 

⑤가혹행위로 얼룩진 훈련

 

'68년 5월: 지옥의 문 열린 실미도!

 

1968년 5월. 인천의 작은 섬, 실미도에 지옥의 문이 열렸다. 실미도 부대에 입소한 공작원 31명을 기다린 건 ‘인간병기’ 조련을 위한 지옥훈련뿐이었다. 기간병들은 공작원들에게 북파 공작에 필요한 산악 구보, 장애물 넘기, 외줄 타기, 해상 침투, 위장 등의 훈련을 반복시켰다. 기간병들은 훈련마다 ‘더 빨리’를 외치며 기관총으로 위협 사격을 가했다. 단순한 위협에 그치지 않았다. 산악 구보 중 황철복 공작원은 총알에 옆구리 관통상을 당했다.

김창구·이서천 공작원은 안전장비도 없이 외줄 타기를 하다 추락해 머리와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백사장에서 훈련을 하는 날은 바닷가로 끌려가 물속에서 군홧발로 짓밟히기 일쑤였다. 훈련 성적이 저조한 공작원은 바위 위에 세워진 채 위협사격을 받기도 했다.

“몽둥이찜질과 주먹질, 발길질 등을 당해 공작원들은 거의 다 골병이 들었습니다. 훈련을 못 한다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기합 또는 폭행을 당했습니다. ”(김병염 공작원 등 재판기록)

 

“제식 훈련을 할 때 발만 틀려도 침대봉으로 머리를 폭행했습니다. 한 대만 내리쳐도 머리가 갈라져 피가 흘렀고 의무병이 꿰맸습니다.”(기간병 김모씨·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면담)

 

2003년 5월 1일 찾은 실미도의 영화 세트장. 현재는 철거된 상태다. 중앙포토

공작원에겐 가혹행위, 기관병도 구타당해

 

실미도에서 훈련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가혹 행위는 빈번했다. 실미도에서 기간병은 반말, 공작원은 존댓말이 원칙이었다. 공작원 중 최고령자(36)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김병염 공작원은 뚜렷한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해 고막이 터졌다. 공작원들은 화장실이나 세면실 등에서 24시간 내내 실탄을 장전한 총을 가진 기간병의 감시를 받았다. 또 교육대장은 공작원을 더 강하게 훈련하겠다며, 공작원들이 보는 앞에서 교관과 기간병들을 구타하기도 했다.

“메밀을 수확하다 공작원 2명이 손을 뒤로 묶인 채 발길질을 당하면서 잡혀가는 걸 봤습니다.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하면 또 발로 차고 때리고 하는 걸 본 동네 부녀자들은 ‘군대 간 아들이 생각난다’며 모두 울었습니다.”(무의도 주민 윤모씨·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면담)

 

산악구보·폭파·위장·해상침투…반복 또 반복

 

실미도 부대의 엄한 군기와 혹독한 훈련은 북파 공작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였다. 실미도 부대는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습격(1968년 1월 21일)에 대한 보복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부대 운영자들은 강한 군기와 훈련만이 임무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봤다. 그래야 살아올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실미도 공작원의 하루는 오전 4시 30분 시작됐다. 기상과 함께 구보와 PT 체조를 했다. 오전 8시부터 구보, 줄타기, 산악행군 등이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오후 6시 10분부터는 정신 무장이나 북한 위장 행동 요령 같은 내무반 교육이 9시 30분까지 계속됐다. 10시 취침. 국방부가 1971년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968년 5월 10일 입소 이후 12주간 총 14과목, 520시간의 교육이 진행됐다. 이 중 사격이 150시간으로 가장 많았다. 종합훈련(63시간), 폭파(44시간), 산악훈련(48시간) 등이었다. 북파 공작 시 위장을 위한 인민군식 제식훈련도 포함돼 있다.

“공작원들은 카빈총 1정과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 1정을 받아 썼습니다. 평소 훈련 때는 북한군같이 자동소총을 사용하고 비상시에만 국군처럼 카빈총을 썼습니다. 북한에 침투해 인민군으로 위장하고 싸울 때 그들이 쓰는 총기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입니다.”(임성빈 공작원· 재판기록)

 

영화 ‘실미도’ 세트장. 중앙포토

 

개밥 훔쳐 먹고 뱀 잡아 배 채워

 

실미도 부대는 끼니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는 열악한 처우를 받았다. 공작원은 부대에 지원할 때 “월급으로 ‘600불(18만원가량)’을 받는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이 약속은 3개월 만에 거짓말로 드러났다. 5월 입소 후 3개월간은 매달 3200원의 봉급을 받았다. 당시 병장 월급 900원(1970년 기준)에 비해선 4배에 가까웠다. 하지만 3200원은 당시 물가로 라면 160봉지를 살 수 있는 금액에 불과했다. 3개월이 지나서는 이마저도 완전히 끊겼다. 봉급뿐 아니라 급식이나 보급품도 점점 줄었다. 실미도 부대의 보급품이 열악해지면서 공작원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부대 내 개밥을 훔쳐먹거나 산에서 뱀을 잡아먹는 공작원이 늘었다. 교육대장은 “우리나라는 식량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니 잘 먹을 수 없다. 인내력을 길러야 한다”고 방치했다.

“입대 후 1개월 동안은 쌀밥에다 쇠고깃국, 계란도 한 개씩 줬습니다. 그 후부터는 고깃국은 없었고 된장국이나 소금국에 보리밥을 줬습니다. 1970년 8월쯤부터는 수제비 또는 보리밥, 소금국 등으로 더 나빠졌습니다. 1971년 7월쯤부터는 밀밥만 나왔고요.”(이서천 공작원 재판기록)

 

‘김신조 부대’ 뛰어넘는 ‘인간병기’ 완성

 

공작원의 침투 폭파 역량은 일취월장했다. 아침마다 실미도 해안 1.5㎞를 3회 구보했고 야간에 공중침투방법인 기구 타기도 능숙해졌다. 부대 입소 6개월 만에 공작원들은 산악 6㎞ 구간을 김신조 부대 이동 속도보다 1분 빠른 26분에 완주했다. 해상에서는 5㎞를 1시간 만에 전진했다. 사격 명중률도 100%에 근접했다.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서 구르면서도 교관이 공중으로 던진 깡통 여러 개를 전부 명중시키곤 했다. 실미도 부대 입소 1년 만인 1969년 5월엔 군부대의 경계를 뚫고 서울 오류동~경기 수원시 간(25㎞), 오류동~경북 의성군 간(210㎞) 침투에 성공하기도 했다.

실미도에서 열악한 처우에 시달리면서도 지옥훈련을 이겨낸 공작원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 모가지를 딸 날’이 머지않았다고 기대했다. 드디어 1969년 10월 실미도 부대는 북한을 향해 출발한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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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김일성 모가지를 따러 가는구나.”


1969년 10월. 실미도 백사장에 어둠이 깔리자 검은 그림자 10여 개가 움직인다. 숨소리조차 죽인 그림자들은 서둘러 공작선에 오른다. 공작선은 칠흑 같은 바다로 모습을 감췄다. 공작선은 백령도를 향해 내달렸고, ‘실미도 부대’ 공작원 10여명과 기간병은 누구도 말이 없었다. 공작선에는 밤에 북한 상공으로 침투할 때 사용할 수소용 기구(氣球)와 개인화기, 폭약 등이 잔뜩 실려 있었다. 실미도 부대가 1년 반 동안의 지옥훈련을 끝내고 드디어 북한 침투 공작을 위해 출발하는 순간이다.

 

⑥취소된 북한 침투작전


실미도부대는 백령도로 출발할 때 윗선으로부터 명확한 북한 침투 명령을 하달받지 못했다. 하지만 개인화기로 중무장하고 폭약과 기구까지 싣고 백령도로 향하는 목적은 단 하나, 공작원이나 기간병이나 모두 ‘북파 공작 개시’를 직감했다. 한밤중 찬 바람이 때리는 바다 위에서 20대 청년들은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공작에 실패할 경우 북한 땅 어디선가 개죽음을 당할 수 있다. 그러면 나의 조국은 내 시신이나마 수습해 줄까. 나의 가족은 내 생사라도 전해 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실미도 공작원들은 ‘김일성 모가지를 따 금의환향할 수 있다’고 되뇌었다. 실미도 지옥훈련을 견뎌냈고, 자신들이 북한의 ‘김신조 부대’를 능가한다고 믿었다.

백령도 선발대 사흘 만에 회군 명령받아

 

백령도에 도착한 선발대는 북한 침투 전초 기지를 세웠다. 10여㎞ 떨어진 북한 땅에서 보이지 않게 섬 남쪽에 막사를 꾸리고 기구를 띄울 장소를 물색했다. 백령도에서 실미도 부대의 최종 목적지인 평양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150㎞, 바람이 북쪽으로 향하는 날 기구로 몇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이들은 1년 반 동안 생사를 넘나들며 동고동락한 후발대가 어서 도착해 평양으로의 침투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고대했다. 실미도에 남은 나머지 공작원 20명가량 역시 북쪽 바다만 바라보며 백령도 합류 명령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선발대가 백령도에 도착한 지 사흘째. 공작원들은 기간병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했다. 기간병들의 초조함이 읽혔고, 허공을 향한 욕설도 잦아졌다. 급기야 실미도부대는 북파 공작 일체를 멈추라는 지시를 받는다. 또 선발대는 ‘실미도로 즉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북파공작이 돌연 취소된 것이다. 기간병들 역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실미도 선발대는 이유도 모른 채 북한 땅을 뒤로하고 사흘 만에 회군했다. 실미도에 도착한 선발대를 맞은 건 풀이 죽은 동료들이었다. 서슬 퍼렇던 기간병들의 기세도 분명 달라졌다. 실미도 공작원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변화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8월 25일 실미도 해변가. 멀리 무의도가 보인다. 우상조 기자

 

실미도부대 책임자 김형욱 중정부장 전격 교체

 

인천에서 실미도 공작원들이 이유도 모른 채 백령도에서 회군할 당시 서울에서는 중앙정보부장이 김형욱에서 김계원으로 전격 교체됐다. 실미도 부대의 대북 침투 작전이 취소된 건 이들의 교체와 직접 결부돼 있었다. 무인도에 감금당한 채 혹독한 훈련과 반공 교육으로 세뇌된 31명의 청년이 ‘김일성 모가지를 따겠다’고 북침 공작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중앙정보부의 수장이 교체되면서 실미도 부대 작전 역시 급작스럽게 취소된 것이다.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김형욱 전 중정부장 회고록 『혁명과 우상3』 中

 

1969년 5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여름 날씨로 접어들자 이만하면 결사대가 야영해도 얼어 죽진 않겠다고 판단하고, 박정희에게 “평양에 결사대를 투입할 준비가 됐다”고 보고했다. 처음에는 그다지도 열렬한 관심을 보이던 박정희가 웬일인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박정희는 그때 이미 평양 당국과 비밀교섭을 모색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한 지 이틀 뒤에 훈련을 담당한 조천성이 청와대로 불려갔다 코가 쑤욱 빠져 돌아왔다.

“각하가 다른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보류하고 계획을 연기하라는 지시입니다.”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박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하. 연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 봐, 김 부장. 만약 그들이 우리의 기습작전에 보복해오는 경우 우리에게는 계속 투입할 병력이 없지 않나 말이야.”

“보충할 병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번에 그자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합니다. 국민들의 사기에도 영향이 많습니다. 우리는 북한놈들에게 당하고만 사는 존재라는 식의 패배의식이 팽배하는 것은 국민총화에도 지장이 많다는 것을 각하께서 깊이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그 뜻은 알겠어. 그러나 보류하자고. 내 말 알겠소?”

“알겠습니다.”

나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음성으로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네댓 달 뒤 나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나 실미도에서 훈련 중인 결사대에 대해서도 한동안 잊고 있었다.

 

1968년 7월 20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중앙포토

 

실미도 부대의 대북 침투 작전을 놓고 중앙정보부 내부 문서에서 우왕좌왕했던 정황이 포착된다. 어이없게도 주요 공작 목표조차 자주 바뀌었다. 김신조 부대 피습 직후 실미도 부대를 창설할 때만 해도 주요 공격 타깃은 분명히 김일성 북한 주석이었다. 하지만 1969년을 즈음해 공격 목표는 순안 비행장, 부전강 발전소, 풍천 미사일 기지, 공수산 미사일 기지, 선덕 비행장 순으로 5차례 바뀌었다.

안보지형 변화하자 골칫거리로 전락

 

중앙정보부장의 교체도 실미도 부대의 공격 목표가 바뀐 것도 이유는 단 하나, 1969년 중소 국경분쟁을 계기로 한반도 안보지형이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말 미국은 아시아 각국에 대한 군사 불개입과 아시아 각국 스스로의 방위를 골자로 한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한다. 서울 북부를 지키던 미 7사단과 2사단의 철수 카드도 나왔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북한과 국제공산주의에 맞서 스스로 안보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면서 북한에 대한 보복 공격 역시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의 안보 지형이 변화하자 실미도 부대는 순식간에 존재 이유를 잃었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골칫거리로 방치되기에 이른다. 부대 입소 시 약속받았던 훈련 기간 6개월은 기약 없이 늘어졌고, 급식도 개밥이나 돼지밥 수준으로 열악해졌다. 그렇다고 실미도에 가둬 둔 부대를 해체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훈련이 지옥이었다면, 이제는 기간병과 공작원이 뒤섞인 부대 자체가 지옥으로 변해갔다. 다음 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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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를 때려죽이고, 그 시신을 기름으로 태워 바다에 띄우도록 했다.”

 

⑦첫 하극상

 

공작원에게 몽둥이 찜질로 동료 살해시켜

 

발을 땅속에 파묻은 듯 공작원들은 버텼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등이 떠밀린 순서대로 나아가 몽둥이를 들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공작원 뒤에는 실탄을 장전한 기간병들의 눈빛이 서슬 퍼렜다. 대낮의 몽둥이질에 비명을 내지르던 윤 공작원은 이내 피를 토한 채 그렇게 숨이 멎었다. 윤 공작원의 사망을 확인한 파견 대장은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공작원들은 윤 공작원의 시신을 불에 태운 뒤 바다에 띄웠다. 그날 밤 공작원들에게는 와룡 소주(1970년대 인천의 3대 소주로 알려짐)가 공급됐다.

“하찮은 일로 정든 동료를 때려죽이게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시체를 디젤 기름에 튀겨 바다에 띄우도록 만든, 잔악한 비인간성에 몸서리쳤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비참한 말로를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임성빈 공작원·재판 기록)

 

임성빈 공작원 재판기록. 중앙포토

 


북한 침투를 위해 출동했다가 백령도에서 회군한 실미도 부대의 기간병과 공작원은 목표를 잃고 방치됐다. 북파 작전은 기약 없이 미뤄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존재 자체도 잊혔다. 부대 안에서 기간병의 가혹 행위는 일상이 됐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분노한 공작원의 하극상이 빈번했다. 윤태산 공작원의 어이없는 죽음은 훈련용 평행봉을 만들러 무의도에서 나무를 베던 중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됐다.

"술 사달라" 주먹다툼이 화근

 

윤 공작원은 박모 기간병과 단둘이 떨어져 나무를 베다 “술 한 잔 사달라”고 윽박질렀고, “안 된다”는 박 기간병과 싸움을 벌였다. 한참 주먹다짐을 한 두 사람은 “부대로 복귀하면 남들한텐 없던 일로 하자”고 약속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박 기간병을 본 동료 기간병에게 하극상 사실이 드러났다. 거듭된 추궁에 박 기간병은 “윤태산한테 맞았다”고 털어놓았다.

“김 중사가 실미도 밖의 상급 부대에 가 있던 파견 대장에게 무전을 해 ‘운동선수 규칙 위반했으니 귀대 바람’이라는 암호로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파견 대장은 그날 오후 4시쯤 부대로 돌아온 뒤 사무실에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김 중사와 이야기했습니다. ‘그놈 주먹이 세니까 꽁꽁 묶어서 천장에 매달아 놓을까 아니면 그대로 둘까 어떻게 할까’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한모 기간병·재판기록)

 

8월 25일 무의도에서 바라본 실미도. 썰물 때 두 섬 사이에 육지길이 만들어져 도보로 오갈 수 있다.

우상조 기자

 


윤 공작원은 며칠 동안 내무반에 감금당했다가 끝내 동료들의 몽둥이찜질이라는 어이없는 처벌로 사망했다. 공작원들은 재판도 없이 한낱 부대장의 지시에 의해 사적(私的) 처형에 처한 것이다. 실미도 부대 생존 공작원들은 군사재판에서 등에서 “입소 당시의 선서에 따라 온갖 가혹 행위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본인은 복무 중 고의과실을 막론하고 부대에 해로운 행위를 자행할 경우 어떠한 극형도 감수하겠습니다.”(1968년 5월 ‘실미도 부대’ 창설 당시 공작원 선서 내용 중 일부)

 

"형법 절차 없는 살해는 형사상 범죄행위"

 

국가라는 이름으로 공작원에게 가혹 행위를 일삼은 기간병의 행위는 정당화할 수 있을까. 기간병들은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와 면담에서 “하극상을 묵인하면 우리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당시에는 공작원 대부분이 사형수나 무기수 출신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 가혹 행위를 할 때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설령 실미도 부대원들이 사형수나 무기수라고 사적 처벌이 정당화될까. 더구나 실미도 부대원은 일부 행불자나 무연고자가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20~30대 청년이었다. 안김정애 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2과장은 “군 형법 등 적법한 절차 없이 인민재판을 하듯 윤 공작원을 살해한 건 명백한 인권침해이자 형사상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미도 부대에서는 이런 방식의 살인이 윤 공작원 한 명에 그치지 않았다. 다음 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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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두 놈은 너희 동기가 될 자격이 없다. 몽둥이로 때려죽여라.”


1968년 7월 11일 한낮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실미도 부대 연병장. 단상에 꼿꼿이 선 이모 소대장이 공작원들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밧줄로 꽁꽁 묶여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이OO·신OO 공작원을 죽이라는 지시였다. 천막봉을 손에 들고 멈칫대는 공작원들 등에 기간병들의 몽둥이가 내리꽂혔다.

 

⑧첫 탈영

 

실미도는 점점 죽음의 땅으로

 

눈을 질끈 감은 공작원들은 천막봉을 휘둘렀다. 그렇게 공작원 두 명은 숨졌고, 시신은 사격장을 파고 묻었다. 이날 밤 교육대장은 공작원들에게 와룡 소주(인천의 3대 소주)를 나눠줬다. 소주를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침상에 누운 공작원들의 눈에는 연병장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았고, 언젠가 그 피를 내가 흘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연병장에서 살해된 두 명의 공작원은 하루 전 실미도 인근 무의도에서 2인 1조로 야간 독도법(지도 보는 법)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오전 4시쯤까지 무의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민가 부엌에 숨어들어 소주를 마셨다.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기간병들에게 잡혔고, 훈련을 중단한 채 부대로 끌려왔다. 실미도 부대 교육대장은 이 소대장에게 “처형”을 지시했고, 이 소대장은 공작원들의 손으로 동료를 처단하라고 했던 것이다. “군기를 와해시키고 동료를 배신한 놈은 처형해야 한다”는 게 소대장과 교육대장의 결정이었다.

8월 25일 인천 용유초등학교 무의분교(옛 무의초)의 운동장. 우상조 기자

 

감금·가혹행위 길어지자 인내심 바닥나

 

실미도 공작원들의 탈영은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소 훈련 강도가 가혹 행위 수준을 넘어섰다. 공작원들의 달리기 속력을 높이겠다며 뒤에서 위협 사격을 하다 옆구리를 관통시키기도 했다. 안전 장비 없이 외줄 타기 훈련을 하다 추락해 머리와 다리를 다치기도 했다. 하지만 공작원들은 휴가는커녕 외출조차 금지됐고, 서신 왕래도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훈련을 받은 것이다. 거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먹거리조차 돼지 먹이 수준으로 열악해지면서 청년들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북파공작을 위해 백령도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후부터 공작원들은 기간병들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북파 공작 후 보상을 받아 새 삶을 살겠다는 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기간병들은 기간병들대로 공작원들의 저항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1970년 8월에는 윤OO 공작원이 박모 기간병을 폭행했고, 기간병들은 공작원들에게 윤 공작원을 몽둥이로 집단 린치를 가해 살해하도록 했다.

공작원 저항에 임의 처형으로 대응

 

실미도 부대 내에서 군기 사고가 나면 임의 처형이 일상화돼갔다. 실미도 공작원들의 집단 저항이 거세질수록 기간병과 지휘관들은 더 극악한 처벌로 진압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법 절차를 무시한 임의 처형은 사실상 살인 범죄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 근본적으로 군이 공작원들에게 탈영이나 하극상 죄를 덮어씌운 것도 부당하다는 게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의 지적이다. 실미도 부대가 만들어질 당시 공작원들의 신분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으로 채용됐기 때문이다.

 

8월 25일 실미도 해변가. 폐선이 눈에 띈다. 우상조 기자

 

 

“수영 훈련하다 익사, 유기치사 여지”

 

실미도 부대 내에서 억울한 죽음은 또 있다. 1969년 8월 22일 조OO 공작원이 중무장한 채로 바다에서 수영 훈련을 하던 도중 익사했는데, 기간병의 보호 조치 불이행에 따른 유기치사로 볼 여지가 있다고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기록했다.

“조OO가 힘에 겨워 물속에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데 김모 소대장이 ‘몽둥이로 때려죽이겠다’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다 물속에서 꼴깍꼴깍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김창구 공작원·1971년 재판 기록)


김 소대장은 이에 대해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와 면담에서 상반된 진술을 했다. “조OO가 20m쯤 떨어진 곳에서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여 ‘괜찮냐’ 하고 물었더니 ‘괜찮습니다’라고 하여 그런 줄 알고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대장님’ 소리가 들렸고, 조OO 쪽을 봤더니 물속으로 가라앉아 구조하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조 공작원의 시신은 화장되지 않고 실미도 남단 야산에 묻혔다. 현재 조 공작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남아 있다. 김 소대장은 “조총을 쏘며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고 주장했다.

 

8월 25일 실미도 내 조 공작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우상조 기자

 


백령도 회군 후 실미도 부대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면서 사건·사고가 잇따르고 공작원이 죽어 나갔다. 실미도가 죽음의 땅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실미도를 넘어 무의도 주민들이 피해를 보는 강력 사건이 발생한다. 다음 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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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못 견디겠다. 섬을 탈출했다가 걸리면 자폭하자.”


1970년 11월 어느 날 자정쯤. 어두컴컴한 내무반 안에서 누워 있던 황OO 공작원이 헛기침 소리를 냈다. ‘기간병들의 감시망이 헐거워진 지금이 때’라는 신호였다. 잠든 동료들을 뒤로하고 황 공작원은 강OO·강OO 공작원과 함께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무기고로 들어가 수류탄 3개를 챙겨 하나씩 나눠 가졌다.

 

⑨두 번째 탈영, 집단 성폭력


‘실미도 부대’에서 극단적 가혹 행위 일색의 훈련 도중 두 번째 탈영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는 공작원에게 약속한 훈련 기간(6개월가량)이 뚜렷한 설명도 없이 2년가량 초과한 상태였다. 한반도 정세가 전쟁 직전까지 갔다가 급격히 긴장이 풀리자 ‘김일성 모가지를 따겠다’던 실미도 부대는 하염없이 방치됐기 때문이다.

썰물 되자 무의도로 건너가

 

탈영병들이 자정 시간을 노린 건 기간병들의 감시망이 상대적으로 허술할 뿐만 아니라 썰물 때였기 때문이다. 썰물이면 실미도와 인근 무의도 사이에 바닷물이 빠지면서 폭 50m가량, 길이 300m가량의 모랫길이 만들어진다.

무의도로 건너간 세 공작원은 마을 여성 2명을 무의초등학교 숙직실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 무의초는 평소 야간 훈련 때 자주 찾았던 곳이라 범행 장소로 택했다. 그 사이 실미도 부대엔 비상이 걸렸다. 무장한 기간병과 공작원들이 달아난 3명을 추적하기 시작했고, 우선 익숙한 무의초로 향했다. 탈영병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직감은 들어맞았지만 성폭력이 벌어진 뒤였다.

 

 

8월 25일 무의도에서 바라본 실미도. 썰물 때라 육지 길이 만들어져 있다. 우상조 기자

 

 

집단 성폭력 후 민간인 12명 인질로

 

그런데 현장에는 예비군과 경찰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경찰이 사건을 처리하게 되면 비밀리에 결성된 실미도 부대가 외부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추적조는 “우리가 처리할 테니 철수하라”며 경찰을 물렸다. 탈영병들은 어느새 성폭력 피해 여성뿐 아니라 어린이 9명, 교사 1명 등 총 12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졸지에 탈영병이 된 공작원 세 명은 실미도로 끌려갈 경우 몽둥이로 맞아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황OO, 강OO, 강OO! 인질들을 풀어주고 자수하면 살려주겠다. 빨리 나와라.”

“개소리하지 마!”

 

 

자폭 시도 후 흉기로 극단적 선택

 

탈영병 3명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던졌다. 그러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대에서 수류탄인 것으로 알고 챙겨나온 무기가 사실은 연막탄이었던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굴을 딸 때 쓰는 도구가 눈에 띄었다. 3명은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복부, 목 등을 찔렀다. 인질들은 비명을 질렀다. 추적조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여기고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주변 가게에서 와룡 소주(인천의 3대 소주)를 사와 추적조 공작원들에게 1잔씩 먹인 뒤 ‘몽둥이를 들고 들어가 진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숙직실에 들어가니 탈영병들이 피를 흘리고 있어 들것으로 옮겼습니다. 상황은 새벽 3시에 끝났어요.”(김모 기간병·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면담)


탈영병 셋 가운데 황 공작원은 실미도로 옮겨지던 도중 사망했다. 강 공작원은 날이 밝자 유리창을 깨고 자해를 시도했다가, 파견대장의 지시를 받은 장모 공작원에 의해 대검으로 살해됐다. 다른 강 공작원은 실미도로 끌려와 내무반에 며칠 동안 치료 없이 방치됐다가 숨졌다.

 

8월 25일 인천 용유초등학교 무의분교(옛 무의초). 민간인 성폭력 사건의 발생 장소다. 우상조 기자

 

 

동료들 시켜 화장한 후 바다에 버려

 

실미도 부대에선 반기를 든 공작원을 살해할 때마다 디젤유(Diesel油)로 화장한 뒤 남은 유골을 바다에 버렸다. 이번에도 지시를 받은 공작원들은 죽은 동료의 시신 3구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화장하는 날은 비가 왔는데 기간병들이 ‘빨리 처리하라’고 명령해 공작원들이 사체를 조각내고 태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료의 시신을 그렇게 처리했으니, 공작원들은 제정신일 수 없었을 거예요.”(이모 군무원·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면담)


1968년 7월부터 1970년 11월까지 총 7명의 공작원이 실미도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6명이 탈출 등을 시도하다 불법 처형당했다. 더 큰 문제는 비극이 잇따르는데도 실미도 부대에서 군 수뇌부와 중앙정보부에 제대로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앙정보부 역시 부실한 보고를 검증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엔 위험하면 현지에서 즉결 처분하고 사후 보고하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리고 공작원들은 서류상 민간인 신분이었으므로 군법으로 처리할 수도 없었어요.”(한모 파견대장·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면담)


방치된 실미도 부대의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공작원과 기간병간 갈등 역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격화돼 갔다. 그러자 공작원들에 대한 회유책을 뽑아 든다. 다음 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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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3명의 부대 이탈, 집단 성폭행, 민간인 대상 인질극, 극단적 선택….

 

⑩성매매로 공작원 달래기

 

 

고생이 많다. 훈련받는 데 불만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아 봐라.

“들어올 때 6개월만 훈련하면 된다더니, 2년이 더 흘렀습니다."

“훈련이 너무 힘듭니다. 빨리 김일성 모가지를 따러 가게 해주십시오.”

“가족 면회를 하거나 아니면 편지라도 주고받고 싶습니다.”

“기간병들의 구타가 심합니다.”

“훈련만 하기가 너무 따분합니다. 오락 시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월급은 왜 안 나오는 겁니까.(첫 3개월간만 3200원씩 지급 후 미지급·당시 3200원은 라면 160봉지를 살 수 있는 금액)”

 

“공작원들은 가족과 연락이 안 되고, 편지도 못 보내고,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반발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유를 억압하면 반발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이모 군무원·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면담)

 

8월 25일 실미도 해변가. 폐선이 눈에 띈다. 우상조 기자

 

 

청년 공작원들 욕구 불만도 쌓여

 

 

청년들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는 것도 문제였다. 실미도 부대에서는 욕구를 이기지 못한 일부 공작원간 동성애가 적발되기도 했다.

“생존을 위협받는 준전시 상황 혹은 감옥같이 격리된 곳에서 생활하면 높은 스트레스 때문에 성욕이 매우 커질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하는 실미도 부대의 공작원들은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의 강한 성욕이 들었을 거예요.”(성의학 전문의 강동우 박사·2020년 9월 중앙일보 인터뷰)

 

 

부대가 내놓은 대안은 ‘집단 성매매’

 

 

한 파견대장은 공작원들과의 면담을 마친 뒤 ‘이러다가 폭동이 일어나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동원한 게 집단 성매매다.

“1971년 3월부터 5월까지 매 월말 2일간 3명씩 부대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나갔습니다. 여관에서 성매매 여성을 한 명씩 배당받고 하룻밤 자고 오는 것이었습니다.”(임성빈 공작원·1971년 재판 기록)

 

“인천에서 성매매 여성 10여 명을 실미도로 데려와 텐트를 치고 공작원들과 성관계를 갖게 한 사실이 있습니다.”(김모 기간병·2006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 면담)

 

“공작원들이 한 번 단체로 외출한 일이 있습니다. 은밀하게 인천 사창가로 가 성적 욕구를 해소했습니다.”(김중권 공군 검찰과장·2004년 월간중앙 인터뷰)

임시방편이 오래 갈 리 없었다. 극비리에 훈련하고 작전을 수행해야 할 실미도 부대의 특성상 보안 문제가 불거지기 때문이다. 기약 없이 늘어지는 실미도 부대의 지옥 훈련을 끝내는 근본적인 처방이 절실했다. 그러나 정부는 실미도 부대를 계속 방치한다. 급기야 일반인의 상식을 깨는 엽기적 사건이 발생한다. 다음 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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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부대’는 북한 침투 작전을 위해 공군 산하에 1968년 4월 창설됐다.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요원들은 연 2회가량 실미도를 찾아 훈련 상황을 점검했다. 중정 요원이 현장 점검 도중 한 번은 공작원 사이에 극심한 전염병이 돈다는 걸 확인했다. 공작원들에게 마이신(항생제)을 대량으로 먹였지만 듣지 않았다.

 

⑪엽기 가혹행위

 

“묘지 파 해골 물 마시게 하고 뼛가루 먹여”

 

의사의 진료가 필요했지만 누군가가 제안한 민간요법을 강행했다. 이들은 신분 노출 우려때문에 민간은 물론 군 통합병원에서도 치료받기 어려운 신세였기 때문이다. 민간요법은 병 걸린 공작원들에게 해골 물을 마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김모 기간병은 공작원들을 데리고 실미도 내 한 무덤을 파헤쳤다. 중국 선원의 묘였다고 한다. 해골 안에 물이 반 이상 차 있고 노란 기름까지 떠 있었다. 공작원들은 “도저히 못 먹겠다”고 물러섰다. 그러나 기간병의 기세에 눌려 억지로 마실 수밖에 없었다. 약효가 있을 리 없었다.

“공작원 중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많았는데, 담력 배양도 할 겸 실미도 내 중국 사람 묘를 파내어 해골 물을 마시게 하였음.”(2005년 국방부 실미도사건 진상조사 T/F 조사보고서)

 

“해골과 굵은 뼈를 골라 가지고 온 뒤 굵은 뼈 일부를 절구통에 넣고 빻았습니다. 공작원들에게 조금씩 나눠줬는데, 먹지 않고 주저해 제가 먼저 시범으로 먹은 뒤 다 먹게 했습니다. 빻지 않은 해골 등은 내무반 앞에 걸었습니다. 그게 부대 표지가 된 거예요.”(김모 기간병·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면담)


실미도 부대 사진에 등장하는 해골이 바로 중국인 묘에서 파 온 뼈라는 것이다. 실미도 부대는 창설된 지 2년 반가량 된 1970년 11월까지 공작원 31명 중 7명이 각종 사건·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특히 동료의 죽음을 지켜본 공작원들은 ‘나도 언젠가 저렇게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불안이 깊어졌다. 실미도 부대에 폭동 조짐이 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부대 해체는커녕 집단 성매매나 해골 물 마시기 같은 엽기행각이 발생한 것이다.

8월 25일 실미도 해변. 우상조 기자

 

“기간병에겐 해골 가루 섞은 소주 먹여”

 

실미도 부대 창설 초기에도 유사한 가혹 행위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대상은 공작원이 아니라 기간병이었다. 실미도 부대의 선발대원이던 김모씨는 2004년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육대장이 ‘김일성의 목을 딸 정도의 특수 공작원을 양성하려면 교관부터 강심장이 되어야 한다’며 소주잔에 해골 가루를 넣고 그 위에 소주를 부어 기간병들에게 한 잔씩 마시게 했습니다. 해골 소주를 먹인 이후에는 ‘너희는 인간의 뼈를 갈아 마신 인간이다’며 ‘이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니까 공작원들을 인간적으로 대하지 말고 악귀처럼 훈련하라’고 명령했어요.”

조승연 인천의료원장은 “해골을 갈아 마신다거나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는 행위가 의학적으로 효능이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며 “되레 먹는 사람의 건강을 해칠 위험이 크다”고 했다. 특히 “뼈 주인이 보유하던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고, 무덤에 묻혀 있던 뼈라면 오염 확률이 더 높다”는 게 조 원장의 지적이다.

실미도 부대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훈련 기간이 3년을 넘기게 된다. 이제 실미도 부대에선 시한폭탄의 초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다음 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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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훈련 못 받겠다. 실미도에서 나가겠다."


1971년 5월 어느 날. 산악 구보 훈련을 받던 정○○ 공작원이 산에서 내려와 식당으로 뛰어들더니 식칼을 집어 들었다. 그는 식사 준비에 한창이던 기간병 목에 흉기를 들이대며 더는 훈련을 받지 않겠다고 소리쳤다. 실미도 부대 입대 당시 약속했던 훈련 기간(6개월)이 2년 반쯤 더 지난 때였다. 동료 공작원들이 모두 달라붙어 정 공작원을 진정시킨 뒤에야 그는 울부짖으며 칼을 내던졌다.

⑫D-Day 초읽기

 

“살길은 실미도 탈출뿐”

 

실미도 부대에선 하극상이나 탈영 등을 저지른 공작원은 동료를 시켜 때려죽이는 게 다반사였다. 공작원 6명이 동료의 몽둥이찜질로 숨졌다. 이번에는 교육대장이 정 공작원 앞에 대검을 내던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지시였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정 공작원은 울음을 터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죽더라도 북에 가서 김일성 모가지를 따고 죽겠습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교육대장은 대검을 거뒀다. 반기를 든 공작원이 처벌 없이 복귀한 건 처음이었다.

“사건은 그렇게 묵인되었지만, 부대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만 갔다. 누구나 이 섬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모두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았다.”(양○○ 기간병 회고록)

 

8월 25일 실미도 야산에서 바라본 해변. 멀리 무의도가 보인다. 우상조 기자

 

부대 심상찮았지만 “기다려라”

 

실미도 부대의 파견대장·교육대장 등도 부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1970년 하반기부터 상부에 “출구 전략을 마련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남북 관계가 개선돼 실미도 부대의 목표였던 북한 침투 공작 필요성이 없어졌다면 부대를 해체하자는 건의였다. 공작원들을 사회로 돌려보내거나 군의 부사관으로 임관시켜달라고도 했다. 일각에서는 “‘인간 병기’로 키운 공작원들을 모두 사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보고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부대 해체 건의 관련 보고는 공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부 장관에게까지 올라간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은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은 2006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 나온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의 진술이다.

“실미도 부대가 공군 소속이었지만, 공군이 자체적으로 부대를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창설한 부대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공작원들의 신분은 군인도 군무원도 아닌 민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1971년 1월쯤 중정과 협의를 하도록 정래혁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했는데, 장관은 ‘알았다, 연구해 보자’고만 했습니다. 얼마 후 다시 정 장관을 찾아갔지만 ‘선거철이라 바쁘니까 10월까지 기다려라, 그때 가서 해결해주겠다’고 답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정 장관은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실미도 부대 해체 안 등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이에 대해 정 전 국방부 장관은 “김두만으로부터 실미도 부대 해체 등의 건의를 받은 적 없고, 김두만이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국가에 속았다” 배신감

 

중정은 실미도 부대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특별한 대안을 내놓지 않았다. 실미도 부대 교육대장이 공작원들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봐라”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공작원들은 모든 탄원이 거부당했다고 생각했고, 국가에 대한 배신감이 깊어져 갔다.

1971년 8월 20일. 드디어 실미도에 시한폭탄이 장착된다. 공작원 8명이 외부에서 구해온 소주를 몰래 마시다 적발돼, 공작원 전체(24명)가 약 40분 동안 집단 구타를 당하는 처벌을 받은 것이다. 이 가혹 행위로 심○○ 공작원이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심 공작원을 옆에 뉘어 놓고 모인 공작원들은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털어놨고, 탈출 논의로 이어졌다. ‘모든 공작원이 실미도를 탈출한 뒤 억울한 사정을 서울의 높은 사람에게 알리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기간병 죽여야 우리가 산다”

 

“서울 중앙청에 가서 국무총리를 만나 4년 가까이 고생한 내용과 국가에 배신당한 사실을 직접 호소하기로 결심했습니다.”(임○○ 공작원·재판 기록)

 

“사령부나 청와대에 가서 실미도의 실정을 폭로하려고 했습니다.”(이○○ 공작원·재판 기록)

 

“중앙청 광장이나 시청 광장에서 휴대하고 있던 총기를 땅에 놓고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폭로하고 후배들에게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당부한 뒤 그 자리에서 자폭하려 했습니다.”(김○○ 공작원·재판 기록)


공작원들이 잡은 D-Day는 1971년 8월 23일 월요일. 눈앞의 무장한 기간병 등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제였다. 이들이 공작원 24명의 탈출을 눈감아 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려면 기간병을 모두 죽여야 한다.” “죽이지 말고 감금한 뒤 탈출하자.” 공작원들의 고민이 시작됐다. 다음 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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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기만해 35년간 실미도 공작원을 사형수 등 범죄인으로 오인하게 했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공군 2325전대 209파견대)’ 공작원 24명의 탈출이 시작됐다. 1968년 5월 실미도 부대에 입교해 지옥훈련에 시달린 지 3년 4개월 만이다. 공작원들은 이날 아침 점호 직후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소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채 서울로 향했다. “6개월만 훈련하고 김일성 모가지를 따면 장교로 임관시켜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왜 4년이 되어가도록 훈련만 시키는 겁니까.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들이 탈출을 감행한 이유다. 서울로 향한 건 국민과 ‘높으신 분’들께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⑬총격전 후 7개월만에 사형 집행

죽음으로 3년 4개월 만의 지옥 탈출

공작원들의 탈출은 실패했다. 그들은 실미도를 벗어나 인천의 여객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갔다. 하지만 서울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근처에서 군과 경찰에 막혔고, 공작원들은 총격전 끝에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이들의 탈출 과정에서 공작원 20명을 비롯해 기간병 18명, 경찰 2명, 민간인 6명 등 46명이 숨졌다. (실미도②『시민 탄 버스에서 총격전···결국 수류탄 터트린 실미도 그들』)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이 수류탄 자폭을 한 직후 현장. 중앙포토


한낮의 서울 도심 총격전은 국민이나 정부에게 충격이었다. 정부는 사건 직후 실미도 부대의 존재를 부정한다. 국방부는 그날 오후 3시쯤 대간첩대책본부를 통해 “무장공비들이 서울에 침투했다”고 발표했다. 3시간쯤 후 정래혁 국방부 장관은 “공군 관리하에 있던 특수범들이 탈출하여 난동하였다”고 정정했다. 군사편찬연구소의『국방편년사(1971~1975)』는 1971년 8월 23일의 사건을 최종적으로 특수병의 난동으로 기록했다. 정부는 또 물밑에서 실미도 공작원들을 ‘사형수 집단’ ‘무기수 집단’으로 내몰았다. 모두 거짓이었다. 공작원들은 민간인 신분이었고, 일부 전과자가 섞여 있었지만, 체육관을 다니거나 행상 등을 하던 젊은 청년이었다.

“정부 당국자 간에 발표내용이 다르고 끝까지 국민을 속이려 들었다…무장공비도 아닌 자기 나라의 특공결사대에 의해 수도 서울이 대낮에 난장판이 되고….”(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회고록 『혁명과 우상3』 中)

 

“국민을 기만하여 35년 동안 실미도 공작원들이 사형수 등 범죄자인 것으로 오인하게 하였다.”(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실미도사건 진상보고서』)

실미도 서류 불태우고…생존자엔 “입 다물라”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사건을 조작해 발표하는 사이 실미도에서는 부대 관련 서류를 소각했다. 실미도 부대에서 살아남은 김모 소대장과 상급 부대(공군 2325전대)의 최모 대위가 서류 뭉치를 불태웠다. 이때 소각되지 않은 서류는 국군정보사령부에 넘겨졌고, 1997년 가을 보안 감사를 앞두고 이모 소령이 소각했다.

버스 안에서 생존한 공작원 4명에 대해서는 조직적인 회유와 협박을 가했다. 실미도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윗선’의 지시를 받은 김모 기간병이 공작원 4명을 만나 “조사가 들어오면 입을 다물고, 나와 같이 월남(미국과 전쟁 중이던 베트남)에 가자”고 회유했다. 또 김 모 전 실미도 부대 파견대장은 생존 공작원에게 “실미도에서 잘 먹고 잘 있었다고 대답하라, 그러면 살려준다”고 강요했다.

생존 공작원들은 그러나 실미도 생활을 낱낱이 증언했다. 하지만 이들의 증언은 공군 수사당국의 ‘축소 수사’로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당국은 실미도 안에서 기간병들이 공작원들끼리 동료 대여섯 명을 때려죽이도록 하거나, 공작원들의 실미도 탈출 과정에서 기간병·경찰·민간인 등이 숨진 경위조차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서울 대방동의 사건 현장. 중앙포토

7개월 만에 사형 집행…50년째 매장지도 숨겨

공군본부 검찰부는 생존 공작원 4명에 대해 초병 한 명을 살해한 혐의만으로 군사 재판에 넘겼다. 이 과정에서 공작원 4명을 사건 직후부터 구속했지만, 가족에게 알리지도 변호사 선임권을 고지하지도 않았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는 당시 이런 축소수사로 사건의 진상이 은폐됐고, 공작원들은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마지막까지 침해당했다고 지적했다. 군사 법원은 1심과 2심 모두 공작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공작원 4명은 모두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실미도 부대의 관리 책임이 있는 군 측에선 4명이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됐을 뿐이다. 김모 공군 2325전대장(대령)이 가장 높은 직책이었고, 그나마 이모 2325전대 공작과장과 최모 2325전대 첩보통신소장 등 2명은 1심 진행 중 공소 취소 처분을 받았다. 결국 김 2325전대장과 한모 실미도 부대장 등 2명에 대해서만 재판이 진행됐고, 이들은 각각 선고유예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실미도 부대 창설을 주도하고 관리한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은 수사 선상에 오르지도 언급되지도 않았다.


1972년 3월 10일. 서울 구로구 오류동의 공군 2325전대 안에서 공작원 4명의 사형이 비밀리에 집행됐다. 서울 총격전 발생 7개월 만에 수사, 재판에 이어 사형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암매장됐다. 군 당국은 이후 암매장지에 대해 침묵했다.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유족들은 유골은커녕 암매장지조차 찾지 못했다. 군 당국은 2005년 처음 유해 발굴을 시작했다. 국방부는 “현재로썬 암매장지를 벽제로 추정하는데, 수차례에 걸친 발굴로도 못 찾았다. 수해로 떠내려갔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사형당한 4명의 시신은 어디에 묻혀 있을까.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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