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국전쟁 6.25--

온리하프 2017. 11. 1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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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신 한국이 분단된 이유?


독일의 상황~~


당시 유럽전선은 독일이 동쪽으로는 소련하고 직접적으로 전쟁중이었고,

레닌그라드나 스탈린그라드까지 독일이 위협하긴 했지만, 소련의 반격에 의해서 오히려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할 정도로 전세가 뒤집어졌다. 즉, 소련이 직접적으로 독일 영토를 지배했다는 것이죠.


연합국 역시 과거 서독의 영역 역시 실효 점령을 합니다.


즉 독일의 경우는 각 진영이 실질적으로 싸우면서 점령하는데 독일이 반땅이 되었고,

실제로 서로 협상하면서 독일 반땅 하기로 합의를 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 동북아시아는 어땠을까요?

여긴 소련보단, 미국이 다 해 먹은 전선입니다. 소련은 독일하고 싸움에 치중했기에 일본하고는 전투를 안 했습니다.

미국이 열심히 태평양 군도들을 하나 하나 치열하게 싸우면서 먹고 있는 와중에도 말이죠.

 결국 독일이 항복한 이후에야 소련은 동북아 전선에 뛰어 들게 되고, 이 때는 이미 일본 원자폭탄 맞고 TKO 되어가고 있던 상황입니다.

일본 열도 자체에 대한 실효 점령은 미국이 이미 일본에게 받아낸 상황이었고 남은 건 한반도 정리였던 상황에서 여러가지 복잡한 변수들이 터집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제 어제의 동지였던 소련이 오늘의 적이 되어 가는 시점에서, 태평양으로 소련이 튀어 나오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일본, 대만,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동북아시아를 막아두면 가능했고,

게다가 명분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소련이 일본에 대한 요구를 하기에는 소련으로서도 뭐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본 분단이 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죠.


반대로 한반도는 달랐던 것이 소련의 개입으로 만주에 있던 관동군 해체 작업이 들어갔고,

이 관동군 편제가 북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


미군이 일본쪽에 신경 썼는 지 의외로 한반도에는 소련군보다 늦게 들어 옵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이 합의를 보게 되는데, 38선 기준으로 하자고 합의를 보면서 남북이 분단이 되는 시점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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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복기… 위기의 근원 파헤치다

한반도 연구 전문가 美 브루스 커밍스 교수
새로운 사료 토대로 한국전 원인 심층 분석
일제강점기 항일세력·부역세력 분열
소련 남하 저지 美 대초승달 전략 등
시대적 상황 짚으며 고착된 분단까지 진단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 지음/조행복 옮김/현실문화/2만5000원



“인천상륙작전에서 한·미 장병은 함께 싸웠고 함께 죽었고 함께 승리했다.”

최근 국빈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회의사당 연설을 통해 6·25전쟁의 한 장면을 상기시킨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2분간의 국회연설에서 “(북한은) 미국을 시험하지 말라”며 북한을 압박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다.


혹한의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 최정예 해병 1개 연대 3000여명이 몰살당하고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만든 10군단이 패퇴하는 치욕을 당했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잊고 싶어 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도 이런 치욕스런 역사를 덮었을 것이다.

최근 비밀 해제된 6·25전쟁 사료를 중심으로 전쟁의 원인을 심층 분석한 책으로,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내용들이 적지 않다.

이 책 저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시카고대학 석좌교수는 6·25전쟁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미국 패권의 역사’ ‘김정일 코드’ 등 저서들이 국내에 알려져 있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이 책에서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실수는 북한의 실체를 무시했으며 당시 중공군의 개입을 오판한 데 있으며, 결국 참혹한 패배로 이어졌다”면서 “이는 지금도 진행형”이라고 지적한다.
연합뉴스


저자는 이 책에 대해 미국인이 잊지 않기 위해 쓴 6·25전쟁 기록이라고 했다.

미국인이 주된 행위자로 참여해 4만여명의 미군이 전사한 3년1개월 간의 전쟁은 미국전쟁사에서 패배로 기록되어 있다.

미군이 패배한 주된 이유는 적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지금도 미국인들은 여전히 북한을 모르고 있다.

저자는 연일 북한을 위협하는 트럼프 대통령 역시 북한의 실체를 얼마나 이해하는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를 뒤집어보면 전쟁의 원인, 특히 북한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미국은 대북 전쟁 내지 협상에서 실패하지 않을 것이란 점도 시사한다.

저자는 6·25전쟁의 기원을 1930년대 만주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벌어졌던 항일투쟁에서 찾는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두 세력으로 분열됐다.

‘항일세력’과 ‘부역세력’이 그들이다.

만주에서 격렬한 유격전을 벌였던 항일세력은 북한 지도부의 핵심 계보를 형성했다.

반면 남한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소련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대(大)초승달’ 전략을 펼쳤다.

즉, 소련 포위를 목적으로 소련 주변부에 자생 가능한 정권을 배치하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일본의 산업을 부흥시켰고 남한을 이에 연결시키고자 했다.

이는 남한에서 부역세력의 복권을 부추겼고, 많은 친일 부역세력이 청산되기는커녕 요직을 차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같은 남북한 간의 골은 미국과 소련이 성급하게 그은 38도선을 경계로 첨예하게 부딪쳤다.

그런 점에서 북한 지도부가 강조하는 항일 경력은 여전히 북한 정부의 정치적 정당성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활용되었다.

애초 미국은 한반도의 이런 구조적 성격을 간과했으며, 이는 북한의 체제와 지도부를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저자는~

“오늘날 미국의 대북정책 역시 역사적 무지와 역사의식의 부재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한반도의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고 한탄했다.

6·25전쟁 가운데 미국이 모르는 것 중 하나는 전쟁이 유례없이 참혹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민간인 학살의 더러운 역사도 끼어 있다.

저자는~

“북한을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로 보는 미국인의 생각과 달리, 그 최악의 범죄자는 겉보기에 명백히 민주주의 동맹국인 남한이었다”

고 지적한다.

이런 사실은 전쟁 직후 맥아더의 검열이 시행되면서 금지되고 잊혀졌다.

그래서 지금도 남한의 잔학 행위를 거론하는 것은 편견이자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결론에서

“(지저분한 학살 등의) 역사적 증거가 지구상 최악의 참을 수 없는 독재 체제라는 지금의 북한 이미지와 모순된다면,

그것은 미국인들이 왜 한국에서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이라고 했다.

그러면 앞으로 이런 대립 구조의 극복은 불가능한 것인가.

저자는

“과거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이러한 이해 없이는 한반도를 둘러싼 대립의 극복이 불가능하다”

고 했다.

한반도 역사에 대한 미국인의 망각은 역사의식 없는 강경한 정책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북한을 더욱더 완고한 유격대 국가로 만들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 김대중·노무현 이후의 남한 정부는 이전 시기에 일궜던 성과들을 후퇴시켰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이밖에도 6·25전쟁 이후 미국은 급속히 군산복합체 산업을 확장시켰고,

이는 미국을 사상 유례없는 세계 경찰국가가 되도록 했다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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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구소련과 미국에 의해서 어설픈 38선이 그어지고,

그랬지만 남북이 어느 정도 왕래가 되었고,

구소련과 미국의 신탁통치가 진행이 되면서

냉전체제 하에서 북쪽은 구소련이 관리하고, 남쪽은 미국-미군이 주둔을 하게 되면서


어설픈 2개의 국가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지면서, 구소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김일성이 한국전쟁 준비를 하고, 어느 정도 미국의 정보로 충분히 알 수 있는

전쟁이었지만,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을 합니다.


그리고 3년간 치고받고 하다, 다시 구소련과 미국에 의해 휴전이 되고

그때의 휴전선이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결국 구소련과 미국의 장난..!!


이 지구상에서 큰 전쟁은 절대 우연으로 발발하지 않습니다.

한국전쟁도 구소련과 미국의 냉전체제 및 장기적인 이익을 위한 하나의 큰 이벤트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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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당사자라는 사실은 생각에서도 많은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전후 약 2세대가 지나면서 한국전쟁에 객관적인 시선을 담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실제의 모습에 대한 말할 수 없었던 기억마저 사라지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은 이렇게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한 책이고 기억해야 할 점을 짚고 있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한반도 내에서의 전투라는 내전의 성격보다 훨씬 크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소련과 미국이 깊숙히 개입되어 있었고 중국과 서구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했던 국제전의 성격마저 갖고 있다.
전쟁의 발발과 과정 그리고 전후에 있어 남북한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사건이다.

2차대전 종전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력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력으로 나뉘어 체제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공산화정책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이에 대해 군사적 대결도 가능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소련은 1946년 이란사태와 1948년 베를린봉쇄건을 통해 계속 미국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일어난 애치슨 선언 등에서 나타난 미국의 정책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해 남북한의 대립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의견도 있다.
중심부 즉, 미국과 소련의 대결을 주변부 한반도에서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무력대결을 통해 공산세력에 대한 저지의지를 강하게 보여준 셈이고~
소련은 공산화전략에는 차질을 입었지만 중국의 확실한 등장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할 수 있는 세력임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구소련의 해체 전까지 있었던 냉전체제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엄청난 군비를 통한 군사적 대립에 해당국가에 대한 통제가 심화된다.
또한 한편으로는 남북한이라는 대리전을 통해 서로의 힘을 확인하고 이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발전을 막았던 계기도 된다.

남북한 내부적으로도 한국전쟁은 체제안정화(?)에 큰 역할을 한다.
남한이나 북한모두 불안정하게 정권을 잡았던 이승만, 김일성에게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반공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고 김일성 역시 당내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국전쟁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 체제 안정화에도 큰 기여를 한다.
서로 상대방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산업기반을 모두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남북한 모두 새로운 경제체제를 도입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시범적 대립장소가 되면서 남북한 모두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게 된다.
국가재정(수입)이 남한의 경우 1959년 52%, 북한의 경우 1955년 28%가 해외 원조가 차지하게 되었다.
농업중심의 남한의 경우 전근대적 유산을 청산하고 자본주의체제를 급속하게 발전시킬 토대를 형성했고,
상업자본이 발달했던 북한은 한국전쟁을 통해 체제의 반대하는 자본세력들이 제거되었기에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할 수 있게 되었다.

남한사회를 규정하던 헌법의 변화는 남한에서 더 강하게 드러났는데 균등경제의 정신을 담고 있던 1948년 건국헌법이~
1954년에 이르러 시장경제 중심으로 변경되었다는 점이다.
즉, 남한은 1948년 건국보다는 1954년의 체제가 이후의 체제를 형성했다.
사실 균등경제는 남한 내부의 지주, 소작의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중심의 재건을 원했던 이승만 정부의 생각이었지만,
미국은 미국의 자유로운 투자를 위해 시장경제를 강력히 요구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던 이승만정부는 균등경제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현재의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는 기틀이 되었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 현대가 모두 이 때 시작된 기업이라는 점에서도 현재의 남한 자본주의는
전부 미국의 자본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남북한에 끼친 영향 중에 재미있는 사실중에 하나는 분단국가였던 독일과의 관계이다.
동독의 경우 공산주의 연대에 따라 비자발적인 지원을 북한에 하게 되는데 동독 기술자의 파견과 북한대학생 유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동독기술자의 파견은 동독기술자들의 식민주의적 행태와 그런 행태에 대해 좋은 인식을 하지 않았던 북한과
북한 내부사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다.
북한의 대학생파견의 경우도 귀환한 유학생들이 전문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몇 몇 유학생들은 자본주의 세계로의 탈출과 유학생을 따라온 동독여성들의 북한에서의 부적응 등으로 성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자극받은 남한은 서독에 견습생 파견 등 강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이에 따른 것이 바로 파독간호사와 광부이다.
그러나 독일로 파견된 광부들이 실제 광부가 아니었다는 점과 서독 역시 당시 열악한 광산업을 대체하는 효과를 얻었기 때문에 남한은 외화획득, 서독은 노동시장 안정이라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켰던 관계였을 뿐이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도 파독간호사와 광부들이 서독에 이민을 신청하는 등 예상외의 결과에 직면하게 되며 모순에 빠진다.

한국전쟁 과정 역시 동서독에 영향을 끼쳤다.
동서독 양측이 한국전쟁을 자신들의 체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동독의 경우는 미국제국주의에 대한 경고로 서독은 스탈린 공산주의에 대한 경고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내부적으로는 이런 경고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동독의 경우 전쟁위험이 개인주의적인 방어형태로 나타났고 서독 역시 전비증가에 대한 우려로 나타났다.
약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한국전쟁을 체제경쟁과 무력통일이 갖는 위험성에 대한 교훈을 갖게 되었고 느슨한 대화의 끈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전후 남한사회는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사회가 되었다.
반공의식에 의한 자기통제 매커니즘이 발동하는 반공규율사회가 되었다.
이런 반공규율사회를 지속시키 위해서는 지속적인 전쟁의 기억이 필요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국가의 공식기억만이 필요했다.
'잊지말자 6.25','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표어아래 한국전쟁에 대한 어떤 논의도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은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전쟁의 전후 과정 및 현재까지의 영속성을 잘 살피고 있다.
당사자의 경험에 의해 제한된 논의의 경계를 풀어헤침으로 앞으로 더 다양한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을 희망도 갖게 한다.



1946년 이란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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