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한일관계 돌파 아이디어, 검사 시절 압수물서 시작됐다
⑦ 한·일 관계
2023년 5월 7일 당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회담에서 대화하는 모습
한·일 관계 악화에는 과거사, 특히 문재인 정부 시절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인한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윤 전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문희상 안’ 말고 ‘목영준 안’
그가 검찰총장직에서 사퇴한 뒤 대선 출사표를 던지기 전 ‘과외 공부’를 하다가 강제징용 문제를 토론 주제로 다룰 때 일이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검토됐던 게 문희상 안입니다.” “아니야. 문희상 안보다는 목영준 안이 현실적이지.”
문재인 정부 당시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한·일 기업(2)과 양국 정부(2), 국민(α)의 자발적 기부금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자고 제안했는데, 제대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윤 전 대통령이 꺼낸 목영준 안은 추후 윤 정부가 공식 징용 해법으로 채택한 3자 변제안의 실마리가 됐다. 2023년 3월 발표된 3자 변제는 대법원에서 승소한 징용 피해자들에게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전범 기업들(패소한 피고)을 대신해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검사 윤석열 눈 멈춘 압수물
윤 전 대통령이 목영준 안을 인지한 건 서울중앙지검장일 때다. 2018년 여름 무렵 양승태 대법원 재판 거래 의혹을 수사하던 검찰이 외교부 본부를 압수수색했는데, 압수물 중 하나인 대외비 문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관련 목영준 전 헌재재판관 의견’을 보게 된 것.
제3자(재단)가 채무자(일본 전범 기업)와 합의하면 채권자(징용 피해자)의 승낙 없이도 채무를 인수할 수 있다는 민법 판례를 근거로 든 제안을 보고 윤 전 대통령은 명확한 법 규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들도 느끼겠지. 못 느껴도 상관없어”
일본은 처음엔 “우리는 아무것도 약속 못 해준다”며 뻗댔다. 그러나 그는 놀라지 않았다. “우리가 선의를 갖고 매듭을 풀면 지들도 느끼는 바가 있겠지. 하지만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건 결국 역사가 평가를 할 테니까.”
좌고우면은 없었다. 처음 압수물 목영준 안을 본 순간부터 2023년 3월 3자 변제안 발표 직후 방일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의 러브샷으로 한·일 관계의 새로운 출발을 기념한 순간까지, 모든 게 ‘윤석열의 뚝심’이었다.
#기대 저버린 ‘인간미 대통령’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한 윤 전 대통령의 ‘탑-다운(top-down)’식 접근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과감했다. 바꿔 말하면 여기에 바텀(bottom)이 작용할 여지는 없었다.
참모들은 “인간미가 남다른 윤 대통령이 강제징용 피해자를 직접 만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전범 기업의 직접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된 피해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가장 중요한 ‘마음’이 부족했다.
대일 관계를 ‘기브 앤 테이크’로 끌고 가지 말자는 그의 결정은 대승적이었으나, 동시에 족쇄가 됐다. 라인 야후 사태 등 갈등 현안이 생기면 참모부터 실무 당국자들까지 일본에 세게 나갔다가 용산에 찍힐까 눈치를 봤다. ‘윤석열의 절대 레거시’인 한·일 관계 개선 기류에 흠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게 불문의 우선순위가 돼 버렸다.
계엄 뒤 칩거했던 尹 "실패하면 탄핵, 알고 있었다"
⑧ 계엄령 도대체 왜
지난해 10월 1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제76주년 국군의 날 행사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김용현 국방부 장관과 대화하는 모습
12·3 비상계엄이 하룻밤도 안 돼 일단락된 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서울 한남동 관저에서 칩거를 시작했다. 친윤계 정치인 A가 관저를 찾았다.
A를 만난 윤 전 대통령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는 듯했다. 폭탄주가 몇 순배 도는 와중에 A는 “지금은 국가 비상사태가 아니기 때문에 계엄 선포 요건이 안 된다. 앞으로 탄핵이 되고 구속이 될 텐데 어떻게 하실 거냐”라고 추궁하듯 물었다. 이에 윤 전 대통령은 “계엄이 실패하면 그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나중에 A는 주변에 이런 말을 했다. “계엄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상황의 심각성을 잘 몰랐다. 군대를 안 다녀와서 그런지 계엄을 선포하면 군대가 명령에 따라 착착 움직일 줄 알았던 것 같다.”
대체 윤 전 대통령은 왜 계엄령을 발령했을까. 탄핵소추안이 국회 문턱을 넘기 이틀 전인 지난해 12월 12일 담화에서 윤 전 대통령은 “제가 비상계엄이라는 엄중한 결단을 내리기까지 그동안 직접 차마 밝히지 못했던 더 심각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며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부정선거 의혹 자체는 2020년 총선 이후 아스팔트 우파에서 떠돌던 뜬구름 같은 주장에 불과했다. 윤 전 대통령이 부정선거와 관련해 새롭게 공개한 사실도 없었다. 부정선거 의혹 때문만이라면 계엄은 무모한 선택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를 계엄으로 내몬 다른 요인이 있을까. 여러 외생 변수들이 거론되지만 윤 전 대통령을 겪어본 인사들은 “계엄 사태의 시작과 끝 모두 윤 전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증언한다.
실제로 윤 전 대통령은 꽤 일찍부터 계엄을 하나의 선택지로 고려했던 것 같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 안가에서 당시 김용현 경호처장, 여인형 방첩사령관 등과 식사를 하며 “비상대권을 통해 헤쳐나가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초 여름 휴가 뒤 국민의힘 의원들을 만나선 “나는 박근혜처럼 죽지 않는다”거나 “내가 탈당해 버리면 된다. 나 혼자 죽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일부 언론인에게 “지금과 같은 야당 독재 상황을 대비해 헌법을 아주 잘 만들어 놨더라”는 말을 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계엄 선포권을 규정한 헌법 77조를 언급한 것이었을까.
총선 참패 뒤 더 거칠어진 야당의 압박, 본인의 독불장군식 본성 탓에 이런 생각은 더 커졌을 것이다. 여기에 ‘위험한 충신’ 김용현과의 밀착을 결정적 트리거로 보는 사람이 많다. 친윤계 의원은 “윤석열 정부 초반 2년은 여당이 한동훈을 넘지 못했고, 이후 1년은 김용현을 넘지 못했다”며 “대통령이 한동훈과 멀어지면서 김용현에게 의지하게 됐다”고 했다. 지난해 1월 한동수 전 대검 감찰부장이 쓴 『검찰의 심장부에서: 대검찰청 감찰부장 한동수의 기록』엔 2020년 3월 19일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대검 간부 회식 때 했다는 말이 담겼다. “(내가) 만일 육사에 갔더라면 쿠데타를 했을 것이다. 쿠데타는 (5·16 당시) 김종필처럼 중령이 하는 것인데 검찰에는 (중령이) 부장에 해당한다. 나는 부장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건희 정권, 단죄의 시작] ② 명태균 게이트와 윤석열 부부 공천 개입 의혹 (0) | 2025.04.21 |
---|---|
[윤건희 정권, 단죄의 시작] ① 윤석열 내란 형사재판 (0) | 2025.04.21 |
윤의 1060일 ⑤~⑥ (0) | 2025.04.17 |
윤석열 탄핵심판을 말하다 (0) | 2025.04.16 |
미*중의 관세 전쟁 (0) | 2025.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