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배 타고 남의 땅 거쳐 백두산에 가다 [배 타고 가는 백두산 上]

2025.10.19 19:54

 

 

 

 

카페리 타고 인천항에서 중국 단둥 거쳐서 백두산 천지에 오르다

구름과 안개에 묻혀 있다가,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안개가 사라지며

천지의 신비로움이 시야 가득히 펼쳐진다. 풍경의 감동이 가슴 가득하게 들어온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학교 다닐 때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다. 백두산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고, 저절로 우러르게 되는 민족의 영산이다. 

민족신화의 발원지이고, 조상들이 기상을 펼치던 발해와 고구려 벌판을 호령하는 산이다. 백두산은 국토의 골격에서 백두대간의 머리이고, 대한민국 모든 산의 종산宗山이다.

북파에서 바라본 천지. 천지는 1년 중 10개월이 겨울이다.

10월의 천지는 이미 한겨울이다. 천공天空에 바람이 불어 호수 면에 물결이 일고 있다. 사진 권혁균


백두산 여행이 결정되었을 때, 그 성스러운 자태를 알현한다는 기대감과 더불어 백두산이 지켜보았을 굴곡진 역사를 곱씹으며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굴곡진 역사의 결과로, 백두산은 우리 땅을 밟고서는 갈 수 없어, 멀리 뺑 둘러 중국을 통해 가야 한다. 

압록강 너머 북한 풍경은 평온, 내 마음은 불안

인천항에서 압록강 하구인 단둥丹東까지 455km, 16시간의 뱃길을 가, 버스로 약 700km, 1박2일을 달려 백두산에 이르는 여정이다. 단둥항에 입항할 때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섬이 북한 땅 신도군薪島郡이고, 단둥시내로 가는 도로변의 철조망 너머 황금평(벌판)도 북한 영토라니 ‘남의 땅’ 같지 않다. 

압록강의 끊어진 철교. 한국전쟁의 아픔이 서려 있는 철교 앞에서 한복을 입은 중국 소녀가 포즈를 잡았다.

건너편은 신의주다. 오른쪽 사진은 일제 강점기 때 선박을 통과시키기 위해 교량 한 칸을 비튼 모습

 

단둥은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고,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백성들이 우리 영토처럼 살았던 간도間島 땅이었다. 한민족의 영혼이 서려 있어서 그랬을까, 중국은 본래 안동이라 불렀던 이곳을 중국의 이념을 불어넣은 ‘붉은 땅’ 단둥丹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단둥에서 신의주를 가까이 바라보는 압록강 단교斷橋, 즉 끊어진 철교에 발을 디딘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건설한 철교를,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미군이 폭격해 북한 쪽 교량은 교각만 남긴 채 파괴되었다. 

입장료 30위안(6,000원)을 내고 올라서면 이 철교를 통해 한국전쟁에 개입했던 중공군이 다리를 건너는 조각물이 나온다. 

가까운 북한 땅. 압록강 유원지에서 보트를 타고,

강 중앙의 국경선을 넘어 북한 땅 가까이 가본다.

풍경은 평화롭지만, 마음은 괜스레 불안하다.

 

우리 입장에서는 섬뜩하다. 철교 끝에서 신의주를 바라본다. 소박한 건물들이 반듯하게 들어서 있지만, 단둥의 고층빌딩들에 비해서는 왜소하게 느껴져 마음이 편치 않다. 부산 해운대의 고층빌딩들처럼 키를 높여 중국을 내려다보는 신의주를 그려본다. 

압록강 단교에서 북쪽으로 가면, 강 건너에 ‘보기 좋은’ 고층 아파트들이 줄을 맞추어 늘어선 섬이 나온다. 이성계가 말을 돌린 위화도다. 만일 그때 이성계가 회군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주를 지배하는 강국이 되었을까, 아니면 중국에 복속된 소국으로 전락했을까. 역사의 상념에 젖어 있을 때, 현지 가이드가 “저 아파트들은 이쪽 중국인과 한국 관광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건물입네다”라고 말한다.

위화도의 고층아파트. 강 건너 중국인과 한국 관광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빌딩이라고 한다.

예전에 이성계가 말을 돌렸듯이. 지금 우리도 건너지 못하는 위화도.


위화도에서 북쪽으로 20분 거리에 있는 강변 유원지河口景區에서 보트를 탔다. 압록강의 중간이 중국과 북한의 경계인데 보트는 경계를 한참 지나 동쪽의 북한 땅에 근접한다. 옥수수밭이 빼곡한 야산 아래에 회색 슬레이트 지붕의 주택이 덩그러니 앉아 있고, 황톳길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북한 사람이 보인다. 보트에서 슬쩍 북한의 강물에 손을 적셔 보았다. 물은 미지근하고 풍경은 평화로운데, 괜스레 마음은 불안하다. 

백두산 천지를 향한다. 천지에 오르는 길은 네 곳이 있다. 중국에 북파, 서파, 남파, 그리고 북한에 동파가 있다. 파坡는 고개를 의미한다. 여행사 프로그램은 보통 가까이 있는 북파-서파, 서파-남파로 짜여 있거나, 북파-서파-남파를 함께 구경하는 일정도 있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1950년 10월 19일,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한 날,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의 모습을 기념하는 조각물이 철교 입구에 세워져 있다.

뒤편 건물은 압록강과 북한 뷰를 볼 수 있는 호텔.


백두산 4개의 고개, 4파坡

고개마다 천지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워낙 구름과 안개와 눈·비가 잦아 천지를 볼 수 없을 때가 많다. 이틀이나 사흘을 다니면서 하루는 맑은 날을 기대하는 것이다. 사흘 내내 흐린 날도 많아서 ‘천지를 보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생겼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은 북파다. 관광거점인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 출발해 백두산 입구에서 미니버스로 갈아타고 72개의 굽이 길을 휘둘러 오른 후, 잠깐 걸어 천지 앞에 선다. 인파에 떠밀려 짧게 천지를 일견한 후 인근의 장백폭포를 구경하며 온천물에 익힌 달걀을 맛본다.

남파를 향하여.

천지 가는 산길 왼쪽에 로켓을 쏘아 올리는 듯한 봉우리 모습

탐방로 바로 옆에는 ‘북한 영토이니 넘어서지 말라’는 철조망이 길게 이어진다.


두 번째로 많이 가는 곳은 서파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1,442개의 계단을 쉬엄쉬엄 30분쯤 올라서면 천지다. 길 주변은 온통 야생화가 가득한 초원이다. 서파에서 바라보는 천지의 시야가 가장 넓다. 날씨가 좋으면 16개 봉우리가 다 보인다. 서파 입구에는 깊은 ‘용암 골짜기’인 금강대협곡이 있다. 

최근에 개방된 남파는 예약제로 하루 2,000명만 입장할 수 있다. 인파에 밀려 사진 한 장 찍기 어려운 북파, 서파에 비해 남파는 사람이 적고, 천지를 매우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철조망 너머는 바로 북한이다. 그래서 ‘서늘한’ 분위기가 있다. 도로 중간에 내려 압록강 발원지인 압록강대협곡을 구경할 수 있다. 

4파 중에서 북한 땅 동파에서 바라보는 천지 풍경이 최고라고 한다. 남파에 올라,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어 바라본 동파는 거칠고 가파르다. 스카이라인의 맨 위에 백두산의 최고봉인 해발 2,744m 장군봉이 우뚝하다.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중국이 북한에 돈 내고 빌린 백두산 최고 전망대 [배 타고 가는 백두산 下]

 

2025. 11. 20. 07:51

 

 

 

1년 중 2개월만 개방하는 북한의 백두산 천지 전망대 남파

 

남파를 내려서며. 백두산은 하나의 뾰족한 산이 아니라, 여러 봉우리들이 모여 이룬 고원이다.

남파 입구의 압록강대협곡. 용암이 흐르다 굳은 절벽이 숲과 같아 '석림石林'이라 부른다.

 

 

인천에서 배로 출발해 백두산 남파 입구까지 2박3일이 걸렸다. 한국의 기온이 35°C를 넘고 있을 때 남파 입구의 전광판에는 21°C가 찍혔다. 가이드는 천지에 오르면 추우니까 긴팔 옷과 우비를 준비하라고 했다. 오전에 비가 많이 내려 천지를 본 탐방객은 없다고 한다. 우리 일행들도 불안한 표정이 역력하다.

 

미니버스로 갈아타고 전나무와 가문비나무가 빽빽한 숲길을 30분쯤 올라서니, 어느덧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와 사스래나무만 듬성듬성한 고원지대다. 해발 2,000m쯤 되니 나무가 사라지고 풀과 이끼만 깔려 있거나, 아예 자갈과 모래만 나뒹구는 황무지 일색이다.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하늘에는 먹구름과 흰 구름이 뒤섞여 파란 하늘이 조각조각 나타났다 사라지고, 산에는 구름과 안개가 위로 옆으로 빠르게 휘날리고 있다. 출발한 지 한 시간쯤 되어 드디어 정상 주차장에 도착했다. 천지로 가는 300m의 탐방로를 뛰듯 걸으며 허공을 보니 다행히 파란색 '바람'이 회색 안개를 천천히 밀어내고 있다.

 

남파에서 바라본 동파. '갈 수 없는 동파'를 남파에서 카메라를 당겨 가까이 본다.

장군봉이 오뚝하고, 그곳까지 천지의 둘레길이 거칠고 험하다.

 

 

전망대에 도착하자 천지를 둘러싼 봉우리들이 "짠~"하고 나타나면서, 그 안에 고요히 담긴 남청색 호수 물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온다. 하늘 아래에서 가장 숭고하고 장엄한 경관이다. 신이 천지창조를 한 것 같은 풍경이 심장으로 전해져 가슴이 쿵쿵 진동한다. 신의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하늘에도 땅에도 호수에도 신성한 기운이 가득하다. 천지를 둘러싼 봉우리마다 솟구친 모습과 내리꽂힌 모습이 격하여 민족의 기상이 여기서 발원했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러나저러나 기념 독사진 한 장을 찍어야 하는데, 전망대에 두 겹 세 겹의 인파가 몰려 아우성이라 '나홀로 사진'은 불가능하다. 사진이 잘 나오는 뷰포인트에는 자릿값을 낸 사람들이 기다란 줄을 서 있다. 가이드가 어서 내려가자고 재촉하지만 아쉬워 발길이 돌려지지 않는다.

 

남파를 내려서며 길옆의 하얀 돌을 주웠다. 종이처럼 가볍다. 화산에서 솟구친 용암이 파편화되면서 식을 때 작은 구멍이 뽕뽕 뚫려 그곳으로 암석 물질이 빠져나간 것이다. 그래서 너무 가벼워 물에 뜬다는 부석浮石이다. 이 하얀 돌과 암반이 산 정상부에 널려 있어서 '하얀 머리 산'이라는 뜻의 백두산 이름이 생겼다.

 

셔틀버스를 타고 내려가다가 중간에 있는 압록강대협곡에 내렸다. 용암이 흐르다 굳은 절벽 아래로 깊게 함몰된 계곡이 초록 숲에 덮여 있다. 본래는 평평했을 지형에 한 방울의 빗물이 닿아 흐르면서 암석에 틈을 내고, 수천 년의 힘으로 깊이 170m의 계곡을 깎아 장장 800km의 압록강을 이루어 서해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런 거친 자연과 격동의 역사 속에서 백두산과 압록강을 휘저으며 기상을 펼쳤던 대大선배들을 생각하며 남파를 떠난다.

 

서파를 향하여. 주차장에서 천지까지 1,442개의 계단을 올라선다.

어느 한국인 커플이 한복 차림으로 가마 타고 오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아래는 손님을 기다리는 중국의 가마꾼. 비용은 8만 원이다.

 

 

서파 천지는 천공의 천국

 

서파에는 워낙 사람이 몰려 셔틀버스 타는 줄에서만 두세 시간을 기다릴 때가 많다. 첫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으나 이미 100여 명이 줄을 서 있다. 백두산 초입의 풍경은 남파와 비슷하다.

 

하얀 자작나무들이 길쭉길쭉 늘씬하게 올라간 초록 숲이 길게 이어지고, 고도가 높아지면서 사스래나무 군락을 끝으로 키 큰 나무들이 사라진다. 거의 올라가 내려다보니 백두산은 뾰족한 산이 아니라, 여러 산들이 비슷한 높이에서 멈추어 서로 어깨를 기댄 고원이다.

 

셔틀버스로 한 시간쯤 달린 끝에 정상의 주차장에 내리면, 천지까지 1,442개의 계단이 시작된다. 100계단을 오르자 숨이 가빠지고, 500계단을 올라서자 등에 땀이 밴다. 계단의 끝 하늘에 안개가 자욱해서 마음이 무겁지만,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면서 '천천히 가요, 안개는 걷힐 거예요'라고 위로해 준다.

 

중국 쪽 백두산을 지배하는 한국 나무.

서파 입구의 금강대협곡 숲에 한국의 잣나무가 빼곡하고,

그중에서도 약 300년 된 거목에 홍송왕紅松王 king of Korean Pine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30분쯤 올라, 마침내 도달한 서파 정상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하다. 회색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며 천지를 품은 16개 봉우리를 감췄다가 열었다가 희롱하는 듯하고, 천지의 푸른 호수는 옅은 안개 속에서 흐릿하고 몽롱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대의 커튼을 열어젖히듯 안개가 스르륵 밀려나면서 천지의 시퍼런 물빛이 확 드러나고, 16개 봉우리 모두가 구름 바깥으로 우람한 골격을 힘껏 내민다. 순간 사람들의 탄성이 터지고, 일제히 휴대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세 겹 줄의 맨 뒤에 있던 나는 10분을 기다려 맨 앞줄로 비집고 들어가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어떤 방해물도 없는 가운데 천지를 내려다보았다.

 

사진에서 아무리 보았어도 현장에서 보는 천지의 위용은 대단하다. 백두산 높이는 본래 4,000여 m였다가, 946년의 화산 폭발에 의해 현재의 2,744m 높이로 낮아졌다고 한다. 얼마나 큰 폭발이면 산이 1,000m 이상 무너지고, 분화구에 여의도 면적의 3배가 넘는 호수가 들어섰다는 말인가.

 

담긴 수량이 20억 톤에 달해, 이 물을 서울시라는 그릇에 부으면 시 전체가 3m 높이의 물에 잠긴다니 상상하기 어려운 수량이다. 저토록 엄청난 양의 물에 누가 저토록 파란 잉크를 풀어놓았단 말인가!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천지를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서파 파노라마. 서파는 천지를 가장 넓게 조망하는 곳이다.

무대의 커튼을 열듯 안개는 스르륵 사라지고,

그림물감처럼 시퍼런 호수와 천지를 호위하는 16봉우리가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걷고 싶다

 

백두산을 다녀온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들다. 길은 멀고도 멀고, 계곡은 깊고도 깊다. 숲은 빽빽하고, 자작나무는 길쭉길쭉하며, 사스래나무는 춤추듯 가지를 벌렸다. 초록 언덕에 야생화는 흐드러지고, 황무지 풀잎에 맺힌 이슬은 영롱하다. 고원은 녹색 구름 같기도 하고 봉긋한 이불 같기도 하다. 천지는 만물이 합장해 떠받든 술잔 같기도 하고, 신이 만물에게 내려준 생명수 같기도 하며,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팔레트 같기도 하다.

 

백두산은 우리 가슴을 웅장하게도, 슬프게도 만드는 산이다. 민족의 영산이지만 영토의 바깥에 있고, 산의 절반 이상이 중국에 속해 있다. 국제적으로 점점 더 '중국의 산'인 창바이산長白山(장백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천지에서는 태극기를 흔들거나 애국가를 부르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만드는 자의 것이다. 언젠가는 북한 땅을 밟고 천지의 동파에 올라 함성을 지르고 싶다. 거기서 백두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 민족의 더 큰 웅비를 도모하는 그날을 그려본다. 지리산에서 설악산까지 걸었던 남쪽 백두대간에 이어, 금강산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북쪽 백두대간을 걷는 그날을 그려본다.

 

 

 

 

백두산 쏠쏠 정보

 

생태

⊙ 해발 2,000m 수목한계선에는 사스래나무가 주로 자란다. 그 이상 높이에서는 털진달래, 바위솔 등 관목과 이끼류가 자란다. 수목한계선의 사스래나무숲은 바람에 시달려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서로 가지를 휘감아 의지하며 바람을 견뎌낸 모습이 뚜렷하다. 사람 사회와 같다.

⊙ 7~8월은 야생화 천국, 백두산 마니아들의 찬국이기도 하다.

⊙ 혼자 껑충하게 핀 독립된 꽃은 없다. 군락을 이루어 지표에 낮게 깔려, 서로 의지하며 산다.

⊙ 해발 1,000~2,000m까지는 침엽수림지대이다. 기온이 낮으며 잎갈나무, 가문비나무, 분비나무 등이 자란다.

⊙ 주요 동물로 호랑이, 표범, 반달가슴곰, 불곰, 담비, 스라소니, 사향노루 등이 있다.

⊙ 자작나무숲에 은여우가 산다. 자작나무 껍질 색도, 주변의 눈밭 색도, 은여우의 은색 털도 모두 은색이다. 은여우의 보호색이다.

⊙ '지하 삼림'은 화산 활동으로 푹 꺼진 지형에 생긴 숲을 말한다. 그늘지고 습해서 버섯이 많다.

⊙ 해발 고도에 따라, 즉 높이마다 다른 식생이 서식하며 생물다양성이 매우 높다. 백두산 일대에는 3,000여 종의 식물과 1,500여 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전나무, 가문비나무, 잣나무 등의 침엽수와 자작나무, 사스레피나무가 많다. 해발 2,000m 이상에서는 나무가 자라지 않아 초본류와 이끼류가 무성하며, 암석과 황폐지가 노출되어 있다.

 

남파

⊙ 1년에 2개월만 개방하고, 예약제로 하루 2,000명만 입장 가능하다. 탐방객이 적어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본래는 북한 땅이지만, 중국이 장기 임대해서 관광지로 개방했다. 올라가며 보이는 철조망 너머는 북한 땅이다. 그래서인지 세 번의 검문을 거쳤다.

⊙ 마지막 검문 통과해 셔틀버스를 타고 북한땅 옆으로 40분을 가면 천지 입구. 사스래나무 군락이지만 올라갈수록 나무는 없어지고, 용암이 흘러 만들어진 평편한 구릉lava plateau이 나온다. 지표는 하얀 부석토로 덮여 있다. 그래서 백두산 이름이 유래한다.

⊙ 셔틀버스에서 내려 300m를 걸으면 천지가 보인다. 해발 2,540m 남파 정상이다. 왕관 모습의 천지가 쟁반에 담긴 듯. 가장 온전한, 전체적인 천지 조망을 할 수 있는 전망대다. 건너편 장백폭포와, 북한 땅의 뾰족한 장군봉도 조망 가능하다. 천지 바깥의 백두고원 풍경도 일품. 멀리 지평선 끝의 기다란 언덕 실루엣은 개마고원이다.

 

기타 정보

⊙ 백산수는 백두산 해발 670m에서 용출하는 생수.

⊙ 부석浮石; 화산재로 만들어진 돌이며 기공이 많아 가볍다. 실제로 물에 뜬다.

⊙ 비룡폭포: 해발 2,000m 천지에서 1km를 흘러 68m 높이 절벽에서 떨어진다. 송화강으로 흘러가며 수량이 많아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아래에는 온천지대.

⊙ 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은 압록강 925km. 두 번째인 두만강은 610km, 다음 낙동강이 520km, 한강 490km.

⊙ 만주벌판: 이곳의 다른 이름이 간도間島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섬에 조선인들이 진출해 농사를 지은 곳을 간도라 했는데, 조선인들이 아예 강을 넘어 농사를 짓고 정착한 땅도 '간도'라 불렀고, 그 땅이 점점 넓어져 마침내 만주벌판 전체에 이르렀다. 한반도의 두 배에 이르는 만주벌판을 조선인들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9년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간도협약으로 간도는 청나라 영토가 되어버렸다. 우리 땅의 영유권을 제3국이 결정해 버린 치욕의 역사다.

 

장백산의 한국 여인들.

 

 

단둥丹東

⊙ 신의주의 압록강 건너편 국경도시. 2025년 4월 인천-단둥 간 페리호 운항이 재개되었다.

⊙ 인구 90만. 북한 노동자 8만 거주. 납북 위험 있어 주의.

⊙ 압록강 단교斷橋 : 6.25전쟁 때 미군 공습으로 끊어진 다리, 현재는 전망대로 활용되는 관광명소. 다리 끝에서 신의주 시내를 가까이 볼 수 있다. 평온한 듯한 풍경이지만 뭔가 국경의 긴장감이 있다.

⊙ 호산 산성 ;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성곽. 산성에 올라 압록강 너머의 북한 땅을 볼 수 있다. 가까이 있지만 넘어설 수 없는 선이 강 위의 허공에 그어져 있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의 끝 성곽이라 하여, 중국성이라고 우기는 듯.

 

집안集安(지안)

⊙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이 있던 곳. 인구 25만의 소도시. 압록강 건너에는 북한의 만포시가 있다. 700~800개의 고구려 무덤들이 공동묘지처럼 들어서 있다. 관리 없이 방치된, 사라진 국가의 묘지라는 인상이다.

⊙ 광개토대왕비 ; 보호각에 유리창을 둘러 바깥에서는 희미한 형체만 볼 수 있다.

 

 

------------------------------------------------------

 

 

우리 땅 간도불법 협약 116주년!

"이재명 대통령은 중국에 한반도 1.5배인 우리땅 간도 반환 요구하라"

 

 

"청일 불법협약으로 중국에 넘어가게된 것을 알고서도 침묵하면 민족도 국가도 아니다!"

 

 

간도협약(間島協約)은 일본제국이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불법으로 강탈한 상황에서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체결한 조약이다.

​이에 시민단체 활빈단(대표 홍정식)은 이재명 대통령,중국통인 김민석 국무총리와 정청래,장동혁 여야대표에 국민에게 믿음주고 역사에 남을 진정한 국가지도자가 되려면 "중국정부를 향해 '우리 땅 간도반환' 대중 (對中) 요구를 정식으로 요구 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활빈단은"간도협약은 1909년 일본이 남만주 철도부설권과 탄광채굴권 등을 받고 청나라에 간도의 소유권을 넘겨준 협약으로 동년 9월4일 일본이 불법적으로 청과 체결해 간도를 중국에 넘겨준 원천 무효인 불법협약으로 116주년에 이르고 있다"고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또한 활빈단은 "영토 문제에는 시효가 없다지만 100년 넘게 간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한 중국의 간도에 대한 권원(title)이 정당화될 수 있는 반면 한국의 영유권주장이 약화될 것이다"고 우려 했다

​간도에 대한 중국의 실효적 지배 기간이 길어질수 록 최초의 청-일 협약의 불법성과 하자가 사후적으로 보정된다는 응고이론이나 현상유지를 중시 하는 현대 국제법의 흐름 등의 측면에서도 간도=우리 땅 주장이 매우 불리하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활빈단은 "간도관련 일부 학술단체가 ‘100년 시효설’을 선정적으로 주장하다간 민족의 영토인 간도 수복을 위해 전개될 피끓는 노력도 무위에 그치고 우리 땅을 고스란히 넘겨줘야 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음도 알자"고 경고했다.

​아울러 활빈단은 간도문제에 관심 없는 정치권에 개헌시 "정치권은 간도협약 무효안 제출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장(訴狀) 제출 등 실질적 수복 대책을 세우고 또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정한 헌법제3조의 영토내용을 북방 영토를 포함한 내용으로 개정하라"고 요구했다.

​더불어 활빈단은" 간도문제에 천하태평인 역대 정부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1902년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임명해 간도(間島)에 대한 직접적 관할권을 행사한 역사적 기록과 간도가 우리 땅임 을 증명하고 있는 ‘로마교황청 조선말 조선지도’(1924년 제작)와 자료 등을 근거로, 조현 외교부 장관은 간도회복을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청·일 간 간도협약 무효확인 국제소송’에 나서고,국회와 깨어있는 애국국민들도 동참해 "중국정부와 협상에 나서 '우리 땅 간도되찾기 범국민운동'을 통한 애국투혼 을 발휘하라"고 주문했다.

이와관련 활빈단 홍정식 대표는"건국이래 역대 정부는 간도(間島)가 광복이후에도 미수복 영토 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1992년 한중수교 당시 뿐만 아니라 116년이 넘은 2025년까지 공식적으로 중국에 간도영유권을 주장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며 “청일 간도협약 체결 당시만 해도 영토와 관련해 주권은 우리에게 있었음에도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중국과 맺은 불법협약으로,우리 땅 간도가 중국에 넘어가게 된 것을 알게된 이상 묵인하고 있으면 민족도 국가도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혔다.

​특히 활빈단은 "無주지는 국제법적으로 선점하여 개간하는 쪽이 영유권을 가지게 되는데 간도지역 은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강도회맹에 의해 출입이 금지된 봉금(封禁)지역으로 양국이 공동관리하는 無주지였지만 간도에 대한 우리의 개간은 무주지 선점이론에 의한 영토를 획득한 엄연한 우리땅 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활빈단 홍정식 대표는 "국제법상 강제로 주권을 침탈한 국가가 맺은 조약은 아무런 효력을 발생 하지 못하기 때문에 간도협 역시 효력을 상실했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활빈단은 "中·日간에는 1941년 이전 맺은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합의가 있었고,韓·日간 1910년 8월22일과 그 이전 모든 조약이 무효라는 확인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에따라 활빈단은 이재명 대통령,김민석 국무총리에 "1974년 중국과 ‘조·중 변계비밀 조약’을 맺은 북한에 ‘중국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되찾아야 할 우리 땅’ 간도(間島) 수복문제를 남북간 심도 깊게 논의해 중국과 한·중 국경조약을 체결하기를 공개적으로국민 특별제안한다"고 밝혔다.

 

 

-----------------------------------------------------------------

 


을사늑약 120주년, 일본 제국의 한반도 점령과 저항

올해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120주년이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는 의미로 굴레 늑(勒) 자를 써서 ‘을사늑약’이라고 불린다. 이때부터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당하고, 통감부가 설치돼 사실상 식민 지배가 시작됐다.

 

당시 이에 맞선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브루스 커밍스는 “1908년 일본인들이 추정한 무장 게릴라들의 수는 69,832명이며,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는 거의 1,500회의 충돌이 있었다”고 전한다.

 

을사조약은 러·일 전쟁 후에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후 체결됐다.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의 제국주의 맹주로 부상했음을 의미한다.

 

을사조약 체결 후 기념사진

 

 

메이지 유신과 ‘아시아의 공장’

 

19세기 후반은 아시아 역사에서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다. 서구 열강과 제국주의 국가들은 포함(砲艦)외교를 통해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했다. 가장 먼저 일본이 미국의 압력으로 개항했다. 영국은 인도와 미얀마를 차지했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점령했으며, 미국은 필리핀을 스페인한테서 빼앗았다. 중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여러 서양 열강들에게 조계지를 허락해야 했다.

 

1853년 미군 페리 제독이 전함 4척을 이끌고 일본 해안에 도착해 일본 정부에 통상을 요구했다. 청나라의 아편전쟁 패배를 알고 있던 에도막부는 미국의 통상 압력에 굴복해 미·일화친조약(1854)과 미·일수호통상조약(1858년)의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19세기 일본은 비유럽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체나 후퇴를 모면해 20세기에는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그 출발은 1868년 위로부터의 혁명인 메이지 유신이 바탕이 됐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낡은 봉건제를 타파하고, 국가 주도의 급속한 산업화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은 1860년대부터 불과 30년 사이에 아시아 제일의 경제력을 자랑하게 됐다. 《현대 일본의 역사》의 저자인 앤드루 고든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아시아의 공장’이라고 불렸다. 조선과 중국은 일본의 가장 큰 수출시장이었다.

 

1890년대부터 20년 동안 일본 경제는 공업화를 향해 한 단계 더 도약했다. 공업 생산은 해마다 5퍼센트씩 증가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 전 세계 연평균성장률 3.5퍼센트를 크게 웃도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 성장은 노동자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가능했다. 이에 맞서 1897년에 일본 최초의 근대적 노동조합인 철공조합이 결성돼 5,400명의 조합원을 거느렸다.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섬유산업에서는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32차례 파업이 벌어졌다.

 

당시 공업화의 종잣돈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3억 6,000만 엔의 배상금이었다. 이 배상금은 전쟁 전 일본 연간 국가 예산의 약 4.5배나 되는 돈이었다. 일본은 이 돈 대부분을 군비 증강과 관련된 중공업에 투자했다.

 

1895년 영국의 찰스 베리즈퍼드 경이 “다양한 단계의 통치를 체험하는데 영국은 800년, 로마는 약 600년이 필요했지만, 일본은 그것을 40년 만에 해치워 버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는 육군뿐 아니라 해군의 대폭적인 증강에 착수했다. 자본주의 팽창을 위한 군사력을 강화함으로써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음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홋카이도, 류큐 왕국(오늘날 오키나와)을 병합한 일본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타이완과 한반도의 지배권을 거머쥐었다.

 

청·일 전쟁 후, 공포의 균형

 

1870년대와 1880년대 일본의 대외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은 한반도였다. 미국이 에도막부에 가한 압력과 똑같은 방식으로, 1876년 일본은 포함외교로 조선에 강화도 조약을 강요했다.

 

조선은 불평등한 조약에 의해 부산을 비롯한 항구 3곳을 개항하고, 치외법권 지역의 거류지(조계)를 설치했다. 무관세 정책으로 일본의 공산품이 값싸게 들어왔고, 쌀을 비롯한 곡물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일부 지역은 방곡령[쌀 수출 금지]을 시행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 세력인 민씨들의 부정부패가 극성을 부리면서 조선 민중의 불만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봉건 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면서 중앙 정부를 상대로 무력 투쟁을 전개했다.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된 농민 봉기가 전주성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할 상황에 이르자, 조선 지배층은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갑신정변 이후 맺어진 청·일간의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들어왔다. 그들은 왕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중국보다 더 많은 4,000여 명이 넘는 군대를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했다.

 

전통적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청나라와 조선 진출을 본격화한 일본 간의 갈등이 청·일 전쟁(1894년~1895년)으로 충돌했다. 주로 양국 함대의 교전으로 치러진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우세해졌다.

 

그러자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본에 맞서 다시 봉기했다.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조선 정부의 도움을 받고 있는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패배했다. 일본은 잔인하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서야 청·일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일본은 수비대 1만 명을 조선에 배치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타이완과 펑후제도, 랴오둥 반도의 영유권을 획득하고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보장받았다.

 

타이완에서도 일본의 식민 점령에 맞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6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이로 인해 4,600명이 전사하거나 병사했다.

 

랴오둥 반도는 만주 진출을 꿈꾸고 있었던 러시아의 견제에 부딪혔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독일·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혀 추가로 3,000만 냥의 배상금을 받는 대신 랴오둥 반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청나라로부터 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고 뤼순과 다롄을 조차했다.

 

청·일 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은 배제되고,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그러나 삼국간섭과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개입이 강화되면서, 한반도는 일시적인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이 틈을 이용해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근대화 정책들을 추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러·일 전쟁, ‘폭풍의 중심’이 된 한반도

 

1900년 무렵에는 자본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세계 각지에 자본이 끼친 영향은 불균등했다. 크리스 하먼이 언급한 것처럼, “1876년에 아프리카에서 유럽이 지배하는 땅은 10퍼센트도 안 됐다. 그러나 1900년에는 아프리카 땅의 90퍼센트 이상이 유럽 식민지”였다.

 

아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했고, 중국은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 등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의 저자 조너선 D. 스펜스는 당시 일부 중국인들은 이제 곧 조국이 ‘참외처럼 조각조각 잘릴’ 것이라는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부동항을 찾아 태평양을 향해 세력권을 확장하던 러시아가,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과 한반도에서 충돌했다. 아시아에서 20세기 최초의 전쟁이 예고되고 있었다. 미국 알렌 공사의 표현대로 한반도는 ‘폭풍의 중심’이었다.

 

1900년 청나라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제국주의 열강은 공동으로 군대를 파견해 진압했다. 일본은 연합군으로 가세해 최대 규모인 1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 군대가 만주를 점령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구축한 우월한 지위가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강한 위기의식을 가졌다.

 

1902년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체결했다. 영국은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중국 본토의 경제적 이권을 수호하려 했다.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두 제국주의 국가의 대립은 러·일 전쟁(1904년~1905년)으로 비화됐다.

 

1904년 2월 9일, 일본군은 개전과 동시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이를 빌미로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하고, 다케시마라고 했다.

 

러시아의 패권이 확장되는 것을 경계한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지했다. 1905년 태프트-가쓰라 협약에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지지하기로 합의한다. 2차 영·일 동맹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보장하는 대가로 일본과의 동맹이 각각 체결됐다.

 

전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흘러갔지만, 일본은 러시아가 항복할 때까지 전쟁을 끌고 갈 힘이 없었다. 러시아도 국내 혁명으로 전쟁을 더 하기 어려웠다. 1905년 9월 5일 미국 루즈벨트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은 삼국간섭으로 빼앗겼던 뤼순과 다롄의 조차권과 창춘 이남의 철도 부설권을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았다. 또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도 차지했다.

 

무엇보다 일본이 한국에서 배타적 특권을 갖게 됐다. 이는 을사조약 체결로 명시화됐다. 이로써 일본은 한반도의 지배권과 만주 진출의 기반을 마련하고,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열강의 지위를 확립했다.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면서 식민지 점령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들이 곳곳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1906년과 1911년에도 모로코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독일의 긴장이 고조됐다. 자본주의 경제적 경쟁이 영토 확장 경쟁으로 변했으며, 그 결말은 군사력에 좌우됐다.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은 이렇게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을사늑약과 저항

 

1905년 11월 17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과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을 앞세워 회의장을 포위하고,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대신 5명을 에워싸며 결정을 강요했다. 결국 이들은 조약 체결에 찬성함으로써 치욕적인 을사오적으로 기록됐다.

 

이 조약에 대해 일본은 ‘제2차 한일협약’이라고 칭하지만, 그 강제성으로 볼 때 ‘을사늑약’이라 부를 수 있겠다. 위임·조인·비준 등 조약 체결의 기본적인 절차가 없었고, 외부대신의 인장을 강제 탈취한 이상 조약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1963년에는 유엔 국제법위원조차 “국가대표에게 가한 개인적 강압” 아래 체결됐기 때문에 무효가 되는 국제조약 사례 4개 중 하나로 을사조약을 거론했다.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됐다. 외교권 박탈은 1909년 일본이 청과의 외교권을 사용한 간도협약으로 나타났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푸순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했다.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내정 전반을 간섭한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에 의해 저격당했다.

 

을사조약에 대한 저항은 다양하게 전개됐다. 고종은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 이 회의는 열강들의 군사적 경쟁을 외교와 법의 지배로 대체하는 것처럼 포장했다. 제국주의 힘 관계 속에서 열린 이 회의는 고종이 더 이상 한국의 대외관계에서 주권자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약 9,000 명의 군대를 해산했다. 군인들은 의병에 합세해 일본에 저항했다. 당시 의병들은 대부분 비정규군들과 게릴라들이었다. 의병운동은 해산된 군인과 함께 노동자, 상인, 학생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항일 의병 전쟁으로 발전했다. 1907년 거의 1만 명의 병력이 서울 근처까지 침투했으며, 의병작전의 범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의 뿌리가 깊은 호남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의병 활동이 활발해 약 4,000여 명에 이르렀다.

 

매켄지는 《조선의 비극》에서 당시 저항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싸우다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일본은 1909년 9월부터 2개월 동안 일본군 보병 2개 여대와 해군함정까지 동원된 대대적인 탄압(남한대토벌 작전)을 자행한 후에야, 비로소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식민지로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 지배에 맞선 무장 투쟁은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해 지속됐다.

 

고종은 러·일 전쟁 직전, 열강의 세력균형과 그들의 공동보장에 의한 중립화를 열망했다. 청·일 전쟁 이후 러시아가 주도했던 삼국간섭과 같은 외교적 중재를 전망하면서 러시아에 기대하거나, 미국·영국·일본 3국의 공동 보호를 미국에 요청하기도 했다. 열강의 세력균형이 깨지고 러·일 전쟁이 다가오자, 고종은 각국에 ‘전시중립선언’을 타전했다. 그러나 당사국인 러시아와 일본의 외면으로 물거품이 됐다.

 

제국주의간 경쟁의 동학과 이로 인한 전쟁을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 협상이나 외교를 통한 해결이나 강대국들의 보호를 기대하는 것은 몽상적이다. 역사적인 교훈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의존하는 전략이 러·일 전쟁을 통해 실패했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갈수록 첨예해지는 미·중 갈등 속에서 적당하게 ‘줄타기’ 하는 것으로는 민중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노동자 연대〉는 정부와 사용자가 아니라 노동자들 편에서 보도합니다.

활동과 투쟁 소식을 보내 주세요. 간단한 질문이나 의견도 좋습니다. 맥락을 간략히 밝혀 주시면 도움이 됩니다.

내용은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독자편지란에 실릴 수도 있습니다.

 

728x90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 다큐 "중국 이야기"  (1) 2025.11.25
로봇과 함께하는 일상…  (0) 2025.11.24
무릅 통증, 퇴행성관절염  (3) 2025.10.14
반도체, 디아이  (0) 2025.10.12
네이버+두나무  (0) 2025.10.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