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트레일 : 지역 살리는 숲길≫
K트레일: 지역 살리는 숲길ㅣ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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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노인들도 텐트 지고 여행하는 '백패킹 시대' 열린다" [K트레일]
[충북 보은 최원석 속리산둘레길 사무국장]
"장거리 트레일에 쏠린 시선… 과거와 달라"
'트레킹' 등산과 차별화 고령화 시대에 최적
'지역 살리는 길' 되려면… 주민 협조 필수적
편집자주
한국일보가 849km의 ‘동서트레일’을 중심으로 지역 생존 전략을 모색합니다.

최원석 속리산둘레길 사무국장이 지난달 26일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상판리 사무실에서 동서트레일이 지역에 가져올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충남 태안과 경북 울진을 잇는 849km 숲길인 동서트레일은 속리산둘레길 208km 중 보은 구간 68km를 지나간다. 보은=정민승 기자
“849km 동서트레일이 완공되면 엄청난 일들이 생길 겁니다.”
사단법인 속리산둘레길을 이끌고 있는 최원석(65) 사무국장은 동서트레일의 성공 가능성을 아주 높게 봤다. 그는 “동서트레일이 개통되면 ‘세계 최초 완주’ ‘최단시간 주파’ 등의 타이틀을 챙기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동서트레일이 백패킹 바람을 다시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백패킹(backpacking)은 배낭에 숙식 장비를 짊어지고 자연 속에서 이동(트레킹), 체류하는 여행. 과거 대세를 이룬 여행 방식이었지만, 교통과 숙박 시설이 발달하면서 퇴조를 맛봐야 했던 문화다.
그러나 MZ세대 중심으로 가벼운 하이킹과 트레킹 활동이 자리를 잡으면서 백패킹이 다시 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게 최 국장의 판단이다. 그는 “트레일 트레킹 커뮤니티가 늘면서 정보 공유, 모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며 “속리산둘레길을 찾는 사람 수도 5년 전과 비교하면 30%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지금 분위기에 서해와 동해를 연결하는, 장거리 트레일이 열리면 텐트를 지고 여행하는 인구를 폭증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산이라는 산은 다 가봤다”는 최 국장은 서울에서 출판인쇄업을 하다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10년 전 고향인 충북 보은으로 내려왔다. 우연한 기회에 산림청과 보은군 요청으로 지금 일을 맡았다.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보은 사무실과 29일 동서트레일 속리산둘레길 구간 노상에서 이뤄졌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지만, 제주 올레길을 비롯해 북한산 지리산 속리산 둘레길과 각종 숲길이 전국에 즐비한 상황에서 동서 횡단 장거리 노선 하나 더 생긴다고 트레킹 인구가 급증할까? 최 국장은 “저출생과 고령화, 그에 따른 지역의 소멸 위기 그리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쏟아내는 많은 정책적 노력들이 숲길에서 만난다”며 “과거와는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르다”고 했다. 그는 또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는 올레길, 둘레길과 달리 동서트레일은 한반도 남쪽을 횡단하면서 다양한 지역과 지형을 지나는 덕분에 새로운 트레킹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849km 동서트레일의 등장은 한국 사회의 고령화 추세에도 부합한다. 최 국장은 “등산과 마라톤이 인기지만, 신체 건강한 젊은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며 “숲길 트레킹은 산을 오르되 그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또 길을 걷되 산책보다는 더 도전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강조했다. 트레일 트레킹이 저변 확대에 유리하고, 다양한 생태·역사적 가치의 동서트레일이 다양한 연령층의 백패커들을 지역으로 끌어들여 체류하게 함으로써 소멸 위기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도 담겨 있다.
최 국장은 숲길의 가치에 대한 주민 홍보 강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람들이 오면 쓰레기만 버리고 가는 것 아니냐며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을 공동화장실 개방 요청에 대꾸도 안 하시죠. 이런 분위기론 동서트레일도 실패하고, 지역 활성화도 불가능합니다.” 동서트레일이 지역을 살리는 ‘숨길’이 되기 위해선 21개 지자체, 225개 마을 주민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최원석 속리산둘레길 사무국장이 지난달 29일 동서트레일 28구간과 겹치는 보은군 속리산면 중판교 인근 속리산둘레길에서 해당 구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숲길로 통칭되는 길이지만, 마을 골목과 농로와 도로를 일부 지난다. 보은=정민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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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세조가 말 타고 넘은 숲길, 수월한데? K트레일 매력, 산티아고와는 다르다
<1> 동서트레일 충북 보은군
보은, 괴산, 문경, 상주 208㎞
세조 말 갈아탄 '말티재 고개'
동서트레일 조성 상재리 마을
"한국 고유의 맛과 멋 숲길"

충남 태안에서 경북 울진까지 이어지는 849km 숲길 '동서트레일' 27번 구간에 있는 말티재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12굽이길. 세조가 병을 고치기 위해 속리산 복천사로 가는 길에 이 길을 올라와 넘었다. 얼마나 가팔랐던지 타고 있던 가마로는 진행이 안 돼 말로 갈아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백패커들이 걷는 숲길은 사진에 보이는 차도와 별도로, 조성돼 있다. 보은군 제공
걷는 행위는 자신을 내려놓고 자아를 찾는 일에 비유된다. 속도를 늦추는 만큼 시야는 넓어지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질문과 답을 건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이 새해 계획 단골 소재가 되고, 그중에서도 걷기가 목록 상위를 차지하는 것도 몸과 마음을 함께 돌아볼 수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속리산둘레길은 이런 걷기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체감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세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산이라는 뜻을 담은 속리산(俗離山)을 충북 보은, 괴산, 경북 문경, 상주에 걸쳐 한 바퀴 감는, 208km의 장대한 도보여행길이다. 보은군 관계자는 "속리산둘레길 보은 구간에서도 말티재 숲길을 으뜸으로 친다"며 "사계절 풍광은 물론, 속세와 선계를 나누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이야깃거리까지 풍성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압도적 비율의 방문자들은 걷는 대신 자동차로 말티고개를 찾는 게 현실. 올해 말 완공을 목표로 조성 공사가 한창인 동서트레일 55개 구간 중 말티재를 품은 27구간과 이후 달천 들녘을 따라 이어지는 28구간을 지난달 29일 걸었다. 동서트레일 구축 사업 마무리가 가시화하자 마을에 생길 변화에 달뜨기 시작한 곳이다.
동서트레일은 충남 태안에서 경북 울진까지 기존의 숲길과 임도, 골목, 농로 849km를 잇고, 이어 만드는 국토 횡단 숲길이다. 총 55개 구간 중 25~29구간이 보은을 지나고, 그중 27~29구간은 속리산둘레길과 같이 간다.

세조가 말 갈아탄 '말티재'
동서트레일은 말티재 아래에 있는 마을, 장재리에서 속리산둘레길과 만난다. 장재리 경로당 앞 '대궐터' 비석이 선 곳이다.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에서 병을 치료하기 위해 머물던 행궁이 있던 곳이다. 본격적인 숲길에 오르기 전, 경로당 화장실 문을 두드리자 굳게 잠겨 있다. 대신 그 옆에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속리산둘레길 화장실 1.8km.' 같이 길에 나선 최원석 숲길등산지도사는 "마을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개방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며 "지역 사람들이 숲길의 미래 가치, 지역을 찾는 백패커들이 가져올 변화를 아직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속리산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말티재 아래에 조성된 장재저수지. 속리산 자락에 폭 안긴 저수지의 수려한 풍광이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잡아 세운다. 이곳에 '포토존'이 설치돼 SNS 등을 통한 숲길 홍보 활용 방안으로 고려됐지만, 변화무쌍한 저수지 수위 때문에 설치되지 않고 있다. 평소에는 '강태공'이 차지하는 공간이다. 보은군 제공
장재저수지를 돌아 2km가량 걸으면 본격적인 말티재 숲길이 나온다. 꼬불꼬불 12굽이 도로 근처에서 능선을 타고 오르는 숲길이다. 곳곳에 계단이 설치됐고, 평석이 깔려 있어서 사실 구두를 신고 걸어도 될 정도다. 또 둘레길 안내판과 '미끄럼 주의' 입간판은 적절한 곳에 설치됐다. 최 지도사는 "이렇게 친절한 숲길은 보기 힘들 것"이라며 "동서트레일 조성 사업비가 이 숲길 관리에 더해지면 더 안전하고 친절한 숲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은군은 올해 총 37억 원을 투입해 관내를 지나는 68km의 동서트레일 숲길을 다듬는다.

숲길 탐방에 동행한 최원석 (사)속리산둘레길 사무국장이 말티재 숲길을 따라 오르던 중 12굽이 도로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숲길은 일부 지역에서 차도를 가로지르지만, 대부분 차도와 분리된 채 이어진다.
말티재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세조가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 길이 너무 가팔라 가마(연)에서 내려 말로 갈아타 말티재가 됐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또 고려 태조 왕건이 조부를 만나기 위해 속리산을 넘는데, 길이 질퍽거려 얇은 돌(박석)을 깔았는데,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박석재라고도 부른다. 보은 구간 동서트레일 중 최고난도 숲길이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큰 무리 없이 넘었다.

100여 명 사는 마을 분교서 하룻밤
실제 동서트레일은 2023년 조성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빗댄 ‘한국판 산티아고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 지도사는 그렇게 불리면 손해라고 했다. “‘한국판 산티아고’ 프레임에서 벗어 나야 동서트레일이 한국을 대표하는 숲길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두 길은 다르다. 산티아고 길은 초원과 마을ㆍ포장도로 비중이 크고, 동서트레일은 세계가 ‘기적’이라고 평가하는 ‘산림녹화’ 이후 축적된 숲길 중심의 길이다. 또 종교적 맥락이 강한 스페인의 길과 달리 동서트레일은 5개 광역단체, 21개 지자체, 225개 마을을 지나는, 지역 문화와 역사, 자연 중심의 숲길이다. 지역 살리기와 관련해선 동서트레일처럼 광역지자체 5개를 아우르는 매개체는 흔치 않다.

폐교한 법주분교에 국립등산학교 건축 공사가 한창이다. 내년 완공되면 849km 길이 동서트레일 탐방객들이 쉬어갈 수 있게 된다. 보은=정민승 기자
12굽이 도로가 한눈에 들어오는 말티재 전망대를 뒤로 하고 고개를 내려오면 솔향공원까지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70여 가구 100여 명이 사는 상판리 마을을 만난다. 고개 하나 넘었을 뿐인데, 동서트레일에 대한 기대감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폐교한 법주분교를 활용 국립등산학교를 짓는 공사도 진행 중이었는데, 마을 주민 이모씨는 “법주사 관광지구로 가는 차량들만 드나들었지만, 내려서 걷는 사람은 없었다”며 “앞으로 걸어서 마을을 지나고 또 분교자리에서 텐트를 치고 돈 쓰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며 웃었다. 제주올레길이 연간 6,630억 원의 소비 지출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허황된 기대는 아니다.
정이품송공원에 '한글'이 얽힌 사연
백패킹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짐의 무게를 최소화하는 것. 최 지도사는 "얼마를 더 걸으면 물을 채울 곳, 야영할 수 있는 곳 등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짐 무게를 줄일 수 있다"며 "백패커들이 이 마을에서 쉬어가면서 다양한 경제활동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백패커들이 체류하게 될 법주분교에서 속리산 법주사가 있는 관광지구까지는 2km, 정이품송까지는 700m 정도 더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동서트레일은 분교를 기점으로 그 반대 방향으로 이어진다. 최 지도사는 “여기까지 와서 정이품송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가게 하는 건 모두에게 손해”라며 “지선을 만들어 사람들의 발길이 정이품송까지 닿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이품송은 세조가 탄 가마(연ㆍ輦)가 이 소나무 밑을 지나는데 가지에 걸리자 가지를 스스로 올려 풀어줬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세조가 그 자리에서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2품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지를 스스로 올려 세조가 탄 가마가 지나가도록 해줬다는 이야기의 주인공 정이품송. 이를 기특하게 여긴 왕이 그 자리에서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2품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보은=정민승 기자
정이품송을 만나고 숲길로 돌아오는 길 오른쪽으로 달천변에 조성된 '논란의 공원'을 볼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의 저자이자 한글 창제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알려진 신미대사가 속리산 복천사에 입산해 입적할 때까지의 일대기와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재조명하기 위해 보은군이 2018년 조성한 공원이다. 최 지도사는 "이곳 사람들은 신미대사가 범어(산스크리트)에 정통했고, 한글 창제 8년 전에 범어에서 28자를 따 한글을 만든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했다. 이 때문에 공원 이름은 '훈민정음 마당'이었다가, 한글학회 등의 반발로 '정이품송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산림청 관계자는 “캐나다의 웨스트코스트 트레일, 미국 존 뮤어 트레일 등 광활한 대자연을 낀 외국의 탐방로에 비할 바 아니지만, 이처럼 마을마다 특색이 있고 소소한 재미와 먹거리, 볼거리들을 수시로 만나는 아기자기한 길이 동서트레일”이라며 “한국 고유의 맛과 멋이 있는 숲길로 다듬어 또 다른 K 콘텐츠로 육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주역으로 전해지는 신미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보은군이 설치한 동상. 2018년 설치 당시 '훈민정음 마당'으로 이름 붙여졌지만, 논란 끝에 정이품송 공원으로 바뀌었다. 보은=정민승 기자

충남 태안에서 시작해 경북 울진으로 이어지는 동서트레일 전제 노선도. 아름다운 숲길이 발달한 충북 구간에선 복선으로 운영된다 산림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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