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리 전 투 위 령 비
지식백과
6·25전쟁 당시 강원도 인제군 현리지역에서 중공군과 북한 공산군에게 한국군이 패한 전투.
1951년 5월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감행되었을 때 강원도 인제군 일대에서 방어하던 한국군 제3군단이 공산군 3개 군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하여 현리지역에서 하진부리까지 후퇴한 전투이다.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최대 규모의 공세작전을 감행했던 이른바 제2차 춘계공세(1951.5.16.∼5.22.)에서 북한 공산군 제5군단과 중공군 제12·27군 등 3개 군단은 현리지역의 한국군 제3군단(제3·9사단) 정면을 공격하는 한편, 일부 병력을 서쪽으로 우회시켜 군단의 주요 보급로인 오마치고개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퇴로를 차단당한 한국군 제3군단은 전방의 압력과 후방의 위협에 압도되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부대가 분산됨으로써 산악지대를 따라 60㎞를 후퇴한 뒤 하진부리 부근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군 제3군단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주요 장비를 거의 다 파괴 또는 유기하게 되었다. 반면에 한국군을 추격한 북한군과 중공군은 속사리와 강릉지역으로 남하하여 큰 돌파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에 미 제8군에서는 예비대인 미 제3사단을 투입하여 전선을 수습하고 다시 전세를 만회했으나, 한국군 제3군단은 방어작전에 실패함은 물론, 인접 부대와의 협조나 부대의 통제 및 후방 방호대책 등에 큰 실책을 범하여 6·25전쟁사상 가장 큰 패전 기록을 남겼다.
그리하여 1951년 5월 21일 오후 6시부로 담당 지역을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단에 인계하고 1951년 5월 26일 3군단 사령부는 해체의 비운을 맞이하였다.
「韓國戰爭史 6」(陸軍本部, 1973)
「한국전쟁」-요도식(육군본부, 1983)
「韓國戰爭要約」(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1986)
현 리 전 투 전 적 비
현리 전투(縣里戰鬪)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 5월 16일 ~ 5월 22일에 강원도 인제군 현리에서 중공군과 북한군, 한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다. 중공군이 춘계 공세를 벌였을 때 벌어진 전투로 인제군에 있던 한국군 제3군단이 방어에 실패하고 하진부리까지 밀렸다.
경과
중공군 12, 27군단과 북한군 5군단은 3군단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보급로인 오미재고개를 점령했다. 3군단이 포위당하자 당시 군단장이던 유재흥은 부군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편으로 도주했다.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의 136페이지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이 도주 행각으로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결국 현리에서 한국군 3군단 예하 3, 9사단 병력 1만9천여명이 희생됐고, 병력의 40% 가량만 복귀했다. 무기는 거의 다 뺏겼다. 한국전쟁 사상 최악의 패전을 기록했다.
증언
정병석 인제문화원장은 15세때 3군단 3사단 18연대에 학도병으로 배치됐다. 그는 "적군이 점령한 능선과 계곡을 피해 가파른 산 중턱을 탈출로 삼아 밤낮없이 걸었으며, 곳곳에는 탈진과 굶주림으로 사망한 전우의 시신이 흩어져 있었으나 미처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말했다.[1]
영향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국군의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서,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3군단은 1951년 5월26일 해체됐다.
평가
칠전량 해전,쌍령 전투와 함께 한국사 3대 패전으로 꼽힌다
현 리 전 투 충 혼 비
유재흥
유재흥(劉載興, 1921년 8월 3일 ~ 2011년 11월 26일[1])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대표적인 친일파 정치군인. 일본군 장교로 활동중 815 광복에 이은 미군정 당시 제도권 안에 있던 행정, 군사인력들을 그대로 차용하려는 미군정의 정책에 힘입어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활용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계속되는 패전과 도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으나 역대 정권에서 계속 승승장구하였다.
[편집] 생애
일본군 장교였던 유승렬의 아들로,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다섯살 때 조선으로 돌아왔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5기로 졸업하였고,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군정 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되었다. 제4여단장, 육군사관학교 부교장 등을 지냈고,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때 민간인 학살을 명령 또는 관여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제7사단장으로서 참전하여 의정부 축선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북한군에 패전을 거듭하여 덕정-의정부-창동으로 축차 철수를 되풀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7사단은 붕괴 괴멸되고 서울이 함락당하게 되었다. 그후 1950년 7월 경북 함창에서 제2군단이 창설될 때 제2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중국군 참전 이후 벌어진 덕천 전투에서 지휘 실수로 중국군 38군과 42군에 포위를 허용하여 제2군단이 전멸되어 해체케 하였으며, 현리 전투에서도 제3군단을 해체케하는 등 한국전쟁에서 지휘한 전투마다 패전하였다.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공세 당시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하여 지휘하던 3군단이 포위됐을 때 벌어진 전투로, 유재흥은 부군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편으로 도주하였다.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의 136페이지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명시했다. 이 도주행각으로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결국 현리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포위섬멸당하며 3군단은 해체되었다.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국군의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서,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 방어전에서 일어난 영천 탈환전과 이후 한국전쟁 후반부의 수도 고지 전투의 공로가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전술, 지휘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UN군에 패퇴한 북한군의 전술적 퇴각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인 것으로 인용되고 있다. 일본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가 서툴러 군에 명령을 하달할 때 "돌아가라"를 "또라가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2] 그는 1951년 7월 시작된 정전회담 당시 남한 옵서버로 참관했으나 부친 유승렬 대좌에 의해 어릴 때부터 일본 군인 교육을 받아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했다.[3]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지만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뒤 박정희 정권의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타이, 스웨덴, 이탈리아 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방부장관 등을 지냈다. 주 태국 대사로 있던 1962년 9월, 친선사절단으로 버마를 방문하였다. [4]퇴임 후에는 1974년부터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한국전쟁 시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본인 지휘하의 1개 사단과 2개 군단이 패주 후 해체되는 결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으로 1951년에 받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수교훈장 등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1990년대에 전직 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전시 작전통제권 회수 등의 국방 관련 현안에 대해 친미 성향의 보수 세력과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 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군에게 일임하자는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계속되는 패전과 무단도주로 작전통제권이 미군으로 넘어간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였지만, 1990년대 이후 작전통제권 반환 움직임에 결사 반대해 많은 비아냥을 사기도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별 달고 거들먹거리기만 했다'라고 발언한 것 때문에 예비역 장성들이 발끈했던 일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재흥은 발끈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 현리전투 당시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1994년 탈출한 조창호 소위가 유재흥과의 면담을 원하였으나 조 소위가 2006년 사망할 때까지 일체의 만남을 거부하였다. 경북 경산 하양초등학교에는 유재흥 장군 전승기념비가 있다. [5]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버지 유승렬과 함께 선정되었다. 2011년 11월 26일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편집] 학력
[편집] 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