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김근태

온리하프 2011. 12. 3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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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중인 김근태씨 부인 인재근씨가 1988년 5월 4일 혼자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받고 있다. [2011/12/30 11:47]

 

 

2005년 여주교도소 옥중면회한 이근안 “용서 빌자 양팔을 벌려 포옹해와”
면회 사실 공개하지 않고 만난 뒤 “용서하도록 기도”…이후 특별사면까지 건의

 

» 수사대상자들을 불법 감금.고문한 혐의로 수감됐던 이근안씨가 2006년 징역 7년의 형기를 마치고 경기도 여주교도소를 나와 차량에 올라타고 있다. 자료사진

 설 연휴 전날이었던 2005년 2월7일 경기도 여주교도소 면회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하나가 펼쳐졌다.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 끌려가 1985년 9월4일부터 9월20일까지 17일간 매일 5시간 동안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자신을 고문한 혐의로 영어의 몸 신세가 된 이근안 전 경감을 찾아가 옥중면회를 한 것이다.

 각 언론은 “이근안 전 경감은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빌고 참회를 빌었다”고 역사적 만남을 크게 보도했다.

 ‘짐승의 시간’을 통과한 민주화운동의 대부가 “민주화가 되면 네가 나한테 복수를 하라”고 비아냥댄 고문기술자에게 복수대신 용서를 택한 장면은 누가봐도 ‘멋진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김근태 전 장관은 20년 전 자신의 행위를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고문기술자를 만나고 온 날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면회 2주 뒤인 2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 사죄는 사실일까?”라며 혼란스런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박처원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 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저 말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끝임없는 의구심이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고 있는지 나는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제 지나가고자 한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리고 있다”면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지금 나는…”고 끝을 맺었다.

» 마지막까지 미소를 띄우며…=30일 오후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빈소에 놓인 고인의 영정사진. 뉴시스
 
그는 애초 이근안 전 경감을 만나야 할지 망설였고, 면회 사실 공개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당시 학력위조 혐의로 여주교도소에 수감된 이상락 전 의원에 대해 “상당한 연민을 갖고 있던” 그는 가는 길에 이근안을 만나는 게 어떠냐는 비서진의 제안을 받고 마지못해 그럼 본인의 의견을 묻고 좋다고 하면 만나겠다고 해서 성사된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 의원이 언론에 귀뜸하는 바람에 사흘 뒤 뒤늦게 공개됐다.

 이에 대해 이근안씨는 지난해 1월 <일요서울>과 한 인터뷰에서 김 전 장관에 대해 “솔직히 정말 그릇이 큰 양반이라고 느꼈다”면서 “(옥중면회) 이후 김근태씨가 내 특별사면을 건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면은 불발됐지만 차라리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한 게 다행이었다. 마음의 짐을 하나라도 덜은 셈”이라고 말했다.

 “김 장관이 들어오자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난 일은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이자 김근태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씨는 “무릎을 꿇거나 큰 절을 올린 일은 없다”면서 “당시 언론보도를 보고 ‘붓쟁이’들의 말장난에 웃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근태씨에 대한 전기고문에 대해서도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AA 건전지 2개’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이라고 부인했다.

 “그때 김근태씨를 앞에 두고 두 시간 넘게 일부러 말로 겁을 줬다. ‘너 같은 녀석은 전기구이를 해 버려야 바른 말을 한다’는 식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한 것이다. 한참 뒤에 눈을 가린 뒤 맨 발바닥에 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 두개를 대며 계속 겁을 줬다.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러면서 그는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일이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속된 말로 ‘선수끼리’의 대결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비록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 목사 안수를 받고 있는 고문기술자 이근안.
 출소 뒤 이근안씨는 2008년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김근태 전 장관이 고문당한 지 3개월가량 지난 1985년 12월19일 법정에서 고문받은 사실을 진술한 내용은 “건전지 두 개로 겁만 주었다”는 이근안씨의 주장과는 사뭇 다르게 너무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9월5, 6일 한차례식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3일의 금요일입니다.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의 장례식이다’ 이런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에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씩 받았습니다.”

  “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의 주범, 옥사)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를 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테니까 그때 너가 복수를 해라’ 이런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한 동물적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 사람은 나중에 혼자서 제 손을 잡고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로라도 다 인정하라. 여기에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결국 9월20일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25일 마침내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만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뒤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조문을 마친 뒤 빈소를 나서고 있다.

  
 
[7신 : 30일 오후 7시 5분]
안철수 "우리 모두 김근태에 빚졌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빈소를 방문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이렇게 보내드리기에는 우리 모두 너무 많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라고 애도했다.
 
안 원장은 여느 조문객처럼 줄 서서 기다렸다가 조문했다. 기존 정치권이나 민주화 운동 진영 인사들의 조문은 충분히 예견된 것이었지만, 안 교수의 조문은 다소 이례적이었다. 안 원장은 조문에 필요한 얘기 외에는 침묵을 지켰고 기자들의 질문에도 침묵을 지켰다.
 
취재진은 조문을 마친 안 원장에게 평소 고인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안 원장의 조문이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등을 물었지만 안 원장은 30여 초 가량 묵묵부답하다가 차를 타고 현장을 떠났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이 조문을 마친 뒤 빈소를 나서고 있다.
 

 

안 원장의 방문 전에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박경철 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이 연이어 빈소를 찾았다. 김 상임고문이 이사장으로 있던 한반도재단의 이사를 맡고 있던 박경철 원장은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오래전부터 존경하는 분이었다. 많은 분들이 족적을 기억할 것이고 그 분이 피우신 꽃을 계속 다듬고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고인은) 저희가 살지 못한 길을 가셨고, 평범한 우리들이 각자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초석을 놓아주신 분"이라며 "항상 마음에 부채의식을 갖고 있고, 이제는 한 시대의 상징으로 남았다"고 평가했다. 하루 전에도 투병 중인 김 상임의장을 찾아왔던 박 원장은 "지난 8월 말에 도봉구에 일이 있어 찾아 갔다가 뵀을 때는 건강하셨다"며 더욱 안타까워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김 상임고문은)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온몸을 바쳐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사회를 이상적인 상태로 돌리고 정의를 회복하는 일의 지도자"라며 "아직 할 일이 많으신데 아쉽게도 가셔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 살아남은 우리들이 고인이 못 다 이룬 민주주의의 꿈을 이룩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별세한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 배우 박철민이 조문한 후 오열하고 있다.
 

 

연기자 박철민씨도 빈소를 찾았다. 정치인 유세에 나서지 않지만 김 상임고문한테만은 유일하게 선거 유세를 도와줬다는 박씨는 "아파트단지에서 유세를 할 때 '시끄럽게 하면 피해보는 분이 있을 수 있다'면서 (스피커를 쓰지 않고) '생목'으로 유세를 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며 "작은 것도 배려하고 약자를 위해 큰 목소리를 내신 분이 가셔서 굉장히 슬프다"고 말했다.
 
백기완 "이 늙은이가 죽어야 하는데 근태가 먼저 죽어"
 
동지들이 먼저 가는 걸 하도 많이 봐서일까.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 없이 걸걸했다. 그는 "이 늙은이가 죽어야 하는데 근태가 먼저 죽어 내가 부끄럽다"며 "신자유주의의 폐기를 위해 싸우다가 나도 쓰러지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김근태 상임고문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돌아온 직후를 회상하며 "근태가 매 맞고 나왔는데, 나는 그 전에 매를 맞았거든. 내가 그 때 '매를 맞아보니, 매 맞아서 크는 키가 따로 있더라'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때 근태가 내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혔던 일이 생각난다"고 했다.
 
백기완 선생은 다시 '매맞아 크는 키'에 대해 "연륜의 키가 아니라 역사의 키"라며 "역사적 진보의 축적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화운동의 투사들이 당한 고초가 결국 한 사회의 진보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이외에도 박희태 국회의장과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빈소를 조문했고, 퇴근시간이 되면서 시민들의 조문이 늘어나 빈소 앞 행렬은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6신: 30일 오후 5시 48분]
말문 떼지 못한 손학규... 조정래 "우린 빨리 철 들어야"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고인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음..... 아......"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가장 친한 벗을 잃은 슬픔에 쉬이 말문을 떼지 못했다. 기자들 앞에 섰지만 말을 내지 못한 채 뒤돌아 이마만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꺼낸 첫 마디는 "김근태라는 친구를 가진 것이 참 자랑스러웠다, 친구였지만 그는 마음의 스승이었다"였다.
 
손 전 대표는 "그 올곧은 마음,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정, 항상 어려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을 제일 먼저 생각한 김근태 의장, 우리는 너무 큰 사람을 잃었다"며 "(먼저 간 것이) 야속하다, 김 의장이 못다한 삶을 우리가 지고 이 나라 민주주의·남북평화·통일·함께 잘사는 나라를 이루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어 그는 마지막 길을 가는 김 상임고문을 향해 "고문이 없고 억압 없는 세상에서 평화롭게 영면하길 빈다"는 말을 남겼다.
 
근거리에서 김 상임고문과 세월을 함께 한 이들은 "안타까움과 아까움"을 표했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오전 64세를 일기로 별세한 가운데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권양숙 여사와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권양숙 봉하재단 이사장과 함께 빈소를 찾은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김근태 선배에게 크게 빚졌다"며 "2주 전 문병 갔을 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여사가 통역해준 데 따르면 '야권 통합이 잘되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쾌유를 기대했는데 안타깝고 슬프다"고 말했다.
 
문 이사장은 "(권 여사와 인 여사가) 금년 3월 권 여사가 봉하에서 혼자 외로우시다는 말씀을 듣고 김근태 선배 내외가 봉하를 방문했다. 노 전 대통령이 종로에서 당선될 때 김 선배가 자신 선거처럼 도왔었는데 그 추억을 회상하며 추모의 마음을 나눴다"고 전했다. 그는 "권 여사는 '김 상임고문이 하실 일이 많이 남았는데 돌아가셔서 안타깝다'는 마음으로 승용차를 타고 봉하에서부터 먼 길을 오셨다"고 말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2007년 대선 때 김 전 의장은 어렵게 대선 불출마 결정을 했고, 이를 통해 통합의 길이 열렸다"며 "그는 항상 대의를 위해 몸을 던졌다, (김 전 의장이) 힘들 때 봬서 마음에 맺힌다"며 비통해 했다. 김 상임고문과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도 "정치인 중 처신이 가벼운 분이 많은데 그는 무겁고 조심스럽고 신중한 정치인으로 국민 뇌리에 남을 것이다, 참 아깝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 밖에 임채정 전 국회의장과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한광옥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한화갑 평화민주당 대표도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쳤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임수경씨가 눈물을 흘리며 빈소를 나서고 있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을 폭행했던 여성이 "김대중, 노무현 빨갱이는 물러가라"며 난동을 피우자,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에게 저지되고 있다.
 

 

종교계, 예술계, 정계 인사들 조문 이어져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 일기로 타계했다. 소설가 조정래가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헌화하고 있다.

정치권 밖 인사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고인은 우리를 대신해 오늘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고초를 겪었는데 우리가 그분에게 한 짓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트린 것"이라며 "이런 배신 때문에 빨리 가신 게 아닌가 한다, 우리는 빨리 철들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자승 스님은 김 고문의 부인 인재근씨에게 "이 시대의 자유·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크게 노력하신 분인데 안타깝다"며 "조계종단도 슬픔을 같이 하겠다"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빈소를 찾았다. 인씨와 막역한 사이인 현 회장은 인씨에게 "사모님께서 힘 내시고 우뚝 일어나셔야 한다"고 말했고, 인씨는 "북쪽 조문 다녀온 것을 잘 봤다, 수고하셨다"고 답했다. 평소 김 상임고문은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한 애착을 바탕으로 이에 큰 역할을 하는 현 회장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의미 깊게 생각해 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큰 별이 진 데 대해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먼저 마음을 내기도 했다. 직접 관을 덮을 '명정표'에 적을 글귀를 쓰겠다고 나선 것. 신 교수는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구'라는 글을 남겼다. 묘비명도 신 교수가 쓸 예정이다. 지역에서도 자발적인 분향소를 열겠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광주민주동지회는 YMCA 무진관에 분향소를 따로 차렸고, 전남대 총학생회도 캠퍼스 내에 분향소를 차렸다. 온라인에도 공식 조문 사이트(www.facebook.com/forevergt)가 열렸다. 오전 10시부터 이어진 조문은 오후 3시까지 1200명의 조문객이 다녀가는 등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박원순 서울시장을 폭행했던 한 중년여성이 김 상임고문의 빈소에 찾아와 "김대중·노무현 빨갱이는 물러가라"며 난동을 피우는 일이 발생했다. 그 여성은 관계자들에 의해 곧장 쫓겨났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FTA를 왜 반대하냐, 북한으로 가라"며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렸다.
 

[5신: 30일 오후 3시 47분]

이재오·김성식·원희룡 등 여권 인사들도 조문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오전 64세를 일기로 별세한 가운데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이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부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전 열린우리당 의장) 빈소에는 많은 여권 인사들도 방문해 애도를 표하고 있다. 특히 과거 민주화운동에 몸 담았던 여권 인사들의 회한은 깊었다.

 

김 상임고문이 위독했던 하루 전날 밤 병원을 방문한데 이어 30일 오후 조문을 위해 빈소를 찾은 이재오 전 특임장관은 "어젯 밤 병상에 있는 김 선생이 생전에 본 마지막이었는데, 그때 가뿐 숨을 몰아쉬며 놓지 않으려 하시는 걸 보고, 지난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당시의 의지를 느꼈다"며 "우리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통일도 아직 감도 못 잡고 있어서 김 선생이 살아서 할 일이 많은데 먼저 가셔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과 김 상임고문은 80년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등의 활동을 함께한 민주화운동 동지다. 이 전 장관은 "김 선생과는 개인적으로 남다른 동지애를 갖고 있다. 우리 집 골방에서 며칠 밤을 지내기도 하면서 많은 사연들이 있는데 먼저 보내고 나니 가슴이 아프다"며 "살아남은 사람이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게 김 선생의 뜻에 보답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김 상임고문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뒤에도 고문 경관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을 때 자신이 도움을 준 일을 기억했다. 김 상임고문이 고문을 당하기 몇 년 전 자신도 고문경관 이근안으로부터 고문을 당한 바 있어 김 상임고문에게 인상착의를 설명받고 고문경관의 이름이 이근안이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는 것.

 

이 전 장관은 지난해 7·28 은평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시를 언급하면서 "야권에서 김 선생을 향해 은평을에 출마하라는 권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 선생이 '이재오 동지가 있는 곳인데 내가 거기 어떻게 나가겠느냐'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던 이 전 장관은 "그 얘길 듣고 참 많이 가슴 아팠다"고 했다.

 

김성식 "이소선 어머니와 만나 옛일 도란도란 얘기하실 것"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고인의 넋을 기리며 묵념하고 있다.
  
▲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구'라고 직접 쓴 명정을 취재기자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명정은 장사 지낼 때 고인의 관직과 이름 등을 기재하고 관 위에 씌워서 묻는 붉은 천이다.

 

최근 한나라당을 탈당한 김성식 의원은 김 상임고문과는 함께 전민련 활동을 했다. 김 의원은 이날 조문 뒤에도 한동안 빈소를 떠나지 못했다. 그는 "형수(김 상임고문 부인 인재근씨)가 조문을 받지 못할 정도라니 참 걱정"이라고 했다.

 

김 의원은 "(김 전 고문이) 내게는 형님이고, 형수님과 내 아내가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활동을 같이 했다"며 "올해는 이소선(전태일 열사 모친) 어머니도 떠나고…, 옛 생각이 많이 난다. 두 분(김 상임고문과 이 여사)가 하늘에서 만나 옛 일을 도란도란 얘기하고 계실 것"이라고 했다.

 

87년 6월항쟁 당시 김천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던 김 의원은, 거기서 김 상임고문과 같이 지내기도 했다. 그는 "민주화운동의 업적은 물론이고 그의 사람됨과 인격이 후배들에게 늘 귀감이 되는 큰 형님이자 동지다. 오랫동안 그의 빈자리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김 상임고문을 평가했다.

 

학생시절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던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도 빈소를 찾았다. 원 의원은 "한때 민주화운동에 참여할 때 내게 많은 애정을 표현하셨고, '민주주의 확대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면서 채찍과 격려를 주시고 따뜻하게 대해주셨다"고 고인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원 의원은 "2001년 내가 한나라당에 입당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김 상임고문이) 직접 전화를 주셔서 '한 번 더 생각하라' '한나라당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리시던 생각이 난다"고 회상했다. 

 

이날 빈소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도 조문했다. 이 의원은 "고인과 국회에 같이 있었고 서로 잘 지냈다"며 "아끼는 분이 돌아가셨다"라고만 했다.

 

이외의 여권 인사들은 조문 대신 조화를 보내 애도를 표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황식 국무총리가 보낸 조화가 빈소에 놓였고,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조화를 보냈다. 박 위원장은 이날 비대위 회의 뒤 한나라당사에서 기자들을 만나 "깊은 조의를 표하고 명복을 빌겠습니다"라고는 했지만 '조문을 가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4신 : 30일 오후 1시 10분]

김근태 상임고문, 마석모란공원에 묻힌다

 

김근태 상임고문의 장례는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 이름으로 치르기로 했다. 공동장례위원장에는 김상근 목사와 지선스님, 함세웅 신부가 위촉됐고 장영달·이인영 전 의원과 박선숙 의원이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장례위는 다음 달 2일 추모 문화제를 열기로 했고 조문객들 모두를 장례위원으로 위촉할 계획이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질 예정이고 장지는 마석 모란 공원으로 결정했다.

 

장례위원회에서 홍보를 맡은 유은혜 전 민주당 수석부대변인은 "모란공원은 조영래 변호사, 전태일 열사, 문익환 목사 등 우리나라 열사들이 계신 곳으로 김근태 의장도 생전에 함께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며 장지 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공식 조문이 시작된 이래 조문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김 상임고문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 받을 때 맞은 편 방에서 고문을 받은 문용식 민주통합당 인터넷소통위원장은 "김근태 고문의 절규를 맞은편에서 들었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이겨낸 과정은 초인적 의지였다"고 회상했다.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김 상임고문을 고문한) 이근안이 그 때로 가도 그 짓을 하겠다고 하는데 마음이 정말 참담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도 조문을 와 "길은 다르지만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다"며 "따뜻하고 품격있고 의지 강한 분이셨다"며 고인을 평가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는 "독재 치하 고문을 이겨내고 민주주의를 온 몸으로 만들어내신 분이다, 생전에 그렇게나 바랐던 민주주의를 되찾고 국민들이 함께 살아갈 사회 만드는데 통합진보당이 함께하겠다"고 강조했다. 강기갑 통합진보당 의원은 "김 상임고문은 민주주의를 되찾고 지키기 위해 온 몸을 던져 살아온 분이셨다, 김 고문 가시는 길에 민주주의를 찾아오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다짐을 바친다"고 말했다.

 

민주통합당 지도부 경선에 출마한 박용진 전 진보신당 부대표는 "김 고문에게 시대의 짐을 너무 많이 짊어지게 해서 죄송하다, 편하셨으면 좋겠고 남은 짐은 후배들이 나눠지고 갈테니 김 고문은 영원한 청년으로 후배 지켜봐주고 격려해 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민주통합당 지도부도 함께했다. 원혜영 공동대표는 "김근태 상임고문은 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모진 고문에 큰 고통 받고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김 상임고문이 씨 뿌린 민주주의, 인권, 평화 위해 민주통합당을 비롯한 민주양심세력은 끝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김진표 원내대표는 "김근태 선배가 온 몸을 던져서 투쟁해 온 민주주의가 지난 4년간 현 정부에 의해서 많이 후퇴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총선·대선에서 국민과 함께 승리해 민주 정부를 회복시키고 대한민국을 민주진보개혁 정치로 복원시켜 선배의 뜻을 받들겠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전혜숙·최규성·최영희·최인기·김유정 의원이 조문에 동행했다.

 

이 대통령 조화 결국 받기로 결정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근조화환이 장례위원들의 거부로 빈소 밖으로 옮겨지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김근태

김근태 상임고문의 장례식장에 이명박 대통령의 조화가 배달됐다. 오전 11시께 청와대로부터 특별한 통보도 없이 덩그러니 조화만 온 것이다. 장례위원회는 당초 "조화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의전을 담당하는 우원식 전 의원은 "장례위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조화에 대해 상의했는데 생전의 김근태 선생께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독재로 규정하고 2012년 총·대선 심판 의지를 갖고 계셨으니 조화는 정중하게 거절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조화를 놓고 간 모양인데 그 마음은 알겠으나 고인의 뜻이 있으니 가져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결국 배달된 조화는 빈소 앞에 뒤돌려진 채 놓였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그래도 보내온 조화는 받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장례위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유은혜 전 수석부대변인은 추후 "이명박 대통령의 조화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받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이 보내온 조화는 박희태 국회의장의 조화와 함께 영정 오른편에 놓이게 됐다.

 

 

[3신: 30일 오전 11시 53분]

이해찬·노회찬·정세균 등 조문 

 

  
'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폐혈증으로 타계한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를 찾은 노회찬, 정동영 의원, 이해찬 전 총리(왼쪽부터)가 조문하고 있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평생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살아오셨고 고문을 이겨내고 해맑은 미소로 후배들에게 진심으로 대해주시던 분"이라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매년 찬바람이 불어올 때면 고생을 하셨는데, 이번에는 끝내 이겨내지 못하셨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전 총리는 "내 삶의 큰 기둥을 잃은 슬픔"이라며 "이 땅에 비인간적인 고문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비통해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김 전 고문과 서울구치소 생활을 함께 한 바 있는 노회찬 통합진보당 대변인은 충혈된 눈으로 "20여 년전 서울 구치소에서 팬티 차림으로 서로 위로하던 일이 엊그제 같다"며 "아직 민주화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고 하실 일이 많은 선배님이 이렇게 가셔셔 황망하다"고 말했다.

 

노 대변인은 "우리나라 정치에서 민주와 진보의 유일한 가교 역할을 해오신 분을 오늘 잃었다"며 "선배님이 가시다가 멈춘 그곳에서 후배들이 그 뜻을 한길로 받들어 민주와 진보가 만나도록 하는 일에 선배님의 뜻이 더욱 절실히다. 이제는 함께 열심히 나아가는 것이 이 슬픔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는 고인을 "바른 길을 걸어오셨고 후배들에게 언제나 정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셨다"며 "선배님의 인격이나 그릇 크기에 비해 당에서 제대로 대우를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평가했다.

 

정 전 대표는 "민주진보진영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지도자를 잃은 슬픔이 너무 크다"며 "남은 우리들이 지도자의 뜻을 받들어 정치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경제·사회·문화 영역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2신 : 30일 오전 10시 50분]

조문 시작... 유가족들, 한명숙 전 총리 품에서 눈물

 

  
'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폐혈증으로 타계한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를 찾은 정치인들이 조문하고 있다.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빈소에서 부인 인재근씨가 분향하며 영정사진 앞에 성경책을 올려놓고 있다.

오전 10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공식 조문이 시작됐다.

 

한명숙·이해찬 전 국무총리,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 정동영 전 민주당 최고위원, 김해진 특임 차관, 권영길 통합진보당 의원, 박선숙·김성곤 민주통합당 의원, 신중식·안명옥·이계안·장영달·신계륜 전 의원, 이강실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성준 성공회대학교 교수가 빈소를 찾았다.

 

10시 15분께 영정사진을 든 유가족들이 빈소에 들어갔다. 유족들 곁은 한 전 총리와 이인영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지켰다. 김 상임고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한 유가족들은 한 전 총리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조문을 마치고 나온 한 전 총리는 "고문 후유증을 너무 오래 가지고 있어서 정말 안타깝고 너무 빨리 가서 안타깝다"며 "어제 마지막 면회를 했는데 편하게 잠들었으면 좋겠다"며 울먹였다.

 

그는 "김근태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민주화 그리고 인권을 오늘같이 우리가 누리고 살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 공권력의 폭력이 이 땅에서 없어질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김근태 뒤를 쫓아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힘을 다해야 한다"며 "김근태도 일하는 우리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 전 총리는 김 상임고문에 대해 "대학교 1학년부터 같이 수십 년동안 민주화 동지로서 항상 바르게 살려고 한 훌륭한 후배였다"며 "우리 역사의 인권을 위해서 자기 생을 바친 역사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신 : 30일 오전 9시 30분]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가 조문을 하기 위해 빈소로 향하고 있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오전 별세한 후 오전 9시 30분 현재 조문객이 하나둘 이어지고 있다. 밤새 김 상임고문 곁을 지킨 이인영 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담담하게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오전 8시께 장례식장을 찾은 문용식 민주통합당 인터넷 소통위원장은 "민주화 운동하던 젊은 시절부터 김 상임고문과 인연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상임고문의 영정사진을 보며 "재단에 걸려있던 사진"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 빈소 조문은 오전 10시부터 가능한 상황이고, 오전 11시 민주통합당 지도부가 장례식장을 방문할 예정이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관계자의 전언이다.

 

장지는 문익환 목사 등 민주화 열사들이 모셔진 마석모란공원으로, 장례 형식은 민주사회장으로 치르는 것을 검토 중이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민주당 상임고문 등 민주계 어른들이 모여 회의한 후 장례 형식을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yonhap_graphics(트위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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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가 큰 소리로 연설할 수 없었던 까닭은?

영원한 '선배'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추모하며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 유성호
김근태

2007년, 당시 열린우리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이 열기를 더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경선에 출마한 김근태 전 의장을 지지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심각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의장님이 경선 연설에서, 그리고 토론회에서 왜 좀 더 자신있게 하지 못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정동영 후보처럼 큰 소리로 당당하게 연설을 해야지 왜 말투도 어눌하고 소리도 작냐는 식의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의장님의 성품이 온화한 것은 좋은데 대선 후보를 뽑는 경선에서도 이러면 되냐느니, 또는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큰소리를 뻥뻥 쳐야 하는데 아쉽다느니 하는 말들이 참 많아지던 때였습니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따라서 바닥의 흐름 역시 더욱 비관적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후보감은 정말 김근태가 맞는데 아무래도 어렵겠다. 저런 식으로 연설해서 어느 국민이 후보를 지지하고 확신을 갖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빨리 핵심 참모에게 이런 여론을 알려 지금이라도 바꿔야 한다는 다양한 말들이 김근태 의장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떠 돌았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저 역시 전화를 했습니다. 의장님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있던 선배에게 "제발 연설할 때 큰 소리로, 당당하게 연설 좀 하시도록 말씀 좀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런 불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어진 선배의 말은 놀라웠습니다.

 

고문으로 시달린 지난 26년의 삶, 김근태의 손수건

 

그 문제를 잘 알고 있다는 선배는 제 말에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우리도 알지. 그런데 문제는 의장님이 큰 소리로 연설을 할 수가 없어."

"아니 왜요? 그럼 여태 정치 연설을 그런 식으로 하셨다는 거예요?"

 

진실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이 역시도 바로 '고문 기술자' 이근안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1985년 8월, 민청련 활동과 관련하여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한 의장님을 간첩으로 조작하려는 음모였습니다. 그리고 알려진 것처럼 허위 자백을 강요하며 이근안은 의장님을 상대로 8번에 걸친 극심한 전기고문과 2번의 물고문을 가했습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물고문 치사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의장님이 연설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고문 때문이었습니다. 고음으로 연설을 할 경우 콧물이 흐르고 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설을 하며 늘 손수건을 준비해야 했다던 그 아픈 '숨겨진' 비밀을 들으며 그분이 감당해야 했던 그 비극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저는 새삼 깨달아야 했습니다.

 

  
2007년 10월, 제17대 대통령선거 대통합민주신당 중앙선대위 발대식에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오른쪽 끝)이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권우성
정동영

 

아내의 생일 축가 <사랑의 미로>가 슬픈 이유 

 

민주화운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장님은 영원한 '선배'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인 인재근씨는 '형수'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던, 적던 후배들에게 그는 '김근태 선배'와 '인재근 형수'로 불렸습니다. 이 두 분의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는 한 권의 책으로 남았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5년 8개월간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의장님이 아내인 인재근씨와 어린 자식들에게 쓴 편지를 모아 묶어낸 옥중 서간집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가 그것입니다.

 

1992년 출간된 이 책에서 의장님은 사랑하는 가족과 어린 아들, 딸에게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그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은 분이 바로 의장님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교도소로 면회온 아내를 위해 불러줬다는 가수 최진희씨의 노래 <사랑의 미로>입니다. 이근안으로부터 당한 고문으로 망신창이가 된 몸인데도 불구하고 생일을 맞은 아내에게 선물로 불러줬다는 그 노래를 들으며 인재근씨는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면회가 끝나고 되짚어 오는 길에서 아내 인재근씨가 흘린 하염없는 눈물은, 그래서 그 사연을 접한 이들에게 또 다른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의장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나던 여느 정치인과 다른 따스함이 있었고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장님은 늘상 악수를 나누며 눈을 맞췄습니다. 그러면서 개개인에 대해 조그마한 변화나 느낌에 대해 말을 했습니다. 누구처럼 그저 앞 사람에게만 손을 내밀면서 눈은 다음에 악수할 사람을 바라보는 건성이 아니라 의장님은 나와 손잡고 있는 그 사람과 눈을 맞추며 한마디씩 안부를 묻었습니다. 바로 의장님이 사람을 대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을 대하는 따스한 관점은 어쩌면 의장님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이 사과했는데 자신은 그것이 가식처럼 느껴져 솔직히 용서할 수 없었다며 "이런 내가 옹졸한 것 아닌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근안은 자신의 행위를 두고 "고문이 아니라 심문이며 심문은 일종의 예술이고, 당시 시대상황에선 애국"이라는 괴변을 늘어놓고 더 나아가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라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의장님의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가슴 아픈 증거입니다. 참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요.

 

웃을 자신이 없어 '조지지도 못하는' 정치인, 김근태

 

"2002년 (대통령) 경선 때 (후보) 9명이 한 줄로 앉아 있으면 한 명씩 나가 연설을 하고 들어왔다. 차례로 나가 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신나게 조지고, 뒤돌아서선 웃으면서 악수하고 자리에 앉더라. 나는 신나게 조지지도, 웃으면서 악수하지도 못하겠더라."

 

의장님 타계 후 트위터에 오른 의장님의 말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누구보다 무섭게, 그리고 단호하게 맞서 싸워온 그였지만 단상 위에서 누군가를 향해 소위 '조지고' 바로 웃으며 악수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김근태는 이런 분이었습니다.

 

다시 2008년 가을 어느 날입니다. 제가 의장님과 관련해서 꼭 남기고 싶은 그날의 기억입니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장님은 '아시는 것처럼' 낙선했습니다. 지역구의 모든 곳에서 다 이기고 마지막으로 개표한 '뉴타운 개발 예정'지역구의 투표함에서 쏟아진 당시 신지호 한나라당 후보를 향한 몰표가 결국 1200표 차의 낙선 이유가 되었습니다.

 

의장님의 낙선은 안타까움과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민주주의 대표 주자'인 김근태와 '뉴라이트 대표 주자'인 한나라당 후보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점은 국회의원 의석 하나를 잃었다는 산술적 의미를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행한 단어가 '지못미'였습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말의 약어인 '지못미'가 세상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당시 의장님의 낙선은 많은 이들에게 오히려 미안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김근태가 버스를 타며 생각한 '함께 살자'

 

  
2008년 총선 당시 서울 도봉구 쌍문역 인근의 김근태 의원 선거사무소 모습
ⓒ 선대식
김근태

그때 즈음, 의장님이 대표로 있었던 정치 조직인 '한반도재단'에서 회합이 있었습니다. 사무실 이전과 관련한 회의가 끝난 후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겸한 회식을 하기로 했는데 의장님도 참석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낙선 후 처음 뵙는 자리였기에 어떻게 지내시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애초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어지기에 보좌관으로 있던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배는 버스를 타고 오시는데 길이 밀리시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럼 의장님에게 차가 없어요?"

 

비록 선거에서 낙선했다고는 하나 차 한 대 쓰지 못할 정도로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모아놓은 돈도 없고 숨겨놓은 돈도 없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는 그 선배의 담담한 말이었습니다. 정직한 정치인이라면 당연한 일인데도 저로서는 괜히 화도 나고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이 말을 함께 들은 참석자들 역시 새삼 놀라며 약간은 우울하게, 또는 즐겁지만 어색하게 이후 도착한 의장님과 술잔을 나눴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1차 자리가 끝난 후 의장님은 집으로 돌아간다며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배웅을 위해 일행들이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가던중 누군가가 "이건 아닌 것 같다. 차를 마련할 수 있게 우리가 도와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고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의장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자네들 말은 고마운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예전에는 자가용을 탔을 때 차에 타서 늘 혼자 나라만 생각하고 정치만 생각했거든. 그런데 요 근래 버스와 지하철을 타면서부터는 그게 아니라 이웃을 생각하게 되더라구. '내 옆에 앉아서 가는 저 사람은 어떻게 먹고사나? 저 사람하고 내가 같이 먹고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솔직히 난 지금이 더 좋은 것 같아. 너무 큰 것만 생각하고 내 주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는데 반성도 많이 하고. 그러니 내 생각은 하지 말고 자네들과 내가, 또 우리가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자구."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 마음이, 그 진정성이 그대로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이후 내내 저는 의장님의 그 날 말씀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선배' 김근태 의장님, 사랑합니다

 

그날 버스를 타고 떠나면서 손을 흔들던 의장님의 미소는 저에게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따스한 기억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의장님의 그 말씀을 꼭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함께 살자'는 그 마음이 바로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자신의 몸과 영혼을 바쳐 남기고 싶었던 이 세상의 메시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글이 추모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의장님의 위중 소식을 접한 한 달 전부터 불안한 마음이었는데 끝내 그것이 부고 소식이 된 것입니다.

 

"2012년을 점령하라."

 

사실상의 유언이 된 이 말씀을 되새기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처한 각자의 조건과 상황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단순한 권력의 변화가 아닌 '함께 먹고살자'는 의장님의 그 말씀처럼, 우리의 이웃과 내가 '다 같이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을 구현할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일하겠습니다.

 

제가 존경하던 김근태 선배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정말 아름답게 잘 사셨습니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