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 한국사 3대 패전(敗戰) - 칠천량, 쌍령, 현리전투

온리하프 2011. 12. 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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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전의 역사

역사는 보통 승자의 역사라고 한다.

인간이면~

꼭 승자가 아니더라도 쓰디쓴 패배의 기억은 최대한 감추고 싶어한다.

때문에 위대한 ‘승전(勝戰)’들은 세세히 기록되어 칭송 받지만 ‘패전’은 주목받지 못하고 역사 속에 침전해 있다.

우리나라 역시 살수대첩, 귀주대첩,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수 많은 승전들, 낙동강 방어전, 인천상륙작전, 월남의 짜빈동 전투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전투들은 모두 승전이다. ‘성공적 방어’, ‘적의 격퇴’, ‘철통같은 사수’ 같은 수식어만이 있을 뿐......

하지만 우리 역사에 이러한 승전만 있었을까? 한민족이 세계에 둘도 없는 막강한 ‘전투민족’이 아닌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터넷에 "한국사 3대 패전" 이라고 떠도는 것으로,

많은 패전의 이유가 중과부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데~   여기에 뽑은 세 전투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경우이다.



1. 임진왜란 (정유재란) - 칠천량 해전 (1597)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반도는 왜군의 침략에 의해 전화에 휩싸였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해전에서 만큼은 연승하며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조선이 해전에 자신감을 얻은 상황에서 1596년 겨울, 가토 기요마사군의 재침략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조정은 가토군이 부산에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수군에 공격명령을 내리지만, 당시 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적이 전해준 정보라는 것과 이미 상륙한 왜군을 제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결국 옥에 갇힌다. 

후임에 오른 원균 역시 출전을 꺼려했지만 1597년 음력 7월 4일,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함 200여척을 이끌고 억지로 출전한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를 출발해 칠천량, 옥포, 다대포를 거쳐 동진하니~ 의외로 훨씬 병력이 많은 일본의 수군은 계속해서 후퇴를 한다.

이에 승기를 잡았다고 오판한 원균은 왜군을 맹렬히 추격했으나, 부산포 앞 저도 인근 해상에서 왜군이 돌연 반전, 조선 수군을 공격한다.

이 와중에 20여 척의 판옥선이 파손당하고 표류해 떠내려가 노획/격파 당하기도 한다.

 

<칠천량 주변의 지도 / 일본 측에서 그린 칠천량 해전의 기록화>


전초전에서 패퇴한 원균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수로로 퇴각해 배들을 정박시키고 방치하니~ 위험을 감지한 경상우수사 배설이 안전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청했으나 이대로 후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원균은 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7월 15일 밤, 토도 타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일본 수군이 칠천량을 급습한다. 수군통제사인 원균은 전투 도중 우왕좌왕하며 도주, 전라우수사인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는 끝까지 분전하다 장렬히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은 일부 판옥선을 이끌고 서쪽으로 도주한다. 도주한 원균은 심지어 한산도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주하란 명을 내려 사실상 수군을 포기한다. 정신없이 도망가던 원균은 결국 왜군을 만나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나중에 이순신장군이 다시 나섯을 때는 전투에서 도주한 배설이 이끌고 온 12척의 판옥선이 조선 수군의 전부가 되었다.

 

<1995년에 그려진 원균의 초상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원균의 모습

- 후세의 평가가 어찌되었든 그의 리더쉽 부재가 칠천량 대패를 불렀습니다.>

 

이 패전은 지휘관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준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이순신의 지휘아래 동북아시아 최강으로 군림했던 조선 수군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또한 전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조정이 어설프게 개입한 것 역시 조선 수군에 재앙을 선사했다.

칠천량 해전 이후 일본 수군이 남해안에서 제해권을 갖게 되어 육상에서 진격 중인 왜군 역시 마음대로 전라도를 유린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거제도와 칠천도를 잇는 다리가 놓여진 고요한 칠천량 /

칠천량 해전이 이순신 장군에게 크나큰 시련을 줍니다. 그의 명언을 새긴 해군2함대사령부의 비석 (출처: 국방일보)>


삼도수군이 하루아침에 ‘증발’한데에 기겁한 조정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복권시킨다. 자신이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육성한 수군이 사라진 것에 피눈물을 흘린 이순신은 그나마 배설이 도주하면서 데려온 판옥선 12척으로 수군을 재건한다. 지금의 해군 2함대사령부 정문의 기념비석에 새겨진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남아있나이다.’라는 명언은 이때 나왔다. 한순간이었던 일본 수군의 전성기도 약 2개월 후 칠천량에서 서쪽으로 200km 떨어진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13 vs 133의 신화를 쓰며 산산조각난다.




2. 병자호란 - 쌍령전투 (1636년)


조선 국토를 잿더미로 만든 임진왜란이 끝난지 채 40년이 안되어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새롭게 건국한 ‘청’과의 관계가 시시각각 악화됨에도 불구하고 국제 감각이 부족했던 조선은 청군의 동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2월 9일 청군이 최초로 압록강을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4일 후인 13일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에는 이미 청군이 개성을 점령한 상태였고 인조는 도성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간다. 기병 위주의 청군은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입성한지 불과 3일째인 16일, 산성을 포위했다.


한양이 청군 손에 떨어지고 남한산성이 포위될 때까지 청군은 제대로된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다. 도성 근처의 조선군은 모두 항전을 위해 남한산성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고립된 왕을 지키기 위해 지방의 조선군을 결집해야 했다. 충청, 강원의 조선군은 개별적으로 남한산성을 향하다가 청군과 접전, 축차 소모되어 집결하지 못하였지만 남부지방에는 상당한 조선군 세력이 보존되어 있었다.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은 도합 4만에 가까운 조선군을 모아 왕을 구원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향하고, 이어 산성이 포위된 지 약 2주후인 12월 30일경, 쌍령에 도착한다.

<인조의 구출을 위해 경상도에서 남한산성으로 진군한 조선군 /

지금은 3번 국도가 지나는 경기도 광주 인근의 쌍령고개 (출처: 네이버지도)>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쌍령은 크고 작은 두 고개를 가리킨다. 각각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두 무리의 조선군은 각각 고개 양쪽에 진을 쳐 목책을 세운 후 타지에서 집결할 조선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조선군에 대응해 남한산성 인근에 주둔하던 청군 6천 가량이 지금의 곤지암인 현산을 점령하고 쌍령으로 척후를 보낸다.

 

 

<조선 풍속도 속 포수의 모습 / 청의 주력이었던 ‘팔기군’>

 

임진왜란 때 조총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꼈던 조선군은 꽤 많은 군사들을 조총으로 무장시킨 상태였다.

활이나 검 또는 창에 비해 많은 훈련 없이도 상당한 위력을 보이는 조총이지만 대규모 전투에서는 대형유지, 사격통제가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했고 당시 조선군은 이런 훈련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청의 척후병이 쌍령으로 접근하자 조총을 소지한 조선군 포수들은 조총을 연속 방포해 청군 척후의 기세를 꺾는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상황에서 마구 조총을 쏜 탓에 개인이 소지한 화약을 모두 소진해 화약을 더 달라고 우왕좌왕 했고 이를 본 청군이 목책을 뛰어넘어 조총대를 유린했다.

전통적으로 백병전에 약하고 훈련도 부족한 조선군인지라 청군이 목책을 넘자마자 어이없게 붕괴하고 만다. 처음 접적한 진영을 지휘했던 허완은 병사들이 혼란에 빠져 도망치는 와중에 말에서 떨어져 압사 당했다.


<후금의 기병을 저지하는 조선의 궁병과 포수 /

 20세기 전의 총병대에겐 대열 유지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19세기 대영제국의 Thin Red Line>


 

이에 비해 민영의 진영은 비교적 정돈되어 조총으로 청군을 잘 저지하고 있었다.

수적으로도 상당히 우세했으므로 성공적인 방어의 기세가 보였지만, 이곳에서도 포수들의 화약이 동나버리는 문제가 생긴다. 화약을 재분배하기 위해 진영 한가운데에 있던 화약을 나눠주다 화약이 화승의 불꽃에 닿아 폭팔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이 폭사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민영의 조선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고 이를 바라보던 청군의 기병 300여기가 일제히 돌격, 전군이 전멸하고 지휘하던 민영 역시 전사한다. 청군의 돌격 때는 실제 청군 기병에 찔리고 베이거나 밟혀 죽은 것 보다 무질서하게 도망치다가 압사당한 조선군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기록이 애매한 점이 있어 청군의 병력이 300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포로 무장한 압도적인 병력의 조선군이 제대로 된 전투도 벌이지 못한 채 와해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1636년 1월 3일, 남한산성의 인조를 구출할 수 있었던 조선의 4만 대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쌍령의 대패 이후 채 한달이 되지 않은 1월 30일, 인조는 청에 항복하고 한민족 최대 굴욕 중 하나인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3. 한국전쟁 - 동부전선 현리전투 (1951년 5월)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 1950년은 격동의 한해였다.

개전 단 3일만에 서울 함락,  8월에는 낙동강 방어선,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 10월 말에는 압록강에 이르러 통일을 눈앞에 뒀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이듬해 1.4후퇴까지 전선이 남북으로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치열한 진격전이 벌어졌다.

1951년 봄부터는 전쟁의 성격이 다소 바뀌어 유엔군, 중공군 모두 본격적인 물자, 장비지원과 부대 배치가 완료되어 38도선 근처에 형성된 전선을 따라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진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화인민지원군의 총사령관인 팽덕회(펑더화이)

지략가였던 그가 지휘했던 중공군은 지금 널리 알려진 ‘인해전술’만이 아닌 뛰어난 전략기동으로 유엔군을 당황시켰>

 

 


현리전투의 발단


1951년 4월, 팽덕회가 지휘하는 중공군과 인민군은 서울을 재탈환하고자 서부전선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벌인다. 훗날 춘계 1차 공세라고 이름 붙여진 이 전투에서 병력 차이를 압도적인 화력으로 메운 유엔군의 대응으로 공산군의 기세가 꺾였다. 두터운 서부전선을 돌파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팽덕회는 서부전선에 대한 공격을 단념하고 강원도로 눈을 돌린다.


유엔군 측은 5월중으로 공산군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거라 예상했고 주요 목표물인 수도권에 미군 주요 사단들을 배치했다. 험준한 중동부지역의 산지에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국군 사단 위주로 배치가 되었다. 이를 간파한 공산군은 중공군이 홍천부터 인제 방면을, 인민군이 동해안을 돌파해 설악산과 방태산의 험준한 지형에 묶여있는 국군 4개 사단을 이중 삼중으로 포위섬멸할 작전을 세운다. 경험과 화력이 충분한 미군보다는 그렇치 안은 국군을 주요 목표물로 설정한 것이다.

<현리전투가 벌어진 1951년 5월 춘계2차공세에서 공산군의 공격 계획>

 

국군 3군단의 위기

1951년 5월 15일, 중동부의 전 전선에 걸쳐 공산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투는 공산군의 예상과 다소 다르게 흘러간다. 국군 3군단(3사단, 9사단)의 좌측을 담당한 중공군 20,27군은 국군 5, 7사단의 방어선을 가볍게 돌파했지만 3군단 우측을 돌파하기로 했던 인민군 2군단은 국군 1군단(수도사단, 11사단)의 저항에 막히고 말았다. 홍천 방면의 미군을 공격하기로 한 중공군 15, 60군 역시 미군이 완고하게 버텨 홍천으로의 진출에 실패 한다. 

예비대를 투입할 정도의 돌파구가 열리지는 못했지만 국군 5, 7사단이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3군단 왼쪽 옆구리가 휑하게 비는 일이 생긴다. 이 와중에 국군 3군단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계곡으로 빠르게 기동한 중공군 20군의 1개 중대가 17일 새벽에 오마치고개를 점령했다.


 

<춘계 2차 공세 때 소양강을 도강하는 중공군과 유엔군을 추격중인 중공군>


오마치고개는 현리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3군단의 3,9사단의 유일한 퇴로였다. 당연히 우선적으로 방어되어야 할 요충지였지만 미10군단과 국군 3군단의 책임지역 경계로 지휘 혼선을 겪다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고 한다.오마치고개가 점령당한 사실을 17일 아침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고 사단에 철수 명령을 내린다. 이렇게 현리에 3군단 예하 두개 사단의 병력이 바글바글하게 꼬여든다. 피해를 많이 받지 않은 전력임에도 불구하고 오마치고개에 대한 돌파시도는 지지부진 했고 오마치고개를 점령한 중공군은 점점 보강되었다.

 


 

전면 패주의 시작


이런 상황에서 3군단장과 두명의 사단장의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고 현리에 밀집된 병사들의 공포감이 서서히 고조되어 군단장이 도주했다는 소문까지 퍼진다. 기록상으로 이견이 많은데 훗날 3군단장이었던 유재흥 장군은 현리에서 작전회의를 마치고 군단 사령부로 복귀하는 길이었다고 주장한다. 장교들이 알아서 장비와 물자를 파기하는 상황에서 17일 밤, 오마치고개 공격을 준비하던 두 개 연대가 통신혼란을 겪다 어이없게 후퇴하는 것을 계기로 3군단 전병력이 남쪽을 향해 방태산으로 철수를 시작한다 말이 철수지 고급장교부터 병사까지 패닉에 빠져 산을 향해 달아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방태산을 가득 매운 패주병을 향해 인민군과 중공군이 추격을 했고 이것이 혼란을 더욱 가중시켜 장비를 폐기도 안한 채 놔두고 소총도 버린 채 도주한 병사도 많았다고 한다.


 

<전쟁 후반기의 국군 포로 행렬의 모습 / 춘계 공세때 포로로 잡힌 중공군>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3군단은 패잔병으로 흩어져 방태산을 넘어 어찌어찌해서 현리로부터 70km 남쪽의 하진부리에서 겨우 집결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비는 유실, 심지어 몇몇은 제대로 된 파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중공군 손에 들어간 것도 꽤 되어 미 공군이 국군 장비를 폭격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고... 집결한 병력은 고작 30%.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격분한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은 부대의 통제력을 상실한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을 문책하고 패잔병으로 전락한 3군단을 해체, 남은 병력을 미군에 배속시킨다. 사태 수습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벤플리트 장군은 경기도 광주에 주둔한 미군 3사단을 3일 동안 2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시켜 돌파구를 틀어막고 진격하는 공산군에게 무지막지한 화력을 퍼붓는다. 또한 동해안에서는 후퇴했던 국군 1군단이 북진해 대관령에서 현리방면으로 압박을 가했다. 23일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진 반격작전으로 공산군은 9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5월 공세를 종결, 결국 기존의 전선에 가까운 형태로 복귀했다.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벤 플리트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

화끈한 화력전투를 즐겼던 벤 플리트 때문에 하루 제한된 포탄 사용량의 5배를 의미하는 ‘Van Fleet day of Fire’라는 용어까지 생겨난다>



초기 한국군의 문제점


5월공세, 또는 춘계 2차공세라고 이름 붙여진 10일간의 치열했던 전투는 크게 보았을 때는 공산군의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벌어진 3군단의 전면 패주 및 해체는 국군과 미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다. 심지어 군 지휘부에서 3일 동안 3군단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생긴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현리를 재점령하면서 패잔병 부대로 흩어진 3군단 예하 병력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지만 만약 중공군이 제대로 된 포위망과 함께 추격전을 벌였다면 3군단에서만 만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할 뻔 했다한마디로 인민군의 무능력 덕에 3군단이 목숨은 건진것이다.

 미군은 그 동안 국군의 투혼을 불사르는 개개인의 전투에는 우수한 평가를 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국군이 큰 규모의 위기상황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내린다. 전투 초기의 상황에는 미군의 책임도 있었지만 군단 전체가 통제 불능이 된 것은 엄연히 국군 지휘관들의 자질 부족으로 볼 수밖에 없다. 병사들의 패주를 막지 못한 장교들이 계급장을 떼고 같이 달아난 사실만 봐도 얼마나 통제가 되지 않았는지 짐작 할 수 있다.


 

 

<험준한 산악지형의 현리-오마치고개 / 지금은 현리지구 전투를 기리는 비석이 그 때 비극을 말해준다>

 

이것은 일본군 출신 장교와 광복군 출신 장교가 섞여있는 ‘전통’과 ‘근본’없는 초보적인 수준의 군이었던 국군에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문제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대부분의 장교, 지휘관들이 미군에 의해 새롭게 야전 교육을 받는다. 또한 미군이 한국군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이 미군에 귀속되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말도 있다. 현리전투는 부대간의 원활한 정보 공유와 상황 대처에 유능한 지휘관, 책임감이 투철한 장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주는 전투다. 현리에서의 비극을 겪고 나서 국군은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시작했고 다행히도 남은 전쟁기간 동안 더 이상 이런 치욕을 당하지는 않았다.

 

참고 : 당시 군단장인 유재흥 장군은 국방부장관까지 지낸다.

        현리전투전적지를 방문하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했으며,

        노무현 정권 시절 작통권 환수에 맹렬히 반대했다고 한다.

[출처] 한국사 3대 패전 - 칠천량, 쌍령, 현리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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