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수
그분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진다
하루빨리 모진 병마와 그 비참한 생에서 부터
해방되어 맑은 영혼으로 되돌아 오길 빌면서~
박인수씨는 현재 파킨슨씨병과 싸우며 외로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랜 떠돌이 생활을 한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하사와 병장' 출신 가수이자 절친한 후배인 이경우씨 이죠!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는 그의 독특한 무대 매너~
쥐어 짜는듯 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토해내는 목소리는 살아생전의 김현식을 무색케 할만치 파괴적인 울림과 뼛속까지 젖어들게 하는 듯한 깊은 한이 담겨있습니다.
흑인보다 더 흑인의 영혼을 지닌 가수라는 찬사를 받으며 한시대를 주름잡은 한국 소울의 최고 대가였던 그는
2년전 행려병자의 몸으로 병상에서 사그라 들어가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리며 TV앞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방탕한 생활과 계속된 악운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모습이었던 그는 아직도 무대 위에 다시 서기위한 마지막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재기와 죽음의 갈림길에서 병마와 싸우던 그는 그 뒤로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저음을 읊조릴때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는 듯하고 고음에서는 세상을 다 포기한 사람처럼 처절하게 탄식하며 무대를 압도하는 그의 목소리는 그의 후배격이었던 김현식의 그것보다도 소리를 갖고노는 듯한 자유로움과 더욱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한의 정서가 담겨있었습니다.
전쟁고아로 스무살 이전을 미국에서 보내며 어린시절부터 고독을 뼛속깊이 체감한 그에게 소울은 흑인의 기교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그 자신의 정서 자체였지요.
그가 '꼬부라진'억양으로 더듬거리며 한국어로 된 노래들을 열창할때 당시 용산에 주둔하던 흑인 미군들이 몰려와 "앵콜"을 외치며 열광한 일화는 흑인음악에 담긴 비애의 감각을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해낸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 이었습니다.
그에게 소울은 단순한 취향이나 패션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진, 어저면 흑인의 정서와는 우연히 공통분모를 갖고 있을 뿐이었던 그 자신만의 표현방식이었던 것이지요.
김현식이나 김광석이 그렇듯 노래로 자신의 삶을 드러낼줄 아는 가수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조절하고 계산하는데 서툴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돈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었고 방랑벽이 심해 가장 친했던 지인들 조차 등을 돌리게 만들었던 박인수도 실제 삶에서는 완벽한 무능력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여느 가수들처럼 조금만 더 자신을 관리하고 매스컴과 문화산업의 틈바구니에서 제 몫을 챙기면서 입지를 다졌다면 그는 음악계에서 나름대로의 이름값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을 관리하고 시스템에 자신을 맞춰 가면서 소비자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워 토해내는 소리꾼의 진정성을 듣기란 어려운 일이 었겠죠?
노래 말고는 어떤 재능도 갖지 못한 사람이 노래를 둘러싼 어떤 부차적인 것들에도 무관심한채 모든것을 자신의 소리에 바침으로서
노래와 삶이 하나가 된 영혼의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가수들의 그들의 길을 따를 필요는 없다 해도, 적어도 그들의 세계가 시대를 넘어서 존중받아야 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자신에게 작곡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신중현의 존재는 그의 음악인생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할만큼 큰 것입니다..
그가 부른 신중현의 노래들 역시 그의 작곡을 가장 인상적으로 소화해 냄으로서 노래에 진정한 생명을 불어 넣습니다.
"기다리겠소" "뭐라고 한마디 해야할텐데"와 같은 히트곡들도 좋지만~
역시 그의 대표곡은 "봄비"입니다.
1967년 이정화가 부른 오리지널이 다소 밋밋한 트롯풍의 느낌으로 그저그런 반응을 얻었던 반면 박인수의 봄비는 원곡을
어쿠스틱 블루스의 거친 리듬 속에서 넓은 옥타브를 신들린 듯이 넘나드는 창법으로 재해석하면서 가슴속을 파고드는 충격을 선사합니다.
차갑게 젖어드는 가라앉은 목소리와 독특한 애드립, 고음을 미친듯이 넘나들며 절규하는듯 울리는 긴 후렴구는 그의 진가를 알려주는데 충분합니다.
1968년에 나온 오리지널도 좋지만 1988년에 신촌블루스 1집에 객원가수로 참여해서 부른 "봄비"는 엄인호의 노련한 블루스기타가 받쳐주어 나름대로 독특한 느낌입니다.
상업적 계산과 언론플레이에 좌우되는 대중음악판에서 훈련과 가공으로 대량생산되는 기성품 영혼의 소리를 찾는것은 비록 추억일지라도 그가 한번 더 건강한 몸으로 무대 위에서 그 절규하는 모습을 보여줄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봄에는 정말 비가 많이 내린다.
초봄에 내리는 비는 동장군의 마지막 발악인 꽃샘추위를 동반 시키지만 봄비를 단비라 말하는 것은 온 대지를 촉촉이 적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돕는 생명수이기 때문이다.
봄을 노래한 시즌 송의 기본 정서는 명랑하고 희망과 극복의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봄비'를 소재로 한 노래의 공통된 정서는 '나를 울려주던 봄비~♬', '봄비 속에 떠난 사람~♪' 같은 가사처럼 통속적이다.

가슴 먹먹해지는 절창 압권
이은하의 '봄비'는 많은 대중이 기억하는 빅 히트 곡이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절창이 압권인 박인수의 '봄비'는 최고의 명곡으로 손색이 없다. 1970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신중현이 리드한 록밴드 <퀘션스>의 첫 앨범에 수록된 노래다. 당시 객원가수로 밴드에 참여했던 박인수는 이 노래 하나로 한국 소울 뮤직의 대부라는 빛나는 지위를 획득했다.
박인수는 임희숙, 여성듀엣 <펄시스터즈>, 남성듀오 <하사와 병장>의 이경우 등 후배들의 음악영웅으로 군림하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1965년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할램가 뒷골목에서 몸에 밴 흑인 특유의 리듬감으로 무장해 미8군 오디션에서 A등급을 받고 한국 최초로 결성된 록밴드 <코끼리브라더스>의 객원보컬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흑인의 한이 가득한 소울을 기막히게 소화했던 그는 <키보이스>, <샤우터즈>, <데블즈>, <바보즈> 등 수 많은 밴드들의 객원가수로 활약하며 미8군 무대에서 가창력을 인정 받았다.
단숨에 미8군 여군들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 박인수는 '라이브무대의 황제'라는 극찬을 받기 시작했고 1967년 소문을 들은 신중현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1970년 결성된 신중현 밴드 <퀘션스>의 첫 앨범에 수록된 '봄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박인수는 비로소 일반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신중현은 "박인수는 영어 발음이 좋고 손을 비비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노래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사실 '봄비'의 오리지널 가수는 박인수가 아니다. 신중현 밴드 <덩키스>의 메인 보컬이었던 여가수 이정화가 주인공이다. 비록 인지도를 얻지 못하고 월남 공연을 떠난 후 행적이 끊겨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보컬이지만 이정화는 신중현사단의 가수를 언급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전설적인 여성보컬이다. 1969년 신중현은 이정화가 먼저 발표했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던 노래를 박인수에게 다시 부르게 했다. 적중했다. 박인수는 "아이고 세상에. 노래가 히트하면서 여대생들이 엄청나게 따라 다녔어. 밤새도록 집으로 전화하고 찾아와 집에 들어 가지도 못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야"라며 당시의 인기를 전했다.
시대초월 리메이크 잇따라
흔히 가슴을 치는 절창이 압권인 박인수의 버전이 '소낙비'라면 부드럽고 여성적인 이정화의 오리지널 버전은 '가랑비'로 비유된다. 박인수 버전이 엄청난 대중적 파장을 일으켰지만 이정화의 오리지널 버전 또한 은근한 매력이 상당하기에 비교해 들어보길 추천한다. 편곡에 따라 노래의 느낌이 변하는 것을 무수한 서바이벌 오디션을 통해 경험했겠지만, 가수의 창법 또한 얼마나 중요한 지를 실감할 것이다. 박인수는 1987년 블루스 돌풍을 일으켰던 <신촌블루스>와 인연을 맺으며 자신의 보컬 능력을 재확인 시켰다.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한국 록그룹 페스티발'에서 박인수는 무려 7분40초의 롱 버전으로 명곡 '봄비'를 열창해 "역시 박인수"라는 탄성을 불러일으켰던 것.
가슴에 비수를 꽂듯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박인수는 무책임한 방랑벽으로 자신의 음악재질을 탕진했던 한국대중음악계의 아웃사이더 이다. 하지만 그의 대표곡 '봄비'는 장사익, 록밴드 <키브라더스>, 김추자, 인순이, 체리보이, 홍서범 등 남녀 가수 구분 없이 시대초월적인 리메이크작업이 이루어졌다. 나미가 부른 '봄비'도 있다. 솔로 데뷔 이전 본명 김명옥으로 극장 쇼 무대를 주름잡았던 나미는 1976년 여성 5인조 보컬그룹 <해피돌스>의 메인 보컬로 캐나다로 진출해 한 장의 앨범을 발표했었다. 수록곡들은 모두 팝송인데 단 한곡이 우리말로 노래한 '봄비'였다.

박인수씨의 예전과 현재 모습
4월 26일 방송된 KBS 1TV 다큐 미니시리즈 '인간극장' 봄비 4편에서는 가수 박인수(66)가 이혼한 아내 곽 씨와 30년 만에 상봉해 미국 뉴욕에 함께 머무르는 모습이 그려졌다.
박인수 전 아내 곽 씨는 "지금 미국 교민들은 전부 다 박인수 씨 팬이다. 내 팬은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이에 박인수는 "왜 없냐. 내가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뿐만 아니라 박인수는 제작진에게 "우리 지금 연애하는데 방해하지 말아달라"며 재치있는 농담을 건네는 여유를 보였다. 이에 곽 씨는 "웃으니까 보기 좋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인다"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박인수 전 아내 곽 씨는 "진서(박인수 아들) 아빠와 죽을 때까지 항상 같이 하겠다. 이제 내가 보살펴야 한다. 때로는 아이같고 때로는 어른같고 때로는 우리 진서 아빠같다. 내 손을 잡아줄 때에는 방금 만난 애인같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아이같다"고 털어놨다.
한편 박인수는 2002년 췌장암 인슐린 종양 제거수술을 받았다. 이어 저혈당 쇼크로 인한 뇌손상을 극복하지 못한 채 11년째 단기기억상실증으로 투병 중이다. 현재 박인수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경기도 한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사진=KBS 1TV '인간극장' 캡처)
<신중현의 자서전 "록의 代父 신중현" 가운데의 내용입니다.>
1967년 어느날 낮 연습을 하던 중, 훤칠한 키의 박인수가 자기를 한번 테스트해 달려며 찾아왔다.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니 "소울(Soul)음악을 부르는 사람"이라는 답이 금방 돌아오는데, 자신감이 느껴졌다.
테스트해보았다.
템프테이션스의 "My girl"과 오티스레딩의 "Duck of the Bay" 같은 곡은 한번 불렀다 하면 그야말로 흑인이 울고 갈 정도였다.
거기에다 플레터스, 샘쿡, 레이찰스 등 흑인 가수의 노래라면 못하는게 없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대에 세웠다.
그런데 그 클럽은 원래가 백인클럽이어서 흑인들은 문간에 기대어 음악을 훔쳐 들을 수 밖에 없는 곳이었는데도 흑인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박인수의 모션 하나하나에 박수를 치고 난리들이었다.
나는 박인수를 연세대 앞 내 사무실에서 봄비만 가지고 1주일을 연습시켰다.
후렴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뽑아 올리는 절창에 공연장은 항상 떠나갔다.
그게 국내 최초의 소울 무대였던 것이다.
아마 어릴 때 기지촌에서 자라 그곳 무대에서 봐둔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봄비" 하면 박인수이다.
이렇게 신중현은 박인수를 회상합니다.
한국 전쟁 때 고아가 되어 미국으로 입양되고 나서 귀국했으나 어디에도 정을 붙일 곳이 없었던 그는 이후 두 번의 결혼실패….
(나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여자들을 실제로 보고서 많이 놀랐다.)
그렇게 그는 망가지고 있었다.
지금 소식이 끊긴 상태이지만 박인수 그는 천성적으로 슬픈 영혼을 가진 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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