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사~3km/2h05m~천마산~3.6km/1h50m~마치고개~2.3km/1h02m
~백봉~1.5km/45m~4거리 갈림길~1.9km/42m~평내 신명APT 앞 정류소
약 12.3km/6h24m 소요
2013.04.04.목
09:00 석사동 자택 출발 |
09:17 상봉행 전철 탑승 |
10:10 평내*호평역 하차 |
10:24 165번 시내버스 타고 수진사 종점 하차 |
12:29 천마산 도착 |
13:37 멸도봉과 돌핀샘을 탐방하고 식사 후 천마산 정상 츨발 |
15:27 마치고개 도착 |
16:29 백봉산 도착 |
17:14 남양주시청 * 백봉초교 * 백봉산 * 월문리 사거리 갈림길 도착 |
17:56 평내의 신명 * 대주아파트 앞에서 165번 시내버스 타고 평내 * 호평역으로 출발 |
18:10 평내 * 호평역 도착 |
18:28 남춘천역 행 전철 탑승 |
19:10 남춘천역 도착 |
19:30 자택 도착 |
천마산 * 백봉 등산지도
아래 1번 지도 : 1번 개찰구로 나와 왼쪽으로 10m 가면 철교 아래에 정류소가 있는데~ 거기서 165번 탑승. 10분 간격
아래 2번 지도 : 수진사 앞에서 165번 버스는 회차합니다. 하차하여 수진사들렸다 천마산으로 갑니다
아래 3번 지도 : 평내 신명*대주*금호아파트 앞 정류소에서 165번 시내버스 탑승하여 평내호평역으로 이동.
09:08 남춘천역에 도착하여 09:17 에 상봉역으로 출발하는 열차를 탑니다.
남춘천 → 상봉행 전철 시간표
춘천역 ← 남춘천역 → 용산행 itx 청춘시간표
itx 청춘 노선도 및 정류소
10:10 평내*호평역에서 하차하여 좌측으로 10m 나가면 철로 아래의 정류소에서 수진사*천마산 행 165번 시내버스를 타면 됩니다.
10:24 수진사 앞의 165번 종점에 도착합니다.
우측길로 조금 들어서면 좌측으로 수진사 들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수진사에 잠시 들렸다 천마산으로 갈수 있습니다
수진사는 지금 공사중이네요~!!
한쪽에는 소나무~ 다른 쪽에는 은행나무가 있으니 가을이면 멋드러진 길이 될 것입니다
경기도의 수 많은 산중에서 군립공원은 두 곳. 명지산과 천마산~
예전에는 수도권 산행지 하면 천마산~ MT해도 천마산~ 야유회 * 수련회....다 천마산을 찾았었는데
시대가 발전 하다보니 가 볼만한 수도권 산행지가 많이 개발되어 요즘은 다소 소외된 산이 아닌가 싶다.
2011.5.12.목 춘천호반산악회 정기목요산행 때 왔었으니 거의 2년 만에 다시 찾게 되었다.
우측의 산길로 접어 들었지만, 결국에는 만나게 되어 있더군요!
대부분의 산객들이 도로를 따라 걷지만, 그래도 흙길이 좋죠~!!
철조망이 쳐있는 길을 따라 걷는 것 또한 옛 군시절을 연상케 하여 줍니다
『 열일곱살인 '나'는 3년 전에 이 마을에 들어와 점순네 집에서 소작농을 하며 지낸다.
점순이는 나와 동갑내기. 활달하고 부끄럼없는 계집애였다.
어느 날, 울타리를 고치고 있는 내게 감자를 먹으라고 주는 것이다.
"느 집엔 이거 없지"하며 주는 점순이가 미워서 거절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나를 못살게 굴었고 우리 닭을 몰래 꺼내다가 닭싸움을 시켜 거의 빈사상태를 만들어 놓고 동백꽃 사이에 앉아
호드기(나무껍질로 만든 피리)만 불었다.
화가 난 나는 점순네 닭을 지게작대기로 후려쳤고 울음을 터트렸다.
울고 있는 나에게 ....
“닭 죽은 건 염려 마. 나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졌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오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그만 아찔하였다.
“점순아, 점순아, 이년이 바느질을 하다 말구 어딜 갔어?” 하고 어딜 갔다 온듯 싶은 그의 어머니가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순이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꽃 밑을 살금살금 기어서 산 알로 내려간 다음 나는 바위를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위로 치 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속에서 김유정님이 말한 노오란 동백꽃은 무엇을 말하는가?
"노오란 동백꽃"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냄새"
동백꽃이 노란색이 아니고 빨간색이란 것은 이곳 중부지방에 사는 우리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다.
『동백꽃』 소설에서 말하는 노란 동백꽃은 생강나무꽃을 말하는 것이다.
알싸한 맛은 나뭇잎에 혀를 대면 알수 있고, 향긋한 그 꽃내음은 아래사진 아래서 실컷 음미했다.
생강나무 잎을 절에서 밀가루로 부쳐 먹기도 했다는데 생강의 향이 입맛을 돋우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옛날 약초꾼들은 고기를 생강나무 잎에 싸 먹기도 했다고~
남도에서는 동백나무 열매에서 짠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손질했지만 중부 이북지방에서는 귀한 동백기름 대신 생강나무 열매 기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예 생강나무를 산동백 또는 동백나무라 했죠~!!
이제 충분히 이해 하시겠죠? 그럼 댓글에 "알았습니다~" 라고 써야죠~!! ㅎㅎ~
김유정 생가 마당에 『동백꽃』 소설속의 점순이가 닭싸움 시키는 장면~~
생강나무와 산수유 구별하기
둘은 꽃 색깔이 같아서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단 민가 근처에 있으면 산수유, 숲 속에 있으면 생강나무로 보면 된다.
산수유는 중국에서 들여와 심고 있는 약용 수목으로 숲 속에 산수유가 자연상태로 자라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아래 왼쪽은 생강나무고 그 우측에 있는 것이 산수유이니 자세히 보면 구별하기가 쉽다.
이것도 머릿속에 않들어 간다면 산에 있는 것은 무조건 생강나무라고 우기면 될것입니다. 큭~~
아아~~!! 이런꽂도 있었나요? 워낙 관찰력이 없어서.......
서울특별시 학생교육원인 천마의 집을 지나 갑니다
남양주에 "사릉길" 이란 것이 있었네요~!!
임꺽정 바위~~
자리는 좋은 전망처 인데~ 좋은 전망을 조망하기엔 연무가 너무 짙습니다
멀리 운악산과 그 앞의 천마지맥 마루금이 이곳까지 이어 집니다
오늘 가야할 마치고개 능선 옆으로 스타힐리조트가 보이고~ 저 멀리엔 오늘의 목적지인 백봉이 가물거립니다.
"휴~~ 저길 갈수 있을까?" "왜이리 가마득하게 보이지~?"
늘상 당직을 끝내고 산엘 다니지만, 어젠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몸이 가벼우면 가차이 보이고~ 무거우면 멀리 보이는게 사람의 마음인가 봅니다.
슬로프를 지나서 있는 마치고개까지 가서 몸 상태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겠습니다
멀리 남양주 호평 동양파라곤 아파트 단지가 오늘의 출발점이었습니다
12:49 천마산 정상에 도착하였습니다.
흔들거리던 사각기둥의 정상석이 새롭게 바뀌었네요~
고려 말 이곳으로 사냥을 온 이성계가 산이 높고 험준함에 감탄해 하면서 혼잣말로~
“인간이 가는 곳마다 청산은 수 없이 있지만 이 산은 매우 높아 푸른 하늘에 홀(笏 : 벼슬아치가 조견할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던 패)이 꽂힌 것 같아 손이 석자만 더 길었으면 가히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手長三尺可摩天·수장삼척가마천)”
라고 한데서 ‘하늘을 만질 수 있는 산’ 이란 의미의 천마산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2011.5.12에 왔을 때 사진. 그때나 지금이나~ 비가 오나 눈이 내리거나~ 계절에 관계 없이 항상 태극기가 펄럭입니다
지척에 있는 멸도봉~
돌핀샘을 찾으러 갑니다. 2년전에 왔다가 못 찾고 갔는데 오늘은 꼭 보고 싶습니다~
올라오시는 산객께 돌핀샘이 어디냐도 물으니~ 요 밑에 있는데 미끄러워 억지로 올라왔으니 내려갈 생각을 말라고 하시는 군요!!
그래서 쉽게 포기합니다.
얼마 있다가 천마지맥 뛸 때 다시 이곳을 지날 것입니다. 그때는 물맛을 몰수가 있겠죠!!
손사레까지 보내주신 산객님 고맙습니다~
그래서 펌~ 했습니다. 돌핀샘에서 약물바위샘으로 바뀌었습니다.
돌핀샘이란 말에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샘을 이루고 있는 바위가 돌핀과 비슷하다고~ 돌 틈에서 나오는 샘이라고~ 돌핀산악회에서 발견하여......
어쨋거나 그런 명칭을 정확히 정리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너무 과하게 표현되거나 전혀 엉뚱한 말을 지어 "그랬다고 한다' 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붙여 버린것을 많이 봅니다.
사실이 구전되면서 와전되기도 했었겠구요!!
그런것을 보며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 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민족이 왜 글을 몰랐을까?
차라리 이제라도 진정한 역사를 펑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1) 1920년대 문맹율
당시 동아일보는 2천만 인구 중의 1%만이 교육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문맹율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자료; 일제시대 문맹율 추이, 노영택 1994년)
동아일보는 1922년 1월 5일자 사설에서 "신문 한 장은 고사하고 일상 의사소통에 필요한 서신 한 장을 능수하는 자가 역시 백인에 1인이면 다행이라 하겠도다" 라며 참담한 조선민중의 문맹상태를 언급하고 있었다.
당시 1920년대 동아일보의 사설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는 문맹율을 정리하면 대체로 1921년 99%, 1922년 99%, 1925년 절대다수, 1927년 대다수, 1928년 90%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가히 1920년대는 조선 민중 절대다수가 문맹의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 앞에서 당시 조선, 동아일보 등의 신문들은 문맹의 타파야말로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는 첫걸음임을 주장하며 문자보급운동에 적극 나섰다. 20년대의 브나로드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문맹타파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2) 1930년대의 문맹율
당시 조선일보 1934년 6월 10일자 사설은 이렇게 말한다.
"지식 없이는 산업이나 건강이나 도덕이나 지지 발달될 수가 없다. 문맹 앞에는 항상 밑몰을 함정이 횡재했으니 그들의 가는 곳에는 위험과 저주가 따라다닐 뿐이다.
.... 전 인구의 1천분의 20밖에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학령아동의 3할 밖에 취학할 수 없는 현하 조선상태에 있어서 간이한 문자의 보급은 민족의 갖일 최대의 긴급사라 하겠다. "
조선일보가 1929년 시행한 문자보급운동의 성과로 한글로 자기 주소 성명을 쓸 수 있게 된 자가 2849명으로 약 3000명이 되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는 2000만 조선민중의 숫자와 비교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1930년대에는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조사한 문맹율의 통계가 있다.
바로 1930년의 <조선국세조사보고>에 나오는 공식화된 통계인 것이다. 일제 시대에 유일하게 공식 조사결과로 남아 있는 문맹율에 대한 통계이다.
이에 의하면 전 인구의 약 77.7%가 문맹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20년대에 비하면 다소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역시 약 80%에 달하는 절대 다수의 조선민중이 일자무식의 상태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경우에는 10세 이상자 약 3%만이 문맹으로 드러나 그 차이가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기 청소년문제에 대한 연구, 김현철 2000년)
문맹율 80~90%라는 것은 민족의 역량이 사실상 0의 상태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1984년 콩고의 문맹율 40.4%, 1983년 적도 기니의 38.0%보다 거의 두 배 이상의 문맹율인 것이다.
1970~80년대 극도의 빈곤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아프리카에서도 이 정도의 문맹율은 찾기 쉽지 않다..
3) 해방후의 문맹율
이러한 극심한 문맹율은 해방 후까지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1940년대에는 태평양전쟁기간을 거치면서 국민교육이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고 1950년대에는 6.25라는 민족사상 최대의 참화를 겪었다.
거의 대부분 국민이 교육의 혜택과는 거리가 먼생활을 했고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버거웠으며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생활이 매일매일 이어졌다.
60년대 말까지도 전주예수병원에서 기생충 1063마리를 뱃속에 안고 죽은 아이가 나올 정도로 비참하고 가난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이런 비참한 상황이니 1950년 6.25가 발발하자 1917년 11월 생으로 당시 겨우 33세 정도였던 정일권이 대한민국의 육해공군 총 사령관에 임명되는 안쓰런 현상마저 벌어졌던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중소기업하나 맡기기도 버거울 젊은 사람에게 대한민국의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었던 어이없는 현실이 당시 조국의 처량한 모습이었다.
대한민국의 문맹율이 확실히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국민교육헌장 등을 반포한 60년대 이후라고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와 6.25의 전화로 인한 폐허, 그리고 80% 정도의 국민이 문맹이었던 이러한 만난을 극복하고 오늘의 성장을 이룬 것은 한 마디로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6.25전사자 시신발굴팀이 이곳에 와 있습니다. 2년 전부터 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별 장비도 없이 그냥 왔다갔다 하는 데 임무 때문인지? 등산 때문인지? 헷갈립니다
13:37 간단하게 준비한 식사를 마치고 마치고개로 향합니다
멋드러진 소나무도 만나 봅니다
산에 있으니까 생강나무 입니다~ 산수유라고 우기는 분들이 꼭 있는데? 윗 설명을 다시 보시길....
4거리 갈림길 입니다
슬로프의 녹지않은 눈~ 갈색 낙엽~ 생강나무 꽃..... 우리나라의 변화무쌍한 4계절을 잘 나타냅니다
스타힐 리조트의 리프트~~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팔위에 앉네요~!!
지나온 천마산~~
갈까? 말까? 고민되는 백봉~~ 날씨가 이래서 그런가요? 거리는 몇 km 않되는데~ 오늘따라 매우 멀리 보입니다
경기도 남양주시의 미금읍 평내리에 위치한 고마치개
궁평에서 화도읍 묵현리 먹깃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여지도서』와 『증보문헌비고』에 '마치현(磨峙峴)' 그리고 『대동지지』, 『조선지지자료』에는 '마치(馬峙)'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사람들이 '마치'와 '말티'라 함께 쓰고 있는데, 여기서 '말'과 '마'는 모두 '산' 혹은 '산정'이라는 의미의 '마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말티고개' 혹은 '마치고개'는 '산에 있는 고개' 혹은 '산정에 있는 고개' 란 의미가 된다.
옛날엔 도둑이 많아 한낮에도 무릴 지어 넘는 험준한 고개였으나 80년대에 터널이 생기면서부터 이 고개는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다.
15:27 마치고개에 있는 사능길, 다산길, 마치고개길......
길 건너에 있는 이정표~~
그 멀리 보이던 산이 2.3km~ 무지 멀게 보이던데...... 어쩔수 없습니다. 계획했던 대로~~
이정표~!!
가평군이 이것 만큼은 최고란 생각이 듭니다. 남양주시는 재정도 넉넉할 텐데 이젠 한번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클럽 비젼힐스 cc~~
생소나무 문도 지나가고~~
왼쪽 것이 백봉 정상으로 보여 집니다.
바로 아래 봉의 시설물도 그렇고 이젠 정리 좀 해야하지 않을까요?
16:29 태극기 만큼은 천마산에서나 백봉에서나 힘차게 펄럭입니다
누각에서 잠시 쉼을 하고 갈길도 살펴 봅니다
평내호평엔 아침부터 지금까지 연무가 계속 되어 조망을 망쳐버립니다
내려가는 길은 완존 사발이길 처럼 아주 좋습니다
17:14 왼 태극기를 이렇게나 많이......
원래 계획한 남양주 시청 방향은 여기서 직진인데~ 잘못알고 우측으로 빠졌습니다.
시청 내려가기 전에 약수터가 있어~ 산객에게 약수터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으니 우측으로 가야 한다고......
내려가니까 있긴 있더군요!! 내가 가고자 했던 약수터는 그 곳이 아닌데~
지도를 보고 등로를 정할 때에 약수터 하나만 확인을 한 저의 실수지요!! ㅋㅋ~~
의도치 않았던 약수터가 있긴 있습니다. ㅋ~
약수물이 아주 맛있고 시원하여 두사발이나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백봉초등학교를 지나고 있습니다
17:56 평내 신명*대주 아파트 앞의 버스 정류소에서 165번 버스를 타고 평내호평역으로 갑니다.
역 화장실에서 수건을 적셔 땀을 딱아내고 런닝을 벗어 땀냄새를 조금이러도 더 없애려 합니다.
그리고 18:28에 도착하는 열차를 타고 춘천으로 갑니다.
경춘선 전철이 생기면서 접근성이 편해 주변의 산들을 가끔씩 다니게 됩니다.
다음엔 오늘 능선을 둘러본 천마지맥을 계획해 봅니다.
'서울*경기권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수골~백운봉~함왕봉~장군봉~용문산 가섭봉~용문사 (0) | 2013.05.01 |
---|---|
뽀루봉식당~뽀루봉~화야산~고동산~야밀종점 (0) | 2013.04.23 |
운길산역~운길산~수종사~한강민물장어 (0) | 2013.03.23 |
안보리~월두봉(달머리봉)~주을고개~물안산~보납산 (0) | 2013.02.26 |
감악산 (0) | 2013.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