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권역

수원화성-화성행궁

온리하프 2019. 1. 21. 12:41
728x90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트랭글gps



수원화성__20190120_1046.gpx




팔달문-서남각루-서장대-화서문-장안문-방화수류정-창룡문-봉돈



팔달문(보물 제402호)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입장료 1,000원/인











홍난파(경기도 화성시 남양, 1898~1941)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가곡 ‘봉선화’와 남북한이 함께 부르는 ‘고향의 봄’을 작곡한 이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어 72일간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결국 건강악화 끝에 그는 공개적으로 전향서를 자필로 쓰고 출옥하게 된다.

이후 홍난파는 1938년부터 1941년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친일행적을 남겼다.


수양동우회 사건에서 풀려나오자마자~

1937년 9월 15일 조선총독부와 조선문예회가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며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시국가요 발표회'를 개최하자,

최남선 작사의 <정의의 개가>에 곡을 붙여 친일가요를 발표한다.


홍난파는 경성방송 교향악단을 이끌면서 1938년 7월 9일 '동요와 합창'이라는 방송에서 <애국행진곡>을 지휘했다.

<애국행진곡>은 일본인이 작곡한 일본 전통의 전형적인 2박자풍의 곡으로 일본의 제2국가로 불리는 노래다. 

그 내용은 '천황폐하의 신민으로 일본정신을 발양하고 약진하자'는 내용으로,

그가 작곡했던 음악 대부분은 '애국' 즉, 일본 천황폐하와 일본을 찬양하며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는 군국주의 음악이었다.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 등 수 십 여곡을 남겼고,

이 중 봉선화와 사공의 노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곡은 이은상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곡이다.





서남각루(西南角樓)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서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팔달산 남쪽 능선에 설치한 용도(甬道)의 남쪽 끝에 세워졌다.
1796년(정조 20) 4월 16일 공사를 시작하여 7월 20일 완성하였다.
편액에는 화양루(華陽樓)라고 쓰여져 있는데 ‘화’자는 화성을 뜻하고 ‘양’자는 산의 남쪽을 뜻하는 것이다.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이 문은 용도(甬道: 담을 양쪽으로 쌓아 만든 길)의 출입문이기도 하다.
5개의 암문 중에서 유일하게 포사(舖舍)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796년(정조 20) 8월 6일 홍예가 완성되었다.

포사(舖舍)는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위급신호를 전달하였다.





3.1독립운동기념탑과 대한독립기념비







수원화성은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들과 채제공,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건설에 참여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유산은 특성에 따라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되는데~

문화유산은 역사적·과학적·예술적 관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니는 유적이나 건축물,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장소를 뜻한다.

자연유산은 생물학적 군락이나 지질학적 생성물,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 서식지 등이며

복합유산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특징을 동시에 충족하는 유산을 말한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 훼손 방지와 영구 보존을 위해 유네스코의 기술 자문을 받게 된다.

유산을 보존하는 데 있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가에는 유산 훼손을 막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지원을 해준다.


우리나라에는 총 11개의 세계문화유산과 1개의 세계자연유산이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수원 화성, 경주 역사 유적지구, 고창 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조선 왕릉,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한국의 역사 마을로 등재됐고,

2014년 6월에는 남한산성이 2015년 7월에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 자연유산으로는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이 있다.





효원의 종각.

종을 3번 치는데 1천원이다.


 제1타종은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효도를 다짐하고

제2타종은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바라고

제3타종은 자신의 발전과 소원 성취를 기원한다.





서장대, 화성장대(西將臺, 華城將臺)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정조 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다.





서노대(西弩臺)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팔각형 평면이며 기와 벽돌로 쌓았다





화서문(華西門)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보물 제1710호)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효과적인 재료 활용을 보여주는 서북공심돈은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장안문(長安門)





북서적대(北西敵臺)에 있는  홍이포(紅夷砲)

길이 215cm, 구경 10cm, 총중량 1800kg이고, 

명나라말부터 청나라 때까지 사용된 유럽식 화포로

포구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여 발사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며

사정거리가 700m에 달하는 위력적인 화기로써 성곽 또는 성루 등에 비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사용하였다.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동북각루, 방화수류정(東北角樓, 訪華隨柳亭)과 북수문, 화홍문(北水門, 華虹門)





북수문, 화홍문(北水門, 華虹門)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 위에는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가 있다.
북수문은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 19) 1월 13일에 완성되었다.
별칭은 화홍문으로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한다.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연포갈비

연포갈비의 12,000원 짜리 갈비탕은~

 춘천에 있는 "갈비명가 춘천왕갈비"의 13,000원 짜리 왕갈비탕에 비하면 이나 맛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왕갈비탕의 반 값인 6,500원 만 받아도 될 듯 싶다.


그런데도 식당엔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니~

수원왕갈비의 유명세가 이정도 였나? 의아했다.


춘천에 와서 갈비탕이 생각난다 면~

퇴계사거리에서 김유정역 방면으로 300m 정도 못가서 우측에 있다.

춘천시 김유정로 1875.    033-264-9511





동북각루, 방화수류정(東北角樓, 訪華隨柳亭. 보물 제1709호)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북동포루(北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인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4년(정조 18) 9월 23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火砲)를 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동장대, 연무대(東將臺, 鍊武臺)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머물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동장대는 1795년(정조 19)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 완공되었다.
무예를 수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 하였다.
이곳의 지형은 높지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펴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창룡대로

화성행궁광장 앞의 종로사거리에서 용인시 수지구 광교상현나들목까지 잇는 도로로

거리가 5km가 않되며 수원화성 내부를 가로지른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공심돈은 성곽 주위와 비상시에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와 같은 것으로 화성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화성에는 서북공심돈·남공심돈·동북공심돈이 있다.
동북공심돈은 1796년(정조 20) 7월 19일 완성되었다.
형태는 커다란 둥근 원의 모습으로 화성 성곽내에서 가장 특징이 있는 건물의 하나이다.
동북공심돈 내부는 소라처럼 생긴 나선형의 벽돌 계단을 통해서 꼭대기에 오르게 되어 있어 일명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





동일치(東一雉)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동일치는 동일포루에서 봉돈 쪽으로 125보(148m)의 거리에 있다.










봉돈(烽墩)

1796년 6월 17일 완성된 수원 화성 봉돈(烽墩)은

일반적인 봉수대(烽燧臺)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에 별도의 시설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든 수원화성의 대표시설이다. 

평상시 남쪽 첫 번째 화두(火竇: 횃불구멍)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 봉화로 신호를 보낸다. 

다른 4개의 횃불구멍은 긴급한 일이 없으면 올리지 않았다.


봉화 신호 체계
봉수(烽燧)는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전하는 군사신호체계이다.
총 다섯 개의 횃불구멍을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남쪽 첫 번째 횃불구멍부터
○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
○ 적이 국경근처에 나타나면 봉수 2개
○ 국경선에 도달하면 봉수 3개
○ 국경선을 침범하면 봉수 4개
○ 적과 아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 봉수 5개를 올렸다





수원제일교회

서울에는 남산에 "N서울타워"라는 이름의 남산타워가 있고, 부산에는 용두산 공원에 "부산타워"가 있다.

그렇다면, 수원은 어떨까?

수원에는 수원타워가 있을 것 같은데, 수원타워 같은 건 없고~

 대신 다른 건물이 이런 "전망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상에 보이는 교회의 첨탑이 "노을빛전망대"다.

전망대는 교인이 아닌 일반 방문객들에게도 무료로 개방된다.

평소에는 잠겨 있기 때문에 "열쇠"를 받아서 올라가야 한다.


저곳에서 보여지는 노을빛 물든 수원화성은 어떤 모습일까?






저 끝이 수원화성 성곽길의 마지막 지점이고 골목을 지나 팔달문 앞을 가로질러 화성행궁으로 걸어 간다.





남수문(南水門)

남수문은 수원천이 화홍문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성곽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이다.
수원천 하류 수량증가에 대비하여 9개의 홍예수문으로 되어 있으며

수문 위에는 성밖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포사가 세워져 있어 비상시에는 군사들이 대기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2년 6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팔달문을 가로지르고~~





노란 겨자색의 기와집 돈까스


          






화성행궁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신풍루(新豊樓)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비장청(婢將廳)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유여택(維與宅)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










화령전(華寧殿. 사적 제115호. =운한각)
화령전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건물로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影殿)이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이다.

화성에서 ‘화’자와『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자를 따서 이름붙인 것이다.

화령전은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면서도 품격있게 만든 조선시대의 대표적 영전이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 내부

현재의 어진은 군복인 융복을 입은 초상화로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다.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





화성행궁광장










수원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을 중심으로 총 9개의 시장이 있는데~

 이 시장들을 통틀어서 "남문시장"이라고 칭한다.

팔달문시장, 수원영동시장, 지동시장, 미나리광시장, 못골종합시장 등...


지동시장은 1970년대부터 형성이 되었는데~

 순대, 정육 식품으로 유명한 곳이다.


옛날식 순데가 있으면 먹으려 했는 데 찾질 못했는 지....

그래서 조그만 교동짬뽕에서 탕수욕에 고량주 한 잔,

용산으로 옯겨 양꼬치에 고량주 두 잔.....

그리고 나서 용산→춘천 ITX에 몸을 실고 여행을 마쳤다.

수원화성성곽길 투어는 역사와 문화, 문명 그리고 수원 시가지의 규모를...

시장과 골목 투어는 옛 것에 대한 동경과 풍요로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수원화성__20190120_1046.gpx
0.0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