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권역/춘천 무명산 찾아보기

배후령 정류장-임도-국립화천 숲속야영장-배후령 정상-비녀산-2군단사령부-춘천국유림관리소 정류장

온리하프 2019. 11. 11. 08:15
728x90

 

 

 

 비  녀  산 

 

배후령 정류장-임도-국립화천 숲속야영장-배후령 정상-비녀산-2군단사령부-춘천국유림관리소 정류장

 

07:45 → 08:07
    춘천우체국(1492) 정류장 → 배후령 정류장(배후령터널 나와 50m 지난 거리에 있음)
08:33
    배후령 정류장에서 산행 시작
09:02
    국립화천 숲속야영장(화천군 간동면 배후령길 1144. 전화 033-441-4466)
09:57
    배후령 정상
10:07
    배후령 옛길 도로 끝
10:08
    비녀산 들머리 도착
10:15
    비녀산 정상
10:54
    칼바위
13:36
    박씨묘(춘천시 신북읍 발산리 2-3)
13:42
    무지골교
14:14     군부대 펜스
14:39     2군단 사령부 앞
14:55     춘천국유림관리소 정류장

 

 

 

 

트랭글 GPS

 

 

 

 

 

 

 

안드로이드 GPS & EARTH

 

?? ???__20191110_0839.gpx
0.06MB

 

 

 

 

08:07    후평동 종점에서 07:30에 출발한 18번 시내버스는 생각 외로 빠르게 배후령정류장에 도착했다.

일요일이라 치더라도~

시내버스 인데 40분도 안 걸리다니...

 

신북읍행복센타 정류장에서 일행 두 분이 합류하기로 했는 데~

그 분들도 그렇게 빠르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나보다.

 시내버스를 놓쳐 승용차로 뒤따라 온다고...

 

 

 

 

 

08:33    25분 정도 기다리니 일행인 보딸님이 자가용을 직접 몰고 왔다.

일행 한 분은 이런저런 이유로...

 

 

 

 

 

건물 전 좌측 임도로 빠져 들고~~

 

 

 

 

 

08:48    산행 시작한 지 15분 쯤 지나니 오봉산 정상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온다.

 

 

 

 

 

잣 알갱이를 까서 먹고 있는 일행들~~

이럴 때 쯤이면 다래, 잣, 밤... 등등이 심심풀이 오징어나 땅콩이 되어 준다.

 

 

 

 

 

이럴 때 흙 길을 걸어보지 언제 걸어보겠나?

 

 

 

 

 

09:02    국립화천숲속야영장

 

 

 

 

 

아주 조용한 곳이다.

 

적을 깨는 것은 간혹 배후령 옛길로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뿜으며 고개를 오르내리는 모터싸이클 뿐이다.

 

 

 

 

 

청춘들~~

그 어떤 행위나 취미를 실행한다는 것에는 때가 있어 보인다.

 

30년 전 쯤~

그때 월세가 2~3만원 할 때인가?

어느날 갑자기 30만원 정도의 장비를 사갖고 캠핑을 가자했다.

와이프와 아이들~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되는 순간이었지...

 

지금,

이들이 부럽다.

 

 

 

 

 

사방이 노랗게 물든 골짜기가 계속 이어진다.

 

 

 

 

 

낙엽송의 단풍이 곱다.

 

 

 

 

 

09:57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에 배후령 정상에 올랏다.

 

여러 지역에서 온 산꾼들이 오봉산을 오르고~

우리는 도로를 따라 춘천 방향으로 내려 선다.

 

 

 

 

 

배후령 정상에서 도로따라 10여 분을 걸어 내려가다 다시 산 길로 들어 선다.

승용차가 서 있는 우측에 들머리가 있다.

 

 

 

 

 

삼한골 주변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그곳을 드나드는 통로는 산이 맞 닿은 협소한 골짜기의 소로 하나 뿐이다.

 

배후령에서 용화산 가기 전 좌측의 수리봉 방향에도 이런 출입금지 안내판이 몇 개 있다.

그 골짜기엔 5년 전까지 북파공작원들의 부대가 있었기에 경계가 삼엄했다.

 

군부대가 있어 오랫동안 민간인 출입이 금지, 천혜 자연이 훼손없이 보존된 곳으로 명성이 높다.

숲체원이 들어서면 의암호 관광시설과 함께 체류형 관광객을 불러들이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10:15    비녀산 정상.

 

뜻 밖이다.

등로가 있을까?라고 염려했는 데~

 비녀산이란 산명까지 있다니...

 

 

 

 

 

등정 기념으로 우리 와라바라산악회 시그널도 하나 달아 놓는다

 

 

 

 

 

 동일한 글씨체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시그널이 세 개나 설치되어 있다.

누가 어떤 사유로 이렇게 까지 해 놓았을까???

 

 

 

 

 

잠시 간식을 나누고~~

 

 

 

 

 

삼한골을 에둘러 쌓은 산능 넘어 용화산이 빼꼼히 보인다.

 

 

 

 

 

수리봉도 가까이 보여지고~~

 

수리봉에서 아래의 국립춘천숲체험원의 건물동으로 내려서는 산줄기엔 등로가 없다.

그러나 얼마전에 그 험한 곳을 내려 왔다.

그리고 지금 이길을 걷겠노라고 다짐한 계기가 되었고...

 

 

 

 

 

배후령 길을 수 없이 오르내리며 오봉산, 경운산, 마적산을 봐 왔다.

그 높은 산능 아래의 이 낮은 능선은~

 어딜가나 그저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는 흔한 산으로 밖에 여기질 안았다.

 

 

 

 

 

그러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데 필요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안았다.

 

봉우리를 6~7개 넘어야 한다는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이렇게 암릉과 칼바위가 있고 70도 가까이 되는 직능도 있다.

 

능선 넘는 재미가 오손도손 밀집된 산이다.

 

 

 

 

 

칼바위와 급경사지를 안전하게 내려섯다.

 

설악산 상봉에서 화암계곡으로 무지막지하게 알바한 산아님이야 누워 떡먹기였겠지만~

이런 길이 정말 싫다는 보딸님은 오늘도 어김없이 악마의 속삭임에 빠져 또 이렇게 그런 길을 걷고 있다.

3년 전인가?

긴 여정의 도솔지맥도 그런 일부분을 차지했고...

 

고생했습니다~~^*^

다음 산행지는 임도가 있는 나즈막한 곳으로 잡을 게요~!!!  ㅋㅋ~

 

 

 

 

 

13:36    문의공 박항 묘역

 

 

 

 

 

춘천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의 29세손이자

신라의 제54대 왕인 경명왕의 일곱 번째 왕자 강남대군의 11세손으로서,
춘천 박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박항은 고려 고종 14년(1227)에 춘성군 장본리(지금의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

몽고족이 원나라를 세우고 고려를 침입하기 시작한 것이 고종 18년 때다.
몽고족은 고려를 무려 일곱 차례나 침입하였는데, 지금의 춘천시인 춘주성을 초토화시킨 것은 고종 40년 때였다.

원나라 황제는 `내가 태양이 뜨는 곳에서 태양이 지는 곳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민을 다 편안하게 하는데
너희들이 나의 명령을 거역하기 때문에 야굴을 명하여 정벌토록 한다' 운운하는 글로
고려 조정을 협박한 후 야굴군을 보내 춘주성을 침략했다.

백성들은 봉의산성으로 피신했지만 얼마 못 가 성이 함락되고
마을이 불타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몽고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당시 박항은 서울 개경(지금의 개성)에 있다가 부모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황급히 춘주성으로 돌아온 그는 성 아래 쌓인 시체 더미에서 부모의 시신을 찾아 헤맸다.

부모를 찾을 수가 없자 부모와 비슷한 모습의 시체가 발견되면 모조리 수습하여 매장했는데 그 수가 300여명에 이르렀다.
한편 뒷날 그의 모친이 몽고군의 포로가 되어 원나라의 수도 연경으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박항은 연경에 세 차례나 사신으로 왕래하며 모친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박항의 강직한 품성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충렬왕 때 박항은 중추원 승선으로서 벼슬 자리에 알맞은 관리를 선발하는 행정을 담당했다.
그 이전에는 궁궐의 정방(政房)에서 그 일을 맡았던 자들이 가끔 외출하여 자신들의 집에서 자고 오고는 했다.

그래서 그들의 집 앞이 항상 벼슬 자리를 청탁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박항은 이를 옳지 않다고 여겼고, 처음으로 정방에서 인사 행정을 모두 마친 후에 궁궐을 나왔다.
그 이후 뒷사람들이 박항을 본보기로 삼게 되었고 마침내 인사 청탁과 관련한 폐단이 없어졌다.

그것 뿐 아니다. 박항은 참문학사(參文學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당시 왕이 과거 급제자들을 불러 자신이 보는 앞에서 다시 시험을 치르게 하는 행사인 전시(殿試)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왕의 총애를 받던 승려 조영(祖英)이 자신의 조카를 포함한 친척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급제 연도의 제한 없이 시험에 모두 응시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려 했다.

대신 이지저와 곽예 등이 전시를 반대했고 박항도 옛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조영이 왕을 부추겨 결국 전시가 이루어졌다.

조영은 풀로 봉해져 있던 응시자들의 답안지를 먼저 뜯어보고 그중 열다섯 명을 급제자로 뽑아 그 명단을 왕에게 올렸다.
그런데 수석을 한 자가 조영의 조카고 나머지 급제자도 전부 그의 친척들이었다.
왕은 박항에게 석차를 매기는 일을 조영과 함께 하도록 명했다.

조영은 일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까봐 박항에게 왕이 이미 급제자를 정했으니 석차를 매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속셈을 알아차린 박항은 왕에게 다른 대신들과 함께 석차를 결정하겠다고 보고했고,
결국 수석을 비롯하여 급제자들이 대거 바뀌었다.

또한 박항은 대몽외교에 앞장서 몽고의 침략이 빈발하던 고려의 혼란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충렬왕 4년(1278)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왕과 공주를 수행하고 원나라 조정에 들어갔다.

이듬해 봄에 귀국한 후 왕을 무사히 호종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다시 필도치(必 赤)가 되었으며 그해에 또 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다.

조국에 대한 충심과 약소국 사신으로서 원나라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비애는 그의 시 `북경노상'에 잘 나타나 있다.

“한결 같은 허허벌판 끝도 없는데 사시사철 광풍은 불어 예누나/
잔산에 해 나는 날도 비가 내리니 옛 성채에 황사가 날아 홀연 무지개 서누나/
고국 땅을 떠나 사천리길 머나먼데 이정표는 하나 둘씩 끝도 없누나/
중국이 아름다워 우리 땅과 비길바 아니지만 밤마다 꿈마다 고국산천으로 돌아가누나.//”

박항은 왕에게 직언을 망설이지 않는 충신이면서 백성에게는 늘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어진 목민관이고자 했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쟁에 필요한 군량이며, 무기와 군자금 등을 모두 고려에서 징발하려고 했을 때였다.

원나라 세조가 감독관으로 보낸 흔도(熊都)와 홍다구(洪茶丘) 등이 우리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려도
왕과 조정 대신들은 원나라의 명령을 좇기만 할 뿐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못했다.

이에 백성들의 고충을 보다 못한 박항이 충렬왕에게 이 문제를 바로 잡아달라고 진언하여
원나라 세조에게 국서를 보내게 했고 이후 원나라 감독관들은 더 이상 횡포를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며 백성을 위해 나라 안팎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운 박항은
충렬왕 7년(1281)에 5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문장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전해져 오는 문집은 없고,
단지 시 3수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충렬왕은 박항의 치적과 노고에 답하고자 그를 `춘성부원군'에 봉했다.

그리고 그가 작고한 지 100여년이 지난 후인 공민왕 18년(1369)에 정몽주가
“고(故) 찬성사 박항은 충효문학이 특출하고 국난에 임하여 위대한 치적과 공을 세운 명현이신데
아직 그 충절에 대한 나라의 은택을 받지 못함은 심히 유감되고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왕에게 상소하여
마침내 조정에서 박항에게 `문의공(文懿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박항의 큰아들 박원굉은 금부(金符)를 하사받고 부만호(副萬戶)까지 지냈다.
제 아버지처럼 평장사를 역임했으므로 평장사공계라 불린다.

박항의 둘째 아들 박원비는 예조판사를 지냈으므로 판사공계라 한다.
평장사공계는 13개 계파로, 판사공계는 14개 계파로 나뉘어 현재 춘천 박씨는 모두 27계파로 자손이 크게 번창했다.

춘천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박항의 묘역이 위치한 자리가
자손들이 대대로 부유하고 번창할 백대천손지지(百代千孫之地)라 한다.

 

 

 

 

 

13:42    무지골교를 지나가고~~

 

 

 

 

 

내려선 곳을 뒤돌아 보고~~

 

 

 

 

 

이제는 아침못 옆의 낮은 산을 걷기만 하면 된다.

 

 

 

 

 

도로에서 이곳으로 오르고~~

 

산아님 괜찮아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힘들면 힘들다 하고,

쉬고 싶으면 쉬자고 하고,

알바했으면 알바했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존심으로 강한 남자인척하는데?

 

벌에 쏘인 후에 "난 벌침에 강해서 괜찮아"해놓고~

5분도 채 지나지 안아 거품물고 쓰러지는건 뭐에요?

 

산아님 땜시 내가 쇼크먹어 쓰러지겠어요~~

 

 

 

 

 

도로를 하나 건너 뛰고~~

 

 

 

 

 

거듭 나타나는 임도를 가로질러 오르고~

 

 

 

 

 

희미한 등로에 나뭇가지가 훼방을 놓는다.

 

 

 

 

 

2군단사령부 펜스가 보이고~

 

우리는 좌측으로 진행했지만,

산행 후 지도를 살펴보니 우측으로 갔어야 했지 안았나 싶다.

 

 

 

 

 

펜스에 갇힌 동물의 사체~~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얼마나 발버둥 쳤을까? ㅜㅜ~~

 

 

 

 

 

서먹함을 뒤로한채 계속 펜스를 따라 이동한다

 

 

 

 

 

농로에 닿고~

 

 

 

 

 

들판의 노란 물결이 가을임을 알려 준다.

 

멀리 마적산도 보이고...

 

 

 

 

 

 

14:39    2군단 사령부 앞~~

 

 

 

 

 

 

14:55    조금만 더 걸어가면 우측으로 오늘의 산행 종착점인 국유림관리소 정류장이 나온다.

 

높은 산이고, 유명한 산이고, 아름다운 단풍이 물든 산이고...

그러한 산들 만이 산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해주는 산행이었다.

 

좌측으로는 삼한골이요. 우측으로는 무지골을 사이에 둔 산능이다.

삼한골은 국립숲체원이 들어선다고 난리고, 배후령은 터널이 생겨 옛길은 추억속에만 남아 있다.

그 양 골짜기 중앙으로 나즈막한 산능이 샘밭 넓은 벌판으 흘러 소양강으로 잠든다.

그 능선은 여러 봉우리들을 내려서야 하며. 나름 암봉 넘는 스릴도 솔솔한 곳이다.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지역의 산들도 처음인 곳이 부지기수다.

나는 얼마 전부터 이렇게 나와바리 산들을 찾아 다닌다.

 

그 이유인즉슨~

남쪽 지방으로 대여섯시간 버스를 타고 산행지에 접근하다보면 주민들이 물어본다.

"어지서 왔능교? 어디서 왔지에?"

곧 강원도 춘천에서 왔다고 화답한다.

그럼 당연히~

"그 좋은 곳에서 뭐하러 여기까지 왔냐"고 되묻는다.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사냐? 빵도 먹어야지~" 속으로 답한다.

 

한~두번 들었을땐 그냥 걷치레로 하는 말이겠지? 했는 데~

그 이후 점차 나는 이렇게 주변의 산을 찾아 다닌다.

 

산아님, 보딸님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 ???__20191110_0839.gpx
0.0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