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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천수변산책로-안마산-퇴계농공단지 뒷 산

온리하프 2020. 4. 25.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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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천수변산책로~안마산~퇴계농공단지 뒷 산 

 

 

아침~점심 챙겨 먹고 오후 2시까지 쇼파에 앉아 리모콘을 눌러 댄다.

갈 곳은 많은 데, 발길이 쉽사리 떨러지질 안는 다.

요즘 일이 조금씩 늘어나고, 장거리 운전을 해야하는 경우가 잦아 졌다.

속초, 인천 ,김포, 서울, 양구, 화천, 홍천...

 

그렇게 장거리 운전을 하면 우측 무릅에 이상 증상이 생긴다.

통증은 없지만, 느낌이 아주 거북스럽다.

예전 아랫지방으로 산행을 갈 때도 장거리 운전했을 경우에 그랬다.

걷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조심스럽다.

 

존재의 이유 중 가장 가치있는 것 중의 하나가 걷는 것 아니겠는가?

다리를 제일 중한시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밍기적거리다가 어느 정도 컨디션이 회복되어 오후 2시 조금 넘어 길을 나섯다.

 

코스는 원래 금병산~안마산 이어 걷기를 해야 하는 것으로 목표를 지난 주에 세워놨는 데~

오늘은 그냥 가볍게 걷는 게 좋겠다.

다음 주 월요일도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일이 예정되어 있다.

 

안마산에서 퇴계농공단지 뒷 숲이 궁금했으니, 오늘의 주 목적지는 그곳 탐방으로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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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주변의 공지천수변산책로로 나왔다.

동내 산엘 카메라까지 챙겨 나오긴 거시기해서 그냥 핸폰으로 찍으니 화질이 뒤떨어 진다.

 

 

 

 

 

대룡산 방향으로~~

 

 

 

 

 

신호등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횡단보도를 건너 저기 보이는 안마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자주 걷는 코스 중 한 곳이 저쪽 동내면 방향으로 걷는 코스다.

오늘은 패스~~

 

 

 

 

 

안마산 언저리로 올라 섯다

 

 

 

 

 

貞 夫 人

 조선 시대, 정이품과 종이품의 종친() 및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이다.

 

1396년(태조 5) 5월 문무관의 정처에 대한 봉작제가 정해질 때 정·종 2품관 처의 작호를 현부인이라고 했다가,

1417년(태종 17) 9월 명부봉작식을 개정하면서 정부인으로 바꾸어 그대로 〈경국대전〉에 실었다.

세종 때는 성이 같은 2품관의 처를 구분하기 위해 '모관모처모씨위모부인'이라고 불렀고,

서얼출신이나 재가한 사람은 봉작하지 않았다.

 

 

 

 

 

멋도 모르고 사유지로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 나간다.

 

 

 

 

 

이곳 등로엔 여러 묘비가 파헤쳐진 것을 볼 수가 있다.

아마도 이장을 했나보다~~

 

 

 

 

 

정규등로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안아 안마산 정상에 도착한다

 

 

 

 

 

 

 

 

 

 

 

 

 

 

 

 

 

미세먼지로 인해...

 

 

 

 

 

오래간만에 왔으니 안마산 옆의 봉우리도 올라 보고~~

 

 

 

 

 

이윽고 주목적지인 퇴계농공단지 방향으로~~

 

 

 

 

 

 

 

 

 

벽파 김우종 선생

1905.10.21∼1993.10.29)독립운동가. 강원도 홍천(洪川) 출생. 연희전문학교 재학중인, 1928년 1월 19일 경기 기독교청년회(京畿基督敎靑年會) 비밀실에서 대학생, 전문학교학생 및 유지 등 40여명이 기독동우회(基督同友會)라는 항일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에는 당시 경기도 고양(高陽)군 연희(延禧)면 연희동에 동민학교(洞民學校)를 설립하여 애국정신과 독립사상을 교육하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서대문경찰서에서 29일간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석방된 후 1933년 3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을 다니면서 임시정부 요인과 접촉하여 독립운동가의 자녀교육을 담당하는 한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군사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1936년 8월초에 임시정부의 비밀지령을 받고 귀국했다가 다음 달에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1937년 2월 10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보훈처 홈)


 

 

3ㆍ1운동 직전인 1918년 12월 낙향한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선생을 만나 신문화에 심취해 흠모하게 되어 다니던 한문서당을 그만두고 남궁억 문하에 들어갔다.

 

1923년 모곡학교를 졸업. 배재고보 입학, 2학년 때 학교 대표로 YMCA가 주최한 전국웅변대회에 나가 연단에서 일제를 비난하는 열변을 토하다 수갑이 채워진 채 종로경찰서로 연행돼 29일간 철창생활을 했다.

  1928년 1월 서울시내 각 전문학교에 재학 중인 1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기독청년학생구락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배재고보 졸업 후 곧바로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김우종은 광주학생의거로 전국적으로 번진 항일운동에 동참, 1930년 2월 전교생을 대상으로 동맹휴학에 들어갈 것을 호소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가 강화된 상황에서도 전국대학생웅변대회에 연희전문학교 대표로 출전한 김우종은 민족의 고통을 호소했다. 이 일로 다시 경찰에 끌려가 3일만에 풀려나는 고초를 겪었다.

 

1932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 연희동에서 주민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고자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운동에 나섰지만 한국역사와 민족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죄로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29일간 구류를 살고 나온다. 서대문경찰서에서 곤욕을 치르고 풀려난 그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가게 되고,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장학생으로 남경의 금릉대학교에 입학해 신학대학원을 나왔다. 금릉대학교 재학 시절 임시정부 요인들을 두루 만났으며 일제에 빼앗긴 조국독립을 되찾기 위해 애국청년회를 규합해 활동했다.

  

1936년 금릉대학을 졸업한 후 임시정부 법무장관이던 최동오 장군으로부터 백범 김구 주석의 지시를 전달받고 귀국하게 된다. 김구의 지시는 종교계 애국청년을 규합할 것, 낙양군관학교 애국청년을 규합, 중국에 밀파할 것 등이었다. 귀국해 지령을 실천하던 김우종은 또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대전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른다. 형무소에서 일본경찰의 끈질긴 회유에도 끝까지 함구했던 그는 출옥 후 평양성화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애국독립운동과 관련돼 해직을 당한다. 또 시무하게 된 평양 남산현 교회에서도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목사직을 박탈당하는 수난을 겪는다.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1943년 춘천에 돌아와 2년간 산양목장을 일구던 그는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보게된다. 그러나 광복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지만 사회는 또 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김우종은 강원도 치안위원장과 반탁 강원도위원장으로 활동하게 했다. 춘천지역 반탁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미군정에 의해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반민특위활동은 일제로부터 영화를 누렸던 세력에 의해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한 한을 가슴에 묻게 된다.

  

반민특위는 좌초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해방된 조국의 참된 민주주의와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1945년 [팽오통신]을 발간하고 보급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팽오’는 단군이 강원도 지방에 팽오라는 인물을 보내 홍익인간의 섭리를 구하려 했다는 구전을 인용한 것으로 [팽오통신]을 통해 강원도의 정의사회구현과 발전에 기여하려는 지역지식인들과 힘을 합쳐 창간한 것이다. 8절 양면으로 발행해 강원언론의 씨앗이 된 팽오통신은 26호까지 발간됐고 큰 뜻을 도내 최초의 일간신문인 강원일보에 넘겼다. 본격 일간신문인 강원일보의 초대사장으로 일했던 그는 신문사 일을 후진들에게 넘기고 이사회장직을 지닌 채 도덕함양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사회 계화 사업에 나선다.

  세계도덕성재무장(MRA)한국본부 최고지도위원으로 세계대회 한국대표로 활동했고, 적십자봉사회 활동과 남궁억․김구선생 기념사업회장으로 얼을 계승하는 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1977년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1993년 88세의 일기로 생을 마쳐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사자상이 무덤의 주인공을 지켜주고~~

 

 

 

 

 

근화원

 

 

 

 

 

마을로 잠깐 내려섯다가 우측의 능선으로 올라타야 한다

 

 

 

 

 

무엇을 했던 구조물인지??

 

 

 

 

 

퇴계농공단지

 

 

 

 

 

금병산

 

 

 

 

 

산악회 멤버인 캔디님이 식당에서 키우는 멍멍이들~~

식당에는 몇 번 들려 봤지만, 이 녀석들은 보기는 처음이다.

그런데도 반갑다고 왈왈~ 거린다.

귀여운 아이들...

 

 

 

 

 

길을 건너 숲으로 들어가고~~

 

 

 

 

 

농공단지 아랫 쪽의 능선엔 길이 없다.

그냥 헤치고 나가는 수 밖에...

 

 

 

 

 

이 능선이 아마도 공지천까지 연결되었을 것인데~~

금호아파트에서 잘렸다.

 

이젠 도리가 없다.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춘천교도소에서 공지천 방향으로만 많이 걸었었고~

이쪽 퇴계천은 얼마 전에 공사를 하더니 길이 좋아 졌다.

어차피 집 방향으로 가는 길이니 한 번 거닐어봐야 겠다.

 

 

 

 

 

물도 아주 깨끗하다.

피래미들도 헤엄을 치고~~

환경이 아주 많이 좋아지고 있다.

 

 

 

 

 

퇴계천길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

지하로 들어선다.

 

 

 

 

 

오~~

아주 좋은 데...♬~♪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의 한 분인 백범 김구 선생님~~

아주 좋은 말씀을 남기셨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

 우정이 깊어 졌다고 생각되어 지는 순간부터 우린 서슴지 않아 진다.

그로인해 상처받고,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이별의 쓰라림을 느껴야 하고...

 

그렇게 고통의 시간이 점점 흘러 간다.

그러면서 치유되어 가고~

그리고 또 관계를 갖게 된다.

 

되집어 보면~

사람은 자위보다, 타인에게 위로 받는 것에 더 행복해 한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란 명언을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겼나 보다.

 

 

 

 

 

집 앞 부근으로 나왔다.

가볍게 몸을 풀었다.

내일도 욕심내지 말고 이렇게 조금만 움직이고...

거뜬한 월요일을 맞이해야 겠다.

 

카메라를 가지고 나오지 못한게 못내 아쉽다. 낼은 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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