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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리 산촌생태마을 歷史 트래킹

온리하프 2020. 4. 5.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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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귀리 산촌생태마을 歷史 트래킹 

 

오전 : 부귀교-부귀리뱃터-부귀교

오후 : 부귀교-살구나무집-부귀교

 

11:02     부귀교(춘천시 북산면 부귀리)
11:44     부귀리 뱃터(춘천시 북산면 부귀리 566)
12:39     부귀교

 
12:47     부귀교
14:06     살구나무집(춘천시 북산면 텃골길 178-38 )
14:49     부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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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주말~

 

늘 하던대로

배낭을 둘러메고 산엘 가야하는 데,

오늘은 좀 처럼 땡기질 안는다.

 

허리가 뻐근해서 인가?

지난 주 일이 썩 과하지도 안았는 데...

 

컨디션 난조인가?

 

리모콘만 조작거리고 있다.

 

그렇게 무미 건조한 시간에 이내 따분함이 밀려 오고...

 

뭘 해야 하지 안을 까?

 

주말인데 집에 만 있으면 뭔가 손해본다는 느낌이~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간단하게 트래킹을 하기로 한다.

 

시내 곳곳엔 벚꽃이 만발했다.

꽃을 찾아 다니는 측엔 끼지 못하지만~

3/9에 오항리에서 봉화산을 거쳐 청평사까지 걸었을 때 알게 된 부귀리 벚꽃길 코스가 생각났다.

 

집에서 40분을 달려 시골길에 들어서는 순간 적잖이 놀라지 안을 수 없었다.

산 속이라서 그렇겠지?

이곳 벚나무 꽃은 아직 몽우리 수준~

아마도 일주일에서 열흘은 더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였다.

 

할 수 없이 그날 봐뒀던 부귀리산촌생태마을을 걸어보기로 한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다.

여기서 부터 구)부귀리뱃터까지 왕복 트래킹을 하기로 한다.

 

 

 

 

 

이곳 길을 걷기로 한 것은 다름 아닌 저기 보이는 안내표시판 때문이다.

3/9일 산행 때는 이곳을 그냥 스쳐지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왜 이런 오지에 그러한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졌는지 궁금했다.

 

 

 

 

 

3/9에 왔을 때 보았던 안내판~

 

생뚱맞지 안은 가?

전봉준은 전라도 고부군 그러니까? 지금의 전북 정읍 사람이니 이곳과 지연 관계는 없고...

그 멀리서 이곳 깊은 산골까지 올라와 동학운동했을리 만무하다.

 

어쨋거나 궁금증을 풀으려면 몸으로 때울 수 밖에~

이것이 27번 째 안내판이니 길을 따르다 보면 26번이나 28번 안내판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면 왜 이곳에 안내판을 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이란 쓰잘데기 없는 궁금증이 폭증한다.

 

 

 

 

 

한말 즉, 1897~1910년에는 소위 양반들의 지배폭력과 탐관오리들의 세금 갈취 및 비행과 폭정이 극에 달했다.

이에 녹두장군 전봉준은 ‘반부패 폐정개혁 창의’의 기치 아래 분연히 일어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고,

훗날 반봉건 근대민주화운동, 반외세 국권수호운동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1875년 불법 강화도 침범 이래 호시탐탐 한국을 식민지화 하고자 혈안이 되어 왔다.
1905년 마침내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여 온갖 야만적 행위를 강행했다.
 
을사늑약에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 다섯이 을사오적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특파대사로 보내 을사늑약이라고도 하는 ‘한일협약안’을 체결토록 했는데,
고종이 반대하는 가운데 이들 다섯 명의 대신이 조약의 체결에 찬성했다.
이로써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으며, 한일합병 후 을사오적은 모두 일제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은 그의 전 생애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 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조도선, 유동하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는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매복했다.
하지만 차이쟈거우(채가구)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 FN M1900의 벨기에 권총, 할로 포인트 탄환 3발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4발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3발 모두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 철도 이사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 是公)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혔다. 그리고 총알 한 발을 남기고 체포되었다.

 

 

 

 

박정희(독립군 때려잡는 만주국 일본군 장교) 딸,박근혜

일본 오오사카 출생 이명박(일본명:스키야마 아키히로)모친이 일본인

친일매국노 윤치호의 손자 윤보선

김용주(조선임전보국단 결성식에서 황군에게 위문전보 보내자는 자)아들,김무성김무성 부인/최치환(독립군 때려잡는 만주군관 장교, 4·19때 공보처장).딸 최양옥이회창/일제시대검사 이홍규 아들. 부인 한인옥의 부친 일제시대 검찰서기 겸 통역전 국무총리/(일제시대,악질 고문 경찰의 대부)노덕술 아들 노재봉 전 국무총리/(중추원 참의)김연수,차남 김삼협 전 국무총리,/김정렬,일본군 중위로 필리핀 공략작전에 참가,대만에서 용감하게 싸웠다전 국무총리/신현확/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 군수물자 관리국무총리 비서실장/(정미7적)이병무 증손자,이진, (환경부차관,웅진그룹부회장) 안익태,애국가 작곡자,일본을 칭송하는 음악을 작곡함민복기(대법원장),식민지 정책의 하수인인 일제하 판사조진만 (법무부 장관, 대법원장)일제시대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에 합격, 해주, 대구,판사KBS 이사장/이명세,(조선인에게 태평양전쟁에 나가 싸우다 죽으라고 한 인물)손녀,이인호조선일보/방응모(고사포를 구입해 일본군에 기증해 열렬한 충성심을 보임,아들,방상훈(조선일보 사장)

 

중앙일보/홍진기(일제 강점기에 태평양 전쟁 지원에 나서 대화동맹에 가담,아들 홍석현(중앙일보사장,)

동아일보/김성수(임전보국단 활동, 학병제·징병제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아들,김학준(동아일보 사장

 

매일경제(mbn)/장지량(항일운동가를 정탐,체포하고 살상하는 만주보민회 회원)장남,장대환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사오적)이완용 증손자 ,이윤형,전 국회의원/(중추원 참의)문명기,맏손자,문태준,전 보건복지부장관/(중추원 참의)문명기 ,손자,남평문

국무총리비서실장/(정미7적)이병무 ,증손자,이진, (환경부차관,웅진그룹부회장)

전,한국은행 총재/을사오적,민영휘 장남,민병도국토부장관/ 친일부역자,인혁당사건 사형집행자,서승환,아들 서승환

전 교육부장관/친일부역자,일제시대 순사부장,아들 안병만,

인권위원장/,친일부역자,현준호,증손자,현병철

전,국회의장/ 일제시대 순사부장 박희준 아들,박관용

그랜드 힐튼호텔 회장/(일제후작) 이해승 손자 이우영,(동원 회장)

현대그룹회장/현준호,중추원 주임참의,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증손자 현정은 삼성그/홍진기(일제 강점기에 태평양전쟁 지원에 나서 대화동맹에 가담,딸,홍라희(이건희부인)두산그룹 회장/친일부역자 박승직,아들 박용오,대림산업/민족반역자.이부용 아들,이규응 이준용과는 배다른 이복형제일신파이낸스/민족반역자 김치열(일본 고등문관) 장남,김형국(일신파이낸스 대표이사)

한국타이거풀스(정미칠적) 송병준,손자,송재빈,송돈호(사장,부사장)(

이승연 위안부누드파문 배후)

남이섬소유자/(을사오적)민영휘 손자 민웅기,

휘문고교 이사장/(을사오적)민영휘,증손,민인기,

풍문여고 이사장/(을사오적)민영휘 현손,민경현,

덕성여대 이사장/민족반역자 송금선 아들 박원국

 

전 서울대총장/(을사오적)이완용 증손자,이장무,

전 문화재청장/(을사오적)이완용 증손자,이장무 동생,이건무.

공주대 총장/ (을사오적) 이근택,증손자,이상우,
정두언/조부가 친일부역자

친일부역자,최준집,(일제시대 중추원 참의)손자 ,최돈웅

친일부역자,김명수(일제시대 일본 신문사의 기자와 전무) 아들,김용균

친일부역자,정운갑(한국근대사의 굴곡점마다 시류에 편승하여 출세를 거듭하여 왔다) 아들,정우택

친일부역자 김영환 후손 김옥숙(노태우부인),김복동(오빠)

친일부역자 김동조 딸,정몽준부인,김영명,

친일부역자,조병옥(일제시대 형사 민족의 독립투사를 때려잡는 일등공신)아들.조순형

친일부역자,백선엽(독립군 때려잡는 만주국 일본군 장교)

친일부역자,임문환(조선총독부 관리)홍사덕,장인

친일부역자,김상배 아들,김종필

친일부역자,이돈직(가짜 독립눈동가) 손자,이인구

민족반역자,윤보선 친손자,윤인구(KBS 아나운서)

민족반역자,신경택(일제시대 면장) 친손자,신중대,(전,안양시장)조선 총독부 서이면사무소 복원

채병덕,일본 육군 병기학교 교관으로 발탁되어 오사카 조병창에서 근무,

일본 사이타마 현 출생,조갑제

 

 

동학농민운동, 을사늑약...

잊혀진지 참 오래된 단어들~

잊어서는 안될 역사인되도 말이다.

이 기회를 계기로 다시 한 번 그 의미와 아픔을 되새겨 본다.

 

 

 

 

부귀천을 옆으로 뱃터까지 잇는 길을 따라 안내판이 계속 이어진다.

 

 

 

 

 

"데라우치 마사타케"일본 제국군, 군인. 정치가, 외교관이다. 

 1910년 5월 제3대 한국통감부 통감으로 부임하여 한일 합방을 성사시키고 초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1895년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간접성 배후 조종 관련 공모 끝에 "미우라 고로"로하여금 직접성 배후 교사하여

조선국명성황후 여흥 민씨시해 사건(을미사변)을 사주했다.

1895년 민비가 친러내각을 구성하자 특병전권공사로 조선에 부임하였다.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국제적 비난이 일자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의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많은 토지가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지주의 소유가 되었다.

조선의 농민 80%가 소작농으로 일제의 수탈 정책에 시달렸다.

또한 일본인 지주들에 의해 기업적 지주제 운영 방식이 보급되었다.

품종·재배 기술·농기구·수확 시기까지 지주의 감독을 받음으로써 소작농의 자가경영 기회는 상실되었다.

 

일제하 농정의 기본 목표는 한국을 일본의 공업화에 필요한 저가의 식량 공급 기지로 삼는 것이었다.

이에 1916년부터 산미증산계획을 시작하여~

쌀의 유출량은 생산 증가량을 앞질러 1930년대에는 생산량의 50%,

공출 제도를 시행한 1940년대에는 60%가 유출되었다.

또한 조선 농민들은 높은 소작료로 영세화·궁핍화의 길로 내몰렸다.

1930년을 전후하여 몰락한 농민은 도시 노동자나 화전민 또는 걸인이 되거나 생존을 위해 일본이나 만주로 떠나야만 했다.

 

 

 

 

 

춘천 소양호선착장에서는 30분마다 유명 사찰이자 관광지인 청평사로 가는 배가 뜬다.

청평사는 1972년 소양댐이 들어서기 전에는 걸어서 찾던 곳이다.

지금은 설악산에서 발원해 인제와 양구를 거쳐 춘천에 이르는 물줄기 전체를 소양강이라 부르지만,

옛날 청평사 골짜기 아래에는 ‘작은’ 신영강이 흘렀다.

신영강을 따라 난 비포장길을 버스로 달리면 양구까지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버스가 흙구덩이에 빠지거나 고갯길을 만나면 손님이 내려서 밀어야 했으니 좀더 걸리는 때도 있었지만~

이 모든 기억이 수몰될 무렵, 여러 마을 주민들이 춘천이나 더 먼 외지로 떠났다.

차마 고향을 뜨지 못한 주민들은 불어나는 물을 피해서 높은 산자락에 새 집을 지어 이주했다.

그래서 소양호 물줄기를 따라 섬마을이 여러 개 생겨났다.

부귀리와 오항리도 그런 섬마을 중 하나였다.

육지 속 섬마을이 된 곳은 하루 두 번 오가는 배가 외부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북산면 부귀리와 오항리선착장에도 오전 8시 30분과 오후 4시(동절기 3시)에 소양호선착장을 떠난 배가 하루도 빠짐없이 들른다. 그런 섬 아닌 섬마을 부귀리에 1999년 임도가 뚫리고 2009년에는 아스팔트길이 났다.

비록 가느다란 소로지만 섬마을에서 벗어나게 해 준 생명선 같은 길이 놓인 것이다.

 

그 이후로 뱃길이 끈겼다.

이 길이 부귀리 마을과 뱃터를 잇는 길로,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시절 이 길을 경험해본바는 없지만 가슴이 짜~안해 진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후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고,

한국 사회를 재편하기 위해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한민족은 무단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하였다.

 

1910년~1918년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불법적인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가 인정되었고

지주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1910년대 말 국제정세가 크게 변화되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하여 민족 해방 운동을 고양시켰다.

 

손병희·최린 등 천도교계, 이승훈 등 기독교계, 한용운 등 불교계가 독립 선언을 계획하여 독립선언서,

파리강화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청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독립의견서 등이 작성되었고,

2월 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 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다.

 

그 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 해방 운동이 전개되었다.

 

 

 

 

 

간도에서는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격으로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간도의 무장독립군들은 이를 피해 북쪽인 밀산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결의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총재는 서일이고 부총재는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었으며,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받았다.

여단장에 지청천(이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 등을 선임했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9개 중대·27개 소대를 편성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밀산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3월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

 만주-소련 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그런데 이때 소련 측은 연해주에 남아 있는 일본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무장해제한 후 자신들이 식량과 군복과 무장을 책임질테니 자유시로 이동하라고 권유했다.

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등도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

이런 무장해제 요구에 서일, 김좌진, 이범석, 김홍일 등은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갔지만~

최진동의 총군부,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유시로 집결했다.

자유시 집결의 궁극적 목적은 분산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모아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내어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1921. 6. 27에 러시아아무르 주 자유시(스보보드니)에서 독립군을 포함한 한인 무장 병력과 소련 적군이 교전을 벌인 사건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고,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어 소련군에 강제 편입되었다.

이 사건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벌어지던 무장항일운동에 궤멸적인 타격을 준 사건이었다.

만주지역에서 무자비한 독립군 소탕 전쟁을 벌이던 일본에 밀려 후퇴하던 시기에 벌여져 치명적인 확인사살을 당해버렸다.

희생자의 규모 자체도 최악인데다~

일본군과의 전투도 아닌 고려공산당 지파들끼리의 통수권 차지를 위한 알력을 이용해

독립군 무력을 지방군으로 흡수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던 소련군에 유인되어 대한독립군단 수뇌부가 군권을 잃고 농락당했다.

당시 자유시에 모여 있던 한인 무장 단체들이 모두 독립군인 것은 아니었다.

자유시에 모인 한인 병력은 니항군대나 자유대대 등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연해주 계열과

대한독립군단으로 대표되는 간도 계열로 나뉘는데,

자유시 참변은 연해주 계열 내에서 일어난 분쟁이 발단으로 되었다.

 

간도 계열은 당연히 봉오동 전투(홍범도)에 참여했던 독립군들이었다.

반면 러시아계 한인 2세들로 구성된 연해주계 무장 단체들은 독립운동과는 사실상 무관한 단순한 공산주의 무장단체들이었다.

이들 한인 무장단체들은 주로 백군과 일본 간섭군에 대항하는 빨치산 활동을 하던 조직들이었으며

서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파와 상해파 고려공산당파로 나뉘어 경쟁하는 처지기도 했다.

 

자유시 참변은 한인 공산주의 양대 단체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vs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갈등과 권력투쟁이 주원인이다.

그러나 정작 사상자는 박 그리고리의 독립단군와 허재욱의 의군부에서 많이 나왔으니,

적군(공산주의)에 가담한 한인(韓人) 독립군 간 서로 총을 겨누는 일이 일어난 사건이라,

이 사건을 한인간 최초의 동족상잔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한편 고려군정의회가 극동공화국군을, 즉 사실상 소련군을 끌여들인 까닭에 말이 무성하다. 이 모든 것이 소련의 음모라는 식으로 치부해버리는 등 소련을 문제의 근원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김구, 김좌진, 이범석, 장준하 등의 우파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반공주의를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고,

공산당과 협력하자는 입장을 보인 김원봉, 여운형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대를 거부한 까닭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러한 공산당 자체의 분열과 민족지도자의 반공정서는 훗날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은 사태가 터지기 이전에 밀산으로 회군하였으므로 화를 면하였고,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지청천 장군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했고,

그 곳에서 오하묵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1921.8)을 결성했다.

그러나 일본 간섭군의 철수 이후 소련에 의해 토사구팽되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고

말년에 극장 수위장 등으로 있다가 광복 2년 전인 1943년에 생을 마감했다.

 

 

 

 

 

 

 

 

1919년의 3.1운동은 비폭력 투쟁으로서 세계의 식민지 국가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고 일제에는 큰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 시기 조선의 3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1858~1936]는

이전처럼 조선인들을 폭력과 탄압으로만 억누르려 하면 3.1 운동보다 더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고,

무단 통치(헌병 경찰 통치)를 끝내고 조선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1920년대의 조선총독부의 통치 형태를 문화 통치 혹은 민족 분열 통치라고 부른다.


언론 활동의 규제를 풀어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는데,

그 결과 현재도 남아 있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간행되고 조선 사람들의 문화 활동도 꽤나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일제가 조선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회유하기 위하여 보여주기식으로 한 것들에 불과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은 이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치안유지법을 발표해 국민들을 마음대로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하였고, 연통제를 도입해서 같은 주민들끼리도 경계하고 독립운동가를 걸러내게 했다.

언론활동을 자유롭게 풀어준다고 했지만 이 시기 간행된 신문들은 일본에 유리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기사만 쓸 수 밖에 없었고, 총독부에서 마음대로 검열을 진행해서 자기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나 사진들은 모두 삭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총독부에서는 교육과 사상을 통해 친일파들을 양성했는데, 그로 인한 대표적인 정책이 경성제국대학의 건설이었다.
 중고등 교육기관을 곳곳에 설치해 자신들이 조선인들을 교육시켜서 세계화에 맞춰질 수 있도록 해주겠고 주장했는데,

사실 이런 학교들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아니라 일본을 옹호하고 숭배하는 식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보통의 조선 아이들은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못하고 소수의 친일파 자제들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광수[1892~1950]는 무정, 소년의 비애 등을 지어 조선 문학사에 기여했고 2.8 독립선언서를 썻다.
그러나 그는 1920년대 들어서며 일제의 회유에 말려들어 대표적인 친일파가 되었고,

여러 친일 소설을 짓고 일제의 수탈 행위를 정당화하는 등 계속해서 친일 행위를 저질렀다.
그를 비롯한 일부 친일 지식인들은 일제가 서양으로부터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를 지켜 주고 있고,

그들이 '우매한 조선인들'을 세계에 적응시키도록 계몽시켜 준다며 일제의 침략을 옳은 일로 왜곡하였다.

 

 

 

 

 

낙엽이 뒤둥그는 길은 쓸쓸하고 애처롭게만 느껴진다

 

 

 

 

 

약산 김원봉3.1 운동의 대중화 단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한인들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로써 의열 투쟁 결사대를 조직하여 암살ㆍ파괴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동포들의 독립 정신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국내외 한인을 중심으로 혁명을 촉발함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구상 아래 밀양 3·1운동의 참가자인 윤세주, 상하이 출신의 곽경 등 13명의 동지들과

길림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발족시켰고 단장은 김원봉이었다.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1926년 12월 동척·식산은행 투탄의거 등을 전개했다.

 1928년 내부 분열로 좌파단원들은 중국 공산당을 따라갔고, 김원봉과 소수단원들은 베이징으로 본부를 옮겼다.

 

1935.7.5 조선혁명당·의열단·한국독립당 등 민족주의 단체가 모여 조선민족혁명당이 출범됨으로써 의열단은 해체되었다.

 

한인들의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해외에서 시작되었다.

이동휘 등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8년경 조직한 한인사회당,

한명길 등이 역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서 1921년 4월 결성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그리고 이와 별도로 이동휘 등이 1921년 5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결성한 고려공산당(상해파공산당)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한국에서의 공산당 결성의 기원은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에서부터 유래한다고 본다.

 

1925년 4월 25일 국내 공산주의 서클이었던 화요회와 일본유학생계의 북풍회, 그리고 민중사계 및 신생활사계 구성원 19명은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다음날에는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했으며, 국제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국제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의 당면과제를 조선의 완전독립,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실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타도 일본제국주의·봉건세력 등으로 정하고,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기치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여 1926년 6·10만세운동 발생에 배후에서 영향을 미치고 신간회(新幹會)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산발적인 활동을 벌이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의 제1차 검거사건을 시발로 1926년 6월, 1928년 2월과 7월 등 4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조선공산당은 당초 조직구성에서 인텔리겐치아와 소(小)부르주아지가 중심이었던 한계로 인해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정당으로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파벌간의 대립과 갈등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제3인터내셔널은 1928년 '12월 테제'를 통해 1926년 3월에 승인했던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하고, 당 재건의 지침을 내림으로써 제1차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 7일자로 그 막을 내렸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이 테제에 따라 여러 차례 당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그동안 잠적했던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표면에 등장, 8월 15일 종로에 있는 장안 빌딩에서 이영·정백 등의 서울청년회계와 ML(마르크스·레닌)계, 그리고 화요회계 일부가 모여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논의, 조직선언을 발표하고 16일 공산당 결성을 마쳤는데, 이것이 세칭 '장안파공산당'이다.

 

한편 8월 20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가 장안파와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담은 '8월 테제'를 발표했으며, 동시에 1928년 해체된 바 있던 조선공산당의 정통 계승을 자임했다. 재건파공산당은 9월 8일 장안파를 흡수하고, 12일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으며, 이후 1946년 11월 23일 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과 합당해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

 

 

 

 

 

3·1운동 이후 민중의 정치적 자각과 진출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민족운동이 국내외에 걸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만주에서는 무장독립투쟁이, 중국관내에서는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외교활동이, 국내에서는 노동·농민·청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 일제는 '문화정치'라는 기만적인 개량정책을 써서 민족독립운동 역량의 분열과 약화를 모색했다.

특히 일제는 당시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실력양성운동을 일제지배하에서 자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 자치운동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1925년 1월에 발표된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은 자치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자치운동이 전개되자 조선일보 계열의 이상재(李商在안재홍(安在鴻), 천도교 구파(舊派)의 권동진(權東鎭) 등은 '비타협적 민족전선의 수립'을 제창하면서 자치운동에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한편, 3·1운동 이후 급속히 성장한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1927년 2월 15일 YMCA 회관에서 신간회가 탄생했다.

창립 후 각지의 독립·민중운동가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각 지회는 다양한 형태로 일제에 저항했으나 본부는 일제의 탄압과 지도력의 미비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1929년 민중대회 개최로 대대적인 반일시위운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일제에 의해 좌절된 후 집행부의 다수가 구금되었다.

이후 등장한 김병로 체제는 일제와의 직접 충돌을 피하려 했고,

이에 사회주의자들이 반발하여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1931년 5월 15일 신간회 전국대회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안내판은 부식되어 버린 것도 있고, 비바람에 떨어져 나간 것도 있다.

어떤 내용의 글이었을까? 아쉬웠다~~

 

 

 

 

 

안내판의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일제말기의 해방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 지 알 수 있다.

 

 

 

 

 

총독부가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에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정책에 협력하는 민간단체들을 조직하여 만든 단체. 대중들을 선동하여 국책협력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에 가장 큰 목적을 두었고, 각종 정책을 독려하고 선전하여 민중들이 대륙침략에 대한 인식을 갖게 했다. 

 

1938년 6월 22일 부민관에서 발기인 총회를 갖고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날 발대식을 가졌다.

59개 단체 및 개인 56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이리하여 총독부를 축으로 그 아래 각종 단체의 간부들을 배치하고 다시 그 밑으로 조선민중 전체를 강제적으로 편제했다.

 

총독부 학무국이 중앙조직을 관리하고 각 도·부·군·도(島)까지 지역연맹조직을 만들었다.

이들 조직은 국책협력을 선동하는 것을 가장 큰 업무로 삼고 지원병 독려, 창씨 독려, 헌금 독려, 폐품수집, 일본어 강습회 등을 통해 조선민중에게 대륙침략정책을 선전·선동했다.

〈아까스끼 曉〉·〈애국반〉·〈총동원〉 등의 기관지, 선전책자도 발행했다.

 

발기에 참여한 단체는 사회단체·경제단체·문예단체·언론단체·종교단체 등을 망라하여 그중 조선인 단체는 25개이고 일본인계 단체는 34개였다.

조선인 단체로는 경성여자중학교동창회연맹 · 계명구락부·국민협회 · 대종민우회 · 동민회본부 · 조선부인문제연구회 · 조선수양단체연구회 · 조선국방의회연합회 · 춘추회 · 조선농회 · 조선무진협회 · 조선문예회 · 조선방송협회 · 구세군조선본부 · 조선교화단체연합회 · 조선상공회의소 · 성공회 · 시중회 · 조선감리교총리원 · 조선기독교연합회 · 조선불교중앙총리원 · 조선장로회총회 · 천도교중앙총회 · 천도교중앙교구 · 천도교중앙총리원 · 천주교경성교구 등이 있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고원훈 · 김갑순 · 김사연 · 김성수 · 김활란 · 민규식 · 박승직 · 박영철 · 박흥식 · 방응모 · 백관수 · 손정규 · 안인식 · 원덕상 · 윤덕영 · 윤치호 · 이각종 · 이긍종 · 이병길 · 이승우 · 장직상 · 장헌식 · 조병상 · 최린 · 최창학 · 한구복 · 한상룡이다.

 

지주 · 자본가 · 교육자 · 언론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로서 발기인들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취지 및 규약을 정하고 이사·전형위원 등 13명의 창립총회 준비위원을 선정했다.

 

준비위원들이 성정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간부는 이사장에 시오하라[鹽原時三郞 : 총독부학무국장], 이사에는 조선인 17명, 일본인 21명을 임명하고, 상무이사에는 조선인 4명, 일본인 4명을 임명했다.

이사들 중 조선인은 김대우 · 김명준 · 김사연 · 김성수 · 김활란 · 민규식 · 박영철 · 박흥식 · 손정규 · 원덕상 · 윤치호 · 이각종 · 이승우 · 조병상 · 최린 · 최창학 · 한상룡 등이고, 이들 중 상무이사는 윤치호 · 이각종 · 이승우 · 조병상이다.

 

 

 

 

 

한말에서 해방 전까지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안내판의 내용을 읽어보자

 

 

 

 

 

1945년 12월28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됐다.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 및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최고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내용이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김구 등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많은 사람은 신탁 통치를 민족의 자주권 부정이라고 여겨 반탁 운동을 벌였다.

특히 우익인 한민당의 입장을 대변하였던 당시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고 보도하여 사회적으로 반탁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이러한 보도는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정확히 반대로 보도한 오보였으며, 결정서의 내용을 왜곡한 것이었다.

 

좌익 세력도 처음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으나, 나중에 소련 측의 요구에 의해 모스크바 회의의 내용의 전문이 공개된 후, 회의의 결과를 총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에 섰다. 여기서 좌익 계열은 임시 정부 건설 원칙에 강조를 하였으며, 우익 계열은 신탁 통치 반대에 강조하였다. 이러한 우익과 좌익의 입장 차이는 격렬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한국인이 존경하는 정치지도자 중 한 사람 김구.
그는 분단의 위기 앞에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통해 통일한국을 염원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은 대한민국 단독 정부를 수립했고, 분단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으로 이어졌다.
김구의 삶은 망국의 비애와 광복의 기쁨, 그리고 분단의 아픔까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겸 정치지도자이다.

구한말 혼란했던 시대 상황만큼 그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17세 때 동학군 선봉장으로 활동했고 19세엔 만주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김이언 아래서 의병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을미사변) 이듬해 2월 스치다 조스케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기도 했다.

사건 현장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다”란 글귀와 함께 당당하게 당시 이름 김창수를 남겼다고 한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가 한국인으로 변장한 일본 장교였다고 기록했지만

최근 연구에선 민간인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고종 특명으로 사형을 면했다.

 
1900년부터는 학교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펼쳤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해 이동녕·안창호·이시영·안태국 등과 함께 조직을 이끌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출범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 정부 활동을 했다.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26년 동안 임시 정부 국무령과 주석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했다.
광복 후 한국 독립당을 이끌면서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통일정부수립 운동을 펼쳤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장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번째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전쟁 이전보다 남북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계엄 해제와 유신 세력의 퇴진을 요구했다.

 4·19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앞서 4월 24일 서울 지역 대학교수들이 학원 민주화 성명을 발표했고,

5월 16일에는 군사 정권의 재등장에 반대하는 지식인 134명이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오랜 독재에 짓눌린 시민들의 민주화 욕구가 거세게 분출되자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신군부는 주요 대학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학생운동 지휘부와 정치권의 주요 인사 검거에 나섰다.

학생들이 잇따라 체포되고, 김대중, 김종필 등이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대학생과 계엄군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면서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지펴졌다.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 당선된 야당 정치인들은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신한 민주당으로 결집하였다.

신한 민주당은 1986년 들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1천만 명 서명 운동을 전개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을 은폐하였으며,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여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에 각계각층에서는 개헌 수용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에 나섰다.

이 무렵 박종철 사망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던 음모가 드러나면서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호헌 조치에 대한 국민의 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는 가운데,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6월 10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며,

26일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국민의 강력한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여, 여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의 이름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국민 기본권 보장 등 8개 항의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 선언을 발표하였다(6·29 민주화 선언).

 

 

 

 

 

약간은 차거움을 주는 바람과 에머럴드 빛 계곡물이 그나마 스산했던 가슴을 달랜다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2박 3일 동안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하고 마지막날 발표한 선언이다.

 

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선언하고 남북의 통일 방안에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경제협력을 비롯한 교류 활성화에 합의했다. 이 정상회담은 1948년 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의 대표가 만난 첫번째 회담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예고 없이 평양 순안공항에 직접 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비행기 트랩 바로 앞에서 영접하는 파격적인 예우를 보였다.

두 정상이 만나 두 손을 맞잡고 악수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분단 55년만에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순간이었다.

 

 

 

 

 

2007년 강원도는 주 5일 근무시대를 맞아 풍부한 산림자원을 소득원으로 개발하고 산촌의 생활환경을 개선하여

살기좋은 마을로 조성 하기 위한 산촌생태마을 조성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지난 1995년부터 2006년 말까지 504억원을 투자하여 29개 마을을 조성 완료한 바 있으며,

2007년에는 56억원을 들여 춘천시 북산면 부귀리 등 6개 마을을 조성했다.

 

강원도에서 조성하는 산촌생태마을 조성사업은 마을별 특성을 최대한 부각하여

산촌문화 및 녹색휴양자원과 연계한 관광·체류형 숲속의 집, 산촌체험시설, 등산로 등을 시설하고

특히, 1사1촌 자매결연을 통한 도·농간의 교류촉진과 산촌마을 홍보 및 임산물 직거래를 위한 마을홈페이지도 구축했다.

 

이와함께 한미 FTA 체결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도내 산촌 마을 활성화 및 산촌 주민 소득증대 대응을 위하여

도 전체 산림면적의 55%인 국유림을 활용한 산채재배·특용수 식재 등

산림복합경영으로 주민 소득을 증대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업이 아직까지 잘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곳 부귀리 현장만을 살펴보았지만, 홍보부족인가?

지금은 찾는 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산촌생태마을" 단어 자체도 낯설다.

 

 

 

 

 

하지만 안내판에 그려진 우리의 역사를 하나 둘... 읽어 내려가며

다시금 우리의 근현대사를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이후 조금만 정비하여 홍보를 한다면~

 지금에라도 충분히 "역사의식 고취 트레킹 로드"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이곳은 도로가 생기기 전에~

소양호에서 부귀리까지 배가 다녓던 부귀리뱃터이다.

 

45분 정도 내려왔던 역사의 길을 다시 되집어 올라 간다.

 

 

 

 

 

부귀천을 거슬러 올라 간다.

 

 

 

 

 

숲 속 길이 걷기 좋다.

 

 

 

 

 

 

12:39    이곳에 차를 세워 놓고 부귀리뱃터까지 걸어 갔다왔다.

한 시간 40 정도 소요되었다.

 

그 시간 동안 27번에서 50번 안내판의 내용을 읽어내려 갔다.

부식되어 분별이 어렵고, 바람에 날려간 것도 있었지만~

거의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세월에 파묻혀 없어져버리기엔 아쉬운 곳이다.

 

 27번 이전의 내용은 무엇일까? 사뭇 궁금해 진다.

 부용산 방향의 상부 쪽을 걸어보기로 한다.

 

 

 

 

 

12:47    이곳에서 부귀천이 시작되는 상부 방향으로 올라가 본다

 

 

 

 

 

멀리 부용산이 살며시 고개를 쳐든다.

 

 

 

 

 

심하네~~

누구인지 써놓치도 안고...

 

 

 

 

 

조선의 기반이 되었던 성리학은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며, 삼강과 오륜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은 실생활과는 거리가 멀어 백성들 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성리학은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서양의 과학 기술이 소개되면서 실용적인 학문 연구의 필요성을 느낀다.

조선 시대 후기~

당시의 어려운 현실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났고 그와 같은 생각이 실학으로 이어졌다.
실학자들 중에서는 농민들이 잘살 수 있도록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과학적인 농사 기술을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고

나라가 발전하려면 상공업을 장려해야 한다는 학자들도 있었다.

우리 것에 대한 연구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정약용 선생이 있다.

 

세도정치는 조선시대 외척 세도 가문이 권력을 주도했던 정치형태를 말한다.

 어린 왕의 즉위와 그에 따른 왕권의 약화를 원인으로 본다.

조선의 제 22대 임금인 정조 때 권세를 휘둘렀던 홍국영으로부터 시작되어

순조 즉위 후 김조순 이래 안동 김씨, 1827년 세자가 정치를 대리한 이후 풍양 조씨,

철종 때는 안동 김씨 등 임금의 외척이 되는 집안이 세도 정치를 행했다.

 

1863년 고종의 왕위 계승을 계기로 흥선 대원군 정권이 등장,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막을 내렸다.

 

 

 

 

 

동아시아철학의 기반이 되는 성리학.

중국 남송의 주희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이(理)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가지며,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질서를 갖는 것이다.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이의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의 예법을 어떻게 풀이할지를 두고 학자와 정치인들이 벌인 논쟁으로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어머니나 시어머니인 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는 것이 알맞은가?”였다.
예송논쟁은 학문적 논쟁인 동시에 지금의 여당과 야당이었던 서인과 남인의 권력 다툼이기도 했다.

예송 논쟁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첫 번째 논쟁은 현종의 아버지인 효종이 죽자 그 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일어났다.
서인은 효종이 조대비의 둘째 아들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가 정리한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법(주자 가례)’에는 장자가 죽었을 경우,
부모는 3년 동안 장례의 예를 갖춰야 하고, 차남 이하는 1년간 해야 한다고 돼 있었다.
그러나 남인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남과 같이 대우해 3년(만 2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조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은 1년으로 결정됐고 논쟁에서 승리한 서인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두 번째 논쟁은 현종이 임금이 된 후에 효종의 왕비였던 인선왕후가 죽자 시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벌어졌다.
주자 가례에는 첫째 며느리의 경우는 1년, 둘째 며느리에게는 9개월간 장례의 예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
서인은 인선왕후가 조대비의 둘째 며느리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남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도 임금이 됐으므로 장자로 대우해야 하며,
인선왕후에게도 장자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예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서는 조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지금보면 참으로 쓸데 없는 곳에 국력을 낭비했다.

백성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러니 외세의 침입을 늘 당했을 것이다.

 

 

 

 

1962년에 개교한 내평국민학교 부귀분교 터로 1995년에 폐교되었다.

그 후로 산촌생태마을이 들어섯었는 데~ 그마져도 없어져버렸다.

 

 

 

 

 

 

 

당나라 법률에 영향을 받아 만들었기에 현실에 맞지 않았던 고려의 법률.

심지어 지방관의 기분에 따라 형벌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조선은 공신력이 있고 모두가 지킬 수 있는 법전을 만들고, 결국 ‘경국대전’을 만들어낸다.

15세기에 완성 된 경국대전. 조선시대 법전의 하나이다.

조선 건국 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의 원전과 속전, 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하여 만든 통치의 기본이 되는 통일법전이다.

고려 말부터 1484년(성종 15년)까지 약 100년간에 반포된 제법령(諸法令) 교지 · 조례 등을 총망라한 법전으로 조선 500여 년간의 정치는 이것에 기준하였다.

제7대 왕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만세성법(萬世成法)을 이룩하기 위하여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통일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1460년(세조 6년) 7월에 먼저 재정 · 경제의 기본이 되는 호전과 호전등록을 완성하여 이를 경국대전 호전이라고 이름지었다.

다음해 형전을 완성하여 공포 · 시행하였으며, 1466년에는 이전 · 예전 · 병전 · 공전도 완성하고 호전 · 형전도 함께 다시 전면적으로 검토하여 1468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신중을 기하여 반행(頒行)을 보류하였다.

그 뒤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교정의 논의가 일어나 감교(勘校)를 가한 후 1470년(성종 1년) 11월에 완성하여 다음해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곧 신묘대전(辛卯大典)이다.

그 후 다시 수정하여 1474년 1월에 반행하고 2월 1일부터 시행하였는데 이것이 갑오대전(甲午大典)이다. 갑오대전 역시 수정의 논의가 일어나 심사 · 수정을 거듭한 끝에 10여 년 후인 1484년 12월에 완성하여 다음해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전(乙巳大典)이며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유일한 최고의 법전이다. 그 내용은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의 각 전으로 되어 있으며, 이전은 관리의 직분 · 임면 · 관아의 편성, 관리제도 등을 규정하고, 호전은 전제(田制) · 세제 · 호적 · 조운(漕運) · 권농 · 비황(備荒) 등 재정 · 경제에 관한 것이며, 예전은 과거 · 사대 · 관혼 · 상제 등 의례 · 교육 · 문서식과 외교 등에 관한 것이다.

병전은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을, 형전은 형벌 · 재판 · 공사노비와 상속 등에 관한 민사 규정을 포함하였다. 공전에는 도로 · 교량 · 도량형(度量衡) · 식산(殖産)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매화나무 꽃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고 고려 조정에서 입지를 다져나갈 즈음,

최영은 고려의 수문하시중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성계는 병권을 차지하였다.

이로써 권신의 횡포와 당파의 알력다툼이 다소 잠잠한 것같이 보였으나,

실상 신구 세력의 충돌과 보수와 개혁의 암투는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약 100년 동안 대제국으로 군림하던 원나라가 쇠퇴하고 대신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서서히 중국의 주인으로 자리잡으면서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말을 보내라, 처녀를 보내라 등등 주문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원래 고려 땅이었다가 몽골군이 침략하여 직할령으로 만들었던 철령위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최영은 왕과 비밀리에 만나서 논의한 후 각 도의 군병을 징발하여 명의 요동성을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즈음 명나라에서는 자신들의 의도를 확실히 하기 위해 요동을 지키던 장수로 하여금 요양으로부터 철령에 이르기까지 칠십 참(站)을 두어 수비를 엄중히 하겠다는 내용을 통보하도록 했다.

 

우왕은 깊이 탄식하였다.

우왕 14년(1388) 봄. 드디어 명을 내려 군사를 소집하였다.

징병령이 내려지자 각 도에서는 갈피를 못잡고 어수선하였다.

여러 해 왜구의 침략을 받아 궁핍해진 백성들은 또다시 농사철을 잃게 되자 원성이 자자하였다.

백성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수상 최영은 과감히 자신이 팔도도통사가 되어 요동 정벌을 주장하는 우왕과 더불어 평양에 출진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좌우군 통합 38,800여 명을 이끌고 평양을 떠나게 하였다.

 

그러자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반대하여 누차 그 불가한 점을 들어 왕에게 간하였으니

“지금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한 가지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가지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疫病)을 앓을 것이니 네 가지 옳지 못함입니다.”

하고 사리를 따져 간곡히 말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아니하여 부득이 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는 사직하려 하였다.

다섯째 아들 방원(후일의 태종)이 당시 이십 전후였던 이성계에게 조용히 아뢰었다.

“이 일은 아마도 최영이 아버님을 꺼려서 견제하고자 함인가 생각되옵니다.

그러므로 굳이 사면하고자 하시오면 최영이 반드시 아버님이 왕명을 거역한다는 죄목을 씌울 염려가 있습니다.

차라리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계시다가 형편을 보아 조처하심이 상책이옵니다.”

 

이방원의 말을 듣고 이성계는 그 이튿날 군사를 이끌고 출발하였다.

그때 우왕은 개성 주둔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싸움을 독려하고자 최영과 함께 그 뒤를 따라 평양으로 내려와 진을 치고 있었다.

 

요동 정벌의 왕명을 받은 이성계는 군대를 지휘하여 우왕 14년(1388) 5월경에

압록강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위화도란 섬에 진주하여 더 진군치 않고 머물러 있었다.

때마침 큰 장마를 만나 군사들이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상소하여 정벌군의 회귀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우왕과 최영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신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좌·우군도통사는 다시 사람을 평양에 보내어 회군의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여전히 이에 대한 허락의 의사가 없었으므로, 이성계는 드디어 회군을 결심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장수들을 향하여~

“만약 상국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는다면 종사와 백성들에게 재앙이 바로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도 또한 살피지 아니하고, 최영도 늙어 정신이 혼몽하여 듣지 아니하니, 어찌 경들과 함께 왕을 보고서 친히 화복(禍福)을 진술하여 임금 측근의 악인(惡人)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공의 한 몸에 매여 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며, 모든 병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찬동하였다. 장수와 군사들의 지지를 받은 이성계는 즉시 군사를 국내로 향하였다.

모두 이성계를 향하여 한마음으로 복종할 것을 맹서하였다.

 

 

이성계가 군사를 돌렸다는 소식을 접한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개성으로 분주히 돌아와서 회군 방어의 준비에 급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초에 평양을 떠날 때 거느리고 나갔던 수천 명의 군사와 수십 명의 조정 신하 대부분이 중도에 뿔뿔이 달아나거나 성 밖의 진중으로 도망쳤다.

결국 우왕과 함께 개경까지 돌아온 신하는 최영 외에 너댓 명뿐이고, 군사는 겨우 1백 명 남짓이었다.

 

한편 이성계가 장졸을 지휘하여 올라갈 때, 장수들은 이구동성으로 신속히 행군하자고 청하자 이성계는 대답하였다.

“급히 올라가다간 최영의 군사와 부딪치기 쉬우니 그리되면 인명을 상하게 될 것이다.

이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회군하는 터에 어찌 그런 충돌을 바라겠는가?”

하고 서서히 올라왔다.

 

이성계가 회군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저마다 다투어 음식과 술을 준비해서 큰길가에 나와 이성계의 덕을 칭송했다.

심지어 동요의 한 구절에,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 생겼다.

목자란 바로 ‘이(李)’ 자를 나눈 것으로 이성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즉 이성계가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다.

 

군인과 민간인, 늙은이와 젊은이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이를 노래하였다.

당시 백성들의 마음이 이성계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위화도회군의 성공은 고려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반면 이성계가 백성들의 지지를 크게 받게 했던 사건이었다.

이로써 새로운 왕조의 건설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개경파 귀족의 대표 주자는 김부식이었고서경파 귀족의 대표 주자는 묘청, 정지상 등이다.

묘청은 서경 출신 승려로 인종에게개경의 운은 쇠했으므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 강성한 금나라에 대항하자 주장했다.

 

어느날 묘청은 인종을 대동강(서경)에 데려갔는데, 대동강에 기름이 둥둥 떠다녀 햇빛에 무지개 빛으로 반짝였고

이에 묘청은 인종에게좋은 징조라며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 주장했다

 

이에 개경파는 묘청을 의심해잠수부를 시켜 강물속을 뒤지니 강물 안에는 기름떡이 발견됬고

이런 저런 이유로 묘청의 잔꾀들이 개경파 관리들에게 막혀 서경 천도가 실패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자

묘청은 서경을 수도로 삼고 '대위국' 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천개로 정하며황제국임을 선포한다 (묘청의 난)


그렇게 묘청과 서경 사람들이 일어나자 곧바로 김부식을 필두로 개경파 관료들은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려 나섰고 결국 김부식과 고려군의 포위공격에 묘청의 난은 진압되고 묘청의 난은 실패로 끝났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사연구초’에서 고려시대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실패’를 조선역사 1천년래 제1대 사건으로 규정했다.
 
묘청의 서경천도 실패를 기점으로 민족의 진취적 기상은 쇠퇴하고,
유교사상에 물든 사대주의가 득세했다는 것이 단재의 시각이다.
 
‘조선사연구초’ 한 구절을 보면 이렇다.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했으므로 조선역사가 사대·보수·속박적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묘청이 승리했다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사건을 어찌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단재는 자주성을 상실하고 사대의 길을 걷게 된 민족의 운명을 탄식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원인을 역사적 맥락에서 짚어냄으로서 이를 후세에 경고했다.
 
고조선 건국부터 오늘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꿔 놓은 일대(一大) 사건.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로 축소시킨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천도
△대륙민족에서 약소민족으로 전락시킨 ‘신라의 삼국통일’
△국력신장의 기회를 놓친 ‘윤관의 9성 철수’
△대륙진출을 포기하고 개인적 야심을 채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등이 대표적 일대 사건으로 꼽힌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 신라로 분열되는 후삼국 시대.

고려를 세운 왕건은 궁예의 부하였는데, 궁예가 쫓겨난 후 국왕으로 추대되었고 수도를 철원에서 개경(개성)으로 옮겼다.

이후 신라와 후백제에게 차례로 항복을 받아내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멸망한 발해까지 받아들여 민족 통일을 이루었다.

고려는 4대 임금인 광종 때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와 정식으로 국교를 맺으면서 송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고려는 나라 이름을 고려로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북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러한 고려의 친송 정책과 북진 정책은 거란을 자극했고, 고려가 송과 군사 동맹을 맺어 자신들을 공격할까봐 초조했다. 그래서 송보다 먼저 고려와 외교를 맺으려 했지만, 고려는 거란을 싫어했다.

특히 태조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고 생각해서 무척 경계했다. 942년 거란이 고려와 친해지기 위해 낙타 50마리를 사신과 함께 보낸 적이 있었는데, 태조는 그 낙타들을 다리 밑에 묶어 굶겨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

993년, 성종 때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다. 대신들은 거란군의 기세에 눌려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넘겨 주자고 했는 데, 이때 고려의 외교가였던 서희가 적진으로 들어가 거란의 장군 소손녕과 담판을 지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조하고, 여진 때문에 거란과 외교를 못하고 있으니, 여진만 물리치면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겠다고 설득했다. 여진은 당시 압록강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민족이였다.

소손녕은 서희의 말대로 군대를 철수시켰고, 이에 고려는 여진을 몰아내 압록강 동쪽의 땅 280리를 개척하여 강동 6주를 세웠다.

1009년, 고려에서는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다. 이 일은 당시 서북면(지금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지방)을 지키던 강조가 고려 왕이었던 목종을 내몰고 현종을 즉위시킨 사건이다.

1010년, 거란은 신하로서 임금을 친 강조를 벌하겠다는 구실로 고려에 쳐들어왔다. 하지만 거란의 속마음은 고려에 빼앗긴 강동 6주를 되찾고, 고려에게 친송 정책을 포기하라고 압박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거란군이 쳐들어오자 강조는 힘을 다해 맞서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고 모진 고문 속에서도 거란 왕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절개를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강조가 죽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개경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현종은 거란에 직접 찾아가 신하의 예를 갖추겠다고 약속했고, 그제서야 거란군은 고려 땅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의 장군 양규는 거란군을 곱게 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물러가는 거란 군대를 공격하여 병사 약 7,000명을 사살하고, 잡혀가는 고려 백성 1만여 명을 구해냈다.

거란은 고려에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1018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3차 침입을 했다. 이때 강감찬 장군이 20만 8천 3백 명의 군사를 일으켜 거란에 맞서 싸웠다.

3차 침입에서 거란군이 남하할 때 평안북도 흥화진에서 큰 싸움이 일어났다. 강감찬은 기병 1만 2천여 명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후 흥화진 앞의 삼교천을 막아 수심을 얕게 만들었다가 거란군이 삼교천을 지날 때 둑을 터뜨렸다.

거란군은 쏟아지는 물줄기에 혼이 났고, 이어 매복한 기병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대패했으나 거란군은 포기할 줄 모르고 개경 근처까지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감찬이 적이 먹을 식량과 물을 모두 없애는 '청야 작전'을 펼쳤다. 타격을 받은 거란군은 우왕좌왕했고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기습 공격하여 거란군 5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거란군은 서둘러 자기네 나라로 돌아간다. 강감찬은 거란으로 돌아갈 때 꼭 거쳐야 하는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맹공격을 퍼부어 10만 명의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군사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귀주대첩'이다.

3차 전쟁을 치룬 고려와 거란은 서로 양보하여 협상을 맺었다. 거란은 강동 6주를 포기하고, 고려는 친송 정책을 포기하기로 했다.

고려는 거란과 화의를 맺은 후에도 여진 등 북방 민족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래서 11년에 걸쳐 압록강 입구부터 도련포에 이르는 긴 성을 쌓았은 것이 '천리장성'이다.

 

 

 

 

 

 

 

 

 

 

본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기에는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淸海)를 진수(鎭守)할 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그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食邑) 2,000호를 봉해주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즉위와 함께 그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장복(章腹)을 내렸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 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

(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하게 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뒤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으며, 851년에야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김제)으로 옮길 수 있었다.

 

 

 

 

 

세계 4대 여행기
7세기 현장법사의 “대당서 역기”

8세기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이븐바투타의 “여행기”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지었다. 700년을 전후하여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그후 금강지의 권유로 구법여행에 나서 인도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했다. 그가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로 추정된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을 연구했다.

 

740년 1월 금강지가 이 경을 번역할 때 필수를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 금강지가 죽어 이 사업은 중단되었으며,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이 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742년 다시 인도로 보내졌다.

 

그후 773년경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금강지의 제자 불공으로부터 이 경의 강의를 들었다.

불공은 유서에서 자신의 법을 이은 6대 제자 가운데 2번째로 혜초를 꼽았다.

불공이 죽은 후 동료들과 함께 황제에게 글을 올려,

스승의 장례 때 보여준 은혜에 감사하며 아울러 스승이 세웠던 사찰을 존속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그뒤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다가, 780년 불공이 활동했던 오대산으로 갔다.

 

그뒤 건원보리사에 머물면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를 시도하여 약 20일 동안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했다.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로 귀국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오천축국전〉 3권 가운데 일부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서(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序) 및 하옥녀담기우표 (賀玉女潭祈雨表)가 전한다.

 

 

 

 

 

 

 

생기마을 "나눔과수원"

과일이 열리면 며고 싶은 사람은 아무거나 따 가세요~

다만, 따가실 때 5개를 더 따서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세요!!

 

 

 

 

 

발해(渤海)는 고대-중세 동아시아의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 요동일대에 위치한 전제군주제국가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698년에 말갈인과 옛고구려 유민들이 지금의 중국만주일대에 세운 국가다.

 

한반도 북부와 중국만주러시아연해주하바롭스크남부 지역에 228년간 존속했는데, 926년란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현재까지 밝혀진 기록과 정보가 적어 아직 베일에 싸인 면이 많은 나라이며 오늘날 역사 귀속 문제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국가다.

실제로 해외에서도 고구려는 한국사로 인정하는 여론이 대부분이지만 발해에 대해서는 신중히 접근하는 편이다.

 

한국사에서 역대 국가들 중 면적이 제일 넓다.
국호 '발해'는 이 국가의 랴오닝성요하지역이 접한 바다를 이르는 말인보하이 해(渤海)에서 유래했다.

발해라는 국호를 정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신들을 '고려(高麗)' 또는 '진국(震國)'으로 칭했다.

또한 을 '가독부(可毒夫)라고 칭했는데, 이는 발해 고유어의 음차라고 한다.

그런데 정혜공주묘비에 '황상'이라는 표현과 '황후'를 사용한 묘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외왕내제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발해를 고구려와 함께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여,

당나라의 지방정권 혹은 말갈족의 나라로 주장하는 동북공정을 진행 중에 있으며,

고구려와 발해 성곽을 만리장성의 일부로 판단하여 복원 계획에 포함시키거나,

당나라 황궁인 함원전보다 더 컸다는 상경성 제2궁전지는 중국 정부에서 비공개로 보수 작업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 대한 사진도 공개되지 않아 더 연구해야 될 부분이 많다.

 

지금은 중국 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에 실린 짤막한 발해 비문정도를 통해 일부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남한뿐 아니라 북한고고학계에도 철저히 비공개한다고 한다.

 

발해가 해동성국이라 불린 것은 10대 대인수인 선왕 때이다.

선왕은 발해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는데, 이때 발해의 영토는 남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로는 소고구려를 합병하여 요동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고구려와 부여 등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또한 북쪽의 흑수말갈 등 발해에 대항하던 말갈의 부족들도 복속시켰다.

 

선왕은 발해 중흥의 대업을 이룬 중흥군주(中興君主)로서 이때 발해는 당으로부터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당에 유학생을 보내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밀접한 외교를 통해 친밀을 유지하였으며 당나라 문물을 받아드려 행정구역을 5경 15부 62주로 개편하고 학술을 진흥시키는 등 발해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의 살구나무집을 다녀오고나서, 좌측의 길로 접어든다.

 

 

 

 

 

비어 있는 산모퉁이의 집

 

 

 

 

 

살구나무집~

이곳도 역시 비어 있다.

 

 

 

 

 

크로커스

겨울이 지나 나무의 새잎이 나오기도 전에 피어나는 꽃 중의 하나로 키는 아주 작다.

꽃대의 모양이 실처럼 생겼다 해서 그리이스어인 Krokos(실)에서 나온 이름이다.

정원에 심어두면 이른 봄에 살며시 꽃대를 내밀며 바로 탐스러운 꽃들이 핀다.

가을에 심어 봄에 꽃을 보는 대표적인 가을에 심는 알뿌리류이다.

 

 

 

 

 

 

 

 

 

 

 

 

 

 

 

 

 

 

 

 

 

 

 

이런 곳에서 딱 5일 만 쉬었으면 좋겠다.

하루는 봉화산 갔다와서 막걸리 한 잔 먹고 푸욱 쉬고~

또 하루는 부용산 갔다와서 막걸리 한 잔 먹고 푸욱 쉬고~

또 다른 하루는 죽엽산 갔다와서 막걸리 한 잔 먹고 푸욱 쉬고~

그리고 나서 힐링하러 부귀리뱃터까지 갔다와서 푸욱 쉬고~

나머지 하루는 저 시소에 앉아 지난 날을 회상하고, 미래를 설계하며 멍 때리기...

 

 

 

 

 

살구나무집

 

 

 

 

 

이집은 아에 폭삭 주저 앉아 버렸다.

 

 

 

 

 

“신비로운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헤아리고 기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꿰뚫는구나

싸움에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족한 줄 알고 그만 하기를 바라노라.” (삼국사기)

을지문덕이 수의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로, 수를 물리칠 만반의 준비를 갖춘 고구려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6세기 후반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수는 고구려에 굴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에 맞서 요서 지방을 먼저 공격하였다. 이후 수는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특히 612년 수 양제가 30만의 별동대로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살수에서 이들을 크게 물리쳤다(살수 대첩). 결국 수는 무리한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멸망하였다(618).

수를 이어 들어선 당은 처음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도모하였지만, 태종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를 압박해 왔다.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이에 대비하였다. 화친을 주장하던 영류왕이 제거되고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한 후 고구려는 당에 대해 강경하게 맞섰다. 당 태종은 수십만 대군을 앞세워 요동성과 비사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3개월 간 완강하게 저항하여 당의 침략을 격퇴하였다(안시성 싸움, 645).

당은 이후에도 고구려를 몇 차례 더 침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고구려가 수 · 당의 침략을 막아낸 것은 중국의 한반도 침략을 저지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신라 진평왕의 대수 외교

진평왕 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잦은 침략을 받았다.

602년에는 백제군이 아막성을 공격해 왔고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으로 침입해 오기도 하였다.
진평왕은 연이은 침략을 받자 수에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특히 611년, 승려 원광으로 하여금 걸사표를 짓게 하여 그것을 수에 바쳤는데,

이것이 수 양제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에 침략하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 군사의 규모

"자치통감" 에 따르면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 때 동원된 군사는 113만 3,800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동원된 사람이 모두 전투병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중국 역사에서 조차 유례가 없는 일로,

대군이 출발하는 데만 40여일이 걸렸고, 군대 행렬은 960여 리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수 양제의 침입은 수의 모든 자원이 결집된 대규모 침공이었으며,

고구려는 집단 방어 체제로 대응하여 이를 물리칠 수 있었다.

 

연개소문 (?~666)

당의 공격을 물리친 연개소문은 중국의 고대 소설과 희곡, 경극이나 연극 등에 자주 등장한다.

이를 통해 연개소문은 비록 적장이긴 하나 중국인에게 전설 속의 영웅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시대마다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 에서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집권한 역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반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박은식의 "천개소문전" 에서는 위대한 혁명가 또는 독립 자주 정신을 지닌 영웅으로 평가된다.

 

고구려 산성은 왜 난공불락이었을까?

고구려의 성은 대부분 산성이었다. 평지성의 경우라 하더라도 인근 산성과 짝을 이루어 방어 체제를 갖추는 경우가 많았다.

산성에서 내려다보면 적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성문 앞을 이중으로 구축한 옹성,

올라오는 적을 파악하고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치 등 성 내부로의 진입을 차단하는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잘 쌓은 산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또한, 고구려의 성은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집단 방어 체제를 이루고 있어서,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한두 성을 내어 준다 해도 겹겹이 구축된 성들이 방어선을 형성하여 적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도성 구조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을 짝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평상시에는 평지성에서 생활하다가 전쟁 등의 위기 상황에서는 산성으로 옮겨 가 대항하였다.
초기 도읍지에서는 졸본성(오녀산성)과 나합성이 이런 관계이다.

나합성은 비록 수몰되어 사라졌지만 평지성에 해당하며, 졸본성은 산성에 해당한다.
이후 국내성 천도 이후 평지성을 방어하는 산성으로서 환도산성을 쌓았다.

평양 천도 이후에는 안학궁(평양성)과 대성산성이 각각 평지성과 산성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당은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어 백제를 먼저 제어하는 방법을 택했다.

나당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를 협공했다.

백제의 멸망으로 군사활동이 용이해진 신라군과 당군의 양면 공격이 거듭되자

고구려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668년 평양성의 함락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다.

 

 

 

 

 

 

 

갈수기 인데도 많은 량의 물이 흐르고 있는 물안계곡

 

 

 

 

 

연녹색의 파릇한 새싹이 올라올 때 쯤이 아름다운 힐링코스가 될 것으로 보여진다

 

 

 

 

 

 

 

 

 

BC 3세기부터 8세기 초까지의 800 ~ 900년간에 걸친 일본의 고대 문화는 고대 한국인(가야인, 고구려, 백제인, 신라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이룩한 문화임은 학술적으로 고증된 사실이다.일본에서는 지금도 이들을 바다건너 왔다하여 도래인(渡來人)이라고 부르고있다.

가) 첫 번째 이동은 BC3세기에서 AD1세기 그 시기는 한반도의 한강이남지역에서 부족국가들의 연합체인 마한, 진한, 변한 등이 출현한 시기였고 뒤 이어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춘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가 건국된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정치 세력 간에 권력 다툼이 있었고 그런 정권투쟁에서 패하여 밀려난 세력들중 일부가 일본에 망명하였다. 대마도를 거처 규슈지방에 정착한 도래인들은 벼농사 짓는법을 비롯한농경문화와 제사의례, 무속, 농기구등을 일본에 전하였다. 일본에서는 이 농경문화를 야요이문화라고 부른다. 규슈 지방에서 일어난 야요이문화는 400여 년간 발전하면서 일본 전역에 퍼져 나갔다.

나) 두 번째 이동은 4세기 말
서기 391년에 고구려의 19대 왕인 광개토대왕께서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정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북으로는 만주대륙에서 숙신 말갈등을북으로 몰아내고 송화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혔고 남으로는 한강 유역에서 국경을 접하고있던 백제를 공격하니 백제는 남으로 밀려갔다. 그 와중에 전쟁에 진저리를 느낀 왕족 귀족 고관 학자 기술자 중 일부가 일본에 망명하였다. 이들 도래인들이 일본에 고분(古墳)문화를 일으켰다. 무덤을 웅대하게 꾸미고 그 속에 부장품을 묻고 벽화를 거리는 등의 고분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많은 한문서적이 일본에 전해진 것도 이때이다.

다)세 번째 이동은 6~7세기 경
552년에 가락국이 신라에게 망하고 660년에 백제가, 668년에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패하여 멸망하니 신라가 3국을 통일하였다.멸망한 나라의 집군세력중 일부가 학자 승려 의사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 기술자를 거느리고일본에 망명하였다. 아마 이들은 일본 동해안의 이즈모에 상륙하여 스루가를 거쳐 야마도 지방에 정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일본에 불교문화를 일으켰다. 사찰을 짓고 불상을 만들고 불경을 보급하는 등 불교미술, 불교건축, 불교조각 등이 발달하였다. 이와 같은 불교문화를 일본에서는 아스카문화라고 부른다.

백제의 아직기가 일본 오오진천황(應神天皇)의 세자에게 한문을 가르쳤고 백제의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 한권씩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한학을 가르쳤으며 일본의 나라에 있는 호류지의 벽화를 고구려의 승 담징이 그린 것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들이다. 요약하면 야요이문화, 고분문화, 아스카문화로 이어지는 일본의 고대문화는 도래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하는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광개토대왕 서거 1천600주년을 맞아 2020. 2/16~17일 양일간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국제학술회의에서 中·日·대만 등 학자들이 연구한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 재위 391∼412)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갖추어준 바탕에서 대정복 전쟁을 수행, 국경 북쪽으로 연 나라와 남쪽으로 백제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고구려의 튼튼한 힘을 과시하며 그가 이룬 최강 고구려는 아들 장수왕에 이르러 절정을 치닫는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화려한 업적은 비문으로 남아 오늘날 우리에게 여실히 전해진다.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그가 이룩한 이 공적은 서양의 정복왕 알렉산드로스와도 비견되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광개토왕의 본명은 '담덕(談德)'이고,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으로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번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연구 논문의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광개토대왕의 생전 정식 명칭은 '영락태왕'이었다."

"광개토대왕 재위 당시 중국과 동북아시아에는 수많은 나라가 공존하고 있었고

서로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문화적으로 아주 풍성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광개토대왕은 북방과 남방을 연계한 대외 전략을 통해 고구려 전성기의 기초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중국, 대만, 일본 세 나라의 주요 학자들은 '고구려 광개토왕과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 이번 국제학술회의에서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사를 다각도로 조명했다.

 

◇ 중국 베이징대 중국고대사 연구중심(센터) 뤄신(羅新) 교수

그는 '고구려 왕호제도(王號制度)에 관한 몇 가지 견해'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문헌자료와 광개토대왕비를 토대로 고구려의 왕호제도를 분석했다.

뤄 교수에 따르면 고구려 왕족과 지배층이 사용한 언어는

고대 만주-퉁구스어에 비교적 가까우며, 알타이(Altaic) 언어 범주에 속해 있거나 그와 인접해 있다.

뤄 교수는 "알타이 계통의 전통적인 정치명호(政治名號)는 이름(王名)과 칭호(官稱.title)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면서

고구려는 최고 지도자를 알타이어 계통에서 수령을 뜻하는 '가(aka/akan)'로 칭했고,

후한(後漢) 중후기부터 중국식 명칭인 '왕'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또 광개토대왕의 연호로 알려진 영락(永樂)은 광개토대왕 생전의 왕명이었으며 태왕(太王)은 칭호였다고 주장했다.

"광개토왕이 즉위할 때 '영락태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영락태왕'은 생전의 정식 칭호였다"는 것이다.

뤄 교수는 또 광개토대왕처럼 고구려 왕들은 생전에 각기 왕명이 있었고,

고구려 고유 언어로 불렸는데 이를 한문으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명칭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했다.

사후 시호(諡號) 역시 모두 고구려 언어로 불렸으며 이후 한문으로 기록됐다고 분석했다.

 

◇ 리밍런(李明仁) 대만 국립 자이(嘉義)대 교수

리 교수는 문화교류라는 측면에서 광개토대왕 재위 전후의 동북아시아 역사를 조명했다.

그는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의 개념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문화인류학의 문화접변(culture acculturation) 개념을 도입했다.

리 교수는 광개토대왕 재위 전후 당시의 국제 정세를 '세력균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중국의 중원과 동북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병렬적으로 공존하고 서로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문화적으로 풍성한 발전을 이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리 교수는 특히 중국 문화(漢文化)의 영향 등 자문화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고고학 발굴 자료나 문헌 자료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고학의 발굴 결과는 파편적이고 우연적인 요소가 많아, 전반적으로 그 시대의 문화교류상을 그려낼 수 없다"면서

 "고고학 자료에만 의지하고 문화교류를 해석할 때 지극히 제한된 일부를 전체로 잘못 보고 자기 입장에서 자기 소리만 말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민족주의적, 자문화 중심적인 역사 해석을 경계했다.

또 "고대 광개토왕 시대의 고구려 문화를 연구할 때 과거의 어떤 전통적인 생각의 굴레를 벗고 그 시대의 역사적 사상을 깊이 고려해야 하고 현대인의 관념을 덧칠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 교수는 또 중원에 존재한 고구려 성씨인 여()·고()·왕()씨, 후연(後燕), 북연(北燕) 등의 왕조에서 활약한 부여 왕자 여울(餘蔚), 고구려계 모용운(慕容雲.高雲) 등도 새롭게 조명했다.

 

◇ 이노우에 아오키(井上直樹) 일본 교토부립대 교수

이노우에 교수는 '광개토왕의 대외관계와 영락 5년 대거란전(對契丹戰)'이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거란전을 중심으로 광개토왕의 대외 전략을 살펴봤다.

그는 광개토왕이 거란의 한 갈래인 패려(稗麗)와 전쟁을 벌인 것은 남방 세력인 백제 등과의 전투에 앞서 배후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광개토왕이 남방의 백제와 군사적으로 심각한 긴장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대() 남방전보다 먼저 패려 토벌을 결행했던 이유는 광개토왕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라면서 "대 패려전은 광개토왕이 행한 대외전략 전체 틀 안에서 자리매김시켜 종합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광개토대왕의 남방 정책은 서북 변경의 동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백제와의 군사적 대립이 고조돼 남방에 대한 전략을 결행하는 데 서북 변경의 정세를 경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노우에 교수는 고구려가 서북쪽과 남쪽 두 곳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을 피했으며 두 곳의 상황을 연계해 대외 전략을 적절하게 구사해 동북아시아 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구려는 자국의 서북쪽과 남쪽, 두 가지 방면에서 전투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는데 신라, 백제와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적극적으로 대(對) 북위 외교를 전개했다"면서 "고구려는 이러한 외교전략을 통해 광개토왕이 고구려 전성기의 기초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372년(소수림왕 2)으로서, 이해 6월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보내왔다.

그로부터 2년 뒤인 374년(소수림왕 4)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왔다.

 

다음 해 2월에 초문사(肖門寺省門寺라고도 하며, 후대에 興國寺로 바뀌었음)를 지어 아도를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후대에 興福寺로 바뀌었음)를 지어 순도를 머물게 하였다.

 

순도는 전진왕 부견의 사신과 함께 왔으므로 북방에서 온 것이 거의 확실하나, 아도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서는 진()에서 왔다고 하였으나,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에서는 오(吳)에서 왔다고도 하고, 고구려에서 위()에 들어갔다가 뒷날 신라(新羅)로 돌아왔다는 설 등이 있어 분명하지 않다.

 

이로 미루어볼 때 중국 북방의 불교가 공식으로 들어온 것은 372년이지만,

그 이전부터 민간 차원에서의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동진(東晉)의 명승(名僧)인 지둔(支遁)이 고구려도인(高句麗道人)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당대의 명승인 축법심(竺法深)의 덕행을 찬탄하고 있는데, 지둔이 입적(入寂)한 것은 366년이므로 이미 372년 이전에 고구려 사람이 불교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둔이 주로 강남에서 활약했던 승려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고구려와 강남 사이에 이미 교통이 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도가 중국 남방의 진이나 오에서 고구려로 오는 일이 가능하였다.

 

순도나 아도가 가지고 왔던 불교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은 쉽지 않다.

이에 대하여 〈해동고승전〉 순도조(順道條)에 "인과(因果)를 보이고 화복(禍福)으로 유인하였으나 백성들의 마음이 질박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재단할 방법이 없어서 법사가 비록 쌓인 것이 깊고, 이해의 폭이 넓었으나 널리 펴지는 못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고구려에 초전된 불교의 내용이 선악의 행위에 대한 화복의 인과를 밝히는 초보적인 수준으로서 당시 중국의 북방불교적인 흐름과 통하고 있었으며 또한 전래 초기에는 그렇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도는 전진에서 왔지만, 아도는 진이나 오에서 왔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고구려에는 중국의 남방불교도 동시에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도와 아도 다음으로 나타나는 사람은 백족화상(白足和尙) 담시(曇始)이다.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그는 396년(東晉 孝武帝 太元 21)에 경율(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와서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교화하였으며, 삼승(三乘)을 선양하고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세운 뒤 405년(東晉 安帝 義熙 1)에 장안(長安)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산수유 내음이 향기롭다

 

 

 

 

 

 

고조선, 정확히 '위만조선'은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멸망했다.
하지만 그 멸망의 원인은 한나라 군대보다 내부의 적들 즉 내통자, 반역자들의 역할이 컸다.

오죽하면 고조선을 멸망시켰던 한나라의 군사령관들이 상은 커녕 벌을 받을 정도였다.

 좌장군 순체는 목이 베여 저잣거리에 내걸렸고, 누선장군 양복은 막대한 벌금을 내고 서인(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반면 고조선 내부의 내통자들은 큰 상을 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108년 왕검성(王儉城)을 함락시키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옛 고조선 지역에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 

한사군(낙랑군임둔군진번군현도군)의 지배 시기에 고조선 사회의 기존 상급 통합조직은 해체되었다. 

중국계 주민들은 군현 내의 주요 지점에 설치된 토성에 주로 거주하면서 지배 족속으로 군림하였고,

고조선인은 촌락 단위로 군현 조직에 예속되었다.

또한 8조의 법금이 갑자기 60여 조로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고조선 사회의 전통적인 사회질서와 문화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경제적으로도 군현의 공적인 수취 외에 한나라인들에 의한 수탈적인 상거래가 성행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강요한 한군현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곧이어 일어났고,

그 결과 2개 군이 폐지되고 1개 군이 축소되는 변동이 잇따랐다.

 

사학계에서 일컫는 고조선은 단군조선(B.C. 2333∼B.C. 1122), 기자조선(B.C. 1122∼B.C. 194), 위만조선(B.C. 194∼B.C. 108)의 세 조선을 통칭한다.   

위만조선이 망하고 한사군(B.C. 108∼A.D. 313)이 설치되면서 한반도 한강 이남에는 수십 개의 신흥 소국들이 발흥했다. 그중 세 나라가 마한(경기·충청·호남지역), 진한(강원 일부·경북지역), 변한(전북 일부·경남지역)이다. 사학자에 따라서는 삼한시대 혹은 원(原)삼국시대로 분류하기도 한다.
세 나라는 씨족이나 부족 연맹으로 여러 집단의 족장이 다스렸다. 유력한 호족이 힘센 장사 수십 명을 규합해 거사하면 나라가 세워졌다. 이처럼 소국 연맹체로 결성된 나라가 삼한 국가였다. 족장들은 스스로 선출한 왕명을 거역하고 국사를 결정할 때마다 의견이 나뉘었다. 부족끼리는 물론 불가침 약정을 맺은 이웃 나라와 영토 전쟁을 벌여 백성들의 삶은 참담했다. 이런 나라가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이 있었다.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기원전 1세기부터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한 신라고구려제의 삼국과 그 판도에 영향을 끼친 가야 연맹을 포함한 4개 국가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세워지면서부터 7세기에 신라에 의해 통일되기까지의 시대를 가리킨다. 삼국시대의 전반은 고구려와 백제가 주도했으나 진흥왕 이후 국력이 막강해진 신라가 삼국시대 후기를 주도하고 결국 삼국 통일을 이루고 통일신라시대를 열었다. 각국의 전성기로 평가되는 시기는 백제 4세기, 고구려 5세기, 신라 6세기 순이다.

일부 사학자들은 실질적으로 삼국이 정립되어 삼국 시대가 전개된 것은 고구려, 백제의 기원인 부여가 멸망하고(494년), 또, 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 부터 신라가 백제를 정복한 660년까지 약 100년 동안의 기간 뿐이므로 오국 시대사국 시대 또는 열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고조선의 시작은 강역 논란과 함께 고조선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논란이다.

이것에 따라 한국사의 길이 자체가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전통 시대에는 기원전 2333년 무렵 건국되었다고 전하는 단군조선과 기원전 12세기 무렵 동래한 기자조선을 모두 조상으로 인식하고 제사를 지냈다. 《삼국유사》에 나온 단군의 나이가 1800년인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서거정이 '나이가 아니라 연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 등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학설은 없었다.

이는 고고학이란 학문이 없었던 시절이기에 역사서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에야 비로소 현대 역사학적으로 고조선 연구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었고,

지금도 고조선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고조선은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시기이므로 사실상 고고학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고조선(古朝鮮)은 지금의 한반도북부중국랴오닝성에 걸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읍 국가이다. 초기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주로 요서에서 요동에 이르는 현재의

랴오닝성 일대와 지린성 그리고 북한의 평안도 일대로 추정하고 있고, 멸망할 때의 위치는 현대의  평양직할시를 중심으로 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로, 이는 기원전 4세기 이전의 영향권보다 요동 방면의 영역이 축소되었고 대신 일부 영토가 남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하지는 않으나 조선이란 국호만 한 차례 등장하며, 《삼국유사》에서

군이 세운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등장한다. 중국의 사서 가운데 《사기》와 정사 삼국지, 《한서》, 《후한서》 등에 조선 기사가 수록되어 있으나 단편적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삼국유사에서 위만조선을 다룰 때 이들 중국 사서를 인용하고 있다.

본래 국호는 '고()'자가 없이 조선(朝鮮)이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기 이전 대의 기록에서 혹 조선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것은 고조선이거나,

또는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평양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시대의 기록인《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단군조선을 고조선으로, 위만조선을 조선으로 일컬었다.

현대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설을 부정하고 위만조선을 기존의 고조선과 연속된 실체로 파악하려는 취지와,

14세기 말에 옛 조선의 국명을 가져다가 새로운 나라 이름으로 삼았던 이성계조선왕조와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조선을 쓰는 용법이 정착되었다.

 

 

 

 

 

좀 더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이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나중에 간척리에서 부용산과 종류산 사이의 건천령을 넘어 이곳으로 넘어오고 싶어 진다.

 

 

 

 

 

고조선에서 현대사회까지의 크고, 굵직한 역사를 되새기며 왔다.

아픔이 많았던 역사이지 싶다.

한 국가가 탄생하기까지 많은 역사가 있겠지만, 우리 처럼 외세의 침입이 많았던 나라는 없는 듯 싶다.

물론 자존감과 자긍심, 민족주의적 사고가 부족했던 것도 일조했다.

그런 것들을 알기에 이제는 새 역사를 써나가야 한다.

 

코로나19로 거리두기 운동을 하고 서로의 모임을 멀리한다.

(우리나라 사람 처럼 조직을 우선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그 숫자를 세어가며 자랑하기도 하고 혹, 거기서 빠지기라도 하면 사회에서 도태된 것 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다른 때와 다르게 투표율이 많이 높다.

나는 그 이유를 x세대의 투표율 때문으로 본다.

며칠 전 북풍이 있었지만 투표율에 영향은 없어 보인다.

 

이제는 새로워져야 한다.

구시대는 지나가고 x세대가 새롭게 국가를 이끌어 가서

 새로운 대한민국, 위대한 대한민국, 과학과 문학과 문화, 철학이 올바른 대한민국이 되어가야 한다.

 

 

 

 

 

봄기운에 휩싸인 오솔길이 걷기 좋다.

긴 추위를 이기고 새싹을는 봄은 역동적이며 깊은 생명력을 보여 준다.

내게 봄은 언제까지 일까???

 

그 봄까지 이렇게 생명이 움트는 부드러운 숲속을 이어 걸으리~~

 

 

 

 

 

아침에 눈을 뜨면 늘 핸드폰을 찾는다. 그리고 "김현정의 뉴스 쇼" 를 킨다.

 

유시민의 180석은 과한 것이 아니었다.

왜 일까?

 

민경욱, 김진태, 이언주, 차명진 후보는 막말 전사들이다.

코로나19로 차분함을 잃치 말아야할 국민에게 피로감을 더 했다.

 

외신은 한국 정부가 코로나19의 모범국이라는 데, 야당은 발목만 잡고 말았다.

 

무노동무임금을 적용하자면 야당 의원에겐 세비 한 푼 주지 말아야 할 정도로 일을 하지 안았다.

 

여당에선 사법개혁을 하자고 하는 데, 야당은 고소장을 들고 검찰로 간다.

 

여러 소리들이 흘러 나온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 21대 국회에선 선진 정치하길 바란다.

자신의 당을 위해서가 아닌 국민과 국격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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