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은 기존의 샛길을 연결하고 다듬어서
북한산 자락을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한 저지대 수평 산책로이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어 걷는 둘레길은
물길, 흙길, 숲길과 마을길 산책로의 형태에 각각의 21가지 테마를 구성한 길이다.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둘레길은 우리의 소중한 자연을 보존하는 길,
그리고 역사와 문화, 생태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이다.
--- 북한산 둘레길 첫째 날 ---
"북한산 국립공원"은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지금도 한 해 평균 1,0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북한산 국립공원을 찾고 있다.
"북한산 둘레길"은 좀 더 쉽고 편안하게 북한산 국립공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70km의 길은 물길, 흙길, 숲길, 마을길로 아기자기하게 조성되어 있어 걷기에 전혀 지루함이 없다.
좀 걸어본 사람이라면 걷기가 왜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불리는지를 알 것이다.
장수 국가 일본에서는 4,000만 명이 걷기 운동을 즐기며 한 해에 개최되는 걷기 대회만 2,500회가 넘는다.
미국도 걷기를 최고의 운동으로 꼽는 국가 중 하나다.
비만 퇴치와 심장병 예방은 물론 우울증 치료에도 효과가 큰 특효약으로까지 대접하고 있을 정도다.
올레길, 둘레길의 등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걷기 열풍이 불고 있다.
특히 북한산 둘레길은 서울 도심에 있어 도시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도심에 있지만 오래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공기가 도시의 그것과는 다르다.
길은 총 21개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같은 길이 하나도 없다.
북한산 우이역 2번 출구~국민대학교 앞 16.7km/7h45m
트 랭 글
오룩스 맵스
정릉에서 "형제봉 입구"를 지나 평창동 방향으로 가야 했는 데~
"형제봉 입구"에서 인디언바위 부근을 지나 국민대학교로 하산했다.
우리가 진행하는 길은 시계 방향이고, 국민대는 시계 반대 방향이다.
그러기에 국민대로 가면 안 된다고 했는 데 그렇게 됐다.
형제봉-형제봉 입구-인디언바위-정법사 코스에서 보이듯이~
"형제봉 입구" 갈림길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알바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괜찮다. 인간지사 새옹지마라고~~
다음 차례에 인디언바위를 올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까.
08:00 남춘천역 출발
10:20 북한산 우이역 2번 출구
10:22 트레킹 시작
10:42 1구간 소나무 숲길
11:26 2구간 순례길
12:48~13:57 점심 식사("더곤지암" 23,000원 왕복 2.15km/1h08m)
13:58 3구간 흰구름길
14:42 우회노선길
15:22 빨래골공원지킴
16:27 북한산국립공원 탐방안내
16:33 5구간 명상길
17:37 북악산 갈림길 표시목
18:05 국민대학교 정문 시내버스 정류장
19:15~20:34 광장시장(48,000원 "주 우가")
21:00 청량리역
22:32 남춘천
24:30 저녁 식사(순이네닭볶음탕 40,000원)
24:40 퇴계사거리 자택
10:22 우이동을 마지막으로 찾은 게 언제쯤이지?
이곳에 오면 늘 싱숭생숭해지고 또 안도감이 든다.
시작할 때와 마쳤을 때의 기분 상태 말이다.
우이동은 그만큼 산악인에게 중요한 시종점이 되는 곳이다.
블로그를 뒤적이니 2018년 11월 불수사도북 종주 때 왔었으니~
거의 4년 반 만에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요즘 연골보호 차원에서 산행 횟수가 많이 줄었다.
표시목 아래는 각자의 설정 목표지점으로 가야 할 방향을 알려 준다.
북한산 둘레길 안내 표시목.
경전철 우이신설선 개통으로 춘천에서 북한산 우이역을 이용하여
도봉산이나 북한산 찾기가 많이 편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두 시간 반이 소요되니 짧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백운대에서 우이동으로 흘러내리는 백운천이 아주 맑다.
설악산 깊은 계곡의 물이라 할 정도로 손색없어 보인다.
서울의 지붕 "창신동"
어르신들의 파라다이스 "낙원동"
당집이 많았던 한강변 동네 '당산동"
조선시대 여덟 명의 판서가 나왔다 해서 이름 지은 '팔판동"...
서울에는 특색 있고 유서 깊은 이야기를 품은 동네가 많다.
강북구 우이동은 서울에서 가장 자연친화적인 동네다.
면적의 80%가 북한산 국립공원이다.
서울 최고의 ‘숲세권’ 동네다.
인근 번화가에서는 볼 수 없는 아늑함과 고요함이 있다.
우이동은 도봉산 끝자락의 "우이암(牛耳岩)"에서 따왔다.
--우이암--
소의 귀(우이=牛耳) 처럼 보이나?
지리산둘레길 274km 종주를 21/06/05~22/04/17에 끝냈다.
물론 4구간으로 나누어 2박 3일이나 3박 4일을 해야 했다.
춘천에서 그곳까지 교통 상황이 너무 열악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고 나서 작년에 외씨버선길을 3회 차까지 했지만~
그곳 또한 교통여건이 좋지 않아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가 대중교통 이용하기 훨씬 수월한 북한산 둘레길 71.5km에 첫발을 내딛는다.
함께 한 산아님은 오랜 기간 동안 길동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늑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62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 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 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손병희 [孫秉熙]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0:42 1구간 소나무 숲길
우이령길 입구~솔밭근린공원 상단 2.69km/1h02m
길을 걷다 보면 소나무가 뿜어내는 강렬한 송진 향이 온몸을 감싼다.
북한산 둘레길 중 유일하게 계곡의 물소리를 지척에서 들을 수 있는 구간이다.
소나무숲길은 솔밭근린공원, 휴식공간, 소나무 숲, 봉황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만여 평의 솔밭근린공원에서는 도심에서 보기 힘든 100년생 소나무를 볼 수 있다.
피톤치드를 마음껏 맡고 싶을 때 찾으면 제격이다.
수질검사 시험성적서는 없지만,
스쳐 지나는 객들이 늘 먹었을 샘물이겠기에~
한 바가지 시원하게 완샷했다.
1916년 1월 22일 평안남도 평양 출생,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진학.
재학 중 기계체조와 수영선수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37년 12월 제50기생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되어 도쿄 주둔 제1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부대 이동으로 만주의 손오기지(孫吳基地)에 파견되었다.
1939년 중위로 진급한 후 도쿄의 기병학교에서 10개월 간 교육을 받았으며, 12월 20일 평양에서 결혼을 했다. 이후 1940년 북만주 가이펑[開封]에서 수비대장으로 근무하다가 1941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1942년 도쿄 주둔 참모본부인 대본영(大本營)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육사 출신의 한국인 가운데 대본영에서 근무한 사람은 홍사익 중장과 이용문 소장 둘 뿐이었다.
1943년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어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버마 등지에서 근무했으며, 1944년에 소좌로 승진해 남방군 교통사령부 참모가 되었다. 1945년 사이공에서 종전을 맞이했고, 일본의 패망으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일본군 사령부 군수참모 재직 시 가깝게 지냈던 베트남인 납품업자의 도움으로 풀려나, 1947년 9월 인천을 통해 귀국했다.
귀국 후 1년여 동안 홍콩, 상하이 등에서 무역업을 하다가 국방부 참모총장이던 채병덕과 이종찬 등의 권고로 1948년 11월 군에 입대해 육사 제8기 특대생으로서 소령으로 임관했으며 한 달 후 중령으로 진급해 초대 기갑연대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4월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8월 초 육군본부 정보국장이 되었다. 1949년 10월 육군본부를 떠나 옹진전투사령관으로 부임했으며, 전남병사구사령관 등을 지내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10일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소수 병력으로 정릉, 미아리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으나 북한 전차대의 공격을 받고 부대가 와해되었고, 한강 철교 폭파 뒤 한강 도하를 수차례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3개월 동안 은신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군에 복귀했다. 이후 강원도 계엄민사부장, 육군종합학교 기획처장으로 근무했으며, 이듬해 3월 제9사단 부사단장이 되어 현리작전을 펼쳤다.
1951년 6월 이종찬 소장이 총참모장에 취임하게 되면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으로 임명되었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과 함께 군의 중립을 내세워 국방장관 신태영의 병력 차출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당시 이종찬 참모총장은 국회의원 통근차가 헌병대로 끌려간 5월 26일 대구 육본에서 열린 참모회의를 통해 군이 정치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육본 훈령 217호「육군 장병에게 고함」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은 해임되었으며, 이용문은 육군본부에서 밀려나 7월 11일에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1952년 9월 6일부터 9월 20일까지 15일간에 걸쳐 수행된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쟁탈전에 지휘관으로 참여했으며, 10월 남부지구 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해 지리산에 잔류하고 있는 공비토벌의 임무를 수행했다. 1953년 6월 24일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지휘하던 중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육군 소장으로 추서 되었으며,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대구 근교에 있던 그의 묘소를 수유리로 옮기는 이장위원회 위원장 맡기도 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8년부터 매년 ‘이용문 장군배 승마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용문 [Lee, Yong-moon, 李龍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육본 작전교육국 근무 시절 이용문(준장) 국장과 박정희(대령) 차장.
《여기 게재한 모든 글들은 꼭 읽어 볼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미국이 2차 대전 후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할 때 가장 중요시한 것은 소련이나 공산세력의 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패전국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미국은 일본에 천왕제의 유지와 관대한 전범 처리로 일본 지배계급과 연대하게 되는 방향을 추진했다.
미국은 동시에 남한을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면서 공산주의 세력의 저지선으로 삼기 위해 일본 등과 연합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보고 남한 정부에 친일 세력이 대거 진출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
육군 최고사령관 1946~1968년까지 일본 육사, 미군정 군사영어학교 졸업자
미군정은 이를 위해 미군사고문단이 일본군 장교출신 친일 조선인들을 앞세워 남한 내 치안을 담당할 군경을 조직하는 작업을 벌였다. 그런 과정에서 친일인사를 우대하는 대신 독립군 출신 참여는 배제하면서 친미세력 확충의 기반을 만들었다.
미군정은 군사영어학교를 개설해 일본군 장교출신 조선인들을 대거 입교시켜 친미세력의 배출처로 삼았다(Sawyer, Robert. Military Advisors in Korea: KMAG in War and Peace. Washingt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62).
그 결과 1946년 남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사령관에 이어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 임명된 육군참모총장의 경우 초대부터 1969년 18대까지 일본육군사관학교나 미군정의 군사영어학교 졸업자들이었다.
오늘날 군 일각에서 주권국가의 당연한 위상인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과 미군 주둔을 통한 군사적 예속이 최상이라는 주장을 펴는 것은 미군사고문단에 의해 의식화된 결과로 추정된다.
일제치하에서 관리를 지낸 조선인 부역자들은 미군정 덕분에 반민족 세력으로 청산되기는커녕 하루아침에 해방정국의 가장 강력한 권력집단으로 변신했다. 미군정은 행정 편의를 위한다면서 일제가 만든 관공서의 기능을 일부 부활시키면서 친일 부역자들을 기용한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미군정기 전체 2만 5000명의 경찰관 중 일제경찰 출신이 5000여 명으로 전체 20% 였다. 독립투사를 고문하던 노덕술, 하판락 같은 악질 일제경찰 출신들도 미군정하에서 경찰이 된 것이다.
그러면 당시 광복군 출신이 경찰이 된 케이스는 얼마나 될까? 놀랍게도 달랑 15명이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진 것은 문재인 정부 들어선 뒤인 2018년 12월이었다.
경찰청의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 TF’가 광복군 유공자 567명의 행적을 전수 조사한 결과, 경찰 입직이 이미 확인됐던 3명 이외에 12명이 경찰관으로 활동한 사실이 새롭게 발굴됐다.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 중 15명이 대한민국 경찰에 투신했던 것으로 조사된 것이다(KBS 2018년 12월 2일).
친일파들은 미군정 하에서 군과 경찰 등에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으면서 미군정의 친일 청산을 적극 저지했다. 이들은 민족반역자 또는 부일협력자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고등경찰을 지낸 자에 대한 피선거권을 박탈하려는 특별조례법의 시행을 저지했다. 이들은 이 조례법의 입법 추진에 뇌물 제공 등을 통해 반대하는 로비활동을 벌이다가 통과되자 미군정에 취소 탄원서를 제출해 결국 이 법이 시행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 미군사고문단이 1949년 한국군을 훈련시키는 모습.
미 군정, 친일 경찰 비호-경찰은 민중의 쇠몽둥이가 되다
미군정은 친일 경찰을 비호했다. 그것은 미군정은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한 경찰 간부를 파면한 것에서 드러났다. 미군정은 1946년 10월 1일 식량수급정책에 반발하는 '대구 사건'이 발발하자 그 원인분석 결과 일제경찰 청산 등 경찰쇄신 문제가 제기됐지만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미군정 당시 경찰력의 20%가 일제 침략자들에게 부역한 인물들로 채워지면서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을 고문, 학살하는 살인마와 같은 쇠몽둥이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해방정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반공, 멸공이라고 보고 민중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짓을 수도 없이 저질렀다.
친일 경찰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온갖 반민족적인 범죄행각을 자행했는데 그 선봉에 선 인물의 하나가 조병옥이었다. 제주 4·3 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공개한 조병옥에 대한 관련 자료는 아래와 같다.
--조병옥은 4·3 발생 직후 일제 강점시기에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살인적으로 고문한 친일경찰들을 대거 현장에 투입해 진압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학살당했다. 특히 조병옥의 비호를 받고 있는 서북청년단의 무차별적 테러가 4·3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이 기용한 일제 경찰들을 그대로 이어받은데 이어, 서북청년단을 경찰 인력으로 흡수했다. 그 결과 경찰은 6·25를 전후해 수많은 양민을 불법적으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친일경찰의 만행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 중의 하나는 1949년 6월 6일 자행한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습격한 사건이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나아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을 불법 시 하고 친일파를 적극 옹호하였다.
이승만 반민특위 비난-친일경찰 반민특위 습격
이승만은 제주 4·3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반민특위가 친일경찰들을 구속하자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는 식으로 친일경찰을 적극 비호했다. 반민특위를 주도했던 국회 소장파 의원 13명이 남로당의 프락치라고 체포된데 이어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되면서 특위는 극도로 위축되어 업무개시 8개월 만에 무력화된다.
그 후 1949년 10월에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는 해체되었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51년 2월에 폐지되어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방해하면서 한국 사회는 수십 년 동안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친일경찰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경찰력의 중심세력으로 뿌리를 내렸으며 다수가 정부훈장을 꿰차기도 했다. 지난 2016년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친일 인사 222명에게 해방 후 440여 건의 훈장이 수여됐다. 일제로부터 훈장과 감사장을 받은 뒤, 해방 후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친일파도 48명으로 집계됐다. 그 가운데는 친일 경찰로 가장 악명 높았던 노덕술도 포함됐다.
한편 친일경찰을 포함한 친일세력 청산을 가로막고 간첩을 양산하는 이른바 빨갱이 사냥이 행해지도록 부추긴 법적 장치가 국가보안법이다. 국보법이 만들어진 1948년 12월은, 반민특위가 구성된 지 2개월 만이었다. 이는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조사와 처벌을 저지하기 위해 친일세력들이 국보법 제정에 앞장섰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는 이유의 하나다.
국보법은 일제가 사상을 통제하고 독립운동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국보법으로 부당 이득을 본 최초 수혜자는 친일파들이었다. 해방으로 단죄의 대상이 된 친일세력은 국보법의 비호아래 반공주의자로 변신했고 오늘날까지 보수 수구세력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일본 관동군 헌병 출신인 김창룡이 ‘멸공전선의 제1인자’라는 호칭 속에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다.
친일파, 국보법 비호 속 반공주의자로 변신
국보법은 공산주의자를 민족과 국민의 범주로부터 추방하고, 반공 체제를 강화한다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진보정당의 출현이나 성장을 저지하면서 수구 보수 세력의 집권을 수십 년 동안 부당 지원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이 법은 탄생부터 개인의 사상과 이념을 제한하고, 정권수호를 위한 반민주적인 악법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좌익 세력 색출을 명분으로 국보법은 1949년 한 해 동안 전국 교도소 수용자의 70%에 달하는 11만 8000명에 적용될 만큼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는 국보법이 공포정치의 수단으로 악용된 정황증거의 하나다.
제주도에서 발간된 Jeju Weekly는 2011년 4월 “Massacre defined by political divide”라는 제목으로 제주 4.3 등에 대해 아래와 같이 썼다.
--친일세력은 일제에 이어 새롭게 상전이 된 미국의 요구를 적극 실천했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해 주는 길이었다. 친일세력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제주 4·3은 공산주의 세력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는 현지 분석 자료를 미국에 뇌물 형식으로 바쳤다. 미국이 가장 좋아할 논리였기 때문이다.
동족상쟁의 참극이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것에 항의한 현역군인들의 집단행동이 여수순천 사건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그들의 순수한 뜻을 짓밟고 대량학살을 자행해 진압했다. 이승만은 정부수립이전부터 미군정의 정책에 순응해 남한 단독정부에서 최고 권력자가 되려고 책동했다.
그는 미군정이 친일세력을 정치사회 권력조직에 복귀시키자 그들과 손을 잡는 반민족적 폭거를 자행했다. 그러면서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친일청산과 친일인사 심판을 차단했다. 그는 장기집권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국회표결을 사사오입하는 식으로 뒤집고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미국에 망명했던 자가 가장 추악하고 천박한 사이비 정치 공학만을 익히고 조국에 와서 그것으로 삼천리금수강산을 엄청나게 오염시켰다.--
이승만과 제주 4·3 그리고 민간인 학살
이승만은 이른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 박멸을 해방정국부터 4·19 혁명 뒤 하야할 때까지 주장했다. 미국은 소련을 의식해 미군정 때부터 호전적인 이승만 정부 군대에 무기 공급을 주저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이승만으로부터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위임받았는데 이승만이 민간인 학살을 지시했을 때 방관함으로써 미국도 학살 공범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1945년 해방이 되자 그해 10월 귀국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노력했을 뿐 북한 지도자들과 협상해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권위주의 방식으로 통치했으며 경찰 등 공권력이 공산주의자나 간첩 혐의자를 불법 감금, 고문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는 집권 직후 제주 4·3을 공산주의자의 반란으로 보고 철저한 진압을 지시했다(South Korea owns up to brutal past – World – smh.com.au". www.smh.com.au. 15 November 2008). 이승만은 1948년 제주 4·3 사태가 발생하자 도쿄로 가서 맥아더 장군을 만나 국방경비대와 경찰이 무초 대사와 미군사고문단의 협조를 받아 진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승만은 이어 여순 사건이 발생하고 한국군경이 초기 진압작전에서 실패하자 주한미군이 로버트 장군과 미 군사고문단에게 필요할 경우 진압작전을 지휘해 사태를 진정시키라고 지시했다.
▲ 한국군경이 1950년 7월 민간인을 학살 장소에 끌고 간 모습. 사진=위키미디어
이승만, 윤석열 정부의 공통점-외세 추종, 민족 외면 정책에 올인
이승만은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목표를 세운 미군정의 남한 점령정책에 철저히 협력하면서 집권 기회포착에 철저한 속물 정치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민주주의 정치를 도입하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청산했어야 할 친일세력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아 집권하고 친일세력을 비호하는 노림수가 숨겨진 국보법을 만들어 반민특위조차 제대로 활동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남한은 사상의 자유가 억압되고 친일세력이 내뿜는 독기로 21세기에도 ‘양극화 심화 속에 자살률 세계 최고, 출산율 세계 최저’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이승만은 한민족이 1천3백 년간의 통일국가를 이룩해 온 역사를 외면한 채 정치사상을 민족보다 상위개념으로 삼아 평화적 남북 통합을 외면했다. 그는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만을 주장하면서 6·25 전쟁을 전후해 수많은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세계가 지탄하는 국보법으로 민중을 탄압했다. 이는 민족사를 얼룩지게 한 가장 큰 범죄의 하나라는 비판을 자초한다.
친일세력은 미군정을 통해 권력기구 속으로 복귀한 뒤 친미세력이 되어 이승만의 지지 세력으로 변신했다. 친일세력은 일제에 이어 미국을 주인으로 섬기며 봉사하는 세력이 되었고 독재정치가 지속된 지난 수십 년 동안 지배세력으로 군림했다. 친일세력과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면서 다수의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친미세력으로 변신한 친일세력은 한국의 경제력, 군사력이 세계 10위 이내에 들게 되었지만 이승만이 미국에 퍼주는 식으로 만든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한 한국 국방 자주권 상실의 회복이나 평화적 남북 교류협력, 평화통일추진 노력을 적대시하고 있다.
동시에 미국의 대북 군사전략에 봉사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식의 반시대적, 반민족적 작태를 거듭하고 있다. 오늘날 윤석열 정부가 대일 굴욕외교 파문 속에 미국 도청 의혹 사태에도 불구하고 한미일 군사동맹체제만에 올인하는 것은 이승만의 외세 추종, 민족 외면 정책과 상당 부분 닮은꼴이다.
국가유공자 지정 등 국가보훈 결정 96%는 군경, 독립 및 민주유공자는 4%
3·1 운동이 발생한 뒤 1백여 년, 광복 이후 7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독립운동 유공자가 발굴되고 있다. 이는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사람들에 대한 후손들의 작업이 부진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이승만이 친일세력과 손을 잡고 반민족적 정치를 한 결과의 하나로 그 후유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발굴과 서훈 작업은 물론 독재정권에 항거해 민주주의 확립에 기여한 민주인사들에 대한 처우도 지지부진 상태다.
국가보훈처가 지난 수십 년간 독립운동 발굴과 서훈 등에 비판을 자초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며, 이런 부적절한 태도는 독재정권에 항거해 민주주의 쟁취에 기여한 민주인사들에 대한 정당한 예우에 소홀한 것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이승만 정권 이래 수년 전까지 실시한 국가유공자 지정 등 국가 차원의 보훈 결정 96%는 군과 경찰에 집중되어 있고 독립유공자와 민주유공자는 모두 합쳐 4%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면 본인은 물론 가족이 대를 이어 고생한다는 말이,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수치다(한겨레 2019년 05월 08일).
국가보훈 대상자는 국가보훈기본법 제3조 제1항에 네 개의 범주로 나눠 규정하고 있다. 첫째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 둘째 국가의 수호 또는 안전보장, 셋째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넷째 국민의 생명 또는 재산의 보호 등 공무수행이다.
2019년 2월 발표된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 의결 권고안에 따르면, 이 법에 따른 보훈 대상자는 2017년 12월 31일 현재 257만 3100명으로 그 96.3%가 군인(일부 경찰 포함)이고 독립유공자는 2.9%(7만 5068명), 민주유공자는 0.8%(2만 1128명)에 불과하다. 민주유공자는 4·19 혁명 및 5·18 유공자뿐이다.
4·19혁명 및 5·18 민주화운동 외에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민주인사들, 이른바 ‘민주관련자’들을 민주유공자로 포함시키기 위한 입법 추진이 2000년 이후 최근까지 여섯 번째 발의되었지만 현재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김세진, 이재호 등 자신을 희생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 등도 국가유공자 대열에 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불합리를 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난 20년간 지속되었지만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친일세력 일제 대신 미국 상전으로 모시고 제 민족 총칼로 찔러
친일세력은 미군정의 비호 속에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면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는 세력을 탄압하고 짓밟았다. 친일세력은 일제를 주인으로 모시고 제 민족을 탄압하고 괴롭히다가 새로 등장한 상전 미군에게 충성하면서 제 민족을 빨갱이라며 총칼로 찌른 것이다. 이들은 미국의 종이 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경제발전이 되자 미국의 덕이라며 앞으로 계속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겠다는 다짐을 앞세운다.
동북아에서 냉전시대가 재연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고, 우크라 사태에서 보듯 강대국들의 전횡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을 직시해서 한반도에 평화와 안전을 정착시킬 자주적, 민주적인 민족 생존과 번영전략에 대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는 친일에 이어 친미로 변신한 세력과 그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등장, 그리고 6·25 한국전쟁 동안 발생한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소재를 가리는 작업과 그 심판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당시 시대상황을 살필 때 남한에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의 책임이 크다는 것은 앞서 지적했다. 동시에 미군정의 기치아래 민간인 학살에 직접 가담했던 친일 군경세력과 이승만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미군정이 경찰과 군인조직을 만들 때 기용한 친일파, 미군정하에서 집권한 이승만은 해방공간 속 친일 청산 주장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거나 탄압하고 반정부 인물로 분류된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적극 옹호, 두둔하거나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반민족, 반민족적인 호전적 성향의 독재정치를 자행해 미국이 암살 대상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이런 인물에 대해 최근 여권 일각에서 그 기념관을 만들자고 나오는 모습은 대단히 역겨운 일이다.
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1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장(왼쪽)이
5 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신고를 받는 장면.
숲에서 벗어나 우이동을 걷다 보면 전봇대에 "북한산 둘레길" 표시를 해 놓았다.
소나무 숲 길
100년 이상된 소나무 숲이라고...
도봉산
11:26 2구간 순례길
솔밭근린공원 상단~이준열사묘역 입구 2.24km/0h57m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 4.19 민주묘지를 바라볼 수 있는 구간이다.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와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묘소도 있다.
봄이 좋다.
싱그러운 나뭇잎과 화사한 봄 꽃이 걷는 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1년 4계절 중~
봄과 가을은 3개월 반, 여름과 겨울은 2개월 반 씩 나뉘었으면 좋겠다.
봄이 짧아 아쉽다.
국립 4.19 민주 묘지
4.19 혁명(4.19의거)의 배경은 장기집권을 노린 독재
4.19혁명 또는 4.19 의거는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의해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5.16 군사쿠데타까지 연결됩니다.
4.19 혁명의 전후 배경과 원인, 결과가 미친 영향은 민주주의를 꿈꾸던 초보 대한민국의 성장기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정치인이나 기득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정의롭고 개혁적인 국민에 의해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1948년 제1대 대통령선거가 있었습니다. 이승만이 90%가 넘는 지지율로 김구를 누르고 당선되었습니다. 6.25를 거쳐 2대 대통령에도 이승만이 당선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법에서는 한 번의 연임만 가능했기 때문에 3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을 뜯어고칩니다. 영원히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의해 이승만은 제3대 대통령에도 당선됩니다.
1960년에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어서 부통령 대수가 하나 높습니다. 집권당인 자유당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나섰고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조병옥과 장면이 나섰습니다.
이기붕은 이승만의 비서로 출발해서 정계에 입문하여 이승만의 권력을 이어받으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찰총수 출신의 조병옥은 야당후보지만 보수색이 있는 정치인입니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에게 혼쭐난 이승만 진영은 미리 치밀하게 작전을 세웁니다. 마침 조병옥이 갑자기 병이 생겨 미국으로 치료를 떠났는데, 자유당은 기뻐하며 선거일자를 앞당기는 등 민주당이 선거에 대비할 수 없게 손을 씁니다. 4.19 혁명(4.19 의거)의 원인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선거 전에 돌아오려던 조병옥은 급서해 버립니다. 덕분에 제4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단독출마로 당선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신익희가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사망했었으니 민주당 입장에서는 두 번이나 연달아 대권후보 없이 선거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부정선거는 4.19 혁명(4.19 의거)의 원인이 되다
이제 남은 것은 부통령 자리마저 차지하는 것입니다. 장면의 인기가 높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무리하게 부정선거 작전을 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속 부정을 저질렀지만 이승만 정권의 독주에 식상한 국민들이 비로소 알아챈 측면도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개표조작, 깡패를 고용한 위협, 금품살포 등의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특히, 정치깡패 등의 폭력집단은 4.19 혁명(4.19 의거)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선거를 앞둔 2월 28일에 대구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집회가 크게 열렸지만 3월 15일 예정대로 선거는 진행되었습니다.
부정선거에 대한 소문이 전국에 퍼진 상태에서 결과마저 예상대로 나오니 국민들은 다음 날부터 바로 시위에 들어갑니다. 마산시위 등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경찰의 강경진압, 정치깡패들의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그날,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던 한 명의 고등학생이 실종됩니다.
약 한 달 후 바다에서 그 고등학생이 건져졌는데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이 신문에 보도되자 일반 국민뿐 아니라 학우의 죽음에 충격받은 중고등학생들까지 참여해서 전국화되어버립니다.
물론 당시의 정부의 입장도 지금의 우익주장과 비슷했습니다. 좌익세력이 선동하여 국가전복을 시도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3.15 부정선거의 여파는 4.19 혁명(4.19 의거)에 까지 연결되게 됩니다.
독재에 항거하는 국민들의 4.19혁명(4.19의거)
드디어 4월 18일, 또 한 번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 후 자신 해산하여 귀가하는데 갑자기 대한반공청년단 소속의 폭력배들이 습격하여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에 전국 교수들도 시국선언을 하며 동참했고 중고등학생들의 시위에서 대학생, 성인들의 시위로 점점 번져 나갔습니다.
4월 19일 경무대와 중앙청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4.19 혁명(4.19 의거)입니다. 정부는 무차별 발포를 하여 시민들이 사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13세 초등학생도 총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좌익공산 세력의 시위라고 규정짓고 계엄령으로 대처합니다. 정부의 과잉진압으로 수많은 시민이 살상당했습니다.
시민들은 격분하여 5.18 광주에서 처럼 경찰서의 무기를 탈취해 항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130, 부산 19, 광주 8명 등 전국에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했습니다.
4.19 혁명(4.9 의거)의 결과, 결국 미국 대사와 장관들의 권유로 이승만은 국민의 요구대로 하야하기로 결심합니다. 4월 26일 라디오를 통해서 발표한 후 하야하였는데, 대통령을 왕처럼 착각하는 일부 국민들은 눈물을 쏟으며 절을 하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다음 날, 문제가 되었던 이기붕은 부인과 두 아들과 함께 권총자살로 삶을 끝냅니다.
임시 대통령직을 맡게 된 허정은 이승만을 외국으로 망명시키려고 은밀히 알아봅니다. 한 달 후 아무도 모르게 하와이로 이승만이 망명할 수 있게 했고, 국회에서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주변인은 물론 정부 각료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해, 4.19 혁명(4.19 의거)의 결과로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뀐 새 헌법에 의해 제2공화국이 출범합니다. 재선거에서 대통령에 윤보선, 총리에 장면이 당선됐고 실질적인 정치는 장면이 맡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중고등학생까지 포함된 국민들의 희생을 통하여 부정부패와 부정선거를 청산하며 민주주의를 되찾은 것입니다. 공산주의 전복을 하려는 좌익세력의 선동이라는 억울한 누명 속에서도 이루어낸 결과입니다.
그러나 4.19 혁명(4.19 의거)에서 국민의 희생으로 독재에서 벗어난 한국은 겨우 1년 만인 1961년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다시 독재의 길에 들어서야 했습니다. 4.19 혁명(4.19 의거)의 희생이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입니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이후 1961년부터 1989년까지 약 30년을 군사독재 하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초봄에만 볼 수 있는 연녹색 나뭇잎~~
때깔이 참 곱다.
눈까지 맑아지는 느낌이다.
보광사
애국선열 강재 신숙 선생 묘
애국지사분들의 묘역이 많은 관계로 굴곡진 근현대사 역사공부를 다시 할 수 있었다.
나라에 친일역사가들이 많아서 인가? 이 분들의 공적을 일일이 교육하지 않는다.
두리뭉실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아닌~
독립운동가 한 사람 한 사람의사를 교육해야 한다.
애국선열 단주 유 림 선생 묘
"진달래 능선에 잠드신 11분의 독립열사"
이 분들의 이념과 투쟁 이력이 모두 다른데 그 이유는
항일무장투쟁이 이념적 당파성을 갖게 됨에 따라
최초의 시작은 국내 독립운동, 해외망명, 무장투쟁 등의 노정을 걷지만~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사상과 노선이 달라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으로 나누어졌다.
이는 안타깝게 도 해방정국에서 통일을 저해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①신숙(申肅 1885~1967)
강재(剛齋) 신숙(申肅)은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1903년에 동학에 입교하여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에서 근무하면서 김남수, 김남규 등과 청파동에 문창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진력하였는데 이봉창 의사가 이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19년 2월 27일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사장 이종일의 지휘 아래 김영륜과 함께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 작업을 맡았고 1920년 봄 극비리에 신상태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북만주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였고, 1930년에는 홍진, 지청천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민본정치의 실현, 노본경제의 조직, 인본문화의 건설’ 등 3대 강령과 정치이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독립당의 무장 부대인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7년 천도교 보국당 대표로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8년 민족자주연맹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4월 11일에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의 연락원 자격으로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까지 다녀오는 등 남북분단 저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자유당 시절에는 민주혁신당 중앙위원장, 민권수호국민 총 연맹 대표지도위원, 광복동지회 부회장으로 독재정권과 투쟁하였고 1960년 4․19 혁명 직후에는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으나 갑작스럽게 중풍으로 쓰러져 끝내 완치되지 못하고 1967년 가회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②김도연(金度演 1894~1967)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은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태극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교사들로부터 민족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한글학자인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게 되었으며 이 같은 인연으로 훗날 ‘조선어학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었습니다. 1913년 일본 유학시절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일제 경찰의 감시와 미행을 피하며 비밀리에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하여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역사적인 2.28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일제는 1942년 <조선어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던 조선어학회를 해체하려고 함흥학생사건을 조작하여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사업에 협조한 사람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는데 당시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있던 상산은 1942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으며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하였습니다.
③서상일(徐相一 1887~1962)
동암(東庵) 서상일(徐相一)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으며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광복 후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설하고, 총무에 선임되었습니다. 이후 한민당을 탈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48년 초대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56년 진보당 전국추진위원 대표자 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했으나 서상일이 고사해 나중에 박기출로 바뀌고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결성운동을 추진했으나 조봉암과 의견충돌로 진보당 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1962년에 사망했습니다.
④김창숙((金昌淑 1879~1962)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으며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한 탓에 앉은뱅이가 되었는데 그래서 자칭 벽옹(躄翁)이란 별호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심산은 전국단연동맹회 성주 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 마련에 앞장섰으나 그것마저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자, 성주지방에서 모은 단연금을 기금으로 자신의 선조인 동강 김우옹을 모신 청천서원에 성명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심산은 모친의 병환 때문에 상경을 미루다가 3.1 독립선언에 참여할 기회를 놓쳐, 결국 3·1 독립선언이 유교계 인사들이 빠진 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대표로만 발표되자,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빠진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하고 전국의 유림 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상해로 가, 이를 영문으로 번역 인쇄하여 우편으로 파리강화회의, 각국 대사, 공사, 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과 한인 동포에게도 보냈습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만주 동삼성 일대에 한인 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 장년을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 하는 독립전쟁방략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첫 사업으로 자금을 유자명에게 주어 폭탄과 권총 등 무기를 구입하여 천진에서 나석주를 만나 이를 전해주면서 국내에 잠입하여 거사를 단행하도록 하였는데 나석주는 식민수탈기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권총으로 일본인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마지막 남은 한 발의 탄환으로 자결하였습니다.
심산은 광복 후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민주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반탁 민주운동에 헌신하였고 1946년에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도회 총본부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성균관대학을 재건하여 학장, 총장을 역임하면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1962년 8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습니다.
⑤김병로(金炳魯 1887~1964)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는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8세의 나이로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채상순 등 5~6명의 포수와 함께 가담하였고, 고정주가 설립한 창흥의숙 고등과 속성과정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서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과 어울리며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변호사가 되면 첫째 아무리 일본 경찰이라도 변호사를 쉽게 폭행하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둘째 변호사 수입을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고, 셋째 공개 법정에서라도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옹호와 사회방위를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가인이 맡았던 ‘시국사건’은 1921년 보합단 사건, 1923년 김상옥 의거, 제2차 의열단 사건, 1926년 6.10 만세 사건, 1927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고려혁명당 사건, 정의부 사건, 1928년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 1929 대구학생 비밀결사 사건, 통의부 사건,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수원고등농림학교 흥농사 사건, 1931년 제3차 간도공산당 사건,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등이 있으며 또 안재홍(1928), 안창호(1932)와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변호도 맡았습니다.
1946년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기초위원회 위원, 미군정청 사법부장, 1947년 사법부 내 6인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48년 8월 5일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파 처벌을 놓고 갈등을 빚게 됩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 관장을 맡아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강한 의지를 보이며 반민족행위자들의 처벌이 민족적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 공정한 재판을 강조하였으나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을 때 이를 거부하였으며, 1950년 골수염 치료를 위하여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고 1957년 대법원장에서 정년퇴임하고 1964년 자택에서 78세를 일기로 운명하였습니다.
⑥양일동(梁一東 1912~1980)
현곡(玄谷) 양일동(梁一東)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30년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중동중학교를 퇴교당하고,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민탁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1935년에 일제에 잡혀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일본 이치타니(市谷)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복역 2년 8개월 만에 신병으로 가석방, 고국으로 압송되어 광복 때까지 향리에서 농촌운동과 농민교육에 종사하였다가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면서 정치에 입문하여 자유당 때에는 야당계 무소속으로 민주당과 함께 반독재운동을 하였고 5·16 군사쿠데타 후에는 구 신민당의 원내총무, 정무위원 등을 지냈습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당선에 이르기까지 5선 의원을 지냈고, 두 번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정지당하였고 1967년에는 <정치정화법> <반공법> 등의 위반으로 투옥되었으며 1973년 동경에서의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 때에는 참고인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1971년 신민당 주류의 유진산과 결별하고 1973년 통일당을 창당, 당수로 있으면서 신민당의 반체제운동에 동조하는 제2야당의 구실을 하였으며, 비록 재정적인 어려움과 원내 세력의 미미함 때문에 통일당의 존재감이 없었지만, 신민당과 합당의 길을 모색하였고 그것이 성사되지 않자 재야 반체제 세력과의 합작으로 제3당의 출현을 보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0년에 사망하였습니다.
⑦유림(柳林 1894~1961)
단주(旦洲) 유림(柳林)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유화영, 별명은 고상진으로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이어서 서당 교육을 받았는데, 경북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를 다녔습니다. 1919년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을 동반하고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으며 이곳에는 1911년 망명한 이상룡과 김동삼 등 안동 출신의 스승과 선배들이 이회영을 비롯한 신민회 계열 인물들과 주축을 이루어 경학사, 신흥강습소, 부민단, 서로군정서로 이어지는 항일조직을 결성하여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920년 여름에 유학을 위해 상해로 갔고, 거기에서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북경으로 옮겼으며 북경에서 신채호, 김창숙을 만나 당시 신채호가 주관하던 잡지 <천고(天鼓)>의 발행을 도왔고 이 무렵 한창 아나키스트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던 신채호로부터 아나키즘을 접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나키즘(anarchism)에 대하여 “무정부라는 말은 아나키즘이란 그리스 말을 일본 사람들이 악의로 번역하여 정부를 부인한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것 같다. 본래 ‘안(an)’은 없다는 뜻이고 ‘아키(archi)’는 우두머리, 강제권, 전제권 따위를 의미하는 말로써 ‘anarchi’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강제적 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 정부를 배격하지, 자율 정부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렇게 볼 때 일제 시기 아나키즘은 강제적 식민지 권력을 부정하는 독립운동 이념으로 기능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일제 경찰에 쫓긴 대다수 학생이 만주로 탈출해 왔으며 이에 1929년 말부터 이듬해 체포될 때까지 단주는 4백 명이나 되는 학생을 수합하여 의성학원(봉천중학)을 창립하여 한인 유학생의 중국학교 입학을 알선하면서 직접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의성학원 운영에 몰두하고 있던 단주는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직후인 10월 초에 조선공산무정부주의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만기 출소하였습니다.
환국 이후 선생은 외세를 배격하면서 자주적 통일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독립노농당을 결성하고 ‘노농신문’을 창간하여 노농 대중의 계몽과 권익 보호에 힘쓰던 중, 1961년 68세를 일기로 영면하였습니다.
⑧이시영(李始榮 1869~1953)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은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으며 명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으로 서울에서도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입니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되고 있었던 상황으로 이것을 막아야 한다고 작정하고,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성재는 교섭국장직을 사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제순 집안과 절교를 선언하였습니다.
이때 신민회 지도자들은 계몽운동만으로 독립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계몽운동에 의병항쟁의 방략을 도입하였는데, 의병처럼 준비되지 않은 전투가 아니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밀고 나가기 위한 군사력 양성을 도모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전략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하여 일제가 강제 합병하기 전부터 만주지역을 조사하였고 그런 준비가 있었기에 만주로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재는 형제들과 더불어 가산을 처분하고 1910년 말 서간도로 가서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정착하여 교육 진흥 및 독립군 양성을 표방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전자는 동포사회의 자치기관이요 후자는 인력양성기관이었습니다. 경학사의 기능은 부민단과 한족회로 계승, 발전되었고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되어 독립군 기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는데, 이때 경학사 초대 사장은 이상룡, 신흥강습소 초대 교장은 이동녕이 추대되었으며, 1920년의 청산리대첩의 승리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누리던 온갖 특권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망명길에 올랐던 이시영 일가의 헌신적인 노력이 하나의 결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 제1진의 한 사람으로 환국하였으나 넷째 형 이회영은 아나키스트가 되어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옥중에서 순국했으며 나머지 네 형제도 중국 전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세상을 떠났으니 만주로 떠났던 6형제 중 혼자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성재는 세 가지 일에 힘을 쏟았는데 하나는 정치활동으로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으로 활약한 것이고 둘째는 종교활동으로 성균관 총재를 맡은 것과 대종교 활동에 진력한 것이고 셋째로 교육 운동에 앞장섰는데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 양성에 착수하였으니,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을 설립하고 신흥전문학관으로 발전시켜 1, 2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51년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 혼란과 사회 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를 떠났고 다음 해인 1952년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습니다.
⑨신익희(申翼熙 1894~1956)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는 1894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나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유학하여 독립운동의 전위가 될 유학생들을 결속시켰는데 정세윤, 송진우, 문일평, 안재홍 등과 함께 유학생의 통일조직으로 ‘학우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발행된 <학지광>의 주필, 총무 등을 맡아 유학생들은 물론 국내 청년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습니다. 1919년 서울에서의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여 제자인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의 강기덕과 연희전문학교의 한창환 등과 연락하여 3월 5일 남대문역, 서울역 앞 만세시위를 진두지휘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되어 3월 14일 농사꾼 차림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상해에 도착한 해공은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이에 적극 동참하여 이시영, 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성안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과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거쳐 선포되었습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 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를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하였고 이 와중에서도 1946년 국민대학을 설립하여 민족국가 건설의 동량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을 발행하여 민족 자주성을 함양하였습니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초대 국회 부의장과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선거운동에 주력하다가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 하였습니다.
신하균(신익희의 아들)
신하균(申河均)은 호를 평산(平山)이라 하였는데, 이는 그의 본관 평산에서 따온 것으로 독립이 불확실하다고 내다본 부친인 신익희가 나중에 죽더라도 본관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아들의 호를 평산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평산은 1923년에 모친과 함께 상해로 부친을 찾아가 공부를 하면서 독립운동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중국에서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였고 중국 중앙은행의 과원조장, 신탁국 조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귀국하여 아버지의 정치활동을 보좌하였으며 이후 민주국민당에 입당한 이래, 민주국민당과 민주당, 신민당에서 정치활동을 하였고 1956년 8월 23일, 아버지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경기도 광주군 제3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었고 이어서 제5대, 제6대 국회의원도 지냈습니다.
⑩이준(李儁 1859~1907)
일성(一醒) 이준(李儁)은 북청군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서 협성회를 조직하였고 독립협회 평의원에 피선되어 ‘독립신문’ 간행, 독립문 건립을 주도하고, 개화파가 몰락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와세다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였습니다. 1904년 일제가 송병준 등 친일분자로 일진회를 조직하여 매국 활동을 시작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윤하영, 양한묵 등과 함께 공진회를 조직, 회장에 선임되어 반일진회 투쟁을 벌였습니다. 1906년에는 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펼치고, 전 재산을 투척하여 돈화문 근처에 야학인 보광학교를 설립하여 청년계몽운동을 하였으며 오상규, 유진호, 설태희 등과 함께 고향인 함경도에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여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1907년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밀리에 고종을 만나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으며 특사로는 정사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개월간 개최되었는데 3명의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제출하고 한국의 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 대표의 노골적인 방해로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일성은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연일 애통해하다가 1907년 음력 7월 14일 한을 남긴 채 순국하였습니다. 일성의 유해는 순국 3일 후 헤이그 공동묘지에 임시 안장하였고, 같은 해 일제 통감부에서는 궐석재판으로 이상설은 처교(處絞), 이위종과 이준은 종신형을 선고하였으며 선생의 유해는 순국 후 55년 만인 1963년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국민장을 치른 후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11) 서상일(徐相一 1887~1962)
동암(東庵) 서상일(徐相一)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으며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광복 후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설하고, 총무에 선임되었습니다. 이후 한민당을 탈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48년 초대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56년 진보당 전국추진위원 대표자 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했으나 서상일이 고사해 나중에 박기출로 바뀌고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결성운동을 추진했으나 조봉암과 의견충돌로 진보당 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1962년에 사망했습니다.
상호가 "단군산장"이다.
닭백숙이 맛있어 유명해진 식당이라고...
이곳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입맛이야 호불호가 있으니 그렇다 치고~
단군이라는 이름을 쓰는 게 맞는지 웃고프다.
애국선열 성재 이시영 선생 묘
이준열사 묘소 입구.
둘레길에서 조금 벗어나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서슴지 안고 방향을 바꾼다.
그런데 홍살문이 설치되어 있는 게 맞는지 궁금하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죽는다 하며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산다 하는가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다.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못하고, 잘 죽으면 도리어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다."
-이준 열사의 말씀-
이준 열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했다.
아래는 고종황제가 수여한 헤이그 특사 임명장이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중), 전 평리원 검사 이준(좌), 전 주러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우).
1 고종,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 전쟁 도발 이후 한국을 ‘병합’ 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구미 열강이 일제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도록 조처한 뒤, 1905년 11월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해 ‘보호국’으로 삼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 조약을 인준하기는커녕 국제사회를 향해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1905년 11월 26일 고종은 헐버트(Hulbert, H.B)를 통해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긴급 전문을 미국 워싱턴으로 보냈지만, 미 국무성은 헐버트의 전달을 묵살했다. 고종은 전 주한미국공사 알렌의 귀국 때 은사금으로 1만 달러를 주며 미국정부가 열강과 공동으로 진상 조사를 벌이도록 교섭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미국정부의 입장이 일관되게 친일적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한 고종은 다시 세계열강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열강의 한국문제 개입을 호소하는 비밀외교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른 냉혹한 국제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제사회가 정의와 원칙에 따라줄 것이라는 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통감부 설치 이후 통치권이 시시각각 일제로 넘어가고 있다는 절박감 속에서 고종은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 특사단 파견을 통해 국제사회 여론에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했다. 원래 1906년 8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고종에게는 일본의 불법적인 국권침탈을 국제문제화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대한제국은 러시아가 주도하여 개최한 1899년 제1차 평화회의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1902년 2월 16일 자로 네덜란드 외무장관에게 평화회의 가입을 신청해 놓고 제2차 회의가 열리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6년 열리기로 되어 있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강대국들의 사정으로 1년 연기되어 1907년 6월 15일에 열리게 되었다. 그 사이 한국에 우호적이었던 러시아의 입장이 바뀌었다. 1906년 4월 3일 자 헤이그 주재 러시아 대사 차리코프가 네덜란드 외무성에 보낸 서한을 보면, 대한제국은 분명히 초청장을 발송한 47개국 중 12번째로 명단에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동아시아전략이 일본과 타협하는 쪽으로 반전되면서 1906년 10월 9일 주일 러시아공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헤이그 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을 불참시키겠다는 의사를 최종 통보했다. 러시아가 마침내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권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종에게는 여전히 평화회의 특사 파견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고종의 특사가 헤이그까지 가는 여정을 살펴보자. 먼저 이준은 고종의 위임장을 받고 1907년 4월 21~22일경 서울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4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다음, 바로 북간도 화룡현 서전서숙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상설에게 급전을 보냈다. 5월 14일경 이준의 전보를 받은 이상설은 이동녕, 정순만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순만의 주도로 그곳 한인들에게 모은 의연금을 전달받은 이상설과 이준은 5월 21일 비밀리에 시베리아열차에 탑승하여 6월 4일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주러공사 이범진의 아들로 프랑스 유학 경험이 있던 이위종과 합류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의 특사단에 내린 고종의 위임장에는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은 세계 각국이 인정한 바이고 각국과 조약을 체결했으니 열국 회의에 사절을 파견하는 것이 도리이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공법(公法)을 위반하여 외교대권을 강탈하여 열국과의 우의를 단절시켜 놓았다. 특사단은 헤이그 평화회의에 가서 우리의 고난을 피력하고 외교대권을 회복하기 바란다.”라고 적혀 있었다.
고종은 특사단을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도 친서를 보냈다. “대한제국은 러일 전쟁 이전에 이미 중립을 선언하여 세계가 중립국임을 다 알고 있는데 …… 일본이 1905년 11월 18일 늑약 이후 우리나라에 가한 모욕과 기만에 대해 심히 민망하던 차에 헤이그에서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평리원 검사 이준, 주 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위원으로 특파하여 일본의 불법 행위를 각국 위원에게 알리고자 하니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특사단은 러시아의 지원을 얻기 위해 15일간이나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며 교섭을 시도했지만 결국 니콜라이 2세를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러시아 외상 이즈볼스키는 이때 헤이그의 넬리도프(Nelidof) 평화회의 의장에게 대한제국 특사단에 협조하지 말라는 전문을 보낸 상태였다.
특사단은 할 수 없이 1907년 6월 19일 페테르스부르크를 출발하여 베를린에 들렀다가 평화회의가 시작된 지 10일이나 지난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하지만 평화회의 참석은 불가능했다.
한편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의 특사와 함께 고종으로부터 또 다른 특사의 임무를 받은 사람은 헐버트였다. 헐버트는 1907년 5월 8일 고종의 친서를 지니고 서울을 출발했다. 헐버트 일행은 5월 9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뒤, 고베를 거쳐 쓰루가(敦賀)로 간 뒤 배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떠났다. 헐버트에 대해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林董)는 네덜란드 주재 일본공사 사토(佐藤愛麿)에게 “제2회 평화회의를 이용하여 어떻게든 한국을 위해 일하려고 한다는 풍설”이 있다며 그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 알맞은 조처를 취하라고 지시하였다.
일본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던 헐버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역시 페테르스부르크로 향했다. 그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바로 헤이그로 가지 않고 독일, 스위스, 프랑스를 방문했는데, 베를린에서 영국 언론인 스테드(W.T. Stead)를 만나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여 그의 협력을 얻어냈다. 만국평화회의 협회 회보인 《평화회의보》편집을 주도했던 스테드는 이상설 등 한국 특사의 ‘공고사(控告詞)’ 전문을 게재해 주고 관련 논설을 실어 특사들의 활동을 자세히 보도해 주었다.
2 헤이그 특사의 활동과 각국 및 언론의 반응
1907년 6월 25일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의 특사는 헤이그에 도착했다. 국내에서 고종의 명을 직접 받아 출발한 것은 이준이었고, 헤이그 현지에서 열국 대표와 언론을 상대로 통역과 연설을 하며 현장의 외교활동을 펼친 것은 이위종이었으며, 특사단의 공식 대표는 이상설이었다.
특사단의 헤이그에서 활동을 살펴보면, 6월 25일 도착하자마자 헤이그 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방문하여 고종의 친서를 전달했다. 6월 27일에는 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대한제국 특사의 참석 문제를 제안했다. 이어 7월 1일에는 네덜란드 외상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이들의 접견은 거부되었다. 네덜란드 외상 후온데스는 각국 정부가 이미 을사늑약을 승인한 이상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회의 참석과 발언권 요청을 거부하였다.
다음은 공고사(控告詞, 선언서)의 작성과 전달이다. 6월 27일 특사단은 호소문을 프랑스어로 작성하여, 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 및 각국의 대표와 외신기자들에게도 전달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그 전문이 《평화회의보》6월 30일 자에 실릴 수 있었다. 그날 특사단은 다시 이를 평화회의장 앞에서 배포하는 과정에서 일행을 대표하여 이위종은 평화회의 본회의장 정문 앞에서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다. 이위종은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 “우리는 평화의 신을 찾아 그 제단이 있다는 헤-그까지 왔노라.”며 회의참석을 요구하였다.
특사단은 7월 9일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스테드가 주관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대한제국 특사의 회의 참석을 요청하면서 한국의 비참한 실정을 알리고 주권 회복에 원조를 청하는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를 절규, 청중의 공감을 샀다. 즉석에서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까지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인들은 항상 평화를 말하지만 어찌 기관총구 앞에서 사람들이 평화로울 수 있는가. 한국민이 모두 죽어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한국민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극동에 평화는 있을 수 없다. 한국 국민들은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 목표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한국 국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인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이기적인 침략에 대항하고 있다. 어떠한 행동을 해서라도 일본인과 싸우려고 결심한 2천만의 한국 국민을 대량 학살한다는 것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흥미 있거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The Independent》 Vol.63, No.3064, August 22.1907, New York)
대한제국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에 대한 각국의 반응과 입장은 어떠했을까. 1907년 7월 16일 당시 네덜란드 현지 신문에는 ‘평화의 왕’ 예수가 초청장이 없어 회의장에서 퇴장당하는 모습의 삽화가 게재되었다. 그 당시 열강이 한국 특사의 입장을 거부하고, 한국 특사의 간청을 냉랭하게 대한 태도를 사실적이고도 흥미롭게 보여주는 일면이다. 미국과 영국은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07.29.), 제2차 영일동맹(1905.08.12.)을 통해 한국에 대한 보호 권한을 일본에 허용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특사 활동에 냉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러시아의 입장이다. 러시아는 한국 정부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바라는 취지로 직·간접적으로 접촉해 왔다. 그러나 실제 헤이그에 한국의 특사가 도착했을 때 특사의 요청을 거부하고 외면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상반된 태도는 포츠머스 강화조약(1905.09.05.)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의 중재로 러일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한국과 관련해서는 한국 주권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이 문제는 다시 러일 간의 외교적 협상을 필요로 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진행 중이던 7월 하순 러·일 간에 별도의 협약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1차 러일협약은 조약 2개 조, 비밀협약 4개 조 및 추가조약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비밀협약 제2항에서 “러시아가 일본과 한국 사이의 현행 조약, 협약 관계를 승인하며 한일관계의 발전을 방해,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을사늑약에서 일본이 한국에 대해 강요한 보호권을 승인한 것으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애매하게 처리되었던 한국의 주권 문제를 일본에게 위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 길이 없는 한국 특사단의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의 행위는 모순되고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한국의 특사단이 이처럼 각국의 냉담한 반응으로 궁지에 처했지만, 동시에 이들을 후원하고 동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각국의 언론인이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영국 언론인 스테드였다. 스테드는 수차례 특사에 관한 기사를 신문에 게재했고, 여러 나라 언론인과 고위 인물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의 특사가 연설할 기회도 마련해 주었다.
3 헤이그 특사단 파견의 의의와 한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참석이 끝내 거부되자 비분강개한 이준은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이상설은 이준을 헤이그 공원묘지에 매장한 뒤 이위종, 헐버트 등과 함께 유럽 각국 순방길에 올랐다. 이들은 각국에서 만난 그 나라 원수, 정계지도자, 언론인에게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과 을사늑약의 불법성, 폭력성을 설파하며 한국의 독립 수호를 위한 국제 협력을 호소했다.
3인 특사의 이후 삶을 보면, 이준은 1907년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순국했고, 이상설은 해외에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3월 2일 연해주에서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이위종은 이상설과 헤어진 후 러시아로 돌아가 활동하였던 것으로 추정될 뿐 뚜렷한 행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 한 명의 특사였던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가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사정을 미국에 소개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꿈에도 그리던 한국을 방문했으나 노령과 여독이 겹쳐 수일 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현재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제국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강대국 간의 군비제한을 통한 세력균형과 식민지 쟁탈을 목적으로 개최된 것이다. 일본에게 외교권마저 유린당한 한국의 특사 일행이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처음부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만국공법 조항에 의거하여 을사늑약 체결의 불법성을 설득하려 했던 고종의 특사 외교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종이 조약체결 과정의 불법성에 대한 열강의 공동진상 조사 및 무효 승인을 요구하고 나아가 한시적인 열강의 공동 보호를 요청하거나 국제 중재재판소에 제소하는 법률적 해결까지 모색한 것은 ‘국제적인 룰’을 따르는 것이었으나, 정작 국제 사회는 자신들이 만든 그 ‘룰’을 철저히 외면했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한 고종과 측근의 만국공법 인식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시대에 맞는 것이라기보다는 ‘신의’와 ‘공론’을 중시하는 전통적 국제질서에 입각해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나 평화회의를 개최한 국제사회는 정의가 아닌 ‘힘’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였고, 보호국으로 전락한 대한제국이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보호국에서 벗어나는데 만국공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일본이 약소국인 대한제국 주권침탈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당당히 폭로한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의 의의는 첫째, 19세기말 20세기 초 이제 막 태동한 국제사회에 약소국이 참여하는 방법과 절차에 대한 문제제기였고 둘째, 세계 평화를 목표로 하는 평화회의가 실제로는 강대국 간의 이해타산과 밀실 흥정에 의해 작동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국가 간에 발생하는 갈등을 과연 국제법이 중재하여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엄중한 현실적인 한계를 지적했다.
이런 냉혹한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질서 하에서 일본은 오히려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권좌에서 밀어내고 대한제국을 직접 경영하고자 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7년 7월 7일 외무대신 하야시를 통해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전보를 보내어, 고종의 밀사 파견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대해 공공연히 적의를 표현한 것으로 이는 명백히 조약 위반이므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선전포고할 명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향후 일본정부가 취할 방책에 대해 원로대신들과 숙의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대한제국 정부 총리대신 이완용과는 이미 고종 양위문제를 거론했다고 보고했다.
이런 와중에 대한제국 내각에서는 이완용과 송병준이 앞장서서 황제 폐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 측이 정권 위임이나 합병을 요구하기 전에 황제가 알아서 양위로써 사죄하는 것만이 대한제국이 살길이라는 주장이었다. 7월 16일 내각회의에서 마침내 황제 폐위가 결정되었고 이완용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7월 18일 황태자 대리 조칙이 발표되었고 7월 20일 서둘러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즉위했다. 이어 7월 24일 한일 신협약(정미 7 조약)을 체결하고,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을, 29일에는 집회,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연이어 공포했다. 7월 31일에는 군대해산 조칙이 내려졌다. 이제 대한제국은 외교, 내정, 군사권을 모두 잃게 되었다.
그 당시 열강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미국이나 영국 등 여러 나라가 아프리카, 중동, 남태평양의 여러 국가들을 합방하지 않았는가?
대륙으로의 침범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은 그런 침범국가들의 허락 아래
조선과 중국, 러시아에 총부리를 겨눴다.
그들은 그렇게 여러 나라와 민족을 고통 속에 빠트렸다.
이제라도 남북 평화통일되어 강한 코리아가 되어야 하는 데,
윤 거시기는 리얼돌인지? 마네킹인지? 구분도 안 되는 것과 뭔 법사를 되리고
러시아와 중국의 코털을 건드려 전쟁의 불씨를 키우고 있으니 억장이 무너 진다.
나라에 2찍과 아닌 사람이 반반 썩여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는 건가?
머나먼 이국 땅에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지도 못한 열사들의 막막함이 느껴진다.
해아 묘비 이전
이 묘비는 1907년 이준 역사가 네덜란드에서 순국대절하였을 때에
헤이그 묘소 앞에 처음 장원형의 묘표가 건립되었으며
그 후 1972년 네덜란드 정부의 협조로 대한민국 정부가
열사의 묘를 유적지로 지정하고 다시 기념비를 세웠던 비이다.
1977.10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열사의 묘역을 확장 재정비하여
새로운 큰 묘비와 흉상을 건립함에 따라
1972년에 세웠던 이 묘비를 외무부 주선으로 1976.6에 이곳으로 옮겨 왔고
원호처의 지원과 학교법인 해청학원 영동고등학교 이영목 이사장의 독지로
7.14 열사의 순국 제71 주기를 기하여 원상 그대로 세웠다.
13:58 3구간 흰구름길
이준열사묘역 입구~북한산생태숲 앞 4.52km/2h17m
(이준열사묘역 왕복 0.45km/0h17m, 점심식사 왕복 2.15km/1h08m 미 포함)
흰구름길 구간은 이준열사묘역 입구부터 북한산생태숲 앞까지 4.1km에 이른다.
국립공원 경계를 따라 울창한 숲과 아담한 오솔길을 걷다 보면 구름전망대가 나온다.
북한산둘레길 중 유일하게 12m 높이의 구름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산 정상에 올라가지 않아도 북한산 (북한산, 도봉산)의 경관과 서울도심,
그리고 멀리 수락산 등을 구름 위에서 조망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빨래골 계곡은 물이 맑고,
조선시대 궁녀들과 인근 주민들의 빨래터 겸 쉼터로 이용되었다.
지방 선비들이 한양 과거 길에 나설 때는 우이령을 넘어 이곳에서 손발을 씻고 한양으로 들어오기도 하였다.
길을 잘 관찰해야 알바를 모면한다.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인가?
칼바위 능선 코스인데 위험한 곳인가 보다~~
기존노선은 안 가봐서 모르겠고~
우회노선은 산을 꽤 올라야 한다.
표시목에 안내문구가 너무 많아 헷갈린다~~
구름전망대
5분 여 정도 가랑비가 쏟아진다.
북한산과 도봉산 조망이 아쉽다.
불암산과 수락산 방향도...
15:22 빨래골공원지킴터를 지나고~~
4구간 샘길
북한산생태숲 앞~북한산국립공원 정릉주차장 1.55km/0h31m
솔샘길은 2.1km 거리로 짧다.
사진 찍어 놓은 게 없어 펌~~
북한산생태숲
산에 오면 테니스 치고 싶고~
테니스 치고 있으면 산 생각나고...
시내 들어서는 전봇대 상부를 잘 봐야 길을 놓치지 않는다.
16:27 북한산국립공원탐방안내소
16:33 5구간 명상길
북한산국립공원 정릉주차장~형제봉 입구 1.08km/1h08m
(형제봉 입구~국민대학교 앞 0.63km/0h31m 미 포함)
명상길 구간은 북한산 정릉탐방 안내소를 지나 정릉주차장에서 청수사 입구로 진입해 형제봉 입구까지 2.4km에 이른다. 정릉동 쪽의 주된 북한산 탐방코스인 대성능선탐방로와 형제봉능선 탐방로 사이의 계곡, 능선 길을 경유하는 구간이라 다소 힘들기도 하지만 오르막 길을 지나 서서히 등장하게 되는 호젓한 참나무 활엽수림에 접어들게 되면 어느새 식어버린 땀마저 여유롭게 느껴진다.
이 구간은 그 간 군사보호시설에 의해 통제되다 최근에 개방된 ‘북악(산)하늘길’ 입구와 연결되어 있다.
백두대간에서 한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북한산의 혈류(血流)를 잇는 의미 있는 구간이기도 하며,
북악(산) 하늘길에서는 1.21 사태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다.
또한, 청수장 건물을 그대로 살려 2001년에 개소한 북한산 탐방안내소 견학을 통해 국립공원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폭넓은 정보 또한 얻을 수 있는 구간이다.
문수봉과 칼바위 능선.
2018년 11월 11일 불수사도북 3구간에서
우이역-하루재-영봉-백운대-대동문-문수봉-승가봉-사모바위...불광동
2018년11월 25일 와라바라산악회에서
불광역-족두리봉-향로봉-비봉-사모바위-문수봉-보국문-칼바위능선-문필봉-국립재활원
이렇게 두 번 왔었는 데, 가물가물하다.
기억 없는 것 당연한 건가?
17:37 "북악산 갈림길" 표시목
※ "북한산 둘레길 둘째 날"에 알바한 이유를 알게 됨.
표시목에서 '북한산 둘레길(평창동)" 방향으로 10m 가면 평창동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데~
시간도 늦고, 날씨도 흐리고, 춘천까지 가야하는 압박감에 서둘러서
안내표시를 대충보고 "북한산 둘레길(수유동)" 방향으로 가야하는 줄 알고
방향을 잡았는 데, 정작에는 북악하늘길로 향하였음.
"북한산 둘레길(수유동)"에서 걸어와 놓고...
여기는 국민대로 내려가는 알바 코스다.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예측컨대 "형제봉 입구"에서 좌회전했어야 했는 데~
극 좌회전을 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앞장 섰으니 남탓 할 수도 없고...
소신은 분명한 원칙과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반면 고집은 철저한 자존심에 의존한다.
그래서 소신불통은 없고, 고집불통은 있다.
어찌 이런 일이, 멘붕이다~~
내부 순환로 정릉터널
18:05 국민대학교 앞에서 북한산 둘레길 첫 번째 트래킹이 마무리된다.
기억에서 잊혔던 근현대사를 다시 공부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다만 평창동으로 하산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뭐 어쩌겠는가? 다시 올라갈 수도 없고...
일주일 후에 인디언바위를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았는가?
"형제봉 입구"에서 알바한 계기를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고...
종주를 한다는 건 기대감이다.
다음에는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 새로움의 연속이다.
일주일 후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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