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와~ 저기가 북한이라구요?"
정전협정 이후 금단의 땅이 된 DMZ 접경지
자유·평화 의미 새기는 'DMZ 자유평화대장정'
6기 70명, 강원 고성에서 94km 대장정 첫 발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출정식…금강산이 눈앞에
금강산 관광객 머물던 금강산 콘도가 첫 숙박지
전국에서 온 참가자들 사연도 각양각색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휴전선과 남북 군사 분계선. 정전협정 이후 70년간 이완을 거듭하며 이어진 남북 대치와 긴장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금단의 땅이 되었다.
금단의 땅 이남 접경 지역도 이 영향으로 개발에서 소외된 채 '변하지 않는 옛 것'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이런 영향으로 생태계가 그대로 보전되고 있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휴전선을 기점으로 그 아래 2km는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5~20km까지는 민간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민간인 통제선이다. 남북의 산과 들, 강과 하천을 가로지르는 철책선의 길이는 약 248Km로 서울에서 대구까지 직선거리보다 길다.
통일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땅. 금강산과 해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류효림 인턴기자
전운이 가시지 않는 속에서도 군사작전에 지장을 주지 않는 지역을 따라 DMZ 걷기 길이 만들어 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길의 길이는 524km. 하루에 꼬박 13.1km씩 40일을 걸어야 완주할 수 있는 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의 길이에는 못 미치지만 완만한 평지인 산티아고 길에 비해 산과 강이 어루어지고 마을마다 전쟁의 비극과 제 각각의 얘깃거리를 품고있는 소중한 문화관광자원이다.
국방부와 행안부 등은 지난 7월부터 DMZ 524km를 걸으며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온 국민이 향유하도록 자유·평화 대장정을 시작했다. DMZ 평화의 길을 따라 걸으며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돌아보자는 취지다.
인구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접경지역의 경제 활성화라는 숙제를 풀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1차부터 6차까지 진행한 대장정. 이날 올해 마지막인 6차 원정대 발족식을 시작으로 힘찬 첫걸음이 시작됐다. CBS 노컷뉴스 인턴 기자 2명이 6박 7일 전 과정을 동행하며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고을마다 서린 얘깃거리를 생생하게 소개한다. 이번 대장정은 524km 중 94km를 걷고 나머지는 버스로 이동한다.
13일 오전 7시 30분 DMZ 대원들이 종합운동장 역에 모여있다. 박영규 인턴기자
막오른 대장정…통일전망대에서 북녘을 바라보며 평화를 염원
오전 7시 30분. 종합운동장역 1번 출구에는 이미 DMZ 자유 평화 대장정을 떠날 채비를 마친 수십 명의 원정대원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두새벽부터 모이느라 미처 끼니를 챙기지 못한 대원들은 탑승 전 관계자들이 준비한 떡, 음료수 등의 간식을 받아들고 버스에 탑승했다.
민간인통제선을 넘나드는 DMZ 평화의 길에 대한 기대와 긴장감 속 약 3시간 반을 내달려 도착한 고성통일전망대에서 DMZ 자유 평화 대장정 6기 출정식이 진행됐다.
고성통일전망대 1층 너머 바로 북한이 보인다. 관광객들이 금강산과 해금강을 바라보고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
전망대에 오르니 저 멀리 왼쪽으로 금강산이 보였다. "저기가 북한이라고요?"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산 꼭대기에 위치한 국군과 북한군 초소까지 선명하게 보이자 관광객들의 탄성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좌측으로는 금강산이 우측으로는 북한이 품고 있는 해금강이 펼쳐져 있었다. 해(海)금강은 바다의 금강산을 뜻하는 말로, 금강산의 기이한 봉우리를 바다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통일전망대에는 사진 촬영 구역을 일일이 설명하고 통제하는 군인들의 발길이 바쁘게 이어졌다. 철책 촬영과 군인들의 모습, 초소 등과 같은 군사 기밀 시설들의 촬영은 일체 금지됐다. 금강산 인근 산봉우리에도 국군 초소가 있어 촬영이 불가했다.
"저기 보이는 곳은 구선봉입니다"
관계자의 설명에 일제히 바라본 곳에는 바다 너머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 구선봉이 보였다. 육안으로도 한 눈에 확인 가능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지만, 대한민국 국민에게 정전 이후 70년 간 결코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이었다.
바로 앞에 길게 늘어진 군사 철책에서 새삼 한반도가 분단 국가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철책 너머 펼쳐진 풍경은 철책 남쪽 우리가 사는 곳의 풍광과 다르지 않은 것이어서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전망대 1층과 2층에는 각각 남북한의 통일을 염원하는 관람객들의 메시지가 담긴 게시판이 있었다. 한반도가 그려진 화이트보드를 가득 메운 검은색의 글씨들은 어지럽지만 '평화'라는 하나의 염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포스트잇도 같은 마음인 듯 했다.
저마다 다른 사연 안고 모인 대원들…어디에 닿을까
이날 고성통일전망대에서 출발해 명파해변을 끼고 숙소 금강산콘도까지 약 5km를 걸었다. 금강산콘도는 금강산 관광이 자유로웠을 당시 금강산 육로 관광객들의 집결지였다. 관광객들은 여기서 하루를 묵고 새벽같이 북으로 향했다. 하지만 2008년 이후 관광이 중단되며 발길이 뜸해졌다.
첫날 일정은 6박 7일의 대장정 가운데 가장 적은 거리를 걷는 날이다. 걱정과는 달리 따뜻한 날씨에 대원들의 발걸음도 가벼워보였다.
원정단 대표로 선서문을 낭독한 제해승(28) 씨는 지난해 해파랑길(부산 오륙도~고성 통일전망대)에 이어 올해는 DMZ 평화의 길에 올랐다.
출발에 앞서 제 씨는 "지난해는 취준생이라 머리를 식히고 생각을 정리하러 왔어요. 올해는 직장인이 되어 참석하게 돼 감회가 새롭네요. 이번엔 바닷길이 아니라 산길 위주일 테니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게 기대됩니다"라며 미소 지었다.
전상헌(64) 씨는 서해랑길(전라남도 해남~인천 강화), 해파랑길(부산~고성), 산티아고 순례길을 모두 경험해 본 '순례길 마스터'다. 전 씨는 한 시간 너머를 걸으면서도 지친 기색이 하나 없었다. 전 씨는 "9년 전부터 걷기 시작했어요. 걷기 카페도 운영하고 있고 하루에 10km씩 걸어요"라며 걷기 사랑을 드러냈다.
이어 전 씨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참 많이 반성해요. 펑펑 울면서 걸은 적도 많아요"라며 자연을 통해 인생을 반추한다고 말했다.
평소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A씨는 "일반인이 갈 수 없는 곳을 단체로 간다는 경험이 귀하다고 생각해 지원했어요"라며 "무사히 여기에 있는 모든 인원이 잘 안전하게 도착을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전했다.
이희재(62) 씨는 지난 주 추가 합격 통지 연락을 받고 원정대에 합류했다. 70명의 DMZ 자유 평화 대장정 6기 원정대원들은 전국에서 모였다. 주최측에 따르면 참가 인원 70명을 뽑는데 340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1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이 씨는 "정년퇴직 후 올해 DMZ 평화의 길이 완공됐다는 소식을 듣고 흥미를 가지던 차에 대장정 모집 공고가 떠 지원하게 됐어요"라며 "평일 낮인데도 통일전망대 관광하러 오시는 분들이 많아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예상보다 통일·안보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고 느꼈어요"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 씨는 이어 "내일부터는 접경 지역과 가까운 곳으로 가게 되는데, 개인이 오갈 수 없는 곳이라 기대 됩니다"라고 덧붙였다.
②천오백년 역사 품은 건봉사…분단 70년 상흔 곳곳에
정전협정 이후 금단의 땅이 된 DMZ 접경지
자유·평화 의미 새기는 'DMZ 자유평화대장정'
조선 4대 사찰 건봉사에서 소똥령마을 9km 행군
건봉사, 화려했던 역사 지녔지만 발 길 뜸해져
정겨운 이름의 '소똥령마을'…언제 다시 북적일까
대표 항일 시인 만해 한용운, 인제에서 다시 숨쉬다
14일 DMZ 자유 평화 대장정 이틀 차 아침이 밝았다.
건봉사를 시작으로 소똥령마을과 용대삼거리를 거쳐 만해마을까지 약 15km를 걷는 여정이 곧 시작된다. 원정대가 아침부터 분주하게 이동한 곳은 휴전선 이남 최북단의 사찰, 강원 고성군의 건봉사다.
조선 4대 사찰 건봉사, 쓸쓸하지만 고즈넉했다
건봉사의 관문인 '건봉사불이문'. 한국전쟁 당시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건축물이다. 박영규 인턴기자
본격적인 원정에 앞서 건봉사를 둘러볼 시간이 주어졌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남쪽 끝자락 자리하고 있는 건봉사는 6세기 서기 520년 신라 법흥왕 시기, 고구려의 아도 스님에 의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건축된 천년고찰이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병을 조직해 훈련한 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 4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큰 절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북부 강원도 지역을 대표하는 31 본산의 하나로 신흥사와 백담사, 낙산사 등을 관할했다.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건봉산의 주변 경관은 고성8경(건봉사, 화진포, 통일전망대 등 고성군에서 선정한 진풍경)에도 꼽힐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있어 관광객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사찰내 대부분의 건축물이 소실됐다. 민통선(민간통제선) 안에 있어 군부대의 검문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금기의 땅이다. 남북 분단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건봉사~송강마을 민통선 구간 6km에 도로 통행이 허용돼 군부대 검문 없이도 건봉사를 방문할 수 있다. 또한 극락전, 대웅전 등 일부 건물들이 복원돼 전국의 불교 신자들과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건봉사 대부분의 건축물은 소실됐다. 역사의 향기를 느끼기에는 뭔가 어색하고 부족함이 진한 여운으로 승화되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다.
버스에서 내려 건봉사 절터로 들어가자 '건봉사불이문'이 대원들을 맞이했다. 건봉사불이문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로 1920년 세워졌다.
14일 건봉사 내 극락전과 대웅전을 연결하는 다리 능파교. 한국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고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대장정 대원 이도훈 씨 제공
이어 극락전과 대웅전, 능파교 등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며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극락전 지역과 대웅전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인 능파교 역시 한국전쟁 당시 피해가 거의 없어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있다.
아름다운 자태에 비해 드문 인적은 관광 명소로서 발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고즈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어 여유를 즐기고 싶은 관람객들에게는 제격이었다.
소똥령마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길지 않은 건봉사 관람이 끝나고 본격적인 걷기가 시작됐다. 소똥령마을은 동해안 최북단 고성군 장신2리로, 이 마을은 본래 이름보다 '소똥령마을'이라는 별명이 훨씬 유명하다.
계곡 옆으로 길게 이어진 마을이라는 뜻의 장신리를 두고 별명을 쓰는 이유는 마을의 역사와 닿아 있다.
옛날 주민들이 인제 원통으로 소를 팔러 갈 때면 능선을 넘다 이 마을 주막에서 쉬어가곤 했다. 이때 주막마다 쇠똥이 수북이 쌓여 자연스레 마을 이름이 소똥령이 됐다고 한다.
정겨운 마을에도 분단의 역사가 서려 있다. 지금은 전체가 50가구도 되지 않는 작은 동네지만, 1960년대에는 3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당시 무장공비 침투가 잦아 군인 가족이 많이 이주했기 때문이다.
한때 마을에는 초등학교까지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휴전선 전방이 안정되고 군인들도 하나둘 떠나면서 학교도 문을 닫았다. 오고 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이 마을도 이제 조용해졌다. 걷는 동안 주민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14일 오후 DMZ 자유평화대장정 대원들이 소똥령마을로 향하고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
건봉사에서 소똥령마을까지는 약 9km 거리다. 험준한 산길을 거쳐야 해 대원들이 발을 헛디디기도 했다. 전날에 비해 두 배 이상이나 되는 길을 걸으면서 물집이 잡혔다. 대장정 이틀 만에 몸이 힘들어 한다는 신호가 온 것이다.
아스팔트 길이라 더 힘들다는 말이 여기 저기서 들려왔다. '포기하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하지만 "나만 힘든 것 같아". 기자 앞의 한 대원의 작은 소리를 들었을 때 꼴찌와 낙오의 두려움을 비로소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약 한 시간마다 4km를 걷고, 4km마다 10분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대원들은 그제야 길가에 짐을 내려놓고 쉬었다. 어떤 이들은 가져온 간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낮 12시가 다 되어서야 천신만고 끝에 소똥령마을의 한 식당 어귀에 닿았다.
만해 한용운의 흔적을 찾아서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의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가 누군지 알아요?" 한 대원이 취재진에게 불쑥 물었다.
'만해', 우리에게는 '님의 침묵'이라는 기념비적인 시로 잘 알려진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인 한용운 선생의 호다.
점심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여정, 최종 목적지인 만해마을까지는 아직 6km가량이 더 남아 있었다. 만해마을은 한용운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으로, 만해문학박물관, 문인의집, 청소년수련시설(설악관, 금강관), 만해평화지종 등 10개 시설로 구성돼 있다.
몸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무거웠던 오래 걸었음에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만해마을에 가까워질수록 한용운 선생의 흔적들도 속속 보이기 시작했다.
백담사.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만해 한용운은 이곳에 머물며 여러 저서와 시를 남겼다. 만해 한용운은 근대사 격랑의 회오리 속에서 민족의 기개를 일으킨 독립운동가다.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을 겪으며 민중이 무참히 쓰러져 가는 광경을 목격한 만해는 그의 나이 25세에 홀연 출가를 결심한다.
그의 발길이 처음 다다른 곳이 바로 내설악 백담사였다. 물론 만해가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백담사의 인지도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전두환, 이순자 씨 부부가 이곳에서 셀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절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전두환이 1995년 구속되자 부인 이순자는 다시 백담사로 갔지만, 당시 인제군 의원들이 "여긴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무른 곳이지, 죄인의 은둔지가 아니다"라며 항의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대장정 3일차인 15일에는 피의능선전투전적비를 시작으로 하야교과 두타연을 걷는다. 대장정 중 가장 힘든 코스로 약 20km를 걸을 예정이다.
③금강산까지 32km…그러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정전협정 이후 금단의 땅이 된 DMZ 접경지
자유·평화 의미 새기는 'DMZ 자유평화대장정'
양구전투위령비, 두타연 지나 이목정까지 14km 행군
두타연, 천혜의 자연과 전쟁의 아픔을 품다
씻기지 않은 전쟁의 상흔…곳곳에 지뢰와 철조망
치열했던 양구 고지전, 위령비 앞에서 넋을 기리다
태극기 감자전 출품돼 눈길 끌어…'과연 MZ!'
15일 오전 강원 양구군 비득검문소 앞, 원정대의 힘찬 구호 소리가 산기슭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오늘 원정대는 비득검문소 내 민간인 통제구역을 지나 양구전투 위령비와 두타연을 거쳐 '금강산 가는 길 안내소(구 이목정 안내소)'에 도착하는 일정을 수행한다. 총 코스 길이는 14km다.
출발 전 비득검문소에서 대한민국의 최전방을 지키는 국군의 인원 확인이 있었다. 민간인 통제구역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는 만큼 원정대원들의 정확한 인원 확인은 필수였다.
70명의 인원 파악이 끝난 후, 원정대는 양구전투 위령비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두타연, 천혜의 자연과 전쟁의 아픔을 품다
15일 오후 금강산 육로관광의 관문이었던 강원도 양구 두타연에 금강산 가는 길 표지판이 서 있다. 박영규 인턴기자
오늘은 14km를 오전에 몰아서 걸어야 해 양쪽 길가로 두 줄로 벌어져서 1.5배 더 빠르게 걸었다. 2열 종대로 걷던 그전 이틀과는 달랐다. 처음에는 긴 거리를 말도 없이 가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걷는 데에 몰두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걸으면서 국군장병에 대한 감사함을 가슴 깊이 느꼈다. 기자는 자진해 이곳에 참여한 것인데도 마음까지 힘들어졌는데, 추워지는 이 날씨에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우리 군인들의 노고를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민통선 안이라 행렬 앞뒤로 군 차량이 대동했기에 쉬는 시간 군인과 대화할 시간이 있었다. 이곳 군 장병들은 야간에 40km를 20~25kg 군장을 메고 행군한다고 했다. 민간인이 올 수 없는 곳, 아무도 몰라주는 곳에서도 고생하는 군인들을 보며 마음 한 켠이 찡했다.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양구 두타연은 수많은 총탄과 군인들의 피와 아픔이 녹아있었다. 곳곳에 지뢰 표지판과 가시철망이 있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몸소 느꼈다.
전쟁의 상처 위에 역설적으로 청정한 자연이 피어나고 있었다. 두타연은 멸종위기 야생생물이 서식할 정도로 청정지역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여정에서 천연기념물 제217호인 산양을 두 번이나 봤다.
순식간이라 사진을 찍지는 못했으나 대원들 모두 "정말 산양이 있구나"하며 놀라워했다. 한 번은 산 끝자락에서 껑충껑충 뛰어가는 갈색빛의 산양을 보았고, 한 번은 갑자기 산에서 흰 산양이 튀어나와 대원들 모두 가던 길을 멈춰 서기도 했다.
"아까 우리가 산양에 길을 피해줬었죠. 왜 그랬겠어요?" 김학면 DMZ 원정대장이 기자에게 불쑥 물었다. 당연하게도 안전상의 문제라 생각했지만 김 대장은 "여기 DMZ 땅의 주인은 우리도, 군인도 아닌 산양 같은 야생동물들이에요. 당연히 인간이 길을 양보하는 게 맞아요"라고 말했다.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15일 두타연 폭포 오른쪽 동굴이 보인다. 이도훈 씨 제공
두타연은 연간 8만여 명이 찾는 접경 지역 최대의 관광 명소다. 금강산과 불과 35㎞ 떨어진 곳이다. 두타연은 금강산 육로관광의 관문이기도 하다. 32km만 더 가면 금강산이 나온다는 이정표도 보였다. 그러나 이정표 뒤 금강산 가는 길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두타연 폭포 상류가 보이자, 대원들은 일제히 감동에 찬 탄성을 내질렀다. "민간에 개방하면 여기 사람 정말 많아지겠어요" 한 대원이 말한 그대로였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10m 높이의 폭포 아래로 맑은 물에 햇빛이 비쳐 윤슬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폭포 오른쪽 암벽에는 동굴이 보였고 주변으로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폭포는 그대로 흘러 하류까지 뻗어가 걷는 내내 폭포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통일은 머리보다 가슴으로"…양구전투 위령비 앞에서의 묵념
15일 오후 양구전투위령비 앞에 선 대원들이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자 묵념하고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
강원도 양구는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당시 양구에서는 피의 능선 전투, 도솔산지구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등 악명 높은 전투들이 이어졌다.
양구전투 위령비는 이런 잔혹한 양구 지역의 전투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자 1994년 건립됐다.
위령비에 도착한 대원들은 추모 시 '길 가소서' 낭독 후 전쟁의 참혹함 앞에 스러져 간 호국영령들을 위해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원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고지전은 한국전쟁 중 벌어졌던 백마고지 전투와 425고지-406고지 전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영화 고지전 캡처
순국선열들의 얼이 담긴 위령비 앞에서 대원들의 침묵은 한동안 이어졌다. 특히 전날 저녁 한국전쟁의 비극을 그려낸 영화 '고지전'을 단체관람했던 터라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하게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고지전'은 휴전협정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3년 여름, 전선 최전방에 위치한 가상의 지역, '애록(AERO-K)고지'을 배경으로 한다.
하루에만 고지의 주인이 몇 차례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던 영화 속 '애록고지'는 한국전쟁 중 벌어졌던 '백마고지 전투'와 '425고지-406고지 전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백마고지 전투는 강원도 철원 395고지에서 중국군과 수차례 접전을 벌이며 고지 수탈과 탈환을 반복했던 전투로, '425고지-406고지 전투는 전쟁 막바지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철원군 일대의 고지전이자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잘 알려져 있다.
1951년 휴전협정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까지 고지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수많은 고지전이 벌어졌다. 휴전협정이 논의됐던 2년 동안 한국전쟁 총사망자 400만 명 중 300만 명이 발생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류동화(35)씨는 "영화 '고지전'을 보고 와서 그런지 오늘 들렀던 장소 중 위령비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 동족 간에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또 다른 참가자 역시 "간접적으로나마 영화를 보고 오니 좀 더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며 "통일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이날 저녁 숙소 양구 지게마을에서는 감자전 만들기 대회가 열렸다. 양구의 지역생산 재료인 감자를 이용해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총 7조가 출품한 쟁쟁한 감자전 작품들 사이에서 젊은 층으로 구성된 4조가 1위를 차지했다.
전인정(34) 씨는 "DMZ에서 우리 같은 젊은 MZ들이 앞장서서 남북의 통일을 염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MZ in DMZ' 키워드를 생각했어요. 영화 '고지전'에서도 그려졌듯 강대국들의 이념 갈등으로 인해 한민족끼리 싸우게 된 한국전쟁의 배경이 너무 가슴이 아프고 조국을 위해서 몸을 바친 분들을 기리기 위해서 태극기를 만들어 봤어요"라며 작품의 취지를 설명했다.
우승조 선정에 앞서 모든 조들의 작품 설명이 있었다. 각 조가 빚어낸 감자전의 모양은 모두 달랐지만, 모두 우리 장병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고 있었다.
내일은 강원도 화천 평화의 댐을 시작으로 안동철교와 살랑교, 숲으로 다리를 지나 위라리 원시림 숲길을 걷는다. 총거리는 약 14km다.
④'대국민 사기극' 평화의댐…평화·안보관광지로 변신 성공
정전협정 이후 금단의 땅이 된 DMZ 접경지
자유·평화 의미 새기는 'DMZ 자유평화대장정'
평화의 댐에서 살랑교, 숲으로다리로 14km 행군
반공시대 유산 평화의 댐, 관광명소로 변모하다
북한강 가로지르는 살랑교, 숲으로 다리를 걷다
나흘 차 부상자 곳곳에…그래도 완주 의지 굳건
16일 넷째 날 아침이 밝았다. 벌써 원정의 반이 지났다.
오늘 원정대는 강원도 화천 평화의 댐을 시작으로 살랑교, 숲으로 다리를 지나 위라리 원시림 숲길을 걸었다. 총거리는 약 14km다.
"나도 천 원 냈었어"…그들이 기억하는 평화의 댐
평화의 댐은 전두환 정부가 '서울 물바다론'을 제기하며 준공됐다. 류효림 인턴기자
평화의 댐 앞에 선 원정대원들은 김학면 원정대장의 구령에 맞춰 우렁차게 외쳤다. 원정 나흘째 일정은 강원 화천 평화의 댐에서 시작했다.
날은 추웠다. 다들 핫팩과 방한복으로 중무장했다. 12월을 향해가는 늦가을 민통선 이북의 날씨는 실제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대원들이 손을 비비고 폴짝폴짝 제자리 뛰기를 하며 추위를 털어내느라 애를 썼다.
1993년 8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안보'를 이유로 평화의 댐을 만들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KBS 방송 캡처
평화의 댐. 80년대생 이전부터는 익숙하고 90년대생은 어렴풋이 들어봤을 수 있지만 00년생 이후 세대들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북측의 200억t 물 공격으로 인해 여의도 63빌딩이 잠기는 걸 막아야 하는 목적으로···"
당시 전두환 정부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해 수공(水攻)을 해오면 서울 시내 3분의 1 이상이 침수될 것이라며 국민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남녀노소가 몰려나와 북한을 규탄했다. 자발적 시위라기 보다는 관제데모에 가까웠다. 결국은 금강산댐 수공을 막기 위해 우리측 지역에 대응댐을 건설하는 것으로 결론났다.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돈을 냈고, 이듬해인 1987년 공사에 착수한다. 성금 총 661억여 원이 모였다.
북한이 금강산댐 수문을 열어 남한을 물바다로 만든다는 시나리오는 김영삼 정부 시절이 되어서야 '대국민 사기극'으로 결론 내려졌다.
대장정 원정대원 중 여럿이 이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이거 천 원 냈었어요. 그래프까지 만들어서 조작하니 국민들이 깜빡 속아 넘어간 거죠" 한 대원이 35년도 더 지난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이렇게 준공된 평화의 댐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발전용 시설이 없고 수문이 없는 홍수조절용 자연배수 댐으로 분단의 아픈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 성수기에는 하루 2000여 명의 관광객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 있는 평화 안보 관광지로 자리 잡기도 했다.
물안개 낀 강 위를 걷다
16일 강원 화천의 '살랑교'. 류효림 인턴기자
강원도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바로 산이다. 그중에서도 화천은 바로 그 산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어딜 둘러봐도 풀과 산이 가득하고, 곳곳에 흐르는 큰 강과 하천까지 있다.
오후에는 강원 화천군 간동면과 화천읍 대이리를 연결하는 인도교인 '살랑교'를 지나 '숲으로 다리'로 걸었다.
살랑교는 교량이 설치된 곳의 지명인 살랑골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북한강 인근에서 살랑살랑 자주 부는 시원한 바람의 이미지도 담고 있다.
다리 위에서 본 하늘과 산의 조화가 멋스러웠다. 마침 비도 내렸는데 대원들은 빗방울이 강에 떨어져 그려내는 동그라미 문양을 보며 잠시나마 '비멍'에 빠져들었다.
16일 강원 화천의 숲으로다리. 류효림 인턴기자
살랑교를 건너 우측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숲으로 다리'가 나온다.
소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이 이 다리를 숲속 길로 들어가는 다리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트레킹 코스이자 자전거길인데, 강과 산을 잇는 다리다. 전체 코스는 천천히 구경하며 걸으면 왕복 1시간가량 소요된다.
걷는 내내 큰 산맥이 길을 감싸고 있고 양쪽엔 물이 가득 차 있어 빼어난 자연경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한국관광공사가 이곳을 '아름다운 자전거 여행길 30선'에 선정하기도 했다.
이날 오후 비가 내려 강에 신비로운 물안개가 꼈다. 차가운 강 위로 따뜻한 비가 내렸다. 따뜻한 비를 맞은 차가운 강은 신비로운 안개를 뿜어냈다. 대원들은 이곳에 한참을 멈춰 서서 사진을 남겼다.
비가 내려 마치 새벽 여명에 물 안개가 낀 듯했다. 시린 하늘 아래 바라본 북한강 줄기의 모습도 아름다웠고, 걷는 내내 투명한 물 위에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한 참가자가 "신선의 세계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매일 저녁 먹기 전 30분가량 처치가 필요한 부상자들에게 치료를 제공하는 시간이 있다. 로비 한 켠 마련된 진료 공간에 가 보았다.
원정이 반환점을 돌면서 피로가 누적되고 부상자도 생겨나면서 대원 대여섯 명이 치료를 받기 위해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 한가운데부터 발 날까지 큰 물집이 생겨 걸을 수 없는 상태인 대원도 있었고, 걸을 때마다 오른쪽 골반에 통증이 느껴진다는 대원도 있었다. 또 신발을 벗어보니 새끼발가락에 피가 흥건했다며 처치를 받으러 오기도 했다.
치료 부위는 모두 달랐지만, 처치를 받으며 "내일 걸을 수 있겠지?" "걸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하며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같아 보였다.
원정 닷새째인 17일에는 강원도 철원 쉬리공원에서 출발해 도창검문소를 지나 용양보 탐방로까지 걷는다. 총거리는 약 10km다.
⑤철원에서 멈춘 금강산행 열차…언제 다시 달릴까?
정전협정 이후 금단의 땅이 된 DMZ 접경지
자유·평화 의미 새기는 'DMZ 자유평화대장정'
쉬리공원, 민들레마을 거쳐 금강산철도까지 12km 행군
쉬리공원 둘러싼 수변 산책로 수려한 경관 자랑해
피난갔던 주민들이 정착한 도창리 민들레마을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김화마을의 이야기를 듣다
옛 철원 주민, 금강산철도 타고 수학여행 갔었다
17일 강원 철원. 너머로 설산이 보인다. 이도훈 씨 제공
철원, 우리나라에서 춥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11월에 벌써 영하로 뚝 떨어져 어제는 이동 중 첫눈을 보기도 했다. 오늘도 영하 6도로 추운 날이었다. 대원들은 핫팩과 워머, 장갑을 챙기며 단단히 채비했다.
오늘 일정은 철원의 화강쉬리공원에서 민들레 마을까지, 용양보 습지에서 금강산철도까지 걷는다. 총거리는 약 12km다.
평화와 통일 염원하는 '쉬리공원'을 걷다
오늘 일정은 화강쉬리공원에서 시작됐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언 몸을 풀기 위해 대원들은 쉬리공원 앞에서 5분간 스트레칭을 했다.
화강쉬리공원의 이름에서 '쉬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청정함을 뜻한다. 마을을 끼고 흐르는 남대천에 1급수에만 발견된다는 '쉬리'가 서식하여 이름 붙여졌다. 또 하나는 영화 「쉬리」에서 차용한 상징으로서, 남과 북의 대치 속에 평화와 통일을 염원한다는 의미가 있다.
나무와 구름이 비칠 정도로 맑은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대원들은 "화강이 꼭 계곡물처럼 맑다"고 감탄하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물속이 훤히 보여 매력적인 민물 낚시터로 유명하기도 하다.
수심이 낮고 맑고 물이 깨끗해 철원을 대표하는 지역 축제도 열린다. 여름에는 이곳 화강에서 물놀이 축제와 다슬기 축제가 펼쳐져 가족끼리 관광을 오기 제격이다.
화강을 둘러싼 수변 산책로와 민들레마을까지 약 9km를 걸었다.
수변 산책로는 가을이 다녀가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 경치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오른쪽에 강이 펼쳐진 수변 산책로는 대부분 평지여서 걷기에도 편했다. 이 탓에 주민으로 보이는 행인들도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북과 가까운 민들레마을에는 방폭문이 있었다
17일 강원 철원 민들레마을. 박영규 인턴기자
이날 점심 식사는 철원 김화읍 도창리의 민들레마을에서 먹었다. 도창리는 광복 이후 북한에 편입되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수복된 지역이다. 전쟁으로 피난 갔던 주민들이 옛 도창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해 새로 형성된 마을로 현재 5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민들레마을 지명의 유래를 흔히 민들레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한국전쟁과 연관이 있다.
도창리에는 소규모 평야 '민들레 벌'이 있다. 민들레벌에는 한탄강을 따라 흘러내려 온 현무암 자갈이 많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구멍이 많다는 의미로 '멍돌' 또는 '구멍돌'이라고 불렀다. 또 멍돌이 많은 들판은 '멍돌들', '먼들'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먼들을 지도에 'Mendle'로 표기했고, 이를 다시 우리말로 옮기면서 지금의 '민들레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17일 강원 철원의 민들레마을 마을회관에 민방공대피소가 있다. 박영규 인턴기자
북한 인근 마을이기에 마을회관 문은 포격을 차단하는 방폭문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회관 내부에도 비상용품함, 비상대비시설비품함 등 민방공 경보 발령 시 사용할 물품이 놓여 있었다.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이지만 동시에 항상 위험에 노출된 곳인 듯 했다.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마을, 김화
17일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김화마을의 역사를 전하는 이야기관에 도착했다. 박영규 인턴기자
이어 대원들은 김화마을에 당도했다. 김화마을은 지금은 휴전선 이남에서 사라졌지만, 김화이야기관에서 그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김화군은 1945년만 해도 인구 9만 명에 1개 읍 11개 면 96개 리를 관할 구역으로 두고, 지역 내 백화점이 들어 설 정도로 번성했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북한으로 편입되면서 38도선 부근에 위치해있다는 지정학적 이유로, 김화군은 한국전쟁의 격전지로 전락한다.
무자비한 폭격으로 목조 건축물 대부분이 전소된 김화군은 이미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그렇게 김화군은 1952년 국내 행정구역에서도 사라진다. 2년 후 일시적으로 부활하기도 했지만 1963년 철원군으로 편입되며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지게 됐다.
남방한계선 앞, 아직 북한군 상징 '별' 남아있었다
민간인통제구역을 지나 DMZ생태평화공원에 들어섰다. DMZ생태평화공원은 제1코스 십자탑 탐방로와 제2코스 용양보 코스로 구성돼 있는데, 이날 대원들은 용양보 코스로 이동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군인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 도착한 곳엔 철책이 동서로 길게 뻗어있었다. 철책 사이로 태극기와 유엔군사령부의 깃발이 보였다. DMZ 남방한계선(군사분계선 기준 2km 아래 지점)이었다.
17일 용양보 습지 가는 길의 한 전봇대에 북한군의 상징인 별이 남아있다. 류효림 인턴기자
사방이 군사 시설로 둘러싸여 있어 사진 촬영이 엄격히 제한됐지만, 곳곳에는 한국전쟁 당시 남북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격전을 벌였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특히 북한의 상징인 별과 우리나라 국방부 마크가 동시에 새겨져 있는 전봇대가 눈길을 끌었다. 원정대와 동행했던 해설사에 따르면, 원래 이 곳은 북한이 점령했던 곳이었지만, 전쟁 이후 수복해 국방부 마크를 새기면서 남북의 흔적이 모두 남게 된 것이라고 했다.
화강 상류 DMZ 남방한계선에 위치한 용양보습지에는 호수, 늪, 하천 등 다양한 지형이 혼재돼있다. 식생·생물 서식환경이 우수해 멸종위기 야생생물인 수달의 서식이 확인될 정도로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다.
17일 용양보 한가운데 출렁다리가 앙상하게 흔적만 남아있다. 이도훈 씨 제공
특히 왕버들 군락이 습지 전체에 분포돼있어 겨울의 쓸쓸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또한 보 한가운데에는 한때 DMZ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들이 오가던 출렁다리가 앙상하게 흔적만을 유지하고 있어, 묘한 긴장감과 동시에 세월의 풍파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용양보습지는 북쪽 지역과의 생태적 연결통로 역할을 수행하는 등 서식처의 온전성, 자연성 등에서 생태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금강산 전기철도 교각을 사용해 조성된 습지인 만큼 옛 철교의 흔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근대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금강산 전기철도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1년 완공돼, 철원역에서 김화역을 거쳐 금강산까지 약 116km에 달하는 노선이었다.
본래 일제가 유화철을 반출할 목적으로 건설했지만, 이후 금강산으로까지 철도가 연장되며 금강산 관광객 수송이 주 목적이 됐다.
옛 철원 주민들은 금강산 철도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철원에서 금강산까지 금강산 전기철도를 타면 4시간가량이 소요됐으며, 요금은 7원으로 당시 쌀 한 가마 값에 해당할 정도로 비쌌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정 엿새째인 18일에는 노동당사에서 도피안사를 거쳐 학저수지까지 걷는다. 총거리는 약 10km다.
⑥전쟁 참상 간직한 백마고지…한반도 평화는 언제 올까?
대학생 인턴기자 DMZ 540km 횡단기
정전협정 이후 금단의 땅이 된 DMZ 접경지
자유·평화 의미 새기는 'DMZ 자유평화대장정'
백마고지 전투서 희생된 호국영령을 기리며
전쟁 격전지였던 도피안사, 국보 문화재 보존
철원 기차역, 극장 재현한 공원은 반응 엇갈려
18일 백마고지전적비를 올라가는 언덕. 이도훈 씨 제공
'DMZ 자유평화 대장정' 엿새째 날이 밝았다. 사실상 장거리를 걷는 마지막 날이다. "우리는 원정대! 가자가자 DMZ!" 이곳 구호가 익숙해질 때쯤 집으로 돌아간다.
오늘 일정은 철원 노동당사에서 도피안사를 거쳐 학저수지까지 걷는다. 총거리는 약 10km다.
대원들은 이날 오후 백마고지 전적비에 들러 이번 여정의 두 번째 참배를 올렸다. 태극기가 좌우로 길게 정렬된 언덕 너머로 하늘을 향해 높게 솟은 전적비가 보였다.
총 22.5m 높이의 백마고지전적비가 언덕 위에 서 있다.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한 국군 제9사단의 넋을 기리기 위함이다. 박영규 인턴기자
백마고지 전적비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호국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1990년 조성됐으며, 높이는 22.5m에 달한다. 이 때 전적비의 높이 '22.5'의 각 자리의 숫자를 더하면 9가 되는데, 이는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한 국군 9사단을 나타내기 위해 설계했다고 한다.
전적비 뒤로는 백마고지가 보였다. 군사시설이 있어 촬영이 제한돼 눈으로만 담아야 했지만,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한국전쟁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 '백마고지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해발 395m의 백마고지는 군인들 사이에서는 395산이라고 통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무명의 야산이었지만, 전쟁 이후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소가 됐다.
영화 '고지전'의 주요 배경인 '애록(AERO-K)고지'의 실제 배경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백마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국군과 중공군이 벌인 혈전으로, 세계 역사에서 유래가 없을 만큼 치열한 포격전, 수류탄전, 백병전 등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당시 백마고지에 발사된 포탄의 숫자만 해도 국군 20여만발, 중공군 5만발 등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화력이 쏟아졌다. 백마고지의 유래 역시 이 기간 중 극심한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된 고지가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여 명명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18일 백마고지 호국영령을 기리는 전적비 앞에 흰 말 동상이 서 있다.
백마고지는 폭격으로 민둥산이 된 고지가 마치 백마처럼 보인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이도훈 씨 제공
AP통신 역시 1952년 10월 9일 자 기사를 통해 백마고지 전투를 '시산혈하'(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룬다)라고 표현하며 "한국군과 중공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략고지 백마를 탈취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전개했다"고 보도했다.
10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국군 장병들은 고지를 재탈환하며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국군 3422명, 중공군 1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많은 인명이 희생된 참혹한 전투로 역사에 남게 됐다.
대장정 대원들은 전적비 앞에서 묵념하며 둘째 날 '양구전투 위령비'에 이어 다시 한번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한민족의 평화를 기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쟁의 참상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남과 북이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만 한 때 한반도 데땅트의 기운이 한반도를 지배하는가 싶더니 다시 긴장이 찾아오고 적대감이 고조되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도피안사'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가다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을 가진 도피안사는 한국전쟁 때 철원군이 격전지가 되면서 절도 함께 완전 폐허가 됐다. 그러다가 1959년 당시 육군 제15보병사단에서 재건하여 군종 승려(군부대 내에 예속되어 있는 불교 승려)를 두어 관리하고 있다.
도피안사에는 국보 제63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223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불상은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어 신라 말 철원 지역에서 성장한 지방 세력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전해진다.
불상이 위치한 법당 내부로 들어가자 향내음이 가득했고, 스님과 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법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향과 스님이 목탁을 치며 염불을 외는 소리가 합쳐져 경건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도피안사 법당 앞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었다. 도피안사는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지만 석탑의 상태는 상륜부와 3층 지붕돌 일부만 손상되었을 뿐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었다.
철원역사문화공원 반응 엇갈려…'추억여행' vs '어색'
18일 철원역사문화공원 내부에 철원역이 재현돼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
앞서 대원들은 철원군의 노동당사 앞에 위치한 철원역사문화공원을 방문했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이전 경제적으로 번성했던 철원읍 시가지가 재현돼 있었다.
1930년대만 해도 철원군은 인구 8만명 이상이 거주했던 강원도 3대 도시 중 하나로, 당시 철원읍 시가지에는 극장, 기차역 등 근대 시설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철원역에는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과 더불어 금강산 여행을 위한 전차가 운행됐다. 이에 금강산 관광을 위해 찾은 여행객들의 발길로 붐볐다고 전해지며, 이들이 묵을 수 있는 여관 등의 접객업소도 100여 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재현된 철원극장에는 우리나라 영화사 초창기의 전설적인 무성영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 포스터가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철원극장은 과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이 공연을 펼쳤던 강원도 문화예술의 산실이었다.
대원들의 철원역사문화공원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렸다. 과거 철원의 번영했던 모습을 신기해하며 사진에 담는 대원도 많았지만, "과거의 모습이 현대의 모습으로 어색하게 재현돼있어 실망스러웠다"며 "빛 바랜 원형 그대로 보여줬으면 어땠을까"하는 반응도 나왔다.
'분단의 상징'으로 불리는 북한 노동당사는 한국전쟁 때 훼손된 이후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붕괴 위험에 처해 올해 3월부터 보수공사 중인 관계로 관람할 수 없었다. 보수공사는 내년 11월 마무리될 예정이다.
원정 이레째인 19일에는 고려천도공원부터 강화평화전망대까지 걷고, 전망대에서 해단식을 진행한다. 총거리는 약 4km다.
⑦"남방한계선 마주했을때 답답함과 애절함이란…"
정전협정 이후 금단의 땅이 된 DMZ 접경지
자유·평화 의미 새기는 'DMZ 자유평화대장정'
6박 7일 DMZ 대장정, 강화평화전망대서 막 내려
대원들 자유·평화·통일 염원한 소감 낭독
"우리 민족이 애정 가득히 서로를 바라보기를"
'70초 영상제'에서 자유‧평화‧통일 메시지 담아
지난 13일 고성통일전망대에서 발족식으로 힘찬 첫발을 내딛었던 DMZ 자유평화 대장정. 어느덧 6박 7일의 시간이 흘러 19일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전날 강원도 철원에서 일정을 모두 마친 원정대는 버스로 3시간을 이동에 인천 강화도에 있는 성산청소년수련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새 아침을 맞았다.
해단식 장소는 북한 땅이 한 눈에 들어오는 평화전망대. 이 곳은 원래 우리군 관측소로 이용되다 2008년부터 전망대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뿌연 연무 때문에 선명하게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웬만한 수영 선수는 헤엄을 쳐 건널 수 있는 거리에 펼쳐진 바다 건너 저 땅에 대한 진한 아쉬움과 가슴을 짖누르는 묵직함이 대원들에게 전달된다.
1996년 한여름 수해때 남북 중간 수역에 있는 유도에 떠 내려온 소를 구출하기 위해 유엔사 회원국들이 머리를 맞댄 일이나, 이렇게 구한 소에게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제주도에게 가져온 '통일의 소'와 합사시켜 '평화통일의 소'를 낳게 한 결과 제주도에서 후손들이 번성하고 있다는 해설사의 설명은 언젠가 다가올 통일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통일전망대에서 시작해 평화전망대에서 끝난 여정
북한 땅이 한눈에 들어오는 평화전망대에서 해단식이 진행됐다. 류효림 인턴기자
이윽고 이어진 해단식. 행정안전부와 국방부 인천광역시, 강화군 등 이번 행사를 위해 도움을 준 정부와 지자체 관계자들이 모두 참석해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대장정의 성공을 축하했다.
행정안전부 임철언 균형발전지원국장은 "DMZ 평화의 길은 행안부와 접경지역 지자체가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접경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조성한 길"이라며 "이번에 걷고 탐방한 524km의 DMZ 평화의 길로 자유의 소중함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이상민 행안부 장관 명의의 완주증을 수여 받고 마치 어린 시절 상을 받은 것처럼 뿌듯해 했다.
대원 전인정(34) 씨는 완주 소감을 통해 "아버지가 42년 전 지켜낸 화천 7사단의 GP와 동생이 12년 전 지켜낸 양구 2사단의 포병대처럼 어딘지도 모를 골짜기 앞 고지에서 고생하고 계신 국군 장병들께 감사함을 마음에 담았다"며 "우리 민족이 위압과 경계의 얼굴이 아닌 애정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길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젊은 시절 백골부대에서 복무했다는 전성헌(64) 씨는 "43년 근무했던 이 지역을 다시 지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남달랐다"면서 "남방한계선을 마주했을 때 그 답답함과 애절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감개무량했고 눈물이 맺혔다"며 다시 한번 감회에 젖었다.
6박7일 대장정을 마친 대원들이 단체로 모자를 던지며 기뻐하고 있다. 이경숙 대원 제공
대원들은 참가자들의 이어지는 소감 발표에 고개를 끄덕이며 격한 동의를 보내는가 어떤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불거지기도 했다. 6박 7일간 DMZ를 함께 걸으며 분단의 아픔을 몸소 느끼고 자유와 평화의 가치, 나아가 통일의 필요성까지 통감했기 때문이리라.
원정대원들에게는 사실 첫날부터 주어진 한 가지 미션이 있었다. 해단식 전날 저녁 진행되는 '70초 영상제'에 출품할 영상을 내야한다는 것. 말 그대로 각 조에서 70초 분량의 영상을 찍고 편집해 완성해야 했다.
이를 위해 총 7개조 원정대원들은 6박 7일 94km의 여정을 함께 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상을 찍고, 또 찍었다. 출발 전 외치는 각 조의 구호 소리는 어색했던 첫 날에서 벗어나 험난한 코스가 이어질수록 또렷해졌고, 합이 맞아가기 시작했다.
때로는 어색한 연기와 포즈에 함께 웃고, 때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나뉜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빚어낸 이들의 영상엔 능숙한 편집 기술 대신 진심이 담겨 있었다.
여정 내내 원정대를 이끈 스태프들이 심사위원이 돼 고심 끝에 채점한 결과, 3조가 70초 영상제의 최종 우승조에 선정됐다. 3조는 영상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여정을 통해 느낀 자유‧평화‧통일의 메시지를 진정성 있게 담아내 호평을 받았다
3조의 박현주 씨는 "DMZ 평화의 길을 걸으면서 느꼈던 부분을 온전히 영상에 담고자 했다"며 "가슴 아픈 분단의 역사 속 고이 간직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며 걸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찼다"는 소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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