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 동치미에 빠진 막국수, 기가 차네
핑크빛 막국수 국물로 유명해진 고성 산북막국수
강원도를 대표하는 음식을 대라면 단연 막국수일 게다.
강원도 막국수는 옛날 화전민들과 주민들이 척박한 땅에서도 두 달 정도면 충분히 자라는 특성을 가진 메밀을 국수로 만들었던 데서 유래했다.
막국수라는 이름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메밀의 특성상 손님이 오면 '막(방금)'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막국수로 불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강원도에서 막국수로 이름난 지역은 춘천, 홍천, 횡성, 인제, 속초, 양양, 고성, 강릉, 원주 등으로 거의 전 지역에 걸쳐 있는데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영동과 영서의 막국수가 다르다. 게다가 같은 영동과 영서 안에서도 제각기 맛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우리는 고성의 유명한 막국수집 '산북막국수'를 찾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이나 달려 도착한 곳은 외딴 산골, 마을에 도착해서 좁은 골목길로 마을 안을 들어가자 하늘색 슬레이트 지붕을 한 낡은 집 한 채가 보였다. 허름한 집이었지만 제법 너른 주차장을 빼곡 메운 차들을 보아 이 집이 요즈음 막국수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간판도 없이 출입문에 세로로 써 붙인 '산북막국수' 다섯 글자가 전부다.문을 열었더니 식당 안은 이미 손님으로 만원이다.
주인으로 뵈는 사내가 나오더니 건물 끝 쪽 방으로 안내했다. 조금은 궁색한 건물가의 기다란 방에는 식탁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비도 내리고 날씨도 제법 쌀쌀해 따뜻한 방바닥에 냉큼 앉았다.
자리에 앉자 먼물 대신 따뜻한 메밀육수가 먼저 나왔다. 숭늉처럼 구수하면서도 메밀 특유의 맛이 입안에 감돈다. 쌀쌀한 날씨 탓에 따뜻한 메밀 물은 제법 잘 대접받는다.
이윽고 나온 것이 동치미.
막국수에서 빠질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다.
물론 동치미 대신 다른 육수를 쓰는 곳도 더러 있지만 그 알싸하고 얼얼한 맛은 동치미가 최고다.
근데 동치미국물이 핑크빛이다. 갓으로 우려냈기 때문이다. 갓으로 우려내면 이처럼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색이 배어나온다. 보기도 좋거니와 그 알싸한 국물 맛이 사가사각 씹히는 건더기와 잘도 어울린다. 이 핑크빛 동치미 국물로 인해 이 집이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치미를 시작으로 식탁 위가 분주해진다. 다음으로 명함을 들여 민 건 편육, 돼지 수육이었다.
윤기가 나는 벌건 명태식해를 수북이 쌓은 편육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 육즙이 밴 부드러운 육질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하다. 명태식해와 수육이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동행한 김원주 화가가 고기 한 점과 식해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어 사진을 돕는다.
종종 같이 다니다 보니 이쯤은 이제 기본.
이쯤에서 동동주 한 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도 추적추적 내리니.
상은 의외로 단출했다. 새우젓갈, 고추, 마늘, 된장을 담은 접시와 상추, 김치, 무, 백김치, 동치미가 전부다.
"나는 이 집 김치가 참 맛있더라." 옆자리에서 벌어진 김치 예찬이 제법 거리낌 없다.
대체 어떤 맛이기에,
한눈에 봐도 시원해 보이기는 보인다만...
젓가락을 백김치로 가져갔다.
살짝 입에 갔다 댔더니 아싹아싹 씹히는 맛이 아주 좋다.
짠맛도 강하지 않을 뿐더러 뒷맛이 달기까지 하다. 그 단 것도 기분 좋은 단맛이다.
윤기 나는 벌건 명태식해는 편육이나 막국수의 입맛을 더 돋울 터.
절로 침이 고이게 하는 그 탱글탱글하니 붉은 자태가 설렌다. 한 입 먹고 입안에서 혀를 놀리는데 조금은 단맛이 받힌다.
"음, 이 집 식해는 조금 달구먼, 원래는 약간 시큼한 게 정석인데, 요즘 사람들 입맛에 맞춘 것 같아." 이곳 고성이 고향인 김원주 화가는 옛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행자의 입맛에도 조금은 달게 느껴졌다.
그 단맛이 처음엔 먹기 좋았으나 뒷맛을 해치기는 했다. 단맛의 여운이 남아 개운하지 않고 편육이나 막국수의 원래 맛을 막고 있었다.
막국수가 나왔다. 우리가 주문한 건 일반적인 막국수가 아니라 메밀 100%인 순메밀이었다.
사실 주문하기 전에 막국수와 순메밀을 두고 잠시 고민을 했다.
예전에 종종 먹어왔던 익숙한 막국수를 먹을 건지, 처음이어서 기대는 되나 그 맛이 두렵기도 한 순메밀을 먹을 건지 잠시 망설이다 본능적으로 순메밀을 주문한 것이다.
검었다.
겉메밀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색깔만 봐도 먹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고명과 꾸미로 김, 깨, 무, 계란, 명태식해가 얹혀 나왔다.
사실 메밀은 그 자체로 무맛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먹는 막국수는 전분을 섞어서 그나마 먹을 만하지만 순도 100% 메밀을 먹는다는 건 여간 곤혹스런 게 아니다.
툭툭 끊어지는 면발과 입안에서 깔깔거리는 식감에다 아예 맛은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나마 이 절정의 무맛을 견뎌내는 방법은 핑크빛의 동치미 국물과 명태식해, 사각사각한 김치와 무 등을 곁들여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맛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그 심심한 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법이다.
그저 그 무미건조한 무맛의 경지, 그 담백하다 못해 무맛의 절정을 느끼고 싶을 땐 순메밀을 먹게 된다.
무심과 무념, 무상의 경지가 바로 순메밀막국수다.
그러니 고명도 양념도 모두 버리고 메밀 그 자체로 맛의 궁극까지 가볼 일이다.
대개 막국수는 전분과의 비율을 8대2, 내지 7대3 정도로 섞는다.
메밀가루만으로는 반죽도 어렵거니와 메밀 특유의 무맛으로 인해 먹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시어머니에 이어 35년 동안 막국수를 해온 박숙자(59) 씨는 손님이 원하면 5대5의 비율로도 막국수를 내놓기도 한단다.
두둑한 배에 계산을 하려는데 식탁을 정리하던 주인 박숙자(59) 씨가 잘 먹었냐며 인사를 건넨다. 첫눈에 봐도 인상이 참 좋은 분이다. 일행은 먼저 나가고 잠시 박숙자 씨와 막국수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이곳의 메밀은 홍천의 부흥곡물상회에서 사온단다.
60kg 한 자루를 36만 원에 사오면 이곳에서 씻어서 말려 도정을 한다.
도정은 거진 읍내 왕자떡방앗간에서 하는데 도정비만 15만 원 정도 든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손님이 가게에 북적대도 한 그릇에 7000원 하는 막국수로는 큰돈을 벌이는 건 고사하고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주인 박 씨는 거래하는 업체의 전화번호까지 보여주면서 메밀을 구하기 어려운 여름 한철을 제외하곤 국산 메밀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해줬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입에 척 감기는 편육과 명태식해, 심심한 듯 고요한 순메밀국수와 핑크빛 동치미 국물의 맛이 다시 그려져 절로 입에 침이 고인다.
산북막국수 찾아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