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대만(타이완)가족여행1:춘천-인천국제공항-타이완 타오위안국제공항-중정기념관-자유광장

온리하프 2019. 4. 1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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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만(타이완) 가족여행(4/13)


춘천-인천국제공항-타이완 타오위안국제공항-중정기념관-자유광장





10:39    인천국제공항





11:39    기내식이 제공되고~





아이들이 부모님 환갑여행이라고 대한항공사 측에 사전에 얘기했던 것 때문인지~

맥주 몇 캔과 작은 케익이 더 제공되었다.





12:55    비행기 탄지 두 시간이 지나서 대만 상공에 도착하고~





13:43    입국수속을 마치고 렌트카를 기다리는 중~~


이번 대만여행은 아이들이 아빠*엄마의 환갑을 기념하는 취지에서 진행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처형식구들이 함께 하자고 하였고~

 그렇게 8명이 3박4일 일정으로 타이페이 자유여행을 하게 되었다.


계획을 추진한 아이들이 기특하고 고마울뿐이다.





14:22    숙소 앞에서~~





15:47    숙소에 짐을 풀고나서 근처 상가로 나와 저녁 시간에 필요한 음료와 과일을 준비한다.





봉지를 하나 씩 들고 다시 숙소로~~





발걸음이 경쾌하다.






방이 다섯이니 조카와 아들은 싱글침대가 있는 곳으로~





부부팀인 나와 처형 그리고 딸은 투윈 또는 더블침대가 있는 방으로 각각 정해 진다.





17:18    방 배정이 끝나고 곧바로 중정기념관으로~

사위, 딸, 처, 처형, 조카, 윗동서, 아들 그리고 나.

이 모임에 조카며느리가 참가하기로 했는 데, 첫 아이 임신 관계로...





최근 '타이완민주기념관"이라고 이름을 바꾼 국립중정기념당은

 타이완 초대 총통인 장제스(蔣介石)를 기념하기 위해 198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저기 보이는 계단의 갯수가 89개 인데~

장개석이 살아있었던 햇수를 나타냈다고 한다.

일본의 협동조합운동이나 농촌개혁,

대만의 농촌사구(우리나라의 里나 面)발전운동,

이스라엘의 키브츠 운동,

덴마크의 삼애운동(하늘, 사람, 땅) 등....


다른 나라의 개혁운동에서 영감을 얻고,

그것이 유신정권의 새마을운동에 편입되어 묶이면서~

우리가 기억하는 국가 올인의 새마을운동이 된 것이다.





장개석(1887~1975) 동상

논리, 민주, 과학은 장개석의 정치이념이기도 하다.


1928~49년 중국국민당 정부의 주석을 지냈고, 1949~75년에는 타이완의 국민정부 주석을 지냈다.

 
1925년 이래 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1926년 중국 북부의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싸워 중국 전역을 장악했으나,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하고 1946년 국공내전이 다시 시작된 후 1949년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주게 되었다.

그는 국민당 잔여부대를 이끌고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국민당 지도자들과 함께 중화민국을 건국하고 장기간 통치했다.

장제스가 공산당에 패배한 이유 가운데 가장 자주 거론되는 것은

자신의 정부 내에 부패가 만연되도록 방관했다는 점이고,

또다른 이유는 그가 외부사정의 변화에 신축성 있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재능보다 충성심을 더 높이 사게 되었고 조직보다는 개인적인 유대관계에 의존했다.

심복들만을 중용하는 경향은 군인사에도 나타나 많은 재능있는 장교들을 제치고 편협한 보수주의적 장교들이 중용되었다.

 지방군벌들을 서로 경쟁시키고 국민당 내의 정적들끼리 서로 싸우게 했다.


 공산당에 패배한 또다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그가 세운 전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을 점령한 일본군에게 저항하는 데 있어서,

미국제 장비를 갖춘 자신의 군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대신 미국이 일본을 패배시키리라고 기대했다.

그는 중일전쟁이 끝난 뒤 공산당과의 내전에 대비하여 자신의 군대를 아껴두었다가 공산당을 일거에 격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실제 내전의 단계에 들어가자 이같은 전략은 역효과를 냈다.

그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수동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지도자의 위신과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버린 반면,

중국공산당은 일본에 대항하여 맹렬히 싸움으로써 국민의 신임을 얻었다.

그의 군대는 중국 남서부지역에서 빈둥거리면서 놀았기 때문에 사기와 전투력이 떨어진 반면,

중국공산당군은 중국 국민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나가는 동안 대규모의 정예군대가 되었다.


중국은 농민들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나라였다.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입증된 바와 같이 중국 농민들이 공산당을 지지했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현대 중국의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다음백과에서~~





광장 양 옆으로 국립희극원과 국립음악원 있고~

가운데 천막에선 중국의 전통적 고전극 음악이 흘러 나온다.





건물이름은 장제스의 본명인 장중정(蔣中正)에서 따왔다.

(장개석=장중정=장제스)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자 중화민국 정부에서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해 크고 아름답게 지었다고 한다.

1980년 4월 5일에 개관하였으며 건축비는 전액 기부로 충당되었다.


중정구()의 이름도 여기서 따왔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듯~

장제스의 동상 앞에서 꿈쩍도 안 하며 경비하는 근위병의 모습이 장관이며 매 정각마다 하는 근위병 교대식이 유명하다.





금, 실, 쟁, 비파에서 흘러 나오는 구성진 가락에 맞춰 중국의 오페라인 경극이 공연되고 있다.

내용을 알 수가 없어서 참 아쉬었다.





 본래 건립 당시에는 대중지정(大中至正)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민진당 시대에 자유광장이라고 바꿔 버렸다고 한다.

역사의 평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1906년 바오딩 군관학교에 입학하고 다음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갔다.

일본 유학시기에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쑨원의 신임을 받아 1923년 제1차 국공합작 때는 소련으로 군사시찰을 갔으며, 귀국 후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벌을 시작하였으며

1927년 4월에는 상하이 쿠테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축출하고

1928년베이징을 점령하여 북벌 완수를 선언했다.





이후 난징에 수도를 정하고 국민정부를 선포, 국민정부 주석과 육군, 해군, 공군 총사령이 되어 정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930년부터 공산당 토벌에 나섰으며,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는데도 이를 항일전쟁보다 우선시하였다.

그러나 1936년 공산당 토벌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에 갔다가

그의 부하인 장쉐량과 그의 군대에 의해 감금당한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을 결성하여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쟁(중일전쟁)에 나섰다.





공산당과 대립하면서도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이끌어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중일전쟁에서 중국(당시 중화민국)을 승전국으로 만들지만,

1946년부터 다시 공산당과 내전을 벌였으며,

1949년 중국 공산당에 밀려 타이완으로 이전하였다.

중화민국의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 장기 집권하다가 1975년 사망했다. 』 위키백과에서~


일본육사, 공산당, 장기집권(1950~1975), 총통제...

지난 우리의 역사와 어찌그리 흡사한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고종 황제가 창안한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4월 10일 임시 정부의 첫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했하며,

황제의 나라를 뜻하는 제국(帝國)을 공화국을 뜻하는 민국(民國)으로 바꾸어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3월 1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인산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 인구 2천만명 중 3.1 만세 시위 참가자는 약 202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했으며,

사망자 7,500여명, 부상자 16,000여명, 체포·구금된 사람이 46,000여명이었다.

만세 시위는 3월부터 시작하여 5월까지도 격렬하게 지속되었는데,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일제 경찰에 연행·구금되어 사실상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3·1 운동으로 표출된 독립 의지를 대표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순종이 건재하고 있어서 망설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상하이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결집되어 있었다.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 이들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했다.

먼저 임시 정부 수립론이 대두되었는데, 조선총독부에 맞서 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가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까닭에 독립지사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1918년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김규식을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상하이는 3·1 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였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1919년 여름부터 더욱 민활하게 움직였다.

신규식을 비롯하여 서병호, 여운형, 조동호, 박찬익, 선우혁 등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 고려교민 친목회를 조직하여 교민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망을 만들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성환, 조소앙 등 명망 높은 독립지사가 상하이로 와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현순, 손정도 등이 이곳으로 파견되었다.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을 것을 결의하고 김규식 등을 대표단으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어릴 때부터 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영어, 라틴어, 신학, 수학, 과학 등 서구식 교육을 받았고, 서재필이 만든 《독립신문》 기자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여 로노크 대학교 학사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를 받은 인재였다.

특히 그는 어학에 능통하여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고,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아직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거절당했다. 김규식은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받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규식의 주장에 고무되어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함태영,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나기도 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함태영을 만나 국내 독립운동 방법을 의논하였으나 체포되어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활동에 타격을 줄수 있다는 함태영의 설득으로 김순애는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위키백과에서~






18:17    중정기념당을 대만의 첫 여행대상지로 삼았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국국민당 주석 또는 타이완 지역 지도자라고 호칭한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문재인 정부의 의지대로 남과 북의 통일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인가?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로를 경계하며 팽창세를 막으려고 여기저기 제제를 가하려는 움직임이 보여지곤 한다.

미국은 과연 남과북의 통일을 원하고 또 지원하고 있는 것인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에게서 복잡미묘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의 의문을 풀수 있는 헤안을 기대해야 하는 건지....





저이궈(這一鍋)

진시황의 무덤에서 발굴된 병사인형과 청동솥 등 전통유물로 장식해 놓아 훠궈 전문식당이라기보다는 박물관에 가까워 보인다.

홍탕과 백탕이 나눠진 채 같은 솥에 나오는 ‘룽펑위안양궈’를 주문해야 한다.

육수에 담가 먹는 돼지고기인 ‘쑹반주러우’는 꽃 모양으로 곱게 포개어져 한 송이 ‘고기 꽃’ 같다.

일본 ‘마쓰야마’의 돼지고기를 쓰는데 삼겹살과 항정살의 중간 정도의 식감으로 맛이 일품이다.

소고기인 ‘선셴뉴러우’(神仙牛肉)도 인상적이다.

빨래건조대처럼 생긴 대에 고기가 주렁주렁 걸린 채 나오는데 고기의 신선함을 유지하려고 대 아래에 냉각장치를 달았다.

관자살과 어묵도 맛의 완성도가 높다.


타이베이시 중산구 중산북로 3단 31호(台北市中山區中山北路三段31號)

월~금 오전 11시30분~오후 2시, 오후 5시~자정, 토·일 오전 11시30분~자정/+886-2-6613-1336.


이렇게 훌륭한 집인데, 내 입맛엔 안 맞았다는 사실~~

처음엔 그런대로 좋았는 데, 중간에 먹게된 오리 피 때문 때문에 속이 거북하기 시작하였고, 결국엔 식사를 다 마치지 못했다.


그런 원인으로 인해 3박4일 내내 음식으로 속알이를 해야 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