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명장과 졸장의 경계에 선 논란의 장군들. 호평과 비판이 엇갈린 한국전쟁 참전 장성들을 '명장 외전'으로 소개합니다.
[명장-외전]
②1950년 9월 알몬드: 맥아더만 바라본 해바라기

에드워드 알몬드 미 육군 장군
“네드, 이 친구야. 자네뿐일세(Ned, my boy).”
1950년 9월 29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김포비행장 활주로에 도열한 장군들 사이에서 ‘네드’(에드워드의 애칭)를 발견하곤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맥아더의 시선은 당시 미 10군단장이었던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에게 머물렀다. 10군단은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 작전을 위해 맥아더 직속으로 편성된 미육군·미해병대·한국군 연합 별동대였다.
인천상륙작전 D-데이(9월 15일)로부터 2주가 지난 때였다. 광화문 중앙청에서 서울 수복(9월 28일)을 기념하는 환도식(還都式)이 열리는 날이었다.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불과 13일만에 수도 서울까지 탈환하며 기적적인 성과를 거뒀는데, 3개월 만에 다시 찾은 서울의 통치권을 이승만 정부에 돌려주는 이 역사적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맥아더가 도쿄에서 날아왔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하필 맥아더가 알몬드만을 콕 집어 칭찬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맥아더를 기다리던 장군들 사이엔 누가 봐도 가장 노고가 컸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달 가까이 낙동강 방어선을 처절하게 지키고 북한군 전력을 소진시켜, 결국 인천상륙작전 같은 후방 기습이 가능하도록 기회를 제공했던 미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다. 아무리 인천·서울 작전에서 알몬드 공이 컸다 해도, 낙동강 방어를 성공시킨 뒤 대구에서 서울까지 부대를 밀고 온 워커의 공로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은 쉽게 이해 가지 않는 대목이다.

한국전쟁 4대 영웅(국방부 선정) 중 한 명인 워커를 제치고 맥아더의 편애를 한 몸에 받았던 알몬드.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더글러스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 월튼 워커, 제임스 밴플리트, 올리버 스미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에드워드 알몬드는 한국전쟁의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위급했던 장소마다 현장을 지켰던 인물이다. 전쟁 발발 땐 맥아더 참모장으로서 한반도 미군 파병에 관여했고, 인천상륙작전에선 상륙군 군단장으로 인천 탈환과 서울 수복의 공을 세웠다. 이후 북진 과정에선 장진호 전투를 지원했고, 곧이어 흥남철수를 지휘했다. 1·4후퇴 이후엔 중동부전선에서 중공군 공세를 분쇄하는 작전에 관여했다.
이 과정에서 알몬드는 맥아더의 사랑을 받고, 워커와 경쟁했으며, 스미스와는 반목하고, 결국 리지웨이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한국전쟁의 모든 주인공들과 입체적 관계를 형성했다. 6·25 전쟁을 하나의 대하드라마로 본다면, 그 등장인물 중 가장 개성 있고 존재감이 탁월했던 ‘신스틸러 악역 명품 조연’이 바로 알몬드였다.

“알몬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조차 재앙을 불러올 사람이다.”
(한국전쟁 당시 알몬드의 참모였던 존 칠스의 평가)
개성이 너무 지나쳤던 장군
알몬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다만 종합적으로 정리하자면 ‘능력은 탁월했으나 인화와 인성에 문제가 많았던 장군’이었다. 그는 상관에게 충성스럽고 헌신을 다했지만, 부하들을 심하게 다그치는 장교였다. 그래서 상관들은 그를 높이 평가했고, 반대로 부하들은 “같이 일하기 힘든 상관”이라며 고충을 토로했다.
비육사 출신(버지니아 군사학교)인 알몬드가 능력으로 인정 받았다는 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승진 속도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전쟁 전 중령이었던 그는 미국의 참전 가능성이 높아지던 1941년 10월 대령으로 승진했고, 진주만 공습 3개월 후인 1942년 3월 준장, 그해 9월 소장으로 쾌속 승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 또래 장교들 중 승진이 가장 빨랐고 오마 브래들리, 조지 패튼, 로턴 콜린스, 리지웨이 등 2차대전 영웅들과 같은 소장 계급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만약 이때 공을 세웠더라면 이들처럼 알몬드도 4성장군 이상으로 진급할 수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알몬의 군생활은 2차대전 유럽 전선에서 큰 위기를 맞이했다.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는 인종 통합 정책에 따라 유색인 병사들을 함께 징집했는데, 알몬드는 그 중 흑인 병사로만 구성된 92사단을 맡았다. 그는 대통령의 기대가 컸던 이 흑인 사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했지만, 알몬드 사단은 여러 전투에서 전투력 부족을 노출하며 졸전을 거듭했다. 알몬드의 승진길도 거기서 가로막혔다. 경쟁자들이 별을 하나씩 계속 달아가는 동안, 알몬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소장에 머물렀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알몬드의 군생활은 기로에 섰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모스크바 대사관 무관 자리와 도쿄 맥아더 사령부 참모 두 가지였다. 여기서 알몬드는 맥아더에게 자기 인생 종반부를 걸기로 했다. 1946년 도쿄에 부임한 알몬드는 인사참모와 부참모장을 거쳐 1949년 1월 맥아더사령부의 ‘넘버2’인 참모장으로 발탁됐다. 아랫사람을 심하게 가리고, 써 본 부하만 기용하는 맥아더가 유럽에서 온 ‘외부자’ 알몬드를 3년 만에 2인자에 등용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 3년 동안 알몬드는 맥아더 퇴근 전까지 절대 사무실을 떠나지 않았으며, 신명을 다해 맥아더에게 충성했다. 원래 행정능력이 탁월했던 알몬드는 도쿄사령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점점 맥아더의 신임을 얻더니 맥아더가 가장 아끼는 부하 중 한 명으로 올라섰다.

2차대전 당시 에드워드 알몬드 미육군 92사단장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병사들의 준비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알몬드는 전쟁터에서도 퍼스트 클래스 인생을 살았다.”
(알몬드의 참모 존 칠스)
맥아더에게 충성한 대가로 알몬드는 권능을 손에 쥐었다. 맥아더는 일선 부대장이나 참모들을 만나기보단, 소수의 심복들만 대면하며 자신이 믿는 부하에게만 권한을 위임하는 최고사령관이었다. 그 덕분에 알몬드는 매우 강력한 문고리 권력을 행사했다. 도쿄사령부의 모든 일이 알몬드를 통해 맥아더에게 보고됐고, 모든 지시가 알몬드를 통해 내려갔다.
알몬드는 맥아더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였다. 대신 부하들 사정 같은 건 절대 봐주지 않았다. 그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 상관이었다. 아랫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했고, 희생을 강요했다. 그래서 맥아더에게는 최상의 평가를 받았지만, 그를 경험한 대부분 부하들은 알몬드를 경멸했다.
알몬드가 가장 나빴던 점은 전장에서 병사들이 고생하는 중에 자기 혼자 귀족 생활을 누리려 했다는 점이다. 그는 1950년 겨울 북진 과정에서 한반도 동부전선을 책임진 10군단장이었는데, 이때 행동 때문에 수많은 부하 장교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됐다. 해병대가 장진호에서 영하 30도 추위에 떨고 있는 사이 알몬드는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트레일러에 살며 △난방이 되는 수세식 화장실을 쓰고 △도쿄에서 바로 공수되는 스테이크와 최상급 와인을 먹었다. 병사들이 한데에서 꽁꽁 언 간이식량을 힘들게 녹여 먹고 있을 때, 군단본부 식당에는 하얀 유니폼을 입은 병사가 식사를 날랐다. 깔끔한 린넨보가 덮인 식탁 위에 번쩍이는 은제식기와 고급 도기가 준비돼 있었다고 한다.
유색인종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인종주의자였다는 점도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는 남부 정서가 강한 버지니아 출신으로 원래부터 흑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흑인 부대인 92사단에서의 실패 경험 때문에 이 인종적 편견은 더 심해졌다. 그는 92사단의 실패가 자기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흑인 병사의 능력이 부족했고 흑인이 태생적으로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인종이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2차대전 때 굳어졌던 알몬드의 이 인종주의는 한국전쟁에서도 바뀌지 않아, 그는 평소에도 “의심할 여지 없이 인종 간에 태생적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녔다. 1950년 겨울 북진 과정에서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구성된 65연대가 동부전선에 합류하자, 그 연대장인 윌리엄 해리스 중령에게 “나는 이 유색인종에게 그렇게 큰 신뢰감을 가지고 있지 않네”라며 쏘아붙였다.
결국 알몬드의 인종적 편견은 적을 무시하다가 적에게 기습을 당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알몬드는 1950년 10월 북진 도중 중공군 포로를 잡으며 중국의 개입을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중국인들을 ‘세탁업자들’(laundrymen·당시 미국에선 중국인이 세탁소를 경영하는 사례가 많았음)이라고 조롱하면서 중공군 역습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모든 동화엔 근사한 구식 악당이 필요한 법이지(Every fairy tale needs a good old fashioned villain).”
(BBC 드라마 ‘셜록’의 악역 짐 모리어티)

월턴 워커 장군 이력.
(악역1: 워커와의 갈등)
유능함, 명석함, 영악함, 용맹함, 노련함, 집요함, 그리고 무자비함까지….. 영웅 서사 주인공(protagonist) 반대쪽에 선 반동인물(antagonist)로서 자질을 모두 갖춘 ‘완벽한 악역’이 알몬드였다. 그는 결정적 순간마다 6·25 전쟁 주역들과 대결하거나 반목했고, 때론 훼방을 놓았다. 알몬드와 가장 큰 갈등을 빚었던 인물은 낙동강 방어전의 영웅 워커다. 1889년생(1912년 임관) 3성장군 워커와 1892년생(1916년 임관) 2성장군 알몬드 사이에 엄연히 존재했던 위계 질서를 생각하면, 두 사람이 전시 상황에서 경쟁 관계였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워커가 상관 맥아더의 신임을 얻지 못한 것은 워커 자신의 무뚝뚝한 성격, 유럽파 장군(워커는 2차대전 당시 패튼 휘하 군단장을 역임)에 대한 맥아더의 불신이 크게 작용했지만, 알몬드의 교묘한 농간도 영향을 줬다. 알몬드는 워커와의 관계에서 맥아더의 뒷배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2차대전에서 떨어진 평판을 만회하기 위해 전투지휘관을 거쳐 중장 진급을 노려야 했던 알몬드 입장에서 워커는 성가신 경쟁자였다. 그는 자신과 극소수참모만이 가진 ‘맥아더 독대권’을 십분 활용했는데, 워커가 맥아더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을 차단하고 자기가 대신 맥아더 명령을 워커에게 전달했다. 알몬드는 마치 자신이 상관이라도 된 것처럼 워커와의 통화에서 구체적 지시를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참다 못한 워커가 알몬드에게 “지금 내가 통화하고 있는 사람이 그냥 알몬드인가, 아니면 맥아더를 대신해 말하는 알몬드인가”라면서 역정을 낸 사례도 있었다.
알몬드는 맥아더가 워커의 전쟁 수행 의지와 능력을 오해하도록 유도해, 워커에 대한 맥아더의 신뢰를 하락시키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 낙동강 방어전 시작 직전인 1950년 7월 26일의 일이다. 이때는 미군이 충북 영동에서 경북 김천으로 물러나면서 대구가 북한군 직접 사정권 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당시 미8군 본부는 대구에 있었는데, 워커는 지원부대와 주요 장비들이 북한군 직접 공격에 노출되기 전 후방으로 빼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사령부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했다. 사령부 이전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나 이때도 맥아더와의 직접 연락을 하지 못해, 결국 워커는 참모장 알몬드에게 이 뜻을 전달했다.
여기서 알몬드는 워커의 건의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중간에서 일종의 농간을 부렸다. 당시 워커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필요성에 따라 사령부를 옮기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알몬드는 8군사령부의 부산행이 가져올 여러 정치적 결과를 맥아더에게 강조하며 부정적인 편견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워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보다 곧바로 한국을 방문해 워커와 면담하기를 건의했다. 맥아더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곧바로 다음날인 7월 27일 대구로 날아가 워커에게 절대 추가 후퇴를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맥아더는 알몬드 보고를 받은 뒤 워커의 전투 의지를 의심했고, 워커에게 강력한 경고를 날리기 위해 한국행을 결정했다. 맥아더, 워커, 알몬드 세 사람만 있었던 90분의 대구 면담은 워커를 향한 맥아더의 일방적 질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면담 이틀 후인 7월 29일, 워커의 그 유명한 ‘버티지 못하면 죽음(Stand or die)’이라는 명령이 나왔다.
맥아더의 신임을 이용해 현장사령관을 곤경에 빠뜨리는 알몬드의 농간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오죽하면 도쿄사령부에서 함께 일했던 한 참모는 알몬드를 셰익스피어 비극 ‘오셀로’에 나오는 악역 이아고(Iago)에 비유했다. 이아고는 상관 오셀로의 질투심을 자극해 오셀로를 악행으로 이끌고 결국 파멸에 빠트리는 ‘음모의 화신’이다.

국군과 미군의 낙동강 방어선
“워커가 이승만으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았을 때, 알몬드는 그런 일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 자신이 한국 정부의 무공훈장을 받자, 알몬드는 아내에게 편지를 네 쪽이나 보냈다.”
(마이클 린치 ‘에드워드 알몬드와 미 육군’ 중에서)
알몬드가 워커를 배제하고 무능한 장군처럼 보이도록 한 작전은 효과를 발휘했다. 맥아더는 워커가 낙동강에서 북한군과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이는 사이, 후방 기습을 통해 수도 서울을 직접 공략하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다. 상륙군은 미육군 사단, 미해병 사단, 국군 일부 부대로 구성된 7만 명 군단급 규모였다. 이때 맥아더는 워싱턴 합동참모본부와 상의도 없이 자기 측근인 참모장 알몬드를 신설 10군단의 군단장으로 선임했다. 게다가 10군단을 8군 휘하에 두지 않고, 자기 직속 별동대로 운용했다. 결국 한반도 전장 지휘권을 워커와 알몬드로 이원화한 것인데, 특정 지역의 모든 부대는 사령관 한 명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지휘 통일(unity of command) 원칙을 대놓고 어긴 것이다. 당시 도쿄사령부 안팎에선 인천 상륙이 알몬드의 3성장군 승진을 위한 작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맥아더는 동원 가능한 물자와 무기 보급을 대부분 알몬드 군단에 몰아줬다. 그래서 워커 휘하의 낙동강 전선은 항상 보급 부족에 시달려야 했고, 그 결과 워커 8군은 인천 상륙 D-데이인 9월 15일까지도 낙동강을 넘지 못하고 남쪽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자신의 편파적 보급 계획 때문에 워커 8군 전투 역량에 제한이 있었음에도, 맥아더는 10군단의 인천 상륙 후 8군의 북진이 늦어진 것을 워커의 능력 부족 탓으로 돌렸다. 워커는 나중에 인천상륙작전의 탄약 보급 규모를 듣고 깜짝 놀라 “내가 여기서 북한군 90%를 죽이는데 쓰는 탄약보다, 쟤들(알몬드 군단)이 월미도에서 북한 애송이 몇 명을 상대하는 탄약이 더 많다”고 말했다.
맥아더사령부의 ‘보급 차별’은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이 성공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당시 유엔군의 기세와 북한군의 지리멸렬을 생각하면 신속하게 8군과 10군단의 지휘권을 일원화해 곧바로 육로를 통해 북진하는 것이 적절했음에도, 맥아더는 10군단을 계속 별도 지휘체계 하에 유지하며 또 한 번 상륙작전을 계획했다. 한 달 안에 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키기 위해, 최대 항구인 부산항과 서울 인접 인천항의 보급 우선권을 계속 알몬드 군단에 줬다. 그 결과 육로를 통해 사리원-평양-신의주 방면으로 밀고 올라가야 할 8군의 보급이 지연됐고, 워커의 북진 속도는 또 늦어졌다.
맥아더의 편애를 확인한 알몬드도 노골적으로 워커에게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했다. 인천 상륙 후엔 남쪽의 8군과 북쪽의 10군단이 공조해 북한군 잔당을 포위 섬멸해야 했음에도, 알몬드 부대는 독자적 작전에만 주력했다. 낙동강을 돌파한 8군은 안동과 충주를 확보한 뒤 10군단의 수원 지역 차단 필요성을 도쿄사령부에 요청했지만, 맥아더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다수 북한군이 포위망을 벗어났다. 또 북한군이 원주와 춘천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음을 확인한 8군이 10군단에 연대급 병력 급파를 요청했지만, 알몬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맥아더의 이상한 편애와 편견, 알몬드의 질투와 독점욕이 한국전쟁 가장 결정적 순간에 유엔군 공세 역량을 오히려 제한하는 결과로 작용했다.
“스미스는 자신이 네 가지의 적과 맞서 싸우게 됐음을 알게 됐다. 그것은 산악, 겨울, 중국, 그리고 자신의 상관(알몬드)이었다.” (햄프턴 사이즈 ‘데스퍼레이트 그라운드’ 중에서)

인천상륙작전 사흘째인 1950년 9월 17일 미군 지휘부가 미해병1사단 지휘소에서 작전 브리핑을 경청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 르무엘 셰퍼드 태평양 해병대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올리버 스미스 미해병1사단장. 미 해병대
(악역2: 스미스와의 반목)
알몬드와 지독한 악연으로 얽힌 두 번째 인물은 ‘장진호 전투의 영웅’ 올리버 스미스 미해병 장군이다. 알몬드와 스미스는 완전히 정반대 성격의 소유자였다. 알몬드는 성급하고 적극적이며 부하들을 시시각각 닦달하며 성과를 내는 장군이었다. 반대로 스미스는 진중하고 매사에 학구적이며 자신이 솔선수범해 부하들을 스스로 따르도록 하는 스타일이었다.
두 사람 간 관계에서 ‘피해자’ 격인 스미스의 회고를 보면 둘은 처음부터 궁합이 맞지 않았다. 스미스는 인천 상륙 작전에 투입되는 미해병1사단을 지휘하기 위해 1950년 8월 도쿄에 도착했고, 이때 맥아더사령부에서 참모장 알몬드를 처음 만났다. 알몬드는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한 시간 반 동안 스미스를 기다리도록 했고, 대면해서도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스미스에게 함부로 말을 내뱉었다. 알몬드는 스미스를 ‘son’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미군에서 ‘son’은 나이 지긋한 고위 장교가 젊은 초급 장교나 어린 병사들을 부르는 애칭 같은 표현이었다. 상황에 따라 ‘젊은이’나 ‘자네’, 혹은 ‘녀석’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겨우 10개월 먼저 태어났고 장교 임관이 1년 빠를 뿐인 알몬드가 같은 계급 장성(소장)인 스미스에게 사용하기엔 적절치 않은 호칭이었다. 스미스는 알몬드와의 첫 만남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의심을 품었고, 스미스의 예감은 바로 적중했다.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 과정에서 군단장 알몬드와 사단장 스미스는 여러 차례 불화를 노출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맥아더의 비현실적인 명령에서 시작됐다.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맥아더는 알몬드에게 “9월 25일까지 서울을 탈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날은 바로 전쟁 발발 3개월 되는 날이었고, 맥아더는 세 달 만에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는 상징적 업적을 달성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인천에서 서울까지 7만 명의 대부대를 끌고 진격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열흘 안에 서울을 탈환하려면 아군의 좌우 측방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한 진격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알몬드는 맥아더의 ‘9월 25일 수복’을 지상명령으로 생각하고 휘하 사단장들에게 무작정 공격을 지시했다. 신중한 성격의 스미스는 군단장 명령을 회피하거나 서면 명령서를 요구하는 식으로 시간을 끌었고, 이 때문에 성마른 알몬드는 사단장을 고의로 우회해 연대장이나 대대장, 심지어 해병 중대장에게까지 직접 명령을 내리는 식으로 진군 속도를 높이려고 했다. 10군단이 상륙 13일 만인 9월 28일 서울을 되찾는 데 성공했지만, 스미스의 시간 끌기와 알몬드의 무시가 계속되면서 두 사람 관계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미해병대는 11월 초부터 중공군과 싸웠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다. 그럼에도 알몬드는 중공군을 세탁업자라고 조롱했다. 10군단 안에서 중공군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몰랐던 사람은 군단장 알몬드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미7해병연대 2대대 작전장교 제임스 로렌스 소령)

장진호 전투 전개도.
알몬드와 스미스의 악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둘 사이가 최악으로 치달은 것은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서였다. 장진호 전투 직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의 위세는 절정에 달했고, 그런 맥아더를 추종하는 알몬드도 더 공격적으로 변해 있었다.
이때도 갈등의 계기는 맥아더의 무리한 명령이었다. 맥아더는 인천 작전이 끝났음에도 알몬드 10군단을 워커 8군에 편입시키지 않은 채 원산에서 다시 한 번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맥아더는 △원산에 상륙한 미해병1사단에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을 넘어 강계와 압록강 중류(만포진) 방향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함경남도 이원에 상륙한 미보병7사단에는 압록강 상류(혜산진)를 향해 바로 북진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그러나 스미스의 해병사단 입장에서 이 명령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해병대는 원래 적진 후방으로 상륙해 아군 증원 시까지 교두보를 확보하는 게 임무다. 상륙작전으로 확보된 돌파구를 통해 내륙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건 육군의 일이다. 당시 맥아더가 해병대에 요구한 것은 동해안에서 서진해 백두대간과 개마고원을 관통한 뒤, 다시 방향을 북쪽으로 튼 다음 평안북도의 여러 산맥을 넘어 압록강까지 가는 초장거리 행군이었다. 전문 산악부대가 아닌 해병대에 이런 기동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군단장 알몬드는 명령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고 더 무모한 세부 작전 계획을 사단장 스미스에게 하달했다.
부대의 안전보다 속도를 우선한 10군단 작전계획 때문에, 해병1사단 전력은 장진호를 중심으로 수십 ㎞ 이상 넓게 분산돼 있었다. 장진호 전투 시작 당시 5·7해병연대는 호수 서쪽의 유담리, 스미스의 사단사령부는 호수 남단 하갈우리, 1해병연대는 남동쪽 계곡 방면 고토리, 보급기지는 그보다 더 아래 진흥리에 흩어져 있었다. 유담리-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를 잇는 보급로는 차 두 대가 교행하기도 어려운 산길이었는데, 보급로 길이가 56㎞에 달했다. 적이 취약한 보급로를 동시에 차단한다면 연대나 대대별로 각개격파 당하기 십상인 지형이었다. 그럼에도 알몬드는 해병사단을 뭉쳐서 전진시키기보다 길게 종대로 늘어뜨려 빨리 산악지역을 통과하길 바랐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 역사학자 T. R. 페렌바크는 당시 상황을 두고 “음산한 땅에 분산된 (해병대의) 연대와 대대들은 실오라기처럼 취약한 길 하나로 이어져 있었고, 130km나 떨어진 8군과 10군단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묘사했다. 실제로 그 넓은 빈틈엔 12개 사단(12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이 들어차 있었지만, 맥아더와 알몬드는 그 가능성을 애써 무시했다.
사단장 스미스만이 중공군 투입시 해병대가 맞이할 수도 있는 끔찍한 운명(포위 섬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미스는 알몬드의 신속 진격 명령에 맞서 해병사단의 전진을 ‘명령 불복종 수준으로’(당시 참전용사 마틴 러스의 회고) 최대한 지연시켰다. 정찰을 계속하고 주변 고지를 확인하며 유사시에 필요한 보급품 기지를 설치하느라, 해병대는 하루 평균 1.5㎞씩 거북이 진격을 거듭했다. 알몬드는 빠른 진격을 계속 종용했지만, 스미스는 재량권이 허용하는 최대 수준으로 신중하게 움직였다. 해병대의 늦은 진격이 진행 중이던 11월 27일 중공군 12만 명의 전면 포위 공격이 시작됐다.
사단 전체가 겹겹으로 포위된 상황에서, 2만8,000명 해병1사단이 사상자 3,615명(전사 561명, 부상 2,872명 등)으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스미스의 신중함 덕분이었다. 스미스가 미리 만들어 둔 간이비행장을 통해 4,312명의 부상자가 후송돼 목숨을 구했다. 만약 군단장 명령에 꼼짝 못하는 여느 사단장이었다면 알몬드의 진격 지시를 어기지 못했을 것이고, 장진호보다 더 먼 곳까지 진격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해병1사단은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해병사단이 전멸했다면 미국 정부는 한국에서 철수했을 것이다. 맥아더의 고집과 알몬드의 맹종이 전쟁을 망칠 뻔했던 위기에서, 스미스의 신중한 판단이 승리의 불씨를 살렸다.
“알몬드는 (23연대장) 프리먼이 부상 입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부상을 빌미로 프리먼을 해임한 다음,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인물에게 23연대 지휘권을 맡길 심산이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중에서)

지평리 전투 장면을 그린 미군의 포스터. 미 육군
(악역3: 지평리 전투 방해)
알몬드와 척졌던 세 번째 한국전쟁 영웅은 미보병2사단 23연대장이던 폴 프리먼 대령(나중에 대장까지 진급)이다. 프리먼은 유엔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첫 번째 승리 ‘지평리 전투’(1951년 2월 13~15일)의 지휘관이었다. 프리먼은 차분한 성격에 준비성이 철저했으며 부하들을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이끄는 ‘지장+덕장’형이었다. 스미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스타일의 장교와 알몬드는 영 궁합이 좋지 못했다. 알몬드는 적극적이지 않은 프리먼의 태도를 싫어했고, 마침 지평리 전투 전 23연대 시찰에서 확인한 몇 가지 지적사항 때문에 프리먼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가졌다. 그래서 프리먼이 23연대전투단(23연대+프랑스 대대+일부 지원부대)을 이끌고 지평리 방어전을 지휘하는 상황을 영 못마땅해 했다. 알몬드는 프리먼 교체를 위한 핑곗거리만 찾고 있었다.
지평리 전투 둘쨋날인 2월 14일 새벽, 본부 막사에 떨어진 박격포탄 때문에 연대장 프리먼이 종아리 부상을 입었다. 프리먼은 목발을 짚은 채로 부대를 지휘할 수 있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알몬드는 기다렸다는 듯 즉시 23연대장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가 선임한 새 연대장은 자신의 측근이자 군단 작전장교인 존 칠스 중령이었다. 현장 지휘관의 경상을 구실로 평소 못마땅했던 부하를 내쫓고 자기 사람을 심으려는 알몬드의 술수가 뻔히 눈에 보이는 조치였다.
전투 도중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건 동서고금 병법에서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원칙이지만, 알몬드는 이마저도 무시했다. 열흘 동안 철저한 방어 준비를 통해 지평리를 철벽 요새로 만든 프리먼이 남은 전투를 지휘하는 게 도의적으로나 작전적으로나 당연했지만, 알몬드는 연대장 교체를 밀어붙였다. 프리먼이 “이런 식으로 교체 당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최고의 불명예”라며 항의했지만, 알몬드는 결국 칠스를 비행기에 태워 지평리로 보냈다.
군단장의 부당한 보직 해임에 항의하기 위해, 강직한 프리먼은 그답지 않게 꼼수로 응대했다. 원래 칠스가 타고 온 비행기를 타고 지평리를 떠나야 했지만, 간이비행장에 나타나지 않고 시간을 끌었고 그 덕분에 하루 더 지평리에 머무를 수 있었다. 명목상 연대장은 칠스였지만 실질적으로 전투 마지막 날인 다음날(15일) 오전까지 프리먼이 연대전투단을 지휘했고, 프리먼의 지휘로 사실상 지평리 전투 승리가 마무리됐다. 그래서 역사는 지평리 전투를 알몬드와 칠스의 승리가 아니라, 프리먼과 랄프 몽클라르(프랑스 대대장)가 일군 쾌거로 기억한다.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패배주의를 떨쳐내며 중공군을 힘으로 밀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중공군도 이 전투 이후엔 유엔군과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 한반도 적화통일 대신 휴전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됐다. 이 역사적인 지평리 전투 승전 이면에, 아집과 편견 때문에 전투 전체를 망칠 뻔했던 알몬드의 위험한 야심이 숨어 있다.
“장군, 부탁 드립니다. 우리가 그냥 떠나면, 저기 있는 피란민들은 중공군 손에 몰살 당하고 말 것입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현봉학이 알몬드에게 민간인 대피를 요청하는 장면)

1950년 흥남철수에서 민간인들을 태운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모습. 미 해군
(반전: 흥남 철수의 은인)
알몬드가 한국전쟁에서 악역만 담당했을 것 같지만, 그건 또 아니다. 현대 전쟁사에서 가장 인간애 넘치는 군사작전 중 하나로 꼽히는 흥남철수(1950년 12월 14~24일) 과정에서 민간인 대피 작전을 지시하고 실행한 인물이 바로 알몬드였다.
흥남철수는 중공군 2차공세(1950년 11~12월) 당시 미 10군단이 함경남도 흥남항을 통해 병력 10만 명과 민간인 약 10만 명을 대피시킨 초대형 철수 작전이다. 규모 면에서는 2차대전 당시인 1940년 연합군의 됭케르크 철수(약 33만 명)와 비교된다. 장비를 버리고 인원만 탈출했던 됭케르크와 달리, 흥남은 군인·민간인·장비 등을 질서 있게 후방으로 빼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됭케르크보다 더 성공한 철수작전으로 평가 받는다.
1950년 2차공세 당시 중공군은 총 30만 병력으로 서부전선 워커 8군과 동부전선 알몬드 10군단을 기습 공격했다. 10군단은 미해병1사단의 선전(장진호 전투)으로 궤멸은 면했지만, 중과부적 상태에서 전선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고 결국 철수를 결정해야 했다. 철수작전을 세울 당시 미군은 125척의 수송선단을 이용해 병력(10만5,000명), 차량(1만8,422대), 전투물자(35만 톤)만을 후송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엔군이 북한 지역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흥남항 주변에 민간인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고, 미군 지휘부는 한국 민간인들을 철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했다. 미군은 애초부터 민간인을 함께 대피시킬 계획이 없었고, 민간인 사이에 중공군과 북한군이 섞여 들어올 가능성 때문에 피란민 후송에 부정적이었다. 알몬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알몬드의 마음을 돌린 사람이 한국계 미국인 문관이었던 현봉학(1922~2007) 박사다. 현 박사는 마침 알몬드 고향인 버지니아주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는데, 이 인연 때문에 알몬드에게 청을 넣기가 수월했다. 그리고 현 박사는 한국인 피란민의 상당수가 기독교 신자였음을 강조해, 미군 수뇌부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마침내 현 박사와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알몬드가 맥아더에게 건의해 민간인을 철수 작전에 포함시켰고, 10만 명의 피란민이 유엔군을 따라 부산과 경남 지역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알몬드가 2020년 9월 국가보훈처 선정 이달의 6·25 영웅으로 선정된 것도 흥남에서 세운 공 덕분이다.
“지휘관은 성공과 실패만으로 평가받을 게 아니라 실패로부터 얼마나 잘 회복했느냐로도 평가받아야 한다. 알몬드의 경험 부족, 지형 파악 미숙, 적 정찰 실패는 재앙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실패를 극복하고 후퇴에 성공했고, 전투력을 계속 보존했다. 장진호 전투 실패는 암울했지만, 10군단과 한국인들을 훌륭하게 대피시킨 것은 평가할 만하다.”
(역사학자 마이클 린치)

알몬드에 대한 다양한 평가
한국전쟁이란 대하드라마의 전반부 주연은 누가 뭐래도 맥아더였고, 알몬드는 그 주연을 보조하는 ‘확실한 조연’이었다. 미군의 한반도 파병, 인천 상륙, 서울 수복, 유엔군 북진,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 지평리 전투 등 6·25전쟁 가장 결정적 분기점에서 모두 깊숙이 관여한 유일한 미군 장성이 알몬드다. 그러나 알몬드는 한국전쟁에서 공보다 과를 많이 남겼다. 그는 매우 영리하고 능력있는 군인이었지만, 인성과 인간관계에서의 문제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작전에서 실패를 자초했다. 결국 훨씬 더 나은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고 말았다. 리더의 능력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리더가 자기 인성을 스스로 잘 통제하고 부하들을 진심으로 감화시키는 것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를 반면교사의 사례로 일깨워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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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알몬드 생애 전반>
-Michael Lynch ‘Edward M. Almond and the US Army’
<알몬드 행적>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Allan Millet ‘The War for Korea 1950-1951’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Joseph Goulden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Richard Stewart ‘Staff Operations: The X Corps in Korea, December 1950’
-Roy Appleman ‘Ridgway Duels for Korea’
-Shelby Stanton ‘America's Tenth Legion: X Corps in Korea, 1950’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워커와의 관계>
-Charles M. Province ‘General Walton H. Walker: The Man Who Saved Korea’
-Dean Nowowiejski ‘Comrades in Arms: The Influence of George S. Patton on Walton H. Walker’s Pusan Perimeter Defense’
<장진호 전투>
-마틴 러스 ‘브레이크 아웃’
-햄프턴 사이즈 ‘데스퍼레이트 그라운드’
-Roy Appleman ‘Escape the Trap’
<흥남철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⑦’
-김선호 ‘흥남철수작전과 월남민 현봉학의 역할’
-이원희 ‘6·25전쟁시 피난민 보호활동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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