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가 잉글랜드를 꺾고 월드컵 결승 진출을 확정한 뒤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현수막을 경기장에서 펼쳐 국제축구연맹(FIFA)의 징계를 받을 가능성에 휩싸였다.
글로벌 스포츠 전문 매체 '디 애슬레틱'은 16일(한국시간)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잉글랜드와의 준결승 승리 직후 포클랜드 제도(아르헨티나명 말비나스) 관련 현수막을 들고 세리머니를 펼쳤고, 이 행위가 FIFA 규정 위반으로 판단될 경우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아르헨티나는 이날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애틀랜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준결승에서 잉글랜드에 2-1 역전승을 거두며 2회 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경기 종료 후 선수단은 결승 진출의 기쁨을 만끽했지만, 세리머니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논란이 불거졌다.
매체에 따르면 미드필더 조반니 로셀소는 경기 직후 'Las Malvinas son Argentinas(말비나스는 아르헨티나의 영토다)'라고 스페인어로 적힌 현수막을 들고 그라운드에 등장했다.
로셀소는 수비수 니콜라스 오타멘디와 함께 현수막을 펼쳤고, 잠시 접는 듯했지만 다시 잔디 위에 펼쳐놓으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디 애슬레틱'은 "이 현수막이 처음에는 관중석의 아르헨티나 팬들이 들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FIFA와 국제축구평의회(IFAB)가 정치적 메시지 노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매체는 IFAB 경기 규칙을 인용해 "선수 장비에는 정치적·종교적·개인적 구호나 문구, 이미지가 포함되어서는 안 되며, 이를 위반할 경우 선수나 팀은 대회 주최 측이나 국가협회, FIFA로부터 제재를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또한 FIFA의 경기장 행동강령 역시 정치적 성격의 현수막과 깃발, 전단, 의류 등 각종 물품의 반입과 노출을 금지하고 있다.

'디 애슬레틱'은 "이번 현수막이 정치적 표현으로 판단될 경우 FIFA 경기장 행동강령도 함께 위반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짚었다. FIFA는 이에 대해 아직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말비나스'는 아르헨티나에서 포클랜드 제도를 부르는 명칭이다.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 동쪽 약 480㎞ 해상에 위치한 영국령으로, 양국은 오랜 기간 영유권 분쟁을 이어왔다.
특히 1982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포클랜드를 침공하면서 양국은 전쟁을 치렀고, 약 두 달간 이어진 전쟁 끝에 영국이 승리했다. 당시 민간인 3명과 영국군 255명, 아르헨티나군 649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지금도 해당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오는 20일(한국시간) 미국 뉴저지주 이스트 러더퍼드의 뉴욕 뉴저지 스타디움(메트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스페인과 2026 북중미 월드컵 결승전을 치른다.
만약 아르헨티나가 정상에 오를 경우 브라질(1958·1962년), 이탈리아(1934·1938년)에 이어 월드컵 2연패를 달성한 역대 세 번째 국가가 된다. 대기록에 도전하는 아르헨티나지만, 결승전을 앞두고 정치적 세리머니를 둘러싼 FIFA의 판단에도 시선이 쏠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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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전쟁


포클랜드 제도(Falkland Islands)는 영국으로부터 무려 1만 2,832킬로미터 떨어진 영국의 자치령 식민지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초부터 자국 해안에서 불과 480킬로미터 떨어진 포클랜드가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1833년 이후 이 제도를 무력으로 점령·통치한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계속해서 묵살해왔다. 결국 1982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수장인 레오폴도 갈티에리(Leopoldo Galtieri) 장군은 정권 유지를 위한 카드로 포클랜드를 뽑아들었다.
포클랜드를 탈환하라
2개의 큰 섬(이스트포클랜드·웨스트포클랜드 섬)과 200여 개의 조그만 섬으로 이루어진 포클랜드 제도에는 2,000여 명의 영국 주민이 거주했으며, 이들을 79명의 해병 코만도 분견대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1982년 3월 28일 아르헨티나군은 2,500여 명의 해병 및 특수전 병력을 출동시켜 4월 2일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소수에 불과한 영국 해병 코만도는 포트스탠리(Port Stanley)의 정부청사 앞에서 항전을 펼쳤지만, 결국 렉스 헌트(Rex Hunt) 총독의 명령에 따라 아르헨티나군에 투항했다.

영유권을 놓고 150여 년 동안 영국과 분쟁을 벌이던 아르헨티나는 결국 1982년 4월 2일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했다.
이튿날 아르헨티나군은 포클랜드 제도의 동쪽 1,60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부속도서인 사우스조지아(South Georgia)·사우스샌드위치(South Sandwitch)까지 장악했다. 4월 말까지 아르헨티나 측은 포병과 헬리콥터, 장갑차 및 푸카라(Pucará) 공격기를 포함하여 약 1만 명의 병력을 포클랜드 제도에 주둔시켰다.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수상이 이끄는 영국 정부는 신속히 대응했다. 우선 외교전을 펼쳐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4월 3일 아르헨티나의 적대행위 중지 및 철군을 요구하는 안보리 결의 제502호를 채택했다. 그리고 포클랜드 주변 320킬로미터 해역을 전쟁지역으로 선포하고 4월 5일 포클랜드 탈환을 위한 해군 기동부대를 출항시켰다.

4월 25일에 이르자 영국의 해군 기동부대가 영국령 어센션(Ascension) 섬을 경유하여 전쟁지역을 향해 1만 3,000킬로미터를 순항해왔다. 이렇게 험난한 원정에 나선 영국 기동함대의 최대의 적은 바로 아르헨티나군이 보유한 쉬페르에탕다르(Super Étendard) 공격기와 5발의 엑조세(Exocet) 대함미사일이었다. 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투입된 2척의 항공모함이 엑조세 미사일의 공격을 받는다면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고 전쟁에서 질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르헨티나군의 항공모함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군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바로 영국 최고의 특수부대인 SAS(공수특전단)를 투입한 것이다.
영국 해군을 괴롭힌 것은 엑조세 대함미사일과 그 플랫폼인 쉬페르에탕다르 공격기였다. 이들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었다.
【CC BY】 Martin Otero

미카도 작전, 엑조세를 파괴하라
1941년 SAS는 독일군의 항공기를 파괴하는 특수부대로 창설되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난 이후 SAS는 이런 작전을 수행할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종전 직후에 해체되었다가 1947년 재창설된 이후 SAS는 대게릴라전이나 대테러임무를 수행했을 뿐 정규전에 참가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무려 40여 년 만에 그 기회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SAS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르헨티나 본토의 리오그란데(Rio Grande)에 위치한 항공기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임무가 주어지자 당시 SAS의 지휘관인 휴 마이클 로즈(Hugh Michael Rose) 중령은 임무를 수행할 부대로 B지역대(지휘관 존 모스(John Moss) 소령)를 선정했다. 이 타격작전에는 '미카도(Mikado)'라는 작전명이 붙었다. 작전의 목표는 엑조세 대함미사일과 그 플랫폼인 쉬페르에탕다르 공격기 5대를 모두 파괴하고 조종사를 사살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작전계획으로는 C-130 허큘리스(Hercules) 수송기를 통한 침투계획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험난한 임무였다. SAS처럼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1,300여 명의 정예 해병이 리오그란데 항공기지를 수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기지는 첨단 방공레이더를 보유하여 다가오는 적기를 쉽게 탐지할 수 있었고, 주변지역에는 방공미사일망이 촘촘히 설치되어 다가오는 적기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게다가 인근에 항공기지가 없기 때문에 침투하는 항공기는 항속거리의 한계까지 비행한 이후 버려야 했다. 이것은 돌아올 길이 없는 자살임무였다.
SAS 내부에서도 커다란 의견충돌이 있었다. SAS는 전통적으로 퇴출수단이 아예 없는 임무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보여 왔다. 그러나 5월 4일 엑조세 대함미사일의 공격으로 구축함 셰필드(HMS Sheffield)가 참혹하게 침몰한 이후, 미카도 작전은 더 이상 취소하거나 미룰 수 없는 최우선순위 작전이 되어버렸다.

페블 섬 기습
포클랜드 제도의 서쪽에 위치한 영국령 페블 섬(Pebble Island)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넓게 펼쳐진 섬이었다. 1982년 4월 23일, 아르헨티나 국적의 항공기 1대가 페블 섬의 활주로에 착륙했다. 우편배달을 위해 페블 섬에 왔다던 항공기에서 내린 한 무리의 남자는 활주로의 크기를 살펴보면서 여러 가지 데이터를 기록했다.
몇 시간 후에 UH-1 휴이(Huey) 헬리콥터가 활주로에 내렸다. 아르헨티나 육군 정찰대가 헬리콥터에서 내려서 통신장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지역주민이 모여들자 정찰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아르헨티나군은 페블 섬을 점령하지 않을 것이지만, 때때로 정찰하러 올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언은 거짓말이었다.
다음 날 아르헨티나 해안경비대 소속의 스카이밴(Skyvan) 수송기가 도착해 아르헨티나 공군의 지상관제요원들을 내려놓았다. 곧이어 아르헨티나 해군 제4공격비행대대 소속의 T-34C-1 멘터(Mentor) 경공격기 여러 대가 활주로에 착륙했다. 그리고 1주일 후인 4월 30일에는 공군 제3공격비행단 소속의 FMA IA58 푸카라(Pucara) 쌍발 공격기들이 활주로에 착륙했다. 이제 페블 섬의 활주로는 아르헨티나군 150여 명이 주둔하는 비행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아르헨티나군은 활주로 인근 주민의 통행을 금지했다.

아르헨티나군은 매우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우선 활주로가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 400여 명까지 수용해야 할 야전기지를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페블 섬 비행장은 포클랜드 서부지역에 마지막 남은 아르헨티나군의 주요기지였다는 점이다. 즉 영국군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말이다. 아르헨티나군의 이런 우려는 곧 현실화되었다.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앞두고 있는 영국군 원정부대에게 페블 섬의 항공병력은 눈엣가시였다. 아르헨티나군은 여기 배치된 항공기들에게 정찰임무를 부여했는데, 정찰기에 영국 해군의 상륙이 발각된다면 치열한 공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 항공기들을 제압하는 임무에 SAS가 투입되었다. 미카도 작전 준비에 여념이 없던 SAS에게 이것은 훌륭한 연습게임이 될 터였다. 항공모함 헤르메스(HMS Hermes)에 주둔 중이던 SAS의 D지역대(지휘관 세드릭 델브스(Cedric Delves) 소령)가 이 임무를 맡았다.
아르헨티나의 침공에 맞서 영국은 항공모함 헤르메스(사진)와 인빈시블을 포함하는 해군 기동부대를 구성하여 4월 5일 포클랜드로 출항시켰다.

정찰조 투입
5월 11일 자정 무렵 D지역대의 보트 중대원 8명이 시킹(Sea King) 헬리콥터 편으로 페블 섬 서쪽 끝에 위치한 케펠 섬(Keppel Island)에 투입되었다.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헬리콥터는 케펠 산과 코브 언덕(Cove Hill) 사이에 착륙했다. 완전군장에다가 클레퍼 카누(Klepper canoe)1)까지 장비한 정찰대원들은 페블 섬이 한눈에 보이는 동쪽 고지대로 이동하여 관측소를 설치했다. 특히 이들은 카누로 접근할 지점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하루 동안 대기하고 있던 정찰대원들은 13일 저녁 카누를 이용하여 케펠 해협을 건넜다. 케펠 해협은 물살이 매우 거셌기 때문에 모터가 없는 카누만으로 건너기 매우 어렵고 위험했다. 그러나 상황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던 대원들은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해협을 건넜다. 페블 섬에 도착하자마자 정찰대 2인조는 활주로가 한눈에 보이는 산으로 이동하여 관측소를 설치했다. 항공기는 어떻게 주기되어 있는지, 유류저장고가 어디인지, 어떤 레이더 장비가 어디에 설치되었는지 등 중요한 세부현장정보를 관측소에서 기록했다. 페블 섬의 가장 커다란 위협은 바로 레이더 장비와 푸카라 공격기였다. 이 두 가지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5월 14일 낮이 되자 갑자기 바람이 거세졌다. 기습부대는 헬리콥터를 통하여 투입할 예정이기 때문에 풍향과 풍속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정찰대의 정보에 따르면 바람으로 인하여 헬리콥터의 비행시간이 증가할 터였다. 애초에 작전계획에 의하면 SAS의 공격부대는 약 90분간 파괴활동을 수행할 예정이었지만, 비행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공격 기회는 30분으로 재조정되었다.

공격부대는 영국 해군의 항공모함 헤르메스로부터 발진할 예정이었다. 헤르메스 항공모함전단에는 구축함 글러모건(HMS Glamorgan)과 초계함 브로즈워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5월 14일 밤이 되자 3척의 함정은 북쪽으로부터 페블 섬으로 접근해갔다. 그러나 이때 브로즈워드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항공모함전단의 방공임무를 맡은 브로즈워드의 시울프(Sea Wolf) 방공미사일 시스템이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고장을 수리하는 사이 브로즈워드는 항공모함전단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그 사이 글러모건은 4.5인치 함포의 지원사격을 위하여 페블 섬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했다. 이와 함께 영국군의 귀중한 전력인 헤르메스 항공모함은 해안에서 64킬로미터까지 접근했다. 강풍으로 인하여 줄어들 시킹 헬리콥터의 항속거리를 보충하기 위해, 원래 계획했던 위치보다 더욱 해안에 접근한 것이다.
페블 섬은 어느 섬보다 아르헨티나 본토에 가까웠기 때문에 헤르메스의 기동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다. 페블 섬의 정찰조는 활주로에 항공기 11대가 주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그날 밤 작전을 수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정찰중대는 비행장에서 6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헬리콥터의 착륙위치를 지정했다.

비행장 유린
5월 14일 밤, 제846해군항공대의 시킹 HC.Mk4 헬리콥터 2대를 타고 SAS D지역대원 48명이 목표지점에 투입되었다. D지역대의 산악중대가 항공기 파괴임무를 맡았고, 나머지 대원들은 비행장까지 통로를 확보하고 공격대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비행장까지 길 안내는 사전정찰조로 투입된 보트중대원들이 맡았다.
SAS 대원들은 대부분 M203 40㎜ 유탄발사기를 장착한 M16 소총을 들고 있었다. 여기에 폭약과 66㎜ L1A1 대전차로켓과 함께 L16 81㎜ 박격포와 포탄 100여 발을 가져왔다. 대원들은 각각 포탄을 2발 이상 짊어져야만 했다. 결국 공격지점까지 이동시간이 더욱 늘어나게 되자 공격 직전 정착민들과 접선한다는 계획은 취소했다.
공격부대가 목표에 도달하자 아르헨티나군 경비병들이 보였다. 다행히도 경비병들은 SAS가 접근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활주로까지 접근한 공격부대는 이제 위치를 잡기 시작했다. 쌀쌀한 날씨 때문에 경비병력은 대부분 숙영지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지원부대가 적군의 숙영지를 향해 박격포대와 중기관총 진지를 설치하는 사이에, 공격부대는 활주로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적의 감시를 피해 공격부대는 레이더 장비와 항공기 7대에 플라스틱 폭약을 장착하고 본격적인 공격을 준비했다.

파손된 FMA IA58 푸카라 공격기. SAS의 기습공격으로 페블 섬에 배치되었던 푸카라 공격기 등 항공기 11대가 모두 파괴되었다. 포클랜드, 스탠리 공항.
구축함 글러모건의 4.5인치 함포사격이 시작되자 이를 신호로 기습부대는 일제사격을 시작했다. 폭발과 동시에 대원들은 항공기를 향해 M16 소총과 L1A1 로켓탄을 소사했다. 폭약에 의해 파괴되지 못한 항공기들은 SAS 대원들의 사격으로 벌집이 되었다. 특히 영국군은 동류전환2)으로 항공기를 수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항공기마다 같은 부분에 사격을 집중했다. 치열한 공격으로 아르헨티나군의 레이더 장비와 푸카라 공격기 6대는 물론이고 멘터 경공격기 4대, 스카이밴 수송기 1대와 유류저장고 등 주요전력이 괴멸했다.
한편 포탄이 작렬하자 아르헨티나군은 영국군의 본격적인 상륙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함포사격이 계속되는 동안 참호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따라서 SAS 대원들이 비행장을 유린하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공격부대가 비행장을 휘젓는 사이 엄호부대는 사격을 자제하고 조용히 기다렸다. 공격부대가 비행장에서 퇴각하고 재집결하고 나서야 엄호부대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SAS의 치열한 공격으로 인하여 페블 섬 비행장에 주기된 아르헨티나군 항공기 11대가 전부 파괴되었다. 또한 아르헨티나군의 현장지휘관도 영국군 공격으로 사망했다. 150여 명의 아르헨티나군 병력이 겨우 54명에 불과한 SAS에게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것이다. SAS는 적 항공기 11대 파괴 및 적군 1명 사살을 기록하며 07시 45분 헬리콥터 편으로 퇴출했다. 아군 부상자는 단 2명에 불과했다. 이제 영국군의 상륙을 위협하는 페블 섬의 비행장은 무력했다. 임무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실패한 정찰
한편 미카도 작전의 수행을 위하여 SAS B지역대의 정찰팀이 파견되었다. 정찰팀을 태운 제846해군항공대 소속의 시킹 헬리콥터 1대(기장 리처드 허칭스(Richard Hutchings) 대위)는 5월 17일 밤에 항공모함 인빈시블(HMS Invincible)에서 출발했다. 정찰팀의 주 임무는 리오그란데 항공기지 인근에 관측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만약 상황이 허락한다면 쉬페르에탕다르 공격기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이를 위하여 대원들은 플라스틱 폭약과 LAW 66㎜ 대전차로켓 등으로 무장했다.
무려 8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비행하기 위해 시킹 헬리콥터는 거의 모든 장비를 뜯어내고 보조연료탱크를 추가했다. 그럼에도 헬리콥터의 항속거리는 겨우 정찰팀을 침투시키고 인근의 중립국 칠레에 착륙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헬리콥터는 칠흑 같은 밤을 가르며 레이더를 피해 바다 위를 낮게 비행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본토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갑자기 시킹의 오메가 레이더 경고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놀란 기장이 랜딩기어가 수면에 닿을 정도로 급격히 고도를 낮추자 경고장치는 이내 꺼졌다. 하지만 같은 시각 부기장은 인근에서 신호탄이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 적군에 발각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헬리콥터는 내륙으로 침투하여 언덕 사이를 누비면서 레이더 탐지를 피했다. 착륙예정지점에 헬리콥터를 내리자마자 기장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이들은 착륙지점에서 무려 80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점에 내린 것이다.
결국 정찰팀을 태운 시킹은 임무를 포기하고 아르헨티나와 칠레 접경지대로 접어들었다. 일단 국경지역에 SAS 정찰팀을 내려놓은 허칭스 대위는 다시 해안으로 이동하여 헬리콥터를 칠레 남부의 푼타아레나스(Punta Arenas) 지역에 있는 호수에 착륙시켰다. 허칭스는 헬리콥터를 파괴하고 호수 속에 완전히 가라앉힐 작정이었지만, 헬리콥터는 윗부분을 드러낸 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정찰팀이 칠레 당국을 피해 은신한 사이에, 헬리콥터 승무원들은 통상의 초계임무 도중에 칠레로 불시착한 것으로 위장하고 칠레 당국에 보호를 요청했다.
작전 취소
정찰임무 실패로 인하여 SAS는 그야말로 장님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장님이건 아니건 SAS를 투입하는 것이 영국군 수뇌부의 결정이었다. 한편 그 사이에 SAS의 D·G지역대는 포클랜드 상륙작전 준비로 바빴다. 주력부대가 상륙하는 사이에 두 지역대는 기만상륙작전을 펼칠 예정이었다.
5월 19일 밤 G지역대는 이미 해안에서 대기 중이었고, D지역대는 헤르메스 항공모함으로부터 상륙함 인트러피드(HMS Intrepid)로 이동하고 있었다. 시킹 헬리콥터가 800미터 정도 떨어진 군함 사이를 이동하면서 몇 차례나 병력을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병력을 태웠을 때, 시킹에는 30명이 타고 있었다. 인트러피드의 좁은 헬리콥터 갑판에는 이미 헬리콥터가 내려 있었으므로, 시킹은 75미터 상공에서 선회하면서 갑판이 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시킹 헬리콥터는 커다란 충격으로 흔들렸다. 헬리콥터의 메인로터에 갈매기가 충돌한 것이다. 이 충돌사고로 로터를 잃자 헬리콥터는 곧바로 해수면으로 곤두박질치면서 두 동강 났다. 타고 있던 SAS 대원 대부분은 어찌해볼 도리도 없이 헬리콥터와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사고로 무려 22명이 익사했는데, 그중 20명이 SAS의 D·G지역대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 중 8명이 풍부한 전투경력을 갖춘 베테랑 부사관인 데다가 2명은 각각 D·G지역대의 선임하사였다는 점이다. 단 한 번의 사고로 SAS는 2차대전 이후 최악의 참사를 기록했다.
이 사건은 결국 미카도 작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군 수뇌부는 B지역대장을 교체하면서 작전을 독려했지만, 작전의 수행방법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한편 최초의 계획에 따라 C-130 수송기를 담당할 조종사 한 사람은 신경쇠약에 걸리기까지 했다. 결국 C-130을 활용한 엔테베식 특공작전은 폐지하고 두 번째 계획으로 잠수함을 통한 침투작전을 제안했다. 하지만 작전을 실행하기도 전에 포클랜드의 아르헨티나군이 항복함으로써 미카도 작전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SAS 파병
SAS는 불과 2년 전인 1980년 런던 주재 이란 대사관 인질 구출사건을 성공리에 수행하면서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그 여파로 SAS에 대한 수뇌부의 기대는 대단했다. 'SAS에게 맡기면 모든 임무는 성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실전은 달랐고, 무엇보다도 SAS 대원들 스스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미카도 작전과 같은 무모한 작전을 실행했더라면, 아마도 SAS는 B지역대를 전부 잃고 사상 최악의 부대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최고의 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알고 향상시키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명확히 임무의 한계를 긋는 과감성도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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