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중국여행 3일차 : 숭산(소림사무술관-소림사-탑림-적자구-현공잔도-삼황채)

온리하프 2019. 10. 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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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

2019년 10월 19일 (토)
낙양 - 등봉 - 초작

기상 후 조식

[트레킹 2일차]

中岳 崇山 숭산 핵심 소실산 (1,512m) 트레킹(약 4시간 30분 소요)

       ☞ 코스: 삼황채 → 현공잔도 → 적자구 → 탑림 → 소림사찰 → 무술공연(관람) → 소림사

                 * (왕복 케이블카 이용시 개인부담)

하산

초작으로 이동(약 3시간 소요)

석식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숭산의 소실산 등산지도

※ 강력주의 : 탑림제자구 구간은 무조건 숭산소림삭도(케이블카) 이용이 합당하다.

※ 소림사무술관에서 무술공연을 보려면 줄 맨 앞쪽에 자리잡고 있어야 위험하지 않다.

중국인들은 공연을 앉아서 보려고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온다.

정말 놀라지 안을 수 없었다. 공연내용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08:40    낙양대주점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등봉으로 1시간 이동하였고~

오악 중 중악의 숭산에서 소실산을 트래킹하기로 한다.


비록 버스안이지만, 산의 형상이 범상치 않음을 직감하게 된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는 "중원을 지배하는 자 천하를 얻는다(得中原者得天下)"는 명언을 남겼다.

대륙을 놓고 치열한 각축을 벌인 자의 실감나는 말이다. 그만큼 중원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중원은 세계 4대문명 발상지이자 중국 문명의 발원지이며, 대륙의 교통 요충지이다.

유장하게 흐르는 황하를 곁에 두고 중국 최대 곡창지대인 화북평야가 있고,

중국 최대의 고도(古都)로 꼽히는 낙양(洛陽)과 정주를 거쳐 대륙 전체의 모든 교통이 지나간다.

그 중원에 중악 숭산(嵩山)이 우뚝 솟아 있다.





왜 그곳에 중악(中岳)을 정했을까?

중국 지도를 보면서 조조의 말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된다.

조조뿐만 아니라 중국 속담에 ‘5,000년 역사를 보려면 낙양을 보고, 500년 역사를 보려면 북경을 보라’는 말이 있다.

북경 이전까지 중원의 핵심은 낙양이었다.

역대 중국 왕조 중 동주·동한·조위·서진·북위·수·당·수양·수당 등 무려 13개 왕조의 도읍지이자 200여 명의 황제가 머물던 곳이다. 명실상부 중국 최고의 고도다.

아마 중악으로 정해지기 전부터 이미 중국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었던 듯싶다.

오악이란 개념이 도입되면서 가장 핵심인 중악으로 정해지는 건 역사적으로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낙양엔 중악 숭산이 있고,

숭산 자락 아래 불교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가 수련한 소림사가 있고, 중국 4대 서원 중의 하나인 숭양서원이 있다.

사마광이 이곳에서 <자치통감>을 저술했다.

더욱이 중국 최초의 사찰인 서기 68년에 창건한 백마사(白馬寺)와 서기 71년 두 번째로 창건한 범왕사가 있다.

낙양과 숭산이 중국 불교의 성지이자 발상지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림사탑구무술학교"


사람이 죽으면 간다는 북망산도 낙양 북쪽에 있다.

북망산에는 여러 왕조의 수 많은 황제릉이 산재해 있다. 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공동묘지와 같은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고묘군이다.

낙양이 중국 역사에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이다.

이같은 유적들로 인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또한 인류역사보다 오래되는 30억 년 동안 쌓인 다양한 퇴적층으로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중국 허난(河南)성 덩펑(登封)시에 자리 잡은 숭산(嵩山)의 서쪽 끝자락인 샤오스산(少室山)에

천하제일명찰(天下第一名刹) 소림사가 있어 숭산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있다.


소림사는 중국 선종의 본산이란 큰 명예를 지닌 천년고찰이다.

493년 남북조시대 북위 황제 효문제가 인도에서 온 고승 발타(跋跎) 선사를 위해 절이 건립했는데, 이것이 소림사의 시초였다.

소림사는 샤오스산 숲속에 지은 절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수십 년 뒤 숭산에 온 또 다른 인도 고승 달마(達摩)대사가 소림사의 운명을 뒤바꿨다.
달마는 남인도에 위치한 한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인도 선불교의 28대 조사였던 달마는 520년경 중국에 건너와 선종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독특한 불교이론과 좌선수행법으로 큰 명성을 얻었고 남조 황제 양무제와 만나 선문답을 하기도 했다.

527년경 북위로 온 달마는 숭산의 한 동굴에 들어가 9년간 면벽 참선수행을 했다.

달마는 면벽 수행 과정에서 맹수와 화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호신술을 익혀 나갔다.
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행하는 참선법과 호신술은

중국인 승려 도육(道育)과 혜가(慧可)에게 전해져 중국 선종과 소림무술로 꽃피게 됐다.




이를 통해 달마는 동아시아 선종의 교조로, 소림무술의 창시자로 전 세계의 추앙을 받게 됐다.

 달마가 면벽참선한 달마동은 불교도와 무술인의 영원한 성지로, 찾는 이가 끊이질 않고 있다.




소림사가 무술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초기부터다.

618년 왕세충의 난이 일어나자 담종을 비롯한 13명의 소림사 승려는 뛰어난 무술로 당시 왕자였던 이세민을 구해 난을 진압했다. 뒷날 당태종이 된 이세민은 소림사에 친필 비석과 많은 전답을 하사하고 승려에게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소림사 승려들이 곤을 들고 나와 반란군에 맞섰다.

명나라 때는 중국 동남지방에서 일본 왜구의 침입과 약탈이 잦자 소림사 무승들이 출동해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소림사 주지를 위시한 수많은 승려들이 승병을 조직, 일본군과 맞서는 등 호국 사찰로 명성을 얻었다.

이렇게 1500여 년간 중국과 함께 흥망을 함께 해온 소림사지만~

오늘날 소림사에 남아있는 역사적 유적이 그리 많지 않다.

긴 세월의 억겁을 견뎌오면서 4차례의 큰 화재로 옛 사찰은 모두 파괴됐다.





중국정부는 대웅전을 보수해 1979년 대외에 개방했다.

소림사는 사회주의 정권 수립 후 일반인에게 개방된 최초의 종교 시설이었다.

개방 첫해 입장객 수가 9만2000명에 불과했던 소림사에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한 것은 영화 <소림사>가 상영되면서부터다.

전 세계적으로 소림사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화의 영향으로 방문객은 1982년 7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소림사를 중심으로 한 숭산 일대의 역사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중국 최대의 관광지 중 하나로 발전하면서 소림사는 지역경제에 큰 공헌을 해왔다.
한 해 동안 소림사를 찾는 관광객 수는 수백만 명을 넘는다.

이를 보여주듯 소림사 경내 입구에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남긴

 '소림문화 인류유산(少林文化 人類遺産)'이라는 글귀의 비석이 세워져있다.





1997년 소림사는 중국에서는 최초로 영리법인을 설립, 공격적으로 비즈니스를 전개해왔다.

이러한 소림사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은 스융신(釋永信) 방장이 주도하고 있다.

스 방장은 1987년 22살의 나이로 소림사 30대 방장에 오른 MBA 출신 승려다.

 '소림사의 CEO'를 자처하는 그는 소림사의 상업화와 국제화의 체계를 완성했다.





그러나 2011년~~

"스융신(釋永信)은 해외에 30억 달러를 은닉해 놓았고 미국과 독일에 호화 별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과거 여러 유명 여배우와 성관계를 맺었고 심지어 베이징 대학의 한 여학생과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들 모자는 현재 독일에 있다."

 소림사 제자를 자처하는 한 네티즌이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에 남긴 글 하나로 떠들썩했다.


'해외 언론에서 확인된 뉴스'라는 이 글은 순식간에 중국 내 인터넷을 강타하며 그해에 2만3천2백건의 관련 뉴스를 쏟아냈다.

한순간 중국 네티즌들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화제의 인물이~

 중국 선종과 무술의 발원지인 소림사의 방장이기 때문이다.





스 방장은 평소 1억원이 넘는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고 첨단 IT 제품을 가지고 다닌다.

1년 중 적지 않은 시간을 중국 각지나 해외에서 보내고 오직 특급 호텔에서만 잔다.


한쪽에서는 '가사 입은 장사꾼'이라고 폄하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중국 문화 산업의 새 장을 열어젖힌 선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가사(袈裟) :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입는 승려의 법의(法衣).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배우 이연걸이 주연한 "소림사"는

이른바 소림 무술 신드롬을 일으키며 1982년에는 70만명이 숭산을 찾게 했다.


그는 이곳 무술학교 출신으로 전국대회에 나가서 1등을 차지했고~

그 이후로 유명배우가 될 수 있었다.





1978년 무술 대가인 류바오산과 공동 설립한 소림탑구무술학교는 덩펑 시 정부의 대표적인 문화사업체 중 하나이다.

소림탑구는 중국 정부가 최초로 인가한 무술학교다.

학비는 일반 학교보다 비싸지만, 지원생이 중국 각지에서 몰린다.


2011년 기준으로~

 "1970년대 말 10여 명의 학생이 모여 무술 수련을 하면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유아반부터 대학 과정까지 2만8천여 명의 학생이 다니는 거대 교육 그룹으로 발전했다"라고 말했다.

덩펑 시의 여러 무술학교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인 수련생도 수백 명에 달한다.





스 방장의 추문에 대해서 소림사는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이다"라며 공안 당국에 수사를 의뢰하고

첫 유포자에 대한 상금으로 5만 위안을 내걸었다.


중국 언론도~

 "소림사의 한 해 입장료 수입은 1억~2억 위안(약 1백80억~3백60억원)에 달하지만 그중 70%는 지방정부가 가져간다.

30억 달러에 달하는 비자금은 조성하기 힘든 금액이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대다수 네티즌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스 방장과 관련된 추문이 나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스 방장이 돈을 주고 매춘부와 성관계를 맺다가 공안에 단속되었다는 글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당시에도 소림사는 공안 당국에 발설자의 처벌을 요구했지만, 수사는 진척 없이 흐지부지되었다.





무엇보다 소림사가 거대한 문화사업체로 발돋움한 데 반해 운영과 자금 관리는 극히 폐쇄적이어서 의혹을 부풀리고 있다.

모든 권한이 스 방장을 위시한 몇몇 인사에게만 집중된 데다 수익 관리도 철저히 비공개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상식선을 넘어선 사업 확장은 불자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선승(禪僧)의 독경 소리는 사라지고 무승(武僧)의 기합 소리와 장사치의 상술만이 난무하는 소림사.

커져가는 대중의 의혹과 시기를 가라앉히고 중국을 대표하는 불교 사찰로서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12:22    과도한 상업화와 선종 불교의 고유한 정신을 망각한 소림사의 행태는 중국 내에서도 논란이 거세다.

이번 여행에서 달마의 꿈과 정신이 느껴지지 않는 점이 안타깝다.

다시 찾게 되려나...??


그런 자문자답과 함께 소림사를 등지고 탑림으로 향한다.





탑림(塔林)
수행과 깨달음의 삶을 살다 떠난 고승들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부도다. 





탑이 밀림처럼 서 있어 탑림이라 한다





소림사의 탐립은 조형설계나 벽돌조각공예 등이 당시 건축설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고탑예술박물관이라 불리며 중국고대건축발전사와 조각예술사 등 불교발전사의 실물자료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탑림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12:35    케이블카를 놔두고 걸어서 기복대로 이동한다.





나의 무모한 도전정신이요! 또 하나의 불찰이었다. 필히 케이블카를 이용하길~~





13:40    케이블카가 있는 쑹산 전망대인 치푸타이(祈福台,기복대)에 도착했는데,

 주변 풍경이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바위와 숲이 어우러져 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한 시간을 땀 뻘뻘 흘리며 쉬지 않고 올라왔는 데~

요놈은 7~8분이면 된단다.

잘못된 선택이란 걸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다.


쑹산 입구에는 2개의 케이블카가 있다.

하나는 이연걸이 영화촬영을 했던 쑹산 정상의 어쭈안(二祖庵,이조암)으로,

하나는 산 중턱 치푸타이(祈福台,기복대)로 향한다.





이윽고 삼황잔도에 몸을 옮긴다.


숭산(嵩山)은 서쪽 소실산(少室山)과 동쪽 태실산(太室山)으로 나뉜다.

모두 72개 산봉우리를 지니고 있으며, 최고봉 연천봉(連天峰·1,512m)은 소실산에 있다.

태실산 최고봉은 준극봉(峻極峰·1,491m)이다.

따라서 숭산 최고봉은 소실산 연천봉이다.

 









놀라운 것은 어쭈안(二祖庵,이조암)까지 이어진 '삼황잔도'이다.

돌산 중턱에 인공으로 만든 이 길은 아찔함 그 자체이다.

3천m에 이르는 삼황잔도는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조차 궁금할 정도였으니, 중국에 대한 경외감까지 느낄 수 있다.





염주를 파는 스님~

지나가는 길손은 아에 관심 밖이다.

소림사 스님과 마찬가지로 역시나 이 깊고 높은 산속에서도 스마트폰은 절대적 위치를 자랑한다.


아마도 스마트폰이 먼저 태어 났다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삼황잔도를 걸으며 바라본 주변 풍경은 생각지 못한 경험을 전해줬는데,

원래 여행이란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즐거움이 더해진다.

또한 기암절벽을 감상하다 우연히 마주친 하늘은 너무나 맑아 참으로 복스러운 여행이란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계속 걷다 보니 또 하나의 명물인 '연천조교'에 도착했다.

다리 길이 60m 정도. 

계곡 사이를 연결하는 일종의 구름다리로 골짜기의 깊이가 약 100m에 달한다.

다리를 건너는 내내 골짜기에서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아찔함을 전해준다.















지나온 연천조교가 아득하다





환상적인 잔도다.

어찌 저곳에 길을 낼 생각을 했단 말인가??





15:12    삼황채에 도착하고~~





숭산 중턱에 천황, 지황, 인황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삼황채가 있다.





삼황채의 수직절벽 위에서 보는 숭산은 깎아지른 절벽과 암봉의 장엄함으로 대단하다.  





삼황채선원





삼황채를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남천문이 나온다.

남천문 앞의 전망대에서 보는 숭산의 풍광은 장관이다.





계속하여 소실산 계곡을 굽어보면서 1시간 정도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주차장이 나온다.


계단 갯수가 만만치 않다.

시작 코스를 소림사부터 잡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주차장에서 숭산 암봉의 위용을 뒤돌아 보면서 트레킹을 종료한다.


이후 초작으로 3시간 이동하여 산양건국호텔에 여장을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