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오지 산골서 '러너의 성지'로… 장수 트레일레이스 5000명 몰렸다
능선 따라 굽이진 산 통과 '4개 코스'
4년 만에 참가자 150명→5000명
주민들 손수 만든 주먹밥 건네 응원
지역 상품 입소문, 매출 증대로 연결

하늘에서 내려다본 해발 1,237m의 장안산. 이곳에서 매년 4월과 9월 트레일레이스 대회가 열려 수천 명이 참가하고 있다. 장수군 제공
조용했던 오지 산골인 전북 장수군이 이제는 수천 명이 찾는 '러너의 성지'로 바뀌고 있다. 인구 2만 명, 면적의 75%가 산지인 이곳은 겹겹의 산 사이로 난 길은 곧게 이어지지 않는다. 능선을 따라 오르내리고 큰 산을 넘어야 다음 풍경이 펼쳐진다. 불편하기만 했던 산길이 매년 4월과 9월에 열리는 트레일레이스(산악마라톤) 대회를 계기로 산악 레저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2022년 참가자 150명으로 시작한 대회는 3년 만인 지난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5,000여 명이 참가하는 국내 대표 산악마라톤 대회로 성장했다. 3~5일 열린 대회에는 4,000여 명이 참가했으며 9월 열릴 대회를 감안하면 지난해 참가자 규모를 훌쩍 뛰어넘을 전망이다.
능선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장수 트레일레이스는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4개 코스로 구성된다. 구간마다 장수의 핵심 산림 자원과 명소를 만날 수 있다. 20㎞ 코스는 처음부터 평지가 아니다. 해발 900m 무룡고개에서 출발해 장안산(1,237m) 능선을 지난다. 시작부터 오르막이 이어져 몇 걸음만 옮겨도 숨이 차오르지만, 숲과 능선을 넘을 때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을 만끽하는 재미가 있다. 장안산은 금남호남정맥의 최고봉으로, 가을철에는 은빛 억새숲 군락이 장관을 이룬다. 발밑으로는 산이 겹겹이 내려앉는 장면이 펼쳐진다. 그나마 수월한 입문용 코스이지만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완만한 능선을 따라 설계됐다. 힘들지만 아름답고, 낯설지만 오래 기억되는 길, 장수 트레일레이스 코스는 그렇게 시작된다.
38㎞ 코스로 장수읍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논개활공장'도 경관이 탁월하다. 장수 읍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탁 트인 곳으로 가장 볼거리가 많은 구간으로 꼽힌다. 이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안에 자리 잡은 수분마을과 신덕산마을을 지나며 산골 마을의 고요한 분위기와 주민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 밭일을 하던 주민은 자연스럽게 참가자를 향해 손을 흔들기도 한다. 산간 오지 마을만의 고요함과 농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중장거리인 70㎞와 100㎞ 코스로 들어서면 산악 코스가 제대로 시작된다.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에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달라진다.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길로 들어서면 금세 새하얀 겨울이 찾아온 듯 풍경이 달라진다. 팔공산(1,151m) 구간은 거친 암릉과 울창한 숲이 번갈아 나타난다. 손을 짚고 올라야 하는 바위, 꺾이는 능선, 숲길이 이어지며 지나는 이에게 달리기와 등반을 겸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코스다. 막바지 지점인 방화동 계곡에 들어서면 물소리가 점점 또렷해진다. 전국 8대 종산 가운데 하나인 장안산이 품은 이곳에는 협곡 사이로 맑은 물길이 흐른다. 참가자가 신발을 벗고 물에 발을 담그거나, 한동안 말없이 자연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는 곳이다.
가장 긴 100마일(170.8㎞) 코스는 트레일레이스 국내 최장 거리로, 대회 참가자는 48시간 안에 완주해야 순위가 기록된다. 남덕유산(1,498m) 서봉에서 출발해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계곡과 마을을 끊임없이 지난다. 마라톤 풀코스처럼 기록 경쟁보다 완주 자체에 의미가 큰 코스다. 지난해에는 112명이 도전해 43명만 완주에 성공했다.
풍경과 함께 달리는 여정

장수 트레일레이스 대회 참가자가 코스를 돌고 있다. 장수군 제공
참가자들은 이 대회에서 단순한 경기 이상의 경험을 하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입을 모은다. 3년 연속 대회에 참가한 박이슬(31·서울)씨는 "처음에는 대회 스태프로 참여했는데, 피니시 라인(결승선)에 들어서며 감격해하는 참가자의 모습을 보고 직접 뛰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막상 달릴 때는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완주하고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유동현(30·서울)씨도 "로드레이스와 달리 장수 트레일레이스는 풍경이 다채로워 매력적"이라며 "다리에 전해지는 충격도 덜해, 16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희로애락을 느끼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고 했다. 또 다른 참가자는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결국 끝까지 가게 만드는 건 풍경과 사람"이라며 "경기라기보다는 하나의 여행에 가깝다"고 전했다.
온 마을이 함께하는 특별한 환대

출발 신호와 함께 장수 트레일레이스 대회 참가자가 일제히 달려 나가고 있다. 장수군 제공
이 대회가 자리 잡는 데에는 주민 참여도 큰 역할을 했다. 코스 중간중간에 있는 보급소에서는 주민이 손수 만든 주먹밥과 고로쇠 수액, 가래떡, 사과, 샤인머스캣, 토마토즙 등을 제공한다. 참가자에게는 '장수에서만 느낄 수 있는 환대'가 된다. 지역 학생도 자원봉사자로 대거 참여하면서 대회는 마을 전체가 함께 만드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지역 경제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많은 참가자가 대회가 끝난 뒤 바로 떠나지 않고 이틀 이상 머물며 장수를 둘러본다. 장수군은 참가비 일부를 지역상품권으로 돌려주며 체류를 유도하고 있다. 김상근 장수군 관광레저팀장은 "대회 기간 중 지역의 모든 숙박업소가 만실"이라며 "넘치는 숙박 수요를 수용하기 위해 군에서는 농업연수원, 체육관, 캠핑장까지 개방하며 방문객이 지역에 머물며 소비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수군에서 토마토 생산·가공업체를 운영하는 김판종(39) 대표는 "러너들이 보급소에서 지원한 저희 토마토즙을 맛본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샷과 후기를 올리면서 전국에 입소문이 퍼졌다"며 "오프라인 매장도 없고 홍보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트레일레이스가 안착에 성공하면서 매출이 두 배 이상 늘었다"고 밝혔다.
사계절 산악놀이 공간으로 재탄생

장수군 트레일레이스 코스. 그래픽=이지원 기자
장수군은 트레일레이스 대회를 계기로 다양한 산악 레저 명소로도 떠오르고 있다. 국내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야크와 함께 운영하는 '장수 K샤모니 마운틴 챌린지'는 덕유산 서봉, 봉화산, 장안산, 팔공산 등 14개 명산을 하나의 코스로 묶은 걷기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는 전용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각 산의 봉우리 등반을 인증하며 장수의 산악지형을 체험할 수 있다. 특히 장수군만의 긴 산줄기인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이 맞닿은 구조는 하루에 한 봉우리를 오르는 여느 산행과 달리 산악 지형 전체를 하나의 생활권처럼 체험할 수 있다. 코스를 완주하면 블랙야크는 아웃도어 커뮤니티 플랫폼 '블랙야크알파인클럽(BAC)'에서 쓸 수 있는 BAC 코인을, 장수군은 기념품을 제공한다.
이 밖에도 캠핑 페스티벌, 가족형 트레킹, MTB(산악자전거) 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사계절 산악 관광지로 자리 잡고 있다. 약 60㎞ 길이의 MTB 코스와 난이도별 코스 조성 사업도 진행 중이다.
장수군은 천혜의 자연 조건과 이 대회를 중심으로 콘텐츠를 키워 '한국의 샤모니'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샤모니는 프랑스 알프스의 산악 마을로, 2003년부터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UTMB)'을 매년 열어 지역 경제를 키우고 있다. 몽블랑을 한 바퀴 도는 170㎞ 코스로 출발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트레일레이스 대회로 자리 잡아 매년 1만여 명이 참가한다. 이정우 부군수는 "우리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과 명산을 활용해 산악 레저의 성지로 성장하기 위해 대회를 연다"며 "철저히 준비해 국내 최고의 트레일레이스 대회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장수 트레일레이스 100km 코스. 그래픽=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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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매년 가게 문 닫고 운동장으로… 장수 주민이 만드는 '진짜 환대'
40년째 치킨집 운영 김병용씨
"인구 줄어 외지인 방문 큰 힘"
"좋은 기억 품고 다시 찾았으면"

3일 김병용씨 가족이 전북 장수군 한누리전당 종합운동장에 마련된 장수 트레일레이스 대회 참가자를 위한 간식 부스에서 음식 준비 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병용씨 제공
전북 장수군 장수읍에서 40년째 치킨집을 운영하는 김병용(74)씨는 매년 봄·가을 트레일레이스가 열리면 가게 문을 닫고 대회 현장으로 향한다. 아내 김순자(71)씨, 딸 김지희(44)씨와 함께 한누리전당 종합운동장에 간식 부스를 차리고 운영하기 위해서다.
김씨 가족은 현장에서 치킨을 튀기고 떡볶이, 파전, 육전 등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참가자에게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김씨는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허기진 얼굴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피로가 싹 가신다"며 "그 순간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김씨 가족은 한 달 전부터 메뉴 구성과 재료 준비, 조리 동선까지 꼼꼼히 점검한다. 대회가 시작되면 수백 명의 주문이 몰리며 현장은 쉴 틈 없이 돌아간다. 주문이 이어지고 음식을 내놓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씨 가족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껏 음식을 내놓는다. "멀리서 일부러 장수를 찾아온 분들인데 대충할 수는 없잖아요. 수십,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분들이니, 갓 만든 따뜻한 음식을 내드리려고 합니다."
김씨가 간식 부스를 운영한 지도 올해로 4년째다. 그가 꾸준히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수익 때문이 아니다. 김씨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장수를 찾는 일이 흔치 않아서" 이 일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대회 기간이면 조용하던 지역도 활기를 띤다. 숙박시설과 음식점, 카페 등에 방문객이 몰리며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김씨는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외지인들이 찾아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된다"며 "장수에 대한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 가족은 앞으로도 매년 두 차례 열리는 대회 현장에 나올 계획이다. "장수에는 대단한 볼거리나 화려한 시설은 없어요. 하지만 자연만큼은 최고의 자랑거리입니다. 참가자들이 좋은 기억을 품고 장수를 다시 찾길 바랍니다."

3일 전북 장수군 한누리전당 종합운동장에 마련된 장수 트레일레이스 대회 참가자를 위한 간식 부스에서 김병용씨 가족이 음식 준비를 하고 있다. 김병용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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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동서트레일 성패 '얼마나 머물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2026 코리아 트레일 컨퍼런스]
산림 문화 자원 활용해야
편의·숙박시설 확충 시급
지역 주민 적극 참여 필요
고유 가치 담은 상품 개발

한국일보가 주최한 2026 코리아 트레일 컨퍼런스가 29일 서울 강남구 SETEC 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다. 박시몬 기자
29일 서울 SETEC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6 코리아 트레일 컨퍼런스'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트레일 조성의 성패가 ‘얼마나 잘 걷게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머물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입을 모았다.
첫 기조강연자로 나선 정철 한양대 국제관광대학원장은 ‘트레일 기반 지역관광 활성화와 체류형 관광 전략’을 주제로 동서트레일이 지닌 관광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정 원장은 “동서트레일과 같은 849㎞의 긴 숲길은 단순 통과형 관광으로는 경제적 파급력이 제한적”이라며 “걷는 과정 자체를 콘텐츠화하고, 지역에 머물며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체류형 관광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트레일 구간의 기존 관광지 안내센터 외에도 도보자들을 위한 편의시설과 장거리 이용객들을 위한 숙박시설 확보를 우선 과제로 꼽았다. 정 원장은 "한류 열풍으로 전국 명산마다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데 샤워실 등 편의시설을 갖춘 곳은 서울시 도심등산관광센터뿐"이라며 "장비를 정비하고 숲길을 걷고 난 뒤 씻을 수 있는 공간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완주에 45일쯤 걸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다양한 형태의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며 "동서트레일 역시 오랜 시간 완주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마을과 연계해 숙소를 확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두 번째 기조강연자로 단상에 오른 김성학 국립산림과학원 임업연구사는 ‘동서트레일을 연계한 산촌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보다 구체적인 지역 연계 전략을 제시했다. 김 연구사는 “태안의 안면송과 울진 대왕소나무와 같은 구간별 산림문화 자원을 기반으로 다채로운 테마를 설정하고 산촌의 고유한 가치를 담은 관광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며 "지역별 대표 임산물과 특산물을 활용해 숲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역 주민이 적극 참여해야 관광의 질을 높일 수 있고 산촌의 가치를 함께 누리고 지켜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성학 국립산림과학원 임업연구사가 29일 서울 강남구 SETEC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6 코리아 트레일 컨퍼런스'에 참석해 ‘숲길 플랫폼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지역 관광 농촌 건강을 잇는 전략’을 주제로 종합토론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은주 제주올레 대표, 정철 한양대 국제관광대학원장, 김 연구사, 강경국 행정안전부 균형발전제도과 사무관, 김명호 문화체육관광부 과장, 민욱조 씨에스피 대표.
이어진 토론에서도 동서트레일을 관광 자원화하기 위한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강경국 행정안전부 균형발전제도과 사무관은 "지방소멸대응기금을 활용하면 트레일 구간 기반시설 조성과 활성화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기금 활용 범위도 확대돼 보급시설과 복귀를 위한 이동 지원, 숙박 지원 등 다양한 정책에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명호 문화체육관광부 국민관광진흥과장은 "1박2일이나 2박3일의 상품화나 숙박과 음식을 하나로 묶은 트레일 패스 출시도 관광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전국 각지의 걷는 길이 하나의 플랫폼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정부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지역 자산을 활용한 사업 모델을 개발하는 기업 씨에스피의 민욱조 대표는 "트레일 구간 청년마을이나 마을기업, 관광두레, 문화공동체 등 다양한 거점들을 연결해 관광자원화의 기반을 닦아야 한다"며 "정부도 기초자치단체들을 연결하는 초광역권 프로젝트로 인식하고 보조금 중심의 단기 지원이 아닌 시장을 만드는 구조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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